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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어) 허술해 보일 수 있지만 행복함에는 틀림없는 고민 중이다. 두세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을 탐독하며 선뜻 결정을 못 내린다. 이미 읽었고 가지고 있는 책에는 브이(V), 옛적에 읽은 책들 중 가지고 있지 않은 책에는 삼각형(△), 제목만으로도 끌리는데 읽어 보지 않은 책에는 동그라미(○), 어쨌든 당장 사서 읽을 책에는 왕별표(☆)....이렇게 하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닌 책이 거의 하나도 없다.
내가 문학작품에 욕심을 부리게 된 것은 중학시절 이후 수 십 년 만이다. 언제부턴가 '포기'했었다. 나는 문학을 제대로 읽어낼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고 '단념'했었다. '재미'가 없었다. 이 스토리가 저 스토리 같고 어디서 많이 본 인물과 대사 같고, 영웅적 서사이든 일상적 사건이든 나와는 무관했었다. 남의 상상에서 흘러나온 '허구'에 나의 사고와 감정을 투여하여 시간과 돈, 에너지를 바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었다. 전공이 영문학이었지만, 학업이 된 문학에 열심은 냈으나, 감동과 관심은 깊어지질 않았다. 중학시절 그토록 찬란하게 매료되었던 문학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박차고 나와 버렸다.
문학과 소원해지는 불상사가 벌어진 이유는 오로지 나의 '오만과 편견'이었다,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물, 배경, 사건 등을 묘사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동시에 머릿속에 이미지로 살려 상상하던 습관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 점점 내 성격이 급해진 탓에) 대충 줄거리만 잡아내며 휙휙 읽게 되었고, 시작부터 서둘러대다가 전개를 기다리지 못하고 결말부터 들춰보는 '야만적 행위'를 일삼았다.
독서의 시간은 책의 부피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앎에 대한 탐욕은 일화의 가장 뜨거운 부분들에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 지루하리라고 예상되는 몇몇 구절을 스쳐가거나 건너 뛰게 한다 (『텍스트의 즐거움』, 58쪽). 그러나 한 나라의 특수한 정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된 서술 부분을 뛰어넘는 것, 그것은 단순한 건너뛰기가 아니라 삭제이고, 생략이다. 지겹다고 건너뛰지 않기를 권한다. 작가가 어떤 상황을 유난히 길게 묘사한다면, 그는 그 시간에 속한 사건에 대해, 혹은 묘사에 대해 야심을 가지고 매달리는 것이고, 작품의 긴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줄거리의 고리만을 따라 띄엄띄엄 읽으면 즐거움에 다다르지 못한다.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겠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저자들을 읽기 위해서는 게걸스럽게 먹지도 삼키지도 말고, 이리저리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아주 가까이 섬세하게 털을 깎는 옛 독서의 여유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같은 책, 60쪽) 그렇게 한다면 저자가 여기저기 심어놓은 수수께끼를 알아내어 어느새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이어서 독자 스스로 책의 수준을 가리게 될 것이며, 취향을 찾을 것이고, 현실과 환상을 조화롭게 거느리는 유연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책들의 그림자』 86쪽
스토리는 문학작품의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비슷한 스토리를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이 어떤 식으로 내용을 분배하여 축조했는지, 어떤 스타일에 어떤 어조를 띠고 있는지, 어떤 언어표현을 구사했는지에 따라 즐거움과 재미의 깊이는 전혀 다르다. ---같은 책, 11쪽
딱 내 이야기였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대며 문학을 대했으니 즐거움을 찾기는커녕 뒤돌아서 버렸던 게다. 줄거리만 쫓다 보니 위대한 반열에 오른 고전들조차 내 손에서는 TV의 (김빠진 사이다 같은) 통속적 드라마로 추락해버렸던 게다.『책들의 그림자』덕에 나는 불안해졌다---내가 뭔가 잘못을 크게 한 것 같은 불편한 마음, 설익은 판단으로 무식한 용기를 내질러 뭔가 귀중한 것을 갖다 버린 것 같은 후회, 너무 중요한 것을 놓쳐 인생을 잘못 살은 것 같은 원통함이 밀려오며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도 수도 없이 '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전문가들의 권고를 들었지만, '내가 살아보지 못한 여러 개의 인생을 살 수 있다' '간접경험을 통해 삶을 확장할 수 있다' '감정이입을 배워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가 생긴다' 등등 그럴싸한 교훈들이 내 귓전에서 사라져 버렸었다.
『책들의 그림자』에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뒷받침하는 여러 작품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이론과 실제가 완벽한 콤비를 이루면서 '문학의 필요성'을 내게 설득시켰다. 이 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여 자서전과 일기까지 챙겨 읽지만 소설은 읽은 게 없는 아이러니한 상태였다) 『농담』 『문학의 공간』 『보이지 않는 도시들』 『싱글맨』 『텍스트의 즐거움』 등등 넘쳐나는 명품 저서의 목록을 선물 받았다. 문학읽기의 측면에서 본 내 인생에 대변동이 생긴 거였다!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가를 뼈저리게 실감했고, 어떻게 문학을 읽을지 방법론적 도움도 얻었고.... 죽을 때까지 결코 흔들림 없이 문학을 읽겠노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문학은 틀어박힌 삶의 한계성을 벗어나게 해주면서 상상력과 이해력을 돕고, 새로운 장소에 이르도록 해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여러 시점에서 사건을 진단해 볼 수 있는 경험을 갖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책은 사람을 도피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게 한다. 훈계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 인생에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사실이 문학이 잘 팔리지 않는 비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 『책들의 그림자』, 12-13쪽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비슷비슷한 하루의 반복은 그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표상된 외면을 찢고 들여다볼 때 거대한 새로움이 있다.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문학은 바로 유리창 안의 거울에 비친 나를 비쳐보게 되는 순간을 마련해 준다. 그것도 아주 경이롭게. 그리고 그 순간은 영원한 것으로 포획된다. --- 같은 책, 23쪽
그렇다. 내가 책을 읽었던 이유는 모리스 블랑쇼가 말한 '기분전환'을 넘어 없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이질적인 공간에 머물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회피와는 거리가 있다. 문학은 나로 하여금 현실 속에 안주해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현실을 진부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마주하게 한다. 비로소 내 앞의 보편적인 현실은 고유성의 옷을 입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다. 그러니 환상, 혹은 허구라고 비웃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 같은 책, 39쪽
『책들의 그림자』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면서_ 오래된 놀이, 문학>에서 시작하여 1장 <언어와 사물>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문학에 대해 삐뚤어져 버린 과거를 반성하고 문학을 읽는 새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남이 지어낸 '허구'에 영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항변해 왔던 이유는 문학을 진지하게 읽지 못해 빚어진 착각이자 오해였다. 문학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펼쳐 놓은 '그들 이야기 them story가' 아니라, 나보다 더 예리하고 섬세하게 삶을 경험한 진지한 목소리를 통해 발견하는 '나의 이야기 me story가' 될 수 있음을 몰랐던 게다. 문학 읽기는 천재들 그네들만의 놀이를 못마땅한 듯 부러운 듯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세한 언어를 통해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포착하고 그러니까,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볼지에 대해 믿을만한 가이드라인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 책의 첫 부분부터 강하게 와닿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댈러웨이 부인』은 냉큼 사서 이 책과 병행했다. 참고서와 실전문제집을 같이 공부한 셈인데, 효과로 따지자면 최상이었다. 오직 한 가지 아쉬움은, 왜 이 즐거움과 보람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인가... 이것뿐이었다. 이 책에서 일러주는 '문학의 참맛'에 째깍째깍 빠져들고 있었다.
적확한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한 독자가, 그리고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독자가, 저자가 이해하고 조명한 세계와 마주했을 때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언어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세계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물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낱말들과 결합되는 순간의 경이로움, 독서에서 찾은 생경한 풍경은 독자를 주목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언어에서 주는 새로운 영감에 의해 독서활동에서 빠져나와 일상세계를 바라보았을 때 독자는 다시 새롭게 사물을 바라본다. 독서는 단순히 언어로 된 풍경을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포개어진 감정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되고 숨은 기쁨을 알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라는 유한한 공간을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공간의 막을 찢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펼쳐진 공간에서 독자는 경이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같은 책) 45-46쪽
이 책이 내미는 유려한 권유를 받아들여 읽게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댈러웨이 부인』은 각각 리스본과 런던을 주 무대로 한다(전자의 경우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살아온 곳으로 스위스 베른도 자주 등장한다). 리스본과 베른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데도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언어만으로도 이 장소들을 생생히 알아볼 수 있었다. 광장, 다리, 학교 운동장, 교실, 책방, 동네 골목길,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에 이르기까지 생소한 공간들이 내 머릿속에서 나의 감각으로 그려졌다. 런던은 몇 차례 가본 터라 댈러웨이 부인의 행로와 타 등장인물들이 거니는 장소들에 대한 나의 기억이 책의 언어와 포개어지며 밀도 있는 읽기가 가능했다. 가본 곳이든 아직 미지의 곳이든 문학에서 마주치면 내가 생각하며 느끼며 살아가는 나의 공간이 되었다. 또한, 이 두 작품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태반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장면들이다. 그러나, 이 일을 겪고 있는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말투와 표정, 몸짓이 보였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많은 것들을 곰곰이 헤아려야 하는 그들과 함께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새롭지만 낯설지 않고, 처음이지만 야릇한 기시감이 풍겨 나오는 세계 --- 픽션은 분명 현실과 통하고 있었다.
『책들의 그림자』는 나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바라보게 한다. 저자가 여러 작품들을 인용하며 작품끼리 또는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풀어나가는 동안, 천일야화에 흠벅 빠져들던 고대의 왕처럼 그다음 페이지가 그다음 작품 이야기가 궁금하여 긴장감마저 들었다. 이 말은 나의 빈약한 읽기 스펙을 여실히 증명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이리도 모르는 작품이 많은 걸까! 한편으로 뒤집어 말하면 내가 접할 문학의 세계는 거의 무한대라는 말이다. 언어가 흩뿌리는 마법의 금가루가 언제 까지든 경이로워 그만큼 행복할 것이며, 나의 일상과 현실이 문학에 의해 재해석되고 새로운 차원으로 뻗어나갈 여지가 많이 남았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날이 발전할 것이다.
어렵게 되돌아온 이 문학의 세계에 탄탄히 발붙이고 싶다. 한 권의 책은 여러 권의 책으로 이어지며 문학을 점점 더 예리하게 간파할 능력을 내게 심어줄 것이다. 지금은 문학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초보이지만 계속하다 보면 실전력이 늘어 어떤 책으로든 활용과 응용이 가능한 실력자 수준에 올라설 것이다. 가장 높은 수준은 뭘까?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 '문학과 놀이'를 할 수 있는 상태, 혼자 하더라도 너무 재미있고 공감하는 인물과 언어가 있어 제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놀이가 되는 상태가 아닐까 싶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댈러웨이 부인』로 출발하여 얼마 전,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 번의 절정에 도달했고, 이제 숨을 고른 후 '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엄청난 도약을 하려한다.
우연히 읽게 된 『책들의 그림자』에서 시작된 나의 '문학 되찾기'는 순항 중임에 틀림없다. 이 문학 여정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명료한 목표를 세웠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정해두면 우왕좌왕없이 전진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모든 문학은 설레는 긴장 속에서 읽고 싶다:
첫 줄의 마술이 통하면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몸을 구부려 그 여정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목적지, 즉 책의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행위가 채우고 있는 사건에 개입하여 온전히 작중 인물들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레고리우스처럼 단 몇 장을 남겨 두고 다 읽어 가는 책 앞에서 마지막 문장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그 문장에 맞닥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져 망설이고 읽기를 늦추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시선은 되도록 천천히 움직이게 할 것이다. 이것이 문학과 놀이하는 방법이다 ---『책들의 그림자』, 29쪽
문학에 등장하는 일상적인 장면에서도 충격을 받을 수 있고, 이 충격이 던진 신선한 감각을 현실로 복귀해서도 유지하고 싶다. 현실에 휘둘리 않고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연습이 문학에서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때 왜 그렇게 문학이 나를 사로잡았는지 곱씹어 보았다. 다른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빠져들게 만드는 독서의 힘 때문이었다. 어떠한 문학작품도 현실적 사물들을 반복하지 않는 법은 없었다.(---) 현실적 사물들이 이질적인 언어에 의해 낯설고 신기한 모습으로 재현될 때면, 나는 멍해지거나 충격에 빠졌다. 나는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 이래로 나의 현실에 함몰되는 대신 스스로 제삼자가 되어 나의 경험, 환경을 바라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나는 가끔 내가 나라고 하는 어떤 사람의 대역을 맡고 연극을 한다는 생각을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관조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 그렇게 해서 나라는 사람의 행복 또는 절망에 빠져들지 않는다. 행복에 궁극적인 의미를 두면서 불행에 빠져드는 대신 냉정하게 사건을 하나하나 해결한다.(---) 이렇듯 책은 삶에 함몰되려는 나를 전혀 다른 인식에 눈을 뜨게 한다. 그 인식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같은 책, 198쪽
문학으로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뒤집기의 독서'라는 것을 해 보고 싶다. 『책들의 그림자』에서 자주 인용되는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롤랑 바르트가 얘기하는 '즐김'('즐거움'과 구분된다)을 하고 싶다:
바르트에 의하면, 즐거움의 텍스트는 만족시켜 주고, 채워주고, 행복감을 주고, 문화로부터 와서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반면, 즐김의 텍스트는 상실의 상태로 몰고 가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어쩌면 권태감마저도 느끼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문화적-심리적 토대나 그 취향-가치관-추억의 견고함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다시 말해, 즐거움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성취되는 수동성에 의한 것이라면, 즐김은 스스로에게 뷰여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찰, 불투명함의 찢어냄, 그리고 책 앞쪽으로 몸을 수그리는 자세이다. (---) 표면의 스토리를 이해하고 책을 덮는 독서가 즐거움의 독서라면 책에 흐르는 아이러니나 삶에 스며 있는 불가피한 외부의 힘에 대한 내면적인 목소리를 파악하는 것이 즐김이다. --- 같은 책, 206-207쪽 '뒤집기의 독서' 중
『책들의 그림자』덕에 이어진 롤랑 바르트 읽기, ('즐거움'이 아닌) '즐김'의 독서가 무엇인지 실감한다!
여러 차원의 문학에 빠져들면서 나를 확장시켜 (또는 나를 벗어나) 타자를 바로 볼 수 있고 세상도 반듯한 시선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문학의 소용은 극대치에 달할 것이다:
누스바움은 독서를 통해 여러 상황의 삶들에 간접적으로 개입한 독자는 실질적으로도 자신 앞에 놓인 다른 집단에게 적용할 수 있는 '공상하는' 습관을 배우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운 독자는 본 것에 대해 관찰자로서 재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 공적 합리성에 기여하는 부분이다. 공상하는 습관을 배운 개인은 공감의 상상력이라는 문학적 태도로 개인을 대할 때, 최소한 잠시 동안이라도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인 묘사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놀이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차원까지 나아가는 부분이다. --- 『책들의 그림자, 85쪽
이렇게 나의 세계를 넓히고 타자 및 세상과 원활하게 연결되는 문학 읽기가 지속되도록 '운명'적인 책을 자꾸자꾸 만나고 싶다. 우연은 없다. 어쩌다가 읽게 된 책도 사실은 '부름'이었고 나는 이에 응답했던 것이다. 나의 필요에 때맞추어 출현한 책은 나를 낯선 세계로 끌어들여 나의 낯익은 세계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공급한다.
책을 읽는 데도 계기가 있다고 말했다. 책의 부름이 있다. 책의 부름에 응답하여 작품 속의 삶에 관계하는데,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모든 순간에 현전한다. --- 같은 책, 206쪽
그리고 이 부름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 연쇄작용이 촉발되어 책 하나의 부름은 다른 책들의 여러 부름으로 고리를 이어가고, 때로는 동시다발적인 부름이 생기기도 한다. 시대와 무관하게, 공간상의 차이를 무색게 하는 초밀도의 네트워크가 책과 나 사이에, 책과 책 사이에 형성된다. 『책들의 그림자』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알게 되었고 이는『불안의 서』를 나에게 소개했다. 또 『불안의 서』의 저자 페르난두 페소아가 궁금하여 『페소아』(아르떼arte, 힘한민 저)를 읽었고, 이 모든 책은 나에게 리스본과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게 한다. 동시에, 『책들의 그림자』는 『댈러웨이 부인』로 인도했고, 이는 (책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게 한다. 『등대로』나 『세월』과 같은 버지니아 울프의 다른 소설들로도 이어진다. 물론, 이 책들은 내가 사랑하는 런던과 영국에 대해 오만가지 꿈을 설정케한다. 문학이 든든한 매개체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에 오밀조밀한 만남이 축적된다. 결국은 살아가는 것에 무성한 잎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만개하며 가치로운 열매가 무수히 맺힌다.
밋밋하면서도 가차 없이 진행되는 삶,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얼핏설핏 반짝이는 '빛'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루 같지만 그래도 자주 출몰하는 덕에 믿을 수 있는 빛은 문학에 존재한다. 언제 나올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있는 것은 분명하기에 기다리게 되는 빛도 문학이 안고 있다. 이 빛을 찾아내는 것은 우연과 모험을 동반한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들을 더듬다가 우연히 찾아낸 책이 나를 사색하게 하고 모험의 동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에서의 보물찾기이다 --- 같은 책,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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