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음악은 사회적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 내용보기
몇년 전 연습곡에 대해 물어온 사람이 있었다.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나는 그가 쇼팽의 연습곡을 염두에 두고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op 10의 열두 곡과 op 25의 열두 곡으로 이루어진 쇼팽의 연습곡은 쇼팽이 피아노 연주자들을 위해 만든 곡이다. 나는 질문자에게 쇼팽의 연습곡은 작곡가가 피아니스트들을 위해 연습용으로 만든 곡이지만 지금은 감상용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라
"음악은 사회적이다" 내용보기

몇년 전 연습곡에 대해 물어온 사람이 있었다.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나는 그가 쇼팽의 연습곡을 염두에 두고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op 10의 열두 곡과 op 25의 열두 곡으로 이루어진 쇼팽의 연습곡은 쇼팽이 피아노 연주자들을 위해 만든 곡이다. 나는 질문자에게 쇼팽의 연습곡은 작곡가가 피아니스트들을 위해 연습용으로 만든 곡이지만 지금은 감상용으로 쓰이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했다. 내 말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도 그 곡으로 피아노 실력을 연마하는 연습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탈리아의 명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장엄함과 장대한 스케일, 압도적인 눈부심과 여유를 통해 바로 그 쇼팽의 연습곡을 연주해냄으로써 쇼팽이 가졌던 음악적 의도를 완벽하게 없애버렸다는 말을 했다. 쇼팽의 의도란 어떤 피아니스트에게라도 각각 가능한 만큼 기교에 몰두하거나 기교 문제를 숙고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마우리치오 폴리니 홀로 쇼팽의 의도를 없애 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화려하고 기교적인 연주 앞에서 감상자가 주눅드는 것이 현대의 흐름이라 해야 옳다면 폴리니 뿐 아니라 다수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쇼팽의 의도를 없애버리는 데 일조(?)한 셈이라 해야 한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매력적인 만큼 논의의 여지가 많은 책이다. 사이드는 고독과 기억, 긍정이라는 음악의 대안적 성격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음악사회학자인 아도르노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났다는 선언을 했다. 아도르노는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이데올로기적 강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했는데 사이드는 모든 음악이 놀랍도록 활기찬 소나타 형식을 따르지 않듯 모든 음악이 무엇인가를 지배하거나 제왕적 권위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아도르노와의 분리를 분명히 했다.

사이드는 피아노 연주 실력도 뛰어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스스로 너무 이성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음악 대신 영문학을 선택한 이력을 지닌 학자이다. 특히 우리에게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최근 1세기 동안 음악이 사회와 무관한 자율적 존재라는 견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그리고 음악을 분석하는 데 요구되는 전문 지식이 너무도 크게 분리되고 엄격해진 결과 온전히 자기충족적이라고 추정되거나 인정되는 음악학 연구가 생겨났다는 말을 했다. (17 페이지)

 

그런데 사이드는 글렌 굴드의 연주가 교육적인 연습곡에 지나지 않았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일련의 무드 음악으로 변화시켰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하는 사이드의 어조는 폴리니의 쇼팽 연습곡 연주에 대해 말하던 때와 달랐다. 두 피아니스트가 연습곡 또는 연습곡에 지나지 않았던 곡을 다르게 변모시킨 것에 어떤 질적인 차별성이 있는 것일까? <음악은 사회적이다>의 원제목은 이다.

저자가 음악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 것은 프롤로그에서인데 거기서 그는 음악은 다양한 외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작용하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말을 했고 제임스 조이스나 스테판 말라르메처럼 지극히 난해하고 사회로부터 단절된 작품을 쓴 작가들도 이데올로기 분석이나 정신분석의 대상이 된 시대에 음악만을 그런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말을 했다. (옮긴이 가운데 한 분인 최유준씨는 “얼마간 유행하다 사라지는 단순한 노랫가락조차 미디어에 실려 우리 귀에 들려오기까지 엄청나게 복잡한 사회적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두 명의 공동 번역자 가운데 한분인 박홍규교수는 Elaborations가 공들여 만듦, 정성들임 등의 뜻을 지녔지만 반드시 긍정적인 뉘앙스만을 지닌 것은 아니어서 동사형인 elaborate의 유사어인 laborate에 ‘과도하거나 무리하게 애쓴‘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말을 했다. 1부 극단적인 사건으로서의 연주에서 연주자들의 무리한 사례, 과도한 일화들로 소개된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는 경우는 글렌 굴드이다. 기행과 괴벽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굴드는 자신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탄생한 인간이며 무(無)에서 피아노 연주를 재창조하고 재구축했다는 환상을 가졌다고 한다.

음악의 사회적 성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바그너(와 나치즘의 일치)와 유태인의 관계 및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경우이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트징어’에서 바그너는 온음계와 반음계를 적절하고도 교묘하게 썼는데 이는 그가 음악이 세속의 상황에 너무도 쉽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안 결과라는 것이다.

 

사이드의 논의 중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바흐에 대해 지적한 부분이다. 그는 바흐의 합창곡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권력과 숭배의 의례를 꼽았다. 예컨대 바흐의 B 단조 미사는 종교적인 경건함과 화려한 형태로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작센 선제후에 대한 찬양 행위와 군주의 측근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려던 바흐의 야심으로부터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129 페이지) 사이드는 바흐의 예를 들며 음악이 사회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사이드는 음악이 비정치적이고 비사회적인 자율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바흐의 음악을 사회적 차원으로 보는 연구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서 Musicial Elaborations에 대해 말하며 elaborate의 유사어인 laborate에 ‘과도하거나 무리하게 애쓴‘이라는 뜻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 바흐 합창곡의 경우 laborate의 경우에 전형적으로 들어맞다고 해야겠다. (사이드가 우리 나라에 최근 번역, 출간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서른 여섯에 타계한 모차르트의 말년의 양식에 대해 다루었다는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온다. 그가 모차르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참 궁금하다.) 궁금한 것은 선제후에 대한 바흐의 태도와 지향점이 어떻게 알려졌는가, 이다. 그의 메모나 기록에서 그것이 밝혀진 것인지 순전히 음악만을 보고 사이드가 바흐의 그런 점을 캐치해낸 것인지 궁금하다.

 

사이드는 음악은 사회적 풍경 속에서 위치하는 방식을 통해 작곡 양식이나 음악 형식을 다향하게 변화시킨다 해도 독자적이며, 음악가들이 독자적인 하위 집단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지식인 계급에 속한다는 말을 한다.(137 페이지) <음악은 사회적이다>에서 가장 낭만적이며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은 “브람스의 작품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것을 연주하는 것은 베토벤이나 슈만에 대해 지금까지 이해해온 것을 불러내 기억하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발라드나 변주곡이나 론도나 랩소디 또는 그 밖의 음악 형식들에 대한 경험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브람스를 브람스로, 베토벤을 베토벤으로, 엘리엇 카터를 엘리엇 카터 등으로 유지하게 하는 형태나 정체성 같은 것이 필요한데 그 형태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고립적”이라는 말이다.(174 페이지)

 

음악의 사회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 가운데 하나는 “베토벤이 푸가와 변주곡 형식에 매료된 것은 소나타 형식의 위압적인 성격에서 비껴선 채 음악을 한 꺼풀씩 벗겨내고 세련화하고 성찰적으로 전개하”려는 의도에 따른 결과라는 말이다.(188 페이지) 이와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사이드는 음악은 단지 진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무한하게 가능한 변주라는 말을 한다. (189 페이지) 마지막으로 사이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예로 든다.

그의 음악을 근원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된 음악이라 말하는 사이드는 자신이 슈트라우스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슈트라우스 음악의 “즐거움과 발견의 전제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맡겨두는 태도이고, 중심화된 권위주의적 정체성을 주장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며 ”그것은 연주 시간을 초월해, 곧 연주라는 사건에 의해 제공되는 극단적으로 집중화된 지속적 시간을 초월해 청중과 연주자의 공동체를 점차 확대하고자 하는 태도“라 말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사이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다루었다. 모차르트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는 음악의 사회적 성격을 주된 이슈로 삼아 논의를 전개한 사이드가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옮긴이 중 한분인 박홍규교수는 사이드와 아도르노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서양중심주의와 클래식 음악에 젖어 있으며, 비관주의적이라 했다. 아도르노는 재즈를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양 음악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드는 아도르노와 정반대였다. 사이드는 음악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강조했다.(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도르노는 비관주의적이었던 반면 사이드는 낙관주의적이었다. 아도르노가 그랬듯 사이드 역시 바그너 음악의 파시즘적 성격에 비판을 가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그너가 갖는 反자본주의적 성격에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사이드가 보인 논의는 부정과 긍정, 비판과 창조의 끝없는 대위법, 변주법, 변증법인 셈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한번 읽고 그칠 책이 아니라 다시 읽고 또 읽어야 할 책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교훈적인 만큼 감동적이기도 한 책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논의한 부분이 특히 그랬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옆에 두고 틈나는대로 펴보기 위해서는 사 두어야 할 책이다.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315423

 

m******1 2011.09.25.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