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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실(史實)에도 여러 가지 역사가 존재한다. 같은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정조의 경우만 해도, 개혁적인 군주였다는 평가와 보수적인 군주였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2’의 저자 이덕일은 정조를 개혁군주라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하는 입장이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정조에 대한 이덕일의 애정이 진하게 느껴진다. 정조를 개혁군주를 넘어서 ‘철인 정치가’ 로 격상시키며, 문체반정과 화성건설 등 정조의 치세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 일변도다. 문체 반정은 천주교 같은 사학(邪學)에 빠지게 되는 핵심 원인을 패관과 소품으로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노론의 천주교 공격을 피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방어책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화성건설은 사도세자의 추숭사업과 새로운 조선 건설이라는 정조의 비전이 총망라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정조는 조선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는 사도세자의 비극이 언제든 다시 재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조선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어야 하기에, 사도세자가 누워있는 곳 수원을 새로운 중심지로 선정했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각종 기술과 새로운 제도를 적용하고 시험했다. 화성 건설의 노동력을 부역이 아닌, 백성들에게 품삯을 주고 일을 하게 했는가 하면, 도드레나 기중기 같은 과학 기술을 십분 활용하면서 공기를 대폭 줄여 건축비도 예상보다 훨씬 절감할 수 있었다. 또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확대하는 등 화성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다. 화성을 자급자족하는 상업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에서 기존처럼 丁(정)형이 아니라 十(십)형으로 건설하는 가하면 조선의 상업을 가로막았던 금난전권을 철폐하고, 신해통공을 유통시키며 조선의 상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조의 치세는 조선을 개방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1800년 정조의 죽음은 이런 변화를 미완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덕일은 정조가 구축했던 정치 체제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을 바뀔 수도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정조의 죽음에 진한 안타까움은 토로하고 있는데, 정조 사후 급속도로 반동으로 치달아갔던 조선사회를 보면 그 심정이 일면 수긍이 된다. 정조의 죽음으로 조선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됐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그리고 조선은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하고 민란이 발생하는 등 명백한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끝없는 수양으로 완성된 인격을 추구하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을 새롭게 바꾸려했던 초인, 자신과 역사를 향해 무한책임을 지려했던 한 비운의 영웅에게’ - 이덕일이 이 책의 첫 장에 밝힌 소감을 보면, 정조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정조에 대해 개혁군주라는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읽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의 저자 백승종은 정조를 보수적인 군주라고 평가했다. 정조는 문체 반정을 통해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차단함으로써, 조선 지배층들이 성리학 이외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펼치는 것을 고사시켰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선의 체제를 지키고, 조선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을 내놓아서, 이덕일과는 이견을 드러내고 있다. 정조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린 책을 읽고 보니, 혼란스러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정조와 정조 시대를 좀 더 비판적으로, 다각적으로,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정조라는 인물에 존재하는 여러 역사적 평가, 일단 정조에 대한 내 평가는 유보했다. 더 지켜보고 공부한 다음에 판단할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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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선이 성리학 유일 사상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13 페이지) 정조는 천주교가 성행한 근본적인 이유로 문체를 들었다.(29 페이지) 정조는 자신이 없었다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라 자책하며 평생을 산 인물이었다.(42 페이지) 노론은 유학의 최고 이념인 삼강오륜마저 자당(自黨)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받아들였다.(48 페이지) 정조는 사도세자 사건을 거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처단할 것이라는 영조의 유훈을 받들자니 아버지의 원혼이 울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니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불효손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서 해법을 찾았다.(53 페이지) 정조의 삶 자체가 그런 묘수 찾기의 삶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조가 택한 것은 사도세자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을 다른 명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할아버지의 유명(遺命)도 거역하지 않은 것이었다. 정조는 피눈물이 흐르는 한(恨)을 간직한 임금이었다.(57 페이지) 구천(九泉)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고 있는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길로 정조가 택한 것은 천장(遷葬)이었다.(70 페이지) 양주 배봉산 갑좌(甲坐) 언덕에 자리한 아버지 장현세자(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긴 것이다. 정조는 이곳을 현륭원이라 이름했다.(81 페이지) 정조는 조선의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으면 사도세자의 비극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비극을 막으려면 수원성 즉 화성(華城)을 중심으로 새 질서를 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용의주도했다. 무작정 왕명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10년에 걸친 천도(遷都) 계획을 염두에 두었다.
정조는 화(華)나라의 봉인(封人: 국경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세 가지 축원을 한 것(화봉삼축)을 기억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며 화(花)와 화(華)는 서로 통용된다고 설명했다.(96 페이지) 정조는 백성을 부역시키지 않고도 거대한 성을 지을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 정조는 축성(築城)이 소비가 아니라 생산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1 페이지) 정조는 화성과 그 일대를 시범지역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게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본받게 하려고 했다. 모든 백성들이 굶주림 없이 풍요롭게 생활하는 조선을 만들려는 정조의 꿈이 실현될 장소는 사도세자의 도시 화성이 될 것이었다.(115 페이지) 화성은 미래 계획도시였다.(127 페이지) 정조에게 정순왕후 김씨(자신보다 일곱 살 더 많을 뿐인 법적인 할머니)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다. 물론 정순왕후 김씨 역시 정조에게 원한을 가졌는데 그것은 정조가 오라비 김귀주를 탄핵해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죽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순왕후의 원한은 인과관계를 무시한 것이었다. 정조가 김귀주를 탄핵한 것은 처벌 차원의 당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153 페이지) 그런 정순왕후를 정조는 매일 문안해야 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 역시 정조에게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노론의 당론에 따라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했으나 정조의 즉위에는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정조를 어떤 인물이라 불러야 할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낸 임금이라 하고 싶다. 정조가 처한 상황은 정신병 발병으로 이어질만한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손이 있었기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고 어머니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버릴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159 페이지) 정조는 지금의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승 사업을 하지 않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새 왕을 모시고 추승 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생각했다. 전자는 영조에 대한 의리이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의리였다.(161 페이지) 정조는 독서 군주였다. 정조는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책을 읽는 것 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외기(外氣)가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177 페이지) 또한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라는 말도 했다.(178 페이지) 모두 ‘일득록(日得錄)’에 전하는 바다. ‘일득록‘은 정조가 경연(經筵) 등 제반 행사에서 대신·각료·유생들과 나눈 대화와 전교(傳敎)를 수록한 책이다. 정조는 즉위 당시 만 24세에 불과했으나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학문은 어느 노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는 모두 동궁 시절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83 페이지)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밤을 자주 새우곤 했다. 정조는 경연(經筵)을 통해 주자학에 경도된 신하들의 좁은 시야를 넓게 틔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경연관들의 수준이 정조에 미치지 못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도 구체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193 페이지) 경연관들의 수준이 미흡하자 정조는 한 가지 방안을 강구했다. 미리 공부(예습)하게 한 것이다. 정조는 경연에서 강학(講學)해야 할 부분에서 미리 문목(問目: 의문형으로 뽑은 문제)을 뽑았다.(193 페이지) 정조는 재위 21년(1797년) 6월 정약용을 동부승지로 임명했는데 정약용은 사직상소를 올려 자신이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서학에 빠졌었다고 시인하며 체직(遞職)을 요청했다. 정조가 사임하지 말라고 명했으나 정약용은 끝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노론은 정약용을 관직에 천거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231, 232 페이지)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오회연교(五晦筵敎)를 내린다. 5월 30일 경연에서 중요한 하교를 내린 것인데 이날이 그믐이기 때문에 호회연교라 불린다. “모든 신료들이 자기 조부와 부친이 선조(先朝: 영조)를 위해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어찌 모년(某年)의 의리를 범하는 일이 벌어졌겠는가.”(232 페이지) 사도세자 사건을 언급한 것이다. 정조는 이 전교에서 자신의 재상 기용 원칙을 천명했다. 정조가 8년을 주기로 번갈아 등용한 세 정승은 남인 채제공, 노론 김종수, 소론 윤시동이었다. 오회연교 이후 정조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가슴 속의 화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어 정조를 괴롭히는 것이다. 정저는 스스로 처방하고 조제했는데 이는 정조의 의학 지식이 어느 어의(御醫) 못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주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236 페이지)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우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48 페이지)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마주칠 수 없다는 법도 때문이었다.(246 페이지)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252 페이지) 반동(反動)이 시작된 것이다. 천주교 탄압, 남인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그토록 살리려고 했던 동생 은언군 이인도 사사(賜死)되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이 빈발했다. 정조 재위 때에는 민란이 없었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선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 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다.(270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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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최고의 전성기는 조금은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의 500년의 역사중 초기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이후로는 전성기를 회복하려
는 노력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과정에는 당연한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다 둘러 보아도 한 왕조가 500년 정도의 긴
시간을 꾸준히 군림한 나라는 찾아보기가 힘드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통틀어 국가의 형태를 제대로 이룩한 나라들은 모두 적어도
중국의 이합집산하던 왕조들에 비해서는 월등히 긴 시간동안 존해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쩌면 정상적인 그러한 왕조의 생명력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왕이 존재하는
나라들의 전성기는 두 번째에서 다섯, 여섯 번째의 왕에게 찾아왔다. 물론 더 멀리
고대의 왕국들은 다르지만, 그들은 국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먼저 이루어졌기에
단순 비교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조선의 전성기가 세종대왕의 시대에 이
루어진 것은 시기적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종대왕의
정치적 능력도 그러한 전성기가 당연하다 느껴질 정도로 훌륭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조는 불행한 왕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과 왕이 되기 전과 이후에 그의 목숨을 노
렸던 여러가지 사건들 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왕이었던 효종에서 시작되는 왕들
이 신하들의 힘이 강했음에도 적절히 한쪽을 이용해 다른쪽을 제어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지만, 정조는 불행하게도 너무나도 긴 시간을 집권한 노론의 세계에서 그
리고 그러한 노론에 대항할 상대 세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되었고, 또
한 그들을 상태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조의 삶을 두권의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이책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는
삶, 그자체가 비극이었던 그럼에도 비극에 함몰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운명과 기득
권에 저항했던 한 왕의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고 있다. 하지만 그 왕의 마지막과
그후의 일들까지도 알고 있는 후대의 우리에게는 그 왕의 삶은 읽기에는 무척 큰
고통이 함께한다. 결국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의에 의해서 실패한 개혁과 삶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 왕이 없어진 것이 이후에 우리 민족 전체
에게 불행한 삶을 가져왔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항상 역사를 이야기할때면 쉽게 듣고, 말하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
그렇다. 우리는 기나긴 정조의 정적들이 기득권을 갖고 그들의 세계로 만든 세계에
서 살아왔다. 불행히도 그 노론의 후예들은 지금도 우리 세계의 기득권 세력이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그들은 나라와 민족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오랜기간을 존재하고 우리를 지배하면서 당연하게 느껴지는
잘못된 일들을 고쳐볼 기회를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가져볼 수 있었고, 스스로 그러
한 기회를 저멀리 던져 버렸다. 단지 결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믿고 말이다.
정조가 떠난 후 조선의 백성들을 지탱해 주었던 희망도 떠나 버렸듯, 어쩌면 우리
는 우리의 손으로 지금의 우리가 아닌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질 희망을 쓰레기통
에 던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는 더욱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의 삶을 함께 읽어가는 것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럽다해도 그를 고통받게한 기
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실체를 알고, 그들에게 속지 않을 수 있으려면 그들에 대
해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희망이 사라진 슬픈 시대에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는 우리가 손
에 들고 읽어나가야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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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TV 에서는 드라마 ' 이산 ' 이 한창이다.
이산이 바로 정조다.
그래서 정조에 관련된 책들이 줄줄이 출간되고있다.
내가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작가 이덕일 교수 때문이다.
이덕일 교수의 역사서를 즐겨보기도 하고
몇 년 전에 읽은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 에서
이덕일 교수의 정조에 대한 평가를 읽고 참으로 안타까웠었다.
그래서 더 자세하게 읽고 싶었기에 주문했다.
두 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챕터를 인물이나 사건 단위로 나누었다.
철인(철학자) 군주에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철학부분이 조금 어렵다. -.-;
경전에 대한 토론 내용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 안되는 곳도 있다.
정조의 죽음엔 늘 독살설이 따라다닌다.
그 만큼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은 임금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고 조선후반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개혁 군주..
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국사시간에 배운 내용들은 거의 잊었었다.
하지만 한을 가슴에 새기고 적진에서 홀로 외로운 임금이었다.
가장 믿었던 신하에게 배신당한 임금이다.
또한 진정으로 백성을 가슴속에서 사랑한 임금이었다.
학자였고, 독서광이었다.
시간이 있어서 책을 읽은게 아니라,
자는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었던 임금이었다.
노론은 소의고 조선은 대의다.
하지만 정조의 신하들은 당을 위해 소의를 택했다.
역사는 가정을 해봤자 변하지 않지만...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도...
우리 조선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강한 조선으로 일제강점기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조...................
우리 나라 역사중에 참 드문... 존경할 만한 임금이다.
올 봄엔........... 화성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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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대한 리뷰를 써놓고, 또다시 2권을 쓰자니, 별로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비슷비슷한 말들이 나오게 되어 좋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것 같아 망설여진다.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정조는, 새로운 시대를 꿈꾼 지도자라 할 만하다. 하긴, 어느 시대인들 새로운 시대, 개혁을 부르짖지 않은 리더가 있었던가. 내가 보기에 가장 어처구니 없는 대통령 중 하나인 김영삼도 그랬고(물론 권력의 부당함으로 치자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빼놓을 수야 없겠지만.), 이제 새롭게 어처구니 없는 대통령으로 이 짧은 기간에 급부상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도 747이니, 국민 성공이니 해 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한다. 정조는 그의 모순된 태생(아버지와 할아버지 둘 중 어느 하나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적 숙명)에서 갈등하고 갈등하면서도 조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왕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부터 조선은 후퇴했으며 결국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정권 주위의 세력 다툼은 재미있다. 그리고 언제나 추잡한 느낌이 든다.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정권 주위에서 "아잉~ 오빠, 한 자리 줘야 해."라고 이야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청와대 수석을 지냈고, 숙명여대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고 하고, 그 외 누가 누구 옆에서 권력을 탐하네 어쩌네 하는 모습은 정조를 둘러싼 지저분한 권력욕을 떠오르게 한다. 그나마 정조는 자신이 꿈꾼 조선의 멋진 모습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기라도 했지, 지금 청와대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한동안 뉴스를 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부디 역사가 올바로 흘러가길. 그리고 그 역사의 방향은 재벌이 아닌 대다수 우리 국민을 위하는 방향이길. 그것이 정의의 길임을 나의 아들딸에게 가르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