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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치세와 외교정책에 대해서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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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에서 아직까지 그 평가가 극으로 갈린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대 임금인 광해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재위 15년 만에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에 처해졌고, 연산군과 더불어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에 사용했던 광해군이라는 호칭으로 기억되고 있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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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에서 아직까지 그 평가가 극으로 갈린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15대 임금인 광해군이라고 할 수 있다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재위 15년 만에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에 처해졌고연산군과 더불어 ()’()’으로 끝나는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에 사용했던 광해군이라는 호칭으로 기억되고 있다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옳은 것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쿠데타에 다름이 아니라고 하겠다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것을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라 칭하며그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그렇다면 이복동생인 세자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나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 영월로 유배를 보내고 등극한 세조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내세운 것은 그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광해군의 정치적 행위를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권력의 속성으로 보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아울러 쿠데타 세력들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대해 우호적이었기에광해군에게 배은망덕이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로부터 이미 망한 명나라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른바 친명배청의 북벌론이 판을 치게 된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면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공격해야한다는 명분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주장한 이들은 말만 떠들었지국력을 키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 결과는 청나라의 침략을 초래하여 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남한산성에 갇혔다가한강 가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적인 절차를 밟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고자 했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재평가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광해군이 당대의 국제 정세를 적절히 파악하여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다는 점이 재평가의 초점이라고 하겠다우리 근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실상 쿠데타의 명분은 그 주도 세력들에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질 뿐이다임진왜란의 현장을 누비며 국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세자 시절의 광해군의 업적을 무사히고뒤늦게 새장가를 들어 왕자(영창대군)을 낳아 그에게 세자 자리를 넘기려고 했던 선조도 그 원조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병이 깊어진 선조는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으로서 광해군을 옹립한 북인 세력들에게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더욱이 장자임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친형 임해군은 광해군을 비방하였고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들 역시 틈만 나면 왕권에 도전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한다특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의 배후에는 인목대비와 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버티고 있었다서양갑을 비롯한 서자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옥사가 일어나자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고 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 역시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자식과 아비를 한꺼번에 잃은 인목대비는 사사건건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었고결국 서궁에 유폐되는 신세에 처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왈실의 어른'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승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만약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내쫓기지 않았다면이러한 일들은 태종이나 세조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 권력 투쟁을 위한 에피소드의 하나로 취급되었을 것이다그렇기에 쿠데타의 명분이 상황에 꿰어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청나라의 침입에 맞서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했지만당시 파견되었던 강홍립은 싸우는 체하다 청나라에 투항하였다이후에도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청나라의 동정을 계속해서 보고했고이에 따라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명분론에 사로잡혔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것을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으로 칭하며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쿠데타로 이해 인조가 즉위하면서 청나라의 침략으로 정묘호란(1636)이 발생하였고당시의 국제 정세에서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 정책이 적절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이 책에서는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고독한 중립 외교로 칭했고나아가 명분론에 휩쌓인 조정 대신들 틈에서 고군분투했던 광해군의 처지를 모래 위의 성에 비유하고 있다그 결과 광해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일부 대신들의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무능한 인조가 즉위(1623)하였다쿠데타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몇 차례 유베지를 옮긴 후에귀양살이 19년 만인 1641년에 제주도에서 생을 마쳤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i*****n 2023.08.18. 신고 공감 1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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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적인 외교노선은 빛, 과도한 옥사는 그림자-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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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이병헌씨가 주연한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력을 선보였다. 주인공인 광해를 친숙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한때 폭군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던 광해군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는 이미지가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한때는 계모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한 패륜적인 왕으로 기억되던 시절도 있었는데,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긍정적인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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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이병헌씨가 주연한 영화 '광해,왕이 된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력을 선보였다. 주인공인 광해를 친숙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한때 폭군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던 광해군이 이제는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는 이미지가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한때는 계모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한 패륜적인 왕으로 기억되던 시절도 있었는데,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된 것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해답은 자주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한 것이 부각되면서가 아닐까한다.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유연있게 대처한 것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떠받들면서 소중화주의에 젖어있던 당시 조정 분위기로서 광해군의 노선은 파격적인 행보였다고 평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백성들의 안위와 목숨을 지켜주지 못했던 사대부들의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동을 떠올려 보면, 외국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국 병사의 파병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렇게 둔감했던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명과 후금 그 어느쪽에도 기울지 않은 등거리외교, 실용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광해군은 조선이 명과 후에 청이 되는 후금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끝내 반정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외교에서는 치적을 보였지만 내치에서 실패한 것이다.

박시백은 보위에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 불안한 세자 시절을 보낸 광해군이 그 불안감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세자시절의 불안감이 트라우마로 남아 군주가 된 뒤에도 광해군을 괴롭혔던 것일까?

 

세자시절 광해군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이 선전을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자, 부왕인 선조는 자신의 후대에 든든한 왕재목이 나온 것을 환영하는 임금이 아니었다.

전쟁때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처신으로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졌던 선조로서는 여러 차례 양위 소동을 벌였다. 유난히 권력에 집착한 군주였던 선조는  선위소동을 일으키며 군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다시 다지는 돌파구로 만드는 동시에 세자 광해의 마음을 떠보는 술수기도 했다.

선조에게는 정치적 묘수였지만 당하는 광해군으로서는 벼랑끝에 몰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혹여 보위에 욕심낸다는 의심을 사지 않도록 납작 엎드려 지내야했다. 

 

계비 인목대비가 낳은 적자 영창대군 또한  광해군의 지위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존재였다. 영창대군을 향한 선조의 사랑은 신하들이 선조의 복심을 살피면서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고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폐세자가 돼, 어린 이복동생에게 왕자리를 물려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훗날 광해군이 과도하게 옥사를 일으키고 역모소리만 나오면 과민해져서, 잔인할 정도로 혹독하게 처벌하게 됐다는 것이다.

 

광해군의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보면 중화주의나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통치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일말의 기대가 아쉬움이 돼버렸다. 광해군대에  전후 새로운 질서를 창출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텐데.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지 못했기에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전전의 지배층들이 다시 지배층으로 복귀한 것은 물론이고, 신분제의 폐해를 보완하거나 생산력 증진면에서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로 넘어갈 사회의 틀을 전혀 다지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출판이나 오현의 종묘배향, 궁중의 복건 등 백성의 생활과는 밀접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방향으로, 전후 더더욱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펴게 할 생각보다는 땅에 떨어진 지배층의 위신과 권위를 세우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동법 실시는 광해군의 치적으로 꼽을 수 있다. 공납을 쌀로 바치는 대동법은 비록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지는 못하고 경기도에서만 제한적으로 시행됐지만, 훗날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동법 실시로 백성들은 방납의 폐단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대된 이후에는 상업발달을 촉진하는 등 조선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동법 정책 하나로 백성들의 짐이 덜어진 것을 보면 민생을 개선하는데 관료들의 의지와 능력이 얼마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 대동법이 실시도 계속된 궁궐의 중건 공사로 인해 빛이 바래고 한다. 백성들은 전쟁으로 인한 피폐함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왕은 그런 백성들의 고단함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계속 궁궐의 중건공사에 매진했고, 재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공사는 결국 백성들에게 그 짐이 전가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민심이 갈수록 광해군에게 멀어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재위 말기에 이르르면 광해군은 여러 차례의 옥사와 대공사, 그리고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서궁유폐까지, 명분에서도 통치에서도 실정하고 있었다.결국 광해군은 폐모한 것이 결정적인 빌미가 돼, 보위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중종반정과 비교하자면 인조반정은  명분면에서나 시기면에서나 적절했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임진왜란때 분조를 수행한 능력을 보거나 명과 청 사이에 추구한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보면 광해군은 군주로서 자질이 빼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군주로서 통치 방향이나 목적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권력에 대한 위험요소를 지나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면서, 실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인목대비의 유폐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자충수가 돼버렸다.

 

연산이나 광해나 옥사가 많았던 군주라는 점에서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 인조반정은 백성들의 저항이 아닌 일부 사대부, 당인을 중심으로 단행됐다. 반정의 주역인 서인들은 30년만에 집권하게 됐고, 조선은 두번째 반정으로 정국이 출렁거리며 전후 복구할 시기를 속절없이 흘려버리고 있었다.

 

반정으로 백성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내의 집권 세력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전후의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청을 거스르지 않게 외교력을 발휘하던 광해군이 축출되자, 명을 추종하는 소중화주의적 노선이 다시 부활했고, 그로써 신흥강국 청과 마찰이 빚어졌다. 그 결과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전쟁, 그것도 질 것이 뻔한 전쟁을 불러들이고 있었으니, 백성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의 불씨를 안겨 준 셈이었다.

 

 

e****0 2014.11.07. 신고 공감 6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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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을수 있는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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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가 아는것은 정사보다 야사가 많을것이다. 어렸을때부터 접한 드라마나 책등도 야사의 비중이 클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여인천하.. 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저시대의 왕은.. 그저 놀고 먹고.. 여자들에게 휘둘린것이 다일까..? 장희빈.. 인현왕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숙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시절 이모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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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가 아는것은 정사보다 야사가 많을것이다.

어렸을때부터 접한 드라마나 책등도 야사의 비중이 클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여인천하.. 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저시대의 왕은.. 그저 놀고 먹고.. 여자들에게 휘둘린것이 다일까..?

장희빈.. 인현왕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숙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시절 이모부가 권해주신 책을 읽지 않았다면 숙종의 탕평책을 알지 못했을테고..

장희빈이 오미자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알지 못했을것이다.

그저.. 미색에 홀려 정사를 망친 어리석은 왕으로 기억하지 않았을까..

문득 그 생각에 마땅하게 읽어볼책이 없나 찾다가 만난 책이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에서도 지정된 셰계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하는데..

나름 역사서를 좋아한다는 나역시 제대로  접해본적이 없는거 같다.

어렸을때도 세계사의 시작은 이원복 교수님의 먼나라 이웃나라였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만화이지만 만화스럽지 않은..  

가볍게 시작되었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책이였다.

11권까지 읽고.. 잠시 잊고 있었다.. 생각보다 출간되는 텀이 긴탓에..

15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머리를 정리하고 싶어서 11권까지 읽어내려갔다.

 

왕이란.. 본디 고독한 존재다.

형자 가까운 친척들은 잠재적인 경장자이고,

신하들도 틈만나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하며.. 심지어 왕위의 찬탈을 노리기도 한다.

이런 환경때문에 정치 굑과서보다 개인적인 경험이 왕의 리더쉽을 형성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모양이다.  정세를 바로 볼줄 아는 혜안과 믿는바를 끝까지 밀어붙일줄 아는 추진력을 겸비했음에도 광해군이 실패한것은 바로 경험때문이다. 임진왜란시절 조정의 분조를 이끌었던 경험을 활용하지 못하고, 세자시절 폐세자가 될뻔했던 불안한 경험에 사로잡혔기때문이다. 광해군 자신뿐만 아니라 조선과 조선백성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그 것들이 다 따로따로 존재하는것은 아니다.

우리의 역사이고.. 그 길고긴 시간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페이지속에서 우리도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광해군의 실패는 지금 우리에게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한다.

 

a******e 2010.09.1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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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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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거라 그런지 속도가 역시 빠르다. 그래서 어느 덧 11권. 주인공은 광해군.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신하에 의해서 왕의 자리를 물러나야했던 왕. 그래 그런지 기억되기로 선한 군주의 이미지보다는 폭군의 이미지가 더욱 강한 임금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광해군 3살 때 돌아가셨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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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거라 그런지 속도가 역시 빠르다. 그래서 어느 덧 11권.

주인공은 광해군.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신하에 의해서 왕의 자리를 물러나야했던 왕.

그래 그런지 기억되기로 선한 군주의 이미지보다는 폭군의 이미지가 더욱 강한 임금이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광해군 3살 때 돌아가셨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물론 그 자리를 지킴에 있어서도 외척의 세력이 몹시 중요했던 시대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앞날이 편치 않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선조는 새로운 중전을 맞았던 것. 그녀가 인목왕후 김씨였다. 당시 광해군의 나의 26세였다. 둘째였지만 형이었던 자가 현명치 못해 그가 선조를 이을 왕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조 39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인목왕후가 새로운 중전인 이상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광해군의 지위가 위태로워짐은 너무나도 뻔한 상황이었다.


 작가분이 말하길 어쩌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보였던 포악스러운 면은 세자 시절에

쌓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었겠냐는 의견도 있다고 했다. 자신을 보호해줄 보호막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신하들까지 그보다는 왕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 41년, 선조가 사망했다. 만약 선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의 바람대로 영창대군이 왕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 더 일찍 떠나는 바람에 장성했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세자 시절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즉위 초 그는 현명한 정치를 하는 왕이었다. 당시 모든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조세를 개편하여 대동법이란 법을 시행하였다. 조선시대 내는 세금 중에 지금처럼 돈이 아니라 그 지방의 토산물을 조정으로 올려보내는 세금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중간에서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백성들의 피해가 무척 컸던 세금이었다. 또한 방납이라는 것이 생겨나 더욱더 백성들의 목을 조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토산물 대신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만큼 쌀로써 세금을 대신하는 제도가 바로 대동법이다. 시작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지만(양반들의 반대로 인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100년이라는 시간이 들었다) 이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교 사상에 젖어 있어서 국제 정서를 읽지 못했던 대부분의 신하들과는 다르게 광해군은 주변의 정세를 읽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른바 중립외교라는 것을 한 것이다. 당시 강국으로서 조선을 넘보던 후금과 명 사이에서 때에 따라 적절한 외교를 한 것인데 이것은 나중에 반정이 발생하는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신보다 천하다 여기는 왜에게 고개를 수그린다는 것이 당시의 신하들에겐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현명하게 나라를 운영해나가고자 했던 광해군의 정치에도 먹구름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형장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이의 이름을 거론하는 옥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형장에서는 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하면 자신의 이복형제를 잔인하게 죽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영창대군은 역모에 휘말리게 된다. 처음엔 위리안치되는 것으로 그치는 듯했지만 곧 식량을 끊고 아궁이에 쉴 새 없이 불을 땠다. 영창대군은 바닥이 뜨거워 눕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울다 기력이 다해 죽었다고 한다. 그 어떤 고문보다 더욱더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복동생을 죽인 형, 광해군. 더욱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나름 우애가 좋았던 사이였다고하여 그 충격이 더욱더 크다.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광해군은 점차 퇴락을 길을 걷는다. 그리하여 결국엔 신하들에 의해 왕의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다. 처음부터 뭔가 불안했었던 왕이었다면 실망감이 이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군을 조직하고 용감하게 왜군에 맞서 싸웠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피난길에 오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자존심보다는 현실을 더욱 중시 여겨 현명하게 외교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피를 보았으며 결국엔 좋지 못한 결론이 났는지 정말 안타까웠다.


 광해군 이후 반정을 일으키면서까지 왕위에 오른자가 행한 정치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안타까움이 커다란 한숨으로 뿜어져 나올지경이다.

w*******y 2010.01.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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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내용보기
11권의 주요인물들 왼쪽 : 광해군, 선조, 임해군, 영창대군, 유영경, 곽재우         유성룡, 허준,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정인홍 오른쪽 : 박승종, 이이첨, 유희분, 박응서, 서양갑, 신율, 능양군(인조), 이귀          허균, 강홍립, 폐세자와 폐세자빈, 김개시, 인목대비   11권은 조선에서 두 번째로 폐위된 임금으로 연산군에 이어‘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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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의 주요인물들

왼쪽 : 광해군, 선조, 임해군, 영창대군, 유영경, 곽재우

        유성룡, 허준,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정인홍

오른쪽 : 박승종, 이이첨, 유희분, 박응서, 서양갑, 신율, 능양군(인조), 이귀

         허균, 강홍립, 폐세자와 폐세자빈, 김개시, 인목대비

 

11권은 조선에서 두 번째로 폐위된 임금으로 연산군에 이어‘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된 두 번째 제왕인 광해군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는 최근 들어서 긍정적인 의미로 재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연산군이 여전히 폭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해, 그는 후금(청)과의 현실적인 외교 관계를 통해 평화를 유지했고,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백성을 위했던 이미지까지 지녔다. 특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대중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더구나 그를 조선의 5대 명군(태조·태종·세종·세조·광해 : 신동준의 『조선왕 성적표』)으로 평가한 관점도 있었다. 그런 인물에 대해 이 책에서는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한 마음이었다. 책장을 덮으면서 느낀 마음을 몇 가지만 적겠다.

 

첫째, 아쉬움과 함께 씁쓸한 마음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 역시 광해군에 대해 개혁적인 군주라는 선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작가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 생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명의 원병이 오기 전까지 선조를 대신해서 임진왜란에서 적절히 대처한 경험도 있지 않은가? 16년이라는 긴 세자 생활에서 갖가지 위기를 극복하고 권자에 오른 인물이니, 어쩌면 가장 준비된 임금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것일까? 저자의 평가는 냉정했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중립외교, 허균에 대한 신임과 그로 인한 동의보감의 완성은 그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이 초기 몇 년에 불과했다.

 

임해군·유영경 등에 대한 옥사까지는 수긍이 간다고 하더라도 신율의 봉산옥사와 연안부원군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이어진 계축옥사 등은 광해군의 과욕에 의한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이첨·유희분·박승종 등에 대한 총애는 무능의 소치이기도 하다. 작가의 관점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광해군에게는 개혁군주가 될 능력과 배경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이룰 의지마저 부족했던 그를 확인하면서 아쉬움과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둘째, 학창시절에도 깨닫지 못한 사실을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그런 것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대동법과 ‘방납의 폐’였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광해군 때 대동법이 시행되기 시작해서 숙종 때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이것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것은 배웠다. 하지만 대동법이 백성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것인지는 몰랐다. ‘방납의 폐’를 근절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으니 암기식 교육의 맹점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방납의 폐해’의 뜻을 확실히 파악했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서 세금을 낼 때 그 지역의 특산품을 내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 지역과 관계없는 물품을 특산품으로 지정하니 각 고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그 물건을 사서 세금으로 내야 했다. 그런데 방납인들이 세금으로 낼 물품을 준비한 뒤에 각 고을에 터무니없는 고가로 공급했다고 한다. 이것을 구매하지 않은 지역은 상급관청과 결탁해서 받아주지 않았으므로, 각 고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방납인들의 물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방납(防納)이란 ‘세금을 내는 것을 방해한다’는 의미이고, 그런 독점업자들이 방납인인 것이다. 방납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뒤에는 권세가·후궁·왕자들까지 끼어들어서 상당한 이권을 나눠가졌기 때문이다.

 

대동법이란 특산품 대신 쌀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으로, 이것이 확대되면 방납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권세가들은 극구 반대했고, 광해군도 겨우 경기지방만 실시했지만, 아무튼 전국적인 확대의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학창시절에도 깨닫지 못한 것을 이제와서 알게 되었으니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셋째, 카메오처럼 선을 보인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서당이 반가웠다. 조선 5백년의 역사를 서당 훈장선생님이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는 형식인『맹꽁이서당』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작가는 오현종사를 설명하면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의 사림의 학통을 보여줄 때 『맹꽁이서당』의 그림체로 끼어 넣은 것이다. 이렇게 가끔씩 웃음을 선보이는 것이 만화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특징은 이미 알려진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사료 등의 근거를 제시하며)으로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이 축재에도 몰두했으며, 월탄의 『자고가는 저 구름아』을 통해서 간교한 인물로 생각했던 정인홍이 나름 지조 있고 의병활동에 앞장섰던 우국지사였던 것도 알게 되었다. 당정이 치열하던 시기에 당파에 초연했던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의 면모도 보았다. 특히 뛰어한 의병장 정도로 알고 있었던 조식의 제자이자 사위로 탁월한 유학자였으며, 강직한 재야인사의 길을 걸었던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12권은 인조실록이다. 그는 나의 선입감으로는 망국의 길로 이끈 무능한 세(선조·인조·고종) 임금 중에 한 명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특히 아들인 소현세자 내외와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간적으로 연산군 이상 가는 망종으로 생각되는 인물이니 아마도 답답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y******3 2014.02.01.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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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외로운 독선주의 왕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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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화백의 11번째 광해군 일기는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왕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능력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신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끝까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선조대왕의 아들로 집권 전의 불안했던 시기를 지혜와 총명함으로 이겨냈던 광해군이 결코 쉽지않았던 집권과정 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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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화백의 11번째 광해군 일기는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왕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능력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신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끝까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선조대왕의 아들로 집권 전의 불안했던 시기를 지혜와 총명함으로 이겨냈던 광해군이 결코 쉽지않았던 집권과정 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광해군의 인간적인 고뇌 이면에 숨어있는 잔혹함과 모두를 믿어야하는 상황에서도 믿지 못했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다.


 


추대받는 왕과 추대받지 못하고 역사의 한 켠에 서럽게 자리잡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왕조의 왕으로써 광해군의 모습과 이루고자 했던 바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왕으로써의 고뇌가 잘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의 모습과 시대 흐름 역시 엿볼 수 있다.


 


 

YES마니아 : 로얄 f***x 2008.07.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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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광해의 비극 그리고 성리학 절대주의자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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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는 어려운 시절을 지낸 후 결국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다른 임금들처럼 별로 칭송받을 만한 치적없이 역적을 솎아 내는 옥사를 치르고 현실에 맞지 않는 궁궐을 축성하고 명과 후금 사이 줄타기 외교를 하다가 결국 인조반정을 맞아 실각한다.   건국후 200여 년간 성리학적 충과 효로 세뇌된 사대부들이 어렵게 반정을 인정 받을 수있는 명분 또한 충과 효이다. 동생 영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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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는 어려운 시절을 지낸 후 결국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다른 임금들처럼 별로 칭송받을 만한 치적없이 역적을 솎아 내는 옥사를 치르고 현실에 맞지 않는 궁궐을 축성하고 명과 후금 사이 줄타기 외교를 하다가 결국 인조반정을 맞아 실각한다.

 

건국후 200여 년간 성리학적 충과 효로 세뇌된 사대부들이 어렵게 반정을 인정 받을 수있는 명분 또한 충과 효이다. 동생 영창을 죽인 죄(이런 죄는 광해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임금들이 거친 죄이다.)보다 어미(명분 상의 어미)를 피박한 죄(이건 광해가 처음인듯)가 더 크고  나라의 존립보다는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사대부의 명분에 광해의 죄가 딱 들어 맞았기 때문이다.

 

만약 선조가 중전이 죽은 후 이미 나이들은 후궁 중의 한 명과 결혼했다면(이 시대에는 이것이 가능, 숙종의 장희빈 사건후에는 후궁이 중전되는 길이 막힘) 광해군이 이처럼 무리한 수를 두는 임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조가 단종을 살려 둘 수 없었던 것 처럼 광해도 영창대군을 살려 둘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간은 영창대군 편이고 광해의 아들이 영창과 비교할 때 더 좋은 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사실을 선조도 알고 인목대비도 알고 모든 사대부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선조는 그렇게까지 광해를 미워했을까?

 

 

e******s 2015.02.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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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제대로 보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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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나의 관심은 38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관심이 있었다고 할 만한 날이 손꼽을 정도이다..학교 다닐 때에 배운 지식이 다이고 국사라는 과목을 그리 못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음에도 난 내 나이때에는 외운다는 조선의 왕의 순서조차도 모른다. 그런 내가 조금씩 역사라는 것에 눈을 뜬 것은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가 사회시간에 한국사를 배운 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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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나의 관심은 38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관심이 있었다고 할 만한 날이 손꼽을 정도이다..학교 다닐 때에 배운 지식이 다이고 국사라는 과목을 그리 못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음에도 난 내 나이때에는 외운다는 조선의 왕의 순서조차도 모른다. 그런 내가 조금씩 역사라는 것에 눈을 뜬 것은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키우고 아이가 사회시간에 한국사를 배운 다는 것을 알고 부터이다..

난 그렇게 하나 하나를 배워 갔다. 강의도 듣고 역사스페셜도 보고..역사드라마도 잘 안 봐서 이해도 떨어지지만 책을 찾아 읽고 그리고 역사가 녹아 있는 장소에서 난 보고 느끼고 그 시대를 생각해본다..

 

그러던 와중에 책과 함께 라는 출판사 블로그에서 우연히 한명기 교수의 벙커강의를 우연히 들어보았는데 왕과 아들들의 이야기 중에 그 날 강의의 주제가 선조와 광해군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난해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보았다는데..아직 그 영화도 보기 전이다. 한명기 교수님이 그 영화를 못봤다면 위상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했는데..나의 위상이 어디쯤인지 잠시 생각도 해보았다..그리고 박시백 작가님의 조선왕조실록 3권을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우선은 내가 가장 관심있는 조선의 왕인 정조와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편과 또 한 권이 11편 광해군 일기 편이다.

 

 

광해군은 과연 누구인가? 세종대왕릉과 융건릉을 가 본 나는 조선의 왕들의 무덤이 이렇구나 하고 감탄을 했었다. 무령왕릉이나 경주의 왕릉들 처럼 조선의 왕릉에는 보물이 같이 들어 있지 않지만..그래도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명판이 왕릉의 입구에 걸려 있고 관리가 잘 되고 있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위치에서 전생을 평안하게 맞이한다고 해야 하나..그러나 광해군의 묘는 정말 거기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다고 한다..보잘 것 없다는 것은 살았을 당시 그가 보잘 것 없었다는 것일까? 아님 죽은 후에도 그를 다시금 되새겨줄 이가 없었다는 것일까?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원이였던 무덤이 지금의 정조의 능과 같은 공간에 능으로 잘 정비되어있는 것을 보면..광해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어림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또 보고 광해군을 다시금 생각해보았다..그래서 이제는 조금 광해군이라는 왕을 알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는 것은 쓰고 있는 지금도 아주 곤혹스럽다. 왜냐면 어려운 말들이 너무 많이 나왔고 내가 전후의 책을 다 보지 못한 이유도 있을 터이다. 그래도 쓰고 싶었다. 박시백 작가님이 이 책을 오랜동안 만들어왔고 이 책이 정말 여느 책들보다도 너무나 잘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리고도 싶었고 감사하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아버지는 선조..선조도 임진왜란과 더불어 기억되는 조선의 왕이다. 집권기에 일본과의 전쟁 속에서 수많은 백성은 물론이거니와 경복궁도 불타고 한 사실만으로도 선조는 힘든 시기를 거쳐온 왕이라 여겨진다. 정비에게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공빈 김씨에게서 난 둘째 아들 광해군은 나라의 어려운 시기에 선조가 피란을 가면서 세자로 책봉이 된다. 후궁에게서 난 아들로 첫째도 아닌 둘째 광해군은 세자가 되어 분조를 이끌고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했으나..정말 돌아오는 것은 아비의 차가운 냉대였다.

 

 

나는 매일 매일 신문을 보지만 나는 왠만해선 1~5면까지는 잘 안 본다. 난 뒤에서 부터 신문을 본다.

내가 읽는 신문을 그나마 한겨레이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박시백 작가님도 한겨레 출신이라 반가웠다.

정치나 권력을 가진 힘있는 자에 이야기에서는 나의 맘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성리학을 받들였던 겸손하였다던 조선이라는 나라..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왜 그리 당쟁이 심했는지..작가님의 그림과 글에서도 보여주듯이 권력을 가진 자만이 그 기분을 아는 것일까? 아버지 조차도 아들이 뛰어난 것을 칭찬하기는 커녕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외면하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는 그 맘을 안돼봐서 난 모르겠다. 자뭇 스승들도 <청출어라>이라는 말을 좋아할 꺼 같은데..세자가 되어 늘 맘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광해..나중에 내 나라 내 신하 내 백성들이 될꺼라고 욕심 부리지 않았던 세자의 삶 16년.. 아버지의 사랑없이 편들어 주는 내 신하 없이 그는 맘 속에서 많은 갈등을 하고 살았던 것일까?

 

이 책을 보면서..생각했다..또 하나 심히 든 생각은 광해를 망하게 했던 <옥사>부분이다. 왕이라고 해서 권력을 가진 자라고 해서 자기와 뜻이 맞지 않다고 누명을 씌우고 고문을 해서 거짓 증언을 받아 내고 그 거짓 증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저를 죽여주시면 됩니다> 아닌가..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살려 주는 것이 아니고 신하들도 상소를 올려 끝까지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기만 하려는 이기적인 맘을 보면서..그들이 정녕 생각하고 그들이 일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지..과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생각한 것인지.임금을 생각한 것인지 한 나라안에서 같이 살고 있는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도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자리만 지키려고 안간 힘을 쓴 건 아닌지 참으로 답답한 부분이였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그래서 이 책을 읽고도 내내 머리와 맘이 무거운 까닭이리라 짐작한다. 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세자였던 16년간 광해는 많은 경험을 쌓았다. 나라 곳곳을 누비며 실무경험을 쌓았던 그였기에..누구보다도 전쟁 이후 황폐해진 나라의 백성들은 진정한 군주를 원했을 것이다..

왕이 되면 반대되는 세력 제거가 앞장 선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그래서 아 요즘도 대통령이 바뀌고 나면 한동안 나라가 시끄러운 거구나. 역시 역사는 쳇바퀴 돌듯이 그 모습이 유사하게 변화하는 것이 맞나 보다.

 

 

 

광해의 주변에서는 모두들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살 잡혀 흔히 말하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자기들의 안위와 이익을 지키려는 자가 있었으며 형은 난봉꾼이였으나 선조는 임해군에게는 관대하기 그지 없었나 보다..광해군을 대할 때는 질투의 마음이 활활 타올랐다고 표현된 것만 봐도 그렇다..

열손가락 중 분명 안 아픈 손가락이 있었나 보다..그것이 광해군이였다는 것이 안타까운 따름이다.

 

이 책에 나중에 김개시라는 상궁이 나온다. 김개시는 상궁이였으나 광해에게 많은 신임을 받는 자리에 까지 오른다..원래 선조의 후궁이였다는 김개시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는 광해를 보면서 어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애정결핍에 의한 광해의 조금은 엇나간 행동들이 광해의 의지와 능력을 앞서 간 것이 아닐까 하는 맘도 들어 안타까웠다. 늘 어느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는데 운명은 타고 나는 것이고..

 

광해는 그렇게 집권을 하고 대동법<쌀로 세금을 걷는 법>의 시범실시와 허준의 의학적인 능력을 북돋아 주고 탕평인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옥사가 시작이 되고 줄줄이 끌려오고 그들을 직접 고문하고 직접 신문을 하면서 광해군은 자기안에 모순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왕이 되었을 당시 광해의 편인 아닌 이들은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는 연산군과 같은 복수는 하지 않는다 믿었것만 그 밑도 끝도 없는 복수가 영창대군까지 죽게 만든다. 광해의 곁에는 욕심에 눈이 먼 이이첨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경험도 많고 세자 시절 많은 준비를 한 한 나라의 희망이 될 수 있었던 임금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광해군은 집권기에 궁이란 궁은 손을 보고 새로 짓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미신에 빠져 점쟁들에게 자기의 운명을 맡겨 버렸다. 그러나 점쟁이들은 정말 광해의 미래를 보기나 한 것일까?

 

그러나 자주적인 외교노선을 주장했던 광해는 신하들의 반대만 없었더라도 아마도 더욱 힘이 실려서 굳건히 나라를 다스리는데 집중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강한 유교적 세계관에서 빠져 나오는 이가 하나도 없었는지 자기의 목숨을 걸더라도 왕의 손을 들어주는 자가 정말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힘없는 자는 권력을 잡아도 그 권력을 잘 누리기 힘들다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에도 확실하게 기록이 되어있다. 그런 기록은 지금이나 과거에나 안타깝고 애쓰러운 맘만 가지고 바라봐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중국이 아버지의 나라이고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그들 때문에 우리의 근대가 얼마나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을 많이 남겼는지 얼마나 갇힌 생각이 썩어 들어갔는지..

 

그렇게 광해의 15년의 집권기는 끝을 달린다. 내내 시끄러웠던 당쟁의 시기도 그리고 주변세력에 대한 정리나 이름은 외우기는 커녕 알기도 힘들다.

읽는 내내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하면서..김개시를 만난 광해는 김개시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김개시의 욕심을 바라보지 못한 채..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게 된다..

 

폐위가 되어서도 오래 살았던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는 말이 인상깊게 남는다.

 

한 나라의 왕..왕의 아버지를 가졌던 그...그리고 태어나서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에 한없이 외로웠을 세자의 삶 그리고 왕의 삶...형도 동생도 죽이게 된 운명..

 

그런 상황을 만든 건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그렇게 이번 계기로 광해군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가 조나 종이라는 칭호를 가지지 않았다고 그의 묘가 초라하다고 그가 불쌍한 것은 아니다..

시대적인 상황이 어려웠을지라도 강한 자아로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는 의견에 살짝 동의도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내 편 없는 왕의 자리가 그에게는 미치도록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안쓰러운 맘은 한쪽 구석에 간직하고 싶다.

 

박시백 작가님의 그림도 일품이고 손글씨로 쓴 내용도 좋았으며 곳곳에 숨어있는 유머러스함도 좋았다.

역사적인 지식이 짧아 아무리 나열하고 설명한 것도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지만..이 책은 내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필히 읽게 해주고픈 좋은 책임은 분명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도 꼭 보아야겠다.

 
 
 
 
 
 
 

 

t*****3 2013.07.1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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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광해군을 보면 집에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태도에따라 자라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조선시대 왕이란 자리는 맘대로 하는것보다 못하는게 더 많았던것 같기는 하다.. 근래들어와서 광해군에대한 제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긴하지만 뭔가 좀 아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내용보기

광해군일기..

광해군을 보면 집에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태도에따라 자라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조선시대 왕이란 자리는 맘대로 하는것보다 못하는게 더 많았던것 같기는 하다..

근래들어와서 광해군에대한 제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긴하지만 뭔가 좀 아쉽다..

l******t 2013.08.2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