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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는 책이 잘 안읽힐 땐, 접고 다른 책을 본다. 이것 저것 다 손에 안잡히고 집중이 안될 때 가장 책에 빨려들게 하는 작가가 폴 오스터다. 장르 소설이 아닌데도 작은 긴장감이 흐르고, 현대 소설인데도 대체 인물들은 뭔 생각이래 하고 답답하게 하는 법 없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대가임에도 대중소설적인 인간 관계들이 쩔그렁 거리며 내는 소란들이 있고, 도시적인 은은하고 세련된 문체로 늘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매번 그의 소설들은 새롭다. 완전히 새로운 주제, 새로운 시도, 화법의 변화가 있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뭐 폴 오스터의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 몇 개 안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개 읽자 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몇개만 읽어도 그 사람을 많이 읽은 편이 된다. 얼핏 생각하면 1984를 떠올리게 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의 세계를 다룬다. 모든 것이 사라져 내리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는 이 도시는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을 염두에 두고 상상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안나 볼룸은 오빠를 찾으러 떠난다.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는 곳이라면 누가 왜 갇힐 것을 무릅쓰고 떠날까. 가는 배가 있으니 오는 배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항구는 곧 봉쇄되고, 국경은 멀다. 알고 있는 것은 단지, 현재 오늘이 이제까지 중에서 가장 열악하지만, 그 하루가 지나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진다는 것 뿐이다. 옛날이 아무리 나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이 오늘날의 그 어떤 것보다 낫다는 믿음은 이 도시에서 단단하고 유일한 믿음이다. 죽음에 이르기 위하여 죽음의 질주자, 최후의 점프, 안락사 클리닉, 암살 클럽 등의 클럽들과 서비스 상품이 난무하는 곳, 도시 거주자의 반이 갈 곳 없는 노숙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고, 어디를 가든 시체가 널려있는 곳. 그 시체에서 옷이며 소지품이며 금니까지 수집해 가는 사람들 틈에서 안나는 살아간다. 이렇게 얘기하자. 우리 모두가 괴물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내면에 옛 삶의 흔적을 지니지 앟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아마도 이게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은 다 끝나고 없다. 하지만 그 옛 삶을 대신해 들어선 삶이 어떤 삶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사람들ㅇ게는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게 엄청난 고통이다.... 가장 일상적인 일에 맞닥뜨려도 어덯게 행동해야 할 지를 모른다. 행동을 할 수 없기에 사고 능력도 없어졌다. .. 주변의 모든 것이 변화에 변활ㄹ 거듭하면서 매일 새로운 변동을 낳는다. 예전에 그 흔들림없이 존재했던 가정이나 전제가 한순간에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오빠를 찾으러 갔지만, 오빠를 찾을 만한 단서는 전혀 찾지도 못한채, 그녀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는다. 노숙을 하며, 넝마주이로 살아가다가 노인을 도와 그 집에 들어가서 숙식을 함께하지만, 노인 부부의 생계까지 책임지는 신세가 되고, 그러다가 그들이 죽어 집에서 내쫓긴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빠의 소식을 알지도 모른다고 이름을 적어간 사뮤엘 파르라는 기자를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져 그가 묵고 있던 도서관에서 함께 지낸다. 그러나 그 도시는 너무나도 위험한 무법 천지였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더이상 아기가 생기지 않는 도시에서 그들에게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생명이 싹텄는데, 신발을 구하러 나갔다가 공격을 받아 그 짧은 행복은 종말을 맞는다. 크게 다친 그녀는 우연히 쉼터의 순찰대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그곳에서 노숙자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또한 그곳 운영자인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쉼터 워번하우스는 예전에 있던 재산들과 골동품들 및 귀금속 등을 팔아서 노숙인들에게 단 몇일만이라도 깨끗한 옷과 따스한 음식, 편안한 침구와 온수가 나오는 목욕 시설등을 제공한다.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노숙인들이 단 몇일이라도 그러한 혜택을 누리고 힘을 얻기 위해 쉼터 앞에서 길게 줄을 서있는다. 거기서 노숙인들을 면담하는 일을 맡은 그녀는 사뮤엘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역시 앙상한 뼈만 남은 채로 거의 죽다 살아남았다. 마침 워번하우스에 젊은 남자가 필요했던 빅토리아는 안나가 자신을 배신하고 사뮤엘과 함께 사는 문제에 개의치 않고 사뮤엘을 쉼터 운영에 의사 역할로 끌어들인다. 이 때 이미 워번하우스는 모든 재산을 다 소진해서, 남은 것이 없어 문을 닫을 위기에 있었다. 어쨌든 가구와 건물 기둥마저 뜯어내어 난방을 하며 추운 겨울을 난 그들은 국경을 넘기로 모의하는데, 안나는 어렵게 발견한 오래된 빈노트와 연필을 손에 쥐게 되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이 소설은 안나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이 그곳에 오게된 경위와, 그 이전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약간의 설명적 회상을 덧붙여 써내려간 이야기다. 줄거리를 길게 쓸 작정이 아니었는데, 세 줄만 쓰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사실 줄거리 자체 보다는, 소설의 문체가 내뿜는 그 폐혀의 분위기다. 그곳의 섬뜩한 풍경들, 더이상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고, 점점 부서져내리기마 하는 어느 도시에 사람들이 갇혀 있을 때, 그 절망적 아비규환 속에서도 여전히 체제는 계속되고 있고, 억압과 강제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모습의 풍경들을 만져질듯 실제같이 묘사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가. 어떤 것, 왜 이런 완전한 가상의 폐허의 도시가 어쩐지 익숙한가. 어느 외진 곳의 똑같은 풍경이 실제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절묘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그 희망없는 땅, 나날이 더 나쁜 일만 기다리고 있는 무너져내리는 공간에서도 삶은, 사랑과 헌신은, 미움과 폭력 못지 않게 계속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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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함순이란 작가의 '굶주림'이란 소설을 읽어봤었다. 그렇게 두껍지는 않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비참하게 가난에 찌드는 생활에 대한 설명과 심리묘사때문에 나름 많은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읽었던 기억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동일 작가의 '달의 궁전'에서 보면 주인공이 뉴욕 센트럴파크 주변에서 찌질하게 굴러먹는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 절망적인 분위기와 상황이 작품 전체를 커버한다고 하면 조금 더 이해가 되려나?
어찌보면 뻔한 레토릭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그려진 지옥같은 사회에 대한 묘사는 어쩌면 지금 현대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무능하기 짝이없으면서도, 시민들의 생활과 생존과는 상관없는 정말 무의미한 사업들만을 벌리고, 또한 그 일들의 관성만으로 인생과 사회의 중요성을 호도하는 사회.
또한 개개인들은 초등학교에서 배울법한 인간과 사회, 그리고 미래와 현재에 대한 기초상식들을 망각하고 때론 무시하면서 서로간의 팍팍하고 까칠한, 그러기에 훨씬 더 나아간 살벌한 관계만을 이어가고, 또한 심화시키고...
표면상으로 아주 궁핍하고 처절하게 그려졌을 뿐이지, 현대 관료주의와 자본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스케치라고 해도 강하게 반발하긴 어려울 정도다. 다만, 폴 오스터의 입담이랄까, 필력이랄까... 그것이 이는 분명 픽션임을 잊지 않게해준다.
하지만... 천개의 조각으로 깨어진 거울에 비친 이 사회가 아닐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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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아하는 폴 오스터의 소설이다. 한참 전에 거의 새 거 같은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해놓고, 최근 완독했다.
'폐허의 도시'라는 다소 자극적이면서도 고루한 제목 때문에 소설의 내용을 예측하기 어려웠는데, 책장을 넘기니 제목처럼 진짜 폐허의 도시가 눈앞에 딱 나타난다. 2천년 즈음의 밀레니엄 관련된 유행의 결과물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하면서도, 폴 오스터 특유의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그리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토리에 금새 휩쓸리고 말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모두 어느정도 폐허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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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로 만나는 폴 오스터의 책이다. 작년 가을에 <뉴욕 3부작>을 시작으로 읽기 시작했다. <달의 궁전>, <거대한 괴물>, <우연의 음악>, <신탁의 밤>, <공중 곡예사>, <동행>, <브루클린 풍자극>, <환상의 책>, <스퀴즈 플레이>, 그리고 <폐허의 도시>까지, 약 1년 동안 한달에 한 권 씩은 읽은 셈이다. 그리고 더불어 <타자기를 치켜세움>과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인줄 알았다>도 있다. 아직 4권 정도 더 읽어야 할 책들이 남았다.
지금 나에게 있는 책은 고작 5권이지만, 조만간 모두 구입해서 앞으로 읽고 또 읽을 소중한 책들이다.
<폐허의 도시>는 있을 법한 미래의 어느 도시의 이야기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책들은 많이 있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 <1984년>과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책들이다. 이 세권의 책은 미래의 도시의 모습을 황폐하고 삭막하며 암울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도 폴 오스터만의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미학'도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어떤 사소한 것들도 놓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네 인생을 결국 따지고 보면 수많은 우연과 사건의 복합체가 아닌가. 그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지 몰라도 결국엔 모든 삶이 그 큰 줄거리 속에 본질적으로 마구잡이의 우연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로 파견근무를 간 윌리엄 오빠를 찾으러 여동생 안나가 그 도시에 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끔찍한 그 도시에서의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도시는 말 그대로 폐허의 도시이다. 지금의 의식주에 해당하는 개념들이 모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다음날 눈을 뜨면 어제는 먼 과거가 되어버리고, 모든 것이 헛된 것,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법의 천지에서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공격해야만 하는 곳이다.
<죽음의 질주자>, <최후의 점프>, <안락사 클리닉>, <암살 클럽>, <변형 센터>와 같은 방법들로 사람들은 죽는다. <기어다니는 사람들>, <웃음 짓는 사람들>, <개 같은 사람들>, <뱀 같은 사람들>, <종말론자> 등과 같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자이며 넝마주이로 생활을 지탱해 나간다. 거기다 불확실한 기후까지 폐허의 도시를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
그러한 도시에서 안나의 넝마주이 생활, 이사벨과 페르디난드와의 만남, 그리고 사무엘과의 도서관 생활, 마지막으로 <워번 하우스>에서의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폐허의 도시에서의 생존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희망의 한줄기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 힘든 여정을 계속해 나간다.
이야기의 끝까지도 결코 이것이 끝이 아님을, 그리고 그 이후의 모습을 전혀 예측 할 수 없게 만든다. 있을 법 하지 않은 도시의 모습이지만 지구상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든다. 읽고 나면 다시한번 폴 오스터에게 반하고 만다.
어쩌면 끝이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니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상상의 목적지 말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멈출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멈춘 것뿐이다. 그래, 멈출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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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글 답게 술술 잘 읽힌다.
이런 소설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으나, 가상소설이나 혹은...SF라고 하긴 좀 그런가? 여하튼, 밑도 끝도 없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안나의 이야기인데, 읽는 순간부터 은근히 거슬렸다.
이런류의 소설을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뭔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들어맞지 않고, 개연성에서 문제점이 보여지면...그냥 읽는 도중에 책을 놓아버리고 싶다.
폐허가 된 그 세상의 묘사는 근사하지만, 꾸민 티가 팍팍 나고, 앞뒤가 엉성한 것이 좀 그렇다. 윌리엄을 찾아나섰다고 하는데, 왜 그를 찾아 나섰는지 모르겠고...
이사벨과의 동거는 생뚱맞고, 사무엘과의 사랑은 황당하며, 빅토리아와 동성애는 어처구니 없다. 등장인물들과의 관계가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고 찜찜하다.
읽는 중간에, 그닥 재미있게 읽지 않았던 '더 로드'와 마찬가지로 그저그렇게 봤던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생각이 났고...마찬가지로 이 책도 그저그런 책 혹은 간만에 돈낭비 했다는 생각이 슬쩍 들 정도로...읽고 나니 허무했다. 당근, 남는 것도 없었고...--;;
ps.언제나 그랬듯이..책 뒷면의 서평이나, 옮긴이의 말은...어찌나 대단한지, 이 책을 보고 이것 저것 잘 읊어댔다. 이런 책들은...보편적으로 내용보다 해석이 더 뛰어난것 같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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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말하는 삶이 아닌가? 모든 것이 다 사라져 가도록 그냥 놔두자. 그리고 남은 것들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는 일. 그리고 그때까지 우리가 생존할 수 있을지 기다려 보는 일. 아마 이게 가장 흥미로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스포일러 있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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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행방불명된 오빠를 찾아나선 여동생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올해 20살의 요조숙녀로 부유한 집안에서 공주님처럼 자라난 온실속의 화초와도 같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디딘 그곳은, 자신이 알고있던 모든 단어들이 삭제되어버린 공간이다. 마치 햇빛에 녹아 없어지는 얼음으로 만든 것 마냥 허물어져 가고 있는 거대한 도시. 정부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노력만 할 뿐, 살기위해 뭐든지 해야 한다.
도시민 대부분이 도둑이거나 넝마주이인 이 도시.
엎친데 덮친격으로 소녀라고 불러도 될만한 이 여성, 안나가 이 도시에 들어오자 마자 항구가 봉쇄되고 만다. 살기 위해 도둑이 되거나 넝마주이가 되어 쓰레기를 뒤져야만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여러가지 것들이 있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 기준이 모호해진다. 살아남기 위해 기존에 알고 있었던 인간다운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를 떠올리게도 하며, 코멕 멕카시의 '더 로드' 의 세상과 흡사하기도 한 이 세상은,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리얼하다.
실제로, 전후세대를 산 우리 부모님 이전 세대도 그러했을 것이고,현대에도 종교분쟁중인 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도시들은 이러할 터다.
인간성을 포기하고 살아남아야만 하는 인간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 양심, 윤리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폴 오스터의 두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기 위해 등장인물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그만의 특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잘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작 답게 그럼에도, 작중 인물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고 있기도 한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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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안나 블름은 저널리스트오 '그 도시'로 파견을 갔다 실종된 그녀의 오빠를 찾아 지상의 지옥이라 불리는 도시로 건너가 그 곳에서 살아 남기위한 삶의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다. 2004.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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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새로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두근두근하는 일이다.
이 소설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토록이나 매력적이고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데,
거기에 더해 안나 블룸이 묘사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내면의 세계를 읽다보면 잠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나게 되어버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더이상 희망이 없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향한 노력. '죽음의 질주자들','최후의 점프','안락사 클리닉'등 자신들의 죽음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에 대한 묘사를 보다보면,
나 자신이 그 도시.
구정물이 흥건히 고여있고 파삭파삭 부서져내리는 낡은 빌딩들 사이의 도시 한가운데에 서서 떨어져내리는 좀비같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진다.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윤리'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게 만들어버리는 '폐허'.
폴 오스터가 묘사하고 있는 도시는 말 할 수 없이 잔인하고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현대의 지옥임에 틀림없지만, 오히려 그 묘사의 세밀함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이다.
한 사람에게 찾아드는 우연한 일에서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서사로 끝을 맺는 폴 오스터의 소설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다.
이 세상의 소설은 두 종류로 나뉜다.
나를 그 소설속의 세계로 옮겨다 놓는 소설.
그리고,
소설의 장치들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는 소설.
'폐허의 도시'는 전자에 속한다.
전자든 후자든 나를 몹시도 흥분시키는 건 마찬가지지만. [인상깊은구절] 더 극적인 죽음도 있다. 이곳에서는 '죽음의 질주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거리를 질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도리깨질하듯 팔을 마구 흔들고 목청 높여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달린다. 대개 떼를 지어, 여섯 혹은 열, 때로는 스무 명이 무리를 지어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든 없든,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달린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 달린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가능한 한 빨리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제 자신을 사정없이 몰아붙여 심장이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물론 질주자들 역시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달리며, 누구에게 뒤질세라, 동료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에 자극을 받아 그 광기의 질주, 인내의 한계에 도전한다. 아이러니다. 달려서 죽으려면 먼저 훌륭한 주자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극한까지 자신을 내몰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의 질주자들은 열심히 준비도 하고 훈련도 한다. 자신의 운명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그 운명으로 가는 길에 자칫 쓰러져 넘어져도 그들은 어떻게 다시 기운을 모아 계속 달려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겐 달리기가 종교와 같은 것이다. 이 도시에는 죽음의 질주자를 선발하는 사무실이 여러 개 있다 - 한 사무실이 9개 구역을 담당한다. 죽음의 질주자 단체에 가입하기 위해선 몇 가지 어려운 입회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물속에서 숨 멈추기, 단식, 촛불에 손바닥 올려놓기, 7일 동안의 대화 금지 등의 과정을 통과해야 가입 자격을 얻는다. 일단 가입하고 나면 반드시 단체 규약을 따라야 한다. 6개월에서 12개월 동안 합숙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식이 용법에 따른 훈련과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서 점차 음식 섭취량을 줄여 간다. 그래서 누구라도 마침내 죽음의 질주를 감당할 준비가 될 때쯤이면 최고의 기력과 최악의 허약함이 공존하는 신체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영원히 달릴 수 있는 상태이면서 동시에 체내의 모든 에너지 원천은 이미 다 소진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 모순의 결합 상태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그들은 이런 상태에서 지정된 날에 동료들과 함게 달린다. 계속 고함을 지르며 달린다. 자기 몸뚱어리에서 자신이 빠져나올 때까지, 자신의 껌질을 훌훌 벗어 던질 때까지. 마침내 영혼이 자유롭게 빠져나오고, 몸뚱어리는 땅바닥에 쓰러진다. 죽음이다. 죽음의 질주자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90퍼센트 이상의 성공 확률을 지닌 죽음의 방법이라고 선전한다. 이를테면 죽음의 질주를 두번 이상 시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보다 흔한 것은 고독한 죽음이다. 그런데 이 죽음 역시 대중들 사이엔 일종의 의식으로 통한다. 사람들은 어디든 아주 높은 곳으로 오른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뛰어내리기 위함이다. '최후의 점프'라 불리는 죽음의 의식이다. 사실 나도 이런 의식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꿈틀거리는 흥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싶다. 뭔가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자유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붕 위에 올라선 몸뚱어리. 마지막 순간을 마음껏 누려 보고 싶은 생각? 그리고 짧은 순간의 머뭇거림.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 금방이라도 분출될 것 같은 생명의 힘.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정말 순식간의 일이라 알 수가 없다) 공중을 가르며 길바닥으로 떨어지는 몸뚱어리. 군중들의 열광은 또 어떤가. 광란의 환호성과 흥분. 그들이 자아내는 광경은 격렬함과 아름다움의 뒤섞임이다. 그런 군중 속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그들은 자신들 삶의 비천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최후의 점프'는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죽음의 의식이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내면의 욕망, 즉 한순간에 죽어 없어지는 것, 짧은 순간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신을 말살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부합되는 의식이기도 하다. 나는 때때로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 가운데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 있지 않나 싶다. 죽음은 우리의 예술 형식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
| 솔직히 이런 소재는 많이 보아왔다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서 인간들이 쓰러지고 그 남은 사람들의 얘기가 되었든, 천재지변으로 인해 모든 것이 휩쓸려가 버린 후 살아남은 이들의 얘기가 되었든 잘못된 정치로 인한것이든, 기타등등이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보았다. 폐허가 되버린 우리들의 삶의 터전. 인간이 극한으로 내몰린 상황. 희망은 절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어딘가에는 탈출구가 존재할 거라 믿으며 버텨 나가는 몇몇의 인간들의 이야기. 너무 흔하디 흔한 주제고 아직은 현실과는 조금은 먼 얘기이기에 자칫 진부하고 와 닿지 않으며 지겹기만 한 이야기가 되버릴 가능성은 농후하다. 하지만 진정한 이야기꾼의 재능을 가진 폴 오스터의 손을 거치면서 이 진부한 얘기가 너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니 정말 이 지구상 어딘가에 이러한 도시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정도이다. 우리가 그들을 구원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흥미를 끌면서도 그의 문장은 너무나 고고하다. 작가가 사랑받는 이유를 알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