그래도 희망입니다
-문규현 신부 글 홍성담 화백 그림, 현암사, 2008
요즘 희망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자연스레 눈길이 쏠리는데요. 그 만큼 희망이란 이 시대 절박하고 간절한 요구인 탓이지요. 그러던 중에 이제 무슨 동네 개점 행사처럼 되어버린 ‘삼보일배’의 기억을 더듬으며 ‘프레시안’에 소개된 글에 혹해 책을 구했습니다.
문규현 신부(그냥 신부님이라 부르지요),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은 기억도 아슴한 임수경씨 방북사건 때인데요. 당시 그 이의 방북을 두고 어느 이름있는 작가는 ‘철없는 아이의 불장난’이라 빈정대었습니다만 철든 어른으로서 그 철없는 아이가 혼자 감당해야했을 두려움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고자 같이 손목을 잡고 판문점을 내려온 이가 신부님이었지요. 이러한 신부님의 모습은 용기와 의식 또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예의와 저 밑바닥에서부터 함께 아프고자 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이었으리라 가늠해 봅니다.
‘삼보일배’ 또한 이러한 마음의 잇대기로 봐야겠지요. 삼보일배’라는 고행의 근본적인 출발은 스스로의 참회입니다. 이 땅의 생명있는 것들에 대하여 아스팔트 걸음걸음 온 몸으로 사죄하고 참회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할 만큼 우리의 게으르고 나약하고 무관심한 반생명의 죄가 크고 깊다는 뜻이지요.
혼자 생각으로 정한 ‘분단 이후 이 시대 최고의 이벤트 두 가지’에 다 신부님이 등장하네요. 그런 신부님의 말씀이니 읽어볼 밖에요. 새겨들을 밖에요.
글은 모두 25 꼭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안 방폐장 반대 투쟁의 가운데 틈틈이 지역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각 꼭지마다 관련하여 새겨들을만한 글귀가 덧붙여져 있으며 홍성담 화백이 그림을 보태었습니다. 처음에 그냥 감상을 적어보다가 이 글의 주된 관심사인 생명과 평화, 사랑과 희망, 자유와 용기, 화해와 용서 등 우리 시대 보편적 가치에 대하여 내 생각을 뜯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새날에 대한 희망을 신부님 곁에서 비춰보고 싶었습니다.
때론 원론적이거나 중복되기도 하고 너무도 평범하여 오히려 가닿기 힘든 구절도 없지 않지만 신부님 말씀 아닌가요.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곱씹어 보면서 감상을 정리하고 토를 달아 보았습니다. 각 꼭지마다 먼저 신부님의 글을 요약하고 거기에 내 생각이나 느낌을 엮어보는 식인데 꼭지 뒤에 글귀 중 인상깊은 것들에도 내 생각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신부님 글은 요약하면서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조금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글의 왜곡이나 훼손이 있다면 오롯이 나의 책임이지요)
1 바람이 넘어서지 못할 턱은 없습니다.
바람을 맞고 있으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바람에게 넘어서지 못할 턱,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바람을 타고 경계를 넘는 자유로운 정신을 닮고 싶습니다.
- 삶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어려움이나 장애를 겪게 되는데요. 따져보면 이들 대부분이 내 스스로 만들어내고 지어올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부님은 ‘바람을 타고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을 닮고 싶다’고 하시네요. 그렇게 스스로의 턱을 없애고 자유로운 바람이 되라 하시네요. ‘생명의 홀씨’를 머금은.
2. 모든 생명의 품에 태양이 있습니다
인간의 소비형태는 갈수록 탐욕스러워지고 이기적이 되면서 지구자원은 급속히 고갈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그나마 이런 자원의 혜택들을 누릴 기회도 감사할 기회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태양이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풍성하게 기운을 내리는 태양이 있습니다 태양의 축복 속에서 평등한 세상이며 모든 생명은 해바라기입니다.
- 태양 아래 생명 또는 온 목숨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계시네요. 이런 태양의 축복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자연의 혜택이나 조화를 마주하며 ‘생명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능력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레이첼 카슨의 글귀)’요.
3. 용기는 열망을 현실로 만드는 힘입니다.
용기는 늘 두려움과 함께 갑니다. 두려움을 떨구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그냥 한 걸음 들어서는 것이 용기입니다. 웅크리고 숨어버리면 영원한 두려움으로 남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습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 꼭 이루고자 하는 열망,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두려움이 마음의 징표라면 마음에 무게를 실어 나아가 보아야 합니다.
- 얼마 전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도록 북돋아준 말씀입니다.
4. 묵묵히 봄을 기다리는 씨앗의 품에 희망이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돈과 투기 바람이 농촌마저 잠식하고 때로 농사꾼의 영혼마저 가벼이 흥정합니다 허나 오늘도 농부들은 묵묵히 들판에 나섭니다
그렇게 신음하는 땅, 농부들은 스스로 그 땅 밑에 누운 ‘생명의 씨앗’입니다.
- 농부를 ‘생명의 씨앗’이라고 말하시네요 참 엄청난 말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소홀히 업수이 여기는가 되돌아보게 되네요. ‘생명’ ‘씨앗’ 없는 세상, 세상의 끝 아닌가요.
뒤에 어느 인디언 예언자의 글귀가 서늘하네요.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인간이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5. 이해와 수용은 노력이 만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통과 갈등, 그것은 다양한 에너지의 만남이요, 건강한 충돌입니다.
삶은 결국 나와 다른 마음을 만나고 겪고 조율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항상 서로를 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진통과 갈등은 우리의 희망과 꿈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르고 있네요. 나 아닌 다른 이와의 관계 또는 만남, 당연히 진통이 있고 갈등이 생기고 무엇으로도 맞닥뜨리게 되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일방적으로 설득되거나 상대를 굴복시킬 수는 없겠지요.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부딪치고 얽히고 아픈 속에서 가능하다 하시네요.
그런데 우리의 희망과 꿈을 갉아먹는 관계는 없겠나요. 사악하고 나쁜 기운을 흘리며 우리의 관계를 흐트러뜨리고 암덩이처럼 퍼져가는 내부자 또는 외부의 무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의 희망과 꿈은 진통과 갈등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겠지만 어쩌면 엄숙한 분노와 단호한 결단으로 커나가는 것은 아닐른지요. 내가 좋아하는 어느 행선 수행자의 글 속에 ‘사납고 나쁜 사람들을 피하기를. 그들은 영혼을 갉아먹으니.’라고 적혀 있네요.
신부님의 말씀을 포대기 삼아 그 안에서 좀 더 부대껴야 할 꺼리이겠지요.
*진리라고 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설명되어질 순 없다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다만 내편으로 끌어올 수 있을 뿐이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에서)
6. 보려하지 않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듭니다
회색빛으로 보이는 갯벌에도 강이 흐르고 길이 있습니다. 커다란 생명의 그릇입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없으면 생명은 더 이상 생명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자연이 만든 작품입니다
-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겉으로만 본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네요.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소리에 귀기울이라 하시네요.
마음을 열어 놓으라 하시네요.
생명의 뿌리이자 존재의 주재자(主宰者)인 자연에 머리 숙이라 하시네요.
*집착이 사람을 눈멀게 하여 사물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집착이 없다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 가난’에서)
= 집착하지 않는 마음, 누구나 원하지만 집착 또한 두려움이나 망설임처럼 마음의 징표가 아니겠나요. 같이 갈 밖에요. 둔하고 무겁겠지만 마음의 무게에 얹어서 등짐처럼 걸머지고, 한 번 씩 이를 벗어던진 비상의 희열 맛보기도 하면서 혹시 압니까. 구름 속처럼 마음밭을 사뿐사뿐 걸으며 찰나의 해탈 얻게 될지요. 그 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겠지요.
*나락 한 알 속에도 머리카락 한 올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
=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말씀하시는 장일순 선생의 되기와 크기를 엿볼 수 있는데요.
요즈음 거의 유행처럼 번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냥 보통사람이 가닿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닐테지요. 다만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낮추게 될 때 오히려 드넓은 우주가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우주와 작고 낮은 존재의 줄긋기, 어쩌면 통할 수 있지도 않겠나요.
7. 생명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시작점, 모태(母胎)입니다.
문명이라는 콤플렉스는 생명의 모태인 바다를 향해 독기를 내뿜습니다. 그 바다를 해치는 것은 결국 우리 존재의 근원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을 끊는 것입니다.
바다와 함께하는 것에서 평화가 출발합니다. 간절히 빌어봅니다 바다와 갯벌이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하기를.
- 평화란 뭘까요. 서로 나란히 어우러진다는 뜻일텐데 이는 옆자리의 존재를 환대하고 존중한다는 말이겠네요. 내 옆자리, 가족과 친구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신부님은 모든 생명의 모태이자 궁극적으로 이들이 만나는 곳을 바다라 하네요. 인간문명이 바다를 향해 내뿜는 독기는 결국 우리 존재의 근원을 해치는 것이고 지속적인 삶의 바탕을 끊는 것이라 하네요. 바다와 함께 하는 평화 속에 ‘우리 안에 화해와 치유의 마음이 더 크게 피어나기를’ 바라시네요.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물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화가 아니라 존경심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8. 아이는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미래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입니다.
현재를 사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일구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란 아이들이 살아갈 삶에 대한 바램이고 기도입니다.
- 아이들의 존재는 삶을 절망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요.
아이란 뭘까요. 아이가 어른의 거울이고 아이에게 희망을 잇대는 일 중요하겠지요
아이가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 또한 당연한 책무이겠는데 혹 아이라는 존재를 너무 과소평가하면서 유난을 떠는 건 아닐까요.
누구나 다 아이 때를 거쳐 어른이 됩니다 우리가 아이 때 어른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요구했나요.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체념할 건 체념하면서 또 나름대로 자기만의 세계를 갖추고 그만한 나이의 희망과 절망을, 욕망과 체념을, 선함과 못됨을 섞어가며 살아가는 독립적 존재 아니었을까요
그러니 아이들에 대한 시선을 내 옆에 있으면서 같이 평화를 도모하고 누리고 서로 아껴야할 뭇 존재들과 같이 두면서 그 앞자리 정도라면 되지 않겠나요. 굳이 비교하자면 봄날 산에 들에 파릇파릇한 새싹들, 이제 갓 태어난 새끼돼지, 땅 위에 땅 속에 약하고 여린 모든 생명들, 인간이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니 인간의 횡포와 약탈을 그치지 않으면 안되는 숱한 생명들의 앞자리 또는 옆자리.
아이를 향한 마음이 뭇 생명에 대한 마음으로 보편화되는 일, 또는 뭇생며의 앞자리에 우리 아이를 두는 일. 인간이 알고 접하는 세상에 인간의 거울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희망담긴 미래를 꿈꿀 권리가 없는 어린 생명이 어디 있겠나요.
그냥 아이는 그대로 아이지요. 어른은 어른의 자리에 아이는 아이의 자리에서 그렇게 서로 옆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살아내는 것이지요. 살아지는 것이지요.
* 어른과 어린이가 서로에 대해 착한 요정이 되는 것보다 아름다운 동화가 어디 있을까
(레이첼 카슨)
= 어떠세요. 그런 동화 한 번 써보고 싶지 않으세요.
9. 사랑과 용서는 상처를 보듬는 힘입니다
손톱 밑 작은 가시하나에도 욕설 한 마디에도 고통스러워 하는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감사할 일로 채우도록 애써야 합니다.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남아 있는 모든 존재를 보듬어 화해하는 마음의 예식에서 우리가 남긴 상처와 파괴와 무관심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겠나요. 어쩌면 삶이란 매일같이 상처받고 상처입히고 아물고 벌어지는 일의 연속이지요. 그러니 스스로부터 용서와 화해하는 일 꼭 필요하겠지요. 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 그게 사랑의 행위 아닐까요.
인류를 향한 큰 사랑의 모습도 보일 테고 키작은 풀, 볼품없는 돌멩이 하나에도 애정과 관심을 쏟는 일도 필요하겠지요. 그럼에도 삶 자체가 죄짓고 업을 쌓는 일이라면 나 아닌 모든 것에 내가 남긴 상처와 파괴와 무관심에 대해 죄를 빌고 용서를 구하는 일, 삶의 통과의례로서 맞이해야 할 죽음의 예식이며 죽음과도 화해하는 의식이 되겠지요.
*위로란 고통받는 이 곁에 우리가 함께 있음을 서로 돕고 있음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걸림돌’에서)
= 위로란 고결하고 관대한 행위의 하나일 것입니다
늘 함께 있지 못해도 고통을 대신할 순 없어도 너를 돕고 싶고, 너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해지는 행위나 모습, 참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이루어내는 큰 모습이 아닐까요.
화해나 용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위로, 화해, 용서. 이것들이 사랑의 구체적인 그림입니다.
10. 따뜻한 손길이 세상을 풍성하게 합니다
볍씨가 쌀이 되기까지 여든 여덟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한답니다. (쌀 미(米)자를 그렇게 풀어보기도 합니다) 나는 누구의 손길과 돌봄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누구에게 마음을 전하러 부지런히 나서는가. 그 사람에게 여든 여덟 번에 이르도록 과연 진심으로 보고 또 보고 나누고 또 나누는가. 튼실한 벼이삭을 기대하고 풍성한 추수의 기쁨을 누리려는 진정한 의지가 있는가
순간 순간 묻되 답은 길게 만들어갈 일입니다
- 사람이 여든 여덟 번의 손길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여든 여덟 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연’이라 했지요. ‘스스로 말미암는’, 이는 온전한 자연 모습 그대로일 때 넉넉히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요. 아마도 이러한 손길의 필요는 그 만큼 우리가 터붙이고 살아가는 자연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이르는 말은 아닐런지요.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고 자신의 관점과 욕심을 앞세운 결과겠지요 사람 탓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지지고 볶고 할퀴고 물어뜯고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삶 속에 다시 자연의 손길과 돌봄을 느끼는 일, 제자리를 애써 찾아가는 일, 튼실하고 넉넉한 관계를 회복하는 일, 신부님은 따스한 손을 내밀라고 하시네요.
진심으로 보고 또 보고 나누고 또 나누라 하시네요. 참으로 그러한 자세나 의지가 있는지 순간순간 물으며 오래도록 답을 만들어가라 하네요
제 앞에 맞닥뜨리는 순간순간 그때 그때 따스한 손길 내미는 일, 오래도록 가져갈 일이지요.
*삶의 위대함의 잣대는 ‘나눔’이다. (피에르 신부)
= ‘나눔과 베품’ ‘퍼줌’, 나누고 베풀고 퍼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이, 부자겠지요.
당신은 부잔가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깨어있는 마음이 곧 힘이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이다. (틱낫한)
= 깨어있는 마음이란 뭘까요.
세상은 위로가 필요하고 내 작은 정성이 위로가 되며 애써 정성을 모아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다, 는 걸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 이를 오래도록 애써 가져가는 일 아닐까요. 이를 위하여 존재에 대하여 나의 소중함과 당신의 소중함으로 소중한 관계를 잇대어 가는 일이 아닐까요.
11. 용기는 변화와 변혁을 만듭니다
용기는 소망을 현실로 만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무런 용기가 필요없는 듯한 순간일수록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상에서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많습니다. 용기의 문턱에 서면 망설임과 두려움이 다가오지만 막상 넘고 보면 생각보다 높은 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턱의 앞뒤에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 용기는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에 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가 변화와 변혁을 만듭니다
-용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순간 필요하다고 하네요. 삶이 중대하건 사소하건 선택의 연속이라 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지요. 그래서 늘상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 머뭇거리고 갈등하고 때로 애써 모른 체 하기도 하지요. 앞에서 말한대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 때 그 때 마음을 북돋우고 부추기는 일 필요하겠지요. 성급해지거나 조바심을 낼 일은 아니겠지요. 다만 내일 다시 두드려야 할 문이 있다는 것, 항상 일깨우면서 문이 열렸을 때 펼쳐질 새로운 마음세상을 떠올리면서.
어쩌면 용기는 중독이고 습관일 수 있겠네요.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 그 자체 이 외에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대 만난 뒤 삶에 눈떴네’에서)
= 모든 것을 버린다, 오히려 생명을 이들 위협으로부터 한 층 위에 두는 건 어떨른지요. 모든 것을 버려가며 지키는 것이기보다 뭐랄까 제 스스로 그 단계를 뛰어넘는 ‘저 높은 곳의 생명’ 말되나요.
12.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새살이 돋아나도록 응원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입니다. 내 안에 힘이 생기고 튼튼해져야 화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흔드는 바람은 우리 자신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아픔을 딛고 새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분명 우리 안에 있습니다
- 내 안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픔을 딛고 새로 일어서은 일이 자신의 몫이고 분명 우리 안에 그 힘을 갖고 있다고 하시네요. 그러면 어떻게 내 속의 힘을 일으켜 세우지요. 내 안의 힘에 대한 믿음과 용기 아닐까요. 이를 통하여 스스로를 북돋우며 스스로 위로받고 용서받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 서로에 대하여 화해하고 위로하고 용서하는 힘을 얻는 일 서로 다르지 않겠네요.
*무엇이든 내가 진정 표현하려는 것은 내 안에서 솟아나 내적 형태를 통해야 한다 (에카르트)
*내면적 자유란 마음의 평화를 얻는 존재 또는 그런 힘을 갖는 것이다. 체념을 거친 사람만이 세계를 긍정할 수 있다. (슈바이처)
13. 소중함은 사랑과 마음에서 나옵니다
생명의 무게는 사랑과 마음의 무게입니다. 이는 곧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존재 하나하나는 대체할 수없는 우주의 기운과 생명의 무게를 지닙니다.
- 온 천지 우주의 기운으로 생명과 존재 아닌 것 없으니 그 무게를 느껴보라 하시네요. 생명의 소중함, 존재의 소중함, 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소중함. 그게 사랑이고 마음이라 하시네요. 어디 마음먹어 보실래요. 큰 사랑, 큰 마음.
*대자연에는 사랑과 감사라는 진동 밖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자연은 사랑과 감사를 포함한 더 넓은 질서겠지요 그 속에서 사랑과 감사의 진동(또는 파장)을 느끼고 퍼뜨리는 일, 그렇게 좋은 관계를 넓혀가는 일,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겠지요.
14. 사랑과 연민이 담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기쁨보다 더 강하게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눈물입니다. 눈물이 흐르는 순간,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가장 진실해집니다.
어떤 눈물이건 사랑과 연민이 있는 눈물이어야 합니다. 그 눈물이 희망이고 힘이며 용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 테두리를 넘어 남을 위해 내일을 위해 흘릴 뜨거운 눈물 한 줄기 정도는 가슴 깊이 남겨둘 일입니다.
- 요즘 갈수록 눈물이 많아지는데요. 마음으로부터 흐르는 눈물, 그 자체로 귀하고 순결한 정화(淨化)이지요. 그 위에 사랑과 연민이 있는 뜨거운 눈물 흘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네요. 작고 여리고 가여운 존재를 위한. 물론 스스로부터 그렇게 여겨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연민과 동정은 거짓이기 쉽지요. 어쩌면 작고 여리고 가엾지 않은 목숨부치 어디 있겠나요.
15. 기도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절박함과 간절함이 배인 모든 것(바램)을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기도에 미움과 욕심, 파괴와 저주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나를 움직이는 것이며 희망을 잃지않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모든 긍정적 가능성 앞에 자신을 활짝 열어두는 것, 신뢰로 가득한 마음이 기도입니다
- 여태껏 살아오면서 기도같은 것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때로 절박하고 간절한 바램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기도란 더 큰 이의 힘을 비는 것이고 그 이에 대한 믿음의 표시라 여겼던 탓이겠네요
그런데 기도는 나를 움직이는 것이며 모든 열려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며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노라 하시네요.
기도란 어쩌면 그런 희망을 담은 촛불 하나인지도 모르겠네요. 작지만 소중한 결코 꺼질 수 없는, 믿음과 소망의 표시일지 모르겠네요. 절박하고 간절한
16. 사랑은 거룩한 화해를 낳습니다
새로 맞은 신부를 통해 자신과 화해한 신랑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이나 결혼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화해를 낳습니다 사랑과 결혼이 축복할 일이라면 바로 거룩한 화해를 동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온 생애 동안 몇 번쯤 치유와 화해를 위한 결정적 순간을 만나곤 합니다.
- 사랑이라, 사랑의 출발이 스스로부터임을 알겠네요. 사랑이 가장 큰 소통의 방식이라면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일, 스스로의 상처를 돌아보고 어루만지고 화해하는 일, 꼭 필요하겠지요.
남녀가 혼인하는 일, 가장 큰 인연을 맺는 일이고 보면 거룩한 화해 꼭 동반되어야겠지요. 때론 벽에 부딪혀 소통이 꽉 막히는 경우 없지 않겠는데요. 그 때 서로의 인연을 푸는 일, 어쩌면 벽을 돌아가는 지혜일 수도 있겠구요. 그러면서 또 다른 상처를 보듬고 자신과의 보다 큰 화해를 위한 받침돌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요.
그리 보면 ‘세상과의 불화’란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소통의 문제일 수도 있겠네요.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화이기보다 꽉 막힌 벽을 돌아가는 화해의 과정일 테지요. 그러한 화해의 큰 모습, 거룩한 화해의 그림이 ‘삼보일배’ 아니겠나요. 신부님이 온몸을 걸고 가르쳐주신 큰 사랑의 모습.
17. 자연없이 희망을 말할 순 없습니다
참된 벗은 나를 나 이상이게 합니다. 부모이기도 하며 큰 스승이기도 합니다. 함께 진리를 깨치고 수행하는 도반(道伴)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원천이며 참된 벗이자 마지막 귀의처입니다. 참된 벗은 또 다른 나입니다. 자연을 배제하고 희망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떠나서 생명을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자연을 참된 벗이라 하시네요. 누군가의 글에 참된 벗은 큰 스승이어야 하며 참된 스승은 좋은 벗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연은 좋은 벗이자 큰 스승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 아닐까요. 가르치지 않으면서 가르치고, 멀찌감치 있는 듯 하면서도 원할 때는 둘도 없는 벗이 되고 넉넉하고 푸근한 품으로 언제라도 돌아올 자리를 챙겨두는 어머니같은 존재.
그러니 자연을 떠난다는 일은 나의 원천인 어머니를 부정하는 일이겠지요.
어쩌면 언제부턴가 어머니를 잃고 방탕하고 황폐한 저자거리에서 헤매고 다니는 탕아의 모습은 아닐른지요. 그러니 어머니 자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때 어서 돌아가야지요. 비록 몹시 앓고 있지만 돌아갈 어머니의 품이 있다는 일, 그게 희망이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닌지요.
18. 책임이란 해야할 일을 하고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이 없다면 책임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책임도 따라야 합니다. 강요를 받아 피치 못해 하는 것은 책임이 아닙니다
책임은 자발적 선택이고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인격과 품위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책임입니다. 책임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꿈이 영글고 희망이 현실로 변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풍요롭고 행복해짐을 즐기는 것입니다.
- 책임과 희망,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차피 책임이란 떠맡은 일이거나 도맡아 해야하는 일이라면 원하건 그렇지 않건 피치 못할 일 아닌가요
신부님은 피치 못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하시네요. 마땅히 가야할 길이라 하시네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항상 이길 수는 없겠지요.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인격과 품위라고 말씀하시네요. 희망과 꿈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마땅히 나서는 일, 어쩌면 희생과 봉사가 책임의 내용일 수 있겠네요.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표현하는 일, 거기에서 보람과 만족을 구하는 일, 기꺼움과 즐거움으로 행할 밖에요.
19. 어머니의 품 안에서 희망이 피어납니다.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저는 수많은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억압과 죽음 아래서 그 어머니들이 자식들의 생존과 생명과 소중함, 인간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이기심이 아닌 공존으로, 지배가 아닌 돌봄으로 분열이 아닌 화해로 거짓이 아닌 진실함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합니다
- 부조리하고 병든 사회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은 자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희생이나 피해도 더할 수 밖에 없겠지요. 이를 자식과 함께 온 몸으로 오롯이 받아내는 이가 어머니시죠. 그리고 그 곳이 바로 어머니의 치열한 삶터가 되기도 하구요.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겠나요. 자식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성, 또는 맹목성. 신부님은 돌봄과 화해와 공생과 진실됨이 맹목성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닐른지요. 때론 그악스런 이기의 몸부림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 맹목성이 세상을 치유하는 가장 큰 사랑의 그림이라는 뜻이겠지요. 누군가 이를 위대한 불성(佛性)이라고 치켜세우듯이.
20. 진실을 믿고 가는 여정이 곧 선물입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꿈꾼다 하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아 낙담하고 주저앉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실에 대한 의구심과 회의가 결국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저 뒤로 지체시킵니다.
진실을 믿고 희망의 끝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내딪다 보면 마침내 좋은 날을 선물받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가는 여정 자체가 좋은 날이자 선물입니다.
선물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선택과 기도, 실천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작품입니다. 절망과 막막함에 짓눌리지 않고 희망과 끊임없이 대화할 때 이루어지는 결실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향한 시선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야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그 마음이 돌에도 꽃을 피웁니다.
-‘살아야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그렇지요.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사회란 낙관도 비관도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를 꼭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가는 거죠.
진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향한 시선, 그렇게 나서는 길 자체가 좋은 날이고 선물이라 하시네요. ‘제 마음 속 돌에 꽃을 피우는 일’ 최고의 선물이자 축복 아니겠나요.
어떠세요, 같이 길떠나 보실래요.
*‘희망을 버리다니,어리석은 일이야, 뿐만 아니라 그건 죄라고 생각해. 죄에 대해선 생각하지마. 생각할 게 너무 많잖아’ (‘노인과 바다’에서)
21. 함께라면 더 큰 세상이 보입니다
혼자 보는 세상보다 마주보는 세상보다 함께 바라보는 세상이라면 더 큰 풍경, 더 큰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이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내 삶 속에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여야 함께가 완성됩니다. 아무리 고된 길을 가더라도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자 분투하는 벗과 함께라면 힘이 납니다 서로의 삶과 기억에 기쁘게 자리할 수 있는, 함께는 아름답습니다.
- 함께 한다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이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며 내 삶 속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여야 완성된다고 하시네요.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넘치는 세상이 따로 있을라구요. 그렇게 제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기꺼이 벗들을 맞아들여 함께 나아가는 세상, 서로의 삶 속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며 기쁘게 함께 하는 모습, 큰 아름다움이라 말씀하시네요.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내가 쓰고 있는 작은 물건이라도 혹시나 남의 몫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권정생 할아버지)
22.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비춥니다
간혹 가망없는 길 위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주저앉고 싶어도 희망을 잃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비춥니다
이들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 옆사람이 내미는 손을 꼬옥 붙잡는 것이 함께 사는 길입니다.
- 신부님도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시는 모습이 쉽지 않아 보이지요.
세계는, 만물은 관계의 망으로 짜여져 있다 합니다 그 속에 한 개인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겠는지요. 그런데 이 관계는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시작도 끝도 없는 광대무변의 조화 속에 그래도 그 관계의 실마리는 개인으로부터 스스로에게서부터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때 나 개인은 관계 또는 세상의 중심일 수 있지 않겠나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희망을 비추라 하시네요. 그러한 관계가 어우러져 꼬옥 붙잡은 손이 꽃보다 아름답다 이르시네요. 요즘 거의 매일 거리마다 마치 커다란 꽃사태를 보는 듯한 촛불의 어우러진 모습, 다름 아니겠지요.
*발전이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가비오따스’에서)
*이같은 분노와 그 분노가 일으키는 자발적 행동이 없다면
사회적 평화를 위한 어떠한 희망이 남아 있겠는가 (피에르 신부)
23. 자신만의 가치가 자라나야 사회도 자라납니다
농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모내기 하던 날, 동네 젊은 농부들이 꽤 몰려왔습니다.
세상 많은 젊은이가 물질지상주의의 수레바퀴에 올라탄 채 허덕입니다. 그들 자신의 꿈이 아닌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희망에 강요당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현실에서 만난 젊은 농부들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젊은이들의 꿈과 가치가 귀하게 대접받는 사회로 성장해가야 할 것입니다. 젊은 스승들 속에서 사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든든한 의지가 됩니다.
- 제대로 된 젊은이들의 모습, 든든할 밖에요. 거기다 땅에 터붙이고 농적 가치를 실현하며 같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그 속에 같이 사는 기분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그렇게 땅을 딛고 제발로 선 가치가 자라나면서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될거라 하시네요.
부디 그런 성숙한 모습 보게 되기를.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순수한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 그 삶 속에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내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을 잃지 않을 때 이것이 바로 청춘인 것이다. (‘낮추고 사는 즐거움’에서)
*젏은이들이 올바른 인식과 힘을 갖게 되면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정말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절감하게 되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희망의 이유’에서)
24. 사랑 가득한 삶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동력입니다
사랑, 이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온 생애를 통해 만나고, 확인하고, 느끼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사랑의 손길이 존재를 존재이게 하고 생명을 생명이게 합니다. 평범한 우리들의 사랑 가득한 삶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동력입니다.
존재와 존재,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고 진심으로 존중하는 것, 사랑을 키우고 사랑을 부르는 힘, 사랑합니다.
- 사랑으로 가슴설렌 기억이 언제인지요. 사랑 가득한 삶을 살아본 적이 있기는 한지요
그럼에도 살아가는 동안 끝내 놓칠 수 없는 그것으로 중심을 삼을 밖에 없는 말, ‘사랑’이지요.
존재다운 존재, 생명다운 생명을 느끼고 만나고 확인하는 일, 온 생애를 다하여야지요. 사랑을 키우고 사랑하는 힘, 사랑하라고 하시네요. 사랑하여야지요.
*희망이란 우리 안에서 빈지리로 호소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채워줄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사랑을 베풀려고 애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피에르 신부)
25. 손잡고 걷는 길이 바로 희망입니다
희망을 성취하는 길은 느리게 걷는 길입니다. 길고 긴 여정입니다. 생명이 제 몸으로 다른 생명에게 길을 만들어 주고 함께 가는 여정입니다. 정성으로 길을 내고 다지며 가야 합니다. 그 길을 벗들의 손을 놓지 않고 용기와 신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희망이 있습니다. 길을 가는 우리 자신이 희망입니다
-그래도 희망입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네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전태일 평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