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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장호연 마티/2008.1.25.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우리에게 탈식민주의 이론을 주장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본업은 비교문학을 전공한 영문학 교수이며, 일급 문학 비평가이자 음악 비평가로도 유명하다. <세계, 텍스트, 비평가>로 르네 웰렉 상을 받았다. 저서로 <문화와 제국주의>,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그의 유작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모든 양식은 일차적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 혹은 역사, 사회, 선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미적 작품은 독특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등장한 시대의 일부다. 때로는 시대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역시 그 일부이다. “이것은 그저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시기가 일치한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수사학 혹은 형식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낭만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세속적인 환경에서 등장한 베토벤이나 바그너와 달리 자신의 음악에서 궁정과 교회의 세계에 더욱 가까운 양식을 선보였다.(p.193)” 이와 같이 양식은 예술가들이 산 시대를 나타내게 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현재 속에 거주하지만 묘하게 현재에서 벗어나 있다. 말년의 양식은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죽음은 굴절된 양태로 나타난다. 말년성이라는 주제와 양식이 우리에게 죽음을 계속 생각나게 할 때가 많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이론적 길잡이로 삼아 R.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장 주네, 남페두사, 비스콘티, 글렌 굴드, 카바피, 브리스톤의 작품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국적과 표현양식이 다양한데도 사이드는 이들 모두를 말년성이라는 개념 하나로 풀어낸다. 이들 중에는 말년의 특징을 보인 작품을 하나만 남긴 사람도 있고, 아예 삶 자체가 말년의 양식인 예술가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이드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슈트라우스의 말년의 오페라는 보통 모더니즘 시대사조에 역행하는 음악적 퇴보로 여겨지지만, 이제 조성 음악의 전통을 나치 독일의 야만성으로부터 지켜낸 수호자가 된다. 철없는 사랑의 시험을 다룬 모차르트의 <코시 판 투테>는 도덕과 무관한 세계, 속죄와 변명이 존재하지 않는, 오직 감정의 조작만으로 견딜 수 있고 죽음으로서만 벗어날 수 있는 세계의 은유가 된다. 장 주네는 삶 자체를 무대로 삼아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려 한 인물로 설명되고, 굴렌 굴드는 해석의 강박을 벗어던지고 연주 자체를 작곡 행위로 승화시킨 예술가가 된다.(p.232)” 이과 같은 말을 통해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사이드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해설’에 나오는 다음의 작품들을 읽기를 권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장미의 기사>, <닉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카프리치오>, 모차르트<코시 판 투테>, 베토벤 <피델리오>, 벤저민 브리튼<피터 그라임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표범>, 토마스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장 주네<병풍>, <사랑의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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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양식은 일차적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 혹은 역사, 사회, 선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미적 작품은 독특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등장한 시대의 일부다. 때로는 시대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역시 그 일부이다. “이것은 그저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시기가 일치한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수사학 혹은 형식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낭만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세속적인 환경에서 등장한 베토벤이나 바그너와 달리 자신의 음악에서 궁정과 교회의 세계에 더욱 가까운 양식을 선보였다.(p.193)” 이와 같이 양식은 예술가들이 산 시대를 나타내게 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현재 속에 거주하지만 묘하게 현재에서 벗어나 있다. 말년의 양식은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죽음은 굴절된 양태로 나타난다. 말년성이라는 주제와 양식이 우리에게 죽음을 계속 생각나게 할 때가 많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이론적 길잡이로 삼아 R.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장 주네, 남페두사, 비스콘티, 글렌 굴드, 카바피, 브리스톤의 작품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국적과 표현양식이 다양한데도 사이드는 이들 모두를 말년성이라는 개념 하나로 풀어낸다. 이들 중에는 말년의 특징을 보인 작품을 하나만 남긴 사람도 있고, 아예 삶 자체가 말년의 양식인 예술가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이드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슈트라우스의 말년의 오페라는 보통 모더니즘 시대사조에 역행하는 음악적 퇴보로 여겨지지만, 이제 조성 음악의 전통을 나치 독일의 야만성으로부터 지켜낸 수호자가 된다. 철없는 사랑의 시험을 다룬 모차르트의 <코시 판 투테>는 도덕과 무관한 세계, 속죄와 변명이 존재하지 않는, 오직 감정의 조작만으로 견딜 수 있고 죽음으로서만 벗어날 수 있는 세계의 은유가 된다. 장 주네는 삶 자체를 무대로 삼아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려 한 인물로 설명되고, 굴렌 굴드는 해석의 강박을 벗어던지고 연주 자체를 작곡 행위로 승화시킨 예술가가 된다.(p.232)” 이과 같은 말을 통해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사이드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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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몇몇 예술가들의 말년의 양식에 대해 다룬 책이다.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을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 말한다.(31 페이지) 그에게 말년성은 종국에 접어드는 것, 의식이 깨어 있고 기억으로 넘치는 것, 그러면서도 현재를 대단히 예민하게 인식하는 것(38 페이지)이며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망명이며,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40 페이지) 그런가 하면 사이드에게 아도르노는 그가 행한 많은 것들이 자신의 시대와 격렬하게 충돌했기 때문에 더없이 만년의 인물이며(47 페이지) 시대와 어긋나려고, 니체적인 의미로 역행하려고 발버둥쳤던 말년성 그 자체이다.(140 페이지)(사이드는 생전에 아도르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누차 인정했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가 색다르게 보이는 것은 유일작임에도 말년의 성격을 보였다는 람페두사의 소설 <표범>을 비롯해 서른 여섯의 나이에 타계한 젊은 모차르트의 말년성을 다룬 책이기 때문이다. 사이드가 다룬 모차르트의 작품은 ‘여자는 모두 다 그래‘를 뜻하는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이다. 이 문제의 작품을 쓰던 당시 모차르트는 개인적으로 작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건강과 함께 재정 안정도까지 악화되었던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가 바덴에서 요양을 하느라 홀로 지내야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쓴 편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열정과 차가운 공허를 함께 지닌 모순된 감정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인 레오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죽음은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란 글로 숙명론적 심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모차르트의 어떤 점이 사이드의 마음에 든 것일까? 그것은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음악과 그토록 부주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야기의 결합.(110 페이지)이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바흐에 비해 모차르트를 덜 좋아하는 내 습성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사이드는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음악과 그토록 부주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야기의 결합을 얘기했지만 나는 모차르트 음악의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의 슬픔이 만들어내는 부조화가 어리둥절하다. 사이드는 코지 판 투테가 몹시 힘이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넘친다는 말을 한다.(110 페이지) 사이드는 “(장) 주네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반항과 열정, 죽음과 재생이 서로 긴밀하게 얽힌 곳으로 끊임없이 들어가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그의 독특한 감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127 페이지: 네 번째 장에서 사이드는 작가 장 주네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이드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탄생한 인간이며 무(無)에서 피아노 연주를 재창조하고 재구축했다는 환상을 가졌다”는 글렌 굴드에 대한 사이드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지? 사이드는 굴드의 비르투오시티가 기교의 과시를 통해 청자들을 소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바흐 음악 연구를 통해 주로 얻은 새로운 종류의 사고를 펼쳐 연주 속에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171 페이지) 이른바 명인 연주자라 불리는 비르투오소가 유럽 음악계에 등장한 것은 피아니스트 리스트(1811~1886)와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1782~1840) 때부터였다. 당시는 작곡과 연주가 분리되기 이전이었으니 두 예술가는 작곡가인 동시에 연주자였다. 신들린 듯한 기교를 선보였던 이들의 등장으로 작곡’에 놓여 있었던 무게중심은 ‘연주’ 쪽으로 서서히 자리를 옮겨갔다고 한다. 사이드는 비르투오소를 부르주아 문화가 꽃피운 산물이라 말한다. (172 페이지) 사이드에 의하면 놀라운 기교를 지닌 천재의 연주를 들으러 가는 현대 콘서트 홀은 짜릿함과 흥분을 극한 상황으로 체험하는 벼랑 같은 곳이다. 굴드의 숱한 기행은 잘 알려진 바이지만 내가 사이드의 책을 통해 처음 안 굴드의 기행은 건반 음악이 1차적인 분야가 아닌 작곡가들(바흐, 비제, 바그너, 베베른, 슈트라우스)을 주로 연주했다는 점이다. 사이드는 굴드가 비르투오시티를 의식적으로 재설정하고 재정립하여 도달하려 한 결론은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속한다는 말을 한다. (176 페이지) 콘서트 무대에선 어쩔 수 없이 왜곡이 생긴다는 이유로 무대를 떠난 굴드, 그리고 그에게 바흐는 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굴드는 음악을 표현과 해석의 예술로 생각하여 일관성과 체계와 창안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는, 까다롭고도 도전적인 과제를 제시했다.(179 페이지)고 한다. 굴드는 상업화되고 말랑말랑한 레퍼토리로 변질된 음악을 격렬히 거부했다. 바흐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런 그의 생각의 연장이었다. “그의 무대는 순응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의 연주는 낭만주의 이전의 바흐로 돌아갔으며, 간소하고 무뚝뚝하고 피아노적이지 않은 톤을 구사함으로써 음악 사운드를 소비의 대상이 아닌 엄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온전히 현대적이다.”(181 페이지) 이것이야말로 말년성의 전형이 아닐지? 바흐와 굴드의 중요성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전모를 제대로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바흐와 굴드의 위대성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굴드에게 바흐의 음악은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부정과 무질서에 맞서는 데서 본질적인 힘을 과시하는 합리적 체계의 등장을 보여주는 원형 같은 장”이라는 사이드의 말은 바흐와 굴드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음악에 대한 사이드의 글은 전문가의 해설이 뒤따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다. 그런데 옮긴이는 굴드에 대해 “해석의 강박을 벗어던지고 연주 자체를 작곡 행위로 승화시킨 예술가”로 규정한다. 짧고도 핵심적인 글이 아닐 수 없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여러 모로 가장 비중있게 다루어진 사람은 글렌 굴드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50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한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다른 책들을 찾아 읽는다면 사이드의 주장이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쓸쓸함, 고독, 무기력 등이 아닌 저항, 긴장, 갈등 등으로 말년을 전혀 새롭게 규정한 사이드의 이론을 현실에서 발견해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싶다. 비평전문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 2008년 가을호가 '한국문학과 말년(lateness)의 양식'이라는 특집에서 말년에 대한 다른 해석들을 내놓았는데 어느 모로 보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의 영향을 짐작케 하는 기획으로 보인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2008년 1월 출간되었다.) '한국문학과 말년(lateness)의 양식' 중 황국명 인제대 교수가 '한국소설의 말년에 관한 사유'라는 글 가운데 한승원편이 내게는 압권으로 다가온다. “한승원은 '농현(弄絃)같은 시간'을 이야기한다. 두 선을 동시에 뜯어 화음을 내는 대신 한 현을 뜯고 흔들면서 한 소리로 하여금 그 위와 아래 혹은 양옆으로 넘쳐나게 하는 농현처럼 갓난아기 속에 자기를 낳아준 아비 어미가 있고, 그 갓난아기 속에 장차의 아비 어미가 있는 것이다. 한승원에게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는 상호 유대하고 역설적으로 공존한다. 죽음 역시 우주적 질서라는 더 높은 차원으로의 복귀”라는 것이다. 말년의 양식으로부터 뽑아낸 의미있는 독서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런 독서를 해낼 수 있을지 자문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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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장호연 마티/2008.1.25. sanbaram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우리에게 탈식민주의 이론을 주장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본업은 비교문학을 전공한 영문학 교수이며, 일급 문학 비평가이자 음악 비평가로도 유명하다. <세계, 텍스트, 비평가>로 르네 웰렉 상을 받았다. 저서로 <문화와 제국주의>,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그의 유작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모든 양식은 일차적으로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 혹은 역사, 사회, 선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미적 작품은 독특한 개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등장한 시대의 일부다. 때로는 시대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역시 그 일부이다. “이것은 그저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시기가 일치한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수사학 혹은 형식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는, 낭만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세속적인 환경에서 등장한 베토벤이나 바그너와 달리 자신의 음악에서 궁정과 교회의 세계에 더욱 가까운 양식을 선보였다.(p.193)” 이와 같이 양식은 예술가들이 산 시대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말년의 양식은 현재 속에 거주하지만 묘하게 현재에서 벗어나 있다. 말년의 양식은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죽음은 굴절된 양태로 나타난다. 말년성이라는 주제와 양식이 우리에게 죽음을 계속 생각나게 할 때가 많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이론적 길잡이로 삼아 R.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장 주네, 남페두사, 비스콘티, 글렌 굴드, 카바피, 브리스톤의 작품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국적과 표현양식이 다양한데도 사이드는 이들 모두를 말년성이라는 개념 하나로 풀어낸다. 이들 중에는 말년의 특징을 보인 작품을 하나만 남긴 사람도 있고, 아예 삶 자체가 말년의 양식인 예술가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이드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슈트라우스의 말년의 오페라는 보통 모더니즘 시대사조에 역행하는 음악적 퇴보로 여겨지지만, 이제 조성 음악의 전통을 나치 독일의 야만성으로부터 지켜낸 수호자가 된다. 철없는 사랑의 시험을 다룬 모차르트의 <코시 판 투테>는 도덕과 무관한 세계, 속죄와 변명이 존재하지 않는, 오직 감정의 조작만으로 견딜 수 있고 죽음으로서만 벗어날 수 있는 세계의 은유가 된다. 장 주네는 삶 자체를 무대로 삼아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려 한 인물로 설명되고, 굴렌 굴드는 해석의 강박을 벗어던지고 연주 자체를 작곡 행위로 승화시킨 예술가가 된다.(p.232)” 이과 같은 말을 통해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사이드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해설’에 나오는 다음의 작품들을 읽기를 권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장미의 기사>, <닉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카프리치오>, 모차르트<코시 판 투테>, 베토벤 <피델리오>, 벤저민 브리튼<피터 그라임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표범>, 토마스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장 주네<병풍>, <사랑의 포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