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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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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국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은 지도 전문가가 대단히 정확한 지도를 완성했다. 그 지도는 정말 정확해서 그 크기가 제국의 영토를 뒤덮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지도가 낡아 너덜너덜해져가는 것과 같이 제국 역시 쇠퇴해갔고 마침내 제국의 붕괴 후 지도는 그 흔적만을 부분부분 남겼다. 『지도 만드는 사람』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보르헤스의 책 『오욕의 세계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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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국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은 지도 전문가가 대단히 정확한 지도를 완성했다. 그 지도는 정말 정확해서 그 크기가 제국의 영토를 뒤덮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지도가 낡아 너덜너덜해져가는 것과 같이 제국 역시 쇠퇴해갔고 마침내 제국의 붕괴 후 지도는 그 흔적만을 부분부분 남겼다.

지도 만드는 사람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보르헤스의 책 오욕의 세계사에 나오는 위의 이야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상징적인 작가로 여겨지는 보르헤스는 현실의 대응물이라고 생각되는 지도가 얼마나 허구적인 지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뛰어난 점은 이 허구적인 지도라는 것이 현실을 뒤덮고 결국에는 현실을 대체해버린다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는 아마도 강력한 왕권을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황제의 제국은 바로 그 지도에 의해서 점령(뒤덮임)당해버리고, 지도의 쇠퇴(너덜거림)에 의해서 제국의 흥망이 결정되어 버리기까지 한다. 주목해야할 지점은 마지막 부분인데, 제국이 붕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그 흔적만을 부분부분 남겼다.’라는 맺음말이다. 현실은 부재할지라도 지도는 부분적으로나마 현존한다. 현실과 가상의 뒤바뀜 또는 뒤섞임을 보르헤스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도는 공간성을 토대로하여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초록색, 한나라당은 파랑색으로 당선 지역구를 색칠하듯 지도로 표시되는 구역은 현실의 토지를 토대로 구축된 세계라는 믿음은 많은 이들에게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은 지도 만드는 사람에 의해서 철저하게 반박된다.

16세기 영국의 역사지지지의 광범위한 사료분석을 통해서 저자가 논증하는 것은 지도가 사실의 재현이라는 역할도 수행하지만, 일정 수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왜곡 또는 통제된다는 것이다. 가장 극명한 예는 책속에 제시되어 있는 아메리카 대륙 개척시대의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6세기 무렵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이른바 세계지도는 기본적으로 아메리카대륙 개척이라는 정치 상업적 목적으로 편찬되기 시작한다. 해상 상업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각국의 왕실로서는 이를 위해 지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네덜란드, 영국, 포르투칼 등 각국에서 앞다투어 세계지도제작에 뛰어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잘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대의 지도는 정확한 지리를 제공한다는 목적과 동시에 지도제작 후원자의 정치적 목적을 만족시킨다는 다소 모순되는 이중적 가치를 동시에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지리를 제공한다는 점은 미개척지를 탐험하고 정확한 항로를 제공해야 된다는 점에서 필수적이었다. 16세기 무렵부터 발달된 과학기술 및 측량기술의 도움으로 예전에 비해서 정확도를 크게 올릴 수 있었기에 그 당시 시대의 요구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지도제작자들은 지도가 소장품으로서 소장자의 권위를 높이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 호화로운 장식을 하기도 했을 뿐더러, ‘이민 사업에 투자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영국정부로 하여금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도록 부추겨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종 그곳을 사람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 언제든 정착하기에 안전한 곳으로 그려내'기도 해야만 했다는 점에서 정치성을 가진 지도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정치적 목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드 브리(Theodore De Bry)는 화이트와 스미스의 지도와 그림을 유럽시장에 출판화는 과정에서 유럽 사람들의 구미에 맞도록 장소의 위치를 바꾸거나 지도의 내용을 삭제하기도 하였다.이 과정에서 아메리카대륙은 미문명’, ‘야만으로 비추어지고 유럽 문명인들이 이들을 정복하고 개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지도 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를 다룬 지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러한 작업을 기초로 장차 유럽 식민주의가 발흥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 지점까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지도 제작자들이 어떻게 현실을 만드는가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도 만드는 사람이 뛰어난 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도를 통한 현실의 구성이 다시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까지 추적을 했다는 지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상정하는 주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 어떤 권력이나 지배의 위계관계를 추적하고자 한다면, 근대적인 작업에서는 어떤 주체를 상정하고 그 주체의 행위와 주요 사건간의 인과관계를 논증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서술을 역사학으로 옮겨온다면 역사의 서술은 당연히 정치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발견한 것은 근대가 상정하는 주체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허구라는 점이다. 다시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형의 폐허에서 꿈으로 아이를 빚은 어느 도인이 있다. 그는 꿈으로 사내아이를 빚고, 불의 신의 도움으로 꿈속의 아이를 현실세계로 끌어낸다. 꿈으로 빚은 아이에게 그는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그는 아이를 폐허가 된 다른 사원으로 보낸다. 몇 년 뒤 사내는 불속을 걸어가도 타지 않는 도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사내는 자신의 아이가 자신의 이 신비한 능력에 정체를 의심하다가 자신이 환영임을 깨닫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어느 날 밤 사내가 기거하는 사원에 화재가 발생하고, 사내는 자신이 화염 속에서 불타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원형의 폐허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이른바 주체라고 상정되는 대상조차 만들어진 것임을 일깨워준다. 즉 우리가 모든 사태의 주재자라고 생각했던 주체자체도 다른 원인에 의해서 주재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드린다면 근대가 주체를 모든 인과관계의 출발점으로 놓고 상정한 많은 논의들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이를 역사학의 관점으로 바라볼 경우, 기존의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며, 사회 기저에서 많은 관계를 형성하는 모종의 질서가 연구 대상이 된다.

지도 만드는 사람는 이러한 관계성에 대해서 국토에 의해서 형성된 국민성’, ‘국가정체성을 통해서 설명한다. 많은 영국 사학자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민이라는 개념이 출현하였고, 따라서 영국의 국민성이라는 것 또한 18세기의 산물이라고 본다. 하지만 저자는 정체성이란 궁극적으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상호작용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16세기 무렵부터 영국의 역사서술은 이전과는 다른 경향성을 띠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역사지지서로서 지도제작을 염두해둔 릴런드의 답사기이다. 릴런드는 지역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남겼지만 이 저작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가 지역에 따른 특이성을 찾기보다는 영국 전체를 하나로 묶어 공통점을 도출해낸다.’는 점이다. 답사기이후 많은 저작이 이에 기대어 출판이 되었고, 색스턴의 대 아틀라스와 같은 지도와 캠던의 브리타니아같은 저작은 영국이라는 국토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때 그랜드투어와 같은 외국여행자에 의해 비추어진 영국의 이미지가 영국에 수입되기도 하는데 소르비에르의 영국 여행이 대표적이고, 흥미롭게도 영국인인 스프랫이 이에 대해 쓴 영국 여행에 대한 고찰은 다시 영국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수 백년에 걸친 이러한 관계맺음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영국인에 의한 국토 정체성 확립 → ⓶ 이를 토대로 타인의 시선으로서의 영국 정체성 형성 → ⓷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영국 정체성의 재확립이라는 구조이다. , 기존 영국사학계에서 18세기에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으로 상정했던 국민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러한 관계맺음 속에서 출현한 복잡한 과정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어떤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실증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으나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랭퍼드가 주장하는 국민성이라는 것이 18세기 근대적 계획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결과로서는 타당할지 모르나 과정에 있어서는 치밀하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근대적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라는 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것인데, 근대의 주체또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랭퍼드의 주장은 인과관계의 시작을 정확한 지점에서 잡은 것은 아니다. 지도 만드는 사람은 근대적 계획이라는 것이 18세기 일부 계몽주의자들의 주도하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계획 자체가 이미 16세기부터 시작된 국토에 의한 정체성 확립과정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치밀하게 논증하여 그 타당성을 획득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로 지나치게 상세한 주석과 자료의 제공이 영국역사에 무지한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논문과 학술서적, 또는 대학교의 강의 교재로는 매우 적합할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이 교양서적으로 읽기에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특히 책의 저자가 나오면 출생년도와 이력까지 소개하며 각 개념이 나올 때마다 학자들의 비판과 반박 등을 세밀하게 소개하는데 이런 서술이 과연 일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둘째로 이것이 주류 역사의 서술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다. 책의 기본적 구성 방법은 서두에 기존의 역사적 업적을 소개하고 이것이 놓친 부분에 대해서 저자의 연구를 가미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게되는 것은 장점이지만 이는 동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역사 지식보다 새로운 견해를 먼저 접하게 되는 위험이 존재한다. 저자는 풍부한 각주를 통하여 원사료를 소개하므로 역사전공자의 경우 이를 통해 어떤 관점이 맞는지 직접 취사선택할 수 있겠지만, 일반인으로서는 저자의 견해가 유일한 견해로 영국 역사의 정체성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마치 지도 만드는 사람에서 지도제작자가 영국 정체성을 형성했던 과정처럼!) 따라서 주류적 역사학의 기본적인 태도를 비롯하여 그들이 이렇게 해석하게 된 중요 근거,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주류 역사학의 재반박 등을 소개해주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도를 태운다

묻혀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김경주 <기담> 중 

위 시는 상징물인 지도를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보르헤스적이다. 지진과 육지 그리고 지도라는 세 개의 위상에서 육지는 상실되고 지진과 지도만 남은 세계를 시인은 상정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시인은 이렇게 상정된 세계가 바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기표는 기의를 더 이상 담지할 수 없다는 현대 언어철학의 태도를 시인은 솔직하게 고백하는 샘이다.

보르헤스와 김경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도 만드는 사람조차 국토라는 허상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역사학자로서 기존 영국 사학자들의 18세기 국민성이라는 관점을 비판하지만 그가 정착한 지점은 16세기의 영국 지도를 바탕으로 살펴보 국토라는 개념이다. 국토에 정주하는 순간 지도 만드는 사람또한 근대적 저작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파괴적인 본질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현대의 모든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빚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포스트모더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과정. 그것이 학자로서의 숙명이고 학문의 운명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도 만드는 사람에 지금은 동의한다. 하지만 결과로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동의한다. 수 많은 학문적 업적이 이전 시대의 업적이 기대는 것처럼 지도 만드는 사람또한 전 시대의 성과를 토대로 일군 저작이며, 이것이 후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지도 만드는 사람는 완성물이 아닌 현재진행하는 책이라고 본다.

 

 

바람은 한 번도 목장을 가지지 못했고, 목장은 한 번도 바람을 가두지 못했다.

-김경주

 

YES마니아 : 로얄 d******d 2011.09.2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