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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나, 훗날 노인이 되어 ‘결국 지고 만 걸까?’, 회한에 찬 눈으로 밤이 너무 길어져버린 하루를 견디는 내 또래의 노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소리칠 수 있을 만큼 생생한 <청춘소설>을 꼭 한 권 갖고 싶었다. <날라리 on the pink>의 작가 이명랑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춘소설, 그렇다 <날라리 on the pink>는 청춘소설이다. 소녀들의 십대, 소년들의 십대, 우리들의 십대를 그리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가 겪었던 이야기, 우리의 딸이 겪었던 이야기,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현재의 사회, 우리가 살아 가는 사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 왔다. 그것은 마치 괴물처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실지로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뭉쳐 거대한 하나가 되어 현재의 사회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신 세대, 386 세대, 현재의 세대까지, 쭈욱 이어져 오면서, 현재의 십대들을 양산해 냈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혀를 끌끌 차며 그들을 “쓰레기”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만든 것이다. 불안정한 십대들, 흔들리는 십대들이 사는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낸 세계다. 점점 발전해 가는 사회 이꼴 점점 더 심각하게 불안정한 십대들이다. 말하자면 나는 아직 현재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십대가 지난 지 5년이지만, 그 정도면 아직 현재의 불안정한 세계를 벗어난 지 얼마 안됐으니, 현재의 세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난 <날라리 on the pink>에서 나의 십대를 봤다. 그 속에는 현실과 사회와 아이들이 있었다. 현재의 모든 아이들. 그들은 불안정한 사회를 조금은 과격하지만 자신들의 방식으로 헤쳐 나가려 한다. 그 속에는 절망과 아픔과 상처가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다. 내가 그러했듯이, 다른 모든 십대들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바라건대, 나의 아이들은 좀 덜 아프고 덜 상처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현재의 세대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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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대다수의 고등학생들이 이럴까? 그들의 고민을 이런식으로 풀어낼까?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고등학생들의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들어있다고 해서 선택한 이 책. 인터넷 소설을 이것저것 따온 듯한 내용. 정말 실망스러웠다. 한때 정말 미친듯이 읽었던 팬픽에서 너무나도 자주 봤던 이야기들, 그리고 장면들이 반복 또 반복되었다. 책을 읽던 중 만난 친구에게 중간 중간 보여주자 마찬가지으 반응이었다. 아마도 인터넷소설이나 팬픽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상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의 삶이 이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모르는 그들의 세계가 정말 이럴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같은 생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소수의 십대가 하는 고민 아닐까?
극단적인 예를 들어 그들의 고민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시도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다른 십대들에게 미안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때라면 그 누구라도 해볼 만한 이런 고민을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로 대신하는 것이 작가는 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실업계 출신의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우는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조금 깨는 과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날라리)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저 머리 빈 정신없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그리고 그들과 같은 고민을 해오던 친구들의 모습도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이 책에서 얻은 편견을 깬 이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치게 일부의 생활을 전체의 고민과 함께 버무려버린 부분이 너무나도 아쉬운 소설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게다가 인터넷 소설, 만화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유치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것만큼은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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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명백한 폭력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설마 이 상태로 끝내진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는 말한다. 불온한 10대에게도 꿈이 있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그들에게 꿈을 꾸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가 문제라고. 상처받은 10대들의 이유있는 항변? 이라고? 작가는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삶을 자세하게 취재하여 그려냈다. 자, 이건 르포다. 르포였다면, 난 잘했다고 "짝짝짝" 박수를 쳐주었을 거다. 하지만 이건 르포가 아니다. 소설이다. 날라리들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그들을 이해하는 척 하면서, 자기가 문제제기한, "어른들 잣대로 재단하는 사회모순"의 우를 자기가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정아"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다른 날라리 아이들 연지, 은정, 서빈, 효은을 바라본다. 작가는 최대한 날라리들과 가까이 가려는 마음에서 "정아"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정아는 날라리인척 하지만, 순결하고 고귀한 학생이다. 연지, 은정, 서빈, 효은의 행각을 르포취재하듯 이야기하며, 자신은 슬쩍 빠져나간다. 정아는 그들과 달리 최악으로 달리지 않는다. 항상 선을 지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과연 정아의 생각인지, 작가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소설 중간중간에 정아의 입을 빌려 날라리 아이들을 "꿈이 없는" "생각도 없는" "내일이 없는" 아이라고 스스로 되뇌이게 만들며,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날라리들의 일탈행위를 주욱 보여준 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작가는 정아의 입을 빌려 말한다. "우리 무시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도 꿈이 있어요." 라는 식으로.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신나게 아이들을 밟아놓고, 무시해놓고, 마지막에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 말을 하려고 소설을 썼겠지만, 그건 조금도 잘 표현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는 밝히지 않고, 한없이 아이들이 일탈하는 장면만 보여주었으므로. 작가가 이 글을 쓰면서, 도중에 몇번 그만두려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랬으면 참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 뿐이다. 바른 성장소설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그들을 위해주는 척 하면서 그들을 까대는 대목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위선자. 나는 작가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생생한 <청춘소설> 한권을 갖고 싶었다고? 차라리 당신이 과거의 날라리였다거나, 그걸 경험으로 썼다면 "그래. 당신이 직접 경험한 거니 진짜 그랬겠지." 라고 넘겨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날라리들의 이야기인가? 왜 그들이 벌여놓은 일탈의 행동만을 보려고 하는가? 소설은 르포가 아니다. 생생한 취재는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걸 빌미로 날라리들에 대해 다 말했다는 작가는 참으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소설 인물에 대한 애정 없이, 단순히 "쯧쯧쯧. 너희를 못 도와줘서 어쩌니? 미안해"라는 심정으로 글을 썼겠지? 하지만, 당신의 그런 시각 자체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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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랑 소설은 참 질펀하다. 몹시 젊은 나이에 등단한 소설가가 어쩜 이렇게 젠체하지 않은 농익은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시장통에서 자랐다는 이 작가의 이력 때문에 난 처음부터 이 사람이 좋았다. 나랑 나이차이도 한살 밖에 나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시장에서 자랐다. 옆집 아줌마가 아저씨한테 사흘걸러 한 번씩 매를 맞으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 그 집 아들이 친구들과 패싸움을 하는 모습을 실시간 중계로 보며 자랐다. 겨우 네살에서 일곱살까지 3년을 살았을 뿐인데도 그 때 내가 본 장면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선명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그 때 내가 본 것들을 꼭 쓰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명랑의 글을 보면 참 반가웠다. 마치 내가 본 사람들을 대신 써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앞부분 서두를 보며 또 그렇고 그런 청소년 소설 중 하나인 줄 알았다. 온갖 아픔을 갖고 있는 깊이있는 날라리 청소년. 그들의 슬픔을 몰라주는 세상. 비정한 세상 속에 몸부림치는 가엾은 아이들. 뭐 그런 얘기들이 하품나게 등장하는 그런 소설 말이다. 난 그런 소설을 보면 작가들에게 그 아이들을 한 번 만나보고 썼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고통도 깊이도 없는 아이들, 잔인한 아이들, 알고나면 허무할 만큼 겁쟁이고 속이 없는 아이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선 무릎을 꿇었다. 이건 진짜구나. 진짜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이구나. 궁금했다. 어떻게 했을까? 길거리에 지나가는 그 아이들을 무작정 따라갔을까? 쪽방촌에서 살아봤을까? 모여서 폭주를 뛰는 아이들 오토바이 뒤에라도 타보고 썼을까? 이 책에는 우리가 아는 밑바닥 청소년의 문제가 날 것 그대로 다 나온다. 인터넷을 통한 원조교제, 집단 폭행, 폭주족, 가출, 음주, 가족강간을 당하는 아이.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야 넘쳐나는 인터넷 쓰레기 뉴스만 클릭해봐도 10분이면 다 볼 수 있는 것들이니까. 놀라운 것은 이런 이야기들을 이 작가가 이름처럼 시종일관 명랑하게 썼다는 것이다. 왜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웃고 있는건가. 책을 다 읽고 돌아보니 그 이유는 여기 나오는 아이들이 명랑(!) 하기 때문이었다. 학생부에 가서 머리를 쳐박고 있어도 눈만 뜨면 벌 받느라 쓰레기 줍고 껌떼고 있어도 그들은 명랑하다. 알 수 없는 희망의 기운이 서려있다. 엉망진창 개판으로 열일곱 청춘을 얼룩지게 만들어버린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듯했다. "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갈 수 있어." 겁주는 것 말고, 협박하는 것 말고, 그렇게 하면 니 인생도 끝이라는 선고 말고, 어른들이 해야 할 것은 진짜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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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다고 놀리지 마라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고." 그래, 이 노래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승철의 '소녀시대'야. 최근엔 소녀시대라는 그룹이 리메이크하기도 했지. 근데 이 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적 있니? 요즘 어린아이들이 과연 가사 속 주인공처럼 저렇게 순수하고 순진할까? 내 대답은 절대 아니올시다야.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건 겪어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지. 고딩보다는 중딩이 무섭고 중딩보다 초딩이 더 무개념인 이 세상 속에서 어쩌면 그들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애초부터 힘든 일인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가 그 나이일 때를 생각해봐. 우리 그땐 어른들이 너무도 우리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며 투정을 늘어놓고 나는 이미 다 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니?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는 너무나 아까운 추억을 놓아버린 걸 거야. 난 우연히 우리 시절에도 있었던 소위 날라리라고 불리던 아이들을 만났어. 바로 [날라리 on the Pink]라는 책을 통한 만남이었지.
갓 고등학교에 올라온 아이들이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 조금은 비뚤어지고 그릇된 방향이지만 나름대로의 소신과 생각을 갖고 있는 아이들의 속사정을 들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상업 고등학교의 학생이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문제아가 되기까지 그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더라고. 한 1년 정도? 근데 생각해보니 애초부터 그 아이들을 문제아의 틀에 가둔 건 다름 아닌 우리들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거야. 15,16의 나이에 입시를 치르게 하고 인문계와 실업계라는 두 갈래 길을 선택하라니. 조금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가고 싶은 학교를 못 간다니 조금 황당하잖아. 무슨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부터 말이야. 그런 사회적 틀 속에서 한 번 분류된 아이들이 탈선의 길로 쉽사리 빠지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이들은 처음엔 자기 학교 옆의 여대에서 담배를 빨거나 몰려다니며 소주나 홀짝이는 정도의 탈선을 일삼았어. 그 정도는 솔직히 그리 심각하다고 보이지가 않았지. 너도 나도 학교 다닐 때 다 한 번쯤 해본 일이잖아. 그치? 하지만 아이들의 수위가 점점 심해지는 거야. 다 같이 가출을 해서 거리로 나가고 남자아이들의 방에 얹혀 지내며 몸을 주고 마음엔 상처를 입고 결국은 학교로 다시 끌려와 문제가 시작되었던 그 곳에 다시 앉아 있더라고.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이야기 속 아이들이 골이 비었다느니 미친x라느니 욕하는 사람들 분명 있었을 텐데. 나는 정말이지 마음이 아프더라고. 누구는 이 소설을 읽고 유쾌하고 재미나 다더라. 근데 나는 있지. 이 소설 재미있지가 않았어. 나는 나름 심각했다는 말이지. 아이들이 받았을 상처와 그들도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단지 좀 지나친 방황을 했을 뿐)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걸 우리가 좀 알아주었으면 했어.
싸움의 기술을 알려주는 동아리에서 교복을 입고 기술을 익히며 학교 선생님이 자신들을 보러 와주길 바랬던 그 아이들처럼 어쩌면 지금도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길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서슬 시퍼런 눈과 걸레를 문 듯 걸게 내뱉는 말을 자신의 방어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아이들을 돌아왔지만 마음의 상처와 처녀성을 잃었다는 무거운 생각은 쉽사리 사리질 것 같지가 않았어. 그런데도 심각하기보다는 가볍고 유쾌해 보이는 그 아이들이 나는 정말이지 신기해서 100% 이해하기는 힘들더라.
친구야, 우리가 보냈던 질풍노도의 역동적이었던 어린 시절은 기억하니?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위협하듯 말을 내뱉고 삥을 뜯지는 않았어도 선생을 욕해보거나 한 번쯤 가출을 꿈꾼 적은 있었잖아. (뭐 가출까지 해보았다면 나보다 한 수 위겠지만.^^) 이 이야기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야. 부디 꼼꼼하게 읽고 우리의 그 시절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더불어 요즘같이 심각한 청소년 문제의 사회에 대한 적절한 비판도 잊지 말고 말이야. 겪어봤기에 더욱 이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십대시절, 방황하며 거리로 나갔던 우리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 아이들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 궁금해지는 밤이다. 그 아이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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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눈에 띄었다. 날라리가 들어가는 제목이라니 왠지 발랄한데 거기에다 핑크란다. 뭔가 유쾌하고 신나는 이야기들이 가득할 것만 같은 제목이다. 작가의 이름도 책제목과 잘어울리는 이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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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 장마철이었다. 나는 비를 피해 우리 집 맞은편 지붕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학생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그 사람을 학생으로 인식한 이유는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복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어느 중년 여성쯤으로 여겼으리라.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양새하며 능숙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 그리고 많이 고단해 보이는 얼굴 표정까지, 어느 한군데 학생으로 보이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쩍 보고 지나쳤다면 피곤함에 지친 어느 아줌마가 잠시 비를 피하고 있는 것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어린 여학생에게서 어떻게 저런 모습,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는 걸까....?
나는 가끔 내가 이유 없는 선입관으로 색안경을 끼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그 중 하나는 담배를 피우고 가출을 하는 학생들, 소위 문제아에 대한 선입관이다. 나는 그 아이들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까지 스스로를 내몰아선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늘 우울한 이유가 있고, 오늘 힘든 이유가 있고, 오늘 즐거운 이유가 있듯이 그 아이들에게도 아이들만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고통을 간직하고 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선입관이 깨졌을 때,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우연히 고등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가출 경험이 있는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이들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근거 없는 생각이 언제부터 머리에 뿌리내렸는지 지금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아이는 너무나 천진난만했다. 너무나 예뻤다. 정말 16살 소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기성세대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10대 소녀들이다. 난생 처음 듣는 단어를 사용하는 그들, 학생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저러지 않았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만든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꿈도 없는, 아무런 대책 없어 보이지만 그들 스스로 상처와 아픔을 딛고 미래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미처 배울 기회를 갖기도 전에 세상은 우리를 금 밖으로 내몰았지만 봐! 우린 이렇게 실수와 상처로 얼룩진 계단을 밝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 포기하지 않아! (p222-223)
이명랑 작가가 표현한 10대 소녀들의 모습은 현재 그들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처럼 고통과 실패의 경험이 인간의 인격적 성장을 도와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감당할 만큼의 고통과 실패의 몫을 겪게 하여 주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의무가 아닐까.
'날라리'라고 칭하여 지는 그들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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