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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신 아닌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세기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맹신하다 못해 어느 순간부터는 그릇된 질서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왜 그것이 답인지 묻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성적 혹은 과학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로 모든 것이 대체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1+1=2임을 증명하는 산수와는 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인간이 객관적이라 칭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의 가치판단은 개입되기 마련인 것이다. 즉, 역사가 승자의 기록인 것처럼 오늘날 진리라 여겨지는 것 역시 권력을 지닌 자의 기록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긴 생애 동안 다방면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 본 책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는 반전주의자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러셀의 후반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합리적 회의주의자’라는 단어는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회의주의자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보다 명확해진다.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 지금껏 이룬 진보마저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러셀은 그러한 회의주의자가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의 권력구조를 진실이라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장하는 객관성은 진정한 객관성이 아닐 때가 많다. 굳이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왜곡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국가들이 자국의 역사를 화려하게 포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지난 1,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의 국민들이 열렬히 전체주의 정권을 지지했던 것은 전쟁이 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자국을 향한 타국의 침략은 옳지 못한 것으로 곧잘 인식하면서도 자국의 침략에 대해서 관대한 까닭은 권력자의 그리고 국가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객관성이 조작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자유가 어느 시대보다도 확장된 오늘날에도 수많은 법들에 의해 우리의 행동은 제약되곤 한다. 조금은 위험한 주장일 수도 있으나 러셀은 모든 이들이 일정한 연령까지 공부해야만 하는 교육제도마저도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공부에 소질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공부를 잘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운동을 잘 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의무교육은 계급, 계층간의 격차를 줄여주는 가장 강력한 제도이다. 아이들의 적성에 따른 교육이 이상적이라고는 하나 우리 사회에서 만일 의무교육이 사라진다면 지금보다 더욱 부에 의존한 학력차이가 발생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러셀의 주장에 전적으로 반대하진 않는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러셀의 주장이 옳다는 믿음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불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의심하는 그 순간 우리에게는 개선의 여지가 발생한다. 그것은 러셀의 회의론이 지닌 힘이며, 더 큰 진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권위적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꺼려지는 것 이상으로 학교에서 학생에 교사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회의론은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자의 한낱 푸념으로만 인식될 때가 많다. 하지만 회의적인 사고도 얼마든지 합리적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이 그토록 강조하는 생산, 경제성장과도 연결시킬 수 있는 게 바로 회의적인 사고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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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책 4권째를 읽었다. 그 전에 읽은 책의 주제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글이지만(비슷한 주제의 글를 읽어서 인지는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이전의 책보다 더 철학적인 글이다. 더 철학적인 글이라고 하여 심오한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며 느낀 부분에 철학적 글을 가미하여 각 장의 내용에 어울리게 스며들게 하였다. '좋은 글'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구체성이 결여되거나 너무 구체적이어서 일반적 상황에 적용하기가 까다로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지 '좋은 글'이라고만 느낄 뿐 나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에 적용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러셀의 책을 읽으면 막연히 '그렇게 하여야겠다.'는 추상적 이해가 아닌, 구체적인 그러나 일반적 상황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러셀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의 모습들은 이성이 아닌 비이성, 합리가 아닌 비합리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모순들을 러셀은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러셀도 이야기 하였다싶이 사회현상의 문제점만을 지적하고 있고 그에 따른 해결책의 구체적언급이 부족하다. 대안 없는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 되지 않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러셀은 구체적 해결책 대신 사건의 본질파악에 주력한다. 사회모순에 대한 본질의 파악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본질파악의 방법으로 러셀은 "합리적 회의주의자"가 되라고 한다. 러셀은 사회의 여러모습을 회의주의로 바라보아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설명한다. 이기주의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단어라기 보다는 부정적 이미지의 단어로 인식된다. 하지만 제대로 하는 이기주의는 그렇기 않은 경우보다 훨씬 낳다고 러셀은 말한다.(page 60)제대로 하는 이기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게되면 자신에게 그 피해가 돌아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을 함부러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말(특히 손윗사람)을 잘 들을때 듣는 말이다. 러셀은 착한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본다.(page 139) 착한 사람은 전통에 어긋하지 않는 사람이고, 지배층의 권력에 순응하는 사람이다.(page 143) 자신을 '착하다'고 해주는 사람의 말에 의문을 가지게 되면 그는 즉시 버릇없거나 '못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사회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착한사람이 사회에 반항하여 말을 안들을 경우 사회는 혼을 낸다. 혼을 누가 내는 가에 따라(군인이 내는가? 경찰이 내는가? 혼을 직접내지 못하고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는가?) 그 사회에 민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한국은 누가 혼을 내는가?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러셀은 말했다. 그가 죽은지 100년이 더 지난 현재에도 마르크스의 이름은 화제거리인데 러셀이 글을 쓴 시기(1920년대)에는 마르크스의 인기가 더욱 컷을 것이다. 러셀은 마르크스가 엄청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유발하고 또한 자본가를 도덕적 혐오감을 주는 인물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page 167) 자본론1을 읽어보면 자본가의 비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나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셀은 사회의 과도한 권력욕심을 인산 본성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인간이 가진 욕구중의 하나가 남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욕구이다.(page 99)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돈을 더 벌고 싶어하게 되고(자본주의 사회에는 돈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에) 이는 사람들 사이에 무리한 경쟁을 낳게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경쟁을 촉진시켰다. 더 나은 생산을 위해 자본은 인간에게 더 많은 경쟁을 강요하였고,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실패한 인간'이 되어 남에게 인정과 존경을 못받게 된다. 따라서 실패보다는 다른사람과 과도한 경쟁(경쟁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을 하게 되어 삶을 피폐하게 한다. 또한 러셀은 바람직한 민주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민주사회는 공동체의 태반이 꺼리는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간섭할 수 없는 사회이다.(page 214) 사회는 사회에 생각이 다른 이들을 '감옥'에 보내서는 안된다. 1920년대에 영국에서 쓴 글이지만 21세기의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사회에 대한 생각을 정부의 생각으로 볼 경우 정부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그간의 사건들에 잘 나타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민주국가의 한국을 바란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합리적, 이성적인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부당한 것에는 행동으로 맞서야 한다는 말이다. 러셀의 책을 읽으면서 합리적, 이성적 사고의 중요성을 배웠다. 러셀의 삶을 보면서 행동하는 지성을 배웠다. 따라서 러셀은 '행동하는 양심'이다. 나는 그동안 너무 '착하게' 살았다. 이제 '나쁜' 행동하는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