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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내 시집 선택 기준은 지나치리만큼 간소하고, 또 어떤 의미로는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우선, 제목을 기준으로 선택한다.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이 어리석은 독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으로 읽을 책을 선택하는지 잘 드러나는 방법이다. 그리고 잠깐, 작품들을 살펴본다. 자세히까지는 아니고 어떤 분위기로 쓰여졌는지 확인해서 마음에 들면 집으로 가져오고,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면 다시 서가로 돌려놓는다. 그 두번째 선별 과정은 특정한 기준이 없이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에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할 수 있겠다. 두두 시집은, 제목이 주는 특별하면서도 단순한 어감이 재미있어서, 그리고 시집 안의 시편들이 짧고 간결한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두두 시집의 제목을 보고 느낀 것들을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시집 두두의 제목인 두두는 두두시도 물물전진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뜻은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심오한 뜻을 가졌다. 아마 이 말을 알았더라면 어감을 재미있게 생각했다니,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두두 시집을 읽으면서 실험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되기 어려운데, 어떠냐면, 전체적으로 시가 굉장히 짧다. 단순히 짧다기 보다는 짧은 글귀들 사이로 기나긴 내용의 의미를 정제해놓은 함축적인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서사가 느껴지고, 넘치는 느낌이 전해진다.
나무와 햇볕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무엇과 무엇이라는 두 대상을 두고 쓰여진 시가 많다. 일상적인 모습을 시로 표현했으면서도 그 교차점이 일상적이지 않은, 시인만의 눈을 거친 표현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분이 어떻다고 짚어말하기 어려운데, 새와 날개를 두고 보면, 날아가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을 땅에 끌리어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낸 점이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연이어 옮겨놓은 세편의 시들은 다 그러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들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페이지의 뒷편을 시인이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겨울 a
콩새가 산수유나무 밑을 뒤지고 오목눈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에서 풀씨를 뒤질 때 식탁 위의 감자튀김(올리브유에 튀긴) 내가 뒤지는
이 시는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옮겨놓았다. 오목눈이들이, 콩새가 먹이를 찾는 모습을 시인에게로 또, 나에게까지 확대되어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시였다. 식탁 위의 감자튀김을 뒤지는 행위를 일상적이게 느끼도록 하면서 더 넓은 범위의 행동으로 확장시켜놓은 것도 같았다. 올리브유에 튀겼다는 디테일까지도 재미있었고. 시인의 유고 시집이었다고 한다. 뒤늦은 부음을 들은 셈이다.
** 두두시도 물물전진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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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 가슴을 데었었다. 평소에 시를 많이 접하지 않는 탓에 오규원이라는 시인의 이름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의 다른 시집을 보고 싶어 찾다가 <두두>를 만나게 되었다. (한 온라인 서점에서 2008 최고의 시집을 투표하는데, 그 후보에 올라 있었다.)
시집을 펼쳐들다가 '시인의 말'에서, 그 짧막한 네 줄 글귀에서 시선이 오래오래 머물고 말았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2007. 1. 21 오규원
시인은 2007년 2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는 문장이 어쩐지 곧 다가올 시인의 마지막 안식을 말해준 것 같아서 가슴이 찡해졌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그 길이가 다 짧다. 맨 마지막에 실린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한 페이지에 들어오는 분량인데, 다섯 줄 미만의 시도 제법 많고, 대부분이 열 줄 안팎이다. 시집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읽으면서, 시인이 생전에 짧은 시편들만 모은 시집을 따로 준비했던 사실을 알았다. 1부 '두두'와 2부 '물물'이 시의 길이에서 차이가 조금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상당히 짧은 시들로만 엮인 시집이라는 점이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4월과 아침' 전문)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나무와 허공' 전문)
내가 태어난 4월, 나하고 같은 날 태어났을 '생년월일이 같은' 수많은 잎들을 이제서야 생각해보며 나도 잠시 어리둥절. 그 잎들은 이미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는 허공이 들어차고, 이듬 해 또 다른 잎들이 같은 날 와르르 태어나고 또 가지를 떠나고... 그들은 그렇게 생몰을 반복하며 자라나고, 나는 처음 태어난 그 몸을 가지고 이렇게 자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묘하다. 갑자기, 몹시 사무치게 그 잎들이 그리워졌다. 같은 날 태어났다는 인연으로.
이 시집에는 꽃과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시를 읽으며 만나게 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 정원에 심었다 제비꽃, 베고니아, 제라늄, 라일락, 애기똥풀, 조팝나무, 산수유, 층층나무, 붉나무, 쥐똥나무, 비비추, 때죽나무, 수국, 배롱나무...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내 머릿속에 꽤 근사한 정원 하나가 태어났다. 꽃을 좋아하다보니, 꽃이 등장하는 시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이 시집이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빗방울' 전문)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한 나에게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 '**과 ##'식으로 짝꿍을 이루는 제목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대와 산', '봄과 밤', '라일락과 그늘', '조팝나무와 새떼들', '산과 길', '덤불과 덩굴', '아이와 강', '발자국과 길', '쥐똥나무와 바람'... 상당히 많은 시의 제목이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나도 가만히 '나와 ...' 제목을 지어보았다. 나와 가족, 나와 강아지, 나와 책, 나와 친구, 나와 사진, 나와 여름... 내 옆에 많은 존재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지고 푸근해졌다. 시의 제목들에서 어울리는 법을 배워본다.
아름답고 향긋하고 다정하고 싱그럽고 가끔은 헛헛하게 만들기도 하는 시들을 만나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시인과 고향이 같은 걸 알고 더욱 반가웠는데, 시인 생전에 한 번 뵙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앞으로 기회가 없으니... 대신에 시인이 남긴 시집들을 한 권 한 권 더 많이 만나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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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라, 투명해져라, 가벼워져라.
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다. 시는 비유와 묘사 등 수 많은 표현기법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형상화 한다. 그렇다면, 시 혹은 언어를 통해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담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언어로써 사물 혹은 자연의 장면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모든 예술이 그렇듯, 언어, 그림, 몸짓, 선율 등에 사고가 개입되는 순간 주관적 관점에 의해 걸러지고 선택되어 예술로 표현된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에 의해 선택된 장면과 언어를 통한 대상과 거리에 대한 객관적 표현은 불가능하다. 또한 독자의 인식에 따라 그 이미지는 얼마든지 변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규원의 마지막 시집 <두두>는 현상 자체를 그대로 포착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시에서 주관을 배제하려는 시인의 무모한 도전은 아니다. 시인이 말했듯, 주관의 개입 없는 시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시인의 주관은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장면을 포착하고, 언어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주관의 개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두>는 주관을 배제한 날이미지 혹은 무의미시에 대한 시인의 언어적 실험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포착하여 최소의 사건을 최소의 언어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규원의 <두두>는 한없이 가볍고 투명하다.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 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 산과 길 (p.23) - 외딴 집이 자기 그림자를 길게 깔아놓고 있다 햇빛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조심조심 떨어지고 있다 바람도 그림자를 밀고 가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림자 한쪽 위로 굴러가던 낙엽들도 몸에 묻은 그림자를 제자리에 두고 간다 -빛과 그림자 (p.54) - 시인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인과관계가 아닌 개별적 동시사건이자 한순간에 포착된 최소의 사건이다.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개별적 존재로써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사건이 되지만, 각각은 행위는 개별적 존재를 부여받는다. 해설의 이광호의 말처럼, “언어가 사물에 대한 덫이 아니라,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상상적 공간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 위해, 그의 언어는 그토록 맑고도 정밀(p.81)”하다. 시만큼이나 시집이 얇고 가볍다. 시의 길이가 짧기 때문이겠지만, 유독 시집의 여백이 눈에 띈다. 이는 시인이 열어주는 상상의 공간이다. 따라서 비어있으되, 결코 가볍지 않은 가득찬 여백이다. 이제 시인은 세상에 없지만, 시로써 이 세상에 그는 영원한 것처럼. 구멍이 하나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 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지는 구멍이 하나 있다 때로 바람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둘이 모두 자취를 감추는 구멍이 하나 있다 - 구멍하나 (p.56) - 서재의 책꽂이에 더 이상 그의 시집이 쌓일 수는 없겠지만, 내 시의 마음에는 그를 위한 작은 자리하나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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