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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들고 한 쪽 끝에서 한 쪽 끝으로 왔다갔다 하기를 수십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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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는 대부분지루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눈요깃거리로서의 영화가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영화들도 많다. 이 책은 그 중 작가주의 영화인의 대표로 여겨지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에세이다. 영화인으로서 예술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의 인생관과 철학을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더욱더 가까이 이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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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깊은 곳에서 끓어 올린 예술의 정수> - 봉인된 시간 – 영화 예술의 미학과 시학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지음, 글을 쓰기 앞서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부터 늘어놓아야겠다. 텍스트 비평을 하기엔 그 대상에 대한 배경지식이 턱없이 부족함을 토로하던 중, 우연히 대학 때 ‘키노’라는 잡지에서 주관한 대학생 영화평론상이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그 평론상에 당선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출품작이 아주 미미해서 그 중 그나마 ‘평론’이라 불릴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쓴 글이었다는 것이다. 어쨌건, 대학생의 신분으로 본 영화 잡지의 세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무언가 인문학적인 텍스트 분석을 기대했던 나에게, 그 잡지사는 기사의 내용과 질 보다는 오히려 ‘영업’을 통해 하루하루를 일구어 내려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영화잡지사 라는 곳이 영화라는 텍스트의 성격보다는 잡지사의 유지 쪽에 어렸던 나에게 더 어필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 잡지사의 편집장이 바로 나는 물어물어 글쓰기 수업에도 찾아가게 되었고, 사설 강좌를 통해 영화에 관한 수업에도 나를 노출시켰다. 그러던 중, 비참하게도 그 10권의 책 중 내가 읽었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을 서술해 놓은 기술서적도 상당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열권의 책중 6권이 더 이상 발간이 되지 않아 서점을 통해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10권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단순한 생각에 그 책들을 한 권씩 모으기로 했다. 먼저 인터넷 헌책 방을 통해서 구해 보려고 했다. 그러니 이메일을 통해서 연락이 왔고, 몇 권은 출판사 쪽에 직접 전화를 해서 반품으로 들어 온 책을 구입하기도 했다. 민음사에서 나온 <영화와 빛>, 이라는 책과 <영화와 모더니티>, 라는 책은 내가 직접 민음사에 출동하여 영업담당자와 창고를 뒤져 구해냈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렇게 어렵사리 책을 구해서 막상 읽으려고 하니 그 내용들이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많은 평론가들이 즐겨서 인용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부터 러시아의 명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쓴 책에 이르기까지, 정말 이렇게 어렵게 구한 10권의 책들을 다 읽어낼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먼저 비교적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책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기술서들은 나중으로 미루어 놓고, 먼저 수필이나, 철학책을 위주로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10권의 리스트 중 처음으로 들은 책이 바로 이 책 ‘봉인된 시간’ 이다. 이 책은 앞서도 잠시 소개했듯이 러시아의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예술관과 영화관을 기술해 놓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중반, 그의 영화가 개봉을 했는데, 이례적으로 매진사태를 이루어 영화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영화 ‘희생’은 말 그대로 관객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대화나 음악이 없이 한 노인이 꼬마와 함께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만 10분 정도 롱테이크로 이끌어가는 아주 ‘엽기적인’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그만큼 그의 독특한 세계관과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이 책의 뒷편에 소개되어있는 그에 관한 짧은 글을 읽어보자. 먼 훗날 이 시대에도 영화다운 영화가 있었다고 평가된다면 바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까지 이야기 되는 사람. 영화감독은 철학자가 되었을 때만 비로소 예술가이고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영화인. 감독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전 생애를 모험에 거는 일이라고 말했던 영화작가.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흥미 위주의 상업주의 영화에 저항하면서 끝까지 ‘예술로서의 영화’를 지켜내려다 죽어간 ‘순교자.’ 탁류와도 같은 오늘의 물질주의 세계에서 맑고 드높은 인간의 영성을 추구한 사람. 영화도 학문도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라 보면서 인간 구원의 문제에 매달렸던 구도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그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나? 이 책 곳곳에서 그는 영화 감독은 철학자이며, 또한 시인이며, 예술가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상업영화의 경우에 관객들을 향해 무엇을 보여줄지 이야기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것을 이야기한다. 비록 그것이 현재에 주목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이해해줄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영화를 만드는 작업 자체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영화 감독의 면모는, 감독이 자신의 구성 속에 혹은 완성된 영화 속에 감독 자신의 확고부동한 영상 구조를 갖추고 현실 세계에 대한 감독 자신의 사고 체계가 확립되어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감독의 이 사고 체계는 감독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꿈들을 알려주는 관객들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직 감독이 사물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드러냈을 경우에만, 즉 일종의 철학자가 되었을 경우에만 감독은 비로소 예술가인 것이며, 영화는 영화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75) 그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삶의 물질성은 물질성이 완전히 용해되어 없어져 버리는 그 경계선상에 존재한다. 영화의 힘은, 영화의 시간을, 우리들이 매일매일, 매시간 부딪치는 현실의 문젯거리들과 현실적이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도록 하는데 있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주장하는 근본 이념은 바로 “실제적 형식과 현상 속에서 사로잡은 시간” 이다. (p.79) 그는 또한 영화관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 좀 더 근본적으로 다가간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가? …. 바람직한 것은 세계관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영화의 원칙적 본질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인간은 보통 읽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인간은 살아 가는 삶의 경험을 얻으려고 영화관에 간다. 왜냐하면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영화야 말로 인간의 실제적인 경험을 풍부하게 하여주고 경험을 통해 인간을 노련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영화의 힘을 바로 여기에 있지 영화사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 내는 스타라든가, 진부하고 낡은 주제라든가 또는 현실을 망각하도록 유도하는 오락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p.80) 이런 이유를 통해 영화 예술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영화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시간을 빚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조각가가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자신이 만들어낼 조각품의 윤곽을 보고 이에 걸맞게 대리석 덩어리의 모든 필요없는 부분을 쪼아내 버리는 것과 흡사하게, 영화 예술가 역시 삶의 사실들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정리 되지 않은 혼합물들 속에서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만들어 낼 영화의 요소가 되고 예술적인 전체 형상의 없어서는 안될 모든 순간만을 남겨 두는 것이다. (p.80) 그는 다른 인접 예술과 영화를 비교해 영화가 ‘예술’일 수 밖에 없는 우월성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희곡, 산문, 연기, 미술, 음악 등등의 인접한 예술 분야들의 상호 교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인접 예술들의 상호교류가 영화 예술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침으로써 영화 예술은 난데 없는 절충적 혼돈의 세계에 빠져 버리고 만다. … 문학적 사고와 회화적 조형성의 결합만으로는 결코 영화 예술적 형상을 빚어 낼 수 없다. 이런 결합은 오직 과장되고 엄청난 절충주의를 빚어 낼 뿐이다. 심지어 시간의 움직임과 시간의 조직에 관한 영화의 법칙도 연극 속의 무대 위의 시간이 갖는 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p.80) 그는 예술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침을 놓는다. 예술가는 경박해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촬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의의 내적 관심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자신의 원초적인 흥미를 분명하게 드러낼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이레 대한 내적 관심은 반드시 신과 같이 평정한 형식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만 예술가는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p.98) 그는 예술가라는 것은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어쩌면 영원히 찾지 못하는 순례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예술가는 미학 자체를 위해서 표현 양식을 탐색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그보다는 현실을 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 줄 수 있는 표현 수단을 고통스런 작업 과정을 통하여 발견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 오랜 생각 끝에 확신을 갖고 태어난 표현이 아니고 단순한 일회적 기지의 소산인 표현들이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오직 인간 문제일 뿐 반드시 가차없이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적 작업이란 단지 얼마간의 직업적 기능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정보를 형상화 하는 작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의 존재 양식인 것이며 그 작가의 유일하게 가능한 표현 양식인 것이다. (p.126) 책의 마지막에 소개된 한스 요아킴 슐레겔에 의하면 타르코프스키가 20세기 전위 예술가들을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술이 점차 영적 정신성을 상실’한 그 순간에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 책의 전반을 통해 그가 자주 읽었던 톨스토이와 도스도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자주 논하면서 엄격한 도덕주의와 함께 ‘예술가의 책임감’ 에 대해서 심각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 책의 말미에서 물질만능주의의 소비이기주의에 빠져있는 현대 문명을 강도높게 비난한다. 그는 작품들 속에서 궁극적으로 이성적 분석이 불가능한 창조의 세계를 발견하고, 무언가 종교적이고, 절대 진리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이 가지는 최종의 목표임을 관객들에게 입증한다. 즉, 예술창조라는 것은 인간 영혼의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신의 기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의 영화를 볼 때 분석ㅈ거이며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며, 자연 경치를 볼 때처럼, 음악을 들을 때처럼 명상적으로 빠져 줄 것을 요구한다. 즉, 여화 감상이란 영화적으로 ‘포착된’ ‘봉인된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 봉인된 시간의 현실에는 항상 꿈과 추억의 내적시간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예술관은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는 예술과 상업적 상품 사이에 놓여진 영화의 보편적 양면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업영화의 탄생은 하나의 죄악’ 이라고 규정하는 비타협적인 그의 주장에, 미지의 낯선 지역에서 영혼을 찾아 헤매며 잃어버린 희망과 믿음 사이에 가슴 아파하던 그의 작품 <노스탈지어:향수>의 주인공이 생각났다. 보통 영화의 성격상 상업영화에 너무나도 많이 노출이 되어있는 우리의 영화 풍토상, 영화란 저급하고 하급한 대중문화로 보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작가는 그러한 대중문화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을 다 바쳐 영화란 예술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준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그가 쓴 이러한 글처럼 어느 한 분야에 자신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비록 상업적으로 실패한다 할 지라도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의 예술관을 펼쳤을 것이다. 진정으로 그가 영화란 예술, 이라는 공식을 믿었기에 그는 비록 제작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해서 조급해 하지 않았으며, 그가 제작을 하고 있는 그 순간순간에도 그에게 부여된 재능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행복했노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 영화에 대한 사랑과 확고한 세계관은 비록 영화 쪽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면 관심이 있는 사람이건 아니던 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에서 누가 어떻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우루루루 몰려가 마녀사냥을 하고, 지난번 마녀사냥 된 사람들의 후일담에 히죽거리는 우리의 현실이야말로 저급한 것은 아닐지. 이런 혼돈과 혼란의 홍수 속에서 이런 보물과도 같은 책을 만날 수 있었기에 나는 안드레 타르코프스키 1932 러시아 자브로지 출생 1954 러시아 영화학교 VGIK 입학 1960 졸업작품, <증기 롤러와 바이올린> 1962 <이반의 어린시절>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 1966 <안드레이 루브료프> 칸영화제 국제 비평가상 수상 1972 <솔라리스>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1975 <거울> 1979 <안내인> 1982 <노스탈지어> 칸영화제 창조적 영화대상, 국제 비평가상,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성 1986 <희생> 칸영화제 대상,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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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있어서 영화란 무엇인가? 예술인가? 아니면 그저 현란한 화면을 통해서 잠시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드는 눈요기인가? ‘영상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고, 영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작품을 작업하면서 들게 되었던 생각들을 글로 정리했고, 그 글들을 정돈해서 발표한 것이 ‘봉인된 시간’이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만큼 영화에 대해서, 그리고 영화가 예술로서 다뤄지게 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영화관련 서적은 없을 것 같다.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첫 번째 장편작품인 ‘이반의 어린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영화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보다 확고하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기도 하면서 그 내용들을 글로써 들려주고 있다. 아마도 영화감독들 중에서 가장 영화라는 것에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최소한 글로서 고민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감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르코프스키는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것이 다른 예술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론을 갖게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연극과 다른 예술장르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에이젠슈타인으로 대표되는 몽타주와 편집 그리고 작가주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등 그의 작품들에 비해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에이젠슈타인을 지속적으로 반박하며 자신의 영화 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몽타주의 정반대에 자기 자신을 놓여두고 어째서 자신은 그런 방법론을 버리게 되었는지와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와 주제 그리고 영화를 만들게 되기까지 일어났던 소소한 감정적 변화들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해주고 있다. 때로는 영화이론 서적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도, 타르코프스키의 메모장이나 일기장을 엿보는 것 같을 정도로 진지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전부 보았지만 여전히 생각하게 되는 의문들이 여러 가지 있었고, 그리고 전혀 그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았던 장면들에 대해서 세밀하게 설명하는 부분들을 통해서 이전에 봤던 작품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영화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갖고 있고, 앞으로 갖아야 할 것이고, 버릴 것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진지한 질문이겠지만... 놓을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의 글들은 보다 소중함을 더하게 되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있었던 타르코프스키의 의견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글들을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나? 그게 철학을 얘기할 정도로인가? 타르코프스키는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의미 있고, 생각해볼만한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 당신이 만약 영화에 대해서 단순한 재미 이상의 것을 찾고 있다면, 타르코프스키의 의견에 한번쯤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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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이 3개인 이유는 간단하다.
워낙에 명성이 자자한 책이기에 별점을 더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영화를 너무나 힘들게 보았고 - 자지 않으려고..... 저자의 영화를 너무나 이해하기 힘들었기에 -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 도저히 별점을 잘 줄 수가 없었다.
사실 개인적인 감상만 따지자면 별 점이 더 추락하지만 누군가는 저자의 영화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하기에 별점이 3개이다.
아무튼 이 책은 러시아어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중역인데 최근에 러시아어 원서를 번역한 책이 나온다고 한다. 제목이 약간 바뀌었다는 점을 명심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