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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자크 랑시에르가 한국에 왔다. 인터뷰 기사를 보고 흥미를 느껴서 이 책을 샀다. 잔뜩 기대를 하고 첫 장을 편느 순간 바로 후회했다.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이 수업시간에 한 번역 정도의 수준이었다. 어떻게 돈 받고 이렇게밖에 번역을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한 그런 글이다. 도서관에서 한번 읽은 뒤 괜찮으면 사기를. 어지간하면 사지 말기를 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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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나 미학, 영화를 놓고 논문을 쓰는 이들이라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이름을 본문이나 주석에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간혹 정치와 미학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정치철학자도 민주주의와 맑스주의에 대한 랑시에르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을 법하다. 그는 맑스이론의 과학화에 전념했던 알튀세르의 학생이자 마오주의자였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유토피아 냄새가 물씬 나는 맑스이론에 몸담았던 자신의 과거를 비판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교조주의적 맑스주의에도 반대하지만, 영미 신좌파의 비판적 맑스주의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랑시에르의 이론은 정치의 미학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미학의 정치성을 강조하고 있기에 정치철학자와 미학자 모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예술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의 교집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어떤 풍경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정치적 경험의 미학적 차원과 예술적 경험의 정치적 차원이 겹쳐지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와 예술적인 것의 가장자리가 서로 포개진다. 랑시에르는 예술의 체제를 크게 윤리적 체제, 재현적 체제, 미학적 체제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이 구분의 핵심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감성적인 것의 나눔'(감성의 분할)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 작품을 예술로 정의하는 것은 감성적인 것의 나눔에 의해서다. 감성적인 것의 나눔이란 실재에 관한 상이한 지각양식들을 수립하고 관리하는, 사회적 지각의 정치적인 기반이다. 해방의 관건은 이 그물망과도 같은 감성적인 것의 나눔을 해체하는 일에 달려 있다. 영화 '메트릭스'를 본 적이 있다면 감성적인 것의 나눔을 '지각 영역의 메트릭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예술들의 윤리적 체제는 예술활동이 공동체의 존재방식에 즉각적으로 동화되는 체제다. 윤리적 체제에서 춤은 의례이거나 치료이며, 시는 교육의 형태이고, 연극은 시민적 축제다. 한마디로 예술들의 윤리적 체제란 예술적 실천들과 작품들이 이것들의 직접적인 도덕적정치적 가치에 따라 파악되고 규정되는 체제이다. 시적/재현적 체제는 미메시스적 활동이 그 고유한 감성적 영역에 의해 정의되는 체제다. 재현적 체제는 예술을 생산하기 위한 규칙(포이에시스)과 인간적 감성의 법칙(아이스테시스) 사이의 일치를 전제한다. 이 체제에는 재현 가능한 것들과 재현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위대한 주제에 적합한 고귀한 형태들과 저급한 주제에 적합할 수 있는 열등한 형태, 예술과 장르의 위계가 있다. 이 재현적 체제는 사회적 세계와 허구적 세계를 조직하는 구조와 규범의 통약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 예컨대 고전주의 예술은 시적/재현적이고, 반면에 모더니즘 예술은 미학적이다. 미학적 체제란 더 이상 그 어떤 일치의 형태도 혹은 이런 유형의 그 어떤 위계의 형태도 전제하지 않는 예술의 체제다. 낭만주의 예술과 리얼리즘 예술이 시적/재현적 체제를 어떻게 무너뜨리기 시작했는가를 보여주는 것과 연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