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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국가주의 국가에서나 민주주의 국가에서마저도 국가가 사망자들을 찬미하려할 때, 마치 판에 박은 듯 한 희생 논리와 레토릭을 작동시키고 마는 것은 왜일까? 희생 없는 국가 혹은 희생 없는 사회는 애당초부터 존립 불가능한 것일까?" '희생 없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소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한때 나는 그것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저자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어떤 답을 했을지 궁금했다. 저자는 희생의 의미와 그 효용, 그것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시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희생'은 개인적, 종교적,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데,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관심은 국가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희생에 있는 듯하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희생이 어떠한 효용을 가지며, 어떤 식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 미처 생각해 본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부터 한국의 현충원에 이르기까지 ‘희생’이라는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그 공통된 의미를 밝히고, 조직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기꺼이 구성원들이 조직을 위해 자신의 가장 가치로운 것-생명-을 지불하도록 기여하게 한다는 레토릭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바는 ‘희생’이라는 의미의 다용성, 그 쓰임의 광역성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영웅들은 모두 가치로운 것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를 통해 영웅이 되었고, 그것은 ‘희생’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폴리스를 위해 죽은 그리스 시대의 영웅들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는 삼국지나 사기에 등장하는 영웅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도 조국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이러한 ‘희생’은 오늘날의 영화에서도 생생하게 재현된다. 이를테면 ‘브레이브 하트’나 ‘패트리어트’와 같은 영화들이 극장에서 사람들을 울릴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가치롭기 때문이라고 인식되며, 영화 속의 영웅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희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숭고한 희생’은 과잉된 표현법이라고 서술하는데, 이는 ‘희생’에 이미 ‘숭고함’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희생’은 ‘가치로움’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죽음이든 ‘희생’이라는 단어가 그의 묘비에 새겨진다면, 죽은 자(홀로코스트-희생물)에게는 영광이고, 살아있는 자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사람은 본래 가치로운 것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고, 의미없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말인즉슨, 자연사나 4중 추돌 사고의 사망자에게도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면 그 죽음은 가치있는 것으로 탈바꿈하고,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포장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일본인들이 히로시마에 원폭 기념관을 세우고 원폭 피해자들을 희생자로 추모한다는 데 놀란적있다. 민간인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고속도로의 충돌사고에서처럼 운나쁜 피해자일 뿐 희생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희생자라는 말을 쓰는데는 어떠한 의도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75쪽에서 '원폭은 신의 섭리'라는 나가이 다카시의 인용된 조사 전문을 읽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을 아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로마제국이 카톨릭을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게, 국가의 논리를 카톨릭에 접합시키고, 피해자를 순교자이자 희생자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조사였다! 천황의 항복 선언에 대해서도 나가이는 ‘성단’이르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러한 성단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위험 생각을 성단이 너무 늦었다는 점을 통해 비꼬고 있지만, 아마도 슬픔에 잠긴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희생자로 바꾸어 죽음을 가치롭게 여기도록 하는 동시에 일본이라는 국가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로마제국이 예수를 신의 아들로 탈바꿈시키고 희생자로 만든 정략적 논리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정말이지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인가? 사실을 권위 있는 사설로 바꾸는 이러한 현상은 진정 종교에 불가능은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전론’에 대한 논의 역시도 매우 인상 깊었다. 나도 자위전쟁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전쟁이라는 과정 자체가 살인이므로 윤리적 개념인 정당성이 논의될만한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어찌됐든, 정당한 살인, 즉 전쟁이란 존재할 수 없는, 셔먼의 말처럼 전쟁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189쪽에서 저자는 파트라야를 위해 죽는 행위는 정치적, 철학적 의의도 찾을 수 없고 사적인 희생에 불과하다고 적고 있는데,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그리고 가장 도덕적으로 온당할 수 있는 희생이라면 사적인 희생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생물학적 욕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란 번제의 제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희생물이란 뜻으로, 저자는 마지막에 루신의 광인일기를 인용하면서, 아직 사람고기를 먹지 않은 아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씁쓸한 희망은 되려 절망적이다. 제물은 제사가 끝난 후 성스러운 것으로 탈바꿈하고 고대인들은 그 고기를 나누어먹음으로써 성스러워진다고 믿었다. 우리 역시도 현충원에 모셔진 호국성령들의 희생을 뜯어 먹고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현충원의 대부분은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 살아있을 때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우리가 그들은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희생이란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기나 했을까. 존재란 그 존재 순간부터 희생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정당하다. 군인들은 생존할 권리보다 희생할 권리가 우선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위대를 없애야 한다는 칸트의 말은 그래서 더 인상 깊었다. 그 말이 정답이지만, 과연 그 어느 순간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아들러는 과도한 군비경쟁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다. 냉전시대가 종식된 지금도 군비 경쟁은 시들지 않는다. 자위를 목적으로 대규모의 살상무기들을 확보하려 하는 경쟁은 과열 양상으로 치달을 뿐이다. 저자 역시도 칸트가 말한 어느 순간을 희망하고 있지만 전망하고 있지는 않다.
"병사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중대한 문제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조차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신앙과 이성이 분열한 뒤에는 철학자마저도 결정을 내릴 수 없다"-칸트로비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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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은 대체로 숨겨져 있어서 국민이 국가에게 어떻게 이용당하고 잇는지도 깨닫게 하지 못하는 방식이 있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가 대놓고 국민들을 이용하는데도 국민들이 그들 스스로는 이용당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것은 애국심이란 포장지를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어 마치 국민들 스스로는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경건한 행위로 둔갑을 시킨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건축물들과 집단 행동들이 함께 떠오른다. 국가의 나이스해보이는 이러한 행동이 추잡해 보이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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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2004년 4월 29일, 따뜻한 봄 햇살이 나른하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머리를 깎고 착잡한 심정 으로 신병훈련소의 정문을 들어가던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군복을 입자마자 나는 이름 대신에 ‘268번 훈련병’으로 호명 받았고 총을 쏠 수 있는 전투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비지땀을 흘려 가며 훈련을 했다. 입대 전 방탕한 생활로 인한 부적격한 신체를 국가에 필요한 기계로 교정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수양록>이라는이름의 하루 일과를 적을 수 있는 공책을 받게 되었는데 맨 앞쪽에는 모윤숙의 시(詩)「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실려 있었다. 매일 밤마다 <수양록>을 쓰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며,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 워야 이긴다.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라는 시구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위해 몸 바칠 것을 다짐했다, 아니 해야 했다. 일본의 전후 책임을 묻는다와 야스쿠니 문제등의 책을 펴내면서 일본의 비판적 지성 으로 활동하는 다카하시 데쓰야(이하 ‘다카하시’로 통칭)는 이런 국가를 위한 국민의 희생 (sacrifice) 메커니즘을 국가와 희생에서 밝히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전사자를 숭고하게 봉헌하는 보편적인 추모 행위에서 야스쿠니 문제라는 일본의 문제적 상황이 배태하기 때문이 다. “야스쿠니의 논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국가—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항상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 국가—에 공통된 ‘희생’ 논리의 문제성을 깊이 있게 고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기본 주제”(16쪽)인 것이다. 다카하시는 1부 <‘희생’의 논리와 레토릭>에서 희생의 논리를 야스쿠니는 물론이고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이나 히로시마 ․ 나가사키의 피폭까지 적용시키며 논의를 진행한다. 2부 <국민 ․ 희생 ․ 종교—‘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것’의 역사>에서는 르낭, 피히테, 모세 등의 견해를 통해 유럽이 공유했던 희생의 논리를 적출한다. 한국의 전사자 추모 시스템을 진단하고 희생 없는 사회에 대한 소고(小考)는 3부 <‘희생의 논리’는 초월 가능한가?>에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국가 비판이라는 난제를 ‘희생의 논리’로 분절하여 꿰뚫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가 결코 올바르지 않으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명제가 폐색(閉塞)하고 있는 것들을 다카하시는 국가와 희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2. 본 문―국가와 희생의 관계 2.1. 희생의 논리 국가와 희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에 대한 정치(精緻)한 분석이 필요하다. 저자의 의견에 따르면 “희생이라는 말은 본디 한자에서도 제사를 올릴 때 신이나 신성한 존재에게 순결한 동물을 잡아 바치는 행위 또는 그 의식에서 재단에 올릴 물건, 즉 봉헌물로서 동물을 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8쪽) 기독교의 번제(燔祭)’는 통째로 태워진다는 의미의 홀로코스트(holocaust)와 유사한데 이는 ‘희생’과 같으며 숭고하다와 고귀하다는 뜻이 희생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애당초 숭고하지 않은 ‘희생’이란 없다.”(38쪽) 다카하시는 ‘고이즈미 수상의 담화문’,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 이야기’, ‘실험동물 위령제’ 등 다양한 텍스트에서 목적을 위해 정당화되는 희생의 논리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제의와 희생양에 대한 분석은 사실 다카하시 이전에 르네 지라르의 선행 연구에서도 충분히 검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원인과 상황이 무엇이건간에, 죽는 자는 언제나 전체 공동체에 대하여 희생물과 유사한 관계에 있다. 생존자들의 슬픔에는, 대단한 행동을 하기를 결심하는 데에 적절한, 공포와 격려가 기이하게 혼합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중략…) 외따로 혼자인 자의 죽음은 막연히, 집단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치르는 공물처럼 보인다.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써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연대성이 강화된다는 말이다. 희생물이 죽는 것은, 죽음의 위험에 처한 공동체가 새로운, 문화 질서 속에서 재생하기 위한 것 같다. 지라르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등 각종 신화와 부족의 의식을 검토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의 존속과 통합을 위한 기능이라는 고찰과 더불어 희생제의가 내포하고 있는 ‘폭력’을 고발한다. 이로운 폭력으로 자행되는 희생 논리는 지양돼야할 파괴가 아니라 성스러움으로 변환하고 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폭력은 해소된다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묵인해도 괜찮은가?’ 라고 되묻고 있다. 국가를 위해 일정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그 희생양으로 정작 자신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불가피한 죽음은 희생의 논리에 충실하게 길들여진 신민(subject)들에게 전가할 뿐이다. 언제나 대신 죽을 수 있는 카게무샤(影武者)를 생산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추모 장소에서 거창한 의식이 행해지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국가와 희생 3부에서 한국도 희생의 논리에서 예외가 아님을 전쟁기념관과 국립묘지의 사례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특히 5․18 광주민주항쟁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국가에 의해 ‘민주 영령’으로 추모 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 그의 시선은 매우 날카롭다. 다카하시는 “민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광주민중항쟁에서 학살당한 민중이 국가의 ‘영령’이 되어, 국가로부터 저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추모되는 것에 대하여 당혹감”(253쪽)을 느낀다고 언급한다. 광주에서 죽은 계엄군과 시민들이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돼있다는 모순이야말로 야스쿠니에 버금가는 ‘국가와 희생’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2.2. 잊히는 것, 군대라는 아포리아 국가와 희생의 전반에 걸쳐 저자는 ‘레토릭’의 중요성과 그 무서움을 역설(力說)한다. 수사(修辭)와 명명(命名)은 특정 사안의 강조 혹은 은폐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는 르낭과 피히테의 논의를 언급하며 이들이 주장하는 국민 개념에도 희생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고 꼬집는다.(145쪽) 희생의 논리는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불러일으키고 그 의식을 결집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레토릭은 가토 노리히로가 쓴 패전후론의 다음과 같은 주장, “잘못된 전쟁의 전사자들일지라도, 이들 역시 자신의 아버지요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잘못된 전쟁의 전사자들인 병사들에게 우선 일본인, 일본 국민으로서 감사와 깊은 애도의 마음을 바친다는 것이다.”(154쪽)라는 것처럼 다른 많은 것들을 배제시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가토의 주장대로라면 아시아의 죽은 타자들은 잊힐 수밖에 없다. 다카하시는 자국과 타국을 분리하는 의식 속에서는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병사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은 소외당한 채 애도공동체가 만들어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거대 담론이 질식시킨 조그맣고 낮은 곳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오욕의 역사를 직시하는 태도야말로 애도에 선행되어야 할 윤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이클 월처의 정전론을 살피면서 다카하시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자위전쟁이 오히려 희생을 정당화는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부모와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은 목숨을 내던진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동체가 가장 앞서서 생명을 빼앗길 존재를 양성해두는 집단, 바로 그것이 군대이며 이른바 상비군인 것이다. 군대, 상비군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가 희생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성립하고 있다.”(236쪽)라는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2004년에서 2006년까지 군인이었던 나는 일개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 다카하시가 곳곳에서 적출해내는 ‘희생의 논리’에 무릎을 치며 경탄했지만 이 대목에서는 그러한 희생이 그토록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지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의 주장을 더 진전시키면 종교적인 신념으로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야 말로 국가가 강요하는 희생의 논리에 저항한 찬사해야할 대상이 된다. 반면 대다수의 한국 청년들은 ‘비양심적 병역 찬성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국가가 종용하는 희생의 논리는 나를 비롯한 한국의 청년들이 모르고 있던 바가 아니다. 단지 분단 상태로 휴전 중인 나라에 태어났다는 원죄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순전히 지금-여기 살고 있으므로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기꺼이 희생양이 됐던 것이다. 만약 국가와 경찰 없이도 침략과 범죄의 위험에서 자유롭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회였다면 국가의 희생 논리 따위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카하시는 군대 없는 사회에서만이 희생의 논리가 폐지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이러한 군비전폐론(軍備全廢論)은 현실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공상적 평화주의’에 불과하다.”(256쪽)라고 자신의 견해가 실제로 실현되기 어려움을 밝힌다. 아포리아에 봉착한 다카하시의 논리는 이제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맺음말―서로가 서로에게 절대적 타자로서 존재하기
다카하시는 데리다의 견해에서 난관에 부딪친 자기 논의의 출구를 찾고자 한다. 데리다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새롭게 독해하며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여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이 단 한순간도 도망칠 수 없는 ‘절대적 희생’의 구조”(258쪽)를 발견해낸다. 어떤 타자에게 응답하는 순간 다른 타자에게는 무책임을 혹은 죽음을 선고하는 절대적 희생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다카하시는 주장한다. 모든 희생의 폐기는 불가능하지만, 이 불가능한 것을 향한 욕망 없이는 책임 있는 결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모든 희생의 폐기”란 특이한 타자들의 부름에 보편적으로 응답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절대적 희생’이라는 구조 속에서, 그러나 모든 희생의 폐기를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동시에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63쪽)
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가능성(response+ability)이라는 다카하시의 입론은 ‘모든 타자는 다 다르고, 그러므로 모든 타자는 절대적 타자’라는 타자의 윤리학과 맞물린다. 절대적인 타자, 즉 국가에 응답하려고 다른 타자(여성, 계급, 식민지 등)를 배격하는 과거 제국 일본의 논리를 더 이상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에 가려진 약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꺼졌던 희망의 불꽃은 점화된다. 다카하시가 “사람을 잡아먹은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해야 해!”라는 루쉰의 광인일기를 국가와 희생에 수미상관의 형태로 배치한 이유도 거기 있다. 희망(希望)은 원래 ‘드문 바람’이라는 것, 1%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한 그것을 믿고 희생의 논리를 비판해야 한다는 저자의 논지는 그래서 더욱 절실해 보인다. 올해 7월 말, 국방부가 선정한 “장병 정신 전력을 저해”하는 불온서적 23권이 발표됐다. 그런데 왜 국가와 희생은 불온도서에 선정이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아마 국방부 관계자들이 공사다망(公私多忙)한 관계로 이 책을 읽지 못한 것 같다. 새롭게 불온서적이 지정된다면 국가와 희생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온서적 마케팅에 힘입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될 테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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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꽤 괜찮다.
국가와 국민의 희생.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들고서 일본인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 주제에 대해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읽을 만 하다.
그런데 저자 스스로 구멍을 파서라도 숨고 싶다고 할 정도로 뭐, 뒤로 갈수록 좀 수습이 안된다.
처음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미약했다고나 할까?
그냥 국가와 희생의 역사를 알아보자는 정도로 했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냥 국가와 희생의 역사를 알아보자는 정도의 생각으로 읽기를 권한다.
결론까지는, 저자 자신도 입장이 분명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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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흔해도 너무나 흔한,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선수 개인과 사기업에게로 전가되는 전형적인 일례입니다. '사명감'이라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독려되었고 결과지어진 이러한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어디가서 돈으로 바꿀 수도 없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 거론되지요. 물론! --- 그 개인과 사기업이 진심 자발적으로 그러한 자신들의 희생을 치뤄서라도 그 '사명감의 완수'와 '자부심의 만땅!'을 원한다면야, 그것에 대해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근데 그게, (고사하고 싶었으나, 또는 고사할 수 없었기에) '고사하지 못했다'가 아닌 (고사해야 맞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사하지 않았다'가 진심인, 진짜 그렇게 자발적이냐라는 거지요.
(위의 인터뷰를 한 선동열 감독 개인에 대한 언급이 결코 아님을 미리 밝혀두며) '너'도 알고, '나'는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게 그렇게 진짜 자발적이 아니라는 걸 말이죠. "국가가 필요하다는데 어떡하겠느냐"란 IBK 배구단 감독의 탄식이, 그 어느 지도자에겐 없겠습니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감독 역시 어쩔 수 없이, 자신은 그러한 희생이 하나의 '당위'로 받아들여져야된다라 생각한다는 선수(先手)를 쳐놓을 수밖엔 없는 겁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국가대표 선수의 선출에 운동 실력만이 아닌, (짊어져야 할 '무거운 책임감'에 대한 대책으로서의) '정신적인 면'과 '도덕적인 부분'까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 책, 「국가와 희생」에서, 국가1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주로 '전쟁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희생'이란 게, "(국민의) 희생없는 국가와 사회는 가능한가?"(p255)란 의문까지 가져올만큼 (굳이 전쟁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너무도 일반적/당연한 것이고 일상적이기까지 하다라 보고 있습니다. 국가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설마 이것도 홉스의 '국가론'2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 것일까요? …………………………………………………………………………………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는, 위와 같은 의미로서의 '국가'라는 조직의 존재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국가라는 조직의 필요성이 어디에서부터 대체 왜 생겨났었었는지'등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일단 존재하고 있다라는 지점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라는 것이죠. 상당히 많은 분량의 인용문구들을 적어놓고, 그에 대해 해설을 하는 형식을 지니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가 결국 전하고팠던 핵심이란 건, 제 생각에, 조지 모세 George Lachmann Mosse 라는 독일 출신 유대인 역사가의 저술 「영령 Fallen Soldiers」라는 책 속 내용3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다음이라고 보여집니다. 요약된 부분을 인용해 보자면,
그러니까, 국가가 말하는/추모하는 '희생'이라는 건 알고보면 '훗날의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사전적 립서비스' 일 뿐, 딱히 대단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뭐,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고, 이 주장이 딱히 억지스럽다라 보여지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만, 문제는! --- 다카하시 데쓰야가 위의 메시지가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에도 동일하고 적용되고 있다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매우 교묘한 전개의 논리를 독자에게 설파하려 든다는 점이지요.
이게, 그러니까, --- 야스쿠니 신사라는 게, 일본만의 것도 아니고, 일본의 큰 잘못마저 아니라는 속내를 서서히 풀어놓고 있다라, 저에게는 그렇게 읽혀지는 겁니다. 어찌해서든 '적용되고 있다'가 아닌, '적용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저자는, 이 새롭지도 않은 결론을 뽑아내기 위해 그 많은 인용문을 가져다 놓고는 고작 "희생논리의 편재성(omnipresence)"(p255) 운운하는, 흡사 '위 아 더 월드'스런 마무리를 기어이 만들어 내고 말지요. · · · (1) 책 속 내용의 일반화를 위해, 저자는 키르케고르와 자크 데리다를 소환합니다. 그 소환의 핵심은 "어떤 타자에게 충실하려면 다른 타자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p258) 이 한 마디를 인용하기 위함이었고, 여기서 '어떤 타자'는 국가이며, '다른 타자'는 (내가 아닌 다른) 국민/군인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인용문을 해설하겠다며 저자는 ---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이 책의 원고 집필을 통하여 편집자와 출판사, 미래의 독자 등 어떤 타자에 대한 내 책임을 다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또 다른 많은 타자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고, 그런 의미에서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p258)이란 예시를 드는 무식을 드러내고 맙니다. 저자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집필'이라는 활동과 '무책임'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키고 있지만, 사실 이건 '희생' 운운할 꺼리가 아닌, '기회비용'의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경제활동일 뿐인 것이죠. 어쨌든! 뭐 이 정도의 오류/무식은 있을 수 있다라 넘어가준다 하더라도! (2) A의 과거 행동에 대해 '그건 잘못인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내내 해오다가, '어! 근데 알고보니 너네 B나 C도 그런 행동을 했었었네~'라며, 'A만 잘못한 게 아니다'를 거쳐, 은근슬쩍 'A에게는 잘못이 없다' 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런 행동을 다 했었었으니 아예 '그 행동 자체가 잘못은 아니거다'라는 식으로 결론지으려는, 정말로 역겨운 논리가 이 책 속에서 읽혀집니다. 그러니까, 아예 이런 결론을 위해, 책의 초반부에 의도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그건 좀 잘못인 것 같아'란 연막을 쳤다라는 것이죠. 우리나라 국립 현충원에 적혀져 있다는 글을 인용해놓고는,
겉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군인/국민들에 대한 레토릭으로서의 '희생에 대한 추모'가 똑같다라 말하면서, 속으로는, 그러니까 같은 말의 계속된 반복을 통해 사실은, 현충원은 되고, 야스쿠니는 안 되는 이유가 뭐냐라는 항변을 늘어놓고 있는 겁니다. 헌데 말이죠!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라는 (상황에 따라선 정말 되도 않는 말인) 이런 식의 채근에 또,
옮긴이란 자는 아예 대놓고 '나무는 보지말고 숲만 보자'로 가자라고 장단까지 맞춰주고 있기도 합니다. 때린 놈이, 생각해 보니 나도 더 센 놈한테 엄청 맞았었으니까, 너도 내가 너 때렸던 거 다 잊어먹어라,라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뜻으로는 이해를 해낼 수 없거늘, 이런 글을 쓴 저자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p267)으로 거론한 옮긴이의 혜안과 수준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겠는 전, 대체 뭘 '걸러내고 독해해 체질'해야 하는 건지 끝내, 이 책을 읽어선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
'국가'란 집단의 유지가,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 '희생의 요청' 뿐만이 아닌, 일부 '진정으로 믿는 성원'의 존재 또한 반드시 필요로 한다라는 유발 하라리의 의견은, 별 특별한 거부감의 생성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할 수 있겠지만,
'사무라이'라는 문화적 자원이, 폭력과 강요의 시기를 거쳐, 끊임없는 교육/세뇌를 통하여, 이제는 되돌이켜지지 않는, 그러니까 그것이 '일부'가 아닌 '적어도 꽤 되는 portion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일본 사회에, 그 발전된 형태인 '야스쿠니 정신'5이라는 것으로 확립되어있다라는 것엔, 아니 낯설어 할 수가 없습니다. 낯설어... 해서도 안되겠지요.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친절하고 공중도덕 잘 지키는 등,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집단으로서의 일본이 보여주는 정치·역사적 관점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 · ·
단 한 게임도 보지 않는 K리그이건만, 그래도 국가대표의 경기가 있다면 보게 되듯, 순전히 개인의 경기인 프로 골프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했다라는 것이 우리에게 희열을 안겨 주는 이유를, 이것이 차마 우리 민족의 습성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꽤나 오래 전부터 우리들에게 전해져 온, 굳이 이것이 '국가주의'라는 명칭으로만 불리우는 것도 아닐 것 같은, "국가와 나의 일치"가 우리/나에게 너무도 자연스럽다라는 건, --- 그것이, 유발 하라리 버젼의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이건, 일본 '사무라이 정신'으로부터 지속되어 온 '야스쿠니 정신'이겠건, 혹은 우리 민족의 뭐, '단일민족으로서의 단결력'이 되었건, 어쩌면 이마저도 '자연스러움'보다는 '폭력과 강요'가 맺어놓은 과실이 아닐까,하는 좀 비참하기도 한, 그런 생각이 슬쩍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우리 나라의 국가대표팀 감독도, 그가 어느 종목의 감독이건,
이 기본적 전제가 되어야 함을, 그리고 우리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강요가 옳지 않듯, 다수의 소수에 대한 강요, 혹은 권력있는 소수의 타인에 대한 강요 등도 또한 결코 옳을 수 없다라는 거, 이건 뭐, '최순실 - 박근혜 - 자본'의 연결에서 보았었듯, 너무나 정말로 간단한 거잖습니까. 국가의 부름에, 선수로서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해야 하는 선택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이것까지 '의무의 회피'라 불러서는 안 된다라는 걸 설마... 그들이 모르진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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