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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린이집 교사입니다. 교사라기 보단 주로 영아기의 아이들을 담당하기 때문에 보육사라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어린 영혼들과 함께 지내온 지도 벌써 십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티 없이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은 제게 크나큰 행복이요, 신이 내게 내려주신 은총이라고 여기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고교졸업 후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 유아교육과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또 대학졸업 후 처음엔 내 직업에 대한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어린이집에 근무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 근무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쉬고 싶은 여느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 왔지요. 그렇다고 근무를 소홀히 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단지 그들을 내 가족으로 마음 깊이 받아들이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마음이 되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계기는 그저 안이한 태도로 근무하고 있던 어느 해 약간 특이해 보이는 아이가 입학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그 아이의 부모가 내색을 하지 않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아이의 행동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보다 특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의 위험 때문이었지요. 아이는 행동이 굼뜨고 유독 레고 장난감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러니 자연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다른 아이들이 뺏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늘 경계하곤 했지요. 자연히 다른 아이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래서 학부모 면담이 이루어졌습니다. 부모의 말에 따르면 아이가 약간 편집증적 증세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맞벌이 부부로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힘에 부치는 할머니 혼자 아이를 키워왔다고 하더군요. 할머니가 약간 거동이 불편해서 밖에 데리고 나가 아이와 함께 놀아줄 수 없었답니다. 단지 집에서 아이 뒤치다꺼리를 해주고 밥을 챙겨주고 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이는 자연히 저 혼자 노는데 익숙해졌답니다. 아주 심하지는 않지만 사회성이 결여된 소견이 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는 지능도 낮아 학습면에서 상당한 장애가 있었습니다. 전 처음에 참 귀찮은 일 생겼다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전 아이와 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는 지능이 낮아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굼뜨고 다른 아이와 잘 어울리지 못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것은 성장환경의 문제가 크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애처로운 생각도 들고 이상하리만치 아이에게 마음이 쓰여 자주 아이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보다 접근하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아침 일찍 그 부모가 트럭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오면 제가 직접 나가 아이를 받아들였지요. 그리곤 꼭 한번 안아주었습니다. 처음엔 저도 어색하고 아이도 경계하는 투로 저를 약간 밀쳐내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전 아이에게 더욱 애정을 쏟았지요. 율동을 할 때엔 일부러 칭찬을 해서 시켜보기도 하고 야외 수업 때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감격할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집 부엌에서 장난을 치던 아이가 과도를 잘못 쥐어 손을 크게 다쳤습니다. 어린이집에 올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아이는 부득부득 어린이집에 가야한다고 우겼답니다. 부모가 하도 이상해서 물었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이쁜 선생님 만나야한다”고 했다는군요. 그 이쁜 선생님이란 바로 저를 두고 한 말이었고 부모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이 있었고 내 스스로도 어린이집 교사로서 뿌듯한 감정도 생겼습니다. 아이는 어느 정도 치료가 되자마자 다시 어린이집에 나타났습니다. 그땐 저를 꼭 안아주더군요. 그 이후엔 저만 귀찮을 정도로 저를 졸졸 따라 다닙니다. 꼭 제가 엄마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내게 직장 생활의 즐거움을 안겨준 최초의 아이였습니다. 이후 전 교사로서의 사명감보다는 엄마로서의 따뜻한 애정으로 아이들을 안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저의 첫 번째 피티였던 거지요.
두 번째는 바로 제가 엄마가 된 것입니다. 어린이집 근무 5년 후 결혼을 했고 결혼 첫 해 아이를 얻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서 낳아주신 엄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 낳자마자 눈물을 꽤 흘렸습니다. 이 때 진심으로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엄마의 자식 사랑이 다 똑같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좀 특별한 데가 있습니다. 제가 6살 때 한 살 위인 언니와 아래로 두 남동생을 남기고 아빠가 돌아가셨거든요. 시골에서 혼자 농사를 지으시며 4남매를 키워낸 그런 엄마에게 전 이제껏 바라기만 했거든요. 이제 내 배로 자식을 낳고 보니 엄마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지금 아들은 4학년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제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내가 나 아닌 어떤 존재를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지요. 그것은 내 생애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머리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보통 작은 어린이집에선 경력 있는 아줌마보다는 처녀 선생님을 더 선호합니다. 저 같은 아줌마들은 점점 설자리가 없어져 갑니다. 그런데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엄마의 경험이 있는 선생님이 훨씬 더 아이들에게 정답게 다가갑니다.
전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어린이집엘 갑니다. 내 사랑하는 자식들이 열명도 더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일반 가정에서 운영하는 작은 어린이집이지만 그들은 저를 누구보다 좋아합니다. 작은 어린이집이다 보니 식사부터 놀이까지 거의 저 혼자 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철이 바뀌는 시기에 맞게 아이들의 정서 순화를 위해서 온 방안을 아이들과 함께 새로 꾸밉니다. 점심 때는 아이들의 기호에 맞고 또 영양을 생각해서 최대한 정성껏 맛있는 음식도 손수 마련해 줍니다. 내 아들을 키우면서 또 내 아들을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내면서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내게 자식들을 맡겼을 그 분들을 생각하면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겐 내 아들과 또 다른 내 아들들이 내 마음의 피티입니다. 해맑은 미소를 보내고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안아주는 그들이 나를 변화시켰습니다. 나 혼자만의 욕심만으로 똘똘 뭉친 이기심 덩어리의 내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준 보배로운 존재이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들의 해맑은 미소가 그려집니다. 저에게 내일 또 만나자고 손짓을 하고 있네요. 이제 포근한 잠을 자며 꿈속 나라에서 나의 천사들과 신나게 놀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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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산을 정복했다거나, 큰 일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을 오인하고 단정지었던 세상 안에서 오히려 따뜻한 작은 빛처럼 사람들을 감쌌던 그의 이야기는 잔잔하지만, 힘이 있다. 말하는 것도 힘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더 힘든 그는 자칫 남들이 보기에는 평생 그저 도움만 받으며 사는 사람으로 보여지기 쉽다. 사람은 의식주가 충족되었다고 해서 살 수 없다.
피티와 그의 친구들의 진정한 관계맺기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고맙습니다. 피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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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티가 살아온 삶을 생각한다면, 내가 처한 환경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쩜 그렇게 해맑은 웃음과 긍정적인 자세, 삶의 희망을 갖고 살아올 수 있었는지 실로 대단한 느낌이 든다.
만일 내가 영화로 만든다면, [피티 이야기]라는 책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 같다. 주연 배우가 누가 될런지 과연 피티처럼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눈을 감으면 피티의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몸이 뒤틀리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제멋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중증 뇌성마비 였지만, 그 누구보다 천사같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았던 피티의 그 모습이......
1920년대 태어나자마자 백치라는 진단과 함께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는 아이라는 말에 좌절한 부모. 그러나 정성을 다해 돌보는 부모의 모습도 책 속에서 짧은 이야기로 표현되었지만, 나 역시 아이를 길러본 엄마로서 다양한 감정이 스친다. 그럼에도 결국 손을 놓고 정신병원이라는 곳에 맡겨야했던 피티의 부모. 그들의 나중 모습도 책을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평생을 정신병원과 요양소에서 보냈던 피티. 그저 어렸을 때 역시 인간이라기 보다는 시간에 맞춰 밥을 먹고 대소변을 처리해오던 피티였지만,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배우고 그들의 말에 반응을 하던 피티의 모습에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 태어났으면, 훨씬 좋은 환경 속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 당시 피티 뿐 아니라 수 많은 뇌성마비 환자들이 백치라는 진단을 받고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비참하게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아프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피티가 절대로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육체적으로 심히 부자유스러워 밖으로 나간 것은 손으로 꼽았고, 또 적절한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말하는 것 역시 소년이 되었을 때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하며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최선을 다해 산 그의 모습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피티의 모습은 정말이지 굉장하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고 피티를 가리켜 실패하거나 낙오자라고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할지라도 피티는 그래도 자신이 주어진 삶 속에서 행복한 찾아서 그렇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처지에 있다면 과연 그렇게 피티처럼 삶의 의미를 갖고 늘 기쁨으로 살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피티를 알게 되고 그를 진정으로 좋아하며 자신의 삶의 기쁨과 활력이 된 것처럼,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많은 사람들이 피티를 거쳐갔지만, 단지 몇 명의 사람들이 피티를 진정으로 사귀고 우정을 나누고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피티로 인해 그들의 삶 역시 늘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캘빈도 그렇고, 캐시도 오언도 마지막 피티를 지켜준 소년 트레버 역시 마찬가지이다. 피티가 그들을 만나서 누린 삶의 풍요로움보다 오히려 그들이 피티를 통해 정신적인 풍요를 누린 것이다.
캘빈과 함께 했던 소년과 청년 시절. 둘이 함께 카우보이 놀이를 했던 그 순간들과 나중에 트레버로 인해 재회를 하고 둘이 카우보이 놀이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이 또 한 번 뭉클해진다.
"고아 고아, 아구 고아." 이렇게 아주 좋다는 말을 하고, 또한 트레버를 만나게 되면서 집요하게 트레버에게 질문을 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의 마음을꿰뚫어보던 피티의 모습 속에서 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생각해볼 수 있었다.
피티도 그러한데... 난 내 삶 속에서 힘들다고 불평하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았다.
만일 내 주위에 피티가 있다면, 나 역시 찾아가서 친구가 되고 싶다.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친구.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과 참된 우정. 피티는 그의 삶에 있어서 그런 친구들을 만났다. 비록 이별의 아픈 순간이 있었지만 그 부족함을 채우는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났으며 사랑을 배우고 마지막엔 트레버라는 진정한 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니...
피티를 나중에 알게 된 트레버. 마지막까지 피티를 지켜준 트레버는 아마도 그의 삶이 굉장히 변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남을 배려하는 법,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 인생의 참된 가치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
아마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내 나이. 이제 적지 않은 삶을 살아온 지금 난 자꾸만 생각을 한다. 누군가에게 피티처럼 되어줄 수 있기를, 나로 인해 누군가가 삶의 희망을 갖고 사랑을 배우고 배려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늘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타인에 대해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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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보는 장애인의 시선을 그리 좋게 바라보지 않는다. 왜 안 그러겠는가?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 다니니 남의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 특히, 뇌성마비가 아닐까 싶다. 이런 아이를 볼때 엄마도 힘들고 식구들도 힘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를 이해하고 바라보면 그리 나쁘게는 보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간혹가다 한 두명쯤은 있을법한 일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는 내 작은아이의 입학식에도 봐왔으니 말이다. 그 당사자의 엄마는 얼마나 정성과 사랑으로 키웠을법한 일들이 그 아이의 행동에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가슴뭉클하게 만들어 주니 말이다.
내가 직접 엄마되고 부모가 된 입장에서 그 아이들의 편견과 오만함을 갖었던 일들을 장애인을 갖고 있지 않는 나에게 부끄러움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갖었던 행동들이 그 아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정도니.... 이런 행동들이 꼭 그 아이의 난폭한 문제아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내와 겸손, 용기를 배우고 상처와 분노를 치유하는 피티이야기처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과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치유하는 자연의 관계를 우리모두는 배워야 할 과제일 것이다. 뇌성마비가 뇌에 생긴 손상으로 인한 증상이 주로 임신했을 때나 출산할 때 또는 출산 직후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 조심했으니 말이다. 감기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 질병도 아니고 유전되지도 않는 것에 우리는 10개월동안 몸에 담고 항상 조심했으니....
1900년대 초반에만 해도 피티 같은 아이들이 잘못 진단을 받아 백치, 치우, 또는 우둔(과거에는 정신지체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해 실제로 이런 용어를 사용할 정도라니 우리는 놀라지 않을수 없다.) 으로 취급되곤 했다고 할 정도로... 지금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뇌성마비가 있는 사람들은 단지 신체 조건이 다를뿐 정상인으로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리 치료와 훈련으로 아주 생산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속에서 아기 피티에서부터 피티의 할아버지을 삶을 엿볼 수 있는 소설책 한권을 읽었다. 정신병원에서 요양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간호사와 의사선생님, 보조원들의 손을 피티할아버지에 닿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투덜거리고 불평만했던 내 몸과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짜증만 냈던 일에 부끄럽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피티처럼 몸은 불편하지 않지만 항상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행동했던 일들이 너무나 부끄럽기까지 한다. 남들은 뇌성마비만 봐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되지만, 우리 모두 다 언제까지나 피티 할아버지를 찾는 다는 말에 놀라웠다. 몸이 불편함도 모른체 평생을 사는 것에 온 힘으 다하며 사신 분이다. 우리는 할아버지한테서 그걸 배울 수 있다면 할아버지의 인생은 정말 아주, 아주 중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장애를 갖고 있는 부모라면 어둠 속에서 가슴 아파하며 조용히 있을 우리들을 가슴뭉클하게 만들어 주니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가기 시작하는 날까지 그래 산다는 게 중요한 거라는 것을 피티를 통해서 배워감을 일깨워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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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을 보며 자신이 온전한 몸을 가진것에 대해 감사해하고 값싼 위안을 얻는다. 또 장애인들을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으로 쉽게 규정하고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진 정신적 장애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정신이 황폐화되고 썩었다면 그거야말로 불쌍한 일임을 모르고있다. 이렇듯 우리들은 은연중에 장애인들에 대한 깊은 편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수 없고 남들에게 도움을 줄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특히 피티의 삶을 바라보면 더 분명하게 깨달을수 있다. 피티의 육체는 뇌성마비로 인해 온전치 않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의 밝은 웃음과 착한 마음씨 때문에 그의 주변 사람들이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뛰어난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것에 불평하고 끝없이 욕심부리며 탐닉하는 이들에 비해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다.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태어난 피티는 뇌성마비라는 큰 병에 걸렸다. 아직 뇌성마비라는 병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그 병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은 피티를 정신박약 이라는 진단을 내려 정신병원에 가둬버린다.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만으론 그를 치료시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티는 평생을 병원에서 보낸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기분이다. 더구나 온몸이 뒤틀리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피티에게 사람들은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모습은 같은 인간이지만 나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걸 아예 상상할수조차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피티는 절망하지 않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누구의 도움없이는 한발자국도 디딜수 없고 세상 밖으로 나갈수도 없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천적인 생각을 가지며 살았고 지금 주어지는 짧은 순간의 행복을 마음 깊이 고마워했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난 가끔 아주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린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손해 나는 일이 생기면 두고두고 마음에 품고 있다. 언제나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데, 피티의 모습을 보고있으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난 피티에 비해 더 많이 가졌고 감사해할 일이 많은데 그걸 깨닫지 못한채 스스로 불행한 선택을 했으니 말이다.
피티이야기를 읽고있으니 "엘리펀트맨" 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태어날때부터 기형적인 몸 때문에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했던 인물을 바탕으로한 실화소설 이었는데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신경섬유종증으로 인한 외형적인 기형은 그를 괴물로 보이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같은 인간이 아닌 저주받은 괴물로, 신기한 구경거리로 여겼다. 그렇게 엘리펀트맨은 생각할수도 없을만큼 끔찍한 처우를 받으며 살아갔지만 그 또한 피티처럼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뛰어난 감수성과 예술성을 지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피티 만큼 주변에서 응원해주고 사랑을 보내주는 사람이 없다는게 슬펐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불평을 한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고 자조섞인 말을 내뱉는다. 자신이 가진것에 만족해하고 건강한 삶을 꾸려갈수 있다는것에 감사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피티의 삶을 보며 많은것을 느꼈다. 비록 1회성으로 끝날 감동일수도 있겠고 곧 잊어버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을 읽고 덮은 순간까지도 이 여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피티를 비롯해 자신의 삶에 축복을 내릴수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존경받고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단 생각이 든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피티를 통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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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티의 일생을 엿보았다. 온통 뒤틀린 팔, 다리와 무표정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태어나 받게 된 백치라는 판정은 가족들에게나, 피티에게나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찍혀버린 것일까?
읽으며 참으로 혼란스럽다. 나는 이렇게 중증의 장애인을 본 적은 있지만 그들과 말을 섞어본 적은 없다. 전에 아이가 어려서 수영을 한 적이 있다. 함께 수영을 하는 아이중에 엄마가 뇌성마비인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엄마는 너무나 양호했다. 손이 약간 불편하고(아주 약간), 입이 약간 틀어져 말이 약간 어눌했지만 대화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였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에 지체 장애아가 있었다. 커다란 아이가 유모차를 타고 다녔다. 초점없는 눈, 입에서는 연신 침이 흘러 손수건을 대 놓은 모습이 생각난다. 여자 아이였는데...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엄마에게 어렵게 물어보았더니 시설에 보냈다고 하였다. 점점 커져가고... 말이 안 통하는 아이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엄마는 셋째를 임신한 듯 배가 불러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보냈을까? 싶기도 하였다.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과 더불어 그들에 대해 너무나 모르는게 사실이다. 나와 다른 모습, 사실 내가 피티를 봤더라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데서 오는 두려움말이다.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듯이 어색할 것 같다.
책의 내용중 트레버가 피티할아버지와 마트에 갔을 때 하는 얘기가 내 가슴에도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저희 아빠가요, 아름다운 겉모습은 가죽 한 꺼풀이지만 더러운은 뼛속까지 속속들이 스며 있다고 그랬어요."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며 읽어나간다. 읽으며 피티할아버지는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티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가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지만... 무엇을 그다지 한 일도 없지만 그는 늘 감격해 하고 고마워 한다. 캐시와 함께 몬태나 주립대 악단의 공연을 보았을 때도, 오언이 훨체어를 고쳐 주었을 때도, 트레버와 낚시를 갔을 때, 마트에 갔을 때, 영화관을 갔을 때도 그는 감사했다. 그의 그런 마음이 다른 사람들도 감흥시킨 것일까?
피티에게 초코렛을 처음주었던 에스테반이 그만두었을 때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비둘기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글을 선물해 준 조, 피티에게 처음 부끄러운 감정을 알게 하고, 금으로 만든, 반으로 나눈 하트 반쪽이 달려 있는 목걸이를 선물한 캐시, 피티에게 휠체어를 고쳐준 오언, 그들이 피티의 곁을 떠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다시 좋은 사람들이 와서 다시 피티의 곁을 지켜주었을 때는 감사하고 고마웠다.
보즈먼 요양소로 오면서 피티는 오랜 친구였던, 캘빈과 헤어지게 된다.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 친구를 보지 못하는 상실감으로 마음을 닫은 피티. 그에게 새로운 친구가 다가온다. 트레버는 정말 대단한 아이다. 정말 이런 친구가 있을까? 피티를 위해 휠체어를 바꾸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고.. 피티의 기사를 신문에 내고, 우연히 오언을 다시 만나고... 그토록 그리워한 친구 캘빈을 수소문해 피티와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죽음의 문앞, 트레버는 피티를 자신의 할아버지로 인정한다. 그렇게 둘은 가족이 된다.
머리속은 복잡하고... 마음속은 미묘하다. 어떤 필설로도 이 감동을 전할 수 없을 것 같다. 중증 장애인, 피티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가슴 뭉클한 무엇, 그것이 무엇일까?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하지만 피티 이야기를 통해 내게 다른 삶으로, 감정적으로 좀 더 풍요로운 삶으로 바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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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초등 5학년 무렵 제가 살고 있는 근처에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장애우들이 함께 사는 곳이 있었어요. 꽤 중증이었던 것 같고요. 그 이전에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은 근처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기도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좀더 따뜻한 말을 하고, 더 잘해줄 것을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하기야 초등학교 2학년이었으니까 그리 철이 든 나이가 아니었겠지만요. 그래서인지 장애우들을 볼 때는 어릴 때부터 보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놀라거나 피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또 가족과 함께 사는 것에만 안주하고 남을 돕는다던가 하는 일에 소홀해지는 것 같아 [피티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이에게 이런 삶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또 아이와 함께 장애우에 대해서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마련해보려고 하지요. 뇌성마비. 하면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계세요. 가스펠 송 작사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이지요. 그 분의 노래가 정말 아름답고 지금도 제가 흥얼거리는 가스펠 중 하나거든요. 고등학생 때 송명희 시인을 직접 본 적이 있고, 텔레비전에서도 보았는데 그분의 미소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피티 이야기를 읽으면서 피티의 미소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해봅니다.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고 늘 긍정적으로 살았던 피티. 태어나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전혀 없고 그저 기계적으로 우유를 먹고 배설을 하면 치워주고, 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침대에서 그렇게 살았지만, 그럼에도 피티의 미소, 긍정적인 생각, 남을 배려하는 마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절대 마음이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던 그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이후 역시 그렇지만 바른 정신을 갖고 자라는 피티의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았지만 - 물론 부모가 기관에 맡기기 전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 말을 알아듣고, 의사소통을 위해서 노력을 해서 신체를 움직여 반응을 보이고 최대한 연습해서 말을 배웠던 피티의 모습은 인간승리네요. 백치라고, 전혀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진단을 할 수 있는지 너무나 기가 막혔어요. 정신박약아는 전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지 지금부터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도 사람들이 무지했다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놀랐어요. 피티의 곁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 특별했던 몇 사람들. 그냥 피티를 기계적으로 돌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피티와 가까워지고 피티와 친구가 된 사람들은 모두 피티에게 반하였지요. 피티 역시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삶의 즐거움을 조금씩 알게 되었으며, 피티의 친구들 역시 피티로 인해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을 또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히려 피티로 인해 더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할까요? 작가는 이 책에서 크게 1,2부로 나눠 피티의 출생과 정신병원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요양소에 가게 되고 노인이 된 후의 삶에 대해 들려줍니다. 피티와 함께 했던 캘빈, 캐시, 오언 그리고 마지막 친구이자 진짜 가족처럼 되었던 소년 트레버와 만남까지 얼마나 감동적인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피티의 임종 직전 트레버가 피티에게 하는 말을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제 할아버지가 돼 주실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식구가 없고, 저도...... 형제도 누이도 없고, 할아보지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부모님은 늘 바쁘시니까요." "서류에 그렇게 나와 있어야만 한식구인 건 아니잖아요. 여기에 있는 게 식구지." "식구는 친구하고는 달라요. 할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제 마음 속에서 우리 할아버지이실 거예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실 거라고요. 전 절대로 할아버지를 떠나지 않아요." 자신이 없어도 더 즐겁게 지내며 삶을 긍정적으로 살라고 트레버에게 말하는 피티 할아버지. 그리고 트레버의 할아버지란 말에 서로를 껴안았지요. 그리고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 속에서 피티 할아버지는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새로운 가족이 된 트레버와 피티. 그리고 트레버는 피티로 인해 자신의 부모님과 진정한 가족이 되었고, 멋진 친구들도 생기게 되었지요. 작가는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만일 피티가 지금 태어났더라면, 적절한 치료와 훈련,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해봤어요. 피티 이야기는 장애를 지닌 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네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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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로 온 몸이 뒤틀린 주인공 피티. 하지만 그 누구보다 더 마음이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삶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다른 질병 역시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불과 50년 100년 전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고, 나도 어릴 때 인천에서 하나뿐인 인큐베이터에 겨우 들어가서 살 수 있었다고 하니... - 이 말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에는 늘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피티의 출생. 1922년이니 1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는 뇌성마비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그저 몸 상태를 보며 [정신박약]이라는 진단을 받고 평생을 기관에서 살게 된 한 피티. 백치이기 때문에 교육도 필요없으며 감정도 없다고 하는 의사의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따뜻하고 사랑 많은 부모 로이와 세라 밑에서 태어났지만, 2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길러도 힘이 들고 지칠 뿐, 게다가 갖고 있었던 재산을 거의 다 소탕하고 약값에 병원비 등 청구서만 쌓여갔기에 결국은 정신병원으로 보내게 된다. 그 곳에서 그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최소한의 인격적인 대우도 받지 않고 오로지 침대에 누워서 살게 된 피티. 그러던 중 멕시코에서 온 젊은 에스테반을 만나게 되고, 에스테반이 주는 초콜릿에 반응을 보이며 점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만나게 되어 평생의 우정을 나누게 되는 이 책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캘빈을 만나게 된다. 캘빈으로 인해 피티는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캘빈은 피티가 쉽게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예스와 노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게 되고, 조금씩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티의 어눌한 발음을 알지 못하지만 캘빈은 그러한 피티의 말을 다 알아 듣는다. 캘빈을 만나기 전 늘 흘리는 음식물 때문에 밤이면 나타나게 된 생쥐들과 친구가 된 피티. 그 쥐들을 관찰하고 이름을 붙여주고, 그 생쥐들에게 먹이를 더 주기 위해 요령껏 음식물을 옷에 흘리는 피티. 그를 누가 정신박약[백치]라 할 수 있는지! 하지만 쥐똥으로 인해 늘상 피티가 잘 때면 쥐들이 오는 것을 알게 된 병원측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 쥐약을 놓기로 한다. 피티의 첫 친구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순간. 피티와 캘빈은 힘을 합쳐 더 이상 피티의 곁으로 생쥐들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데 성공을 한다. 그렇지만 소중한 첫 친구들을 잃게 되는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피티의 곁에는 캘빈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극복해나간다. 또 보조원인 조가 병원에 오게 되고 또 하나의 친구가 생기게 된다. 지금 태어났으면 그런 잘못된 진단을 받지도 않았을테고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받게 되었다면 아마도 피티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 물론 이 책이 픽션이지만 실제로 이런 인물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십대가 된 피티 역시 사춘기가 되고 사랑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간호사로 온 캐시에게 애정을 느끼는 피티. 캐시와 함께 바깥 세상을 경험한 피티의 모습도 굉장하다. 태어나서 보는 바깥 풍경이란 얼마나 경이로운지, 주어진 그 순간을 사랑하는 피티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캐시가 떠난 후 피티에게는 또 한 명의 친구가 생긴다. 병원으로 오게 된 또 다른 보조원 오언. 처음과 달리 피티와 캘빈의 모습과 그들의 행동에서 오언의 태도가 바뀌게 되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돌보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피티의 곁을 떠나가고, 캘빈과도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환경을 좀 더 편안해지고 더 이상 백치가 아니라 뇌성마비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때에는 이미 피티가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요양소에서의 피티는 더 이상 삶의 목표를 잃었다. 자신이 사랑한 조, 캐시, 캘빈, 오언 모두 떠나고, 상처입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피티에게 또 한 명의 멋진 친구이자 가족이 생기게 된다. 바로 8학년 학생인 트레버 래드. 아마 우리 나이로 치자면 중학교 2학년인 셈일 듯. 굳게 닫힌 마음을 다시 천천히 열게 되고, 트레버 역시 처음과 달리 점점 피티의 매력에 빠져든다. 누구보다 사랑이 많고 긍정적인 삶을 원하는 피티. 그렇게 육체적 장애가 있지만, 일평생을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던 피티는 절대로 남을 원망하지도 않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며 그 안에서 행복을 영위하는 모습에서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트레버와의 생의 마지막 행복한 순간. 그리고 그로 인해 캘빈과 오언을 다시 만나게 되고 기쁨의 재회를 한다. 단지 피티를 돌보고 친구가 되었던 사람으로 인해 피티만 행복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책 속에서도 말했듯이 누구나 피티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피티에게 반할 것이며, 피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피티의 모습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우정을 넘어 가족이 된 트레버와 피티.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트레버의 부모들도 진한 감동을 받는다.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남을 배려하는 피티의 마음. 트레버는 그 피티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더 희망을 갖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리라! 피티가 우리에게 주는 삶의 희망과 행복. 그리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장애는 절대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우리의 옆에 피티가 있다면, 만일 살아가면서 피티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큰 축복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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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고 있는 내내 A4용지를 옆에 두고 있었다.
네 등분으로 접어서 적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은 내 오산이다. 겨우 한번을 읽었을 뿐인데도 앞장에는 기억하고픈 문장으로 가득 차고 뒷면으로 이어진다.
피티Petey..pity?의 의미를 지닌 이름인가 라는 생각도 했었다. 이름에 간혹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를 위한 동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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