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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 편집부 저 | 문학세계사 | 2008-01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시 뜨겁게 품었던 시정詩情을 어디에 풀어놓고 살아갈까?’ 책의 앞표지에 세로로 쪼로록 소개된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꽤 오래 전의 책이니까. 나는 애써 한 마디 툭 내뱉고는 이내 책장을 넘긴다. 책에도 지문이 있다면 아마도 이 시집은 지문이 모두 닳아지고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나의 손을 많이 탔던 책이다. 먹고 또 먹어도 물리지 않는 김치나 밥처럼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시인들의 이름이나 얼굴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마치 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것처럼 편안하기까지 하다.
이 책에는 <하모니카 부는 오빠>(문정, 문화일보), <너와집>(박미산, 세계일보), <창고大개방>(방수진, 중앙일보),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하다>(유희경, 조선일보), <가벼운 산>(이선애, 서울신문),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이은규, 동아일보), <파문>(이장근, 매일신문), <페루>(이제니, 경향신문), <차창 밖, 풍경의 빈 곳>(정은기, 한국일보), <예의>(조연미, 부산일보) 등 여덟 편의 ‘당선시’와 , <염전에서>(김남규, 조선일보), <까마귀가 나는 밀밭>(임채성, 서울신문), <활>(정상혁, 중앙일보) 등 세 편의 ‘당선시조’가 수록되었다. 이외에도 당선자들의 신작시를 각각 다섯 편씩 실었으며, 당선소감과 심사평까지 실려서 아주 풍성한 독서를 할 수 있다.
오늘은 ‘당선작’ 대신 ‘신작시’ 한 편을 감상해보기로 하겠다. 요즘 한창 김장철이니까, ‘서울신문’에 당선된 이선애의 신작시 중에서 “김장하는 날”이라는 작품을 골라본다. 우리가 평소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마음에 그림처럼 그려 놓은 ‘김장’이라는 풍경을 시인은 어떻게 묘사해 놓았는지 가만가만 따라가 보기로 하자. 시적 화자와 공간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감상한다면 이 작품에 깊이 내재해 있는 시적구조에 대한 숨은 비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어머니는 전사다. 전화戰火가 휩쓸고 간 우물가, 바람에 나뒹굴고 있는, 무수한 잔해들을 본다. 텅 빈 소쿠리에 담겨 있는, 붉은 고무장갑, 널브러져 말라붙고 있는, 피 묻은 살점들……. 화생방전이 아니라 전면전이 벌어졌나 보다. 잠시 휴전이 선포된 걸까. 어머니의 매운 손끝, 축 늘어져 있는,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이는, 패잔병들의 상처를, 붉은 약으로 싸매고 있다. 구설口舌의 화살촉에 맞은 내 가슴의 상처도 보았는지, 어머니는 깨고 물 묻힌 거즈로, 눈치껏 동여매어주고 있다. 전쟁戰爭은 잔인하다. 끝내 어머니도 깊은 내상을 입은 채, 마루 위에 쓰러져 눕는다. 쓰러져 누운 채, 필승을 잠꼬대한다 간꽃 핀 전투복 사이, 찬바람이 보초를 서고 있다.
나도 이제는 전쟁을 즐긴다. 아파트 베란다가 오늘은 온통 불바다다.
―이선애, 「김장하는 날」(전문), 본문 73쪽.
-2016. 11. 16. ⓒ 심은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