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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세 류타카와 18세 렌의 첫만남--------------
그는 그녀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키가 컸고 약간 마른 체격이었다. 머리는 가지런히 뒤로 묶어 정리한 단정한 모습에 검은 두 눈은 그녀의 속을 꿰뚫을 것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히타치 당주(류타카)의 입에서 준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연못에서 구한 아이는 내 아들이다. 알고 있었나?" "돌보는 이가 없었기에 평민의 아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너를 죽이기 전에 내 허락이 필요하다 했나? 내가 모든 것을 지켜 봤다. 그러니 이제 널 죽인다 해도 달리 할말은 없겠지?"
언뜻 보기에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몹시 딱딱해 보였다....
"여긴 당주께서 주인이신 곳입니다. 하오니 저를 죽이신다면 죽을 수 밖에요."
"그런데?"
"다만, 군자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히타치의 다이묘는 군자가 아닌 소인배라는 걸 알게 된 게 애석할 따름입니다."
렌의 겁없는 대답에 기겁을 한 무사들이 날카롭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아직 스물도 안 돼 보이는 계집의 어디에서 저런 용기가 나는 것일까?
"무슨 근거로 나를 군자가 아니라고 폄훼(貶:떨어뜨릴폄毁:헐훼)하는 것이냐?" "분명히 당주께서는 저를 가리켜 아드님을 구해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놓으시고는 저를 죽이려 하시니, 자식의 목숨을 구한 이를 죽이려는 사람을 어찌 군자라 칭할 수가 있겠습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찮은 계집 따위가 무슨 이름이 있겠습니까만, 제 주인께서는 저를 렌이라 부르십니다."
이름을 들은 류타카는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끊임없는 그녀의 상념을 베어버리기 위해 류타카는 그녀를 취하고 베어버릴 결심을 한다.>-----
"네 처소가 마음에 드느냐?" "예." "내 아들이 너를 몹시 따른다고 들었다." "도련님은 누구나 좋아할 만큼 어질고 따뜻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군자가 아니라 혹평하더니 내 아들에게는 관대하구나."
"저는 다만......" 자신의 농담에 당황한 그녀가 얼굴을 붉히자 그는 피식 웃었다. "내 앞에서 꼿꼿하게 대답하던 결기는 어디로 간 것이냐?" "그때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토노(영주,귀인)."
"무엇을 원하느냐?"
류타카의 뜬금없는 질문에 렌은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세이쥰이 오래도록 말문을 열지 않았던 것은......네게 그 공을 치하하고 싶어 묻는 말이다. 무엇을 원하지?"
"없습니다."
"네 눈은 있다고 말하는데 입으로는 아니라고 말하다니, 솔직하지 못하구나."
"설마요. 잘못 보신 거겠지요."
"좋다. 네 대신, 내가 정하지. 너를 내 측실로 만들어주겠다."
류타카의 서늘한 눈빛을 본 렌은 말문이 막힌 듯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 서글픈 초야----------------------------------
"받아라, 내가 네게 주는 합환주다."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그는 중얼거렸다.
"널 여인으로 보게 된 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마셔라."
....무척이나 독한 술에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자, 그는 투박한 손끝으로 여자의 보드라운 볼을 어루만지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심정이 그 술맛과 같다."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수그려 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신을 피하는 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류타카는 그녀의 턱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피하지 마라. 피하면 너만 다칠 뿐이다."
----------------- 석고대죄 후-----------------------------------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할 줄은 몰랐다. 이 아이가 자신에게 이토록 깊이 다가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한 번쯤은 내게 도움을 청해도 좋으련만,네 고집은..날 힘들게 하는구나."
------------------둘만의 보름간의 휴가 중-------------------------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혀있었다. 렌은 말없이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냈다. 그러자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살며시 고개를 흔들며 옷소매로 이마를 대충 문질렀다. 그녀가 이상한 듯 쳐다보자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손수건에서 나는 네 향이 없어질까 그런다."
그리고는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마치 귀한 것을 간직하듯 품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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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와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려 하자 그가 뒤에서 꽉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마치 쑥스럽고 어색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네게 대답을 강요한 말은 아니다. 부담스럽다면 그냥 흘려들어도 좋다."
과묵하기 그지없는 사내가 슬쩍 드러내는 속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정실 하루의 회임 소식에 아파하고----------------
"놓으란 말이다!"
그녀는 그를 더욱 끌어안으며 울먹이는 어조로 정신없이 소리쳤다.
"화가 났어요. 토노께 화가 났는데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밉다하면 제가 초라해질 것 같아서...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울며불며 매달리는 계집의 가녀린 몸뚱어리가 그를 슬프게 했다. 어리석은 놈! 우매한 놈! 이렇게 울리려 했던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무거운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펑펑 우는 계집을 살며시 보듬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자신의 마음을 속삭였다.
"울지마라, 너를 아프게 하고, 울려놓고도 나는 한편으로는 기쁘다. 네가 내게 보이는 것만큼 무관심한 건 아닌 듯해서...정말 기쁘다. 고맙다, 렌."
그의 속엣말에 그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렌의 머리를 빗겨주며....-------------------------------
"네 머리를 빗겨주려고." "토노..."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는 조심스레 빗질을 시작했다....
"네게선 어머니의 살내가 난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따뜻한 냄새야. 어릴 적에 아버님이 어머니의 머리를 빗어주시는 걸 본 적이 있지. 어린 눈에도 두 분의 정다운 모습이 참 부러웠었다."
"제 부모님도 금실이 좋으셨어요....."
"아버님은 조선에 계신 건가?"
"아마...오래도록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이젠 어떤 모습이셨는지 기억이 흐릿해요."
그녀의 어조에서는 여전히 슬픔이 묻어났다. 아마도, 평생 가도 지울 수 없는 상처겠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찬성하지는 않았으나....이 아이는 조선인, 자신은 일본인, 그러나 이 아이는 지금 자신의 곁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류타카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렌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하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사과였다. 하나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에게 미안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아줄 수 없는데 대한 정인으로서 미안함이다.
---------------------불바다 속의 렌과 류카타---------------------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그가 나를 기억해 줄까, 한때는 그를 사랑한 조선인 여자가 있었다고 생각해 줄까.
'류타카,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녀는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훔쳐내며 말을 했다.
"사랑.....해요." 점점 숨이 차오르면서 시야가 아득해졌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때 멀리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맙소사. 세이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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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라! 내가 가야 한다! 저 안에 내 여자와 자식이 있단 말이다!"
"나와! 나와 다오! 렌! 세이쥰!"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잃어버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내 목숨보다도 더 너를 사랑하고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던 걸까......나는 네게 내 전부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넌 이런 나를 두고 가는 것이냐, 렌, 렌!
"들어줘. 제발 내 말을 들어줘......"
잔뜩 쉬어버린 그의 목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의 목은 소리 대신 시뻘건 핏물을 토해냈다.....
"사랑.....한다. 너를 사랑해, 렌."
그 말을 할수록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차라리 그녀를 조선으로 보냈다면 이런 꼴은 보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 밤, 그때 놓아주었어야 했다....너를 붙잡는 바람에 내가 너를 죽였구나. 내가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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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감동적인 결말 있습니다...새드 앤딩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