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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누가 말했는지 굳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간에, 유명한 어구가 하나 있다. 젊었을 적에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는 자는 바보이며, 나이가 들어서도 공산주의자로 남아있는다면 그는 더 바보라는 말. 내가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이 아마 중학교 1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로 유명한 이원복이 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룬 만화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동안 이원복이 보여 왔던 나름의 사상적 행로(?)를 살펴보면, 그가 그 만화책에 굳이 그 말을 인용했던 의도가 짐작이 간다.
그때와는 또 달리, 지금 한국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은 이제 마녀사냥을 위한 ‘페인트’의 역할조차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전히 ‘빨갱이’라는 말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되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옹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좌파이든 좌파를 공격하는 극우이든 간에, 이제 좌파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행이 지나버린 말이 되어버렸다. 좌파하면 두려움에 떨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사상 논쟁 지겹지도 않냐’라는 말이 쿨하게 다가오는 시절이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쿨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추억’으로 상기하기도 한다. 그 중 일부는 경험이 부재한 추억 혹은 낭만인 경우도 있다(나를 포함해서). 좌파만이 아니다. ‘계급’이라는 단어조차 이제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단어가 된 것이 현실이다.
#2. 저자의 서문을 읽는 순간,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1984년 봄, ‘광부파업을 둘러싼 대중의 잔인한 분위기’에 아찔함을 느끼면서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꼈다는 말이 특히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어떠한 비장감도 느껴졌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이 책은 묘비명이 아니며 지난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몸짓도 아니다. 이 책은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들이 잘못 전달될 때일수록 역사가 중요하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망각에 맞선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은 요즘 글쟁이들의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의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1900년대 동안 새로운 기억상실증들로 인해 몇 가지 없어서는 안 될 역사가 지워져버렸다.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분명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가 서구 유럽의 좌파에게 바치는 ‘비판적’ 헌사다. 여기서 ‘비판적’이라는 말을 굳이 앞세운 것은, 그가 곳곳에서 낭만적인 시선을 과감히 거두어버리고 쓴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곳곳에서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한 기존 좌파들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특히 젠더의 문제에 민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점은 오늘까지 유요한 문제이다. ‘이 사람, 젠더 문제에 너무 민감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단 몇 초라도 들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구태의연한 말을 되뇔 필요가 있다. ‘세상의 반은 여자다’. 그리고 그 여자의 수는 ‘노동자’의 수보다 많다. 저자의 지적대로, ‘어떤 식으로든 여성들은 기다릴 것을 요구받았다’.
노동자들이 조직화된 정치에 무관심해 보였더라도,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삶에 대한 생각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종종 ‘개인적인’ 욕망의 경제에 갇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을 어떤 식으로 자유롭게 해방시킬 것인지가 좌파의 문화정치가 직면한 문제였다.
특히 여성, 인종, 성적소수자 등의 문제에 비하여 생산수단의 유무로 판단되는 ‘계급’의 문제는 그 불명확성과 비가시성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명확히 드러나는 인종이나 국적에 비해 계급은 ‘실재하지만 테두리 선이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3. 좌파가 당면한 구체적 문제에 다다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행동상의 타협은 위험하지 않지만 강령상의 타협은 위험하다’라는 말은 명확한 원칙이기는 하나 적용하기에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부르주아 혹은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을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인상적인 성장을 이룩했음에도 야당으로 고정되어 계속 외부에 존재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부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연합을 통해서만, 즉 혁명의 목표를 수정하거나 유예하는 제한된 강령을 공언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이 책의 중간 부분, 그러니까 독일과 이탈리아의 두 사례가 바로 그 증거다. 아주 조금의 성과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강령은 차후에 다가올 미래로 넘겨둘 수 있다는 생각은 독일의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원칙만을 부르짖으며 그 원칙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의회나 행정상의 문제를 도외시하면 이탈리아의 사례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여성의 참정권 등 젠더에 관련된 사항들도 사실 생각해보면 ‘전략적’으로 접근된 경우라고 봐야할 것이다.
굉장히 슬픈 일인데, 우리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믿음 같은 것이 적어요. 그래서 만날 '우리 현실에서 이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생각이 지배해요. 개혁이라는 것이 진보의 기초적인 부분과 겹치기도 하지만, 개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를 좀더 합리화하는 데 있죠. 상상력이 없으니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죠. 개혁이 갖는 소박하고 진보적인 경향에 너무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어딘데'하면서. 그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착함 때문에 된통 작살이 나는 거죠. 누가 어떤 놈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너무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제 진보고 개혁이고 뭐고 싫고 무슨 사회, 이념도 다 싫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이야. 이명박이 제일이야"하는 식으로 가는거죠. 이명박은 디지털 시대를 토목 건설로 해결하려는 몽상가인데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이 가장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죠.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반동인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한 셈이죠. 개혁의 목적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니까요.
- 김규항, 지승호와의 인터뷰 중,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시대의 창, 2007.
그것은 참여정부 최대 과오 중의 하나였고, 그 과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하여 개선의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를 비판하는 것이(특히나 좌파의 입장에서는) 그의 자살로 인하여 더욱 부담이 가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이 그를 죽였다’는 노사모 출신 배우의 말은, 그 격앙된 상태를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좀 격앙된 태도로 본문에 인용된 알퐁스 메르앵의 말(246쪽)을 고쳐서 받아치고 싶은 심정이다.
“개혁 세력들은 자신들의 근거 없는 자존심을 위하여 ‘가항력적’인 파도에 휩쓸려버렸고, 수구우파들이 우리를 쏘게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들 스스로 우리를 쏘고 싶어 한 것이다.”
지금 사상으로는 도저히 규정이 불가능한 괴물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판해야하는 기준을 흐려야 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대통령 스스로가 ‘좌파 신자유주의’와 같은 웃기지도 않은 유행어를 날리지도 않을 것이며, 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실패 이후 민주노동당에게 대연정을 위한 손을 내미는 슬랩스틱 에드립을 보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유행어와 슬랩스틱 에드립은, 결과적으로 희극이 아닌 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블로그를 하다가 발견한 다음과 같은 답글을 보라.
*** (답글) 2009/07/26 21:27 우리같은 국민들은 미디어법 이런거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단지 수구골통이라는 조중동, 수구진보라는 한겨레, 경향...독과점 지상파 3사. 이들 언론이 이념을 떠나 진정 국민들 편에 서서 언론의 진정한 역할을 보여줄때 이념 따지지 않고 손뼉치고 이들을 믿어 줄겁니다.
글쎄. ‘언론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이고 ‘국민’은 또 누구인가. ‘이념을 떠나 진정 국민들 편에 서’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자신이 누구보다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이 실체가 없는 몽상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념이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면서도 이념하면 도리질부터 치는 이 현상의 타개는, ‘커밍아웃’과 ‘충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추신. ‘미완의 기획’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더 레프트』는, 저자가 ‘이 책은 단연코 묘비명이 아니다’라고 강조함에도 ‘실패의 역사’라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지우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공산주의는 소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교조주의와 그 교조주의를 악용하고 일국사회주의라는 논리로 교묘히 포장한 스탈린에 의하여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가 결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사회민주주의 진영은 역사적 굴곡 속에서 연대와 의회를 강조하다가 결국은 ‘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말 자체를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루어낸 ‘개혁적’ 성격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셜플랜에 의지하는 노동당’이라는 기괴한 이미지는 결국 부시의 푸들이 되어버린 노동당 당수까지 배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협력’과 ‘연대’의 범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언어의 정치’에 대해 심각하게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천재적인 솜씨였다. 사람들이 돌무더기로 바리케이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군사적인 면에서 보자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바로 그 일을 해야 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바리케이트의 이미지는 1830년과 1848년, 파리코뮌 등 민중봉기의 모든 영웅적인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 바리케이트는 상징이며, 왕과 반동의 군대에 대항하는 빈민과 노동자들의 방어선이다. - 1968년 당시를 묘사한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조직의 앙리 웨버의 말.
그러나 영화관과 댄스홀의 야단법석에서부터 관람스포츠, 스타시스템, 광고 및 패션 등에 이르는 새롭게 단장한 ‘문화산업’의 장치는 1920년대에 민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미처 채워주지 않은 일상생활이라는 인간적 공간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낯설지 않은 상황은 더욱 심각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노동운동의 하부구조가 파시즘에 의해 분쇄되자 이러한 사적인 오락의 영역이 파시스트 국가의 가장 성공적인 개입 장소가 되었다. 파시즘은 반민주적인 억압의 도구이자 테러의 체제였을 뿐만 아니라 (분명 둘 다이긴 했지만) 좌파가 스스로 무시해버린 심리적 욕구와 유토피아적 갈망을 동력으로 삼았다.
벌써 4년 정도 지난 일이지만, 조금은 급진적(적어도 한국에서는)인 좌파 소그룹의 회의에서 좌절감만 얻어 나왔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언어와 일상의 정치가 실존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협’ 혹은 ‘수정주의’라는 비난이 얼마나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물론 주요 강령을 망각한 타협과 변화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강령’ 그 자체에 올인하는 것 또한 또 다른 변질을 양산해낼 가능성이 크다. 비록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복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롤모델로 꼽히는 스웨덴의 예를 보라.
1928년부터 당 의장을 지내면서 1932년부터 총리로 재직한 페르 알빈 한손이 1928년에 고안해낸 ‘국민의 집People's Home'이라는 아이디어는 위계와 특권의 제거에 상호성의 윤리를 의미했다.
"모름지기 좋은 집이란 평등과 배려, 협력과 도움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이것을 거대한 국민과 시민의 집에 적용하면, 오늘날 특권층과 소외계층, 지배하는 자와 예속된 자, 부자와 빈자, 배부른 자와 배곯는 자, 약탈자와 피해자로 시민을 가르는 사회 ‧ 경제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사회정의의 이상을 노동계급의 우위라는 분열적인 생산주의적 수사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또 대다수 스웨덴인들이 가진 농촌과의 연계를 환기시켰다.
얼마 전, 내가 가입되어 있는 모 당의 지역 모임을 알리는 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그 메일 내용 때문에 당 게시판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당원 모임을 즐겁고 부드럽게 하자는 측면에서 ‘카드게임’을 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카드게임을 하는 것은 취소되었지만, 그리고 나 자신도 카드게임은 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도에 대해서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 당원 가족들이 함께하는 야유회 등도 열리고, 매 달마다 지역 당원들의 모임이 있다. 사실 내 성격상 그런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계속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다. 일상에서의 정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나 자신부터 일상에서 정치를 배제시키고 있고, 그 배제를 통해 다시 정치를 다루는 언어들을 기존의 프레임 속에서 꺼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봐야 아는 사람 몇 안 되는 학교 동창 모임은 하나도 어색해하지 않으면서(뭐, 그닥 좋아하지 않기는 한다), 왜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당원 모임은 부담스러워 해야 하는 걸까? 언어의 족쇄를 푸는 것뿐만 아니라, 그 족쇄를 다르게 채워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 여기 실례를 하나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발전론은 예외입니다. 세계 규모로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나타났던 그 순간이 수많은 학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습니다.
-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2.
세계1차대전 전후에 보였던 전환들(사회주의 -> 애국적 민족주의로 인한 국제적 사회주의 연합의 붕괴 -> 전쟁 말기~전후 대중들의 사회주의적 요구)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이 부분은 나를 조금은 절망하게 만든 부분이었다. 전쟁 초기 불었던 애국주의 열풍이 엘리트만의 것인가? 오히려 엘리트들은 대중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전쟁 말기의 ‘사회주의적 요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배가 고파야 움직이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인지상정이 ‘강령’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연대’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 사족 아마도, 내 평생 읽게 될 책 중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다(적어도 단권으로 치자면). 전체 페이지는 1000페이지가 넘고, 참고문헌 정리만 해도 100페이지를 육박한다. 그만큼 이 저서는 역사학자 제프 일리의 '학문적 열정'을 넘어서는 저작이다. 그에게는 지식인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소명의식이 느껴진다.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고 있는데도, 열정과 애정이 확실히 느껴지는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며 또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다. 마치 사전을 보는 것처럼, 서재에 꽂아두고 틈틈히 찾아봐도 좋을 책(꽂아두면 뽀다구도 난다ㅋㅋ). 페이지가 부담은 되지만 사실 글자 크기가 그리 작은 편은 아니라 페이지 넘기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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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내용이 방대해서 단숨에 읽기는 어려운 책이지만 곁에 두고 틈틈이, 한 구절씩 새기며 읽기에 좋은 책입니다. 아마 몇 번쯤 읽는다면 더욱 좋겠지요. 세미나용으로도 좋을 듯 하구요. 인상적인 구절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1848년에 마르크스는 징후를 근본적으로 잘못 읽었다. 훗날 엥겔스가 씁쓸하게 토로한 것처럼, 그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단말마의 고통이라고 오인한 것은 실은 탄생의 진통이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연구에 몰두했다. 마르크스는 이미 착취의 경제를 변화의 원동력으로 간주하면서 억압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새로운 혁명의 추진력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혁명적 음모가들의 소규모 집단이 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생활의 조건에 따라 규정된 사회계급들이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1848년 이후 마르크스는 기초를 이루는 이론적 탐구에 다시 몰두했고 이런 탐구는 결국 <자본>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는 패배 속에서 예전의 블랑키주의의 유혹에 빠진 공산주의자동맹과 정치적으로 단절했다. 동맹 중앙위원회의 중요한 회의에서 마르크스가 역설한 것처럼, 혁명은 의지로 부리는 묘기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숙되는 여러 조건의 소산이었다. 이제 노동자들은 기나긴 정치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현실의 조건들을 변화시키고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노동자들은 15년, 20년, 아니 50년의 내전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력들이 부르주아적 체제 내부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최대한 발전하는 이러한 전반적 번영이 지속되는 동안은 진정한 혁명은 언급조차 할 수 없다. 진정한 혁명은 이 두 요인, 즉 현대적인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형태가 서로 모순에 빠지는 시기에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위기만큼이나 확실하다.”
창조적 실용주의가 세계적인 흐름이라고는 해도 이 책에서 우리는 여전히 많은 시사점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좌우파의 이념을 넘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유럽 좌파의 지난 150년 역사가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더 이상의 양극화를 지양하고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보다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대한민국을 꿈꿔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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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과연 진보시대를 경험했던 적이 있는가? 보수세력은 김대중 ·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 몰아붙였다. '잃어버린 10년'으로 이름붙인 김대중 · 노무현 정부가 정말 좌파정권인가? 두 정부를 추진한 경제정책을 살펴보면 '좌파'라 명명한 것은 실로 좌파를 모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정부는 자유주의정부에 가까웠고, 개혁주의를 더 시행했을 뿐이다. 이제 개혁주의 정부가 끝나고 보수정권이 들어섰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지방의회뿐만 아니라 국회까지 보수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보수주의 시대에 '좌파'를 떠올린다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양성 사회다. 사상과 이념이 획일화된 민주주의는 진보할 수 없다. 정치지형이 보수주의로 획일화될 때 사회진영과 시민진영은 더욱 더 보수와 반대되는 좌파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이 진보진영 몰락과 좌파종식을 외치는 이 때에 제프 일리가 쓴 <The left>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준다. 방대한 분량(1010쪽), 엄청난 책값(50,000원)이라는 무게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특히 인민, 사회학이 힘을 잃어버린 이 때 단순하고, 표피적인 책 읽기가 유행 하는 이 때 이런 두깨와 책값은 1980년대 치열한 사상 싸움과 정치투쟁을 경험했던 이들도 접하기 버거운 책이다. 하지만 진정 민주주의와 인민주권, 다양성이 지배하는 사회구성을 원한다면 긴 호흡을 가지고 <The left>를 한 장씩 음미하면서 읽어보자. 이 책을 통해 1848년 혁명 실패 이후부터 2003년에 이르는 유럽 좌파를 만남으로써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에릭 홉스봄 <The left>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의 학식과 분석을 1968년 학생 급진파의 참여의식과 결합하면서 제프 일리는 민주주의 희망 선언이자, 150년 동안 민주주의에 현실성을 부여해온 좌파운동을 상대로 기나긴 애도의 작별인사를 했다. 1848년 이후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숙고와 열정을 두루 담아 집필한,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이 개괄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The left> - 추천평) 사상서 중에 이토록 오랜 시기와 광범위한 분량, 여러 나라를 두루 아우른 책은 별로 없다. 그래도 좌파를 정치지형 안에 뿌리내리게 한 지역은 유럽 외에는 별로 없다. 150년 유럽 사상과 정치 지형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말이다. <The left>는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1848년 혁명이 패배한 직후인 1860년대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로 산업자본주의가 유럽 경제에 뿌리 내리고 팽창하는 가운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여 정치조직을 만들어가는 좌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부는 1914~23년이다. 역사 이래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인 1차 대전은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의 등장을 요구한다. 3부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56년까지로 대공황과 파시즘 및 레지스탕스가 남긴 유산을 통하여 의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세워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4부는 좌파의 새로운 정치를 만들고자했던 신사회운동을 다루는데 이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저자의 바람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에 대하여 이렇게 평한다. 이 책은 묘비명이 아니며 지난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몸짓도 아니다. 이 책은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들이 잘못 전달될 때일수록 역사가 중요하다는 확신의 소산이다. 망각에 맞선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은 요즘 글쟁이들의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의 힘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1990년대 동안 새로운 기억상실증들로 인해 몇 가지 없어서는 안 될 역사가 지워져버렸다.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분명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본문 14-15쪽) 그는 좌파의 종식과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좌파 탄생을 원하고 있으며 화석화된 좌파가 아니라 인민과 인간을 위한 진정한 좌파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좌파는 국왕 거부권 폐지, 단원제 입법부, 선출에 의한 사법부 구성, 권력분립을 주장했다. 행정부보다 입법부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실현을 위하여 1인 1표의 민주적 참정권 등을 채택하는 강력한 민주주의적 입장을 쟁취하기를 원했다. 한 인민이 민주질서 중심에 자리잡기를 원했다. 하지만 좌파는 현실사회주의 몰락에서 보여주듯이 스스로 권력집단이 되었고, 인민을 그 계급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사회주의의 종언을 고한다. 특히 '여성문제'에 관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인 참정권과 관련하여 최악의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계급 남성들은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성의 투표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1968년이 남긴 다른 두 가지 유산은 좌파의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중요했다. 하나는 의회 외부 정치의 부활이다 ― 직접행동, 공동체 조직화, 참여의 이상, 소규모 비관료적 형태들, 풀뿌리에 대한 강조, 일상생활과 정치의 일치.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동안 가장 창조적인 의회 외부 저항이었던 페미니즘과 새로운 여성운동의 부상이다.(본문 661) 대한민국 정치지형에도 보수시대가 열렸다. 아직도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영역에서 보수화를 꿈꾸고 있다. 아니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진보와 좌파라는 정치지형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잃어버린 10년은 결코 진보와 좌파시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좌파정권'이라는 단 하나의 말로 좌파가 꿈꾸는 직접행동, 공동체성 회복, 참여정치, 여성주의, 분배를 통한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가기를 거부한다. 평등 자유 연대라는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이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특히 획일화된 사상을 강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좌파는 몰락했다고 박물관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담지 못하는 영역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 중요한 사상이다. <THE left> 이런 의미에서 좌파에 대한 심층서는 아니지만 화석화 위기에 빠져버린 우리 사회의 사상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는 책임은 분명하다. 좌파를 박물관에만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 순간 우리 사회는 삭막함을 넘어 호흡할 수 없기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는 결국 죽은 사회가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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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과 형식은 차치하고서라도 전체적으로 거칠고 투박한, 때로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불분명한 문맥의 흐름때문에 방대한 책의 분량만큼이나 끈질긴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책.
여실히 보여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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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사회에서 좌파는 수난을 겪는 중이다. 분열로 망한다고 했던 누군가의 일갈이 현실이라도 되는냥 잇달아 악재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대한 깊은 얘기는 뒤로 해두자. 좌파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1848년부터 2000년까지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한, 역사서 The left 라는 책을 소개하겠다. 책의 내용을 다 써 넣는것은 리뷰라고 할 수 없겠고, 역시 내가 가장 감명깊었던 내용을 서술해보면, 역시 과격 좌파들의 테러리즘이 아닐까 싶다. 1968년 이후로 촉발된 거대한 좌파의 물결은 세계 대도시의 젊은이들을 급진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미디어의 발달과 보급이 이들의 급진화에 일조한 것이다. 바로 이 급진화의 정도가 문제가 되곤 했다. 그들의 목적은 세계의 피억압 민중의 해방이었는데,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너무 급진적이었다. 서독의 적군파와 일본의 적군파의 예가 바로 그렇다. 그들은 그 해방을 위해 테러리즘을 수단으로 천명했는데, 이를 위해 이들은 정부 고위 관료와 경찰들을 납치 살해하고, 테러를 일삼고, 여객기를 하이재킹하는 테러를 감행했다. 결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의 이런 테러리즘은 대다수 시민의 지지를 얻다가, 결국 지나친 테러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이들 역시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적군파는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서독의 적군파는 경찰에 의해 검거됨으로써 그들의 세는 약화되었다. 이런 세계 좌파의 역사를 보면서, 한국사회의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리 급진화 된다고 하더라도, 테러리즘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세력이 나타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사회 전체의 폭력은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합의'가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다른 어떤 선진사회 보다도, 한국사회는 '비폭력'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진화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는 비폭력임을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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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수, 꾸역꾸역 읽은 시간은 9개월.. 이 책을 구입하며 좌파에 대한 어떤 기대를 함께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나의 실수인지도 모르겠다. 기대도 분량도 읽어나갔던 시간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어떤 절망같은 것을 마음속에 심어주었던 과정들인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들에 비추었을 때, 더욱 두려움과 절망감을 느끼게 해 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좌파의 역사는 자본의 패악이 극에 달했을 때의 반동으로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반작용이자 반격이었다. 그래서일까, 좌파의 약진은 적어도 이 책이 이야기해주는 유럽이라는 공간 안에서만큼은 능동적인 때가 단 한번도 없어보인다. 자본을 거머쥔 우파와의 정당한 싸움보다는 자본구조의 약점이 두드러져 스스로 무너져내릴 때 반작용으로 좌파는 약진할 수 있었고, 때로 좌파의 성장은 우파의 헤게모니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면서 힘을 잃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령 좌파가 권력을 쟁취했더라도, 마치 권력의 짧은 유통기한을 증명이나 해주듯이 스스로 부패과정을 통해 힘을 잃어버리는 모습은 권력의 순환이나 인간사회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했다. 좌파 스스로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 모습 역시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좌파내의 페미니즘이 약진할 수 있었던 것도 전쟁으로 인한 남성인력의 부족이 기회가 되었지만 그나마도 좌파내의 마초적 특성으로 인하여 여성들의 권익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스위스의 여성 참정권이 1970년대가 되어서야 가능했던 사실은 좌파의 마초적 성향을 상징적으로 증명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좌파를 견제하던 우파가 내몬 공권력의 폭력에 대해서도 어떤 두려움이 증폭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 영국 탄광노동자를 탄압하던 대처정부의 공권력이 보여준 잔인함이나 20여년전의 문화투쟁에서 보여준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압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문명국가 안에서도 공권력은 아무렇지 않게 잔인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들이 아니었을까. 이를 지금의 우리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입시켰을 때,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폭압으로 억누르고 연행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그들의 실적으로 계산해내는 무식함과 잔인함은,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폭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저 두려움만 앞서게 만드는 일이다. 더욱이 권력이 자본에 넘어갔다는 극단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이윤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대한 일방적 탄압은 과연 얼마나 폭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올까 하는 상상은 그 자체마저도 두렵게 한다. 너무 좌파의 수동성과 의존적 속성만을 느낀 것일까? 물론 2차대전 중의 파시즘을 물리치고 지속적인 견제를 유지케 한 것은 좌파의 이념이었고 우리에게는 남미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좌파의 약진에 대한 기대감이 있지만, 좌파의 폭력성은 단계적으로 거세되어야만 했고 온건성은 부르주아 이념에 흡수되어 제대로 된 모습조차 파악하기 힘들어 진 것이 사실이다. 남미 좌파의 약진 역시, 너무도 극단적인 계급분리현상과 시기에 맞게 나타난 리더쉽의 조화가 만들어 낸, 어떤 의미에서는 특수성이 가미된 현상이라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에게는 아직 좀 더 낙하해야만 하는 수직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암울함만 느끼게 한다. 결국은 인간사회란 가진자로 표현되는 우파와 저항자로 표현되는 좌파의 영원한 싸움과 순환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아직은 진정한 좌파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일말의 기대감은 남아있지만, 이 책에서 보여준 좌파의 세상 역시 인민에 의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 조금은 암담해지고 실망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