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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2000년 윌밍턴 내 이름은 존 타이리. 1977년생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에서 자랐다. 윌밍턴은 주에서 가장 큰 항구를 가진 도시로, 유구한 생동력의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제 막 생겨난 도시라는 인상을 더 받는다. 날씨도 좋고 해변도 근사하다. 그러나 황혼기를 저렴한 곳에서 보내려는 북부의 퇴직자들의 물결을 받을 준비는 되지 않았다. 한쪽으로 케이프피어 강을 끼고, 다른 쪽으로 바다를 둔 곶에 위치한 도시에 가깝다. 머틀비치와 찰스턴으로 연결된 17번 간선도로가 마을을 양쪽으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다. 어릴 때, 아버지와 차를 타고 케이프피어 강 부근의 유서 깊은 명소에서 10분 정도 소요되는 라이츠빌 비치까지 드라이브를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신호등이 많이 생기고 쇼핑 센터들이 들어서서, 특히 관광객이 몰려드는 주말이 되면 한 시간은 걸린다. 연안에서 떨어진 섬에 자리한 라이츠빌 비치는 윌밍턴에서 최북단으로 주에서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해있다. 해변 언덕 위로 줄지은 집들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비싸며 대개 여름철 내내 임대된다. 아우터 뱅크스는 한적하게 떨어져 있고 야생마와 라이트 형제의 비행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낭만적인 매력은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점도 있다. 휴가차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근처에서 맥도날드나 버거킹을 찾을 때 가장 안도한다는 점이다. 보통 꼬맹이들이 객지 음식을 기피하여 저녁에 해변 말고 또 다른 대안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윌밍턴도 잘 사는 곳은 잘 살고 못사는 곳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정된 평범한 직장을 다니셨기 때문에 잘 사는 편이었다. 아주 잘 사는 건 아니었고, 그냥 잘 살았다. - 우체국에서 차로 우편을 배달하셨다.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 동네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나는 시내에서 명문 고등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친구들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집은 낡고 비좁았다. 현관 지붕이 내려앉은지 오래됐지만, 집 마당은 그나마 좋았다. 뒷마당에는 큰 참나무가 있었다. 여덟 살 때, 나는 건설현장에서 주어 온 나무로 나무집을 만들었었다. 이 집을 만들 때 아버지의 도움은 없었다. - 아버지가 망치로 못이라도 박는 날이면 곧 사고로 이어졌다. 혼자서 파도타기를 터득한 것도 같은 해 여름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와 내가 참 다른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어려서 인생을 정말 몰랐다는 생각도 든다. 다들 우리 부자를 남남으로 볼 정도로 다른점이 많았다. 그는 수동적이며 내성적인 반면, 나는 늘 활동적이었고 혼자 있는 것이 질색이었다. 그는 교육에 큰 비중을 두셨지만, 내게 학교란 운동부가 달린 문화 공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걸을 때 신발을 끄는 편이었지만, 나는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동네 끝까지 뛰었다 돌아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냐고 아버지께 계속 묻고 다녔다. 8학년 정도 되면서 아버지보다 키가 크기 시작했는데, 1년 뒤에는 팔씨름을 이길 수 있었다. 우리는 외모도 아주 달랐다. 아버지는 모래빛의 머릿결에 엷은 갈색 눈과 주근깨가 있었지만, 나는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가졌고 올리브 색 피부는 5월이 되면 아주 검게 그을렸다. 이런 다른 점을 두고 이웃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홀로 나를 키우셨으니 그럴만도 하다. 성장하면서 이웃에서 내가 돌도 안될 때 우리 엄마가 도망갔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나중에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실수로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 엄마가 될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점을 엄마가 깨달으셨다는 말만 아버지께서 해주셨다. 그는 엄마를 험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칭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어디에 계시든, 과거가 어쨌든, 꼭 엄마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널 보면 네 엄마 생각이 나구나.”라고 가끔 말하셨다. 여태 엄마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해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 마음은 없다. 우리 아버지는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좀처럼 감정을 내색하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아버지와 포옹하거나 키스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혹여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아버지가 원해서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하는 그런 생기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껏 힘들게 길러주신 점으로 보아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를 가졌을 때 그는 마흔 셋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가 부모보다는 수도승이 되었더라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정말 말이 없으셨다. 내 일상생활에 대해서 거의 물어보는 일이 없었고, 좀처럼 화를 내지도 않았고 농담도 하지 않았다. 늘 틀에박힌 생활을 하셨다. 매일 아침 식사를 챙겨주셨고, 저녁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면 잘 들어주셨다. 치과 예약은 두 달 전에 미리 하셨고, 세금은 토요일 아침에 냈으며, 일요일 오후에는 세탁을 하며, 매일 아침 7시 35분이면 정확하게 출근을 하셨다. 사교적이지 못한 아버지는 매일 혼자서 담당구역을 다니며 우체통에 소포와 편지 꾸러미를 넣으며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그는 데이트를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주말 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포커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전화기가 몇 주째 침묵을 할 수밖에. 전화가 온다 해도, 잘못 걸려온 전화거나 텔레마케터였다. 혼자서 나를 길러주신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실망시켰을 때도, 그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주로 혼자 저녁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하루 일과를 다 마치면 서재로 돌아가 동전을 보고 계셨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큰 낙이었다. 그는 서재에서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일명 「그레이시트(Greysheet)」라는 수집가 회보를 살펴보며 다음에 추가할 수집 동전을 고르고 계셨다. 그러나 동전 수집을 처음 시작하신 분은 바로 할아버지셨다. 그가 영웅시하는 분으로, 루이스 엘리아스버그라는 볼티모어의 재정가는 동전의 다양한 날짜와 조페소 각인이 새겨진 미합중국의 동전을 완전하게 수집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수집품도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소장된 동전 수집품과 맞먹을 정도였다. 1951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동전 수집에만 집착하셨다. 해마다 여름이면 그들은 기차를 타고 여러 조폐소를 들려서 직접 새 동전을 구입했고, 남동부 지역의 다양한 동전 박람회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전국의 동전 수집가들과 확고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수년간 거액을 퍼부어 동전 수집을 늘려갔다. 루이스 엘리아스버그와 달리, 할아버지는 부자가 아니었다. 버고에서 잡화점을 하셨지만, 마을 너머에 피글리 위글리 대형 체인점이 문을 열자 장사가 안됐다. 그러니 엘리아스버그의 수집 규모를 따라잡을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몇 푼 안되는 수입이 생기면 바로 동전 구입비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30년간 재킷 한 벌만 입으셨고, 평생 같은 차를 몰고 다니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우편 업무를 하시게 된 게 분명하다. 고등학교 학비를 내는 거 외엔 집에 동전 하나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분 모두 확실히 별난 사람이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는 유언장에 집을 팔아서 그 돈으로 더 많은 동전을 사들이라고 자세히 글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런 유언이 없어도 아버지께서 어련히 그렇게 따랐을 테지만. 아버지가 물려받은 수집품은 이미 그 가치가 아주 높게 매겨져 있었다. 고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금값이 온스 당 850 달러까지 오를 때 이 정도의 가치는, 검소하신 아버지께서 직장을 몇 번이나 은퇴를 하고도 25년 정도를 더 쓸 수 있는 한 밑천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돈 때문에 수집을 했던 것은 아니다. 수집을 함께 하는 동안 두 분 사이에 생겨난 그 연대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둔 동전을 고생 끝에 찾아내어 먼 길을 운전해가며, 또 가격을 맞추려고 부단히 애쓰는 과정에는 희열감이 생겼다. 그렇게 흥정해서 구입할 수 있는 동전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하나씩 추가할 때마다 그들에게는 보물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열정과 수고를 내가 동참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래서 겨울이면 이불 몇 장을 더 덮고 잤고 새 신발은 단 한 켤레만 살 수 있었다. 옷은 구세군이 오지 않는 한 꿈도 꾸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진기 한대도 갖추지 못하고 살았다. 그와 함께 유일하게 찍은 사진도 애틀랜타 박람회에서 찍은 것이었다. 우리가 한 수집가의 진열대 앞에 서 있을 때 그가 찍어서 집으로 보내준 것이었다. 그 사진은 아버지의 책상에 한동안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손을 내 어깨에 두르신 채, 우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손에는 아버지가 방금 전에 구입하신 동전을 쥐고 있었다. 이 동전은 클리블랜드 조폐소에서 1926년에 제작되어 최상의 조건으로 보전된 버팔로 문양이 새겨진 5센트 동전이었다. 이 동전은 버팔로 문양이 새겨진 동전 중에서는 아주 희귀했다. 또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가격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한 달간 핫도그와 콩요리만 먹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적어도 얼마간은. 내가 초등학교 일, 이학년 때가 되면서 아버지는 마치 내가 같은 배를 탔다는 듯이 동전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어른이, 그것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 자식을 친구처럼 대우해 주면 어떤 자식도 기분이 좋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귀담아 들어가며 동전에 관한 이야기에 몰두했었다. 차츰, 나는 세인트 고든이 제작한 20달러 더블 이글스 동전이 1924년에 비해 1927년에 얼마나 많이 주조되었고, 뉴올리언스에서 주조된 1895년 바버 다임이 같은 해 필라델피아에서 주조된 동전보다 가치가 열 배나 더 높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 정도는 기억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나는 슬슬 그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었고, 육칠 년간 주말에 친구들이 아닌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자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운동이나 여자 친구, 자동차, 음악 따위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열네 살이 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더불어 짜증도 나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에 비해서 우리집 형편이 다르다는 것도 점차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멋진 선글라스를 살 돈이 있었던 친구들에 비해, 나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먹으려면 소파 속으로 들어간 동전들을 찾아야 했었다. 많은 친구들이 열여섯 살 생일 때 차를 선물로 받았지만, 나는 카슨 시티에서 주조된 1883년 모건 은화를 아버지에게 받았다. 우리는 낡은 소파에 찢어진 부분은 담요로 가리고 살았고, 케이블 TV나 전자레인지도 없이 사는 유일한 집안이었다. 냉장고가 고장났을 때 아버지는 중고품을 구입하셨는데, 녹색 바탕은 부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색상이었다. 친구들이라도 놀러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원망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그땐 아무튼 그랬다. 돈이 그렇게 필요했으면 잔디를 깎거나 잡일이라도 했으면 됐을 텐데 말이다. 그땐 너무나 철이 없어 꽉 막힌 놈이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버지도 뭔가 낌새를 차렸지만 달리 어떤 말도 하지 못하셨다. 다만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썼던 유일한 방식으로 나에게 대해왔다. 동전 이야기였다. 이것만이 그가 자연스레 꺼낼 수 있는 유일한 대화였다. 그는 아침과 저녁도 계속 만들어주셨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런 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친구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영화를 보러가거나 유행하는 셔츠를 사고 있을 때, 나는 이런 모습을 밖에서 구경이나 하는 식이었다. 그딴 놈들을 뭐 하러 만나나 싶었다. 고등학교에는 누구나 어울리는 무리가 있는 법이다. 나는 질 나쁜 아이들과 어울렸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아이들, 나도 역시 이들처럼 그렇게 되었다. 수업도 빼먹으며 담배도 피고 싸워서 세 번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운동도 그만두었다. 2학년 때까지 풋볼과 농구, 육상을 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가 운동이 어땠냐고 물어볼 때도 있었지만, 막상 자세하게 들려주면 편하게 받아주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운동의 ‘운’자도 모르는 분이었니까. 그는 평생 운동부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내가 2학년 때 딱 한 번 농구 경기를 보러 오신 적이 있다. 낡은 운동복 재킷과 조화되지 않는 양말 차림으로 스탠드에 앉아 있는 우스꽝스런 대머리의 남자. 비만까지는 아니지만 바지가 허리춤까지 올라온 모습은 마치 임신 3개월의 임산부의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난 태연한 척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보자 당혹스러운 나머지, 경기가 끝나고도 그를 못 본 척 했었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갈수록 더 심화되었다. 졸업반이 되면서 이런 내 반항심은 극에 달했다. 이 년간 성적은 떨어졌고 -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게으르고 신경을 안썼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긴 하지만 - 입에 술냄새를 풍기고 밤늦게 몰래 들어오다가 여러번 아버지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술과 마약을 했을 것이 뻔한 파티에 있다가 경찰에 잡혀 집으로 인도되었을 때 아버지는 내게 외출금지를 내렸지만, 내 일에 신경쓰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와 친구 집에서 몇 주간 머문 적도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평소처럼 아침을 식탁에 차려주셨다. 나는 겨우 학업을 마쳤다. 아마 학교 측에서 나를 졸업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도 이런 내 모습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는 성품대로 어렵사리 대학 얘기를 꺼냈지만 나는 이미 진학을 단념했었다. 직장이 필요했다. 차도 갖고 싶었다. 지난 십팔 년간 없이 살았던 그런 풍요로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졸업을 하고도 아버지와 진학 문제를 꺼내는 것은 피해버렸다. 그러나 내가 전문대 원서조차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밤늦게까지 서재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늦게 아버지는 그간 소원했던 부자관계를 동전으로 화제를 돌리며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애틀랜타 갔을 때 생각나니? 우리가 그렇게 찾던 버팔로 머리 동전을 네가 찾았잖니?』 아버지가 말문을 던졌다. 『우리 사진 찍었던 곳 말이야. 네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생각을 하면 네 할아버지랑 내가 함께 있을 때가 생각나.』 나는 아버지와의 그 지긋지긋한 지난 삶이 떠오르자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동전 이야기 듣는 게 정말 지긋지긋해요!』 나는 소리쳤다. 『다신 듣고 싶지 않아요! 그 엿같은 수집품 팔아서 다른 걸 해보라구요. 다른 걸!』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등을 돌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서재로 돌아가시던 아버지의 그 속상한 얼굴을 지금도 난 잊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었다. 아버지에게 상처줄 생각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내심 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동전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는 이렇게 감정의 골이 패인 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며칠 뒤 함께 찍은 사진마저 치워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동전을 떠올리는 물건을 보면 내가 화낼까 봐서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신 것처럼. 아마 그때는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가 사진을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군입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동부쪽으로 온통 군부대지만 - 윌밍턴에서 차로 몇 시간만 가면 일곱 개의 군부대가 있다 - 군생활은 인생 패자들이나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군바리들 틈에서 명령이나 받으며 인생을 소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아니다. ROTC 출신들이나 내 고등학교 동창들이라도 그럴 것이다. 차라리 공부 좀 한 아이들은 대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에 진학을 했고, 그 반대의 아이들은 변변치 않은 직장을 전전하며 어울려 술이나 퍼먹으려 하고 책임감이 눈곱만큼이라도 따르는 일은 아주 질색하였다. 졸업 후 이년 간 쉴새없이 일을 했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에서는 주방보조로 일했고, 동네 극장에서 표를 끊기도 했고, 스테이플사에서는 짐을 싣고 내렸으며, 와플 하우스에서 팬케이크을 구웠고, 외지 사람들에게 개나 먹을 음식을 파는 관광 명소 몇 군데서 계산원으로 있기도 했다. 돈은 버는 대로 모두 써버렸고 관리자까지 오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결국 옮겨다니는 직장마다 해고되었다. 그래도 한동안 별 걱정없이 살았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거니까. 밤늦게까지 바다에서 서핑을 하고 돌아와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집에서 독립을 하지 않았으니 전세나, 음식, 보험, 장래를 준비하는 따위에 단 한 푼의 수입도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들이 나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딱히 불행했던 적도 없지만 얼마안가 이런 삶에 싫증이 났다. 하지만 서핑만은 물리지 않았다. 1996년 허리케인 버사와 푸란이 연안을 강타했을 때 파도는 아주 최고였다. 그 후로 나는 르로이라는 술집에 자주 다녔다. 그러다 매일 밤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갔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서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무슨 일을 한다고 대답해 주면서 우리 모두 정처없이 빠른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만 분명해졌을 뿐이다. 나와 달리 기반을 잡아가는 친구들이 직장에 만족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믿은 적은 없었다. 땅을 파고, 창문을 닦고, 포르타 포티(이동식 변기)를 운송하는 일이 그들이 꿈 꿔왔던 직장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공부를 게을리 했을지언정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많은 여자를 만났다. 르로이 바에 가면 늘 여자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를 탐닉하게 내버려둘 뿐이며 내 감정은 늘 드러내지 않았다.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만난 루시는 수개월을 사귀었는데, 그러다 잠시 서로가 소원해지는 시기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단 걸 알게 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재학중인 그녀는 한 살 연배로, 졸업 후에는 뉴욕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다. 『너에게 관심이 있어.』 마지막으로 함께 한 밤에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서로 바라는 게 달라. 너도 얼마든지 능력이 있는데 왜 그렇게 현실에 안주해서 사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난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 말과 함께 작별인사도 없이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일 년 뒤, 그녀의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우리는 이십 분간 통화를 했다. 그녀는 변호사와 약혼을 해서 유월 달에 결혼을 하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그녀의 말은 충격이 컸다. 그 후로 나는 직장에서 다시 해고가 되어, 예전처럼 르로이에서 마음을 달랬다. 늘 그곳에는 인생의 패자들로 서성거렸다. 나는 문득 이런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내 자신을 위로하는 척 하는 모습이 싫어졌다. 그래서 여섯 병 들이 맥주를 사들고 해변으로 가서 앉았다. 나는 인생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여 대학교 학위를 받을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 손을 놓은 지도 오래되어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 어색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운명인지 불행인지, 마침 해병 두 명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젊고 건실한 몸매에서는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저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고민 하면서 아버지를 배제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아버지와 논의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대화를 하지 않았었다. 어느 날 밤, 부엌에 가다가 평소처럼 책상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주 유심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머리는 거의 다 빠졌고 왼쪽에 남은 부분도 귀밑이 하얗게 새어 있었다. 은퇴 시기가 가까워진 것이다. 이만큼 내게 해주었으면 내가 아버지를 더 이상 실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해병으로 지원할 생각도 했었다. 너무 자주 봐서 익숙했기 때문이다. 라이츠빌 비치는 캠프 르준이나 체리 포인트에서 온 해병으로 늘 붐볐다. 그러나 막상 지원을 할 때는 육군을 선택했다. 해병과 육군 두 군데서 소총을 매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해병 지원부대에 갔을 때 담당관은 점심을 먹고 있어서 당장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육군은 접수를 받았기 때문에 결정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어떻게 보면 충동에 더 가까운 결정이었다. 나는 4년을 계약한다는 깨알같은 글씨에 서명을 했다. 축하의 말과 함께 내 등을 토닥이는 담당관을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때까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가 1997년 말로, 내 나이 스물이었다. 포트베닝에 위치한 신병훈련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가혹했다. 온통 욕과 세뇌 교육뿐이었고, 아무리 터무니없는 명령이어도 따라야하는 곳 같았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아주 빨리 그곳에 적응하였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나는 보병을 선택했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 루지애나나 몸서리치는 포트 브래그 기지 같은 곳에서 모의 훈련을 많이 했다. 대개 이곳에서 우리는 최상의 살상이나 파괴 훈련을 받았다. 제 1 보병 사단, 다른 말로 「더 빅 레드 원(the Big Red One)」의 예하부대였던 우리는 그 후에 독일로 파병되었다. 나는 독일어를 한 마디도 못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보통 내가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1999년 마케도니아를 시작해서 2000년 늦봄 코소보에 이르기까지, 나는 발칸반도에서 그 지긋지긋한 칠 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육군 월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집세나 식비를 낼 필요도 않고, 막상 월급을 받아도 마땅히 쓸 데도 없기 때문에 난생 처음 통장에 돈을 넣어보기도 했었다. 넉넉한 돈은 아니지만 충분한 돈이었다. 첫 휴가는 집에서 아주 따분하게 보냈다. 두 번째 휴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냈다. 동료의 고향이 그곳이어서 우리 셋은 그 동료의 부모님 댁에서 숙박을 했었다. 그때 저축했던 돈을 거의 다 써버렸다. 코소보 파견에서 돌아와 세 번째 되던 휴가에는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에 집으로 향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는 집에서 보내는 따분함도 충분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거리상 아버지와 통화하는 일은 드물었다. 대신 아버지는 매달 1일의 날짜 소인이 찍힌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내 동료들의 엄마나, 여동생, 아내에게서 받는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지나치게 일상적인 내용도 아니고 눈물을 자아내는 글도 없었고, 내가 보고 싶다는 말 따위도 없었다. 심지어 동전에 관한 내용도 없었다. 그저 날씨나 물어보는 정도였고, 내가 생사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싸웠던 발칸반도 내용을 들려주었을 때 아버지는 내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답장해주었다. 그 이상 내용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답장에서 위험했던 전투 내용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위험해 처했던 사실이 아버지를 두려움에 떨게 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다음부터 넣지 않았다. 대신에 경계 근무는 지독하게 따분하며, 한가지 정말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다른 근무병이 하루 저녁에 피워대는 담배가 몇 개비인지 추측해보는 것이라는 내용으로 써서 보냈다. 아버지는 늘 끝인사로 다시 조만간에 편지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를 다시 실망시키는 일도 없었다. 그는 내가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정말 훌륭한 분이셨다. 지난 삼 년간 나는 많이 성숙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들어가서 철들어서 나오는 그런 식인 셈이다. 특히 나처럼 보병 부대에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장비를 책임지며 다른 동료들도 나를 믿고 근무하기 때문에, 사고 치면 저녁 식사 한 끼를 건너뛰고 잠자리에 드는 것보다 훨씬 더한 처벌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처리할 서류도 많고 따분하기 때문에 담배를 물고 늘 입에 욕을 달고 산다. 침대 밑에는 성인 잡지가 여러 상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제 대학에서 갓 졸업한 학사 장교들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나처럼 보병을 땅개 취급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은 일에 책임지고 뭐든 제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으면 「못합니다」란 말은 없다. 생사의 전선에 있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동료를 죽일 수도 있다. 이렇게 군대는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매일 목숨을 걸고 싸우며 그렇게 싸워야 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다. 모든 군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다들 다른 동료들과 근무했었다. 군대를 아주 싫어하는 동료도 있지만 경력을 쌓으려고 입대한 친구도 있었다. 머리 좋은 놈도 있고 멍청한 놈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결국에는 협동하며 생활해야 했다. 동료애 때문에. 조국이나 애국심 때문도 아니었고, 살인 훈련을 받아서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내 옆의 동료 때문이었다. 동료를 위해 싸우며 그를 살려낼 때, 동료도 나를 위해서 싸운다. 이처럼 간단한 전제로 군대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변했다. 입대 전부터 담배를 폈고, 신병훈련소에 있을 때 매일 지독한 기침을 달고 살았지만 거의 이 년간 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고 끊었다. 술도 일주일에 맥주 한두 잔 정도로 조절해서 마셨고, 한 달간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경력 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일병에서 병장으로, 다시 육 개월 뒤에는 하사로 진급하면서 내가 리더십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전투에서 대원들을 이끌며 발칸반도에서 가장 악명높은 전쟁범들을 체포하는데 일조하였다. 우리 부대장은 장교후보학교로 추천하였지만 나는 망설였었다. 장교가 된다는 것은 책상에 앉아 훨씬 더 많은 잔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입대 전부터 서핑 외에는 운동을 안 한지 몇 년 되었다. 그래서 세 번째 휴가를 나올 쯤엔 복근 살만 20파운드나 나가서 군살을 빼야만 했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뉴욕에서 온 꼴통 토니와 함께 러닝이나 복싱, 역기를 들며 시간을 보냈다. 부대에서 가장 친했던 토니는 말할 때 언성이 높은 편이었고 테킬라가 최음 효과가 있다고 우기는 친구였다. 그는 자신처럼 양팔에 문신을 하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예전의 내 모습은 저 먼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책도 많이 읽었다. 군에 있으면 책 읽을 시간이 많다. 책을 서로 돌려 읽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대여도 하는데 겉표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오래 대여된다. 그렇다고 내가 책벌레였단 인상을 주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초서, 프라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이 작고한 작가의 책이 아니라, 주로 미스테리나 스릴러물,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읽었다. 나는 특히 칼 히아슨의 책을 좋아했다. 그의 글은 쉽게 읽히고 웃음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이런 책들을 영어 수업에 채택했더라면 엄청난 독서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동료들과 달리 나는 여자를 밝히지는 않았다. 나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혈기왕성하고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한 나이에 여자를 만나 성욕을 채우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어떤 동료들은 뷔르쯔부르크 주둔 시에 현지 여성들과 연애해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군에서 가정을 이루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혼도 부지기수였다. 나도 특별한 누군가를 만났다면 피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토니는 내게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랑 나가자. 안그러면 기회 없어.』 그가 말했다. 『관심없어.』 『그게 말이 돼? 새바인이 자기 친구 중에 아주 죽이는 애가 하나 있대. 키도 크고 금발인데다가 테킬라를 좋아한대.』 『돈을 데리고 가. 아마 가고 싶어 할 거야.』 『무슨 소리야. 걘 안돼. 새바인이 싫어하는 거 알잖아.』 나는 아무말도 안했다. 『그냥 잠시 놀다가 오면 돼.』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처럼 수도승 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단 걸 아는 토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나섰다. 『어떨 때는 정말 네가 이해가 안돼.』
공항에서 아버지가 태우러 왔을 때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어깨를 두드리자 거의 펄쩍 뛸 정도로 놀라셨다. 아버지의 체구는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아 보였다. 아버지는 포옹대신 악수를 하며 비행은 어땠냐고 물으셨다. 우리는 서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밖으로 아무 말 없이 걸어나갔다. 지난 번 휴가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집으로 오니 낯설고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에서 짐을 트렁크에 실을 때 아버지의 포드 에스코트 차량 후미 범퍼에 붙은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군을 지지합니다!」 아버지에게 그 슬로건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집에 와서 짐은 예전에 쓰던 내 방에 던져 놓았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선반 위의 먼지 묻은 트로피에서부터 속옷 서랍장에 숨겨두며 마시던 반 정도 남은 와일드터키까지. 소파는 담요로 가리고 있었고, 녹색 냉장고는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라고 항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텔레비전은 채널이 흐릿하게 네 군데만 잡혀서 나왔다. 아버지는 스파게티를 만드셨다. 금요일은 늘 스파게티 먹는 날!! 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집에 오니까 좋네요.』 아버지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셨다. 『다행이다.』 아버지는 우유를 들이켰다. 우리는 저녁에 꼭 우유를 마신다. 아버지는 식사에만 신경을 쓰셨다. 『토니 아시죠?』 불쑥 말을 던졌다. 『제가 편지에서 말했을 거예요. 어쨌든 들어보세요.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구요. 여자 이름이 새바인 인데요. 여섯 살짜리 딸이 있어요. 제가 말렸지만 말을 안듣더라구요.』 아버지는 파르마 치즈를 음식에 골고루 잘 끼얹었다. 『아...』 그가 말했다. 『그렇구나.』 그 후로 나는 말없이 먹었다.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조금 더 마셨다. 벽에 걸린 시계가 똑딱거렸다. 『올해 은퇴하시면 아주 좋으시겠어요.』 내가 말을 건냈다. 『휴가 받은 셈 치세요. 구경 좀 하고 다니시라구요.』 나는 독일로 면회 오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면회 오지도 않겠지만 괜히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면을 돌돌 감았다. 면을 감으며 아버지는 적합한 답변을 궁리하시는 듯했다. 『글쎄다.』 아버지는 침묵을 깨며 말했다. 나는 결국 아버지와의 대화를 단념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뿐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우리는 각각 볼일을 보았다. 비행에 지친 나머지,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부대에 있던 습성대로 이따금씩 깨기도 했다. 아침에 몸을 뒤척일 때쯤 되니 아버지는 벌써 출근하신 상태였다. 아침을 먹고 신문을 읽었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볼까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차고에서 서프보드를 꺼내 차를 얻어타고 해변으로 갔다. 파도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파도 타는 데는 별 문제 없었다. 파도를 타지 않은 지 3년이나 되어 적응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작은 파도라도 보니까 바다가 가까운 부대에 근무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드를 타고 해안가를 바라보니 사람들이 모래 언덕 너머의 집들로 짐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앞서 말했듯이 라이츠빌 비치는 일주일 정도 집을 임대해서 오는 가족들로 늘 붐볐다. 가끔, 채플힐이나 롤리에서 온 대학생들이 방을 빌리기도 했다. 내 관심은 후자에 있었다. 부두 교각 근처의 주택들 사이로 뒷마당 데크에 자리를 잡고 서있는 비키니 차림의 여대생들이 눈에 띄었다. 잠시 그들의 모습과 경관을 보는 사이에 한 차례의 파도가 다시 밀려왔다. 그렇게 나는 오후 내내 나만의 세계에 홀딱 빠져 시간을 보냈다. 르로이에 들릴 생각도 해봤다. 그곳은 사람이든 뭐든 그대로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길목 가게에서 맥주 한 병을 사들고 일몰을 보러 부두 교각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낚시꾼들은 벌써 자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몇 명은 잡은 고기를 손질하고 버릴 부위를 물에 던지고 있었다. 바다빛은 점차 철회색을 띠더니 오렌지 빛으로, 다시 노랗게 물들어갔다. 부두 교각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는 돌고래가 수면 위로 올라오니 펠리컨들이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밤에 대보름달이 뜰 것이다. 야전 생활을 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그렇게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정말이지, 여자를 만나야겠다는 그런 생각 따위는 정말 없었다. 그녀가 부두 교각을 거니는 모습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달리 말하면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키가 큰 금발이었고 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의 매력적인 여자였다. 둘 다 나이는 나보다 다소 어렸다. 모두 반바지에 홀터 차림이었고, 검은 머리의 여자애는 보통 아이들을 동반해서 한나절 해변에 있을 생각으로 왔을 때 들고 다니는 큰 니트 백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두 밝은 표정으로 신나게 놀러온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인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답례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 금발 머리가 내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내 서프보드와 들고 있던 맥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눈동자를 굴리며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다른 아이의 반응에 놀랐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웃으며 인사했다. 그녀는 내 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파도 탈만했겠어요.』 그녀의 말에 경계심이 풀렸다. 생각지 않은 다정스러움도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들은 교각 끝까지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난간에 기댄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쪽으로 같이 가서 인사나 나눌까 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둘 다 내 타입은 아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써 무시하며 나는 맥주를 길게 들이켰다. 그런데 눈길이 자꾸 그녀에게 갔다. 그들의 대화를 안 들으려고 했지만 금발 머리의 목소리는 내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브래드라는 남자 얘기를 한참 했다. 정말 좋아하는 남자란다.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그녀가 속한 여학생 동아리가 가장 좋고, 지난 번 연말 파티가 너무 좋았다며 옆에 친구도 내년에는 같이 가보자고 말했다. 또 많은 친구들이 상태 안 좋은 남학생회 아이들과 만나다가 그 중에 한 명은 임신까지 했다며 그녀를 탓했다. 그 친구를 자기는 말렸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친구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친구의 얘기가 재밌는지 따분한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웃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시 친근감이 느껴졌다. 뭐라고 할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그런 기분? 말도 안 되는 거 나도 안다. 맥주병을 한쪽으로 놓으려는 순간 난간에 놓아 둔 그녀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십 분정도 그렇게 서 있을 때 남학생회 친구들로 짐작되는 남자 두 명이 교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버뮤다 반바지에 각각 분홍색과 오렌지 무늬의 라꼬스떼 상표의 셔츠 차림이었다. 느낌상 이 중에 한 명이 금발 머리가 말하던 브래드라는 남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든 그들은 그녀들이 모르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들이 놀래키면 여자애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남학생들의 팔을 세차게 때리면서도 내심 반가워할 것이 뻔하다. 그러다 대학생 커플들이 다들 그렇듯이 함께 깔깔거리며 웃으며 돌아갈 것이다. 내 생각대로라면 남자 애들도 분명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들이 여학생들 가까이로 와서 갑자기 놀래키며 소리를 지르자 그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남학생들을 장난스럽게 찰싹 때렸다. 남자 애들은 깔깔거리며 웃다가 분홍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맥주를 조금 쏟았다. 그는 가방이 놓인 난간 옆에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꼬며 기댔다. 『얘들아, 잠시 후에 우리 캠파이어를 할거야.』 오렌지 셔츠는 금발 머리에 어깨를 두르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목에 키스를 했다. 『너네들 같이 갈 거지?』 『들어 갈 거지?』 금발 머리가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그녀가 대답했다. 분홍 셔츠가 난간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손이 가방에 닿았는지 가방이 기울어지며 떨어졌다. 가방은 마치 물고기가 물위로 뛰듯 첨벙하며 물에 빠졌다. 『뭐지?』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가방!』 검은 머리의 그녀가 소리쳤다. 『네가 가방을 건드렸어.』 『미안하게 됐네.』 그의 말에는 미안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내 지갑이 들어있단 말이야!』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가라앉기 전에 빨리 건져와!』 남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물에 들어갈 생각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확실한 건, 지갑을 찾지도 못 한다. 게다가 지금까지 술을 마신 게 분명한데 저 상태로 물에 들어가서 해안가로 헤엄쳐 돌아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검은 머리도 핑크 셔츠의 표정을 읽었을 것이다. 그녀는 난간을 딛고 뛰어내릴 자세를 취했다. 『바보같은 짓 하지마. 이미 늦었어.』 핑크 셔츠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 『너무 위험해. 그리고 상어가 있을지도 몰라. 지갑 하나 가지고 왜 그래. 내가 하나 사줄게.』 『무슨 소리야! 저기에 돈도 다 들었단 말이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한 행동을 보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교각 끝으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이런...! Two 내가 그녀의 가방을 건지러 물에 뛰어든 이유는 짚고 가야겠다. 그녀의 영웅이 되어 깊은 인상을 심어주거나 지갑 속에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궁금해서 한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물에 뛰어 들면서도 이런 내 모습이 바보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난간에서 네 사람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핑크 셔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에 있죠?』 내가 소리쳤다. 『저기요!』 검은 머리 그녀가 소리 질렀다. 『아직도 보여요. 저기 내려가네요!』 날이 어두워 물체를 식별하는데 잠깐 시간이 걸렸으나 파도의 힘을 받아 교각으로 헤엄쳤다. 그리고 교각 옆으로 헤엄쳐 물에 떠 있는 가방을 아주 조심스레 손에 넣었다. 물론 가방은 다 젖은 상태다. 파도가 밀어주었기 때문에 해안으로 헤엄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헤엄을 치는 동안 나를 따라오며 바라보는 네 사람을 몇 차례 올려다보았다. 바닥이 발에 닿자 나는 물에서 걸어나왔다. 머리에서 물기를 털고 모래 해변으로 걸어가던 중에 그들과 가운데 지점에서 만났다. 나는 가방을 건네주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검은 머리가 말했다. 눈길이 그녀와 마주치는 순간 자물쇠에 열쇠가 찰칵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이지, 나는 로맨스 같은 거 모른다. 첫눈에 뿅갔다는 말도 많이들 하지만 나는 그딴 거 안 믿었다. 지금도 안 믿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도 거부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굳이 외모를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 사이가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보다는 머릿결을 쓸어 넘기는 그녀만의 자연스러움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제가 건져오려고 했어요.』 『알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에 뛰어들려는 거 봤어요.』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안절부절 못하는 아가씨를 보니까 통제력을 잃고 도와주셨나 보네요?』 『그런 셈이죠.』 그녀는 잠시 내 대답에 생각을 하더니 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가방에 든 물건을 꺼내 들었다. 지갑과, 선글라스, 바이저, 선스크림을 금발 머리에게 건네고 가방을 쥐어짰다. 『네 사진 다 젖었어.』 금발 머리가 지갑을 툭툭 털며 말했다. 친구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가방을 이리저리 비틀며 쥐어짰다. 충분히 물기를 뺐다고 생각한 그녀는 다시 물건을 가방에 넣었다. 『정말 고마워요.』그녀가 말했다. 비음이 섞인 말투는 노스캐롤라이나 동부 말과 달랐다. 분 근처 산지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서부 경계선 근교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별걸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야, 이 사람 보답을 바라나 봐.』 핑크 셔츠가 시끄럽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핑크 셔츠와 나를 번갈아가며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세요?』 『아니요.』 나는 손을 흔들어 사양했다. 『그냥 제가 좋아서 한 거예요.』 『요즘도 기사도 정신이 있다고 저는 믿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혹시나 그녀의 말에 어떤 우롱감이라도 섞여있을까 했지만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오렌지 셔츠가 힐끗 나를 바라보더니 내 머리를 응시했다. 『해병이세요?』 그가 물었다. 그는 금발 머리를 다시 팔로 꼬옥 안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최정예, 최강, 그대 이름은 해병!... 출신은 아니고요. 아무데나 지원하려다가 육군으로 입대했죠.』 그녀가 웃었다. 우리 아버지와는 달리 광고를 봤나 보다. 『저는 사바나에요.』그녀가 말했다. 『사바나 린 커티스요. 그리고 이쪽은 브래드, 랜디, 여긴 수잔요.』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존 타이리에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은 굳은살이 조금 박혔지만 따뜻하고 매우 부드러웠다. 여자 손을 잡아본지도 참 오래됐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나저나 뭔가 대접해 드려야겠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식사했어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물었다. 『야외에서 먹을 음식을 만들었는데 양이 넉넉해요. 같이 가서 드실래요?』 남자 애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핑크 셔츠, 랜디는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솔직히 후련했다. 〝야, 이 사람 보답을 바라나 봐.〞...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그래, 그렇게 해요.』 브래드가 그다지 반기는 기색없이 거들며 말했다. 『재밌을 거예요. 교각 옆에 방을 하나 빌렸거든요.』그는 해변가 방향의 한 주택을 가리켰다. 그 집 뒷마당 데크에는 여섯 명 정도가 서성거렸다. 거기엔 남자들도 더 있어서 같이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사바나의 포근한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다. 『좋아요. 다리에 가서 보드를 챙기고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 『그럼, 이따 봐요.』 랜디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가 사바나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으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같이 가요.』 동료들을 제쳐두고 나오며 그녀가 말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다들 이따 봐. 알았지?』 우리는 모래 언덕으로 걸으며 계단으로 연결된 부두 교각을 향해갔다. 그녀의 친구들은 잠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내 옆에 서서 걷자 그들은 서서히 발걸음을 돌리며 해변으로 걷기 시작했다. 옆으로 흘깃 보니, 브래드와 나란히 걷던 금발 머리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살짝 쳐다보고 있었다. 랜디도 부루퉁한 표정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사바나가 이 점을 눈치챘을지는 알 수 없었다. 『수잔은 내가 이러는 게 못마땅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어떤게요?』 『그쪽이랑 같이 걷는 거요. 걔는 내가 랜디랑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오늘 오후에 여기 왔을 때부터 계속 우리 둘을 엮으려는 거예요. 랜디도 하루 종일 저를 따라다니구요.』 마땅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한 나머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먼 바다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수면위로 서서히 솟았고, 사바나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파도가 부서져 깨지며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이 은색빛을 토해냈다. 우리는 교각으로 다다랐다. 교각 난간은 모래와 소금으로 얼룩졌고 목재는 풍화되어 갈라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대는 어디에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독일요. 2주간 휴가를 받아서 아버지를 뵈러 집에 왔어요. 그쪽은 산지쪽에서 온 것 같네요?』 그녀는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르노아요.』 그녀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 말투? 맞죠? 그래서 내가 시골 깡촌에서 왔다고 생각한 거죠?』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깡촌에서 온 거 맞아요. 큰 목장에서 자랐죠. 말투가 다른 거 알아요. 그래도 사람들은 귀엽다고 하던데요.』 『랜디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버렸다. 어색한 나머지 그녀는 말없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괜찮은 애 같아요.』 잠시 뜸을 들이며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별로 안 친해요. 팀이랑 수잔 외에는 놀러온 아이들 중에서 아는 애들이 거의 없어요.』 그녀는 손으로 모기를 쫓아냈다. 『이따가 팀을 볼 거예요. 정말 괜찮은 애에요. 맘에 드실 거예요. 다들 좋아하거든요.』 『모두 일주일 정도 놀러 오셨나봐요?』 『한달요. 하지만 놀러온 것도 아니에요. 자원봉사 왔거든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라고 들어 봤죠? 여기에서 집 두 채 정도를 지으려구요. 우리 가족이 몇 년간 일을 맡아 왔어요.』 그녀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숙박하는 집이 어둠 속에서 생기를 찾아갔다. 사람들이 더 보였고, 큰 음악 소리와 이따금씩 터지는 웃음 소리도 들렸다. 브래드, 수잔, 그리고 랜디는 맥주를 든 여학생들과 벌써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선행을 베풀러 왔다기 보다는 함께 놀다가 기회를 엿봐서 여자 하나 물려는 대학생들처럼 보였다. 그녀도 내 표정을 눈치챘는지 내 시선을 따라 그곳을 보았다. 『월요일까지는 일 안해요. 쟤들이 저렇게 놀고 있어도 곧 있으면 장난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난 아무말도 안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죠. 하지만 생각하신 대로에요. 대부분 쟤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에요. 그냥 이력서에 색다른 거 하나 넣어서 졸업하려는 거 뿐이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쟤들은 몰라요. 뭐, 어쨌거나 집은 지어질 테고 일은 하게 되어 있죠. 늘 그래왔으니까요.』 『전에도 이런 일을 했었어요?』 『16살 때부터 매년 여름에 했어요. 교회 사람들과 했었는데 채플힐에 갔을 때는 거기서 사람을 모아서 시작했죠. 사실은 팀이 시작한 일이에요. 저랑 같이 르노아 출신이에요. 졸업은 했지만 이번 가을에 석사 학위를 받을 계획이래요. 서로 안지 정말 오래 됐어요. 우리는 학생들이 집에서 소일을 하거나 기간제 직장에서 일하며 여름을 보내지 않고 색다른 기회를 찾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각자 모은 돈을 거둬서 집을 짓고 한 달간 쓸 비용도 각자 내요. 그리고 일 한다고 일당을 주지도 않아요. 그래서 제가 가방을 꼭 찾으려고 했던 거죠. 못 찾았으면 한 달 내내 굶었을 걸요.』 『친구들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죠.』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뜻깊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한걸요.』 걸을 때마다 발이 모래에 미끄러졌다. 『그러데 왜 윌밍턴으로 왔어요?』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집을 지으러 르노아나 롤리 같은 곳 말고 왜 이리로 왔냐구요.』 『해변이 있잖아요. 사람들 심리가 그렇잖아요. 한 달간 일할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여긴 더 쉽거든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만큼 일도 많이 할 수 있구요. 올해 서른 명이나 일을 같이하겠다고 서명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가까이 붙어서 걷고 있음을 느꼈다. 『그쪽도 졸업했죠?』 『아니요. 이제 4학년이에요. 그리고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있구요. 이것도 미리 물어보실 거라면 말이죠.』 『네, 물어보려고 했어요.』 『그럴 거예요. 학교 다니면 다들 그렇게 물어보잖아요.』 『나한테는 군대가 좋냐고 물어보죠.』 『좋아요?』 『모르겠어요.』 그녀는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다시 듣고 싶어질 만큼 듣기 좋았다. 교각에 이른 후 나는 서프보드를 집어 들었다. 나는 다 마신 맥주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바닥에 병이 닿으며 달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머리 위로 별이 떴고, 언덕을 따라 줄지은 주택에서 나오는 불빛은 할로윈데이의 호박초롱을 상기시켰다. 『왜 군에 갔는지 물어봐도 돼요? 군생활이 좋은지 싫은지 모른다 치고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잠지 뜸을 들였다. 나는 서프보드를 다른 팔로 옮겨 옆구리에 끼었다. 『당시에는 그냥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는 게 제일 낫겠네요.』 그녀는 더 들으려 말을 기다렸지만 아무말이 없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나마 집에 오니까 좋으시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물론이죠.』 『아버지도 좋아하시죠?』 『그러시겠죠.』 『그러실 거예요.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그러면 좋죠.』 『확신이 안 드는 목소린데요.』 『우리 아버지를 안 보셔서 그래요. 별로 말이 없는 분이시거든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달빛이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도 감미로웠다. 『자랑스럽다고 꼭 말하지는 않으셔도 다른 식으로 그 마음을 보여주시는 분일 거예요.』 그런 분이시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을 음미하는 사이, 그들이 있는 곳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고 모닥불 옆으로 여학생 두 명이 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학생 하나가 한 여자애를 팔로 안고 앞으로 밀어대자 여자가 깔깔거리며 남자를 밀쳐댔다. 가까운 곳으로 브래드와 수잔이 서로를 꼭 껴안고 있었고, 브래드는 어디로 가고 안 보였다. 『같이 생활할 친구들을 대부분 모른다고 했었나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자 머리카락이 어깨에 헝클어졌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에요. 대부분 자원봉사 서명하러 왔을 때 처음 봤어요. 그리고 오늘 여기서 다시 본 거구요. 학교에서 가끔 봤을지도 모르죠. 쟤네들끼리는 서로 알지 몰라도 저는 몰라요. 남학생회나 여학생회에서 많이들 활동하죠. 저는 지금도 기숙사 생활을 해요. 다들 착해요.』 그녀는 남을 비방하는 말 따위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남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신선하며 많은 생각이 들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건 처음부터 그녀에게서 느꼈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녀만이 가진 일부였었다. 『몇 살이세요?』 집으로 다 와서 내가 물었다. 『스물 둘요. 지난 달이 생일이었어요. 그쪽은?』 『스물 셋요. 형제들 있어요?』 『아니요. 외동이에요. 저랑 부모님이랑요.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르노아에 계시고 25년간 아주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이죠. 그쪽 차례네요.』 『저도 외동이에요. 아버지와 늘 둘이 살았어요.』 내 말을 듣고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볼 거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서핑을 가르쳐 준 분이 아버지세요?』 『아니요. 어릴 때 제가 스스로 배웠어요.』 『대단하네요. 좀 전에 파도 타는 모습 봤어요. 아주 쉽게 타시는 것 같더라구요. 멋지기도 하구요. 그 모습을 보니 저도 그렇게 타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배우고 싶으면 제가 가르쳐 줄게요.』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안 어려워요. 내일도 나올 거예요.』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확실한 거 아니면 말하지 마세요.』 그 말에 난 멍해졌다. 그녀는 내 팔을 잡더니 모닥불을 가리켰다. 『이제 가서 인사할까요?』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목이 턱하고 막혔다.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집은 일층에 차고와 예닐곱 개의 침실이 달린 거대한 삼층 구조의 건물이었다. 널찍한 데크가 주변을 에워쌌다. 데크 난간에는 타월들이 내걸려 있었다. 집주변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렸다. 데크에 놓인 그릴에서는 핫도그와 치킨을 요리하는 냄새가 났다. 그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두건을 쓴 남자애는 도시의 세련미를 풍기려는 듯이 상의를 벗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웃음만 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데크 앞 모래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주변으로 다소 큰 사이즈의 셔츠를 입은 여러명의 여자애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남학생에게는 관심이 없는 척했다. 한편, 남자들은 저만큼 떨어져 자신들의 우람한 팔과 조각 같은 복근을 자랑하듯 폼을 잡고 여자애들의 시선을 일부로 의식하지 않는 듯이 서 있었다. 이런 모습을 르로이 바에서도 많이 봤었다. 배운 놈이든 아니든 애들은 애들이다. 모두 20대 초반의 이 남자애들은 한참 이성을 밝힐 나이다. 해변에서 술먹고 놀다보면 다음에는 안 봐도 뻔했다. 내가 그 시간까지 여기에 있진 않겠지만. 우리가 그들 근처로 이르자 그녀가 걸음을 늦추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언덕 옆으로 갈까요?』 그녀가 제안했다. 『그래요.』 우리는 불가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못 보던 남자가 나타나자 쳐다보는 여자애들도 있었지만 곧 시선을 피하고 하던 대화를 하였다. 랜디도 맥주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우리를 보고 여자애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빨리 등을 돌렸다. 『치킨이랑 핫도그가 있는데.』 그녀는 이런 상황을 다 무시하고 내게 물었다. 『치킨.』 『술은 뭘로 하실래요?』 불빛에 비친 그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다들 마시는 걸로 하죠. 고마워요.』 『바로 가져 올게요.』 그녀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는 같이 가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대신 모닥불로 걸어가서 셔츠를 벗어 빈 의자에 깔고 다시 내 자리에 와서 앉았다. 고개들 들어보니 두건 쓴 남자애와 사바나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질투심이 생겼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런 감정을 식혔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바도 없고, 더군다나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더욱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끝내지도 못할 일을 시작할 마음도 없었다. 2주 뒤면 떠날 텐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식사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차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모습에 생각이 달아났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한쪽으로 잘 빗어 넘긴 검은머리는 희끗한 새치가 벌써부터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중년처럼 나이 들어 보이는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당신이 존이군요.』 그는 웃으며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전 팀 웨던이에요.』 그는 손을 내밀었다. 『사바나에게 얘기 들었어요... 사바나도 그쪽이 그곳에 있었던 걸 고마할 거예요.』 나는 악수를 하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처음에 가진 경계심만 아니면 그의 미소는 브래드나 랜디에게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함이 묻어났다. 그는 눈에 띄는 내 문신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내 문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은 편도 아니고 양쪽 팔에 다 새겨 놓았다. 사람들은 내가 나이들면 후회할 거라고 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고.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그러세요.』 그는 안정감을 느끼는 거리를 두고 자리에 앉았다. 『잘 오셨어요. 차린 건 없지만 음식은 먹을 만할 거예요. 배고프죠?』 『솔직히 배고팠어요.』 『서핑하고 나면 다 그러죠.』 『서핑하세요?』 『아뇨. 그런데 바닷가에 있으면 늘 배고파요. 어릴 때 방학을 맞이해서 바다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 해마다 여름에 파인 놀 숄즈에 갔었어요. 가 보셨어요?』 『딱 한번요. 여기도 있을 건 다 있잖아요.』 『그럼요.』그는 내 서프보드를 가리켰다. 『긴 보드를 좋아하나 봐요?』 『다 좋아요. 여기 파도는 이게 더 맞거든요. 짧은 보드로 제대로 놀려면 태평양에서 타는 게 좋아요.』 『가봤어요? 하와이, 발리, 뉴질랜드 같은데요. 그쪽이 파도타기에는 아주 좋다고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아직요.』 그가 그런 곳을 알고 있다니 놀라웠다. 『다음에 한 번 가봐야죠.』 나무 하나가 터지는 소리를 내며 작은 불꽃이 하늘로 솟았다. 나는 손을 모두며 질문을 생각했다. 『여기서 빈곤층을 대상으로 집을 지어준다고 들었어요.』 『사바나가 말하던가요? 네, 그럴 계획이에요. 필요한 가정이 두 집 있는데 7월말이면 그들도 집을 갖게 될 거예요.』 『좋은 일을 하시네요.』 『저만 하는 것도 아닌데요. 그나저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혹시 저더러 자원봉사를 할 수 있냐고 물으시려는 거죠?』 그가 웃었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재밌네요. 전에도 그런 말 들어봤어요. 제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많이들 생각하죠. 저는 티가 많이 나나 봐요. 그나저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제 조카를 아시나 해서요. 걘 포트 브래그에서 근무해요.』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저는 독일로 배치됐어요.』 『람슈타인요?』 『아뇨. 거긴 공군기지구요. 저는 비교적 가까운데 있어요. 왜요?』 『작년 12월에 프랑크푸르트에 있었어요.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냈죠. 원래 거기서 살다 왔어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계세요.』 『세상 좁네요.』 『독일어 좀 배웠어요?』 『전혀 할 줄 몰라요.』 『저도 그래요. 부모님은 독일어가 유창해요. 몇 년간 집에서 독일어를 듣고 지냈죠. 그래서 외출 전에 따로 교습도 받았어요. 근데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야 말이죠. 다행이도 합격은 받았다만 저녁에 식탁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 하는 게 다였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 형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둘다 바보가 된거죠.』 나는 웃었다. 그는 진솔하고 꾸밈없는 인상이어서 그새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참, 뭣 좀 갔다줄까요?』그가 물었다. 『사바나가 이미 가지러 갔어요.』 『그렇겠네요. 사람을 정말 잘 챙겨주거든요. 걘 늘 그래요.』 『사바나 말로는 둘이 같이 자랐다면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바다네 목장이 우리집 목장 옆에 있어요. 학교도 같은 데 다니고 몇 년간 교회도 같이 다녔어요. 또 대학도 같은 곳으로 다녔구요. 그러니까 여동생처럼 좀 특별한 사이죠.』 그가 여동생이라고 표현했지만, “특별한 사이”라는 말을 들으니 실제 감정은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랜디처럼 그녀가 나를 여기로 초대한 것 가지고 질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동안 사바나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팀이랑 같이 있네요.』그녀가 말했다. 한손에는 치킨, 감자 샐러드, 감자튀김이 든 접시를 들고, 다른 손에는 다이어트 펩시를 들고 있었다. 『응. 아까 너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도 전할까 해서 잠깐 왔지.』팀이 대신 말했다. 『그러다가 집안 얘기 하면서 지루하게 만들어 버렸지.』 『잘했어. 그렇지 않아도 소개시켜줄 생각이었어.』그녀는 내가 상의를 벗은걸 신경쓰지 않았다. 『음식 가져왔어. 팀, 내거 먹을래? 가서 또 갔고 오면 돼.』 『아냐, 됐어.』팀이 일어서며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그럼 둘이 먹어.』그는 반바지에서 모래를 털어냈다. 『존, 만나서 반가웠어요. 내일이든 아무 때나 다시 오려면 와요.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고마워요. 저도 반가웠어요.』 팀은 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에서 오는 사람과 다정하게 인사를 한 후 이내 뛰어갔다. 사바나는 음식과 마실 것을 건네주며 내 곁에 앉았다. 옆에 바짝 앉았지만 서로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무릎에 접시를 얹고나서 캔을 집으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캔을 들어올렸다. 『아까 맥주 드셨지만 아무거나 가져오라고 해서 음료수를 갔고 왔어요. 좋아하실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아이스박스에 맥주는 얼마든지 있어요. 저도 군인들이 어떤지 알거든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정말 괜찮아요』캔을 따며 말했다. 『술을 안마시나 보네요.』 『안마셔요.』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어조는 방어적이거나 새치름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투여서 맘에 들었다. 그녀는 치킨을 한조각 떼어 물었다. 나도 한입 물었다. 말없이 먹는 동안 팀과 그녀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팀이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녀도 알고 있는지, 그녀가 생각하는 팀은 어떤지 궁금했다. 분명 뭔가 짚히는건 있지만 팀이 말한대로 형제같은 관계가 아니라면 그게 뭔지 알수는 없었다. 어쩐지 그 점이 궁금했다. 『군에서는 어떤걸 하세요?』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는 하사에요. 병기계서 근무하죠.』 『뭐하는 덴데요? 그러니까 매일 무슨 일을 하냐구요. 총쏘고 뭘 폭파하고 그러나요?』 『가끔요. 하지만 기지에 있으면 거의 따분해요. 여섯시 정도에 아침점호해서 인원점검하고 분대별로 운동하러 가요. 농구나 달리기를 하거나 역기를 들기도 하죠. 어떤 경우는 무기 해체, 조립교육을 받기도 하고, 야전 교육도 받고, 사격장에 가고 그래요. 그날 훈련이 없으면 내무반에서 비디오게임도 하고, 독서도 하고, 또 운동을 하러가거나 그날 할일을 하죠. 그리고 네시에 기상점호를 받고 내일 전달사항을 받아요. 그러면 하루를 마치는 거예요.』 『비디오 게임을 한다구요?』 『저는 운동이나 독서를 해요. 제 동기들이 게임 고수들이죠. 걔들은 폭력적인 게임일수록 더 좋아해요.』 『어떤 책을 읽으세요?』 읽는 책을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교전지역에 배치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치킨을 다 먹고 말했다. 『상황이 조금 달라요. 경계근무를 서야해요. 파손되는게 부지기수니까 수리도 해야하고, 순찰을 나가지 않아도 늘 정신없이 바쁘죠. 그렇지만 보병은 지상군이니까 거의 밖에서 생활한다고 보면 돼요.』 『무서운적 있었어요?』 나는 적절한 답변을 찾아보았다. 『네. 가끔요. 사방천지가 끔찍하게 돌아가도 매번 겁먹고 다니지는 않아요. 그냥 뭐랄까... 살려고 발버둥치는 거라고나 할까요. 아주 갑자기 일이 터지기 때문에 맡은 임무를 하면서 안죽으려고 하는거 외엔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후유증은 나중에 정신이 들면 오죠. 그때서야 죽음의 고비까지 갔었다는걸 알고서는 오돌오돌 떨거나 토하는 사람도 생기죠.』 『저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나는 질문인지 아닌지 몰라 화제를 바꿨다. 『왜 특수교육학과를 갔죠?』내가 물었다. 『말하려면 긴데. 정말 듣고 싶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노아에 앨런이라는 아이가 있어요. 평생 알고 지냈죠. 자폐아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걔한테 어떻게 다가서야할지 몰라 방치해뒀어요. 어렸지만 저도 그런 게 속상하더라구요. 그래서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우리 부모님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앨런에게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처음엔 납득할 수 없었죠. 앨런에게는 늘 인내하며 지켜주는 형이 있었어요. 꼭 같이 다녔어요. 단 한 번도 동생에게 실망하지도 않고 보살피더니 점차 앨런도 호전되더라구요. 하지만 그래봐야 정상은 아니었어요. 지금도 부모님과 살지만 앞으로도 그렇겠죠. 어릴 때보다는 길을 덜 잃어버려요. 저는 그때 앨런과 같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그때가 몇 살이었어요?』 『열두 살요.』 『그래서 학교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거죠?』 『아뇨.』 그녀가 말했다. 『앨런 형이 했던 방식을 하고 싶어요. 그는 말을 이용했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하였다. 『자폐아동들은... 그들만의 작은 세상에 갇혀진 셈이에요. 그래서 학교나 병원에서는 기본적인 것밖에 못하죠. 하지만 저는 그 닫힌 세상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실제로 그런 적도 있구요. 앨런은 처음에 말타는걸 무서워했어요. 하지만 앨런의 형이 계속 태웠어요. 그러더니 앨런이 말을 쓰다듬거나 코를 만지기도 하더니 나중에는 먹이까지 주더라구요. 그다음부터는 말을 탔어요. 말을 처음 타던 앨런의 얼굴이 생생해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보통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어요. 바로 그런 경험을 이런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단지... 행복을요.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때 저는 제 인생을 결정했어요. 자폐아를 위한 승마 캠프장 같은 것을 열어서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요. 그러면 아이들이 앨런처럼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잖아요.』 그녀는 상기된 모습으로 포크를 내려놓고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멋지네요.』 『두고봐야죠.』 그녀는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지금은 그냥 꿈이에요.』 『말을 좋아할 것 같은데요?』 『말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알면서! 맞아요. 좋아해요. 마이다스라는 아라비안 종인데 여기에 와서 말을 못타니까 가끔은 미치겠더라구요.』 『본색이 드러나네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좀 더 있어야 해요. 집에 가면 매일 하루종일 탈려구요. 말 타세요?』 『한번 타봤어요.』 『좋았어요?』 『다음날 몸이 쑤셔서 애먹었어요. 걷지도 못할 지경으로 아팠어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와 대화하는 게 좋았다. 남들과 달리 자연스럽고 편했다. 머리 위로 오리온자리가 보였고, 수평선 너머로 금성이 환하게 반짝였다. 다른 사람들은 술기운에 장난을 치며 쉴새없이 계단을 오르내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아버지도 좀 봐야하구요. 지금도 안주무시고 계시면 걱정할까봐서요.』 『전화하실래요? 여기 전화 써도 돼요.』 『아뇨. 지금 나서야될 것 같아요. 한참 걸어야하거든요.』 『차 없어요?』 『네. 아침에 차를 얻어타고 왔어요.』 『팀에게 태워주라고 할까요? 팀이 태워줄 거예요.』 『아뇨. 괜찮아요.』 『말도 안 돼는 소리마세요. 한참 걸어가야 한다면서요? 팀한테 운전하라고 할게요. 불러올게요.』 그녀는 말리기도 전에 뛰어갔다. 잠시후, 집에서 팀이 그녀를 따라나왔다. 『팀이 기꺼이 태워주겠대요.』 그녀가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요?』 『괜찮아요.』그는 안심시키며 말했다. 『트럭을 앞에 세워뒀어요. 서프보드는 뒤에 실으면 돼요.』 그는 보드를 가리켰다. 『도와줄까요?』 『아니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할게요』 나는 의자로 걸어가 셔츠를 입고 서프보드를 집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천만에요.』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자동차 열쇠 가지고 바로 나올게요. 차는 저기 풀밭에 주차된 녹색 트럭이에요. 그 앞에서 보죠.』 그가 떠나자 나는 사바나를 향해 돌아섰다. 『정말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저두요. 군인과 처음으로 있어 봤어요. 든든하다고나... 할까요. 오늘밤에 랜디가 짓궂게 굴지 않겠죠. 문신 때문에 겁먹었을 거예요.』 그녀도 내 문신을 봤나 보다. 『나중에 기회되면 또 보죠.』 찾아 오라는건지 말라는건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여러모로 미스테리한 그녀였다. 다시 궁금한 점만 증배되었다. 『그런데 잊으신 거 같아서 조금 실망이에요.』 뭔가를 뒤늦게 생각한 듯 그녀가 말했다. 『뭘요?』 『서핑보드 타는거 가르쳐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바나에게서 받은 내 감정이나, 그 이유로 내일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팀이 눈치챘는지는 몰라도 그는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운전에만 집중하며 길을 옳게 찾아가는지만 물었다. 그는 황색불이 들어와도 차를 세우는 운전자였다. 그냥 휙 지나가면 되는데도. 『즐거우셨나 모르겠네요.』 그가 말했다. 『아는 사람도 없으면 어색하잖아요.』 『즐거웠어요.』 『둘이 잘 통하던데요. 사바나 매력있지 않나요? 그쪽이 마음에 드는 눈치던데.』 『좋은 얘기를 나눴어요.』 내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저는 사바나가 여기에 온 게 조금 걱정됐어요. 작년에 사바나 부모님이 우리랑 함께 했지만 이렇게 사바나가 혼자 참여한건 처음이에요. 다 큰 여자애지만, 여기 애들이 사바나가 평소에 어울리는 애들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저녁 내내 걔한테 추근대는 남자애들을 보는것도 못마땅하구요.』 『처신 잘 할거예요.』 『그럴거예요. 하지만 어떤 녀석들은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럴 수밖에요. 사내놈들이잖아요.』 그는 웃었다. 『그런거 같아요.』그는 차창을 가리켰다. 『여기서 어디로 가요?』 길을 안내하며 몇 차례의 모퉁이를 돌고나서 속도를 줄이라고 말했다. 그는 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아버지의 서재에서는 노란 불빛이 새나왔다. 『태워줘서 고마워요.』 차문을 열며 말했다. 『별말을요.』 그는 시트에 기대며 말했다. 『저기요, 아까 말한대로 언제든지 들리고 싶으면 편하게 오세요. 우리는 평일에는 일하지만 주말이나 저녁땐 일이 없어요.』 『그렇게 할게요.』 나는 약속했다. 집으로 들어와서 아버지의 서재로 가 방문을 열었다. 그는 「그레이시트(Greysheet)」를 읽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들었나 보다. 『죄송해요.』 나는 서재 문턱에 걸터앉으며 말했다.『놀라게할 생각은 없었어요.』 『괜찮다.』 단 한마디의 말뿐었다. 아버지는 잡지를 내려놓을까 고민하다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오늘 파도가 아주 좋았어요.』 내가 말했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파도였어요』 아버지는 웃으시며 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좀 틀며 물었다. 『오늘 어떠셨어요?』 『똑같지 뭐.』 아버지는 다시 묵념에 빠지셨다. 우리 부자의 대화는 늘 이런식으로 뻔히 오고가는 말들 뿐이었다. Three 서핑은 외로운 운동이다. 긴 무료함 속에 극도의 활동성이 점철된 서핑은 자연에 맞서지 않고 편승하는 법을 가르쳐주며, 묘미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서핑 잡지들이 소개하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대부분 공감한다. 파도에 올라타 그 안에 숨어들어 해안으로 타고 가는 맛은 다른 무엇에 견줄 수 없는 맛이다. 그러나 나는 바짝 마른 피부에 축 늘어진 머리를 하고 매일 나와서 하루종일 파도를 타며, 자신들만이 고귀한 존재인냥 하는 부류들과 다르다. 내게 서핑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내게 서핑이란 늘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탈출구인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일요일 이른 시간에 우리가 바다로 나설 때, 내가 사바나에게 하려던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주로 걷기만 했고, 비키니를 입은 그녀가 보기 좋았지만 애써 표정을 숨겼다. 『말 타는 것도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네?』 『마음의 소리를 듣는거요. 그래서 저도 말타는 걸 좋아해요.』 멋진 파도는 보통 청명하고 맑은 날 이른 아침에 볼 수 있다. 이런 날은 무더위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해변에 사람들이 붐빌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바나는 전날 모닥불을 피웠던 자리에 타월을 덮고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내가 어제 자리를 뜨고도 파티가 몇 시간은 더 지속됐을 게 분명하지만, 빈 병이나 쓰레기 하나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내 감정도 다소 나아졌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더웠다. 우리는 몇 분간 물가 바로 앞에 앉아 기본적인 서핑 요령을 점검했다. 나는 보드에 올라타는 법을 일러주었다. 사바나가 마음의 준비를 마치자, 나는 그녀 옆에 서서 보드를 끌고 물로 들어갔다. 서핑을 하러 온 사람들은 어제 봤던 사람들 외엔 별로 안 보였다. 파도를 차분하게 탈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는 순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 『잠깐 서봐요. 잠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도가 한차례 일며 그녀의 배를 때리자 그녀는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바로 닭살이 일어났다. 그녀는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다. 『적응 좀 해보구요...』 그녀는 팔을 펼치며 한차례 짧은 숨을 소리내어 몰아쉬었다. 『이런! 정말 물이 차가워요. 완전 차요!』 완전? 내 동기들은 이런 말 안썼다. 『적응될 거예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차가운 건 싫어요. 딱 질색이에요.』 『눈오는 곳에 살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재킷을 입고 장갑에 모자를 쓰고 단단히 무장을 하죠. 이렇게 아침부터 얼음짱같은 물속에 들어가지는 않거든요.』 『웃기네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물위에 붕붕 떠다녔다. 『네. 정말 웃기죠. 에쿵!』 에쿵! 웃음이 났다. 그녀의 호흡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닭살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앞으로 조금 나아갔다. 『그렇게 생고생하지 말구요. 위로 팔짝 뛰면서 가면 훨씬 나아요.』 내가 제안했다. 『그쪽은 그렇게 하세요. 저는 제 식대로 할테니까.』 내 요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 이런 시간에 나오신게 신기하네요. 저는 영상으로 올라가는 오후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죠.』 『지금 26도 정도 돼요.』 『아, 네! 네!』 그녀가 결국 순응했다. 그녀는 팔을 저어가며 연이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살짝 물에 잠기기도 했다. 단호하게 팔을 저었다. 『이제 조금 될 것 같아요.』 『저한테 부딪히지 마세요. 진짜로. 살살 해봐요.』 『그러죠. 고맙네요.』 내 장난을 무시하며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며 아주 몰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 표정은 너무 진지하고, 열정적이고, 웃기기도 했다. 『그만 웃어요.』 내 표정을 읽은 듯 그녀가 말했다. 『안 웃었어요.』 『얼굴 보면 알아요. 속으로 웃고 있잖아요.』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마침내 그녀가 내쪽으로 왔다. 물이 내 어깨 높이쯤 차고 나서 사바나가 보드에 올라탔다. 나는 보드를 잘 붙들었다. 그녀가 바로 앞에 있어 나도 모르게 눈길이 자꾸 그녀의 몸매로 갔다. 나는 애써 그 모습을 뿌리치고 뒤에서 몰려오는 파도를 주시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는지 알잖아요? 손으로 세게 젔다가 보드 앞을 양쪽으로 잡고 얼른 일어서세요.』 『알았어요.』 『처음엔 힘들어요. 넘어져도 겁먹지 말고 그냥 넘어지세요. 몇 번 하다 보면 일어설 거예요.』 『알았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작은 물결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자, 준비해요...』 나는 타이밍을 쟀다. 『자! 팔을 저어요...』 파도가 오자 나는 보드를 길게 밀어 보냈다. 그리고 그 탄력으로 사바나가 파도를 잡아탔고, 다음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곧게 서서 균형을 잡고 파도가 소멸될 때까지 해안까지 타고 가는 일만은 없다는 거 외엔. 물이 얕아지면서 속도가 줄자 그녀가 보드에서 내렸고,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사람처럼 나를 향해 돌아섰다. 『저 어땠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서로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눈길을 피할 순 없었다. 그 순간 ‘대략난감’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몇 년간 체조를 했어요.』 그녀가 실토했다. 『균형감각 하나만은 좋았어요. 발라당 넘어질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이 얘기를 해줄걸 그랬나 봐요.』 우리는 한 시간 넘게 물에서 보냈다. 그녀는 매번 보드에 서는 것을 성공했고 쉽게 해안까지 타고 갔다. 비록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그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윗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벌써 일어나 있는 사람도 조금 있었다. 여자애들 세 명은 데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전날 무리를 하여 회복이 덜 됐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사바나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내옆으로 와서 계단에 앉아 같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발라당 넘어진다고 했어요.』 나는 분명히 해두었다. 『저는 넘어지면 그냥 넘어지라고 했어요.』 『어머?』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컵을 가리켰다. 『커피맛 어때요?』 『맛 좋네요.』 내가 말했다. 『저는 커피로 하루를 꼭 시작해요. 안 좋은 버릇이죠.』 『누구나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잖아요.』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버릇이 있는데요?』 『저는 그런거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툭 건드렸다. 『어제 보름달이 처음 뜬 거 알았어요?』 사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요?』 내가 말했다. 『저는 보름달을 참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달을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거 있잖아요. 이를테면, 뭔가 실수를 해도 다시 새로운 기회를 얻을 것 같은 느낌 말이에요.』 그녀는 달에 대해 더 얘기 하지 않고 컵을 입술로 가져갔다. 김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올랐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내가 물었다. 『오늘 회의가 있는 거 외엔 없어요. 참, 교회가 빠졌네요. 저만 가요. 누가 가려하겠어요. 참 그러고 보니까 지금 몇 시에요?』 나는 시계를 봤다. 『아홉시가 조금 넘었네요.』 『벌써요? 시간이 별로 안 남았네요. 열시 예배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헤어질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갈래요?』 그녀의 질문이 귀에 들어왔다. 『교회요?』 『네. 교회요.』 그녀가 말했다. 『안 갈래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에게 교회는 분명 중요했다. 그러나 그녀가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별로요.』 내가 말했다. 『교회 안 간지 몇 년 됐어요. 어릴 때는 다녔지만...』 나는 말을 흐렸다.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다리를 쭉 뻗고 내 말을 더 기다렸다. 내가 말이 없자,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서요?』 『뭐가요?』 『갈래요 말래요?』 『옷이 없어요. 지금 입은 옷이 다에요. 집에 가서 샤워하고 다시 이쪽으로 제시간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안 그러면 가겠는데요.』 그녀는 내 눈빛을 한번 살피며 말했다. 『좋아요.』 그녀는 내 무릎을 툭툭 쳤다. 그녀가 내 몸을 만진 게 이번이 두 번째다. 『제가 옷을 구해올게요.』 『잘 어울리네요.』 팀이 말했다. 『옷깃이 조금 끼긴 해도 사람들이 모를 거예요.』 잘 다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카키색으로 차려입은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낯설어 보였다. 넥타이를 언제 매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런 내 모습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팀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사바나가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됐어요?』 그가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는 웃었다. 그는 신발끈을 묶으며 내게 윙크하며 말했다. 『사바나가 그쪽한테 마음이 있다고 했잖아요.』 군에도 군종목사가 있다. 모두 꽤 좋은 분들이다. 우리 기지에도 내가 아주 잘 알고 지내는 목사가 두 명 있다. 그 중 한 명이 테드 제킨스라는 목사인데, 누구나 딱 보면 신뢰감이 간다. 그는 술을 안 마신다. 같이 생활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찾아오면 언제든지 환영을 해주었다. 아내와 갓난 애기 둘이 있는 그는 십 오년간 목회활동을 해왔다. 그도 개인적으로 가정문제나 일반적인 군생활과 관련하여 마음고생을 해봤기 때문에, 누가 찾아와서 대화를 원하면 아주 세심히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얘기를 다 할 순 없었다. 그도 결국에는 장교였으니까. 그는 우리 소대원 두 명을 쉴새없이 찾아와서 그들의 탈선 행위를 다 듣고서야 돌아갔다. 문제는, 그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모든걸 다 말하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그가 좋은 분이고 육국 군종목사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그는 지루한 설교로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 않고 친구에게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하나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본인에게 맡겨두는 편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봐가며 위태롭다 싶은 사람들은 한두 명씩, 아니면 백 명이라도 불러서 대화를 하는 분이었다. 우리 소대가 발칸반도로 떠나기 전까지 아마 오십 명은 세례시켰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세례를 받아서 그런 절차를 밟지는 않았지만, 말한대로 정말 오랜만에 교회에 온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다니지 않은 것도 오래되어 뭐가 뭔지 몰랐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니지만 설교는 들을만 했다. 목사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찬송도 좋았다. 그리고 어릴 때만해도 늘 지루했던 설교시간이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설교에 푹 빠졌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나중에 새로운 화제로 대화할 수도 있고, 교회를 구실로 삼아 사바나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니까. 사바나는 팀과 내 사이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찬송을 부를 때 곁눈질로 보았다. 조용하게 낮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음율이 살아있어 듣기 좋았다. 팀은 성경에 몰두하며 읽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그는 목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우리는 교회 앞 층층나무 그늘에서 기다렸다. 목사와 얘기를 하는 팀의 모습에서 생기가 넘쳤다. 『서로 아는 사인가요?』 나는 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늘에 있긴 했지만, 더워서 땀줄기가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뇨. 팀 아버지가 여기 목사님 얘기를 해주셨나 봐요. 여기 찾아오려고 맵퀘스트(MapQuest)를 이용해서 어제 지도를 찾아보더라구요.』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선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옛날 남부 요조숙녀를 상기시켰다. 『같이 와서 좋네요.』 『저두요.』 내가 말했다. 『배고파요?』 『조금요.』 『그럼 숙소로 같이 가서 드세요. 음식이 조금 남았어요. 팀 옷도 돌려줄겸. 더워서 불편해 보여요.』 『헬멧에 장화신고, 갑옷을 입은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걱정마세요.』 그녀는 내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재밌네요.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도 그런 말은 안 쓰던데. 재밌어요.』 『놀리는 거죠?』 『사실대로 말한 거예요.』 그녀는 우아하게 나무에 기댔다. 『얘기가 끝나가나 봐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지만 대화가 끝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팀이 손을 어떻게 모으고 있는지 보여요? 저건 슬슬 작별 인사를 준비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악수를 청할 테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쪽으로 올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팀은 그대로 행동하며 우리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저처럼 작은 시골에 살면 사람들 보는 재미 밖에 없어요. 생활하다 보면 그 주기를 읽을 수 있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팀을 너무 지나치게 보고 자란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기다렸지?...』 팀이 손을 들어보였다. 『이제 갈까?』 『한참 기다렸잖아.』 그녀가 말했다. 『미안.』 그가 말했다. 『이야기 할 게 있어서.』 『아무나 만나면 할 얘기가 있대.』 『알아.』 그가 말했다. 『이제부턴 무뚝뚝해질 거야.』 그녀는 웃었다. 그들이 다정하게 장난을 주고받는 모습에 잠시 소외감을 느꼈지만, 차로 돌아가는 길에 사바나가 내 팔짱을 끼면서 그런 생각도 한순간에 달아났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는 모두 깨어있었다. 대부분이 수영복을 입고 선탠을 하고 있었다. 2층 데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보였다. 실내에서는 음악이 크게 울려퍼졌다. 아이스박스에는 맥주가 새로 채워져 있었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숙취에는 해장술이 최고란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조금 망설였다. 맥주는 언제든지 당기기는 게 사실이지만, 방금 교회를 다녀왔기 때문에 안 마시기로 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군에서 배운대로 팀의 옷을 잘 개어놓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팀이 샌드위치를 만들어 놓았다. 『많이 들어요.』 그가 말했다. 『먹을 건 엄청나게 많아요. 어제 내가 세시간이나 쇼핑을 해서 사온 것들이죠.』 그는 손을 헹구고 수건으로 닦았다. 『저도 사바나가 안 들어올 때 옷 좀 갈아입어야겠네요.』 그는 부엌에서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은 전통적으로 해변에서 볼 수 있는 장식으로 꾸며졌다. 밝은 색상의 고리버들 세공 가구들이 많았고, 조개로 만든 램프와, 벽난로 위로 등대 조각상들이 보였고, 파스텔로 그린 해안 그림도 걸려있었다. 루시 부모님도 볼드해드 아일랜드에 이런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족끼리 있는 것을 좋아해서 세를 놓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윈스턴세일럼에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이틀은 아주머니와 함께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가여운 루시만 홀로 남아야 있어야 했다. 물론 나는 루시랑 같이 있었다. 당시에 그녀 부모님이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리끼리 있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해요?』 사바나가 말했다. 그녀는 다시 비키니 차림이었지만 밑에 반바지를 하나 더 껴입었다. 『이제 안색이 좋아보이네요.』 『어떻게 알아요?』 『옷깃이 목에 꽉 낀다고 눈알이 튀어나오진 않아요.』 나는 미소를 보였다. 『 팀이 샌드위치를 만들었어요.』 『다행이다. 배고팠는데.』 그녀는 부엌으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하나 먹었어요?』 『아직요.』 내가 말했다. 『그럼 같이 먹어요. 저는 혼자 먹는거 싫어해요.』 우리는 부엌에 서서 먹었다. 데크에 누워있던 여자애들은 우리가 있는 것을 몰랐는지, 그 중 한 명이 어젯밤 다른 남자애랑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이런 애가 불우이웃을 위해 선행을 베풀러 온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바나는 마치 안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코에 주름이 잡힌 인상을 쓰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마실 거 필요해요? 어떤 걸로 할래요?』 『그냥 물 마실게요.』 그녀는 물병을 꺼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안 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보고 말았다. 솔직히 너무 좋았다. 그녀가 눈치챘을까 궁금했지만 아마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허리를 펴고 일어설 때 아까 교회에서 봤던 그 재미난 표정을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병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이거 먹고 또 서핑타러 갈거죠?』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물에서 오후를 보냈다. 서핑보드에 누운 사바나의 몸매를 바로 앞에서 감상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녀가 파도를 타는 모습은 훨씬 더 보기 좋았다. 게다가, 그녀가 물 밖으로 나와 쉬고 있을 테니 조심해서 타라고 했을 때, 파도도 타고 은밀히 그녀를 바라볼 수도 있어서 더욱 좋았다. 늦은 오후, 우리는 숙소 뒤편에 있는 일행들 근처에서 타월을 깔고 누워있었다. 나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랜디와 수잔 외에는 그다지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수잔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바나를 쳐다보았다. 한편, 랜디는 꿩대신 닭으로 브래드와 수잔과 함께 노는 것으로 만족하며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그러나 팀은 보이지 않았다. 사바나는 유혹적인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누워 나릇한 햇살을 받으며 잠을 청했지만, 그녀가 옆에 있으니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근데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문신 얘기 좀 해봐요.』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설명요?』 『글쎄요. 문신한 이유나 의미 같은 거요.』 나는 한쪽 팔꿈치를 괴고 누워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왼팔을 보여주었다. 『보세요. 이건 보병 마크구요. 또 이쪽은...』 나는 글씨들을 가리켰다. 『중대, 대대, 연대 표시를 말하는 거죠. 우리 분대원들은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조지아 포트베닝에서 기초 훈련을 마치고 자축하기 위해서 새겼어요.』 『밑에 ‘배터리’는 무슨 뜻이에요?』 『그건 내 별명이에요. 기초 훈련 받을 때 우리 훈련 교관님이 붙여줬어요. 제가 총기 조립을 빨리 못하니까 교관님이 꾸물거리면 내 몸에 배터리 꽂아서 시동 걸어주겠다고 하시면서 그때부터 붙여진 별명이죠.』 『호탕하시네요.』 『맞아요. 우리는 그분 안 계실 때 지옥의 루시퍼라고 불렀어요.』 그녀는 웃었다. 『그 위에 가시철사는 어떤 의미에요?』 『아무것도 아니네요.』 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말했다. 『입대 전에 그냥 한 거예요.』 『다른 팔에 있는 건요?』 한자였다. 깊이 들어가고 싶지 않아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건 철없고 정신 못 차릴 때 했어요. 아무 뜻도 없어요.』 『한자 아닌가요?』 『맞아요.』 『무슨 뜻인데요?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용기, 명예... 뭐, 이런거요.』 『욕이에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말한대로 이제는 별 의미없어요.』 『중국만 안가면 되겠네요.』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맞아요. 그러면 되겠네요.』 나는 맞장구쳤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반항심이 있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요. 사실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그래서 그때 그냥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 거군요?』 『저로서는 그랬어요.』 그녀는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때도 제 가방을 찾으러 물에 뛰어들었을까요?』 『아니요. 아마 비아냥거리기만 했겠죠.』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때 가방 찾아줘서 기뻤어요. 정말 필요한 가방이었거든요.』 『다행이네요.』 『또 다른 거 말해주세요?』 『다른 거 뭐요?』 『본인에 관한 다른 얘기요.』 『글쎄요. 뭘 알고 싶은데요?』 『남들은 모르는 거요.』 나는 질문의 의미를 생각한 후 말했다. 『1907년에 주조된 10달러 인디언 문양 동전이 몇 개나 되는지 말해줄게요.』 『몇 개나 되는데요?』 『마흔 두개요. 이 동전은 원래 사용하려고 만든 게 아니에요. 조폐소 직원들이 지인들과 함께 간직하려고 주조한 동전이죠.』 『동전에 관심있어요?』 『글쎄요. 말하려면 길어요.』 『시간 많잖아요.』 사바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방을 집었다. 『잠시만요.』 그녀는 가방을 뒤져서 썬크림을 꺼냈다. 『등에 로션 좀 발라주고 얘기 해줘요. 등이 탈 것 같아요.』 『아, 그러죠. 뭐라구요?』 그녀는 윙크를 하며 말했다. 『거래하죠.』 나는 그녀의 등과 어깨에 로션을 아주 고루고루 발라주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피부가 붉어져서 일할 때 화끈거릴 것이 분명했다. 로션을 발라준 후,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얘기도 들려주었고, 동전 박람회에 갔던 일, 심지어 엘리아스버그 씨에 관한 얘기까지 하면서 몇 분을 보냈다. 단, 그녀가 물어보면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물어봐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동전을 수집하세요?』 『항상요. 그런 셈이죠. 동전 얘기는 이제 서로 안 해요.』 『왜요?』 그 이유까지 설명해주었다. 이유는 묻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면 거짓말로 잘 둘러댔어야 한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바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서로 잘 모르는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서는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그녀의 얼굴엔 호기심 어린 표정이 드리워졌다. 『알아요. 저는 바보였어요.』 예전의 내 모습에 가장 걸맞은 표현이 있다면 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러게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구요. 지금 모습과 아주 다르니까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봤어요.』 사실이긴 하지만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아버지 생각을 하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나는 간략하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었다. 말하는 동안, 그녀는 내가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에 집중을 하듯이 모래를 손으로 떠서 손가락 사이로 갈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버지와의 서먹한 관계를 끄집어내고 말았다. 『그러네요.』 그녀는 내 말에 동조하며 말했다. 『2년간 집을 떠나있었고, 설령 그쪽이 예전과 달라졌다고 해도 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아시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변에는 사람들이 꽉 찼다. 이 시간대면 이미 해변에 올 사람들은 다 와 있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도 없을 시간이었다. 랜디와 브래드는 물가에서 프리스비를 던지며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다른 일행도 몇 명 건너와 그들과 합류했다. 『알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늘 서로 서먹했어요. 정말 아버지와 대화하는 게 힘들어요.』 순간, 내가 이런 얘기를 남에게 한 건 그녀가 처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낯설어졌다. 『우리 나이엔 다들 부모님과 그래요.』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세대차이가 아니라, 동전에 관한 게 아니면 아버지와 가벼운 얘기조차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사바나는 앞에 모래를 반반하게 다졌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버님을 만나고 싶어요.』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재밌는 분 같아요. 저는 늘 이런... 삶의 열정을 가진 분들이 좋았어요.』 『인생이 아니라 동전에 대한 열정이죠.』 내가 정정해서 말했다. 『같은 말이죠. 어쨌거나 열정은 열정이잖아요. 따분함을 깰 수 있는 재미가 있으니까 뭐가 됐든 좋은 거죠.』 그녀는 발로 모래를 밀어냈다. 『어쨌든 제 생각은 그래요. 하지만 나쁜 열정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커피 카페인처럼 말이죠?』 그녀는 앞니 사이의 작은 틈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죠. 동전이나, 운동, 정치, 말, 음악, 신념... 뭐든지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만사에 깊이 신경을 쓰지 않는 부류들이죠. 열정과 만족은 함께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없으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해요. 그럴 명분이 없으니까요. 제가 아버님의 동전 얘기를 듣고 싶은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누군가가 뭔가를 아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다른 사람도 영향을 받아서 행복해지거든요.』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그녀가 아직 순진하다고 팀이 말했지만, 우리 또래에 비해서 훨씬 조숙해보였다. 옆에 앉은 사바나는 내 눈길을 따라갔다. 프리스비를 던지던 아이들은 그 열기가 한창이었다. 브래드가 던지자 두 명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동시에 잡으려다가 머리가 부딪히며 물에 자빠졌다. 프리스비를 놓친 빨간 셔츠는 반바지에 모래를 묻힌 채 머리를 부여잡고 욕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일행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도 웃음이 났다. 『봤어요?』 내가 물었다. 『잠시만요.』 그녀는 말을 돌렸다. 『잠깐만 여기 계세요.』 그녀는 빨간 셔츠에게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움츠리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옆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사바나의 영향력은 컸다. 그녀가 웃으며 말하다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그는 벌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와 다시 내 옆에 앉았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기심을 숨길 순 없었다. 『평소같으면 아무말도 안했을 거예요. 하지만 가족들이 많으니까 말조심을 하라고 일러주었어요.』그녀가 설명했다. 『주변에 어린 애들이 많잖아요.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네요.』 그럴줄 알았다. 『말할 때는 대신 ‘완전’이나 ‘에쿵’ ... 이런 말을 쓰라고 했어요?』 그녀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곁눈질하며 흘겨보았다. 『그런 표현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우리 분대원들에게도 이런 말을 가르쳐줄까 해요. 문을 때려부수고 들어가 RPG를 던지면서 이런 말을 하면 적이 더 겁을 먹을 것 같아요.』 그녀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RPG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욕하는 것보다는 더 무섭겠네요.』 『로켓추진탄요.』 시간이 갈수록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오늘밤에 뭐 할 거예요?』 『회의 외엔 별다른 게 없어요. 집에 가서 아버님께 인사시켜 줄려고요?』 『아니요. 아무튼 오늘은 안돼요. 나중에요. 오늘밤에 윌밍턴을 구경시켜줄까 해서요.』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네.』 인정하며 말했다.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거기서 아무 때나 출발하면 돼요. 내일 일해야 하는 거 알지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어떤 곳인데요?』 『지역에서 해산물을 잘하는 데가 있어요. 게다가 좋은 체험도 될 거예요.』 그녀는 무릎을 팔로 감쌌다. 『저는 원래 모르는 사람이랑 데이트 안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겨우 어제 만났는데 그쪽을 어떻게 믿어요?』 『그러죠.』 내가 말했다. 그녀가 소리내며 웃었다. 『그렇게 나오니까 예외도 만들어야겠네요.』 『네?』 『그렇게 하자구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솔직한 군바리가 좋아요. 몇 시에 만나요?』 Four 다섯 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남부 유럽인의 피부로 변했기 때문에 햇살에 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샤워를 하니까 화끈거렸다. 물이 가슴과 어깨에 튀기자 쓰라렸고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나서 나는 휴가를 받아 집에 온 후,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리고 깨끗한 반바지와 집에는 몇 벌 없는 단추식 담청색 셔츠로 갈아입었다. 색상이 나와 아주 잘 어울린다고 루시가 사줬던 옷이다. 나는 소매를 걷고 옷단을 바지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신장을 뒤져 유행이 지난 샌들을 꺼냈다. 문틈으로 책상에 앉은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를 보면서 내가 연이틀 저녁 약속을 다른 데서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내내 아버지와 함께 조금도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는 내색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양심에 찔렸다. 동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후로 아침과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유일했으나, 그나마 그 자리도 내가 뺏은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아버지 집에서 머물며 밥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차를 빌려줄 수 있는지 물으려는 참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내 생활을 즐기려고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셈이었다. 사바나가 이런 내 행동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떤 때는 사바나가 내 머리 속에 집세도 내지 않고 들어가 살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죄책감을 받으면 잘못된 행동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좀 더 같이 있기로 결정했다. 구실일지는 모르지만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도 없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나는 늘 앉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너구나.』 아버지는 인사를 하자마자 머리를 쓸어올리며 책상을 응시했다. 내가 아무말 않고 있자 아버지가 억지로 말을 거셨다. 『오늘 어떻게 보냈냐?』 나는 자세를 틀어 앉았다. 『아주 좋았어요. 사바나랑 하루종일 있었어요. 어젯밤에 말씀드렸던 애 있잖아요.』 『음...』 그는 내 눈길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옆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런 얘기 못 들었다.』 『말씀 안 드렸나요?』 『그래, 하지만 괜찮아. 날이 늦었구나.』 아버지는 내가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걸 이제 보신 듯 했다. 어쨌거나 예전에도 이런 내 모습을 보셨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머쓱해질까봐 나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네, 알아요. 제가 멋을 좀 냈죠? 오늘 제가 같이 저녁 먹자고 했어요.』 내가 말했다. 『차 좀 가져가도 될까요?』 『아... 그래라.』 『오늘밤에 차가 필요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시면 제 친구들한테 빌리든가 할게요.』 『아니다.』 아버지는 차 열쇠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다른 집 같으면 아버지들이 열에 아홉은 차 열쇠를 던져주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손으로 직접 건네주셨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그냥 조금 피곤하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차 열쇠를 받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틀간 계속 저녁 같이 못해서 죄송해요.』 『괜찮다.』아버지가 말했다. 『이해해.』 차를 끌고 나왔을 때는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하늘은 독일에서 본 저녁 하늘과 대조되는 감미로운 빛을 띠었다. 도로는 보통 주일 저녁처럼 심하게 막혔다. 해변에 도착해 차를 세우는데 30분은 족히 걸렸다. 나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아 야구 경기를 시청하던 남자애 두 명이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왔어요?』 그들은 놀라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말했다. 『사바나 보셨어요?』 『누구요?』 그 중 한 명이 무성의하게 물었다. 『아니에요. 내가 찾아보죠.』 나는 거실을 건너 건물 뒤 데크로 가봤다. 어제 그릴로 음식을 만들던 남자애와 다른 일행이 보였지만 사바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변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숙소로 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누굴 찾으세요?』 그녀가 물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여자요.』 내가 말했다. 『부두 교각에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여자요. 하지만 서핑 하나는 제대로 배운 여자에요.』 그녀는 허리춤을 손을 얹고 미소지었다. 그녀는 반바지에 자신의 볼 색깔을 띠는 여름 홀터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마스카라와 립스틱까지 바른 것 같았다. 자연스런 그녀의 맨얼굴도 아름답지만 - 바닷가에서 자라서 이런 여자들을 많이 본다 - 지금의 모습은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서자 레몬향이 묻어났다. 『저를 그 정도 밖에 표현 못해요?』 그녀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순간, 그녀를 확 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 놀란 척하며 말했다. 『여기 있었군요.』 소파에 앉았던 남자애들이 힐끗 우리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TV를 봤다. 『준비 다 됐어요?』 내가 물었다 『지갑 가져와야 돼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부엌에 둔 지갑을 들고 문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행선지를 말하자 그녀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식사하러 ‘통나무집’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간단 말이에요?』 『군인이 돈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요. 이 정도면 그만이죠.』 발걸음을 같이 옮기면서 그녀가 나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다니까. 이래서 잘 모르는 사람이랑은 데이트 안하려는 거예요.』 식당은 케이프피어 강을 경계하는 유서 깊은 윌밍턴의 도심에 있었다. 이 지역 한쪽으로는 전형적인 관광 휴양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념품 가게와 골동품 전문점이 두 곳 있었고, 고급 레스토랑들과, 커피숍, 그리고 부동산 가게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윌밍턴의 다른 한쪽으로는 항구도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큰 창고들이 방치된 여러 창고들과 함께 서있었고, 다소 오래돼 보이는 사무실 건물들에는 절반 정도만 입점되어 있었다. 이 지역을 찾는 여름철 관광객들이 여기로도 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차를 돌렸다. 점차 인파가 줄더니, 우리가 더 황량한 지역으로 지나가자 인도를 걷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에요?』 사바나가 물었다. 『조금 더 가야해요.』 내가 말했다. 『저 위쪽 끝까지요.』 『이런 데는 사람이 안다니지 않나요?』 『그냥 동네 건물이죠.』 내가 말했다. 『관광객이 오든 말든 건물주는 신경 안 써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잠시 후, 속도를 줄이고 한 창고 건물 옆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통나무집’ 앞에는 수십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고, 식당은 변한 것 없이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아는 바로, 이 건물은 1940년부터 온갖 허리케인의 비바람을 견뎌내긴 했지만, 넓은 현관은 난잡해 보였고, 벗겨진 페인트칠과 곧 무너질 듯 주저앉은 지붕윤곽을 가진 허름한 건물이었다. 외벽에는 그물과, 자동차 휠캡, 면허판, 낡은 닻, 노, 녹슨 쇠사슬 같은 것으로 꾸며놓았다. 그리고 파손된 노젓는 배 한 척이 문 옆에 놓여있었다. 건물로 들어설 때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사바나의 손을 잡고 들어가야 하나 생각했지만 생각에 그쳐버렸다. 한참 여자를 찾을 때 작업에 성공은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는 거의 경험이 없었다. 만난지 단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그녀를 작업대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우리가 축 주저앉은 현관으로 들어설 때 사바나가 배를 가리켰다. 『식당주인이 이 가게를 연 이유가 저기에 있네요. 그분 배가 전복됐기 때문이죠.』 『그럴 수도 있죠. 아니면 누가 저기다 두고 그냥 방치해 둔 것일지도 모르구요. 이제 들어가도 되겠죠?』 『얼마든지요.』 나는 문을 밀어서 열었다. 그녀가 어떤 기대를 했을지는 모르나, 안으로 들어서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내 한쪽은 강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긴 바가 있었고, 손님들의 좌석은 목재로 만든 공원 벤치가 놓여 있었다. 머리카락을 크게 부풀린 여자 종업원 둘이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테이블 사이를 걸어다녔다. 그들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였다. 실내는 음식을 튀긴 기름 냄새와 담배 냄새가 났지만 참을만 했다. 테이블은 거의 다 찬 상태였다. 나는 주크박스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가수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컨츄리웨스턴 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클래식 록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우리는 테이블 사이를 지나갔다. 대다수의 손님들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건설 노역자에서, 조경사, 트럭 운전수 등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스카(NASCAR:전미 스톡 자동차 경주협회) 상표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 분대원 몇 명도 팬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종일 트랙이나 도는 경기 따위를 시청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신문에서 관련기사를 자동차란에 싣지 않고 스포츠란에 게재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는 서로 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녀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저는 이런 곳 좋아해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 살 때 매일 이곳에 와서 사신 거 아니에요?』 『아니요. 여긴 가끔 왔어요. 저는 주로 르로이를 다녔죠. 라이츠빌 비치 근처에 있는 바에요.』 그녀는 냅킨꽂이와 케첩, 텍사스 피티 핫소스 사이에 끼어진 플라스틱 필름을 접착 용지에 부착해서 만든 라미네이팅 재질의 메뉴판을 집었다. 『이렇게 해 놓으니까 보기 좋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메뉴판을 열었다. 『이 집은 뭘 잘해요?』 『새우 요리요.』 『어머, 정말요?』 『정말이죠. 새우란 새우는 여기 다 있죠. 포레스트 검프에서 부바가 포레스트에게 자기랑 새우 잡자고 조르던 장면 알죠? 그릴 새우, 소테 새우, 바비큐 새우, 케이준 새우, 레몬 새우, 새우 크리올, 새우 칵테일... 다 여기에 있어요.』 『어떤 거 좋아하세요?』 『저는 한쪽에 칵테일 소스를 두른 칠리 새우나 프라이드 새우를 좋아해요.』 그녀는 메뉴판을 덮었다. 『그쪽에서 골라요.』 메뉴판을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믿어 볼게요.』 나는 냅킨꽂이 사이에 메뉴판을 꽂았다. 『정했어요?』 『큰 통에 담은 칠리 새우요.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거예요.』 그녀는 내 앞으로 몸을 기댔다. 『그 잊지 못할 경험을 해주려고 지금까지 여자를 몇 명이나 여기로 데리고 왔나요?』 『그쪽을 포함해서요? 가만있어 보자...』 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한 사람요.』 『영광이군요.』 『여기는 친구들과 술보다는 밥을 먹으려고 많이 왔었죠. 하루종일 서핑한 후 여기서 먹는 밥맛은 아주 최고였어요.』 『그건 곧 알게 되겠죠.』 종업원이 와서 나는 새우 요리를 주문했다. 그녀는 술을 시킬 건지 물었다. 『스위트티로 주세요.』 사바나가 말했다. 『같은 걸로요.』 종업원이 자리를 뜨고나서 우리는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다시 왔을 때도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군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사바나가 군대 이야기에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도 물어보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군입대 전 3년간 생활했던 것에 대해선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질문을 해가며 아주 관심있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데이트가 얼마만인지 정말 오래만에 해보는 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루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별 다른 생각없이 지냈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사바나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와 단둘이서 있는 게 좋았고, 그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오늘 당장은 아니지만 내일이나 모레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이나, 재치, 타인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전부 신선하고 호감이 갔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으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내 스스로 부인했지만, 이틀간 사바나와 시간을 보내며 그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 음악 좀 더 들어요.』 그녀의 말에 내 생각이 달아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머니를 뒤져 25센트 동전 두개를 꺼내 주입구에 넣었다. 사바나는 유리를 짚고 앞으로 기대며 곡을 찾았다. 그리고 몇 곡을 골랐다. 테이블로 돌아와 앉으려는 쯤에 첫 곡이 벌써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밤엔 제가 얘기만 했군요.』 『말을 잘 하시는데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냅킨 종이에 싸인 포크와 나이프를 꺼냈다. 『얘기 좀 해봐요. 제 얘긴 다했지만 저는 그쪽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아요.』 『많이 알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내 나이도 알고, 학교, 전공도 알고, 난 술을 안 마신다는 것도 알잖아요. 또 고향이 르노아고, 목장에 살고, 말을 좋아하고,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위해 여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구요. 많이 아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나는 그녀가 빠트린 것 중에서도 아는 게 좀 있었다. 『더 말해 봐요.』 내가 말했다. 『이제 그쪽 차례에요.』 그녀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거 물어보세요.』 『부모님 얘기 좀 해주세요.』 『좋아요.』 냅킨을 집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컵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결혼하신지 25년 됐어요. 지금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시죠. 두 분은 아팔라치안 주립대학교에서 만났어요. 엄마는 저를 가질 때까지 2년간 은행에서 근무하셨어요. 그 후로 전업주부가 되시면서 모든 일을 다해주셨죠. 공부도 도와주고, 운전수가 되어 주고, 우리 학교 축구부 감독도 해주셨고, 학부모회 대표까지 많은 일을 하셨어요. 지금은 내가 여기 와있으니까 다른 일을 찾아서 매일 자원봉사를 하세요. 도서관이나 학교, 교회 같은데서요. 아빠는 학교 역사 선생님이세요.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여자 배구부 감독을 맡아오셨는데, 작년에는 주에서 결승전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팀이 지고 말았죠. 그리고 교회에서 집사이신데 청년부와 합창단을 맡고 계세요. 사진 보실래요?』 『좋죠.』 그녀는 가방을 열어서 지갑을 꺼낸 후, 지갑을 열어서 테이블 앞으로 내밀었다. 지갑을 받을 때 그녀의 손이 스쳤다. 『물에 빠져서 사진 귀퉁이가 조금 너덜해졌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알아 볼 수는 있을 거예요.』 나는 지갑을 돌려서 잡았다. 사바나는 엄마보다는 아버지를 더 닮았고, 까무스름한 피부는 아빠에게 물려받은 듯 했다. 『좋으신 분들 같아요.』 『정말 사랑해요.』 그녀가 지갑을 돌려받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최고죠.』 『아빠가 선생님인데 왜 목장에 살아요?』 『아, 지금은 목장 안 해요. 원래는 우리 할아버지 목장이었어요. 그런데 목장에 붙은 세금들을 내려고 할아버지가 조금씩 목장을 처분하다보니까, 막상 아버지가 물려받았을 때는 집이랑, 마구간, 목장 울타리까지 해서 10에이커 밖에 남지 않았죠. 목장이라기 보다는 큰 마당이라고 봐야죠. 우리는 그런 식으로 표현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좋은 이미지가 드는 것 같아요.』 『저한테 체조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배구는 아빠 때문에 한 건가요?』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물론 아버지는 훌륭한 감독이셨지만, 저한테는 제 적성에 맞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배구는 아니더라구요. 뭐, 열심히 잘 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어요.』 『말을 좋아했군요.』 『어릴 때부터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말조각상을 주셨는데, 그것이 인연이 됐어요. 여덟 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처음 말을 갖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선물이었죠. 말 이름은 슬로컴이에요. 나이든 암컷인데 순하고 저한테는 아주 딱이었죠. 그래서 잘 관리했어요. 말에게 먹이를 주고, 솔질하고, 마구간도 청소해주고요. 학교랑 체조,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돌보는 거 외에는 슬로컴이랑 시간을 보내는 게 다였어요.』 『다른 동물요?』 『자라면서 우리집은 농장이 되어갔어요. 개, 고양이, 한때는 라마도 키웠었죠. 그리고 길잃은 동물들은 제가 집으로 꼭 데리고 왔어요. 나중에 부모님도 두 손 들더라구요. 어떤 때는 한 번에 네, 다섯 마리까지 데리고 올 때도 있었어요. 가끔 동물 주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으러 왔었는데, 못 찾으면 우리 집에서 한 마리 얻어서 가곤 했어요. 우리집이 동물 수용소인 셈이었죠.』 『부모님 마음이 넓으셨네요.』 『네...』 그녀가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부모님도 길잃은 동물들은 아주 좋아하셨어요. 우리 엄마는 아니라고 하지만 저보다 훨씬 더 심했어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공부도 잘 했을 것 같아요.』 『늘 A학점이었죠. 우리반 졸업생 대표 연설을 제가 했죠.』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그녀가 말했다. 『왜죠?』 나는 답변하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제대로 사귀어본 적 있어요?』 『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네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어떨 거 같아요?』 『글쎄요...』 나는 말을 끌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웃었다. 『그러면... 그 질문은 모르는 걸로 해요. 어느 정도 궁금증이 있으면 오히려 좋아요. 게다가 그쪽에서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종업원이 통에 담긴 새우와 칵테일 소스가 든 플라스틱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다음, 우리가 마시던 컵에 차를 다시 채워주었다. 그녀는 오랜 경험으로 인해 능숙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더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돌아섰다. 『친절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죠.』 『바쁜가 보죠.』 사바나는 새우 하나를 집으며 말했다. 『내가 그쪽에게 심문받고 있는 걸 알고 그냥 피했나 봐요.』 그녀는 새우 껍질을 벗기고 소스에 찍어서 한입 입에 넣었다. 나도 통에서 새우 두 마리를 집어 내 접시에 담았다. 『또 뭘 알고 싶어요?』 『글쎄요. 아무거나요. 대학교 다니면 뭐가 제일 좋아요?』 그녀는 그릇에 새우를 담으며 어떤 말을 해줄지 생각해 보았다. 『좋은 선생님들이겠죠.』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대학교에서는 우리가 직접 교수님을 선택할 수 있어요. 시간표가 빡빡하지 않으면 말이에요. 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아빠가 조언을 해주셨어요. 아빠는 저더러 과목을 생각하지 말고, 교수님을 기준으로 항상 수업을 선택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아빠 말씀은, 학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정 수업을 들어야 하겠지만 스승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거였죠.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좋은 충동을 주시기도 하고 재미난 얘기도 많이 들려주세요. 그리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어도 엄청난 지식을 주시는 분들이죠.』 『자신들 과목에 열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녀는 윙크했다. 『그렇죠. 아버지 말씀이 옳았어요. 저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고, 제 전공과는 거리가 먼 과목을 들었어요. 그런데 이거 아세요? 그 수업들은 지금도 마치 내가 강의실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아주 생생해요.』 『뜻밖인데요. 저는 그쪽이 농구 경기 보러가는 것 정도로 말할 줄 알았어요. 채플힐에서는 거의 광적 수준이잖아요.』 『농구도 좋아하죠. 친구들도 사귀고, 아빠,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것도 그렇겠구요. 저는 르노아를 떠난 후로 많은 것을 배웠어요. 대학 생활은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정말 좋구요. 하지만 저는... 부모님 품에서만 살았던 거죠. 새롭게 눈을 뜰 수 있는 경험도 해봤어요.』 『가령 어떤 거요?』 『많죠. 술이라든가, 밖에 나가면 추근대는 남자애들에 대한 부담감 같은거요. 일학년 땐 정말 학교 다니기 싫었어요. 적성이 안 맞는 것 같더라구요. 실제로 그랬구요. 그래서 부모님에게 집으로 돌아가든가 편입을 하겠다고 했더니 반대하시더라구요. 부모님은 제가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아셨던 거죠. 그리고 부모님 말씀이 옳았던 것 같구요. 2학년 정도 됐을 때, 저랑 같은 처지에 놓인 여자애들을 만나면서부터 훨씬 생활이 나아졌어요. 기독교 학생 동아리 두 군데에 가입을 했는데, 거기서 우리는 토요일 아침마다 롤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했어요. 그리고 파티도 다니고 남자애와 데이트도 해봤지만 부담감 같은 건 못 느꼈어요. 정말 파티 같은 파티에 갔을 때도 부담감은 없었어요. 그냥 남들처럼 똑같이 행동할 필요는 없다고 받아들이게 됐어요. 제 판단에 옳다 싶은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된거죠.』 그래서 어젯밤에 나와 같이 있었던가 보다. 지금은 그 점이 신경쓰였다. 그녀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이랑 비슷한 것 같네요. 저도 지난 2년간 철이 많이 들었거든요. 우리 둘이 서핑 전문가라는 거 외에도, 그 점은 저랑 같네요.』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네요. 제가 방황을 좀 더 했다는 것만 빼고요.』 그녀는 다시 내 앞으로 몸을 숙였다. 『우리 아빠는 제가 힘들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들도 각기 어떤 일로 고민하며 저만큼이나 힘들어 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아버님이 지혜로운 분이시군요.』 『엄마, 아빠 다 그래요. 두 분 모두 일류대를 나오셨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서로 만나셨대요. 부모님은 교육을 정말 중요시했는데, 저를 그들의 프로젝트에 이용하신 셈이 되었죠. 저는 유치원에 가기 전부터 책을 읽었지만, 한 번도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저를 어른들과 얘기하는 것처럼 다루셨던 것 같아요.』 나는 그들이 내 부모님이었다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다시 그런 생각을 떨쳐버렸다. 우리 아버지도 최선을 다하셨고, 나도 지금의 내 모습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정에 대한 후회는 있을지언정, 종착역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간에, 지금 이렇게 칙칙한 변두리 식당에서 앞으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녀와 앉아 새우를 까먹고 있으니 말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집은 아주 조용했다. 음악 소리가 여전히 흘러나왔지만, 대부분은 불가에 앉아 내일 이른 아침에 할 일을 생각하는 듯이 쉬고 있었다. 팀도 일행들 사이에 끼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일행들 쪽으로 걸어가려는 때에, 놀랍게도 사바나가 내 손을 잡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산책해요.』 그녀가 말했다. 『저녁 먹은 것 좀 꺼지면 앉아요.』 머리 위로 별들이 펼쳐진 하늘에 가느다란 구름이 떠 있었고, 수평선 너머엔 아직 보름달의 형태로 달이 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우리가 해변으로 걸어가자 쉴새없이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썰물로 물이 빠져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는 단단한 모래를 밟으며 물가로 걸어갔다. 사바나는 샌들을 벗으려고 내 어깨에 손을 짚고 중심을 잡더니, 마저 한 짝도 벗었다. 나도 같이 신발을 벗고 우리는 말없이 몇 걸음을 걸었다. 『여기 너무 아름답네요. 산도 좋긴 하지만 여기도 나름대로 멋져요. 정말...평화로워요.』 그 말은 그녀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나는 달리 어떻게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어제 만났다는 게 안 믿어져요.』 그녀가 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만난 사람 같아요.』 내 손을 마주잡은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별을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팀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눈길을 바라보았다. 『팀은 내가 아직 순진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가끔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웃어버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렇게 우리처럼 두 사람이 해변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야... 보기 좋다...하는 생각이 들어요. 언덕 뒤로 가서 이상한 짓을 할 거란 생각은 안 들어요. 그렇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저는 미리 짐작하고 그러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중에 그런 얘기를 들으면 늘 놀라고 말죠. 어쩔 수 없지만요. 어젯밤에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여기 일행들 두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말 충격이었죠.』 『그런 일이 안 벌어진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죠.』 『대학이 안 좋은 게 바로 그거에요. 많은 학생들이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생활해요. 그러니까 뭐가 되었든... 이것저것 경험하려는 거죠. 섹스나 술, 심지어 마약 같은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요. 보수적일지는 몰라도 저는 그런 거 이해 못해요. 그래서 제가 남들과 달리 모닥불가로 가지 않으려는 거겠죠. 솔직히 어제 얘기 들었던 그 애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그들과 나란히 앉아서 마음을 숨기며 옆에 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판단할 문제는 물론 아니죠. 여기 봉사하러 온 애들이니까 착한 것만은 분명해요. 그래도 그렇죠. 무슨 말을 하고 싶냐구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런 건 참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이죠.』 그녀가 내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무말도 보태지 않았다. 『누구한테 그 애들 얘길 들었어요?』 대신 이렇게 물었다. 『팀요. 팀도 실망한 눈치였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걔네들을 내쫓을 건가요?』 우리는 해변을 한참 걸어 내려가다 다시 돌아서 걸었다. 불가 옆에 어른거리며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뿌연 안개엔 소금 향이 배어났다. 그리고 달랑게들이 우리가 다가가자 구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선을 넘었네요.』 『어떤 게요?』 『제가... 흥분한 거 말이에요.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에요. 내 일도 아니잖아요.』 『누구나 판단해요.』 내가 말했다. 『사람 본성이잖아요.』 『알아요. 하지만... 저도 완전한 인간이 아닌 걸요. 결국엔 하나님이 판단하실 문제에요.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 나는 미소지었다. 『왜 웃어요?』 『우리 군종목사님이 생각나서요. 그 분도 똑같은 말을 했거든요.』 우리는 해변을 걸으며 숙소 부근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물가에서 벗어나 다시 부드러운 모래를 밟았다. 걸을 때마다 발이 미끄러졌다. 사바나는 내 손을 힘주어 쥐었다. 나는 일행들이 있는 모닥불에 가면 그녀가 내 손을 놓을지 궁금했다. 실망스럽게도 그녀는 내 손을 놓았다. 『이제들 돌아왔구나.』 팀이 반갑게 우리를 불렀다. 랜디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예전처럼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제는 그런 표정이 슬슬 지겨워졌다. 브래드는 수잔 뒤에 서있었다. 그녀는 브래드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수잔은 사바나에게 자세한 얘기를 나중에 듣더라도 일단은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랜디를 생각해서라도 열받은 척 해야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일행들은 관심없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팀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걸어왔다. 『다들 저녁 식사는 어땠어?』 『아주 근사했어.』 사바나가 말했다. 『지역 음식을 맛봤어. 우린 ‘통나무집 새우’로 갔다왔어.』 『재밌었나 보구나.』 팀이 말했다. 질투심이 숨겨진 말인가 해서 잘 들어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팀은 어깨로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랑 같이 있던지... 다 얘기가 끝나가긴 하지만, 내일 할 일을 얘기하고 있었거든.』 『사실 조금 졸려. 차 있는 곳까지 존을 바려다 주고 와서 안에 들어가서 쉴게. 우리 내일 몇 시에 일어나야 해?』 『여섯 시. 아침먹고 일곱 시 반까지는 현장으로 가야 돼. 그리고 선크림 바르는 거 잊지마.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할 거니까.』 『알았어.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줘.』 『그래.』 그가 말했다. 『내일 다시 말하겠지만, 잘 봐봐. 내말 안 듣다가 내일 새까맣게 타는 애들이 꼭 나와.』 『그럼, 아침에 봐.』 그녀가 말했다. 『그래.』 그는 고개를 나에게 돌렸다. 『오늘 다시 봐서 좋네요.』 『저두요.』 『그리고 몇 주 지내다가 따분하면 언제든지 와요. 일손은 늘 필요하니까.』 나는 소리내며 웃었다. 『그 말 할줄 알았어요.』 『제 정체가 드러나는 군요.』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쨌든, 또 뵙고 싶네요.』 우리는 악수를 했다. 팀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사바나가 집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모래 언덕으로 가서 샌들을 다시 신고 풀이난 목재 길을 따라 숙소를 돌아서 나왔다. 잠시 후, 우리는 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어두워서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오늘밤 즐거웠어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 하루종일요.』 나는 침을 삼켰다. 『또 언제 보죠?』 그저 누구나 물어볼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아직 키스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건...』 그녀가 말했다. 『알아서 하시면 되죠. 제가 있는 곳을 알잖아요.』 『내일 밤 어때요?』 나는 불쑥 말을 꺼냈다. 『밴드가 있는 다른 곳을 알고 있어요. 아주 재밌어요.』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밑으로 쓸어 넘겼다. 『그 다음날 밤은 어때요? 괜찮아요? 공사를 시작하는 첫날은 늘... 들뜨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그날은 사람들이 다 모여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빠지면 안 되거든요.』 『네. 좋아요.』 하지만 나는 하나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내 목소리에 묻어나는 마음을 분명 읽었을 것이다. 『팀이 말한대로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들리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화요일 밤에 보죠.』 나로서는 앞으로도 익숙하지 않을 그런 어색함 속에 우리는 계속해서 서있었다. 그러다 내가 키스를 하려는 순간 그녀가 뒤돌아섰다. 평소대로 행동한다면 일단 덤벼들고 봤을 것이다. 게다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충동적인 키스였을 것이다. 사바나의 경우는 달랐다. 이상하리만큼 내 몸은 굳어있었다. 그녀도 서두르지는 않았다. 차 한대가 지나가며 이런 정적도 깨졌다. 그녀는 숙소 방향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내 팔을 잡으며 가볍게 뺨에 키스를 했다. 여동생에게 키스를 받는 느낌이었지만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그녀의 채취는 내 몸을 감쌌고, 그녀가 뒤로 물러서고 나서도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을 아주 오래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조용히 팔을 빼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 숙소로 사라졌다. 그날 밤 늦게, 나는 오늘 하루를 되새기며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보낸 오늘 하루가 내게는 얼마나 의미있는 날이었는지 그녀에게 말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밖으로 별똥별이 환하게 빛을 발하며 밤하늘을 갈랐다. 왠지 모르게 좋은 징조라고 믿고 싶었다. 나는 사바나의 부드러운 키스를 백번도 넘게 되새겼고, 단지 어제 만난 여자와 이렇게 사랑에 빠진 내 모습에 놀라워하며 잠을 설쳤다. Five 『일어나셨어요?』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아버지는 오븐 앞에 서계셨다. 실내는 베이컨 냄새가 감돌았다. 『응... 존이구나.』 잠이 덜 깬 나머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도 일찍 일어난 거 알아요. 그냥 아버지 일 나가시기 전에 일어나고 싶었어요.』 『음...』 그가 말했다. 『그래. 음식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아버지는 늘상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보였다. 내가 집에 있는 것이 좋다는 뜻이었다. 『커피 있어요?』 『주전자에 있다.』 나는 커피를 컵에 따라 붓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테이블에는 손대지 않은 신문이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아침을 드시며 늘 신문을 보셨다. 나는 신문에 손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신문을 제일 먼저 보는 것을 좋아하셨고, 늘 일면부터 차례대로 읽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제 사바나와 보낸 저녁이 어땠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요리에만 신경쓰시며 아무말 없으셨다. 시계를 보니 사바나가 잠시후면 일어날 시간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내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분명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정신이 없을 텐데도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현실을 직시하니 조금 아쉬움이 들었다. 『어젯밤에 뭐 하셨어요?』 사바나의 생각을 떨쳐버리고 물었다. 아버지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계속 요리만 하셨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뭐라고 했냐?』 『어젯밤에 뭐 하셨어요?』 『어제 뭐 어쨌다고?』 『어젯밤요. 뭐 재미난 일 없으셨냐구요.』 『없었다.』 그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버지는 나를 보고 웃으며 베이컨을 뒤집었다. 팬에서는 지글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저는 재밌게 보냈어요.』 나는 자청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사바나는 정말 좋은 애에요. 사실 어제 사바나랑 교회도 갔었어요.』 나는 어쩐지 아버지가 더 물어보실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를 바랬다. 우리집도 다른 집안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하며 간혹 웃으며 농담도 건네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는 오븐에서 버너를 하나 더 켜고 작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계란풀이를 부었다. 『빵을 토스터에 몇 장 넣어주겠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우리는 다시 말없이 밥만 먹을 것이 훤했다. 『제가 할게요.』 나는 서핑을 타며 하루를 보냈다. 아니, 타려고 했었다. 바다는 하룻밤 사이에 잠잠해졌고, 작은 파도는 맛이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파도는 어제보다 해안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서 소멸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파도를 하나 만나 타더라도 곧 소멸되어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오크아일랜드에 가거나 차를 몰고 애틀랜타 비치까지 갔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더 멋진 파도가 있을지 몰라 서핑을 타고 쉐클포드 비치까지 갔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대신 지난 이틀간 서핑했던 곳에서 파도를 탔다. 해변 조금 아래로 숙소가 보였고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뒷문은 닫혀 있고 타월도 보이지 않았다. 창가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데크로 나와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언제 돌아올지 궁금했다. 물론 네, 다섯 시면 돌아오겠지만, 그때쯤이면 벌써 집에 돌아가 있어야 한다고 미리 생각해두었다. 그 시간까지 있을 이유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사바나가 나를 스토커 취급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세시 정도에 자리를 정리하고 르로이를 들렸다. 바는 예전 기억과는 달리 어둡고 칙칙해서 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늘 이 술집을 보면 전문 술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콜중독자 전문 술집! 아니나 다를까, 외로운 남자들이 술잔에 고개를 묻은 채 인생의 고민에서 잠시 벗어나려고 앉아 있었다. 가게주인 르로이가 보였다. 그는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알아보았다. 바에 자리를 잡자, 그는 의례적으로 잔을 들고 맥주를 채웠다. 『오랜만이야.』 그가 말했다. 『이제 말썽 안 피우는 거야?』 『노력중이죠.』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내 앞으로 잔을 밀어넣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 꾸며놓으니까 좋네요.』 어깨 너머로 고개짓을 하며 말했다. 『다행이군. 자네를 위한거야. 뭣 좀 먹겠나?』 『아니요. 이거면 돼요.』 그는 내 앞의 카운트를 닦은 후, 행주를 어깨에 걸치고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어깨를 짚는 손길이 느껴졌다. 『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뒤를 돌아보았더니 예전부터 싫어하던 친구들 중 한녀석이 보였다. 여긴 이런 놈들만 있다. 여기는 장소도 그렇지만 친구놈들도 아주 싫었다. 생각해보니 늘 그랬던 것 같다. 딱히 갈 데가 여기 밖에 없지만, 왜 여길 다시 찾아왔고, 왜 하필이면 단골로 만들었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안녕. 토비구나.』 키 크고 깡마른 토비가 옆으로 앉아 몸을 돌려서 나를 보았다. 그는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 며칠간 샤워를 안했는지 냄새가 났고, 셔츠에는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직도 군바리야?』 그는 발음이 샜다. 『운동 좀 했나 봐.』 『그래.』 군대 얘기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 『주로 놀지 뭐. 논지 몇 주 됐어. 그 전에 퀵스톱에서 일했었지. 그런데 주인이 아주 더러운 인간이었어.』 『지금도 같은 집에서 살아?』 『물론이지.』 같은 집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기색을 보이며 그가 말했다. 그는 병을 기울여 한 모금 길게 마셨다. 그리고 내 팔을 빤히 쳐다보았다. 『몸 좋구나. 운동하냐?』 그는 다시 물었다. 『조금.』 나는 그가 같은 질문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근육이 제대로 잡혔는데!』 나는 달리 다른 말을 고르지 못했다. 토비는 다시 한 모금 술을 마셨다. 『야! 오늘 맨디네 집에서 파티가 있어.』 그가 말했다. 『맨디 기억하지?』 물론 잘 안다. 3일도 못가서 헤어졌던 예전 여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토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걔네 부모님이 뉴욕인가 뭔가 가서 오늘밤 아주 진탕 놀거야. 파티하기 전에 여기서 잠깐 취기만 올리려고 있는 거지. 우리랑 같이 갈래?』 그는 어깨로 구석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을 가리켰다. 테이블은 맥주 피쳐가 세 병이나 비워져 있었다. 두 명은 예전에 알던 친구지만, 나머지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못가.』 내가 말했다. 『저녁에 아버지와 저녁 먹기로 했어. 아무튼 생각해줘서 고마워.』 『취소해. 오늘 밤 아주 대단할거야. 킴도 올거야.』 생각만 해도 움찔한 과거의 또 다른 여자였다. 나는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나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안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거의 마시지 않은 잔을 앞에 두고 일어섰다. 『약속했거든. 그리고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알잖아.』 그는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번 주말에 만나자. 애들이랑 서핑타러 오크라코크에 가거든.』 『생각해 볼게.』가지도 않을 거면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버님 댁 전화번호는 그대로지?』 『응.』 나는 자리를 떴다. 토비는 분명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오던 길에 저녁거리로 스테이크와, 샐러드 한봉지, 드레싱, 감자 두개를 샀다. 차도 없이 물건을 서프보드와 함께 들고 집으로 오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걸을만 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다녔었다. 그리고 질이 들어선 군화보다는 신고 있는 신발이 훨씬 더 편안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차고에서 그릴과, 조개탄 자루, 라이터 기름을 꺼냈다. 그릴은 몇 년간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묻어있었다. 나는 그릴을 뒷마당 현관으로 가져가 석탄가루를 털어내고 호스로 물을 부어 거미줄을 제거하고 햇볕에 말렸다. 집안에서는 스테이크에 소금과, 후추, 마늘 가루를 조금 뿌리고, 감자는 호일에 싸서 오븐에 넣은 다음, 샐러드를 그릇에 담았다. 그릴이 마르자, 나는 조개탄을 넣어 불을 피우고 마당 밖에 테이블을 차렸다. 스테이크를 그릴에 몇 점 더 올리고 있을 때, 때마침 아버지가 걸어오셨다. 『아버지 오셨네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늘밤 저녁을 제가 한번 만들어 볼까 해서요.』 『아...』 그가 말했다. 그는 그제서야 내 저녁을 차릴 수 없다는 걸 이해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해라.』 그는 한 마디 더 보탰다. 『스테이크는 어떻게 구워드릴까요?』 『중간만 구워라.』 그는 현관문 근처에 계속 서있었다. 『제가 군에 가고 난 후로 한 번도 안 쓰신 모양이에요.』 내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사용하세요. 그릴스테이크만한 게 또 어딨어요. 집으로 오는 내내 군침이 흘러 혼났네요.』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오마.』 『십분 정도면 스테이크가 다 익을 거예요.』 아버지가 들어가시고, 나는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 감자와 샐러드를 담은 그릇을 꺼냈고, 드레싱과, 버터, 스테이크 소스도 꺼내 들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크루즈 승무원 복장을 하고 우유 두 잔을 들고 나오셨다. 그는 반바지 차림에 검은 양말과, 테니스화, 꽃무늬 하와이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반바지를 몇 년간 안 입은 사람처럼 새하얀 다리를 드러냈다. 설령 반바지를 입으셨다 하더라도 나는 그 모습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복장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했다. 『때마침 나오셨네요.』 나는 다시 그릴로 돌아서며 스테이크 두 접시를 담아서 하나를 아버지 앞에 놓았다. 『고맙다.』 『천만에요.』 아버지는 접시에 샐러드를 담고 드레싱을 뿌린 후, 호일에 쌓인 감자를 꺼냈다. 그리고 버터를 바르고 스테이크 소스를 적당히 끼얹었다. 이 과정이 말없이 이루어졌다는 것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오늘 어떠셨어요?』 늘상 물어보는 질문을 했다. 『똑같지 뭐.』 아버지의 대답도 한결같았다. 그는 다시 웃으며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사회활동 장애자다. 나는 아버지가 왜 대화를 그토록 힘들어하시는지 궁금했고, 그가 젊었을 땐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결혼할 사람은 어떻게 찾았을까? 싹수 노란 질문이란 거 잘 알지만 악의를 갖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한동안 먹기만 했다. 접시가 포크에 닿는 소리만이 우리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바나가 아버지를 뵙고 싶대요.』 나는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그 아가씨 친구?』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분은 우리 아버지 밖에 없다. 『네.』 내가 말했다. 『마음에 드실 거예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다녀요.』 그는 자신이 물어볼 차례라는 걸 알았고, 물어볼 말이 생각나자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만났어?』 나는 가방 얘기를 아주 생생하게, 그것도 가능하면 아주 웃기게 표현해가며 설명했지만, 아버지에게서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잘했구나.』 다시 대화가 멈췄다. 나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랐다. 『아버지?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래라.』 『엄마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엄마에 대해서 물어보는 건 몇 년만에 처음이었다. 그녀와 같이 살지도 않았고, 기억도 없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도 못 느꼈던 것이다. 지금도 그다지 관심은 없다. 그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싶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뜸을 들이며 감자에 버터를 더 발랐다.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저녁 먹다가 만났어.』 아버지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네 엄마는 식당 종업원이었어.』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예뻤어요?』 『응.』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감자를 으깨며 소금을 살살 뿌렸다. 『너랑 비슷했어.』 『뭐가요?』 『음...』 아버지는 조금 망설였다. 『엄마는... 고집이 있었어.』 나는 달리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컵을 집었다. 『우유 더 마실래?』 아버지가 물었다. 어머니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다. Six 시간은 상대성이다. 물론, 내가 먼저 알아낸 사실도 아니고, 저명한 과학자들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 내가 말하는 상대성 시간이란, 에너지나, 질량, 광속도, 혹은 아인슈타인이 가정했던 그 어떤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바나를 기다리는 동안 느꼈던 시간이란 오히려 무료함의 시간에 가까웠다. 아버지와 저녁을 마친 후, 나는 다시 그녀 생각을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바로 생각나는 사람도 그녀였다. 나는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파도가 어제보다 좋았지만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래서 늦은 오후가 되어 서핑을 그만 타기로 했다. 나는 해변가의 작은 햄버거 가게에서 치즈버거를 하나 사먹을까 망설였다. 동네에서는 아주 유명한 가게다. 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은 들었지만 나중에 사바나를 만나면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집으로 향했다. 나는 스티븐 킹의 최신작 소설을 조금 읽다가 샤워를 하고 청바지와 폴로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두 시간 더 책을 읽다가 시계를 보았더니, 고작 이십 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상대성 시간이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며 내 옷차림을 보시더니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셨다. 『사바나 만나러 가냐?』 『네.』 소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자동차 열쇠를 받았다. 『오늘 늦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뒷머리를 긁었다. 『알았다.』 『내일 아침 같이 먹을까요?』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다소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그럼 이따가 봐요. 알았죠?』 『아마 자고 있을 게다.』 『꼭 보자고 말한 건 아니에요.』 『아...』 그가 말했다. 『그래...』 나는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막 열려는 차에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도 사바나를 만나고 싶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못 들을 뻔했다. 사바나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아직 밝고 햇살이 바다에 뿌려지고 있었다. 차에서 나오자 마음이 떨렸다. 이렇게 내 마음을 떨리게 한 여자가 또 언제 있었을까, 어쩐지 우리 사이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현실이 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건만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복도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고, 뒷마당 데크에는 늘 있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곳으로 걸어가 사바나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해변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모래를 밟으며 걸어가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서버렸다. 그녀는 랜디와, 브래드, 수잔과 함께 모래 언덕 근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랜디가 무슨 말을 하자 그녀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랜디와 앉은 그녀는 수잔과 브래드처럼 연인으로 보였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저 지금 공사중인 집 얘기를 하든가,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을 서로 얘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싫었다. 게다가 사바나가 내 옆에 앉았을 때처럼 랜디 곁에 가까이 앉아 있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한 날을 그녀가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궁금해 하며 그렇게 서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오셨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오나 궁금해 하는 참이었어요.』 랜디가 옆에서 희죽거렸다. 그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승리감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고양이가 없으면 쥐가 날뛴다’는 표정으로 읽혔다. 사바나는 천천히 내 곁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소매없는 흰색 블라우스에 밝은 색상의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는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의 어깨는 오랜 시간 햇볕에 그을린 자국이 전보다 더 많았다. 그녀는 가까이 걸어와 뒤꿈치를 들고 내 뺨에 키스를 했다. 『잘 지냈죠?』 그녀는 내 허리를 팔로 안으며 말했다. 『네.』 그녀는 내 표정을 읽으려는 듯, 살짝 허리를 뒤로 제쳤다. 『저를 보고 싶었다는 표정인데요.』 그녀는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뭔가 받아칠 만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하자, 그녀는 내 융통성에 대꾸하듯 윙크를 했다. 『저도 그쪽이 보고 싶었나 봐요.』 나는 그녀의 어깨 맨살을 잡았다. 『바로 갈까요?』 『그래요.』 우리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길은 내 마음을 완전히 누그러뜨렸다. 그러다 잠시... 그녀를 바로 쳐다보았다. 『랜디와 대화하는 거 봤어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녀는 내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래요? 봤어요?』 나는 다시 용기내서 말했다. 『일하면서 서로 친해진 것 같던데요.』 『네. 맞아요. 그리고 내 짐작이 맞았어요. 사람 괜찮더라구요. 여기서 일 마치면 모건스탠리에 6주간 인턴과정을 밟으러 뉴욕에 갈 거래요.』 『음...』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숨죽여 웃었다. 『질투하는 거 아니죠?』 『질투 안 해요.』 『그럼, 됐어요.』 그녀는 다시 내 손을 꽉 잡았다. 『질투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나는 마지막에 들은 말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녀가 그런 말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아주 좋았다. 우리는 차로 걸어가서 내가 차문을 열어주었다. 『‘오이스터스’에 데리고 갈 생각이에요.』 내가 말했다. 『해변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나오는 나이트클럽이죠. 나중에 밴드부도 나오는데 그때 춤추러 나갈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 뭘 할건데요?』 『배고파요?』 어제 먹으려 했던 치즈버거를 떠올리며 물었다. 『조금요.』 그녀가 말했다. 『숙소에 와서 간식을 조금 먹어서 그다지 배는 고프지 않아요.』 『해변을 좀 걷는 건 어때요?』 『음... 이따 봐서요.』 그녀는 다른 것을 생각해 둔 게 분명했다. 『그럼 뭘 하고 싶은지 말해 볼래요?』 그녀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에게 인사하러 가는 건 어때요?』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요?』 『네. 정말요.』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 들렸다 가요. 그리고 먹을 거 사서 춤추러 가면 되잖아요.』 내가 망설이고 있자,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갈거죠?』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부탁을 하면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그런 것이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저녁 내내 그녀와 단둘이만 있고 싶었다. 그리고 나랑 단둘이서 보내는 게 싫은 게 아니라면, 굳이 오늘밤에 우리 아버지를 보러 가자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나는 마음이 상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채, 그녀는 지난 이틀간 공사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들떠 있었다. 내일은 창문 공사를 한다고 했다. 말을 들어보니, 랜디는 이틀간 그녀 옆에서 같이 일을 했다고 했다. 즉, “되찾은 우정”을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나는 랜디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관심을 그렇게 표현할지 궁금했다. 몇 분후, 우리는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아버지의 서재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시동을 끈 후, 열쇠를 빼서 차에서 내렸다. 『우리 아버지는 조용한 편이라고 말했죠?』 『네.』 그녀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그냥 만나 뵙고 싶었어요.』 『왜요?』 어감이 이상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불쑥 그렇게 말이 튀어나왔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했다. 『가족이니까요. 길러주신 유일한 가족이잖아요.』 사바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소개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다소 놀라셨는지 숱없는 머리를 한번 휙 쓰다듬으며 바닥을 내려다 보셨다. 『전화도 안 드리고 와서 죄송해요. 존에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모두 제 탓이에요.』 『아...』 아버지가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가 시간을 잘못 맞춰왔나요?』 『아니요.』 아버지는 고개를 들더니 다시 바닥을 보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버지가 말했다. 잠시 우리는 그렇게 아무말없이 거실에 서있었다. 사바나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아버지가 그 모습을 봤을지는 모르겠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이제야 손님 대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물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존 말로는 동전수집을 아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는 나를 보며 대답을 어떻게 할지 살피는 모습이었다. 『노력 중이에요.』 『그 노력을 우리가 무례하게 방해했나 봐요?』 그녀는 나에게 했던 식과 똑같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놀랍게도 나는 아버지의 부자연스런 웃음소리를 들었다. 크게 웃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웃은 건 웃은 거였다. 놀라웠다. 『아니요. 방해한 것 없어요. 그냥 오늘 새로 구입한 동전을 보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말씀하시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사바나는 이 모습을 못 봤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했을 것이다. 『정말요?』 그녀가 물었다. 『어떤 건데요?』 아버지는 몸의 체중을 다른 다리로 옮겼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한번 볼래요?』 우리는 40분간 거실에 있었다. 나는 서재에 앉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주로 듣기만 했다.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다. 제대로 된 수집가들처럼, 아버지는 동전을 일부만 집에 보관했다. 나머지는 어디에 뒀는지 나도 잘 모른다. 아버지는 2주마다 수집품의 일부를 바꾸어 놓았는데, 마치 새동전들이 마술로 ‘짠~’하고 나타난 것 같았다. 대개 아버지의 방에는 다해봐야 동전이 열개도 안됐고, 값어치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왠지 아버지가 사바나에게 흔한 1센트 링컨 동전을 보여줄 것 같았고, 그러면 사바나도 황홀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열 번도 넘게 질문을 했다. 하지만 내가 대답해 줄 수 있거나, 동전 화보집에서 알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세부적인 질문을 했다. 그녀는 동전이 특정한 값이 나가는 이유를 묻는 대신, 동전을 구입한 시기와 장소를 물어봤다. 그러면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내가 어릴 때 주말마다 애틀랜타, 찰스턴, 롤리, 샬럿 등을 따분하게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그때 갔던 여행에 대해서 한참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혼자서만 말했다. 여전히 대화중에 말수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사십 분의 시간 동안, 아버지는 내가 휴가를 받고 집에 와서 대화했던 것보다 사바나와 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녀가 전에 말했던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열정은 이미 천 번은 봐왔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있어서 동전이 삶을 포옹하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다른 얘기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동전 얘기는 그만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내 기분을 헤아리며 동전 얘기는 그쯤에서 멈췄다. 그러나 다른 화제로 말씀은 없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기분이 좋았다. 나도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손으로 동전을 짚으며 설명할 때, 빛나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조폐소 각인이나 인쇄의 선명도, 동전에 새겨진 화살이나, 화관 모양 때문에 동전의 가치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는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동전으로, 웨스트 포인트에서 주조된 푸루프 주화(수집가용 특별 각인 한정판 주화)를 사바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사바나에게 동전의 결함 부위를 보여주려고 돋보기를 꺼냈고, 그녀가 돋보기를 건네받자 아버지의 얼굴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동전에 관한 내 감정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주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역시나 내가 알던 아버지였다. 기적은 없었다. 사바나에게 동전들을 보여주며 모든 것을 다 설명한 후, 수집 경위까지 설명을 마치자 설명도 점점 끊어졌다. 이미 했던 말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그는 이내 말이 없어졌다. 때마침, 사바나도 아버지가 점점 불편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책상에 놓인 동전들을 가리키며 말을 붙였다. 『고마워요. 정말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아버지는 웃었다. 그러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기 때문에 이제 자리에서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 설명 잘 해주셨어요. 그런데 우리 이제 가봐야 될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아... 그래.』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좋았어요.』 아버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사바나가 앞으로 다가와 아버지를 포옹했다. 『우리 다음에 또 이런 시간 가져요.』 그녀가 속삭였다. 아버지도 그녀를 안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어릴 때 받았던 생기없는 포옹이었다. 나는 그녀가 아버지가 어색하는 걸 느꼈을지 궁금했다. 차에서 사바나는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아버지를 본 소감을 묻고 싶었지만 답변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부자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아버지는 나를 길러주신 유일한 혈육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있지만, 남들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부정적인 말을 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성품상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버지를 인사시켜 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는... 마음씨가 참 따뜻한 분이세요.』 한 번도 아버지를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다행이네요.』 『정말...』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순한 분이세요.』 그녀는 나를 힐끗 보았다. 『하지만 그쪽이 왜 어렸을 때 말썽을 피웠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님은 윽박지르며 혼내는 분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맞아요.』 그녀는 나에게 장난스런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점을 이용해서 못된 짓을 했다는 말도 돼구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좀 하지 그랬어요.』 『그땐 어렸었다구요.』 『핑계도 좋네요. 그건 설득력이 없다는 거 아시죠? 저는 우리 부모님을 이용해 본 적 없어요.』 『네. 그쪽은 완벽한 어린이였겠죠. 전에 저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나요?』 『놀리는 거예요?』 『물론 아니죠.』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놀리는 것 같은데요.』 그녀가 말했다. 『알았어요. 조금 놀렸어요.』 그녀는 내 대답을 곰곰이 생각했다. 『뭐, 놀려도 어쩔 수 없지만, 완벽하지는 않았어요.』 『아니라구요?』 『당연하죠. 하나만 얘기하면, 4학년 때 어떤 과목에서 B학점을 받은 건 정확히 기억해요.』 나는 놀라는 시늉을 했다. 『말도 안돼! 설마요!』 『정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성적을 다시 올렸어요?』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이런 일이 다신 없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했었죠.』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배고프죠?』 『왜 안 물어보나 했어요.』 『뭐 먹고 싶어요?』 그녀는 뒤로 묶은 머리를 한번 쓸어올렸다. 『맛있는 빅 치즈버거 어때요?』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말에 얼어붙었다. Seven 『유명한 데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네요.』 사바나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모래 언덕 저 멀리, 자갈밭 주차장 가운데에 자리잡은 조스 버그 스탠드에는 손님들이 긴 꼬리를 물고 꼬불꼬불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데에요.』 나는 아주 큼직한 햄버거를 한입 물며 말했다. 사바나는 모래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내 옆에 가까이 앉아 있었다. 햄버거 맛은 환상적이었다. 맛있고 두툼한 크기였다. 감자튀김은 다소 기름졌지만 먹을만 했다. 햄버거를 먹으며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얘기 하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또한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남들과 있을 때 꾸밈없이 행동하면서도 그들의 심리에 아주 부합하는 행동을 했다. 그녀의 성격이나 외모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닮은 사람을 내 주위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왜 나에게 호감을 갖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우리는 환경이 서로 아주 달랐다. 그녀는 산지에서 왔고, 머리도 좋고, 마음씨도 착하며,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줄 용의를 가진 세심한 부모님 아래서 성장했다. 반면에, 나는 문신을 한 군인이며, 행동도 미숙하며, 집에서도 거의 외톨이였다. 아버지와 대화하던 모습만 봐도 그녀의 부모님이 교양적으로 그녀를 잘 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 앉은 그녀를 보며, 나도 그런 점을 더 닮고 싶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궁금해 하면서도 부드러움이 숨어든 그녀의 목소리에 생각이 달아났다. 『당신이 여기에 왜 왔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해변을 좋아하니까요. 이런 데 자주는 못 와요. 제가 사는 곳에는 파도도 없고, 새우배도 볼 수 없잖아요.』 내 표정을 보자 그녀가 내 손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장난이었요.』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냥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거죠.』 왠지 모를 좋은 기분이 들며, 나는 먹다 남은 햄버거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앞으로도 이런 기분이 다시 들지 모르지만,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내 팔을 손으로 치며 다시 물가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밖에 있으니까 정말 좋아요. 바다 너머로 해만 지면 아주 그만인데요.』 『일몰을 보려면 여기 정반대 지역으로 가야해요.』 『정말요? 해는 서쪽에서 진다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녀의 눈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읽었다. 『아무튼 그렇게 들었어요.』 그녀는 치즈버거를 반 밖에 먹지 않았다. 그녀는 먹던 걸 봉투에 넣고 내가 옆에 둔 것도 안에 넣었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봉투를 한 번 접은 후, 그녀는 다리를 쭉 뻗으며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죠?』 그녀가 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음료수를 마시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이 지난 이틀간 저랑 같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을 좀 더 잘 알게 되어 좋았거든요. 점심도 같이 먹고, 어젯밤에 저녁 먹을 때는 정말 재밌었어요. 그런데 뭔가 하나 빠트린 것 같은 잘못된 느낌이 들더라구요. 해변에서 당신이 해변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그것이 당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때 같았으면 키스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있었지만 참았다. 대신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내 눈빛과 마주친 그녀의 눈길에는 어떤 수줍음도 없었다. 『저한테 여기로 온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도 뻔하니까 장난을 친 거예요. 당신과 이렇게 있으면... 왠지 그냥 좋아요. 우리 부모님처럼 편안하기도 하구요. 우리 부모님은 정말 편안한 분이셨어요. 저도 크면서 나중에는 저래야지 했던 생각이 나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언제 한번 부모님을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나는 목이 타올랐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고 손가락사이로 깍지를 꼈다. 우리는 조용히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물가엔 제비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부리를 조아렸고, 한 무리의 바다갈매기들이 파도가 밀려오자 흩어졌다. 하늘은 더 어두워졌고, 비가 올 것 같은 구름이 더 많이 꼈다. 해변 위로는, 드넓은 쪽빛 하늘 아래를 거니는 연인들이 흩어져 걷고 있었다. 우리는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모든 사물이 새롭게 보이는 것에 놀랐다. 새롭지만 편안하여,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 연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연인이 될 수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독일로 돌아갈 것이고, 이 모든 것도 다 끝나게 될 것이다. 내 동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사실은, 대서양을 다리로 놓고 만난 사람과 인연이 되려면 특별한 날을 몇 번 보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부대에도 휴가를 다녀온 동기들 중에서 사랑에 빠졌다며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코 오래 가지는 않았다. 사바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런 일반화를 뿌리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그녀를 더 많이 알고 싶었고, 결코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그녀는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내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면 내일 모레, 아니면 그 후로도... 어쩌면 그런 편견을 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해보았다. 『저기 봐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바다를 가리켰다. 『저기 흰파도요.』 나는 쇳빛 바다를 훑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앉았던 사바나는 자리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물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와봐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소리쳤다. 『빨리요!』 나는 놀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쫓아갔다. 나는 한달음에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녀는 물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봐요!』 눈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그녀가 말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 마리가 나란히 줄지어 파도를 타다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다시 해변 아래쪽에서 떠올랐다. 『돌고래 새끼에요.』 내가 말했다. 『매일 저녁이면 섬 주변을 지나가요.』 『저도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마치 서핑을 하는 것 같네요.』 『네. 그렇게 보이네요. 그냥 놀고 있는 거예요. 지금은 사람이 없으니까 안심을 하고 노는 거죠.』 『쟤네들과 같이 놀고 싶어요. 저는 늘 돌고래와 같이 헤엄을 치고 싶었거든요.』 『그럼 안 놀걸요? 아니면 당신이 쫓아오지 못 하도록 해변 아래로 달아날 거예요. 쟤들은 저렇게 있는 게 좋은 거죠. 서핑하다가 쟤네들을 본 적이 있어요. 저 녀석들도 호기심이 가면 아주 근처까지 다가와서 쳐다보고 가요. 그런데 쟤네들 가까이 가려 하면 쏜살같이 달아나죠.』 우리는 돌고래들이 우리 시야에서 벗어나 깜깜한 밤하늘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제 가야되겠네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남긴 음식을 집어들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갔다. 『아직까지 밴드부가 연주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렇게 오래 공연 하지는 않아요.』 『상관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뭐 다른 게 있겠죠. 또 말해두지만, 저 춤 잘 못 춰요.』 『싫으면 안 가도 돼요. 다른데 가고 싶으면 다른 데로 가요.』 『다른 데 어디요?』 『배 좋아해요?』 『어떤 배요?』 『큰 배요.』 내가 말했다. 『USS 노스캐롤라이나 호를 볼 수 있는 데를 제가 알아요.』 그녀는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가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자고 해도 그녀가 따라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라면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잠깐만요.』 그녀가 말했다. 『갈 곳이 생각났어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궁금한 나머지 물어보았다. 『어디요?』 사바나의 일행이 공사를 어제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집공사는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골조 공사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지붕도 이미 올려진 상태였다. 사바나는 차창 밖을 쳐다보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번 둘러볼래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요?』 『네. 보고 싶어요.』 달빛을 받고 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뒤쫓아 나도 따라서 내렸다. 공사장에 발을 내딛자, 이웃집 부엌 창가에서는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입구로 몇 걸음 걸어가자, 사바나가 자랑스럽게 공사 중인 건물을 가리켰다. 내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며 팔을 두르자,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편안하게 기댔다. 『우리가 지난 이틀간 만든 게 바로 이거에요.』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어때요?』 『훌륭해요.』 내가 말했다. 『여기에서 살 가족들이 정말 좋아할 거예요.』 『맞아요. 그리고 아주 훌륭한 가족이에요. 고생을 정말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집을 가질 자격이 충분해요. 허리케인 푸란이 이들의 집을 파괴했지만, 다른 많은 가족들처럼 이 집도 홍수에 대한 어떤 보험을 들지 못했어요. 아이가 셋 달린 싱글맘인데, 남편은 몇 년 전에 도망갔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이 가족을 만나면 정말 좋아할 거예요. 아이들은 공부도 잘 해서 성적도 잘 받아오고 교회 청년부 합창단에서 노래도 불러요. 또 예의도 바르고 공손해서... 얘들 엄마가 아이들을 옳게 키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가족을 벌써 만나본 것 같네요?』 그녀는 집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간 가족들도 여기에 있었어요.』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안을 둘러볼래요?』 나는 마지못해 그녀를 앞세웠다. 『안내해요.』 집은 크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사시는 집의 평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러나 평면도는 더 펼쳐져 있어서 실제로 집은 더 커 보였다. 사바나는 내 손을 잡고 방마다 들려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세부적인 것까지 특징들을 잡아가며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부엌에 적합한 벽지와, 집 입구에 바를 타일 색상, 거실 커튼의 천, 그리고 벽난로 위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를 생각해 두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돌고래를 보았을 때와 같은 놀라움과 기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눈에 선명한 그녀의 어렸을 때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다시 앞문으로 나를 안내했다. 먼 곳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문가에서 나는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섰다. 『현관도 생길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흔들의자도 두 개 들어가고, 그네도 들어설 만큼 공간을 만들어서요. 그래서 여름밤마다 여기 앉아서 시간을 보내거나 교회를 다녀오면 다들 여기서 모이게끔 말이에요.』 그녀가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이 이 가족들이 다닐 교회에요. 그래서 이 집이 아주 완벽하다는 거예요.』 『이 집안 사람들을 아주 많이 아는 것 같네요.』 『아니요. 잘 몰라요.』 그녀가 말했다. 『얘기는 조금 밖에 못 해봤어요. 하지만 그냥 이 모든 걸 생각해 봤어요. 봉사 나와서 집 지을 때마다 저는 그래요. 주변을 한번 걸어보면서 이곳에 살 집주인들이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상상해 보려고 하거든요. 이렇게 하면 집짓는 것이 훨씬 더 재밌어요.』 달이 구름사이로 막 숨자 하늘이 어두워졌다. 수평선 너머로 번개가 반짝 빛을 뿜었고, 잠시 후 가느다란 빗줄기가 지붕위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길가에 늘어선 떡갈나무의 풍성한 잎들이 바람을 맞으며 소리를 냈고, 천둥소리가 집으로 울려퍼졌다. 『갈려면 비바람이 몰려오기 전에 지금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우리 갈 데도 없었던 거 몰라요? 게다가 저는 이렇게 천둥치며 비오는 날을 좋아해요.』 나는 그녀를 좀 더 끌어당기며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머리는 다 익은 딸기향 같은 향긋한 냄새가 났다. 밖을 보니, 빗줄기는 굵어져서 비스듬한 각도로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만이 유일하게 빛을 발하며 그녀의 얼굴 한편을 그늘지었다. 머리 위로 천둥이 포효했고 비는 아주 작렬하게 쏟아부었다. 빗방울이 톱밥으로 덮인 바닥을 강타하자 땅에 물웅덩이가 넓게 고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온은 따뜻했다. 옆을 보니 빈 나무 상자들이 보였다. 나는 그녀 옆을 떠나 상자를 주어와 단을 쌓아 간이의자를 하나 만들었다. 그다지 편안하지는 않겠지만 서있는 것보다는 한결 나을 것 같았다. 사바나가 내 옆에 앉자, 여기로 온 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실제로 단둘이 있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있으니 마치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사이처럼 느껴졌다. Eight 내 지혜를 무색하게 할 만큼 상자는 지독하게 딱딱했다. 그러나 사바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닌 척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다가 상자 뒷모서리가 살에 닿아 누르자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이러면 더 편할 줄 알았어요.』 『괜찮아요. 다리가 뻐근하고 아파서 그래요. 아주 좋은 걸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경계 근무를 서던 밤이 생각났다. 그때 난, 꿈속의 여자 옆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며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이제야 내가 그동안 뭘 빠트렸는지 알겠다. 사바나가 내 어깨에 머리를 묻은 지금, 나는 후회했다. 군에 입대한 것과, 해외 파병을 간 것과, 또 삶의 다른 길을 걸어 그녀의 삶에 일부나마 함께 했을 그 길을 걷지 않은 것을. 그 길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채플힐의 학생이 되어, 여름마다 시간을 내어 집을 지으러 다니며, 그녀와 말을 타러 다닐 수 있을 텐데. 『정말 말이 없네요.』 그녀의 말이 들렸다.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그냥 오늘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좋은 생각이었으면 좋겠네요.』 『네. 좋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뒤척이자 그녀의 다리가 내 다리와 스쳤다. 『저두요. 그런데 당신 아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는 오늘밤에 본 것처럼 늘 그래요? 수줍어하고, 말할 때 시선을 피하고 그래요?』 『네.』 내가 말했다.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몇 걸음 너머로, 비바람이 절정에 이르러 구름에서 비가 억수같이 쑫아붓고 있었다. 집 사방에서 폭포처럼 비가 쏟아졌다. 다시 번개가 번쩍거렸다. 이번에는 보다 가까운 곳이었다. 대포소리 같은 천둥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창문이 달렸으면 창문 포장지가 와르르 떨렸을 것 같았다. 놀란 사바나가 더 가까이 밀착하자, 나는 팔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가 발목을 꼬고 내게 기대자, 이렇게 오래도록 그녀를 안고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들과는 달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친근감이 감돌았다. 『철도 더 들었고, 책임감도... 더 있는 것 같구요.』 그 말을 들으니 기분 좋은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내 군바리 머리와 문신은 생각 못했나 봐요.』 『맞다. 군바리 머리. 문신도 그렇고... 뭐, 그런 건 덤으로 딸려 오는 거죠. 완전한 사람은 없잖아요.』 나는 그녀를 툭 치며 어딘가에 부상을 받은 시늉을 했다. 『사실, 예전부터 당신 기분을 알았더라면 이런 건 안했을 거예요.』 『안 믿어요.』 그녀가 내 몸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하지만 미안해요. 제가 괜한 소릴 했나 봐요. 그런 것에 대한 제 느낌을 얘기하려는 거였어요. 당신한테는, 그런 게 오히려 확실한... 이미지를 주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그런 거요.』 『어떤 이미지요?』 그녀는 한자가 새겨진 문신부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하나씩 설명해 갔다. 『이건 내 인생 내가 사니까 니들은 상관마라는 거구요. 이 보병 마크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낀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시철사는요... 그냥 어렸을 때 당신의 모습을 잘 반영하는 것 같아요.』 『심리학적 설명이 아주 그럴싸하네요. 저는 그냥 그림만 좋은 것 같은데요.』 『심리학 수업에서 점수 깎일 것 같네요.』 『벌써 깎인 거 아니에요?』 바람은 거셌지만 비는 조금 잦아들었다. 『사랑에 빠진 적 있어요?』 그녀는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나는 질문에 놀라며 말했다. 『뚱딴지같군요.』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야 여자들의 신비감이 더해진다고 들었거든요.』 『아, 그렇긴 하죠. 그런데 물어본 질문에 답하자니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골랐다. 『몇 년 전에 여자를 하나 만났어요. 그 당시엔 그게 사랑인 줄 알았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녀를 좋아했고 함께한 시간이 좋았지만, 그녀가 없을 땐 또 생각이 거의 안 나더라구요. 그녀를 만난 건 사실이지만 연인은 아니었어요. 앞뒤가 안 맞긴 하지만요.』 그녀는 생각에 잠겼지만 아무말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요? 사랑한 적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찼다. 『없어요.』 『하지만 저처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있죠?』 그녀는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분대에 있다 보면 심리전도 써 먹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제 본능대로라면 분명 과거에 심각한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녀가 웃었지만, 그 웃음엔 슬픔이 담겨있었다. 『맞출 줄 알았어요.』 그녀가 목소리를 억제하며 말했다. 『맞아요. 있었어요. 대학교 1학년 때요.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맞아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지 않았나요?』 그녀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사랑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말하기 싫으면...』 『괜찮아요.』 그녀는 손을 들어 내 말을 잘랐다. 『하지만 어렵네요. 잊으려고 했던 얘기거든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에게도 말 한 적 없어요. 사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어요. 그냥 들으면 뻔한 얘기 같은거 있잖아요? 시골에서 온 여자애가 대학에 와서 잘생긴 선배를 만났는데, 알고보니 그 선배는 남자 동아리 회장이기도 하구요. 그 선배는 인기도 좋고, 돈도 많고, 매력적으로 생겼죠. 그래서 그런 선배가 자기 같은 여자에게도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에 어린 일학년 여학생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구요. 그 선배는 그녀에게 특별하게 대해줬어요. 다른 여자 애들이 질투하니까 그녀도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녀는 이런 외곽에 위치한 호텔에서 열리는 동계파티에 다른 커플들과 함께 그 선배를 따라가게 되어요. 친구들한테 그 선배가 보기보다는 친절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다고 들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그 선배는 자기와 잤던 여자들을 침대 틀에 눈금을 표시해 두는 사람이었죠.』 그녀는 계속 말할 용기를 내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친구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그녀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어요. 그냥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음료수를 준 거 밖에 없죠. 그런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선배가 호텔방에 데려다 준다면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게 되죠. 그리고 다음에 일어난 일은, 둘이 침대에서 키스를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방이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나중에서야, 어떤 사람이 - 그 선배겠지만 - 음료수에 뭔가를 넣었고, 침대에 그녀의 이름을 넣어 눈금을 새기는 것이 그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녀의 말은 점점 빨라지다가 말이 엉키기도 했다. 『그는 가슴을 더듬으며 만졌어요. 그녀의 옷이 찢어졌고, 팬티도 찢어졌어요. 그가 위에 올라탔어요. 무거워서 밀쳐낼 수 없었어요. 그녀로선 정말 무기력했죠. 그가 그만뒀으면 하고 바랬어요. 왜냐하면 그녀는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머리가 어지러워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도와달라고 소리도 못 질렀죠. 그때, 다른 방에 있던 커플들이 달려왔어요. 안 그랬으면 그 선배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자기 뜻대로 했을 거예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그 방을 나왔어요. 옷을 들고 울면서요. 힘겹게 로비 화장실을 찾아내어 거기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죠. 함께 온 여자애들이 화장실에 들어와서 그녀의 번진 마스카라와 찢어진 옷을 봤어요. 그리고 위로의 말 대신, 그들은 그녀를 비웃었어요. 마치 처신을 잘 했어야지,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쳐다보면서요. 결국 그녀는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그 친구는 차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태우고 갔어요. 그 친구는 눈치가 있어서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을 마칠 쯤, 나는 분노로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나는 여자들의 성인도 아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들에게 싫은 것을 강요시켜 본 적은 없었다. 『미안해요.』 생각나는 말은 이거 밖에 없었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알아요. 하지만 달리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단지 이것만...』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잠시 후,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렸다. 『단지 뭐요?』 『제가 그냥... 글쎄요.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을 마구 패버릴까요?』 그녀는 슬픔을 머금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제가 그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를 거예요.』 『진짜요.』 내가 말했다. 『이름만 대세요. 하지만 당신에게 피해주지는 않을게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쥐었다. 『당신 마음 알아요.』 『농담 아니에요.』 그녀는 창백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세상의 고초와 상처받은 젊음이 모두 담겨있었다. 『그래서 얘기 안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감동 먹었어요. 그 마음만으로도 됐어요.』 그렇게 말하니 기분은 좋았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비는 마침내 그쳤다. 비가 그치면서 다시 이웃집의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노래 제목은 몰랐지만, 아주 오래 전에 나왔던 재즈곡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우리 부대원 중에 한 명이 재즈광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대학교 1학년 때가 힘들었다고 말한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구요. 이런 것도 모르고, 우리 부모님은 제가 향수병에 걸린 줄 알고 집에 있으라고 하셨죠. 그러나... 그만큼 깨달은 것도 있어요. 당당히 이겨내서 살아남자는 거였죠. 물론 더 악화되거나, 아니면 더더욱 일이 꼬였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시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어요. 그리고 깨달았구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그녀의 얘기 중에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그날 밤에 호텔로 차를 가지고 온 사람이 팀이었나요?』 그녀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달리 전화할 데가 없잖아요?』 나는 둘러대듯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리고 팀도 대단해요. 지금까지도 자세한 얘기를 안 물어봤어요. 저도 얘기를 안 했구요. 그때부터 팀이 저를 조금 보호하려는 경향이 생겼어요. 저도 그게 싫지는 않구요.』 말없이, 나는 그녀가 그날 밤과 그 이후에 보여주었던 용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내게 사연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세상을 낙천적인 자세로 본다는 것이 나는 놀랍기만 했다. 『완벽한 신사가 될 것을 약속하죠.』내가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에요?』 『오늘밤에요. 내일 밤도. 항상요. 저는 그 친구랑 달라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턱을 만졌다. 그녀의 손끝이 닿고 지나가자 살이 따끔거렸다. 『알아요.』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제가 지금 여기에 당신과 왜 있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다 다시, 나는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달리 다른 것을 생각해내는 것도 어렵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첫날 우리가 만나고 나서 수잔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당신이 가고 우리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말이에요.』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당신이 무섭게 생겼대요. 단둘이 있으라고 하면 정말 못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라구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보다 더 한 말도 들어봤어요.』 나는 분명히 밝혀두었다.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나는 수잔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당신이 해변에서 가방을 저에게 건네주었을 때, 저는 정직하고, 자신감 있고, 심지어 부드럽기까지 한 모습을 보았어요. 무섭다는 느낌은 전혀 못 받았어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가로등 아래로 식지 않고 남은 열이 안개가 되어 땅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뚜라미들이 서로를 부르며 울어댔다. 목이 갑자기 탁 걸려 침을 삼켰다. 나는 사바나를 바라보다 천장을 보고, 다시 내 발을, 그리고 다시 사바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평범한 지역으로, 평범한 휴가를 나와서, 평범하지 않은 사바나 린 커티스라는 여자와 어쩌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내 표정을 보았지만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불편했다면 미안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제가 가끔 이래요. 너무 앞서 나가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생각도 안하고 생각나는 말을 그냥 내뱉어버려요.』 『불편하게 한 거 없어요.』 나는 그녀의 고개를 나에게 돌리며 말했다. 『이제까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여기까지만 말하려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속에 숨긴다면 이 순간은 달아날 것이고, 내 감정도 솔직히 밝힐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난 며칠간이 내게는 얼마나 의미있는 날이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나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좋았던 일은 당신을 만난 거예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멈춘다면, 앞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랑해요.』 나는 속삭이며 말했다. 나는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려울 거라고 늘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평생을 살며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가진 적은 없었다. 내가 사바나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바라는 것 만큼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이나 기대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 뿐이었다. 바깥 공기는 선선해지기 시작했고, 땅에 고인 물이 달빛에 어른거렸다. 구름이 흩어지며 그 사이로 이따금씩 별 하나가 방금 인정한 속내를 상기라도 시켜주듯이 반짝였다. 『이럴 거라고 상상해 봤어요?』 그녀는 놀란 듯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이 말이에요.』 『아니요.』 『조금 두렵네요.』 가슴이 저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감정은 나와 다르다는 확신이 섰다. 『사랑한단 말 안 해도 돼요.』 나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제가 말한 건...』 『알아요.』 그녀가 끼어들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이 한 말 때문에 두려운 게 아니에요. 내가 두려운 건,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었거든요. 사랑해요. 존.』 지금 생각해 봐도 어쩌다가 이 모든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잠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그녀가 내 앞으로 몸을 기댔다. 순간, 키스를 하면 이 분위기가 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자, 나는 백 살까지 살며 전 세계를 다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꿈속의 여자와 처음으로 키스를 하는 이 순간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사랑은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Nine 우리는 그곳에서 늦게까지 있었다. 그 집에서 나온 후, 나는 사바나와 해변으로 돌아와 그녀가 하품을 할 때까지 긴 백사장을 걸었다. 그리고 숙소까지 다시 돌아왔고, 현관 불빛에 나방이 달려드는 가운데, 우리는 문 앞에서 다시 키스를 했다. 전날에도 사바나를 많이 생각하며 보내긴 했지만, 다음날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새로운 감정으로 사바나에 대한 생각은 배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아버지도 직장에서 돌아와 이런 내 모습을 보셨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물론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라자냐를 만들 거라고 해서 내가 그의 등을 두드렸을 때도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사바나가 얘기만 내내 하자, 두 시간 후, 아버지는 서재로 들어가셨다. 비록 아무 말씀은 없으셨지만, 아버지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니, 나보다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가진 것은 내가 그날 밤늦게 집에 왔을 때였다. 부엌 카운터 위에는 쪽지와 함께, 땅콩버터 쿠키가 신선하게 구워져 접시에 담겨 있었다. 쪽지에는, 우유는 냉장고에 얼마든지 많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사바나를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나갔다. 그리고 차를 몰고 윌밍턴의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점포들을 돌아다니며, 사바나가 골동품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전함을 보러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래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따분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일행들과 함께 모닥불가에 앉아 있었다. 그 다음 이틀 저녁으로, 사바나가 우리 집을 들렸다. 이틀간 아버지가 저녁을 만드셨다. 첫 날 저녁에, 사바나는 아버지에게 동전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는 조금 힘들었다. 아버지는 주로 우리가 말하면 듣기만 했다. 사바나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대화에 동참시키려고 했지만, 우리는 저절로 우리끼리만 얘기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 사이에 식사에만 열중하셨다. 집에서 나왔을 때 사바나의 얼굴은 다소 어두웠다. 아버지에 대한 첫인상이 바뀌지 않았기를 바랬지만, 그녀에게 변화가 생긴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다음날 저녁에 다시 찾아오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버지와 그녀는 동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서재에 있었다.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지만, 사바나가 도대체 무슨 속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예전의 나보다는 더 이해심을 가져주기만을 기도했다. 집에서 나올 쯤,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신, 차를 몰고 해변으로 가던 길에,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진지하게 들려주었고, 특히 나를 키워준 일에 대해 칭찬까지 해주었다. 달리 어떤 생각을 해야할지 몰랐지만,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봐주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말이 되어, 해변 숙소로 내가 찾아가는 일은 사람들에게 의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숙소에 있던 대부분의 일행들이 내 이름을 알 정도가 되었다. 물론, 하루 일과에 지쳐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대부분 술을 마시거나 해변에서 노는 대신, 7시나, 8시 정도에 TV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얼굴은 모두 햇살에 그을려 있었고, 손가락에 생긴 물집을 가리기 위해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토요일 밤이 되어, 사람들은 다시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었다. 내가 나타났을 때, 때마침 남자애들이 밴 뒤에 실어 놓은 맥주 상자들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위로 상자를 옮기는 것을 도우면서, 사바나를 처음 만났던 저녁 이후로 술을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주처럼, 그릴로 고기를 구우며 모닥불가에 앉아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해변으로 산책을 갔다. 나는 담요와 밤에 먹을 간식이 든 피크닉 바구니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누워서 떨어지는 별똥별 쇼를 보았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별빛에 놀라워했다. 날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게 바람이 부는 완벽한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대화하며, 키스하며, 그렇게 서로의 팔에 잠이 들어버렸다. 일요일 아침, 바다에서 해가 뜰 무렵, 나는 사바나 옆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새벽 햇살에 빛났고, 머릿결이 담요로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팔 하나는 가슴으로, 다른 팔은 머리 위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평생, 매일 아침 이렇게 그녀 옆에 누웠다가 깨어나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교회에 갔고, 팀은 우리가 일주일 내내 거의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기분이 좋은 모습이었다. 그는 공사를 도와주겠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다음주 금요일이면 떠나서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존을 아주 들들 볶는구만.』사바나가 팀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손바닥을 쳐들며 말했다. 『일단 말은 걸어봤으니까, 나중에 딴소리 하지마.』 아마도 내게는 가장 한가로운 한주였던 것 같다. 사바나를 향한 내 감정은 더욱 깊어 갔다. 그리고 날이 지나갈수록 이 모든 것도 곧 끝날 거라는 생각에 속이 타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억지로 생각을 떨쳐내야 했다. 그러나 일요일 밤이 되면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바나를 생각하며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였다. 바다 건너에 두고 온 그녀를 생각해 봤고, 남자들에게 둘러쌓인 그녀를 생각했으며, 그 남자들 가운데에 내가 그녀에게 품었던 감정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면, 내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월요일 저녁, 숙소를 찾아왔지만 사바나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그녀의 방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화장실마다 고개를 밀어 넣어 찾아보기도 했다. 데크 뒤를 가보아도 없었고, 해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변 아래로 내려가 물어보았지만 무관심한 반응만 돌아왔다. 두 사람은 그녀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애들 중에, 샌디인지, 신디인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해변 아래를 가리키며 한 시간 전에 그녀가 그쪽으로 가는 것을 봤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를 찾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나는 해변 양쪽을 걸어다니다가 숙소 근처의 부두 교각을 주목하였다. 직감이 들어, 나는 계단을 올랐다. 밑으로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바나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돌고래를 보러 나왔거나, 파도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러 부두 교각에 온 줄 알았었다. 그녀는 가로등에 기댄 채, 무릎을 괴고 앉아 있었다. 나는 가까이로 가고 나서야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솔직히, 누가 울든 그렇다. 아버지도 우신 적이 없다. 있어도, 내가 없을 때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울었을 때가 3학년 때였는데, 나무집에서 떨어져서 손목을 삐었을 때였다. 우리 부대에서도 우는 사람을 두 명 봤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등을 토닥이며, 나는 잘 모르겠으니 네가 어떻게 해보라는 식으로 경험 많은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사바나가 나를 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에서 눈물을 급히 훔쳤다. 그녀는 두어번 고른 숨을 몰아쉬었다. 물에서 건져주었던 그녀의 가방은 다리 사이에 끼어져 있었다. 『괜찮아요?』 『아니요.』 그녀의 대답에 가슴이 뛰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였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었다. 사바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있는 게 좋겠어요?』 다시 물었다. 『꼭 말해야 되나요?』 나는 잠시 주저하며 말했다. 『네.』 그녀는 침울하게 웃었다. 『같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내 옆에 와서 앉으면 좋겠어요.』 나는 자리에 앉아 잠시 머뭇거리면서 그녀를 팔로 안았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말 없이 앉아 있었다. 사바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호흡은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뺨을 타고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당신을 위해서 뭣 좀 샀어요.』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마음에 들면 좋겠어요.』 『내 마음에 꼭 들거예요.』나는 나즈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내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됐고, 어쩌다 첫날밤에 대화를 하게 됐는지, 그리고 문신을 드러내며 랜디를 험상궂은 눈초리로 쳐다보던 당신과, 우리가 서핑타러 처음 갔던 날, 내가 해변까지 파도를 타고 왔을 때 봤던 당신의 넋나간 표정...』 그녀가 말을 흐리자, 나는 그녀의 허리를 꼭 감싸쥐었다. 『어딘가에서 누가 찬사를 보냈을 거예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웃으려 했지만 웃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지난주 며칠간 있었던 일이 새록새록 다 떠올라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구요. 당신 아버지와 보냈던 일이나, 아이스크림 먹으로 갔던 것, 심지어 말없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까지요.』 『돌이킬 수 없어요.』 내가 잘라서 말하자,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내 말을 말렸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군요.』 그녀가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모든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았죠. 여기 와서 그런 걸 경험할 줄 몰랐어요. 그리고 여기 와서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 몰랐구요. 또, 다른 얘기지만, 당신 아버지도요.』 나는 감정을 조절하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밑으로 쓸어 넘겼다. 『당신 아버지는 아주 훌륭하신 분 같아요. 정말 훌륭하게 당신을 키우셨어요. 저도 당신이 이걸 원치...., 그러니까...』 그녀가 말문이 막히자, 나는 당혹스러워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울었던 거예요? 우리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 때문에?』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제 말 안 듣고 있던 거예요?』 그녀는 혼란스런 생각을 고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누구하고도 사랑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요. 전에도 상처를 받았어요. 그 후로 제 삶은 무너졌어요. 그때와는 다르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며칠 뒤에 떠나버리면 이 모든 게 다 끝날 거예요... 그리고 저는 다시 무너질 거구요.』 『끝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항변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가끔 편지 쓰고 전화로 통화할 수 있겠죠. 그리고 휴가 나오면 만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지금 같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의 바보같은 표정도 못 볼 거예요. 함께 해변에 누워서 별도 못 볼 거구요. 서로 마주보고 앉아 개인적인 얘기도 못 할거라구요. 그리고 지금처럼, 내 어깨에 두른 당신의 팔도 느낄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좌절감과 공포심이 솟구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가 말을 계속 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보다가요. 당신에게 책을 한 권 사줄까 해서 갔었어요. 책을 한 권 골랐을 때, 이 책을 주면 당신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두 시간 뒤면 만날 테고, 그때 가보면 알겠지 해서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기분이 언짢더라도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다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여기 앉아 있는 동안 든 생각이 바로 그거였어요. 우리가 함께하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거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계속 이었다. 『이제 곧, 그것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는 당신이 여기에 2주 밖에 안 있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기가 힘들 줄은 몰랐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나에게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아래로 파도가 말뚝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의 바다갈매기가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나는 키스를 하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그녀의 숨결에는 계피향과 박하향이 났다. 나는 다시 포근한 안식을 느꼈다. 그녀의 우울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바람으로, 나는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쥐며 가방을 가리켰다. 『그래, 어떤 책을 샀어요?』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이 말했던 책을 생각해냈다. 『아, 참... 지금 책을 줘야하죠?』 보아하니, 그녀가 히아슨의 최신작은 구입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가 책을 꺼내기를 기다리며 눈을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책 주면...』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반드시 읽는다고 약속해 줘요.』 어떤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지 잘 몰랐다. 『물론이죠.』 내가 말했다. 『약속할게요.』 그녀는 여전히 망설이더니, 가방을 집어서 책을 꺼냈다. 나는 책을 건네받고 제목을 읽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책은 자폐증과 아스페르거 증후군에 관한, 사실상 교과서나 다름없는 수준의 책이었다. 나는 두 증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다지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교수님 중에 한 분이 쓰신 책이에요.』 그녀가 설명했다. 『그녀는 제가 들어본 수업 중에서 최고에요. 강의실엔 늘 학생들이 꽉 차 있고, 수강등록을 하지 못한 학생들이 가끔씩 교수님과 얘기를 하려고 들리기도 하죠. 교수님은 행동발달장애 모든 분야에 걸쳐 최고의 전문가 중에 한 분이세요. 그리고 성인들을 주로 심층적으로 연구하시는 소수 전문가 중 한 분이에요.』 『대단하네요.』 나는 열의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럴 거예요.』 내가 말했다. 『정보가 많을 것 같네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당신 아버지 때문에 읽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두 분이 생활을 잘 하라고요.』 처음으로 나는 몸이 경직되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어요?』 『저는 전문가는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책은 내가 교수님에게 부탁해서 두 학기 동안 채택된 책이에요. 아까 말했듯이, 교수님은 행동발달장애가 있는 성인 삼백 명 이상을 면담하셨어요.』 나는 그녀를 두르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래서요?』 그녀도 흥분된 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점을 우려하며 내 얼굴을 탐색했다. 『제가 겨우 학생이란 거 알아요. 하지만 아스페르거 증후군이 있는 아동들을 연구하며 여러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요... 그 아이들을 아주 가까이서 보면서요. 그리고 우리 교수님이 면담했던 많은 성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어요.』 그녀는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내 팔을 잡으려고 다가섰다. 『당신 아버지도 그들 중 두 사람과 증세가 매우 비슷해요.』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하며 내가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 아버지는 아스페르거 증후군일지도 몰라요.』 『우리 아버지는 지능이 모자라지 않아요...』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스페르거 증후군은 행동발달장애에요.』 『그게 뭐든 상관없어요.』 내 목소리가 올라갔다. 『우리 아버지는 그딴 거 없어요. 날 키워 주셨고, 일도 하시고, 세금도 내시고, 결혼도 한번 하신 분이에요.』 『아스페르거 증후군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 증세를 보이구요...』 그녀의 말에, 좀 전에 그녀가 말했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만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침이 바짝 말랐다. 『아까,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훌륭하게 키우신 것 같다고 말했잖아요.』 『그랬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진심이구요...』 그녀가 처음부터 말하려던 뜻을 이해하자 턱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를 레인맨 같은 사람으로 봤기 때문이죠. 그래서 증상에 비해서는 잘 했다고 판단한 거구요.』 『아니에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아스페르거 증후군은 일정한 범위가 있어요.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되어서 증세가 악화되는...』 그녀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도 어쩌면 존경이겠죠. 하지만 당신이 좋아서 존경하는 그런 것은 아니죠.』 『아니에요. 잠시만요...』 나는 그녀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혼자 서 있고 싶은 마음에, 나는 반대편 난간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집에 계속 오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은 이유가 아니라,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슴이 죄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리집에 오자고 했던 거군요.』 『뭐라구요?...』 『아버지가 좋아서 온 게 아니라 당신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러 왔다구요.』 『아니에요...』 『거짓말 하지 마요!』 나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동전에 관심이 있는 척 하며 아버지와 앉아 있었던 거예요. 속으로는 우리 속에 갇힌 원숭이 정도로 아버지를 살펴보면서요.』 『그런 거 아니었다구요!』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당신 아버지를 존경해요...』 『당신은 아버지가 문제가 있었지만 그걸 극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나는 무섭게 그녀를 몰아치며 그녀의 대답을 정리했다. 『네...그거였군요.』 『아니요. 당신이 틀렸어요. 저는 당신 아버지를 좋아해요....』 『그러니 그건 좋은 실험대상이 된 거구요, 맞지 않나요?』 내 표정은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알겠어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당신은 그렇게 하나 보죠? 그걸 몰랐네요.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였죠?』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서 돌이켜 보는 듯 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제 행동이 후회돼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아버지를 이해해 주길 바랬을 뿐이에요.』 『왜요?』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내 몸은 바르르 떨렸다. 『저는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아버지 밑에서 자란 거 알죠? 저는 아버지와 살았어요.』 『저는 그냥 도와주려는 거였어요.』 그녀는 눈을 아래로 하고 말했다.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맺어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요. 그리고 도움도 필요 없구요. 당신이 남의 일에 끼어들 이유라도 있었나요?』 그녀는 뒤로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알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뭘 알아요?』 내가 다그쳤다. 『우리 아버지가 상태가 안 좋다고 당신이 생각했던 걸요? 그러니 아버지와는 정상적인 관계는 기대하지 말라는 거요? 아버지랑 대화를 하려면 동전 얘기를 하라는 거요?』 나는 목소리에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곁눈질로 보니, 어부 두 명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노려보자 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우리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사바나의 답변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솔직히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아버지와 보낸 시간들이 수작에 불과했다는 생각만 머리에 맴돌았다. 『어쩌면요.』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구요?』 『제 말 들었잖아요.』 그녀가 어깨를 살짝 들며 말했다. 『어쩌면 앞으로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화제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것 뿐이라구요.』 나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니까 당신 얘기는, 모든 게 나에게 달렸다는 소린가요?』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녀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죠.』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서 제가 책을 샀던 거예요. 당신이 읽어보라구요. 당신 말대로, 저보다는 당신이 아버지를 더 잘 아니까요. 그리고 저는 당신 아버지가 활동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은 절대 없어요. 분명 지금도 활동을 하시니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의 변함없는 행동을요. 사람과 말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든가, 사회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행동을 말이에요...』 나는 휙 돌아섰다. 뭔가를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다. 뭐든. 『내게 왜 이러는 거죠?』 나는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나라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으니까요.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아버지를 모욕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아버지를 이해하도록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 배어났지만, 내 마음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단지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에서... 그녀에게서... 『어디 가요?』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존! 기다려요!』 나는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교각 계단에 이르렀다. 나는 계단을 쿵쾅거리며 걸어 내려왔고, 모래를 터벅터벅 밟으며 숙소로 걸어갔다. 사바나가 뒤에 따라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일행들 가까이로 가자, 그들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잔뜩 화난 상태였다. 맥주를 들고 있던 랜디가 사바나가 뒤따라오는 모습을 보았는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옆에 있던 남학생회 일행 두 명도 거들었다. 『왜 그래요?』 랜디가 말을 걸었다. 『사바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그의 말을 무시하자, 그는 내 손목을 잡았다. 『이봐! 묻잖아.』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에게서 술냄새가 풍겼고, 술기운에 하는 행동이란 걸 알았다. 『놔.』 『사바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손 놓으라고.』 나는 다시 말했다. 『안 그럼, 손목을 부러트릴 거야.』 『이봐, 다들 왜 그래!』 뒤에서 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애 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랜디가 다그쳤다. 『왜 쟤가 울고 있냐고? 네가 울렸지?』 피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마지막 경고야!』 『왜들 이러는 거야!』 팀이 가까이 다가와 소리쳤다. 『다들 진정하고 떨어져!』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은 본능적으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팔꿈치로 명치를 가하자, 뒤에서 외마다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재빨리 랜디의 손을 잡아 꺾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내 앞으로 돌진해 왔다. 나는 무심코 팔꿈치를 휘둘렀고, 그 팔꿈치는 정타했다. 그의 연골이 부서진 것 같았다. 나는 또 달려드는 사람이 있을까봐 몸을 돌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사바나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싸우는 모습을 보고 뛰어 온 것이 틀림없었다. 모래에 엎어진 랜디는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했고, 뒤에서 몸을 잡았던 남자는 네 발로 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이 다쳤잖아요!』 그녀는 울먹이며 내 앞으로 가로질러 뛰어갔다. 『이 사람은 그냥 싸움을 말리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팀이 땅바닥에 엎어져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솟구쳤다. 그 모습에 모두 넋을 잃고 서있었다. 사바나만 무릎을 꿇고 팀 옆에 앉아 있었다. 팀이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뛰고 두려움도 생겼다. 왜 하필이면 팀이었을까? 그가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 다치게 할 마음도 없었고, 내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싸움을 시작한 건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일이 이렇게 벌어질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들이 용서하고 없었던 일로 해줄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나는 사바나가 속상해하는 소리를 들으며 뒷걸음치며 걸었다. 다른 일행들은 경계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피해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 길을 터주었다. 『어머나. 세상에... 어쩌면 좋아. 피가 많이 나... 병원에 가야겠어...』 나는 계속해서 뒷걸음치며 돌아서서 계단으로 올라섰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벗어나 내 차로 걸어갔다. 어느새,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차에서 내 자신과 오늘 저녁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Ten 막상 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차를 몰고 한동안 정처없이 달리며 저녁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회상했다. 지금도 내 자신에게 화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팀에게 내가 했던 행동과 부두 교각에서 사바나와 있었던 일 때문에도 화가 났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의 발단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한다고 느끼고 있을 쯤, 다른 한 순간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속였다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내가 화를 낼 필요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내 사이가 가깝지도 않으면서,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면서 왜 그토록 화를 냈을까? 왜 지금도 화가 풀리지 않는 걸까? 그녀의 말이 옳았을 수도 있으니까? 내 가슴에선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쓰지 않았다. 내 마음의 소리가 옳든, 틀리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그녀가 관여할 문제였는가? 차를 운전하면서 내 마음은 분노에서 수용으로, 다시 분노로 교차되었다. 팔꿈치로 팀의 코를 짓눌렀던 느낌은 점차 누그러졌지만, 오히려 속상한 마음만 가중될 뿐이었다. 왜 나를 말렸을까? 왜 그들을 말리지 않았을까? 내가 싸움을 시작한 장본인도 아닌데. 그리고 사바나도... 그래, 나는 내일 사과하러 그곳에 갈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의 말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걸 나도 안다. 그리고 그녀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이유를 알고 싶었다. 들어보면 모든 게 설명 될 것이다.... 하지만 팀을 그렇게 만들어 났는데? 그녀는 어떻게 나올까? 그는 가장 친한 친구사이이고, 설령 내가 사고였다고 맹세해봐야 그녀에게 통할까? 또 다른 일행들에게 했던 건 어떡하고? 그녀도 내가 군인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제 그 군인의 일부 기질을 봤는데도 여전히 같은 감정으로 나를 바라볼까? 집으로 차를 돌렸을 때는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깜깜한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서재를 살핀 후, 침실로 향했다. 물론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는 매일 밤, 늘 같은 시간에 잠을 청하셨다. 변함없는 행동을 하시는 아버지. 나도 알고, 사바나도 지적했던 변함없는 행동. 나는 침대로 기어갔지만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을 다시 처음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녀가 책을 건네주던 그 시점으로. 다른 생각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일도, 사바나도, 팀의 코를 부러트린 일도. 그러나 밤새도록 천장을 올려보며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일어났을 때 부엌에서 아버지의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잤지만, 아버지가 알아볼지는 알 수 없었다. 『일어나셨어요?』 중얼거리며 인사했다. 『존이구나.』 그가 말했다. 『아침 좀 먹을래?』 『네.』 내가 대답했다. 『커피 있어요?』 『주전자에 있다.』 나는 커피를 컵에 따라 부었다. 아버지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신문 헤드라인을 보았다. 아버지는 신문 일면을 먼저 보시고, 그 다음은 수도권 기사를 읽으신다. 스포츠나 생활면은 아예 보지도 않는다. 변함없는 행동을 하시는 아버지. 『밤에 잘 주무셨어요?』 『그렇지 뭐.』놀랍게도, 아버지는 나에게 잘 잤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스패튤라로 계란을 저으셨다. 베이컨이 벌써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셨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물어볼지 이미 알고 있었다. 『빵을 토스터에 몇 장 넣어주겠니?』 우리 아버지는 정확하게 7시 35분에 출근하신다. 아버지가 출근하신 후, 신문을 훑어보았지만 기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마땅히 뭘 해야할지 몰랐다. 서핑을 하러 가거나, 집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다시, 침대에 가서 좀 쉴까 하는 사이, 집 앞으로 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빗물받이 통을 청소하거나 지붕의 곰팡이를 싹 청소해준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놀랍게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나는 놀라서 기겁했다. 팀은 체중을 다른 발로 옮기며 서있었다. 『안녕. 존.』 그가 말했다. 『이른 시간인 거 알지만, 들어가도 될까요?』 그는 폭이 넓은 병원 반창고를 코에 붙인 채, 양쪽 눈가에는 피부가 새까맣게 부어올라 있었다. 『네... 들어오세요.』 한쪽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나는 그가 집을 찾아왔다는 것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팀이 내 옆을 지나 거실로 걸어갔다. 『집을 못 찾을 뻔했어요.』 그가 말했다. 『지난번에 차를 태워주러 왔을 때는 늦은 시간이어서 그다지 신경을 못 썼거든요. 동네를 두 바퀴 도니까 알겠더라구요.』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작은 봉투를 들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커피 드실래요?』 나는 불쑥 그렇게 말을 던지며 놀라움을 감추었다. 『주전자에 한 컵 정도는 남았을 거예요.』 『아니요. 괜찮아요. 밤새 잠을 안자서 카페인을 안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숙소에 돌아가면 누워 있을까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리고... 어젯밤 말이에요.』 나는 얘기를 꺼냈다. 『미안해요. 제가 그럴려고 했던 건...』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내 말을 막았다.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아요. 제가 판단을 잘못 했어요. 다른 사람을 말렸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나는 그를 살펴보며 말했다. 『아프죠?』 『괜찮아요.』 그가 말했다. 『밤에 응급실에 있을 때 좀 아프긴 했어요. 진료 받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구요. 사람을 하나 더 불러들이고서야 코를 손봐주었어요. 하지만 금방 나을 거래요. 그냥 살짝 부딪힌 정도에요. 외모가 조금 남자답게 변모하기 만을 바래야죠.』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웃는 것마저 미안했다. 『정말 미안해요.』 『사과를 받을게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해해요. 그런데 사과받으러 여기 온 건 아니에요.』 그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서 얘기해도 될까요? 아직도 조금 머리가 띵 하네요.』 나는 팔꿈치를 무릎에 괴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소파 모퉁이에 앉았다. 팀은 몸을 잠시 움츠리며 편안하게 소파에 앉았다. 그는 들고 온 봉투를 자리 옆에 두었다. 『사바나 얘기 좀 하려구요.』 그가 말했다. 『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싶구요.』 사바나의 이름을 들으니 모든 것이 되살아나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친한 사이라는 거 알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지난밤, 병원에서 오랜 시간 얘기를 했어요. 제가 여기에 온 건, 사바나가 한 행동으로 당신이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해서 온 거예요. 사바나도 자기가 실수한 걸 인정해요.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를 진단한 것도 주제넘은 행동이란 것도 알구요. 그 점에 관한 한, 당신 말이 맞아요.』 『그럼, 왜 본인이 직접 여길 오지 않았죠?』 『지금은 현장에 가 있어요. 제가 몸이 나을 때까지 대신 책임을 맡고 있거든요. 그리고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걸 사바나도 몰라요.』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거나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말을 안 듣고 싶었으니까 그랬겠죠.』 그는 차분한 목소리를 말했다. 『저도 남들이 제 동생 앨런 얘기를 하면 그랬어요. 동생이 자폐아거든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앨런이 동생이라구요?』 『네. 왜요?』 그가 물었다. 『사바나가 동생 얘길 하던가요?』 『조금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앨런에 대한 얘기보다는, 동생을 늘 인내하며 참아주었던 형이 있었고, 그 형을 보면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더 들려주었던 게 생각났다. 소파에 앉은 팀은 멍든 눈을 만지며 움찔거렸다. 『그럼 아시겠네요.』 그가 말했다. 『저는 당신을 이해해요. 사바나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죠. 내가 사바나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사바나가 가끔은 순진할 때가 있다고 제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죠. 걔도 남을 도우려는 뜻으로 다가서지만, 그게 뜻한 대로 안 될 경우도 있거든요.』 『사바나만 그런 것도 아니죠.』 내가 말했다. 『저도 과민반응을 했어요.』 그는 차분히 나를 바라보았다. 『사바나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잘 모르시는 군요. 그리고 그녀의 말이 옳다고 쳐도,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이거죠?』 그는 내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도 같은 걸 겪어봐서 알아요.』 그가 말했다. 『앨런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고생했던 게 생각나네요. 한동안 우리는 앨런이 왜 그런지 조차도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아세요? 상관없다는 거예요. 지금도 동생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니까요. 하지만... 동생의 증세를 알고 나서는 우리 사이가 보다 수월해졌어요. 동생을 알고 나니까... 동생에게 별 다른 기대를 안 하게 되더라구요. 또 기대도 하지 않으니까 동생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구요.』 나는 곰곰이 그가 말한 것을 생각했다. 『동생이 아스페르거 증후군이 아니라면요?』 내가 물었다. 『아닐지도 모르죠.』 『그런데 정말 아니라면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특히 증세가 더 약한 경우는요.』 그가 말했다. 『혈액을 뽑아서 검사를 하는 병과는 다른 거죠. 당신은 그렇게라도 하면 알아낼 수 있고,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전혀 알아낼 수 없어요. 사바나에게 들은 말대로라면, 저는 솔직히 당신 아버지는 거의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변화를 왜 기대해요? 아버지는 일을 하시고, 당신을 길러 주셨고... 이 정도면 아버지란 사람에게 더 기대할 게 뭐가 있어요?』 그의 얘기를 듣고 생각을 하는 동안 아버지의 모습이 머리에 스쳤다. 『사바나가 책을 샀더라구요.』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말했다.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숙소에서 가져왔어요.』 그는 봉투를 건넸다. 책은 전날에 봤던 것보다 더 묵직해 보였다. 『고마워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대화가 마무리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다. 그는 문으로 걸어가서 문고리를 잡은 채 뒤돌아섰다. 『그 책 꼭 읽을 필요는 없어요.』 『알아요.』 그는 문을 열다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사바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세요. 알았죠? 사바나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 알아요. 저는 그냥 사바나가 행복했으면 하는 거 뿐이에요.』 사바나를 향한 그의 감정은 내 짐작대로였다. 그가 차로 걸어가는 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며, 그도 사바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책을 옆으로 치우고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도 책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두 시간 후, 나는 억지로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남은 오후 내내 그 책을 읽으며 아버지와의 기억을 회상했다. 팀의 말이 맞았다. 확실하게 병명을 진단하는 내용은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확실한 선을 긋고 증상을 규명하는 내용은 없었다. 아스페르거 증후군 중에서는 아이큐가 낮은 사람이 있는가 반면, 더스틴 호프만의 극중 배역인 레인맨처럼 자폐증이 매우 심한 사람은 특정 주제에 천재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활동을 아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채지만, 다른 사람들은 수용시설에서 지내야 했다. 나는 아스페르거 증후군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음악이나 수학에 천재성을 보이는 분석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그 확률은 일반인에게서 천재가 나오는 것만큼 드문 경우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성향이나 증상을 아는 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며, 뭔가 잘못 되었어도 그의 부모님은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아스페르거 증후군 아동이나 자폐아동들을 지능이 조금 떨어지거나 수줍음을 타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수용시설에 아이를 보내지 않은 부모님들은 언젠가 아이가 괜찮아지겠지 하며 마음 편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아스페르거 증후군과 자폐증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었다. “자폐증 환자는 그들만의 세상에 살지만, 아스페르거 증후군 환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일반인과 함께 산다.” 이 기준대로 보면, 일반인 대부분이 아스페르거 증후군을 가진 셈이 된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 사바나가 지적했던 내용도 있었다. 아버지의 변함없는 행동, 사회적 부적응, 동전 말고는 대화 화제에 관심이 없는 것, 혼자 있으려는 것, 이 모든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여서 억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놓고 보면 얘기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같은 삶의 선택들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도 있겠지만, 아스페르거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 아버지는 이미 미리 선택된 삶을 강요받은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의 행동을 아주 최소한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아버지는 변화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변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책에서 말하는 모든 암시가 확신을 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현실만 봤을 때는 위안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와 관련하여 늘 나를 힘들게 했던 두 가지 질문도 설명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어떤 점을 보셨을까? 그리고 왜 아버지를 떠나셨을까? 절대 알 수도 없고, 깊이 더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조용한 우리집을 전제로 상상해 보았다. 저녁 자리에서 불쌍하고, 어린 여종업원을 앞에 두고 동전 수집품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말없는 남자와, 잠들 때마다 침대에 누워 더 나은 삶을 꿈 꿨을 한 여자가 보였다. 그녀가 꼬리를 쳤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매력에 반한 그는 계속해서 저녁에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남자의 상냥함을 보았고, 나를 기를 때 보여주었던 인내심을 보았을 것이다. 남자가 조용한 성품이란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노하지만 결코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사랑하진 않았지만, 결혼할 정도는 되는 남자였을 것이다. 아마 동전을 팔아서 살면 행복하지는 않아도 편안하게는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했고, 남자가 동전을 팔 생각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면서, 그녀는 깨닫게 된다. 남편은 여자가 하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런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그녀는 외로움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단지 이기적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집을 나가고 싶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그녀는 그 첫 기회를 맞게 된다. 내 생각이 틀릴지도...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될지는 모르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의 뇌에 배선 배치가 잘못 되었다면, 그는 삶을 위한 어떤 규칙을,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지지 않는데 도움이 될 규칙들을 만들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규칙들이 아주 정상적인 것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가 있도록 도움이 되었던 방법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규칙은 나에게 아주 충분했다. 그는 내 아버지고 최선을 다한 분이셨다. 이제서야 그걸 알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책을 덮고 옆으로 밀쳐 두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이 메여 왔다. 아버지는 퇴근하고 집으로 오신 후, 옷을 갈아입고 스파게티를 만들러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바나가 아버지에게 보였던 행동 때문에 화가 났으면서도 나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지식이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걸 보면 참 신기할 노릇이다. 아버지의 행동은 꼼꼼했다. 그는 스파게티 봉지를 깔끔하게 따서 내용물을 옆에 꺼내 놓았다. 그리고 스패튤라를 정확한 각도로 잡고 고기를 볶았다. 이번에는 소금과 후추를 넣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내 말대로였다. 그리고 바로 토마토소스 캔을 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소대로 나의 일과를 묻지 않고 말없이 요리만 하셨다. 어제 같았으면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을 테지만, 오늘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늘 이럴 것이니까. 나는 난생 처음,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며 아버지의 일과를 묻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사바나와 함께 보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후, 나는 설거지를 거들며 일방적인 대화를 유지해 갔다. 설거지를 다 마치고 아버지는 다시 행주를 집었다. 그는 카운터를 두 번 닦고 나서, 소금과 후추통을 어제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있던 자리에 정확하게 다시 두었다. 아버지는 대화를 더 원하는 눈치였지만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가라앉혔던 것 같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는 곧 서재로 갈 것이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최근에 구입하신 동전들을 구경할 수 있어요? 어떤 것들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아버지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숱이 없는 머리를 만지셨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흰 부분이 머리에 더 크게 드러났다. 다시 고개를 든 아버지의 표정은 거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러자.』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함께 서재로 걸어갔다. 아버지가 내 등에 가볍게 손을 얹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손길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가움이었다. Eleven 다음 날 저녁, 나는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바다를 내다보며 부두 교각에 서 있었다. 사바나가 나올지 궁금했다. 어젯밤, 몇 시간 동안 아버지의 들뜬 목소리로 동전 얘기를 들은 후, 나는 차를 몰고 해변으로 갔다. 내 옆 좌석에는 여기서 만나자는 내용으로 사바나에게 쓴 쪽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쪽지를 편지봉투에 넣어 팀의 차에 두고 왔다. 나는 팀이 편지봉투를 개봉하지 않은 채 전달해 줄 거라 믿었다.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그를 안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팀은 우리 아버지처럼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소동을 부렸으니 그 숙소에서 나를 반길 리 없었다. 랜디나 수잔, 다른 일행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사바나와 연락할 방법이 없어진 셈이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도 없고, 숙소 전화번호도 몰랐기 때문에, 쪽지를 남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분명히 내가 잘못했고, 민감하게 행동한 것을 인정한다. 사바나뿐만 아니라 숙소 일행들에게도. 그냥 거기서 나왔으면 될 일이었다. 운동깨나 했다고 자부하는 랜디나 그의 친구들도, 사람을 한순간에 불구로 만들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과는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만약 독일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나는 영창에 갔을 것이다. 정부는 국가에서 승인한 공식 기술을 정부가 승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남용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쪽지를 남겨두고, 나는 다음날 시계만 보며 그녀가 나올지 궁금해 했다. 만나고자 한 시간이 흘러가자, 자꾸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멀리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걸음걸이를 보니 사바나가 분명했다. 나는 난간에 기대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나를 보자 걸음을 늦추더니, 이내 거기에 멈추어 섰다. 포옹도, 키스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색해진 우리 사이를 보며 가슴이 아렸다. 『쪽지 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와 줘서 기뻐요.』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몰래 빠져나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다시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미안해요.』 나는 다짜고짜 그렇게 불쑥 말했다. 『그냥 도움을 주려고 했던 거 알아요. 제가 잘못 받아들였어요.』 『그리고요?』 『그리고 팀에게 한 것도 미안하구요. 팀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좀 더 조심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눈꺼풀 하나 깜박거리지 않았다. 『그리고요?』 나는 발을 질질 끌었다. 이 말까지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그녀가 원하는 말은 알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리고 랜디와 다른 친구도 미안하구요.』 그녀는 여전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또요?』 난감했다. 나는 할 말을 고르며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또...』 나는 말을 흐렸다. 『또 뭐요?』 『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글쎄요.』 내가 말했다. 『뭐가 되었든, 그것도 미안해요.』 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생각하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웃음기가 살짝 번졌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섰다. 『그게 다에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웠다. 놀랍게도, 그녀는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목을 두 팔로 안았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미안해 할 이유가 없어요. 저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그럼 왜 물어봤어요?』 『왜 물어보았냐면...』 그녀가 말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당신은 착한 사람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말한 대로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날 밤 늦게, 팀이 저한테 말하더라구요. 제가 그런 말을 할 권한이 없다구요. 당신이 옳았어요. 저는 전문가의 식견을 가지고 있지도 않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제가 경솔했죠. 해변에서 있었던 일만 두고 보면, 저는 모든 걸 다 보았어요.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었죠. 팀에게 한 것도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어쨌든 사과를 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어요. 앞으로도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죠.』 그녀가 나에게 기댔다. 나는 눈을 감고 이대로 그녀를 안은 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해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키스를 하며 좋은 밤을 보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 선을 만지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뭐가 고마워요?』 『책 말이에요. 이제는 아버지를 조금 이해할 것 같아요. 어젯밤에 아버지와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줘서 고맙구요.』 그녀가 이마에 주름을 잡고 인상을 쓰자, 나는 그 이마에 입을 대고 키스를 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다시 말을 했다.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못 했을 거예요. 그런 제 마음을 당신은 모를 거예요.』 다음날, 그녀는 원래 현장으로 일하러 가야 했다. 그러나 내가 독일로 귀대하기 전에 서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그녀가 팀에게 말하자, 그는 이해해주었다. 내가 그녀를 차에 태우자, 팀은 숙소 계단을 내려와 차창 옆으로 쭈그리고 서서 시선을 맞추었다. 멍이 시커멓게 들어있었다. 그는 창문으로 손을 내밀었다. 『존, 만나서 기뻤어요.』 『저도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몸조심하구요. 알았죠?』 『그럴게요.』 악수를 하자, 서로의 감정이 교차했다. 사바나와 나는 포트피셔 수족관에서 오전을 보냈다. 우리는 이상하게 생긴 물고기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우리는 코가 긴 동갈치와 작은 해마들을 구경했다. 큰 탱크에는 수염상어와 대형민어들이 있었다. 우리는 소라게를 만지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사바나는 기념품 가게에서 열쇠고리를 사주었다. 열쇠고리는 생뚱맞게 펭귄이 새겨져 있었는데, 사바나는 그게 그렇게 재밌는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 후, 나는 바닷가 부근의 양지바른 식당으로 사바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은 채, 서로의 손을 잡고 정박된 배들이 살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열중한 나머지, 웨이터가 세 번이나 다녀간 것도 모르고 그때까지 메뉴판을 열어보지도 않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의 표정과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키스를 해 올 때, 나는 그녀의 달콤한 숨결을 맛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중에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서약하는 건가요?』 『당신이 원하면요.』 『그럼, 제대하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약속하세요. 안 그럼, 결혼 안 할 거예요.』 『약속하죠.』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오스월드 농원을 거닐었다. 전쟁 전의 모습으로 복원된 이 농원은 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남부의 나른한 햇살을 받고 꽃을 피운, 수천 가지 색상의 야생화로 길을 낸 자갈길을 걸었다. 『내일 몇 시 비행기에요?』 그녀가 물었다. 해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일찍 가요.』 내가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공항에 있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밤엔 아버지와 같이 있겠네요?』 『그럴 계획이에요. 생각보다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말하면 이해해...』 그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말을 막았다. 『안돼요. 계획을 바꾸지 마세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구요. 저도 그게 좋아요. 그래서 오늘 제가 나왔잖아요.』 우리는 정성껏 조경한 나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 『우리들 말이에요.』 『쉽진 않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아요.』 나는 말을 멈추었다.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아,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몸을 당겼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촉감을 음미하며 목과 귀에 키스를 했다. 『전화 많이 할게요. 전화 못 하면 편지 쓸게요. 그리고 내년에 또 휴가 받아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쪽으로 갈게요.』 그녀는 몸을 뒤로 누이며 내 얼굴을 쳐다보려고 했다. 『그럴 거예요?』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물론이죠. 진심이에요. 이렇게 당신을 남겨두고 가는 게 편하지 않아요. 가까운 곳에 배치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지금 당장 약속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에요. 복귀하면 전출신고를 하려구요. 그리고 꼭 그렇게 할 거예요.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알아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녀의 굳어진 표정을 보니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편지 쓸거죠?』 『참나...』 그녀의 장난기를 보자 긴장감도 사라졌다. 『당연히 쓰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뭘 그런 걸 물어봐요? 늘 편지 할게요. 그리고 저, 편지 정말 잘 써요.』 『믿어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집은 쉬는 날만 되면 꼭 편지를 써요.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요. 편지에다가 꼭 이렇게 말해요. 당신을 사랑하며, 다시 만나길 정말 눈빠지게 기다린다고요.』 나는 그녀의 목에 다시 키스했다. 『그러면 당신에게 나는 어떤 존재죠? 그리고 얼마만큼 나를 눈빠지게 기다릴 거예요?』 그녀는 뒤로 몸을 기댔다. 『그럼, 편지 읽어보세요.』 나는 웃고 있어도 마음이 아팠다. 『보고 싶을 거예요.』 『저도 보고 싶을 거예요.』 『당신은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저는 벌써 울었으니까요. 기억하죠? 게다가,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그렇게 정리했어요. 네...물론 힘들겠죠. 하지만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가요.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전 알아요. 느낄 수 있다구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 고비를 이겨낼 거라고 저는 마음으로 믿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잖아요. 사실 많은 연인들이 그렇지 않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걸 못 갖고 있잖아요.』 나는 그녀를 믿고 싶었다. 꼭 믿고 싶었지만, 일이 정말 그렇게 간단할지 궁금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쯤, 우리는 차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해변 숙소로 그녀를 태워주었다. 나는 숙소 일행들이 못 보도록 차를 숙소에서 조금 내려온 거리에 세웠다. 차에서 내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키스를 하며 그녀를 바짝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 될 것이다. 갑자기 귀대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가야할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이 메였다. 『편지 쓸게요.』 나는 약속했다.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핸드백을 집었다. 그리고 펜과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녀는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집 주소와 전화번호에요. 알았죠? 그리고 여기에 이메일 주소도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엔 기숙사를 옮길 거예요. 이사 하는 대로 새 주소를 알려줄게요. 그렇지만 언제든지 우리 부모님 집으로 연락하면 될 거예요. 부모님이 저한테 다시 보내줄 테니까요.』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내꺼도 가지고 있죠? 내가 다른데로 작전을 나가더라도 편지는 받을 수 있어요. 이메일도요. 군대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더라도 컴퓨터 하나 만큼은 아주 성능이 좋거든요.』 그녀는 소외받은 어린애마냥 팔로 안았다. 『두려워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군인이라는 게요.』 『난 괜찮을 거예요.』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나는 차문을 열고 지갑을 집었다. 그녀가 적어준 주소를 지갑에 넣고 다시 두 팔을 벌렸다. 그녀가 다가와 나에게 안겼다. 나는 내 몸에 안긴 그녀의 느낌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내 가슴을 뿌리치며 다시 핸드백을 집어들고 편지봉투를 꺼냈다. 『어젯밤에 쓴 거예요. 비행기에서 읽어보라구요. 그때까진 읽지 마세요. 알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다시 키스를 했다. 그리고 차에 타서 핸들을 잡았다. 차의 시동을 걸고 막 출발을 하자, 그녀가 소리쳤다.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2주 정도 뒤에 들리겠다고 말해주세요. 알았죠?』 차가 움직이자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백미러로 그녀가 아직도 보였다. 나는 차를 세울까 고민했다. 아버지도 이해하실 것이다. 사바나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아버지도 알 것이고, 그녀와 마지막으로 저녁을 보내는 것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를 멈추지 않고 거울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그녀를, 내 꿈에서 멀어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버지와 함께한 저녁자리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나는 대화를 붙여볼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 점을 알고 계셨다. 아버지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나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이따금씩 나를 쳐다보며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가스불을 끄고 나에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가까이 서서 내 등에 손을 얹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도 아픈 내 가슴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내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흡수하려는 듯이 그렇게 우두커니 서계셨다. 아침이 되어, 아버지는 나를 공항까지 태워주셨다. 내가 탈 비행기의 탑승 방송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나와 출구 옆에 서있었다. 아버지는 손을 내밀었지만, 대신 나는 아버지를 포옹했다. 아버지는 꼿꼿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랑해요. 아버지.』 『나도 사랑한다. 존.』 『동전 좋은 거 찾으시구요. 알았죠?』 나는 뒤로 물러서며 한 마디 더 보탰다. 『동전 얘기 다 들려주셔야 해요.』 아버지는 바닥을 내려보았다. 『나는 사바나가 좋아.』 그가 말했다. 『좋은 애야.』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내가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탑승 후, 나는 사바나가 준 편지를 무릎 위에 쥐고 있었다. 바로 열어보고 싶었지만 활주로에서 이륙할 때까지 기다렸다. 창가로 해안선이 보였다. 나는 우선 부두 교각을 찾았고, 다음으로 숙소를 찾았다. 그녀가 아직도 자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그녀도 해변으로 나와 비행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나는 편지봉투를 손으로 따서 열었다. 봉투에는 그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문득, 내 사진도 주고 왔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사진 속 얼굴을 한참 쳐다본 후, 옆으로 밀어 놓고 심호흡을 하며 글을 읽어내려갔다. 사랑하는 존에게로. 너무나 할 말이 많아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우선 사랑한다는 말부터 할까요? 아니면 당신과 보냈던 나날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말하면서요? 아니면 그 짧은 시기에 당신을 만나면서부터 우리의 운명적인 만남을 믿게 되었다구요? 얼마든지 할 말은 많고, 모두 진심이에요.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지금 드는 생각은 당신과 지금 당장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밖에 없어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의 표현할 수 없는 미소를 보면서요. 앞으로는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수천 번이나 되새기겠죠. 당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고, 나를 안아주던 당신을 느끼면서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 모든 걸 그리워할 거예요. 존, 당신은 예의를 갖춘 보기 드문 남자에요. 나는 당신의 그 점이 정말 좋았어요. 우리가 함께 있는 내내, 당신은 한 번도 나와 잠자리를 원하지도 않았어요. 나에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은 정말 모를 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훨씬 더 특별하게 해주었고, 그대로의 모습으로만 늘 당신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라보기엔 숨막히게 눈부신 새하얀 빛처럼요. 매일 당신을 생각할 거예요. 내심, 당신 마음이 변해서 우리가 함께한 기억을 잊을 날이 올까봐 두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해두고 싶어요. 당신이 어디에 가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보름달이 처음 뜨는 밤이 오면(우리가 처음 만난 날처럼요.), 당신이 밤하늘에서 보름달을 찾길 바래요. 그래서 내 생각을 하고 우리가 함께 한 날들을 생각해 주세요. 내가 어디에 있고, 무슨 일이 생기든, 저도 똑같이 그러고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함께 있진 못해도 이것만은 함께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만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거구요. 사랑해요, 존. 당신이 전에 했던 서약을 마음속에 간직할 거예요. 당신이 돌아오면 결혼할게요. 만일 약속을 어긴다면 저는 상처받을 거예요.
당신의 사랑, 사바나가. 눈물 맺힌 창가 너머로 구름층이 밑으로 깔려있었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돌려 집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할 소중한 그곳으로. Twelve 몇 시간 뒤, 독일에서 외로운 첫날밤을 다시 맞으며, 나는 다시 편지를 읽으며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떠올렸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때의 기억이 이미 나를 사로잡았고, 가끔은 군생활보다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손을 마주 잡았던 사바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고,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 서핑을 하던 날, 해안가로 파도를 타고 왔을 때 놀라던 내 표정을 떠올리니 크게 웃음이 났다. 사바나와 보낸 시간은 나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 부대원들도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 그 후 2주간, 동료 토니는 여자 친구의 중요성을 자신이 입증한 셈이라며 새치름을 떨며 계속해서 나를 놀려댔다. 그에게 사바나 얘기를 꺼낸 게 잘못이었다. 그러나 토니는 나에게 들은 얘기보다 더 많은 것을 궁금해 했다. 내가 책을 읽을 때도 그는 건너편에 앉아 바보처럼 희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휴가갔을 때 그 불타던 로맨스 얘기 좀 더 해봐.』 그가 말했다. 나는 애써 그를 무시하며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바나라고 했지? 사~바~나~. 젠장, 이름은 마음에 드네. 가녀려 보여도... 잠자리 하나만은 죽여주지 않든?』 『너, 입닥쳐.』 『나한테 이러지 마. 지금까지 널 챙긴 사람이 누구야? 같이 여자 만나러 나가자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결국 내 말 들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자세한 얘기 좀 해봐.』 『신경 꺼.』 『너 테킬라 먹은 거 맞지? 내가 그거 효과 있다고 맨날 말했잖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토니가 두 손을 쳐올리며 말했다. 『이봐...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는 거 아냐?』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사이라서? 그래. 그 얘긴 했잖아. 그런데 나는 네가 몽땅 이야기를 꾸며댔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다 뻥이야. 이제 됐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상사병이 제대로 걸렸구만.』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그는 걸어나갔다. 그러나 토니의 말이 맞았다. 나는 사바나에게 완전히 눈이 멀었다. 사바나와 함께라면 뭐든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으로 전출신고를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 부대장은 심각하게 고려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사바나가 아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잠시 듣고 있더니 의자 뒤로 몸을 눕히며 말했다. 『아버지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어려울 걸세.』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오며, 적어도 앞으로 16개월 동안은 여기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묶여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던 날 밤, 나는 내무반에서 걸어나와 축구장으로 활용하는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나는 풀밭에 누워 달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주 먼 외지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니 몹시 짜증이 났다. 내가 귀대하고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바로 서로에게 전화와 편지를 꾸준히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메일도 주고받았지만, 사바나가 편지를 선호하고, 그녀도 편지로 받고 싶다는 걸 곧 알게되었다. 『이메일처럼 바로 열어볼 수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는 그 점이 좋아요.』 그녀가 편지에 쓴 내용이다. 『나는 우체통에서 우연히 편지를 보는 것도 좋아하고, 편지를 열어볼 때 그 초조한 기대감도 좋아해요. 느긋하게 아무 때나 읽어볼 수 있다는 것도 좋구요. 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당신이 쓴 글을 읽을 때 바람이 얼굴에 살짝 스치는 느낌도 좋아하구요.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좋아요. 무엇을 입었고, 주변에는 뭐가 있고, 펜을 잡고 있는 모습 같은 거요. 이런 게 진부하고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지만, 당신이 천막에서 램프가 켜진 작전 테이블에 앉아 있고, 밖에는 바람이 부는 모습이 자꾸 생각나요. 음악을 다운로드 받거나, 논문을 찾을 때도 똑같이 쓰이는 기계로 글을 읽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낭만적이잖아요.』 나는 거기서 웃음이 났다. 천막이나, 작전 테이블, 램프 부분은 그녀가 잘못 생각한 것이 맞다. 그러나 실제로는 목재로 된 우리 내무반에서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관급품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그림이 연출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날이 거듭 지날수록, 사바나를 향한 내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어떤 때는 동료들 사이에서 몰래 빠져나와 혼자 있곤 했다. 나는 사바나의 사진을 꺼내들고, 사진 앞에 얼굴을 가까이 댄 채, 그녀의 생김새를 낱낱이 쳐다보았다. 그녀를 몹시 사랑하며 추억을 생생히 기억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여름이 가을이 되고, 다시 겨울이 될수록, 나는 그녀가 보내준 사진에 더욱더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랬다. 나는 그녀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솔직했을 때, 자세한 그녀의 얼굴은 잊혀지고 있었다. 어쩌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사진에서 본 사바나는, 나도 미처 몰랐던 작은 점이 왼쪽 눈 밑에 있었다. 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미소는 살짝 뒤틀린 표정이었다. 오히려 이런 불완전한 얼굴이 내 눈에는 완전함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사진으로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 싫었다. 나는 그럭저럭 군생활을 충실히 보내고 있었다. 사바나를 생각하고, 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할 일도 그만큼 많았다. 9월 초가 되어, 군에서도 설명을 아끼는 일련의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 분대는 두 번째로 코소보에 파견되어 다른 평화유지활동을 하고 있던 제1기갑사단과 합류했다. 한편, 상당한 수의 보병이 독일로 다시 파병되고 있었다. 비교적 상황이 잠잠해서 내가 총을 쏘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꽃을 꺾으러 다니거나 사바나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총을 손질하고, 미치광이들이 날뛸까봐 경계해야 했고, 몇 시간동안 경계근무라도 설 때면, 땅거미가 질무렵 피곤이 엄습해 왔다. 솔직히 말해서, 사바나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하거나, 심지어 그냥 생각만 하는 것도 하지 않은 채, 이, 삼일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러면 내 사랑을 의심해야 할까? 파견활동 동안 나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십번도 해보았다. 그러나 늘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자리에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녀를 남겨두고 오던 날 느꼈던 그 아픔이 나를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았다. 동료가 자신의 아내 얘길 해도 좋고, 손을 잡고 있는 연인을 보는 것도 좋고, 심지어 우리가 지나갈 때 마을 주민들이 웃어주는 모습도 좋았다. 사바나의 편지는 10일 정도마다 도착했다. 독일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편지가 쌓여있었다. 편지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대개 일상적이고 평범한 내용들로 적혀 있었지만, 그녀는 맺음말이 나올 때까지 말하고 싶은 감정을 아껴두었다. 편지를 읽는 가운데 나는 그녀의 자세한 일상을 접하게 되었다. 예정보다 늦게 첫 번째 집이 완공되어서, 두 번째 집을 지을 때 더 고생했다고 했다. 그 일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일에 효율성은 더 붙긴 했지만, 더 시간을 늘려서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또 알게 된 사실은, 첫 번째 집이 완공되고, 그들은 온 마을사람들과 큰 파티를 열어서 오후가 되도록 자축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일행들은 ‘통나무집 새우’에 가서 자축을 했고, 팀은 자기가 다녀본 곳 중에서 그곳이 가장 분위기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가을 학기에 자신이 듣고 싶었던 교수님들의 수업을 거의 다 듣게 되었고,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심리학 잡지에 자신의 주요 논문을 게재한 반즈 교수님의 「청소년 심리학」을 듣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고 한다. 나는 사바나가 못을 박거나 창문 다는 일을 도울 때도 내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는, 팀과 한참 얘기 중에라도, 말하는 상대가 나였으면 하고 그녀가 바라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건 그 보다 더 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사바나를 향한 내 사랑은 훨씬 더 깊어만 갔다. 물론, 아직도 사바나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한 한, 사바나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쩌면 사바나의 편지를 모두 모아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편지 말미에는 꼭 몇 문장, 아니 한 단락에 가까운 내용으로, 잠시 생각을 하게 하거나 추억을 떠올리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을 읽고 또 읽었으며, 읽을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를 상상하기도 했다. 내가 두 번째로 받았던 편지를 예로 들면 이러하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남들은 그저 바닷가에서 날밤새며 한 번 놀았다가 얻어진 결과라고 치부할 테죠.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예요. 그래서 내가 남들에게 우리 얘길 안 하는 거예요. 그들은 우리를 이해 못 할 거예요. 설명할 필요도 없구요. 내 마음으로만 그 진정성을 알고 있으면 되니까요. 당신을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요. 어쩌면 당신이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랑해요. 단지 지금뿐만 아니라 항상요. 다시 저를 꼭 안아주는 날을 꿈꿀게요. 그리고 내 사진을 보낸 후 받은 편지에는 이렇게 보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 보내줘서 고마워요. 벌써 지갑에 사진을 끼워넣었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네요. 하지만 그 사진 보고 울었어요. 슬퍼서 운 건 아니에요. 사실, 슬펐어요. 당신을 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운 이유는 기뻐서 울었어요. 사진을 보면서,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란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코소보에 파견되었던 기간에 온 편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한테 가장 나중에 온 편지를 읽고 걱정했어요. 그곳 소식을 듣고 싶어요. 아니, 꼭 들어야 해요. 당신이 그곳 생활이 어떤지 전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났어요. 다시 내 얘기를 하자면, 추수감사절 때문에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시험도 걱정되구요. 그리고 당신도 위험한 곳에 있잖아요.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구요. 그 사람들도 당신을 제가 아는 사람처럼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당신도 안전할 테니까요. 당신에게 안길 때 안전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요. 그해 크리스마스는 침울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면 늘 그렇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껏 공휴일은 모두 독일에서 보냈다. 우리 내무반 동료 두 명이 나무 하나를 어디서 구해오더니 푸른 방수천을 덧씌웠고, 깜빡거리는 전구를 달아서 장식을 해놓았다. 절반이 넘는 동료들이 집으로 갔다. 나는 우리의 우방, 러시아군이 불구대천의 원수로 돌변할 경우에 대비해, 군에서 대기해야 하는 불행한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동료들은 대부분 마을로 들어가 질 좋은 독일 맥주를 진탕 마시며 크리스마스이브를 자축했다. 나는 사바나가 보내준 소포를 이미 열어보았다. 팀이 입었던 옷과 같지 않나 싶은 스웨터 한 장과, 집에서 직접 구운 쿠키가 들어있었다. 그녀도 내가 보낸 향수를 이미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 스스로에게 선물이 될 겸, 사바나에게 전화를 걸며 전화비를 펑펑 쏟아부었다. 그녀도 내 전화를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 후로, 나는 그녀의 설레이던 목소리를 몇 주간이나 계속 되새겼다. 우리는 결국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음성이 듣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경쾌한 말투와 말이 빨라지면서 점점 두드러지는 비음 섞인 발음도 잊고 있었다. 나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어 그녀와 함께 있는 상상을 했고, 눈이 내린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여기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2001년 1월까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지워나갔다. 여름휴가는 6월에 있었고, 제대까지는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말 그대로 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제대까지 360일 남았다. 359일, 358일... 그리고 사바나를 만나는 날까지는 178일 남았군. 177일, 176일...」 노스캐롤라이나로 다시 돌아가는 날이 정말 실감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시간은 자꾸 느리게 흘러갔다. 뭔가를 절실히 원하면 늘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니, 내가 어릴 때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날이 점점 줄어들던 때가 생각났다. 사바나의 편지가 없었다면 아마 기다림은 훨씬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사바나만큼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정한 한 달간의 간격으로 꾸준히 편지를 보내주셨다. 놀랍게도 내가 평소에 받았던 편지들 보다는 두, 세배는 더 내용이 길었다. 그 추가된 편지지에는 동전에 관한 내용이 다였다. 나도 시간이 생기면 부대 컴퓨터실에 들려서 직접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특정 동전들을 찾아 그 기원을 수집했고, 편지로 그 내용을 아버지에게 보내기도 했다. 장담하건데, 이렇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고, 다시 아버지에게 답장이 왔을 때, 나는 아버지의 편지에서 눈물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상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런 자료를 보내주어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레이시트(Greysheet)」를 읽을 때와 같은 그 열정으로 내 자료를 유심히 살펴보았다고 믿고 싶었다. 2월에는, 다른 나토군(우리도 1944년 실전 참가 경험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는)과 함께 기동훈련을 받으러 수송선을 타고, 가칭 독일의 한 지방을 관통하는 탱크들의 맹공습을 받는 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스페인의 갤리온선들이 사거리가 짧은 대포를 퍼붓고, 미국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지원을 했던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말이다. 요즘은 적군도 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구나 한입으로 러시아군이라고 말하겠지만 명쾌하지는 않다. 지금은 그들이 우리의 우방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다 하더라도, 제대로 굴러가는 탱크도 많지 않고, 설령 그들이 유럽을 초토할 목적으로 시베리아 공장에서 수천대의 탱크를 비밀리에 만들고 있다 치더라도, 그 어떤 성능 좋은 탱크들도 보병이 아닌, 비행기 공습이나 우리의 기계화 사단들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뭘 알겠는가? 기동훈련이 시작되면서 날씨 또한 가혹했다. 북극 한랭전선이 혹한의 추위를 몰고 왔다. 눈과, 진눈깨비, 우박, 그리고 시간당 최고 80킬로미터의 바람이 부는 가혹한 날씨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어찌나 추운 날씨였는지 내 눈썹에도 서리가 서렸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총신이라도 만지면 손가락이 달라붙었다. 아주 지독하게 달라붙었기 때문에 손가락을 때는 과정에서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얼굴을 파묻고 손은 개머리판에 고정시키며 행군을 했다. 우리가 걷는 흙길은 쉴새없이 내린 눈보라로 인해 빙판길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가상의 적군과 싸우는 동안, 나는 얼음동상이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우리는 10일간 그렇게 생고생을 했다. 내 부하 절반이 동상에 걸렸고, 나머지도 저체온증이 나타났다. 기동훈련이 끝나갈 쯤, 우리 부대원은 서너 명 밖에 남지 않았다. 기지에 복귀했을 때는 그들마저도 의무대에 바로 입원해야 했다. 나도 입원했다. 나는 이 육군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별의별 꼴을 다 당한 셈이었다. 그래도 대견하지 않은가. 우리 조국의 샘 아저씨(Unlce Sam;미국)와 「더 빅 레드 원(the Big Red One)」사단을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며 이 한 몸 바쳤으니까. 마침내, 사단장님이 병동으로 오셔서 우리 분대원들의 성과를 치하하셨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현대전 전술을 교육받거나, 적어도 일기예보 채널을 보았다면 시간을 더 유익하게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사단장님께 거수경례를 하며 훌륭한 육군 보병이 될 것을 충성했다. 그 후, 기지에서의 몇 개월은 조용하게 지낸 편이었다. 물론, 간헐적으로 무기나 항해술에 관한 교육을 받기도 했고, 이따금씩 동료들과 마을로 가서 맥주도 마셨지만, 역기를 들거나, 먼 거리를 달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복싱이라도 하게 되면 토니를 정신 못 차리게 패주었다. 기동훈련을 받을 때 생고생 했던 것에 비하면, 독일에서 맞는 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눈이 녹았고 꽃이 피었다. 그리고 날씨도 따뜻했다. 솔직히, 완전히 따뜻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영상으로 기온이 올라갔고 동료들 대부분이 반바지를 입고 프리스비를 던지거나 밖에서 소프트볼을 할 정도는 되었다. 마침내 6월이 다가오면서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바나는 벌써 졸업을 해서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여름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차라, 나는 채플힐로 갈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2주간의 시간을 아주 신나게 보내게 될 것이다. 내가 윌밍턴으로 아버지를 보러 갈 때도 사바나가 함께 따라오기로 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떨리고, 설레였고, 동시에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 우리는 편지나 전화로 이미 서로에게 계획을 알렸던 것이다. 또, 보름달이 뜨던 첫날 밤, 나는 밤하늘을 쳐다보았고, 사바나도 하늘을 보았다고 편지로 전했다. 그러나 그녀를 안 본지 거의 일 년이나 되었고, 서로 만나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녀가 내 품으로 달려들까? 아니면 감정을 다소 억누르고 가볍게 뺨에 키스만 할까? 만나자마자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날씨나 물어보고 서로가 어색해 할까? 모르겠다. 나는 밤새 수천 번의 시나리오를 써가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니도 내 마음을 알았던 나머지, 신경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대신 휴가날이 다가왔을 때 내 등을 찰싹 때렸다. 『이제 여자 친구 곧 만나겠군.』 그가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됐어?』 『그래.』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갈 때 테킬라 몇 병 꼭 챙겨서 가라.』 내가 표정을 찌푸리자 토니가 웃었다. 『다 잘 될거야.』 그가 말했다. 『걔도 널 사랑한다구. 네가 이 정도인데 당연한 거지.』 Thirteen 2001년 6월, 나는 휴가를 받고 프랑크푸르트발 뉴욕경유 롤리행 비행기를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으로, 사바나가 차를 끌고 공항으로 나온다고 했고, 우리는 그녀의 부모님을 뵈러 르노아로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런 뜬금없는 소식은 비행기를 타던 전날 그녀가 깜짝 소식으로 알려준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을 본다는데 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분명 그들은 훌륭하신 분들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적어도 첫 며칠간은 사바나와 단둘이만 있고 싶었다. 한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는데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하더라도 - 사바나를 아는 한, 장담하건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모르지만 - 그녀의 부모님이 새벽까지 딸을 붙잡고 있으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냥 누워서 별만 봤다고 말해도 말이다. 물론, 그녀는 다 큰 성인이지만, 부모란 늘 자기 자식에겐 그런 법이다. 그리고 나도 그들이 모든 걸 다 이해해 줄 거라고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도 그 집의 귀한 딸이 아닌가. 그러나 사바나가 이미 알아듣게 설명했던 터였다. 내가 2주간의 휴가를 받았으니까 둘째주를 우리 아버지와 있을 거면, 첫째주는 그녀의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그녀는 너무나 기분이 들떠 있어서 그녀의 부모님을 꼭 만나고 싶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르노아로 갈 거면 다른 곳도 조금 들려서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내 기대담도 커져갔고, 심장도 더 뛰었다. 그러나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를 보자마자 뛰어갈까? 아니면 감정잡고 느긋하게 걸어갈까?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나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떠밀려 공항 연결 통로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군용가방을 어깨에 메고 공항역사로 걸어 나왔다. 처음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둘러보니 그녀가 왼쪽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리고 내 고민도 일순간에 달아났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는 쏜살같이 뛰어왔기 때문이다. 가방을 채 내려놓기도 전에 그녀가 내가 달려와 와락 안겼다. 그리고 뒤이은 키스는 마치 마법에 걸린 왕국처럼, 아무도 알 수 없는 언어였고, 요새였으며, 신비로운 신화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는 동강 난 두 몸이 일 년 만에 다시 붙어버린 느낌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얼마나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후, 우리는 수화물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간,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붙들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차에서도 편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조금 돌아서갔다. 휴게소에 들리며 우리는 아이들처럼 서로의 애정을 표시했다.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그 얘긴 여기까지만 했으면 한다. 어쨌거나 두 시간 후, 우리는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아담한 빅토리아조 양식의 이층집 현관 앞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뜻밖에도, 사바나의 어머니는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나를 안아주었고, 맥주를 건네주었다. 나는 사양하며 고마움을 전달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바나의 어머니, 질은 사바나와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정 많고, 개방적이고, 첫느낌 보다는 훨씬 지적인 모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완전히 그녀와 판에 박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의 환대를 제대로 받고 있었다. 사바나가 내 손을 줄곧 잡고 있었지만, 불편함보다는 오히려 훨씬 편안함을 느꼈다. 저녁이 무르익고, 우리는 달빛을 받으며 산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을 땐, 우리가 언제 헤어져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잠은 손님방에서 잤다. 방은 내가 머물렀던 그 어떤 방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묵은 방은 고전적인 분위기의 가구와 편안한 침대가 놓여있었다. 방은 환기가 잘 통하지 않아, 산뜻한 산의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어두었다. 정말 긴 하루였다. 신체 리듬이 독일 시차에 맞춰졌기 때문에 나는 곧장 잠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편안한 잠옷 차림을 한 사바나가 문을 등 뒤로 닫으며 살금살금 내 침대로 걸어왔다.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며 쉬쉬거렸다. 『우리 부모님이 알면 저 죽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는 내 옆으로 기어들어와 마치 북극에서 야영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그녀를 꼭 껴안자, 그녀의 몸이 내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밤새 키스를 하고 희희덕거렸고,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방으로 몰래 돌아갔다. 나는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다시 잠이 들었고, 창가로 새어나는 햇살을 보며 깨어났다. 아침 음식을 만드는 냄새가 방안으로 솔솔 스며들었다. 나는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사바나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식탁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신문을 읽고 계셨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부모님의 중압감이 느껴졌다. 내가 자리에 앉자 사바나의 어머니는 커피를 한 잔 따라주었고, 베이컨과 계란 요리를 앞에 놓았다. 건너편에 앉은 사바나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고, 부드러운 아침 햇살을 받으니 산뜻하고 더욱 청량한 모습이었다. 『잘 잤어요?』 그녀의 반짝이는 눈은 장난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주 멋진 꿈을 꾸었어요.』 『그랬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어떤 꿈이었어요?』 식탁 아래로 사바나가 내 발을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녀가 어색해하는 표정이 사뭇 귀여웠지만 나는 거기까지만 즐겼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지금은 생각이 안 나요.』 『나는 그러면 정말 미치겠더라.』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음식은 입에 맞아요?』 『냄새가 아주 좋네요.』 내가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사바나를 힐끗 보며 물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죠?』 그녀는 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늘 말을 탈까 생각 중인데요. 말에 올라탈 수 있겠어요?』 내가 망설이자 그녀가 웃었다. 『괜찮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믿어 봐요.』 『말은 쉽죠.』 그녀는 마이다스를 탔고, 나에게는 그녀의 아버지가 주로 탄다는 페퍼라는 이름의 쿼터호스 종을 권해주었다. 우리는 한나절이 넘도록 오솔길을 거닐었고, 말을 타고 넓은 들판을 달리며 그녀가 거닐었을 세상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르노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그녀가 준비해온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들과 지인들이 살고 있는 집들을 알려주었다. 그녀가 이곳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바로 그때였다. 우리는 예닐곱 시간동안을 안장에 앉아있었다. 나는 사바나를 쫓아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가까워지면 또 멀어졌다. 땅바닥에 얼굴을 파묻히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순간도 여러 차례 있었다. 페퍼가 날뛰기라도 하면 줄을 놓지 않으려고 바동바동 안간힘을 다 써야했다. 그러나 저녁을 먹으러 갈 때가 되어서야 내 몸의 이상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내 걸음걸이가 조금씩 오리걸음이 되고 있었다. 다리 안쪽 근육은 마치 토니가 몇 시간 동안 그 부위를 때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토요일 밤, 사바나와 아늑하고 작은 이탈리아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로 갔다. 그 후, 그녀가 춤추러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그때는 이미 거의 걷지 못할 지경까지 되었다. 내가 절뚝거리며 차로 걸어가자,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걸어와 나를 부축했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며 내 다리를 잡았다. 『여기 누르면 아파요?』 나는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어쩐지 그녀는 이 모습이 재밌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아프잖아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확인해 보는 거예요.』 『뭘 확인해요? 아까 말했잖아요. 쑤시다구요.』 『이렇게 당신처럼 군인도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어렸던 나도 이젠 다 컸나 싶어서요.』 나는 다리를 문질렀다. 『알았어요. 그러니 이제 확인은 그만하죠. 알았죠?』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미안해요.』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좀 우습지 않아요? 말은 똑같이 탔는데 나는 멀쩡하잖아요.』 『당신은 계속 탔잖아요.』 『나도 한 달 만에 타는 거예요.』 『참나... 알았어요.』 『빨리요. 인정하세요. 웃기죠? 그렇죠?』 『눈곱만큼도요.』 일요일에는 그녀의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갔다. 교회에서 돌아와서는 다리가 너무 쑤셔서 달리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야구경기를 봤다. 사바나의 어머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오셨다. 나는 자세를 편하게 할 때마다 욱신거리며 오후를 보냈다. 야구경기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화를 편하게 받아주셨다. 우리는 군생활 얘기부터 시작해서 그가 감독을 맡고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이야기와 그의 포부까지 말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사바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따금씩 사바나는 세탁을 끝낸 옷을 한 바구니 들고 거실로 들어와 옷을 갰고, 그녀의 어머니는 또 한 차례의 빨래를 세탁기에 돌렸다. 그녀가 법적으로는 대학원생이고 성인이었지만, 여전히 빨랫감을 집으로 갖고 와서 엄마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차를 몰고 채플힐로 돌아갔다. 사바나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보여주었다. 가구는 별로 없었지만, 비교적 새것이나 다름없었고, 가스 벽난로와 대학교 전경이 내다보이는 발코니도 있었다. 날씨가 따뜻한데도 그녀는 불을 피웠다. 우리는 치즈와 크래커로 가볍게 때웠다. 시리얼만 제외하고는 그녀가 준 건 그게 다였다. 나로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바나와 단둘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거의 자정까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사바나는 평소보다 말수가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침실로 걸어갔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앉자, 그녀를 찾으러 방으로 갔다. 그녀가 침대에 앉은 모습을 보고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두 손을 모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음...』 그녀가 더 이상 말이 없자, 나도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그리고 내일 일찍 수업도 있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당신도 자야겠군요.』 『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미처 그 생각을 못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블라인드 틈으로 공원의 불빛이 방안으로 새어들었다. 긴장한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음...』 그녀는 마치 벽에 대고 얘기 하듯 다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두 손을 쳐올렸다. 『내가 소파에서 자면 되죠?』 『괜찮겠어요?』 『그럼요.』 내가 말했다. 사실, 소파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창가를 보며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가 된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한편으론 그러고 싶어요. 지난 몇 주간 고민을 했었어요. 그리고 다 괜찮을 거라고 마음도 다잡았구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저를 사랑하잖아요. 사랑하는 사이면 다들 그렇게 하구요. 당신이 없으니까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쉬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말을 흐렸다. 『괜찮아요.』 마침내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도 두려웠나요? 처음에는요?』 나는 아주 적합한 답변을 찾아 고민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이불을 바르게 정리하는 척 했다. 『화났어요?』 『천만에요.』 『그렇지만 실망했군요.』 『그냥...』 내가 실토하자 그녀가 웃었다.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잖아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기분이 들까요?』 『그냥, 외로운 군인이니까요.』 그녀는 내 말에 다시 웃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웃음 속에 초조함도 희석되어 있었다. 『소파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작아서요. 다리도 뻗지 못 할 거예요. 또 이불도 남는 게 없어요. 집에서 몇 장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깜빡 했어요.』 『이불이 문제군요.』 『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그럼 나랑 같이 자면 되겠네요.』 그녀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적 갈등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가 어깨를 들추며 말했다. 『그렇게 하실래요? 그냥 잠만요.』 『누구 분부라구요.』 그제서야 그녀의 어깨가 편안하게 내려왔다. 『좋아요, 그럼. 그 문제는 이제 해결됐네요. 잠시만 잠자리 좀 정리할게요.』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건너 서랍을 열었다. 그녀가 고른 잠옷은 그녀의 부모님 댁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파자마였다. 나는 잠시 그녀를 세워두고 거실로 돌아가 운동할 때 입는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내가 방으로 다시 오자, 그녀는 이미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침대로 가 그녀 옆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발로 이불을 차내고 불을 끈 후, 다시 누우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보고 옆으로 누웠다. 『잘자요.』 그녀가 속삭였다. 『잘자요.』 내가 잠들 리가 없었다. 어쨌건 한동안은 못 잤다. 너무...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지 못 할까봐 몸을 뒤척이진 않았다. 『저기요.』 그녀가 다시 조용히 말을 붙였다. 『네?』 그녀는 몸을 틀어 나를 보았다. 『말해줄 게 있는데요. 남자랑 이렇게 자는 건 처음이에요. 하룻밤 꼬박 자는 거 말이에요. 그럼, 한 단계 가까워진 거 맞죠?』 『맞아요.』 내가 말했다. 『한 단계 가까워진 거죠.』 그녀는 내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누가 물어보면, 당신도 우리가 같이 잤다고 말하면 되겠네요.』 『바른 말이죠.』 『그래도 말 안 할 거죠? 그냥... 저는 남들의 입에 오르는 게 싫거든요.』 나는 웃음을 참았다. 『우리만의 비밀로 할게요.』 그 후 며칠은 수월하고, 편안한 일정이었다. 사바나는 아침에 수업을 듣고 보통 점심때가 조금 지나면 수업을 마쳤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신병들이 휴가 나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다는 낮잠을 청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몇 년간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버릇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녀가 깨기 전에 일어나 커피물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가 길모퉁이에서 신문을 사들고 들어왔다. 어떤 날은 베이글과 크루아상을 사들고 왔고, 다른 날은 그냥 집에서 시리얼만 먹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산다면, 지금의 생활 패턴으로 미루어 보아 신혼 초의 생활 패턴을 점쳐 보는 건 아주 일이었다. 얼마나 좋은가, 살아보지도 않고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아니면,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바나의 부모님 댁에 있을 때, 사바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리 단둘이서 첫날 밤을 보낼 때도 그랬다. 그러나 그 후로는... 다른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없을 때도 혼자만의 완전하고, 충실한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미처 내가 몰랐던 것 같다. 냉장고 문에 붙여둔 달력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들로 적혀 있었다. 콘서트, 강의, 여섯 차례 정도의 친구들 파티. 그리고 팀과의 점심약속도 군데군데 연필로 써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업을 네 과목 듣고 있었고, 한 과목은 대학원 조교로서 강의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요일 오후마다 한 교수와 사례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꼭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바로 그 연구였다. 그녀의 생활은 편지에서 말했던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중에 그녀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부엌에서 먹을 걸 만들면서 그 일과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했다. 목소리에서도 그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녀가 생기있게 말하는 동안, 나는 주로 말을 들으며 대화의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 점에 관한 한, 전혀 이상한 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일과에 대해서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교차하는 감정이 생겼다. 서로가 연락을 하고,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는 나름대로 그녀의 삶을 살았고, 나도 나의 삶을 각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후로, 그녀는 학위를 따냈고, 학위수여식 때 학사모를 하늘로 날렸으며, 대학원 조교로 일했고, 이사를 했고, 산림을 꾸려 지금의 아파트를 얻었다. 그녀의 삶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로 따져보면 그다지 큰 변화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나에게 있어 변화란, 무기조립 및 해체를 여섯 개에서 여덟 개의 기종으로 늘렸다는 것과 벤치프레스의 파운드를 30파운드 더 늘렸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물론, 내 본분의 역할도 다 했다. 적어도 러시아군이 수십 개의 기계화 사단들로 독일을 침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게 했으니까.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사바나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고, 나를 향한 그녀의 감정의 힘을 지금도 여러 번 감지할 때가 있었으니까. 사실, 여러 번 그럴 때가 있다. 아무튼, 대체적으로 훌륭한 한 주였다. 그녀가 외출하면 나는 캠퍼스를 걷거나, 실내 체육관 근처의 하늘색 트랙을 돌며 조깅을 했고, 충분한 휴식시간을 취해가며 운동했다. 나는 하루도 채 안 되어 체육관을 찾아냈다. 나는 거기서 마지막 날까지 운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게다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요금을 부과하지도 않았다. 사바나가 귀가할 쯤 되면 이미 운동과 샤워를 다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함께 보냈다. 화요일 밤에는 채플힐 시내로 가서 그녀와 수업을 함께 듣는 동료들과 저녁을 먹었다. 생각한 것보다는 더 재미있었다. 특히 여름학교에 다니며 공부만 한 사람들과 내가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즐거웠고, 청소년 심리학에 관해서만 대화가 집중되는 것도 흥미로웠다. 수요일 오후에는 사바나가 자신이 듣는 수업을 구경시켜 주었고, 교수님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날 오후 늦게, 우리는 전날 밤 인사한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가졌다. 그날 저녁, 우리는 중국요리를 사들고 집으로 가서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그을린 피부를 부각시키는 끈달린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섹시한 모습이었다. 목요일이 되어, 나는 그녀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특별한 밤을 만들어 그녀를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수업을 듣고 사례연구를 하는 사이, 나는 쇼핑몰에서 거금을 내고 정장과 넥타이를 샀고, 다시 거금을 내어 신발까지 구입했다. 나는 그녀의 정장차림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신발을 샀던 그곳 점원이 동네에서 가장 최고라고 하던 식당으로 저녁식사를 예약해두었다. 별 다섯 개에, 이국적인 메뉴와, 산뜻한 차림의 종업원들까지 모든 점이 최고였다. 물론, 사바나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준비한 거였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강의실 문으로 걸어오자마자 그녀가 이미 또 다른 저녁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번에 이틀간 함께 만났던 그 친구들과 다시 저녁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너무 들떠 있어서 차마 나의 계획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난 실망한 정도가 아니었다. 화가 났다. 내가 생각해도 그녀의 친구들과 저녁을 보내는 건 아주 즐거웠다. 심지어 하루 더 오후를 보낸 것까지도 좋았다. 그러나 거의 매일 이렇게 만나야 하는 걸까? 일 년간 떨어져 있었고 이제 함께 있을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나와 같은 바람을 공유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는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던 일 년을 채우려고, 휴가 나가면 가능한 한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내가 착각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게 뭔가? 그녀는 내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내 기분대로라면, 나는 아마 아파트에 그냥 남고 그녀만 혼자서 보냈을 것이다. 대신, 나는 한쪽으로 떨어져 앉아 대화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무섭게 노려보았다. 나는 수년간 위협에 관해서라면 아주 능숙했다. 그리고 그날 밤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사바나도 내가 화가 났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편한 게 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며 소극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분위기를 맞추려고 노력했고 나도 그에 응했다. 간혹 그녀가 내 손을 잡기도 했고, 내 눈길과 마주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살짝 웃음을 보이다가도, 내가 그 웃음을 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음료수와 감자튀김을 한웅큼 내놓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내 태도에 불만을 갖고 결국에는 터지고 말았다. 그녀를 탓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 입장을 설명했고, 그녀가 먼저 화를 내는 과정에서 나도 화를 내며 분한 감정을 드러냈다. 우리는 집으로 가면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도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잤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내가 신문을 사러 간 사이에 아침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나가버렸다. 나는 결국 혼자서 커피만 마셨다.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집에 오는 대로 화해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털어내고 싶었고, 계획했던 저녁식사 얘기도 꺼내고 싶었다. 그리고 내 행동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이해해줄 거라 믿었다. 밖에서 낭만적인 저녁을 먹으면 그 일을 다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이면 우리가 아버지와 주말을 보내기 위해 윌밍턴으로 가야하니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내가 오는 것을 나름대로 기다리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바나와 달리, 아버지에게 그다지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어찌 그럴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사바나가 이미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바나... 항상 사바나였다. 이번 휴가나, 내 인생의 모든 게 결국에는 사바나로 결부되었다. 나는 한시까지 운동을 마치고, 청소를 끝내 놓고 짐을 대부분 챙겼다. 그리고 식당으로 전화를 해서 다시 예약을 했다. 사바나의 일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곧 집으로 들어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게임 프로와, 드라마, 정보광고, 토크쇼가 피해자를 찾아나서는 변호사들의 광고와 묻혀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나는 아파트 앞 공터로 나가 그녀의 차가 있는지 몇 번이고 주차장을 살폈고, 내 짐도 세 네 번은 다시 확인했다. 사바나가 분명히 집으로 올 시간이었고 해서, 나는 식기세척기를 열심히 청소했다. 그리고 몇 분이 더 지나고, 나는 양치를 두 번째나 하며 다시 창문 밖을 빼꼼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바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를 틀어 노래를 몇 곡 들었고, 주파수를 예닐곱 번 돌리다가 결국은 꺼버렸다. 나는 다시 아파트 공터로 나갔다. 소득은 없었다. 시간은 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채 가라앉지 않았던 열이 서서히 올랐지만 애써 눌렀다. 뭔가 늦는 적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혼자서 계속 되내였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스티븐 킹의 최신작 소설을 꺼냈다. 그리고 유리컵에 얼음물을 따르고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그러나 같은 문장만 반복해서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다시 십오 분이 지났다. 그리고 삼십 분이 더 흘렀다. 사바나의 차 소리가 들릴 때 쯤, 내 얼굴은 험악하게 굳어있었다. 세 시 반,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존!』 그녀가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다. 그녀는 테이블로 걸어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수업이 끝나고 학생 하나가 찾아와서 내 수업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나 때문에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대요. 대단하죠? 나한테 조언을 구하더라구요. 공부 방향도 묻고,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하고, 교수님들도 추천해 달라고 하더라구요. 내 조언을 듣고 있는 그 학생을 보니까...』 사바나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참 보람이 있더라구요.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싶더라구요. 교수님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건 들었지만, 막상 나도 그런 경험을 할 줄은 몰랐어요.』 내가 억지로 미소를 짓자, 그녀는 한술 더 뜨며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튼 시간 좀 있냐고 묻더라구요. 좀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다구요. 그래서 별로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이 얘기 저 얘기 하나씩 더 하다 보니 점심까지 먹게 되었어요. 그 여학생은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겨우 열일곱 살 밖에 안됐는데 고등학교를 일 년 빨리 졸업을 했대요. 대학과목 선이수제도 시험과목도 많이 통과해서 벌써 2학년이에요. 그리고 더 빨리 졸업하려고 여름학교 수업도 들을 예정이라네요. 정말 본받을 학생이죠.』 그녀는 자신의 들뜬 기분을 나와 나누고 싶어 했지만, 나는 쉽게 나서지 못했다. 『대단하네요.』 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 대답을 듣고 그녀는 처음으로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내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짜증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고 싶지 않죠? 됐어요. 근데 이제 슬슬 짜증이 나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녀는 나를 향해 휙 돌아섰다. 『이딴 거요!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요!』 그녀가 말했다. 『존, 당신의 속마음이 얼굴에 쓰여 있어요. 화났잖아요. 그러면서 이유도 말하지 않구요.』 나는 수세에 몰린 기분이 들어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내가 말했다. 『난 당신이 몇 시간 전에 들어올 줄 알았어요.』 그녀는 손을 쳐들었다.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설명했잖아요. 어쨌거나 지금은 책임진 일을 하고 있다구요. 그리고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들어오자마자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잖아요.』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뭐요? 그 정도 사과로는 안 되던가요?』 『나는 그렇게 말 안했어요.』 『그럼, 뭐예요?』 내가 다른 말을 못하자 그녀가 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당신은 어젯밤 일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죠. 그리고 또 얘기해 볼까요? 그런데 그 일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맞나요?』 나는 눈을 감았다. 『어젯밤엔, 당신이...』 『내가요?』 그녀가 끼어들며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제발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요?! 난 잘못한 게 없어요. 먼저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구요! 어제밤은 즐거울 수 있었어요. 아니요 분명 그랬을 거예요. 근데 당신은 누굴 쏘아부칠 듯 그렇게 앉아 있었잖아요.』 그녀는 과장하고 있었다. 아니면... 바른 소리를 하고 있든지. 뭐가 됐든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당신을 어떻게 감싸고돌았는지 알아요? 그리고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냐구요? 말하죠. 일 년 내내 사람들에게 당신 칭찬만 해댔어요. 친구들에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요. 당신이 속도 깊고, 당신이 하는 일도 자랑스럽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본 건 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당신의 이면을 보고 말았어요. 당신은... 경솔했다구요.』 『내가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그 말에 그녀는 잠시지만 말을 멈췄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당신이 어제 그렇게 나오니까 내가 오늘 늦은 건지도 모르죠.』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젯밤 일은 미안하게 됐어요...』 『당연히 미안해 해야죠!』 그녀가 다시 말을 가로채며 소리질렀다. 『그 사람들은 내 친구들이라구요!』 『친구들이라는 거 나도 알아요!』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들과 일주일 내내 있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한 대로에요. 우리끼리만 있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우리끼리만 있고 싶었다구요?』 그녀가 다그쳤다. 『글쎄요... 당신은 아닌 척 하지만 제가 말해주죠. 아침에도 같이 있었구요. 지금도 집으로 들어와서 같이 있잖아요. 나는 다 잊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당신은 고작 싸움이나 하려고 들잖아요.』 『싸우려는 거 아니에요!』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꾹 참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옆으로 돌아서서 화를 눌렀다. 그러다 다시 말하려는 순간, 불길함이 감도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단지 예전처럼 있고 싶었어요. 지난 여름처럼요.』 『지난 여름이 어땠는데요?』 나도 이러는 내가 싫었다. 이미 쓰잘데 없는 일로 다시 그녀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 내 모습은 누군가에게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하다가 퇴짜맞는 꼴이었다. 대신, 나는 화제를 조금 돌려서 말하려고 했다. 『지난 여름에는 함께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반박했다. 『나는 하루종일 집 만드느라 일만 했어요. 기억하죠?』 물론, 그녀의 말이 옳았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나는 다시 말을 붙였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작년에 우리가 더 많은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이러는 건가요? 내가 바쁘기 때문에요? 내 생활을 가지는 게요? 어쩌라는 거예요? 일주일 내내 수업 빠지라구요? 강의가 있는데 그냥 아프다고 할까요? 숙제도 하지 말구요?』 『아니요...』 『그럼, 어쩌란 거예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당신은 내 친구들 앞에서 나를 창피하게 할 거잖아요.』 『당신을 창피하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변론했다. 『아니라구요? 그럼 트리카가 오늘 나를 불러서 얘기한 건 뭐죠? 우리가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하며 저더러 더 나은 일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건 뭐냐구요?』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을 들은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그녀는 알 리 없었다. 분노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그냥 단둘이서만 있고 싶었던 거예요. 그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 말도 그녀에겐 아무 소용없었다. 『그럼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대신 그렇게 물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나요. 「우리 딴 건 안 될까요? 그 친구들과 있고 싶지 않아서요.」 이렇게 말하면 됐잖아요. 존, 저는 독심술 같은 거 못해요.』 나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돌아서서 방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나는 공터로 나가는 출입구만 응시했다. 그녀의 말에 그다지 화난 것은 없었지만... 그냥 슬펐다. 어쩐지 그녀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일을 너무 크게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지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란 사람은 말주변이 없으니까. 내가 지금 바라는 건 그녀가 방을 건너와서 나를 안으며 내 기분을 이해하니까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해주는 거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나는 창가를 바라보며 외롭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말했다. 『그렇게 얘기 할 걸 그랬어요. 미안하게 됐어요. 그리고 어젯밤 일도 미안하구요. 또 늦게 들어왔다고 인상쓴 것도 미안해요. 이번에 휴가 나오면 당신과 오래 있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뿐이에요.』 『마치 나는 그런 생각을 안 한 사람처럼 말하네요.』 나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보여요.』 그 말을 남기며 나는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 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내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혼자 있고 싶었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캠퍼스를 걸었다. 그리고 나무 그늘을 찾아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그녀가 뒤에 따라올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녀가 따라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후, 학생회관에 들려 얼음물을 샀다. 비교적 사람도 없고 바람도 선선했지만 그곳에 있진 않았다. 땀을 흘리고 싶었다. 차마 떨쳐내지 못한 분노와, 슬픔과 실망감을 정화하듯 땀을 쏟아내고 싶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사바나는 이미 집에 들어올 때부터 싸울 기세였다. 대답도 기다렸다는 듯이 빨리 나왔다. 그리고 즉흥적이었기 보다는 사전에 준비한 말처럼 보였다. 하루종일 분을 삭히지 못한 사람처럼. 그녀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젯밤에 보인 행동을 보면 그녀가 화를 낼 만도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과실이나 내 감정을 신경쓰지 않는 모습 때문에 오후 내내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그늘도 작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나는 보통 학생들이 먹여살리는 길가 작은 상점에 들려 피자 두 조각과 맥주 한 병을 샀다. 나는 다 먹은 후 다시 조금 걸었다. 그리고 결국 아파트로 걸음을 돌렸다. 그때가 벌써 아홉 시였다. 그리고 오후 내내 오락가락 하던 내 기분도 이젠 가라앉은 상태였다. 집 앞 도로까지 오니, 사바나의 차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침실에 환하게 켜놓은 스탠드 불빛도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방은 모두 불이 꺼져있었다. 대문이 잠겨 있을지 궁금했으나, 손잡이를 잡자 스르르 돌아갔다. 침실문은 조금 닫혀 있었고, 방안 불빛이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그냥 거실에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그녀의 화난 얼굴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긴 한 숨을 들이마시고 짧은 복도로 걸어갔다. 나는 고개를 빠꼼 내밀었다. 그녀는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큰 셔츠를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잡지를 읽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바나.』 『존.』 나는 방으로 건너가 침대 모퉁이에 앉았다.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전부 다요. 당신 말이 옳았어요. 어젯밤은 제가 바보같았어요. 친구들 앞에서 당신을 그렇게 난처하게 했으니까요. 그리고 늦게 집에 왔다고 그렇게 화낼 필요도 없었구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놀랍게도 그녀는 손으로 침대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이리 와요.』 그녀가 속삭였다. 나는 침대로 올라가 침대 틀에 기대며 그녀를 팔로 안았다. 그녀도 몸을 기댔다. 그녀의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더이상 말다툼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요.』 그녀의 팔을 쓰다듬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로 갔었어요?』 『마땅히 갈 곳도 없더라구요.』 내가 말했다. 『그냥 캠퍼스를 걸어다녔어요. 피자도 먹고, 생각도 많이 했어요.』 『내 생각요?』 『당신 생각요. 내 생각도 하고, 우리들 생각을 해봤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 『아니요.』 내가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이젠 화내는 것도 짜증이 나더라구요.』 『나도요.』 그녀가 반복해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나간 새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말해주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말해도 돼요?』 『물론이죠.』 『사과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 친구들과 그렇게 오래있었던 거 말이에요. 그래서 좀 전에 제가 화나 있던 거예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듣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 말이 맞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말이죠. 하지만 당신도 잘못 생각한 게 있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내 친구들과 너무 오래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 것도 내가 예전만큼 당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맞아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건 잘못 생각한 거예요. 정반대죠. 당신이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랬던 거예요. 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내 친구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에요. 바로 나때문이죠.』 그녀는 궁금증을 남기고 말을 멈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이랑 같이 있기만 해도 힘이 난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손가락을 펴서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거 괜한 말 아니었어요. 지난 여름은 나에게 정말 소중했어요. 당신은 정말 모를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가버리고 저는 정말 힘들었어요. 팀에게 물어봐요. 현장에서 거의 일도 못할 지경까지 갔었죠. 편지에는 잘 지내고 일도 잘하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매일 밤마다 울었어요. 매일 현장에 앉아서 당신이 다시 해변으로 걸어온다는 상상을 했어요. 정말,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바랬죠. 군인 머리를 한 사람만 봐도 가슴이 뛰었어요. 물론, 당신은 아니지만요. 그렇지만 그게 더 속상했어요. 당신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요. 매번 그랬어요. 저도 알아요. 당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먼 바다 너머에서 엽서도 보내줬다는 거. 하지만 당신이 막상 옆에 없으면 얼마나 힘들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다시 마음 잡기까지는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그리고 이번에 당신과 같이 있는 것도 그래요. 당신이 보고 싶었고, 사랑하는 만큼,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어요.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까봐요. 두 가지 갈래길에서 고민해 봤어요. 그리고 제가 내가 내린 답은 뭐든지 하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지난해처럼 힘들어 하지 않도록요. 그래서 바쁘게 같이 있으려고 했던 거예요. 알겠어요? 내 가슴이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구요.』 나는 목이 메여왔다. 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당신을 아프게 했다는 생각요. 당신이 그런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하지만 나도 그런 상처를 준비하고 있어요. 일주일 후, 당신은 다시 떠나고, 나는 또 남아서 그 후에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 생각해야 하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겠죠. 당신도요. 하지만 나는...』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요.』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대답을 들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답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죠. 그건 확실히 알아요. 올 여름에는 좀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늘 같이 운동하면 되죠.』 내가 싱거운 농담을 건네자, 고맙게도 그녀가 웃어주었다. 『맞아요. 그러면 좀 낫겠네요. 턱걸이 열 개 정도 하면 새롭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겠죠? 그렇게라도 된다면 좋겠어요. 하지만 꼭 그럴 거예요. 쉽진 않겠지만, 이번에는 일년 내내 그렇게 아파하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 종일 그 생각만 했었어요. 크리스마스 땐 당신이 돌아온다구요. 몇 개월만 더 있으면 이 모든 게 다 끝난다구요.』 순간,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셔츠를 파고들며 옷을 걷자, 내 배가 드러났다. 전기가 찌릿하고 올랐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키스를 하려고 몸을 숙였다. 그녀의 키스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열정이 묻어났다. 격렬하고 생동적인 그런 키스였다. 그녀의 혀가 내 것과 닿자, 그녀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깊은 호흡을 내뿜으며 내 청바지 단추로 손가락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녀의 몸을 타고 손을 더 아래로 내려가자, 그녀는 셔츠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바지 단추를 풀렀다. 나는 이대로 계속 가고 싶었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기 전에 억지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잠시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그녀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 앉아 셔츠를 벗었다. 나는 가쁜 호흡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기대며 내 셔츠를 걷어올렸다. 그녀는 내 배꼽과 늑골에 키스를 했고, 다시 가슴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청바지를 끌어내리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셔츠를 벗고, 다시 청바지를 바닥에 벗어던졌다. 그녀의 목과 어깨에 키스를 했고,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내 귀에 전해졌다. 내 살과 맞닿은 그녀의 피부는 불덩어리였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나누어 갔다. 그동안 내가 꿈꾸었던 완전한 사랑이었다. 그 후, 나는 그녀를 두 팔로 안은 채 생생한 그 하나하나의 느낌을 되새겼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정말, 정말 사랑한다고. 우리는 한 번 더 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사바나가 마침내 잠이 들었을 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부드럽고도 짜릿한 밤이었지만, 우리의 미래가 무엇이든, 이렇게나마 우리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면, 그 희망에 매달려야 한다는 서로의 체념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Fourteen 휴가 기간 동안,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도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남아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보낸 주말을 제외하면, 우리는 가능하면 둘이 붙어다녔다. -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동전 얘기만 하셨다. 채플힐로 다시 돌아온 후, 사바나가 수업을 다 마치는 대로 우리는 오후와 저녁을 함께 보냈다. 우리는 프랭클린 스트리트를 따라서 상점가를 거닐었고, 롤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역사박물관도 갔으며,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 동물원에서 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에겐 지난번 저녁에 이어 두 번째지만, 우리는 신발을 샀던 곳의 점원이 말해준 멋진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안으로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나오자, 그녀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와 함께 있으니 내가 행운아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잠자리를 다시 갖지는 않았다. 함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사바나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그녀가 손가락을 내 입술에 대고 고개를 흔들며 제지했다. 『어젯밤은 정말 근사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얘긴 안 할래요.』 그녀는 나를 안았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우리 사이에 변화가 감지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아침 사바나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떠났다. 우리는 탑승 방송을 기다리며 출구 앞에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내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윽고, 탐승 시간이 되자, 그녀가 내게 와락 안기며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고 억지로 웃음을 보였지만, 나는 그 웃음에서 슬픔을 들을 수 있었다. 『약속한 거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근데 잘 안 되는 걸 어떡해요.』 『괜찮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육개월만 있으면 되잖아요. 생활하다 보면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나중에 놀랄 거예요.』 『말은 쉽죠.』 그녀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해요. 이번에는 더 강해질 거예요. 잘 지낼 거예요.』 나는 그녀가 한 말이 못미더워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요.』 그녀가 말했다. 『잘 지낼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한참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보름달 꼭 볼거죠?』 그녀가 물었다. 『한 번도 안 빠트리고 볼게요.』 우리는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어야 했다. 나는 어깨에 짐을 둘러멘 채 연결통로로 걸어갔다. 어깨 너머로 살짝 보니 사바나가 사람들에게 가려져 벌써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 후, 나는 몸을 뒤로 기대며 사바나의 말이 진실이었길 기도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관심 가져주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사랑과 관심도 부족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랑과 관심은 우리 관계의 단단한 벽돌이었다. 그러나 함께 보낸 시간과, 우리에게 드리워진 절박한 이별의 위협이 없는 시간은 회반죽을 하지 않은 벽돌처럼 불안정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내가 그녀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게 많았다. 작년에 그녀와 떨어져 지낸 삶이 그녀에게 그토록 영향을 줄지는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초조하게 몇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또 어떻게 그녀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의 관계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팽이의 회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으면, 팽이가 죽지 않게 계속 돌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아름답고, 마법 같고, 어린아이의 탄성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떨어져 지내면, 팽이가 비틀거리며 불안정하게 회전력이 줄어든다. 나는 팽이가 쓰러지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작년을 거울삼아 많은 것을 터득했다. 6월과 7월에 독일에 있을 때 그녀에게 더 많은 편지를 썼고, 더 자주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보다 주의깊게 들으려 했고, 어떤 우울함이 있는지, 아니면 나에게 애정의 말을 듣고 싶은지 신경쓰며 통화했다. 초반에는 전화를 걸 때 초조함이 생겼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이제는 그런 전화가 기다려졌다. 그녀도 순조롭게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2주간 부모님 댁에서 보냈고, 곧 가을학기를 맞이했다. 9월 첫 번째 주부터 우리는 전역까지 남은 날을 카운트해 갔다. 100일이 남아 있었다. 주단위나 월단위보다는 날을 세는 게 더 편했다. 하루하루 세어나가면 어쩐지 우리 사이의 벌어진 거리가 줄어들어 더욱더 친밀해지는 것 같았고, 결국 서로가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힘든 고비는 다 지났다고 서로에게 다짐해 주었다. 그리고 캘린더를 넘길 때마다 우리 관계의 두려움은 소멸해갔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더 이상 갈라놓지 못할 거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다 9.11이 발생했다. Fifteen 이것만은 확실하다. 9.11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거. 나는 트윈타워와 펜타곤에서 뿜어나오는 불기둥을 지켜보았고, 사람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에게서 굳은 표정들을 보았다. 그리고 빌딩들이 붕괴되며 거대한 먼지 구름과 파편들이 피어오르는 걸 목격했다. 백악관에 소개령이 내려졌을 땐 분노심이 생겼다. 나는 몇 시간 안으로 미국이 공격으로 응징하고, 군에서 출격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우리 기지는 군 최고 비상경계령이 발효되었다. 그리고 내 부하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울 때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개인적인 이견이나 정당의 이해관계 따위는 일순간에 녹아진 듯 했다. 그 짧은 기간에 우리는 단지 미국인이었을 뿐이다. 전국의 모병소마다 입대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이미 징집되어 온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복무의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토니는 우리 분대에서 2년 연장복무를 신청한 첫 번째 지원자였다. 그리고 삼삼오오 다른 지원자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 12월의 영예로운 제대를 기대하며 고향으로 가서 사바나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나조차도 그 열풍에 휩싸여 연장복무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주변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건 핑계였다. 당연히 애국의 물결에 같이 편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도, 전우애와 책임감이라는 연대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내 동료들을 잘 알고, 그들을 사랑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그들을 저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내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 내 제대 날짜가 다가오자, 동료들은 많이 아쉬워하며 심지어 제대를 재고해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사바나에게 전화해서 그 소식을 전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동조해주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돌아가는 상황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명도 듣기 전에 그녀는 이미 내게 주어진 의무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곧 일은 현실로 다가왔다. 조국의 부름에 나는 기꺼이 희생을 했다. 주범자들을 색출하는 작업도 신속히 완료되었지만, 2001년은 우리에게 특별한 일없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 분대원들이 실망한 점은, 우리 보병 사단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타도하는 일에 관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이라크 침공에 대비한 훈련을 하며 대부분의 봄과 겨울을 보냈다. 사바나가 보내주던 편지에 변화가 생긴 것도 이맘 때였던 것 같다. 한때는 주단위로 오던 편지가 열흘 단위로 오더니, 날이 줄어들수록 2주 단위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편지 내용의 분위기가 변하지는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가졌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변화가 생겼다. 우리의 미래를 기약하던 내용과 한때는 늘 기대감으로 채워주던 장문의 편지 내용이 사라진지 오래됐다. 우리는 그런 꿈이 이제는 2년 뒤로 멀찌감치 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먼 미래를 놓고 편지를 쓰려니, 우리가 인내해야 할 아픔이 너무 긴 시간으로 그녀는 느껴졌던 것이다. 5월이 오자, 적어도 다음 휴가에는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내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기 며칠을 남겨두고 다시 운명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우리 부대장이 나를 호출했다. 내가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자, 그가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의 말로는, 우리 아버지가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이미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특별휴가가 주어졌다. 나는 채플힐로 가서 사바나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 대신, 윌밍턴으로 가서 아버지의 병상을 지켰다. 병원 소독 냄새를 맡고 있으면 죽음보다는 병세가 호전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늘 들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계셨다. 그는 내가 복귀하기 전까지 그곳에 계셨다. 아버지의 피부는 아주 희멀겋게 창백했고, 가쁜 호흡을 내쉬고 계셨다. 첫 일주일은 의식이 들어왔다 말았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식을 차렸을 때, 나는 이제껏 거의 본 적이 없는 그의 감정을 보았다. 그는 극도의 공포감과, 일시적인 정신착란 증세, 내가 곁에 있어주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그런 교차된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또다시 아버지의 손을 잡게 되었다. 그것도 여러 차례. 아버지는 목에 튜브를 끼웠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다. 기지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조금 들려주긴 했지만, 주로 동전에 관한 이야기만 해주었다. 나는 「그레이시트(Greysheet)」를 아버지에게 읽어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서 아버지가 서랍에 보관해 둔 예전의 발행된 책들도 가져와서 읽어주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DHRC(David Hall Rare Coins)」나 「레전드 화폐학(Legend Numismatics)」과 같은 사이트에 들어가 그곳에서 제시한 최근 가격과 정보들을 모두 아버지에게 읽어주었다. 가격은 아주 놀라웠다. 내가 추정하기로 아버지의 수집품은 금의 시세가 높았던 시기에 동전가격이 떨어지긴 했어도, 집을 구입한 직후 몇 년간의 시세보다 열 배는 더 나갔다. 우리 아버지는 간단한 화술도 구사하지 못하는 분이지만,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부자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가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시세를 말할 때마다 아버지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셨다. 순간, 내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동전이 추구하는 것은 동전 그 자체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동전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 점을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수집했던 동전들을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는 그 자료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살펴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났다. 다음날, 나는 우리가 롤리나, 샬럿으로 갔었던 얘기나, 사바나와 있을 때의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의사들조차도 아버지가 내 말을 알아들을지 미지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내가 병문안을 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잘 웃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복귀하기 전날 집으로 다시 돌아갔고, 병원에서 아버지가 계속해서 회복될 때까지 간병해줄 사람을 알선해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튼실해졌다면, 사바나와의 관계는 소득이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말자. 그녀도 가급적이면 나와 자주 있으려고 했고, 많은 힘을 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우리 관계에 벌어지기 시작한 틈을 치료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그녀에게 내가 무엇을 바라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곁에 있을 땐 아버지와 단둘이 있고 싶었고, 그녀가 없으면 그녀를 옆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사바나를 향해 엇갈린 길을 걸어도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이런 고비를 잘 비켜나갔다. 그녀도 내 생각과 내가 바라는 점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함께 있을 별도의 시간. 우리 관계를 배터리라고 한다면, 외국으로 나가 있던 나의 시간은 계속해서 고갈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번은 아버지 곁에 앉아 심박계의 단조로운 소리를 듣고 있을 때, 사바나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은 104주의 시간에서 4주 밖에 없었음을 깨달았다. 5퍼센트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편지나 전화 통화를 하고 있긴 했지만, 가끔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이렇게 버텨왔을까 싶기도 했다. 우리는 이따금씩 산책을 나갔고, 밖에서 식사도 두 번 했다. 그러나 사바나가 강의와 수업이 다시 있었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탓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다투게 되었다. 나는 그런 게 싫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다투는 게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한동안 집에 가서 못 온다는 말로 그 속내를 내비쳤다. 그것이 처음이자, 유일한 사바나의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다툰 것을 가급적이면 잊으려 하며 작별했다. 지난번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눈물의 이별이 되었다. 어쩌면 서로가 그런 이별에 익숙해져 있거나, 우리가 성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갈 때, 우리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생겼음을 알고 있었다. 전보다 눈물을 많이 흘리지 않은 것도 우리의 강렬했던 감정이 소멸하고 있어서였다. 가슴 아픈 깨우침이었다. 한편, 보름달이 뜨던 다음날 밤, 나는 황량한 축구장을 거닐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나는 첫 번째 휴가 때 사바나와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두 번째로 휴가 갔던 날도 떠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 번째 휴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우리의 불길한 징조를 예감했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여름이 찾아왔다. 우리 아버지는 서서히 병세에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편지에 매일 하루에 세 번씩, 정확하게 20분 동안 동네 세 블록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물론, 그 정도도 아버지는 힘에 부친 일이었다. 이 와중에도 희망이 보이는 면을 꼽자면, 아버지는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동전 수집만 제외하면 그랬다. 아버지는 은퇴를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편지도 예전보다 더 자주 보냈고, 화요일과 금요일마다 고향 시간으로 정확하게 1시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전화 목소리로 아버지의 피곤한 기색이라도 보일까봐 주의깊게 들었고, 식사도 잘하고, 수면도 충분히 취하고, 약도 잘 챙겨서 드시라고 당부했다. 늘 말하는 사람은 나였다. 아버지는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보다 전화로 통화하는 것을 더 힘들어 하셨다. 늘 통화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얼른 통화를 끝냈으면 하는 목소리였다. 어떤 때는 일부로 짓궂게 시간을 끌었지만, 이것이 장난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알고 계실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재밌고 웃음이 났다. 아버지가 같이 웃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아버지의 목소리는 경쾌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나는 좋았다. 아버지가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늘 첫 번째 전화벨이 울릴 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며 내 전화를 기다렸을 것이 눈에 선했다. 8월은 9월로, 다시 10월로 접어들었다. 사바나는 채플힐에서 학업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에서 유엔 소식과 다른 유럽국가들이 우리가 이라크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제지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읽었다. 나토 동맹국들은 긴장감이 흘렀다. 뉴스에서는 각국의 시민들이 시위를 했고, 각국 정상들은 미국이 엄청난 실수를 범하려고 한다며 강력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사이, 우리 지도자들은 생각을 전환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분대원들은 맡은바 본분에 충실히 하며 비장의 각오로 불가피한 전쟁에 대비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1월에 나는 분대원들과 함께 코소보에 재투입되었다. 그렇게 오래 주둔하지는 않았지만 긴 시간이었다. 그쯤엔 나도 발칸반도가 짜증이 났다. 평화유지활동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보다도, 군에 있는 우리들은 유럽의 바람과 상관없이 중동에서 곧 전쟁이 터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기간에도 사바나의 편지는 꾸준히 오는 편이었다. 나 역시 사바나에게 꾸준하게 전화를 넣었다. 나는 평소대로 동트기 전에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면 그녀가 있는 지역 시간으로는 자정 정도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늘 그 시간에 꼭 통화가 연결됐지만, 그녀가 집에 없을 때도 몇 번 있었다. 그녀가 친구들을 만나거나 부모님과 외출을 했다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점점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그녀가 좋아하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가끔은 연이어서 두, 세 배 더 많이 전화시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전화벨이 계속이 울리고 사람이 안 받자 서서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녀가 마침내 전화를 받으면 어디에 있었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그녀 또한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 실수였다. 자꾸 궁금증만 증폭되었고, 심지어 통화를 하는 가운데에도 통화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통화를 하면서도 서먹함을 느꼈고, 그녀 역시 부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애정을 교환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 사무적인 통화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전화를 끊으면 나는 늘 내가 품은 질투심에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리고 그 후 이틀간 내 자신을 나무라며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는, 사바나가 예전에 내가 알던 바로 그대로의 모습이 되어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예전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의 그 순수했던 시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소원해질수록,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예전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모습을 지켜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악순환처럼, 내 집착은 오히려 우리 사이를 더 벌여놓았다. 우리는 다투기 시작했다. 두 번째 휴가 때 그녀의 아파트에서 다퉜을 때처럼, 나는 그녀에게 내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그녀에게 다시 설득당하는 느낌을 받거나, 심지어 그녀가 내 고민을 덜어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내 질투심보다 이런 전화통화가 더더욱 싫었다. 물론 그 두 가지가 뒤틀려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고비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사바나와 함께 하는 삶을 기원했으니까. 12월에는 더 자주 전화를 걸었고, 전화할 때마다 질투심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경쾌하게 했다. 그런 목소리를 그녀가 바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표면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나흘 전, 나는 그녀에게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도 일 년이 채 안 남았다고 상기시켜주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반가운 목소리 대신, 그녀는 말이 없었다. 들리는 거라고는 그녀의 숨소리뿐이었다. 『듣고 있어요?』 『네.』 그녀가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 『그런데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요.』 사실이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 거의 일주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해 첫날에 보름달이 떴다. 나는 밖으로 나가 달을 보며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하게 된 그 날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거렸다. 그리고 지금 내 슬픔에 묻혀 흐릿하게 떨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돌리고 오는 길에, 여러 명의 동료들이 원을 두르고 서 있거나,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나에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내가 지나갈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내 인생에서 소중한 전부를 잃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감지했을까? 아니면 또다시 과거를 바꾸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았을까? 모르겠다. 또, 그들도 묻지 않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다리던 명령이 다음날 아침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분대는 터키에서 이라크 북부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작전회의를 하며 임무를 하달받았고, 전투 계획을 검토했다. 개인적인 시간은 거의 없었지만, 캠프 밖으로 용케 나가더라도 현지인들의 적개심 품은 눈길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우리는 터키가 우리 군이 자국을 침공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거란 소문과, 그 허용 여부를 두고 물밑 접촉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 소문을 믿지 않은 지 이미 오래 전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소문 그대로였다. 우리 분대와 다른 분대들도 쿠웨이트에 배치되어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구름한점 없는 늦은 오후에 상륙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방위가 모두 모래였다. 그리고 바로 버스로 옮겨 타고 수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텐트촌의 도시였다. 군에서는 편의를 제공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음식도 좋았고, PX에도 필요한 물건은 거의 다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따분했다. 우편배달은 형편없었고(나는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 전화라도 하려면 끝도 보이지 않는 줄을 서야했다. 훈련 중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언제 침투가 시작될지를 생각하거나, 화생방복을 누가 더 빨리 입는지를 연습했었다. 우리 분대의 계획은 다른 사단에서 온 부대들이 바그다드에 화력을 모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었다. 이미 사막에서 엄청난 시간을 보낸 느낌을 받은 2월이 되자, 우리 분대는 만반의 준비태세를 다 마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11월 중순부터 많은 군인들이 쿠웨이트에 집결해 있었고, 소문도 극에 치달아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나는 생화학무기에 관한 소식을 들었고, 사담 후세인이 「사막의 폭풍(1991년 걸프 전쟁 시 다국적군의 작전명)」에서 뼈아픈 교훈을 받은 나머지, 최후의 혈전을 기대하며 바그다드 주변에 공화국 수비대로 방어선을 치며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3월 17일이면 전쟁이 터질 것을 알고 있었다. 쿠웨이트에서 마지막으로 있던 밤, 나는 살아오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는 아버지에게, 하나는 사바나에게 썼다. 그날 저녁, 나는 이라크까지 160킬로미터로 늘어선 호위 선상에 서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전투가 산발적이었다. 우리 공군이 하늘을 점령한 상태여서, 우리가 주로 사막으로 에워싸인 고속도로를 지나갈 때, 머리 위로 두려울 건 거의 없었다. 이라크의 육군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나중에 우리 분대가 전투를 벌일 때 어떤 상황에 치닫게 될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어 긴장감만 주었을 뿐이다. 여기저기서 적의 박격포 사격이 있다고 소리쳐서 서둘러 복장을 챙기면, 잘못된 경보이기 일수였다. 사병들은 늘 긴장해있다. 나도 사흘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라크로 깊숙이 들어가자 전투가 개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라크 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민간인과 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총소리가 들리면 우리도 공격을 했다. 심지어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쏘는지 모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수니 삼각지대에 들어서자 교전은 더욱 거세졌다. 우리는 팔루자, 라마디, 티크리트 지역의 전투 상황도 들었다. 그곳은 모두 다른 사단의 부대가 싸우고 있었다. 우리 분대는 사마와 지역을 폭격하는 82 공수 사단과 합류했다. 우리 분대가 처음으로 전투다운 맛을 본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공군이 전날부터 폭탄과, 미사일, 박격포로 포격하며 길을 내었고, 우리는 다리를 건너 시내로 진입을 했다. 내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도시가 적막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분대는 도시의 외지에 배치되어 집집마다 수색하며 적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동해 갈수록 적의 피해가 속출했다. 불길에 검게 그을린 트럭과, 그 옆에 자지러진 운전수의 시신, 일부 무너진 건물,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파괴된 자동차들이 보였다. 산발적인 소총 사격에 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가 순찰을 하면, 민간인들이 팔을 치켜들고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부상자들을 구조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이른 오후가 되어 철수 준비를 갖출 쯤, 우리는 거리 위의 한 건물로부터 무자비한 포격을 받았다. 우리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위태로운 위치에 처해있었다. 두 사람의 엄호를 받으며 나는 나머지 분대원들과 총알 세례를 피하며 거리 반대편의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한사람도 죽지 않은 걸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적지에 천회분의 탄환을 퍼부으며 일제 사격을 가했다. 나는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어 분대원들과 조심스럽게 건물로 진입을 시도했다. 나는 정문을 폭파하기 위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리고 부하들을 문쪽으로 이동시킨 후, 나는 고개를 안으로 내밀었다. 연기가 자욱했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건물 안은 파괴됐지만 적어도 이라크 병사 한 명이 살아있었다. 우리가 다가서려는 순간, 바닥 밑의 좁은 공간에 있던 그가 총을 쏘기 시작했다. 토니가 손에 총을 맞았다. 그러자 우리는 수백발의 탄환을 퍼부으며 응사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소리지르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손가락에 힘을 준 채 바닥에서 벽으로, 다시 천장으로 총을 겨누었다. 실내가 초토화 되며 벽의 석고 덩어리와, 벽돌, 나무 조각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침내 사격이 끝나자, 생존자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확인 사살 겸, 수류탄 하나를 바닥의 좁은 공간에 던졌다. 우리는 폭발을 피해 밖으로 이동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격렬했던 이십 분의 체험이 끝나자,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 귀의 윙윙거리는 소리와, 부하들의 구토하는 소리, 욕하는 소리, 조금 전의 상황을 되새기는 말들 밖에 없었다. 나는 토니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모든 분대원의 안전을 확인한 후, 우리는 왔던 길로 다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 군이 확보한 기차역에 다다르자, 모두 긴장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날 밤, 우리는 거의 6주만에 처음으로 우편꾸러미를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여섯 통의 편지가 와있었다. 그러나 사바나에게 온 편지는 한 통 밖에 없었다. 나는 희미한 빛을 받으며 편지를 읽어나갔다. 사랑하는 존에게로. 부엌에서 이 편지를 쓰는 거예요.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지금 나와 같이 있다면 이 말을 직접 전해줄 수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내 볼에 눈물을 흘리며 고심해서 글을 쓰고 있어요. 어쩌면 지금 하려는 말을 당신이 용서해줄 거라 믿으면서요. 당신으로선 정말 힘든 시기라는 거 알아요. 나도 전쟁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나요. 그리고 늘 겁이 나구요.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허겁지겁 찾아보면 당신이 이런 와중에 있고, 당신이 어디에 가 있고,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요. 당신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매일밤 기도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우리가 나눈 추억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당신이 절대 그 추억을 잊지 않길 바래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존, 당신은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고,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것 보다도, 당신을 사랑하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지난 2년 반동안,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보름달을 보며 우리의 추억을 떠올렸어요. 첫날밤을 보내며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과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던 날이 생각나요. 그와 같이 우리끼리만 나누었던 추억을 늘 기쁘게 회고할 거예요. 우리의 영혼이 늘 하나가 되어서요. 그 외에도 너무 많아요. 눈을 감으면 당신의 얼굴이 보여요. 그리고 걸으면 당신이 내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그런 것들이 내겐 생생해요.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것이 포근했다면, 지금은 아프기만 해요. 당신이 군에 남기로 한 거 이해해요. 그리고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구요. 지금도 그렇구요. 하지만 우리 모두 알잖아요. 그 후로 우리의 관계가 변했다는 걸요. 우리는 변했어요. 당신도 그건 인정할 거라고 믿어요. 어쩌면 떨어져 지낸 시간이 오래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어쩌면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모르겠어요. 우리가 싸울 때마다 나는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어쩐지 둘을 끈끈하게 묶어주던 유대감은 잃어버린 것 같아서요. 내 말이 핑계처럼 들릴 거란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딴 사람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거 믿어주세요.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는데 당신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 나를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진 않아요.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순 없었어요. 거짓말은 우리의 추억까지 훼손할 테니까요.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당신이 배신감을 느끼겠지만요. 당신이 나랑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나를 증오한다는 걸로 이해할게요. 나도 내 자신이 싫거든요. 이 편지를 쓰면서도 그점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거울을 보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가 보여요. 진심이에요. 이런 말 듣고 싶지 않겠지만, 당신은 늘 제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함께 했던 때, 당신은 내 마음에서 특별한 자리를 맡은 주인이었어요. 앞으로도 그 자리를 내주지 않고 당신을 영원히 간직할 거예요. 당신은 영웅이고, 신사에요. 당신은 상냥하고 정직한 사람이에요. 그 보다도, 당신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첫사랑이에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늘 당신은 내 사랑일 거예요. 내 삶도 당신이 있어서 더 나을 테니까요.
정말 미안해요... 사바나가. Sixteen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간,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먹으로 벽을 치고 싶었다. 대신, 편지를 구겨서 옆으로 던졌다. 나는 분노 이상으로 치달았고, 배신감을 넘어, 의미를 부여한 세상의 모든 것을 그녀가 짓밟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를 훔쳐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를 증오했다. 길에서 그 남자를 만난다면 어떻게 할 지 상상했다. 그다지 그림은 예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었다. 아니면 최소한, 전화라도 걸고 싶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한 모든 날을 돌이켜 보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9개월 정도를 남기고 있었던 우리다. 거의 3년의 시간을 이겨냈었다. 하지만 집으로 가지는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답장도 쓰지 않았고, 그녀에게 다시 편지가 오는 일도 없었다. 나는 구겨서 버린 편지를 다시 주어왔다. 편지지를 반듯하게 펴서 봉투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전투하다가 생긴 상처처럼 지니고 다니기로 했다. 그 일로 몇 주가 지난 후, 나는 완전한 군인으로 탈바꿈하여, 여전히 생생한 유일한 현실로 도피했다. 나는 위험이 따르는 모든 임무에 지원을 했고, 부대에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찰을 나가면 방아쇠를 빨리 당기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 써야했다. 시내에서 마주치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군에서 민간인 사망으로 부르길 좋아하는 불행한 사고는 없었지만, 그 어떤 이라크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참을성을 가지고 분별력있게 행동했냐고 따진다면 나는 거짓말을 할 것이다. 잠은 거의 한숨도 못 잤지만, 우리가 선봉에 서서 바그다드로 계속 진출할 때까지 내 정신력은 아주 최고의 상태였다. 웃긴 건, 목숨을 건 행동을 해야만 사바나를 잊을 수 있었고,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인생도 급격히 변동하는 전쟁의 운세에 맡겨지고 있었다. 편지를 받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바그다드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희망이 보이긴 했지만 여러 주가 흐르고, 몇 개월이 지나자 일은 복잡하게 꼬여갔다. 결국에는 이 전쟁도 다른 전쟁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란 이윤을 다투면서도 결국엔 힘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관계가 현지의 생활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바그다드 함락 후, 우리 분대원 전원이 경찰이나 재판관으로 몰락했다.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말 그대로 군인에 불과했다. 외부에서 일을 지켜보고 나서 우리의 활동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현실에서 실시간으로 보면, 일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민간인들이 나에게 접근해서 누가 이런저런 물건을 훔쳐갔고, 이런저런 범죄를 저질렀으니 어떤 조치를 취해달라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허울뿐인 질서를 지키려고 그곳에 있었다. 즉, 이곳에서 자치권이 양도되어 그들 스스로 정부를 지켜낼 수 있을 때까지는 우리 군이나 민간인을 죽이려고 하는 반군들을 진압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특수한 과정은 빠르게 착수되지도 않았고, 쉽지도 않았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혼란하다기 보다는 조용할 때가 더 많았다. 한편, 다른 도시들은 와해되어 혼란으로 치달았고, 우리는 질서회복을 위해 파견되었다. 우리가 반군이 점령한 도시를 소탕하더라도 그 도시를 수호할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반군은 얼마안가 다시 그 도시를 점령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것이 실효성이 있을까 가끔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요점만 말하면, 지난 9개월간의 스트레스나, 따분함, 혼란함을 달리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모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렇다. 사막이다. 사막이긴 하다만... 나는 해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당연히 모래에는 익숙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곳의 모래는 달랐다. 모래는 옷에 들어갔고, 총 속으로, 밀봉된 상자 속에도, 귀에, 코에, 치아 사이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침을 뱉으면 늘 입에 모래 알갱이가 씹혔다. 적어도 그 정도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 있었던 사실은 안 들으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령, 이라크는 대체적으로 상황이 나쁘지 않지만, 일이 악화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원 중 한 사람이 사고로 멀쩡한 아이를 쏴서 죽였다고 하면 내 말을 들으려 할까? 바그다드로 통하는 길목에서 급조된 사제 폭발장치를 건드려서 군인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은 모습을 봤다고 하면 믿을까? 떨어져간 몸뚱이에서 피가 흘러, 마치 비가 온 듯, 길가에 피가 흥건하게 고인 모습을 봤다고 하면 믿을까? 아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모래 이야기를 들으려 할 것이다. 그래야 전쟁이 먼발치에서 안전하게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질 테니까. 나는 내 본분을 충실히 다 했고, 다시 연장복무를 신청하며 2004년 2월까지 그곳에서 주둔하며 마침내 독일로 복귀했다. 나는 독일로 오자마자 할리를 한 대 구입해서 전쟁에서 멀쩡하게 돌아온 척하며 지냈다. 그러나 쉴새없이 악몽을 꿨고, 아침이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을 때가 많았다. 낮에는 늘 긴장하며 살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화를 내기 십상이었다. 독일에서 거리를 걸으면 건물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게 되었고, 상권에 들어서도 저격수들이 있지 않나 싶어 창문을 불안하게 살펴야 했다. 정신과 의사는 - 누구나 의례적으로 상담을 받아야 했다 - 내가 정상이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었다. 이라크를 떠나온 후 독일에서의 생활은 거의 무료했다. 물론, 아침에 운동도 하고, 무기나 항해술에 관한 교육도 받았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었다. 손에 부상을 입은 토니는 바그다드 함락 후 상이군인훈장을 달고 곧장 브루클린으로 돌아갔다. 2003년 말, 본분을 다 한 네 명의 동료가 다시 영예롭게 전역을 했다. 그들도 남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반면, 나는 다시 연장복무를 신청했다. 올바른 결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달리 할 일도 없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내 분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낯설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두 신참들이었다. 물론, 다들 훌륭했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신병훈련소나 발칸반도에서 함께 생활한 친구들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전쟁을 겪지도 않았다. 내심, 나는 그들이 예전의 분대원들만큼 가까워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운동도 혼자 했고, 가급적이면 개인적인 접촉은 회피했다. 내가 지나갈 때 분대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성격 까칠한 나이든 하사였고, 그들을 무탈하게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기만을 바라는 그런 존재였다. 훈련할 때마다 내 분대원들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생활과 같지는 않았다.
친구들이 가버리고, 나는 가급적이면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여러 차례의 전투를 겪은 2004년 봄,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장기간의 휴가를 보냈고, 그해 여름에 다시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지난 10년보다 이번 4주간의 시간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은퇴를 하셨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쉽게 빠져들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동네를 세 블록 걸었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 사이에 남는 시간은 동전 얘기를 했고, 심지어 내가 시내에 있는 동안 동전 두 개를 구입하기도 했다. 인터넷은 이런 과정을 예전보다 훨씬 편리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료를 검색하는 일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다. 나는 15년 만에 만나는 동전수집가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예전처럼 다정하게 정보를 주었고, 아주 반갑게 나를 기억해주었다. 동전 수집가들의 세상은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주문한 수집품이 도착했을 때(동전은 늘 하룻밤 사이에 선적되어 배달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번갈아가며 동전을 살피며 흠을 찾아내기도 했고, 동전의 질을 감정하는 회사인 PCGS(Professional Coin Grading Service)에서 매긴 등급을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편이었다. 마침내 시간이 한참 지나 내가 딴 생각이 들어도, 아버지는 동전에 인생의 비밀이라도 숨어있는 듯이, 수 시간 동안 동전 하나만 빤히 들여다보셨다. 우리는 그다지 많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이라크에 관해서 애써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 역시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에 관한 한, 우리는 서로 할 말이 없었다. - 이라크는 그런 생활을 영위하게 허용하지 않았다. - 우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였다. 나는 애써 묻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산책을 하실 때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느릿한 걸음걸이에 비하면 20분이 너무 길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이 그 정도는 필요한 시간이라고 말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달리 아버지에게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급격하게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얼굴의 짙은 색조가 한 시간은 지나야 사라지곤 했다. 의사에게 찾아가 그 말을 전했지만, 내가 바라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버지의 심장은 큰 손상을 이미 견디었다고 했다. 지금 걷고 있는 것도 상당한 기적이며, 운동부족이 오히려 아버지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의사와 대화를 나눠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아버지와의 발전된 관계를 내가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두 차례의 휴가는 다른 때보다 우리 부자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지속적인 대화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 서재에 같이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자 맞추기 퍼즐을 했고, 아버지는 동전을 살펴보셨다. 내 기대치를 줄이니 평화롭고 정직한 점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서서히 우리 사이에 새롭게 형성된 변화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버지가 내 얼굴을 낯설게 훔쳐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보냈고, 그런 사이에 조용히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아직까지 버리지 않았길 바랬다. 그리고 독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나는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 것 같았다. 2004년의 가을이, 겨울이 되고, 다시 2005년의 봄으로 서서히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군 생활도 평온무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가끔은 우리가 이라크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내 단조로운 생활이 깨지긴 했지만, 이미 경험을 한 나로서는 크게 마음이 동요되지는 않았다. 독일에 남게 되어도 나는 상관없었다. 이라크로 돌아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동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을 덮고, 텔레비전을 끄는 순간, 내 마음은 딴 곳으로 팔렸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여덟살이었다. 내 또래에 비해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멈춰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군에서 인생을 깨달았고, 내가 내린 올바른 결정이었지만, 가끔은 의구심이 생겼다. 나는 집 한 채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었다. 아버지 외엔 아무것도 소유한 게 없었다. 나는 이 세상의 외톨이였다. 내 동료들은 지갑에 자녀들이나 아내 사진을 끼어 넣고 다니지만, 내 지갑에는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색 바랜 사진 한 장 밖에 없었다. 그들은 미래의 포부를 말하지만, 나는 그런 계획이 없었다. 어떤 때는 내 부하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들이 나를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쳐다볼 때도 있었으니까. 나는 이제껏 그들에게 내 지난 과거나 개인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사바나나, 우리 아버지, 토니와의 우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기억은 누구와도 소유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었다. 가끔은 비밀로 간직하는 게 가장 좋은 법이었으니까. 2005년 3월, 아버지는 다시 심장발작을 일으켜서 폐렴으로 전이되었고, 한동안 중환자실에 입원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퇴원했지만, 아버지는 복용중인 약으로 인하여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의 사회복지사가 사람을 알선해주어 식료품을 구입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4월이 되어 다시 입원을 하셨다. 이번에는 일상적인 산책을 단념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5월에는 하루에 열 개도 넘는 약을 복용해야 했고, 거의 침대에만 누워계셔야 했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는 거의 판독이 어려웠다. 편지 쓸 힘이 없는 것도 이유지만, 벌써부터 손이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이웃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찾아봬 줄 것을 통사정했다. - 이웃은 지역 병원의 간호사였다. - 결국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6월 휴가날짜가 다가오기만을 세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몇 주 동안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매번 아버지와 전화 통화할 때마다 아버지의 지친 기색은 역력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고향으로 전출신고를 요청했다. 우리 부대장은 전보다는 다소 동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함께 방법을 찾아보았다. - 내가 포트 브래그 기지에 배치되어 공수훈련을 받을 수 있는 서류까지 구비해주었다. - 그러나 내가 의사를 만나 다시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내가 아버지와 가까이에 있는 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고려해 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집보다는 그곳에서 더 많은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의사는 아버지에게 한동안 이점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 그때까지 아버지는 수프만 드셨다 - 아버지는 내가 휴가 나올 때까지는 재고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의사 말로는, 아버지는 내가 마지막으로 한번만 집으로 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동안, 나는 의사의 말이 과장됐다고 스스로를 확신시켰다. 그러나 그는 과장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던 일 년 사이에, 아버지는 30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피부는 거의 핏기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체중이 많이 빠진 것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목이 메여와 가방을 문 안에 그냥 내려놓았다. 『아버지, 저 왔어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를 못 알아볼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운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존 왔구나.』 나는 소파로 가서 아버지 옆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아버지는 이 말밖에 없으셨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살펴보러 걸어갔다. 그러나 부엌에서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 먹은 수프 깡통들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오븐에는 얼룩이 묻어있었고, 쓰레기가 넘쳐흘렀다. 그리고 곰팡이 핀 접시들이 싱크대에 쌓여있었다. 열어보지 않은 우편들이 작은 부엌 식탁에 수북하게 놓여있었다. 집청소를 며칠째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순간, 나는 아버지를 돌봐줄 것을 약속했던 그 이웃에게 당장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 일이 급한 건 아니었다. 우선, 나는 닭고기 면 수프 깡통을 지저분한 오븐에 올려놓고 불을 켰다. 그리고 내용물을 그릇에 부은 후 쟁반에 담아 아버지에게 가져왔다. 아버지는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고마움을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릇을 삭삭 긁어서 마지막 한입까지 다 드셨다. 나는 한 그릇을 더 퍼서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굶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아버지가 음식을 깨끗이 다 비우자, 나는 아버지가 소파에 눕도록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곧장 잠이 들었다. 그 이웃은 집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엌과 욕실부터 시작해서 집청소를 하며 남은 오후와 저녁을 보냈다. 아버지의 침대 이불을 갈려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이불에 변이 묻어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이웃의 목을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집청소를 다 끝내고 나는 거실로 돌아와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 아버지의 체구는 아주 왜소해 보였다. 아버지의 머리를 쓰다듬자 한웅큼의 머리카락이 빠졌다. 순간, 울음이 터졌다.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다는 현실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우는 것도 몇 년 만에 처음이었고, 아버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처음이었다. 울음은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착하고, 정많은 분이셨다. 상처를 받은 분이긴 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나를 길러주셨다. 그는 단 한 번도 화를 내며 손을 든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탓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던 기억을 떠올리니 내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휴가를 받아서 집에 왔던 지난 두 차례가 생각났다. 아버지와 다시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나는 아버지를 침대로 옮겼다. 팔에 안긴 아버지는 너무 가벼웠다. 아버지를 이불로 덮어 주고, 나는 바닥에 내 잠자리를 만들었다. 아버지의 새근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깨어나 기침을 하셨고, 기침은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준비를 하는 동안, 아버지의 기침은 마침내 멎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로 데리고 갈 지를 파악하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기...있자꾸나.』 아버지가 간청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가고 싶지 않아.』 가슴이 메여왔다. 결국 나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지 않았다. 늘 같은 생활을 하셨던 분에게 병원이란 낯설고도 위험한 곳이었다. 병원이란 아버지에게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그런 곳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이불에 변을 봤다는 생각이 든 것도 바로 그때였다. 다음날 이웃이 찾아왔을 때, 그녀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사과였다. 그녀는 딸이 아파서 며칠간 부엌을 치우지 못했지만, 이불은 매일 와서 갈아주었고 통조림 음식도 충분히 비치해 두었다고 말했다. 현관 앞에 선 그녀의 얼굴은 지쳐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그동안 그녀에게 품고 있던 원망감이 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가 베푼 은혜만이라도 이미 감사하다고 전했다.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떠들어도 한 번도 불평을 하신 적이 없으셨지.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어딜 가야하는데, 그 경비를 모아야 한다고 아무런 물건이나 가져와 팔아도 아버지는 그때마다 우리 애들의 물건을 사주셨어. 아버지는 집 마당도 잘 관리하셨단다. 그리고 집 좀 봐달라고 부탁하면 늘 들어주셨어. 아버지는 정말 우리에게 완벽한 이웃이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이건 알아라. 네 아버지는 내가 집에 오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으셨어. 아버지는 내가 물건을 두거나, 청소하거나, 심지어 책상에 신문을 쌓아놓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지. 그러면 나는 보통 신경쓰지 않고 일만 했어. 그런데 아버지가 몸이 조금 괜찮을 땐, 나더러 집밖으로 나가라고 무섭게 굴더라고. 내가 아버지를 다그치려고 들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도 하셨어. 그래서 나는...』 그녀가 말을 흐리자, 내가 대신 그녀의 말을 정리해주었다. 『난감했겠죠.』 그녀의 얼굴에 죄책감이 드리워졌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잖아요.』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리셨다. 『네가 집에 와서 다행이야.』 그녀는 주저하며 말을 다시 꺼냈다. 『안그래도 네게 아버지 얘기 좀 하려고 했다.』 그녀는 옷에 묻은 보풀을 털어냈다.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가면 네 아버지를 잘 보살펴줄 수 있을 거야. 간병인들도 아주 훌륭하지. 거긴 늘 수용인원이 꽉 차있지만, 내가 그곳 원장을 알아. 그 원장도 네 아버지의 주치의를 알고 있단다. 이런 말 듣고 있는 게 힘들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아버지에겐 그게 최선책인 것 같아. 그리고 나도...』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채 마치지 못했지만, 나는 아주머니의 진심어린 배려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니까. 집은 아버지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곳이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아버지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라면, 강제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버지에게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어디에서 돌아가시느냐가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죽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변이 묻은 이불을 덮고 혼자서 굶어 죽을 집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두려움을 느끼는 곳이지만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주고 씻겨줄 사람들이 있는 곳이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물었다. 『그곳이 어디에 있어요?』 나는 그 후 2주간, 아버지의 병상을 지켜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정성들여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주었고, 아버지가 일어나시면 「그레이시트(Greysheet)」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 잠자리를 만들고 같이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이불에 변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성인용 기저귀를 사달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오후 내내 잠을 잤다. 아버지가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많은 요양원을 찾아 다녔다. 이웃 아주머니께서 추천한 곳을 비롯해서 반경 두 시간 내에 있는 곳이라면 다 찾아다녔다. 아주머니의 말씀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말씀하신 곳은 청결하고 간병인들도 전문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보다도, 그곳 원장은 우리 아버지의 간병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웃 아주머니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아버지의 주치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용이 문제되지는 않았다. 요양원의 비용은 엄청나게 비쌌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부 연금과, 사회보장제도, 노인의료보험, 개인의료보험까지 들고 있었기 때문에 (몇 년 전, 어떤 용도로 돈을 내는지도 모른 채 보험 외판원의 깨알같은 글씨에 서명을 했을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유일한 비용은 마음가짐이라고 나는 다짐했다. 원장은 - 사십대로 갈색 머릿결을 가진 이 분의 친절한 매너는 어쩐지 팀을 연상시켰다 - 이해심이 넓었고,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는 한 무더기의 정보지와 분류된 서류지를 건네주며 아버지의 쾌유를 기원해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요양원 얘기를 꺼냈다. 며칠 뒤면 내가 귀환해야 하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전했다.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그런 결정을 한 내 동기와, 염려, 그리고 아버지가 이해해주리라고 희망한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막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충격으로 동공이 열려 있었다. 얘기를 마치자, 정말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었다. 아버지의 다리를 토닥거리며 물 한잔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갔다. 거실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소파에서 몸을 구부린 채 바닥을 내려다보시며 떨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는 아침에 아버지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랍과, 파일, 찬장과 옷장을 뒤지며 물건을 챙겼다. 양말 서랍에는 양말이 있었다. 셔츠 서랍에는 셔츠만 있었다. 아버지의 서류함에는 모든 것이 이름표가 달려서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튼 놀라웠다.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아버지는 비밀스런 물건들이 전혀 없었다. 숨겨둔 마약도 없었고, 일기도 없었고, 당혹스러운 음흉한 물건도 없었으며, 혼자만 간직해온 개인적인 사물함도 없었다. 아버지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분이셨다는 걸. 그리고 문득, 그런 모습의 아버지를 내가 감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짐을 다 챙길 쯤, 소파에 누운 아버지는 깨어 있었다. 며칠 간 규칙적인 식사를 해서 아버지는 다소 기운을 차리셨다. 아버지의 눈에는 희미하게나마 빛이 감돌았다. 소파 옆 테이블에 삽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종이 쪼가리를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성급하게 그려낸 지도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과, 그 지도에「뒷마당」이라는 글씨가 떨리는 필체로 적혀있었다. 『이게 뭐에요?』 『네 꺼야.』 아버지는 삽을 가리켰다. 나는 삽을 집어들고 뒷마당 참나무로 이어지는 지도의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가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몇 분도 채 흐르지 않아 삽에서 금속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상자 밑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모두 열여섯 개의 상자가 나왔다. 나는 현관에 앉아 땀을 닦고 나서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나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이미 알 것 같았다. 남부 여름의 따가운 햇살에 금화들이 빛나자 눈이 부셨다. 상자 밑에는 클리블랜드 조폐소에서 1926년에 제작된 버팔로 문양이 새겨진 5센트 동전이 있었다. 이 동전은 우리가 함께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동전으로, 나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유일한 동전이었다. 휴가 마지막 날인 다음날, 나는 집 정리를 했다. 전기나 수도시설물을 잠그고, 우편은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고, 잔디를 관리해줄 사람을 찾았다. 땅에서 꺼내지 않은 동전들은 은행의 귀중품 보관함에 맡겼다. 잡다한 것까지 신경쓰다 보니 거의 하루가 다 지났다. 우리는 마지막 저녁 식사로 닭고기 면 수프와 연한 채소 요리를 먹었다. 그 후, 나는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나는 아버지의 짐을 풀고 아버지가 좋아하실만한 물건들로 방을 꾸몄다. 책상 밑에는 십 년도 넘은 「그레이시트(Greysheet)」를 두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한 생각이 들어 원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잡다한 물건까지 챙겼다. 물건을 챙기는 내내, 아버지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뭘까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안심을 시켜도 아버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길에 가슴이 찢어졌다. 내가 아버지를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었다. 이제 공항으로 갈 시간도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아버지 옆으로 가 침대에 앉았다. 『괜찮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저 사람들이 아버지를 돌봐줄 거예요.』 아버지의 손은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그래.』 아버지는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할 말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나는 숨을 들이키며 생각을 모았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버지에요. 저같은 놈을 잘 참고 견디셨잖아요.』 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평생을 두고 하고 싶었던 말들이... 『아버지, 진심이에요. 지난 시절 제가 했던 모든 점을 사과드리고 싶어요. 아버지와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도 미안하구요. 아버지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분이에요. 저한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 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한 번도 저를 나무란 적이 없으세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인생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어요. 지금 당장 아버지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저도 이러는 제 자신이 정말 싫어요. 아버지, 하지만 겁이 나요. 저도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목소리는 갈라지고 고르지 못했다. 아버지가 내 어깨에 팔을 얹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 아버지가 마침내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대답에 웃음을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랑해요, 아버지.』 아버지는 이다음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아버지의 한결같은 일상의 일부였으니까. 『나도 사랑한다, 존.』 나는 아버지와 포옹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그레이시트(Greysheet)』최신호를 갖다주었다. 나는 문으로 나서며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여기 온 후 처음으로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진 듯 했다. 아버지는 잡지책을 얼굴 가까이에 댔다. 들고 있는 페이지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아버지는 입술을 움직이며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Seventeen 아버지는 7주 후에 돌아가셨다. 나는 특별휴가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나는 그저 창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수천 피트 아래의 형체없는 잿빛 바다를 바라보자니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의 임종소식을 들은 후로 면도도 하지 못했고, 샤워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내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항에서 집으로 차를 타고 가던 중,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일상적인 모습들에 화가 났다.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과, 걸어가는 사람들, 상점을 안팎으로 거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서야 모든 전기를 거의 두 달 전에 끊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길가에 불이 꺼진 우리 집은 을씨년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리고 나처럼... 그런 생각을 하니 문으로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문틀에는 윌리엄 벤자민이라는 변호사의 명함이 끼어져 있었다. 명함 뒤에는 우리 아버지를 대리한다고 적혀있었다. 집전화를 끊은 상태여서 나는 이웃집에서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서류가방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나는 침침한 집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는 소파에 앉았다. 그가 입은 정장은 내 두 달치 월급보다 더 비싼 옷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한 후 위로의 말을 전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자네 아버님이 좋은 분이셨기 때문이네.』 그가 말했다. 『아버님은 내 첫 번째 고객 중에 한 사람이었지. 그러니 지금 이런 비용은 청구하지 않을 걸세. 아버님은 자네가 태어난 직후 유언을 작성하려고 나를 찾아왔었지. 그리고 해마다 같은 날에 자네 아버지가 보내준 동전 증명서를 우편으로 받아보았지. 그 증명서에는 아버지가 구입한 모든 동전들의 목록이 기재되어 있었어. 아버지에게는 유산세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지. 그래서 자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유산을 증여받고 있었다네.』 나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쨌건, 6주 전에 아버님이 나한테 편지를 써서 동전을 자네 소유로 해달라고 알려왔다네. 아버님은 모든 절차를 밟고 싶었던 게지.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버님의 유언장을 점검했지. 아버지가 거주하는 곳을 전해 들었을 때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네. 그래서 전화를 넣었지. 아버님은 그다지 많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원장과 대화할 수 있도록 내게 허락해 주었어. 그 원장은 자네 아버지가 임종할 시기와,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자네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준다고 내게 약속을 했다네. 그래서 지금 내가 자넬 찾아온 거라네.』 그는 서류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네가 장례 절차를 밟고 있다는 것도 알고, 적절한 시기도 아니란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 아버지가 그러더군. 자네가 여기에 오래 있지 못할 테니까 내가 대신 일을 처리해 달라고. 어쨌거나 이것들은 내가 쓴 게 아니고 자네 아버지가 쓴 거라네. 자, 여기 받아보게.』 그는 종이가 든 묵직한 봉투를 내게 건네주었다. 『아버지의 유언장과, 수집한 모든 동전의 목록이 여기 있고, 장례 절차 서류도 모두 여기 있네. 모두 비용은 미리 지불된 거라네. 부동산도 유언검인 승인을 받아놓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을 했었다네. 그렇지만 문제될 건 없을 걸세. 부동산도 작고 자네가 외동이니까. 필요하다면 나한테 말하게. 내가 사람을 구해서 필요없는 물건을 옮기거나 집을 처분하는 일을 맡길 테니까. 자네 아버지 말로는 자네가 그럴 시간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 그는 서류가방을 닫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 아버지는 좋은 분이셨다네. 대개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네. 그렇지만 자네 아버지는 매우 꼼꼼한 분이셨어.』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분이셨어요.』 변호사의 말대로, 모든 과정이 다 처리되었다. 아버지는 원하신 대로 무덤가에서 예식을 선택했고, 자신의 옷가지를 모두 매장하길 원했으며, 심지어 관도 직접 고르셨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았더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기대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오히려 아버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만 증폭되었을 뿐이다. 따뜻한 8월의 비내리던 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예전 직장 동료 두 분과, 요양원 원장, 변호사, 그리고 아버지를 보살펴주었던 이웃집 아주머니만이 장례식 예배에 참석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내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 갈기갈기 부서졌다 - 그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 오직 이 분들만이 아버지의 덧없는 삶의 마감을 지켜보셨다. 목사님이 기도를 마치며 더 할 말이 없냐고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나는 이미 목이 부을 때로 부어 말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힘없이 아버지의 침대 모퉁이에 주저앉았다. 비는 이미 그쳤고 잿빛 햇살이 창가로 스며들어왔다. 집은 쾌쾌하여 거의 곰팜이 핀 냄새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버지가 베던 베개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앉은 자리 옆으로 변호사가 갖다 준 봉투가 놓여있었다. 나는 내용물을 쏟아냈다. 다른 서류들과 함께 유언장이 맨 앞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그 밑에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책상에서 치웠던 사진이 틀에 끼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찍은 사진 중에서 남아있는 건 이것 밖에 없었다. 나는 사진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날 오후 늦게,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 루시가 찾아왔다. 그녀가 문간 앞으로 처음 들어섰을 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철없던 시절에 만났던 그을린 피부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서 있는 곳엔 실크 블라우스에 고급스런 검정색 팬트수트를 입은 여자만 있을 뿐이었다. 『존, 안됐구나.』 그녀가 나에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부둥켜안았다. 내 살과 맞닿은 그녀의 몸은 무더운 여름날에 마시는 시원한 물 한잔과 같았다. 그녀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살짝 풍겼다. 어떤 브랜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프랑스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신문 부고를 보고 왔어.』 그녀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내가 말했다. 나는 소파를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올래?』 그녀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녀의 결혼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쯤, 그녀가 의식을 한 듯 손을 움직였다. 『잘 안됐어.』 그녀가 말했다. 『작년에 이혼했어.』 『안됐구나.』 『그러게.』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 살았지?』 『그럼.』 나는 거짓말을 했다. 『잘 살았지.』 우리는 한동안 옛날 얘기를 꺼내며 대화했다. 그녀의 마지막 전화를 받고 내가 군에 갔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도 살아온 인생을 말해주었다 - 그녀는 디자인 일을 도우며 백화점에 소매점을 차렸다 - 그리고 이라크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나는 모래 얘기도 해주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더니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대화는 소멸해갔다. 우리 모두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때 가까웠던 사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서 다음 질문이 무엇인지 이미 알 수 있었다. 『너 사랑하는 사람 있지, 그렇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둔 채 창밖을 쳐다보았다. 창밖으로 하늘이 다시 컴컴하고 흐렸다. 비가 더 많이 올 것 같았다. 『응.』 『이름이 어떻게 돼?』 『사바나.』 『지금 와 있니?』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 『얘기 좀 해줄 수 있어?』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얘긴 꺼내고 싶지 않았다. 군에 있을 때 안 사실이지만, 우리 같은 이야기는 따분하기도 하고 뻔히 알 수 있는 내용이었고, 다들 얘기를 해달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듣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얘기를 듣던 그녀는 여러 번 내 손을 잡았다. 여태껏 내 속에 이것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그러나 말을 흐리자, 그녀도 내가 혼자 있고 싶다는 걸 눈치챈 듯 했다. 그녀는 내 뺨에 키스를 하고 가버렸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몇 시간동안 집을 서성거렸다. 이 방, 저 방을 거닐며 아버지를 떠올렸고, 사바나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낯설어 보였다. 그러다 서서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가볼 데가 또 있었다.
Eighteen 그날 밤,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비바람도 지나갔고 기온도 지독하게 높이 올랐다. 창문을 열어도 시원하지 않아 밤새 몇 시간동안 몸을 뒤척거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보니 벽에 부착된 나무판에 아버지의 자동차 열쇠가 걸려있었다. 나는 내 짐을 차 뒤에 싣고 집에서 가져갈 만한 물건들을 몇 개 가지고 나왔다. 사진 외엔 그다지 쓸만한 물건은 없었다. 짐을 다 실은 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말한 대로 사람을 구해 남은 짐을 옮기고 집을 처분해 달라고 부탁했다. 집 열쇠는 우편함에 넣어두었다. 차고에서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차를 후진시킨 후 차고 문을 닫고 열쇠로 잠갔다. 마당에서 집을 바라보니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제 이 집을 볼 수 있는 날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를 몰고 요양원에 들러 아버지의 유품을 챙긴 후, 윌밍턴을 벗어나 주간 연결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을 따라 쭉 뻗은 도로를 달렸다. 이렇게 쭉 뻗은 도로를 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어렴풋하게 길이 생각나긴 했어도 친근감이 밀려왔다.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벗어나 롤리를 거쳐 채플힐에 이르자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옛 생각을 잊으려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차는 벌링턴을 지나 그린스보로와 윈스턴세일럼을 달리고 있었다. 일찍 길을 나선 후, 주유소는 단 한 차례만 들리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곳에서 산 물병을 조금씩 들이켰지만 음식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옆 좌석에 놓여있었다. 이따금씩 사진 속에 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곤 했다. 어느덧 차는 북쪽을 향해 작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드넓은 대지에 살짝 치솟은 듯한 고속도로는 남북으로 펼쳐진 푸르스름한 정상의 산들을 끼고 돌았다. 늦은 오후가 되어 차를 세울 수 있었다. 나는 고속도로 바로 옆에 위치한 허름한 모텔에 방을 잡았다. 몸이 경직되어 스트레칭을 잠시 한 후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다. 깨끗한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은 후, 뭣 좀 먹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배는 아직까지 고프지 않았다. 해가 낮게 뜬 해안의 날씨는 전혀 후텁지근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침엽수의 향이 느껴졌다. 여긴 사바나의 고향이다. 어쩐지 그녀가 아직도 여기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부모님 댁으로 곧장 가서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생각을 떨쳐버렸다. 내가 찾아온 것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대신, 나는 르노아 거리를 지나 다양한 패스트푸드 식당들로 자리잡은 소매상가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조금 벗어나서야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이곳은 르노아에서 변화가 없었던 지역으로, 새로 이사를 오든, 관광을 오든, 언제든지 편하게 들릴 수 있는 곳이었고, 누구하나 외지인 보듯이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허름한 당구장 앞에 차를 세웠다. 당구장을 보니 예전에 죽치고 살았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창가에는 맥주를 선전하는 네온광고판이 걸려있었고, 주차장은 입구 밖까지 잔뜩 주차되어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내 궁금증에 답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실내로 들어갔다. 행크 윌리엄즈의 음악이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왔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네 대의 당구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고, 두 명은 볼에 씹는담배를 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트로피 배스(10pound(4.5kg)이상의 커다란 배스)가 나스카(NASCAR:전미 스톡 자동차 경주협회) 기념품들로 둘러싸인 채 박제되어 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탈라데가, 마틴스빌, 노스 윌케스보로, 록킹햄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나스카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사진을 보니 왠지 편안해졌다. 실내 바 한 귀퉁이로 고인이 된 데일 언하르트의 활짝 웃는 얼굴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 지역 암환자들을 위한 기부금을 바란다는 문구와 함께 현금으로 꽉 찬 병이 놓여있었다. 나는 예기치 않은 동정심이 들어 2달러를 병에 넣었다. 나는 바에 앉아 바텐더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내 또래였고, 말투를 들으니 사바나가 생각났다. 이십 분간 편안한 대화를 한 후, 지갑에서 사바나의 사진을 꺼내며 그녀의 집안과 알고지내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녀의 부모님 이름을 들먹이며 예전에도 알고 지냈던 것처럼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는 경계심을 낮추지 않았지만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시골에 살면 다들 지역민을 보호하기 나름이니까. 그러나 그도 해병대에서 2년간 복무를 했다고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여자 알아요.』 그가 말했다. 『부모님이 사는 집 옆에 올드밀 로드에 살고 있어요.』 저녁 8시가 조금 지났다. 하늘은 이내 땅거미가 졌다. 십 분 후, 나는 넉넉한 팁을 남기고 밖으로 나와 길을 나섰다. 말들이 뛰어다니는 시골길을 들어서자 이상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도 그랬던 생각이 났다. 오르막길을 오르자 눈에 익은 건물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사바나의 부모님 댁이 보일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바나의 부모님 댁이 보였고, 나는 운전대 앞으로 몸을 숙이며 다음에 나타날 갈림길을 찾았다. 그리고 담장 앞 갈림길에서 긴 자갈길로 이어진 길로 차를 돌렸다. 자갈길로 들어서자 손으로 직접 쓴 페인트칠의 「희망과 말들」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자갈이 바퀴에 밟히는 소리는 왠지 편안함을 주었다. 나는 버드나무 아래에 세워진 낡은 소형 트럭 옆에 차를 세웠다. 나는 집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가파른 지붕과 벗겨진 흰색 페인트칠,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굴뚝을 한 이 집은, 마치 유령의 집이 땅으로 치솟은 듯한 인상을 주었고, 백 년은 되어 보였다. 쓰러져가는 정문 위로 달린 전구 하나만이 불을 밝혔고,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성조기 가까이로 작은 화분이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에 흔들거렸다. 집 옆으로는 비바람에 풍화된 헛간과 작은 가축우리가 보였고, 그 너머로 에메랄드 빛의 목초지가 큰 참나무들로 이어진 작은 흰색 펜스로 에워싸여 있었다. 헛간에 떨어진 곳엔 오두막처럼 보이는 건물이 서있었다. 그늘진 곳을 보니 노화된 장비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기에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차마 차를 돌릴 수는 없었다. 해가 지평선으로 떨어지며 하늘은 석양의 빛을 토했고, 산새에 운치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신발 끝에 묻었고, 침엽수의 향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렸고 지빠귀가 간격을 두고 지저귀고 있었다. 그 소리에 힘입어 나는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면 어떤 말을 할까 궁리해 보았다. 아니면 그녀의 남자에게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리트리버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내가 손을 내밀자 개가 부드럽게 핥았고, 다시 걸음을 돌리며 계단을 유유히 내려갔다. 개는 집 주변을 돌며 꼬리를 쉴새없이 이리저리 흔들었다. 르노아까지 나를 이끌었던 똑같은 힘에 이끌린 채, 나는 현관에서 걸어 나와 개를 따라갔다. 개는 울타리 밑으로 배가 땅에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추며 빠져나와 헛간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개가 사라지자, 바로 사바나가 헛간에서 나왔다. 그녀는 양 팔에 네모난 건초더미를 끼고 있었다. 그녀가 구유통 여기저기로 건초를 던지자 목초지에 있던 말들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달려왔다. 나는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몸에 묻은 것들을 털어내며 다시 헛간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무심코 내 쪽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걸음 내딛으며 내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얼어붙어버렸다. 오랫동안 우리 둘은 꼼짝도 않고 그렇게 서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느끼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갑자기 지난 과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이후로 그녀는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그녀도 나처럼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이었고, 옷에는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낡고 닳은 카우보이 장화를 신고 있었다. 땀흘리며 산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은 지난번 보다 더 자라있었지만 내가 늘 좋아했던 앞니 사이의 작은 틈은 여전했다. 『사바나.』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환환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존?』 그녀가 소리쳤다. 『다시 만나서 기쁘네요.』 그녀는 정신을 모으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눈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믿음이 들자 대문으로 달려왔다. 잠시 후, 그녀가 나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품은 포근하고 편안했다. 순간,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대로 영원히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모든 환영이 깨지며 다시 어색해졌다. 나조차도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온 배경을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나는 시선을 피했다.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냥 와야 될 것 같아서요.』 그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만 궁금함과 망설임이 교차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필요없다는 듯이. 나는 뒤로 조금 물러서며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어둠 속으로 말들의 윤곽이 보였다. 나는 지난 며칠간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느닷없이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장례식을 끝내고 지금 온 거예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은 내가 한때나마 끌렸던 연민의 표정으로 이내 바뀌었다. 『아...존... 안됐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앞으로 다가서며 포옹했다. 이번에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얼굴이 조금 그늘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어린 슬픔이 배어났다. 나는 잠시 뜸을 드렸다. 지난 2년간의 일을 한순간에 정리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하려면 길어요.』 내가 말했다. 헛간의 불빛에 비친 그녀의 눈길은 그녀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었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들을. 내 손을 놓는 순간, 그녀의 왼쪽 손가락에 반짝이는 결혼반지가 보였다. 순간, 차가운 현실이 엄습했다. 그녀도 내 표정을 보았다.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결혼했어요.』 『미안해요.』 고개를 흔들며 내가 말했다. 『이렇게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요.』 놀랍게도 그녀는 손을 살짝 흔들어 저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동네가 작잖아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사람한테 물어봤죠.』 『그러니까... 그냥 말해주던가요?』 『말을 잘했죠.』 우리는 서로 어색해 하며 어떤 말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이대로 계속해서 서서, 마치 오랫동안 사귄 친구들처럼 헤어진 후 그동안 서로 못 했던 말들을 다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남편이 언제라도 불쑥 집밖으로 나와 내게 악수를 청하거나 싸움을 부추기를 바랬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말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헛간 불빛의 그늘진 그림자를 받은 채, 말 네 마리가 구유통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마이다스를 포함한 세 마리의 말들은 자신들을 챙기는 걸 그녀가 잊은 게 아니냐는 듯이 사바나를 응시했다. 마침내 사바나는 침묵을 깨며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쟤들 좀 봐줘야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식사 시간이 돼서 저렇게 촐랑거리는 거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하며 돌아섰다. 그녀는 대문으로 걸어가서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좀 거들고 싶나요?』 나는 집 쪽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그녀가 내 눈길을 따라갔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이는 지금 없어요. 그래서 도와준다면 저야 좋죠.』 뜻밖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녀는 내가 문으로 들어오자 문을 닫았다. 그녀는 퇴비더미를 가리켰다. 『말똥 조심해요. 신발에 묻으니까요.』 나는 짐짓 놀란 듯 웅얼거렸다.『잘 피해보죠.』 그녀는 헛간에서 건초를 한 다발, 다시 두 번 더 떠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냥 옆으로 가면서 구유통에 던지면 돼요. 저는 가서 귀리 좀 가져올게요.』 그녀가 말한 대로 하자, 말들이 다가왔다. 사바나는 들통 두개를 들고 왔다. 『조금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자칫하면 쟤들이 찰 수도 있거든요.』 내가 몇 걸음 물러서자 사바나가 들통을 우리에 걸었다. 말 몇 마리가 총총거리며 걸어왔다. 사바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먹이는 몇 번이나 먹이는 거예요?』 『매일 두 번요. 먹이 주는 건 일도 아니에요. 쟤네들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면 놀랄 거예요. 단축 번호를 눌러서 급하게 수의사를 부를 때도 있거든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일이 많아 보여요.』 『맞아요. 말 한 마리 기르는 게 닻을 내리고 사는 것과 같다고들 해요. 거들어 줄 사람이 없으면 주말이 돼도 외출은 힘들어요.』 『부모님들도 와서 도와주나요?』 『가끔요. 제가 꼭 필요할 때만 불러요. 그렇지만 아버지도 이젠 나이가 드셔서 말 한 마리 다룰 때와 일곱 마리 다룰 때 확연한 차이를 느끼세요.』 『십분 이해해요.』 따뜻한 밤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나는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애써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조용한 이 은신처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생각은 했지만, 당신이 살기에는 딱 맞는 곳이네요.』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생각보단 일이 훨씬 고되요. 손봐야하는 일도 끝이 없구요. 헛간은 비가 새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 지난 겨울에는 울타리일부가 크게 무너졌어요. 저건 우리가 봄에 수리를 해놓은 거죠.』 “우리”라는 말을 들으니 남편을 말하는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아직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보였다. 『그래도 여긴 아름다워요. 일이 많긴 하지만요. 나는 주로 이런 밤에 현관에 앉아서 세상의 소리를 경청하는걸 좋아해요. 자동차 소리도 거의 안 들리니까 너무... 평화로워요.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좋은 것 같아요. 긴 하루의 일과를 마쳤을 때는 더욱 그렇구요.』 그녀의 말에서 대화를 신중하게 고르려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겠네요.』 『말굽을 청소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도와줄래요?』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요.』 내가 말했다. 『쉬워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녀는 헛간으로 들어가서 굽은 모양의 작은 못 같은 것을 두 개 들고 나왔다. 그녀는 내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먹이를 먹고 있는 말 한 마리에게 다가갔다. 『그냥 말굽을 잡고 여기 다리 뒷부분을 톡톡 치면서 당기면 돼요.』 그녀가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건초를 먹느라 정신이 팔린 말은 고분고분하게 말굽을 들었다. 그녀는 다리 사이에 말굽을 걸쳤다. 『그리고 말굽 주변에 흙을 털어내면 돼요. 이게 다에요.』 나는 말이 있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서서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그러나 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은 몸집도 크지만 고집도 셌다. 나는 다시 다리를 당기고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몇 번을 더 그렇게 시도했다. 그러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만 먹어댔다. 『다리를 안 들려고 하는데요.』 나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잡고 있던 말굽 청소를 끝내고 옆으로 와서 내 말 앞에 몸을 숙였다. 그녀는 몇 번 톡톡 건드리고 다리를 당기며 말굽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끼었다. 『그럴 거예요. 저 놈도 당신의 손길이 어색하고 불편해 한다는 걸 아는 거죠. 자신감 있게 해야죠.』 그녀가 말굽을 내렸다. 나는 다시 시도해 보았다. 이번에도 말은 나를 무시했다. 『내가 하는 거 잘 봐요.』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계속 보고 있었어요.』 그녀가 시범을 다시 보이자 말이 다리를 들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가 했던 대로 정확하게 시연했다. 그러나 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의 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왠지 이 놈이 내가 끙끙거리는 걸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나는 집요하게 동작을 되풀이 했다. 그러자 마법처럼 말이 다리를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긴 하지만 마음 한켠이 뿌듯했다. 내가 여기에 온 후 처음으로 사바나가 웃었다. 『잘했네요. 이제 진흙을 긁어내고 다음 말굽도 그렇게 하세요.』 내가 한 마리를 잡고 말굽 청소를 끝내는 동안, 사바나는 여섯 마리를 마쳤다. 모든 일을 끝내고 그녀가 문을 열자, 말들이 깜깜한 목초지로 총총 걸어갔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사바나는 창고로 걸어갔다. 그녀는 손에 삽을 두 개 들고 있었다. 『이제 대청소 시간이에요.』 그녀는 삽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대청소요?』 『퇴비요.』 그녀가 말했다. 『치우지 않으면 주변에 쌓이거든요.』 나는 삽을 잡았다. 『매일 이렇게 해요?』 『사는 게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가 객쩍은 농담을 뱉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를 옮기더니 외발수레를 끌고 돌아왔다. 우리가 퇴비를 치울 무렵, 나무들 위로 달이 떠 은은하게 비추었다. 우리는 아무말 없이 일을 했다. 바닥을 긁는 삽의 딸그랑거리는 소리만이 리듬을 타고 울렸다. 일을 다 마친 후, 나는 삽에 몸을 기대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헛간 마당의 그림자에 가려진 그녀의 모습은 사랑스럽고, 보일듯 말듯 했다. 그녀도 아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나를 의식하고 있는 눈치였다. 『괜찮아요?』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존?』 『아까 물어봤잖아요.』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 나는 아직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몸의 체중을 다른 다리로 실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어요.』 놀랍게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묵인하에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정말이에요.』 나는 말했다. 『어쨌거나 가장 친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거든요.』 그녀의 표정은 이내 부드러워졌다.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대답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도 그 점은 느꼈을 것이다. 나는 주변 건물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바로 당신이 꿈꿨던 목장이죠, 그렇죠?』 내가 물었다. 『「희망과 말들」은 자폐아동들을 위한 곳이잖아요, 맞죠? 』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흘러내린 머리를 귓가에 끼어 넣었다. 그녀는 내가 아직도 기억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눈빛이었다.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동안 생각했던 것이 이게 전부에요?』 그녀는 두 손을 쳐올리며 웃었다. 『한동안은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세금 낼 정도의 수입도 안돼요. 우리 둘 다 직장은 있어요. 그리고 매일 느끼는 거지만 아직도 배움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오는 애들이나 자폐아 센터의 아이들은 다루기가 힘들어요.』 그녀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애들이 앨런과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을 했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앨런 얘기 했던 거 기억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앨런의 경우는 특별한 거예요. 걔가 목장에서 자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다른 애들보다 이곳에서의 적응이 훨씬 빨랐어요.』 그녀가 말을 멈추자 나는 호기심어린 눈길을 주었다. 『예전에 들었던 거와는 다르네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앨런이 처음에 두려워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요. 그렇긴 해도 앨런은 이제 적응이 된 거예요. 그게 중요하죠. 여기 적응하지 못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어주는데도 말이에요. 이런 일은 주말에만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일 년도 넘게 여기를 꾸준히 드나드는 애들도 있어요. 우리는 발달평가 센터에서 일해요. 그래서 많은 아이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죠. 우리가 이 목장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상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다 받아주자고 했어요.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어떤 애들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떤 때는 우리가 하는 일이 헛바퀴가 도는 느낌이 들어요.』 사바나는 기억을 더듬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시간 낭비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어떤 애들은 정말 효과를 보고 있거든요. 주말을 이용해서 두 차례 다녀가는데, 마치... 꽃봉오리가 서서히 피면서 마침내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만 같아요.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들의 마음이 새로운 생각과 가능성으로 개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애들이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타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표정들이죠.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여기에 오는 모든 아이들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들어요. 모든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은 끈기 외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어요. 어떤 아이들은 말 타기는 커녕, 말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해요.』 『당신 탓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나도 말타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거든요, 생각나요?』 그녀는 마치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네, 기억하죠. 당신이 말을 처음 탈 때는 여기 아이들보다 더 겁을 먹었죠.』 『겁먹었던 거 아니에요. 페퍼가 거칠어서 그랬던 거죠』 『참나! 그럼 내가 왜 그 녀석에게 타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 녀석은 생각보다 훨씬 쉬운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탔을 때는 그렇게 말이 동요하진 않았단 말이에요.』 『그 놈은 거칠었어요.』 나는 다시 한 번 고집을 피웠다. 『말 처음 타는 사람답게 말하네요.』 그녀가 놀렸다. 『당신 생각이 틀리긴 해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감동이네요.』 그녀의 장난기를 보자 옛 기억이 밀려왔다. 『당연히 기억하죠.』 내가 말했다. 『그때가 가장 좋았어요. 결코 잊을 수 없죠.』 그녀의 어깨 너머로 개가 목초지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아직까지 내가 결혼을 못 하고 있나 보죠.』 내 말에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나도 기억해요.』 『그래요?』 『그럼요. 못 믿겠지만 사실이에요.』 그녀의 말이 무겁게 허공에 맴돌았다. 『사바나, 행복해요?』 나는 마침내 말을 꺼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셈이죠. 당신은 안 그래요?』 『글쎄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웃었다. 『당신 대답은 늘 그래요. 뭔가 마음 속으로 답을 찾을 때요. 안 그래요? 반사적인 행동처럼요. 늘 그랬어요. 정말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봐요.』 『내가 정말 물어보고 싶은 거요?』 『내가 남편을 사랑하느냐 하는 거요. 그런 것 아니었어요?』 그녀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직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 온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맞아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내 표정을 읽으며 말했다. 『남편을 사랑해요.』 그녀의 말은 가슴이 아플 만큼 꾸밈이 없었다. 내가 생각에 잠기려는 차에 그녀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아픈 기억을 떠올린 사람마냥,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표정을 지워버렸다. 『식사 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방금 본 표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니요.』 내가 말했다. 『사실 아침, 점심도 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비프스튜가 조금 남았어요. 저녁 먹을 시간 돼요?』 그녀의 남편 생각이 다시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진흙이 묻은 낡은 카우보이 장화들이 놓여있는 현관까지 걸어왔다. 사바나는 내 팔을 잡고 균형을 잡으며 장화를 벗었다. 팔을 붙들고 있는 느낌은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손길에 힘입어 그녀의 얼굴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신비하고 조숙한 그녀의 얼굴은 늘 매력적이었지만, 동시에 슬픔과 줄어든 말수까지 느낄 수 있었다. 가슴 아프지만, 그 혼합된 표정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했다. Nineteen 작은 부엌은 누가 보아도 지난 100년 간 보수공사를 대 여섯 차례는 했을 거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낡은 리놀륨 바닥재는 벽 가장자리가 살짝 벗겨져 있었고, 여러 해 전에 교체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틀 창문 아래에는 수차례 페인트로 덧칠한, 밋밋한 문양의 기능성 흰색 캐비닛과 스테인리스 싱크대가 놓여있었다. 주방 조리대는 균열이 생겼고, 한쪽 벽면에는 집만큼이나 오래된 장작 난로가 놓여있었다. 실내 곳곳에는 현대식 물건도 이미 침투해 있었다. 대형 냉장고와 식기세척기가 싱크대 가까이에 있었고, 반쯤 마시고 남은 붉은 포도주 병 대각선 방향에는 전자레인지가 보였다. 어떤 면에선, 아버지의 집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바나는 찬장을 열고 와인잔을 하나 꺼냈다. 『와인 한 잔 하실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와인은 잘 못해요.』 놀랍게도 그녀는 잔을 다시 갖다 놓지 않았다. 대신, 마시고 남은 와인 병을 집어들고 와인을 한 잔 따라 부었다. 그리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 앞에 앉았다. 내가 테이블에 함께 앉자, 사바나가 와인을 한모금 축였다. 『당신도 변했네요.』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많은 게 변했죠.』 그녀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은 채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감정을 억누른 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저녁마다 이렇게 와인을 마시고 있을 거라고는 예전에 꿈도 꾸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마시잖아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잔을 흔들어댔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정말 웃긴 게 뭔지 아세요?』 그녀가 말했다. 『이제는 술맛을 알고 마셔요. 처음엔 좋은 맛인지 나쁜 맛인지 알지도 못했죠. 그런데 이제는 술 사러 가면 꽤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죠.』 나는 내 앞에 앉은 여자가 아직은 낯설었다. 게다가 마땅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직까지는 부모님에게 배운 행동대로 사니까요. 밤에 한 잔 이상은 안 마셔요. 하지만 예수도 물로 포도주를 만든 장본인이니까 저도 그다지 죄를 짓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예전 그대로의 그녀를 타임 캡슐처럼 꺼내봐야 한다는 것이 씁쓸했지만 그녀의 논리에 나는 미소지었다.『안 물어 봤어요.』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궁금했을 거 아니에요.』 잠시였지만, 들리는 소리라고는 냉장고가 돌아가는 낮은 소음이 전부였다. 『아버님 일은 참 안됐어요.』 그녀는 테이블의 갈라진 균열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진심이에요.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 아버지 생각을 참 많이 했었어요.』 『고마워요.』 사바나는 다시 잔을 돌리며 흔들었다. 그녀는 회전하는 술잔을 넋놓고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얘기 좀 해줄 수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다시 그런 얘길 꺼낼 마음이 내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자 뒤로 몸을 기대자 놀랄 정도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나는 아버지의 첫 심장발작과 두 번째 발작, 그리고 지난 이년간 아버지와 함께 돌아다녔던 곳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우리 부자간에 피어난 정이나, 아버지에게 느꼈던 포근함, 아버지께서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지만 결국엔 포기했다는 얘기까지 들려주었다.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날들도 소상하게 얘기해주었고,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셔야 했던 가슴 아팠던 기억까지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장례식과 봉투에서 발견한 사진 얘길 들려주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사진을 남기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러실 분이잖아요.』 『당연한 얘길요.』 내 말에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안도감이 도는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내 손을 힘주어 쥐었다. 『소식을 접했으면 무슨 일이 있었어도 장례식에 가봤을 거예요.』 『조촐하게 치렀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아버지 장례식이란 게 중요하죠.』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다시 술을 한모금 마셨다. 『이제 식사할까요?』 그녀가 물었다. 『글쎄요.』 그녀가 조금 전에 말한 것이 생각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일단 스튜 요리를 데울 테니까 먹을 건지 안 먹을 건지는 그때 봐서 생각하기로 하죠.』 『뭐 좋은 것 있나요? 제 말은... 예전에는 요리할 줄 안다고 말하지 않았거든요.』 『우리 가족에겐 별미에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할게요. 우리 엄마가 만들었어요. 어제 음식을 가져오셨죠.』 『진실이 드러나는 군요.』 『진실이란 게 웃기죠. 다 그렇잖아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선반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터퍼웨어 용기를 꺼내는 동안, 나는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와 남편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그릇에 스튜를 몇 번 떠서 담은 후 전자레인지 안에 그릇을 넣었다. 『다른 것도 드릴까요? 버터 바른 빵은 어때요?』 『네, 좋아요.』 잠시 후, 음식이 차려졌다. 냄새를 맡자, 그제서야 배가 정말 고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사바나는 다시 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같이 안 먹을 건가요?』 『배 안 고파요. 사실, 요즘 식욕이 별로 없어요.』 그녀는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나도 그녀의 얘기에 대답하지 않은 채 음식을 입에 넣었다. 『정말이네요. 맛 좋은데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마가 음식을 잘 해요. 음식 만드는 것 좀 배우지 그랬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렇게는 못했어요. 늘 바빴거든요. 젊을 땐 공부할 게 많아서 그랬고, 최근에는 건물 보수공사로 시간이 없었어요.』 그녀는 거실 쪽을 가리켰다. 『집이 오래됐죠. 집처럼 보이진 않지만 지난 2년간 손이 많이 간 건물이에요.』 『멋진데요.』 『예의상으로 한 말이더라도 고맙네요.』 그녀가 대답했다. 『여기 이사왔을 때를 보셨어야 해요. 헛간이나 다름없었죠. 지붕도 새로 필요했어요. 그런데 재미난 건, 사람들이 집을 리모델링하려고 고민할 때 지붕은 꼭 빠트린다는 거죠. 지붕 올리는 게 당연한 과정이지만, 나중에 교체해야된다는 생각은 못하더라고요. 우리가 한게 바로 그런 부류들이에요. 냉난방 장치, 열처리된 창들, 흰개미들이 파먹은 부위를 수리하고 ... 몇날 며칠을 일했나 모르겠어요. 그녀는 먼 회상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일은 거의 우리 스스로 했어요. 여기 부엌에 해놓은 것처럼요. 캐비닛과 바닥도 새로 해야 했지만, 이사온 날 보니까 거실과 침실에는 비가 올 때마다 천정이 새서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였어요. 별수 있나요? 먼저 해야할 일부터 생각해 봤죠. 제일 먼저 낡은 지붕 판자부터 뜯어냈어요. 37도는 나가는 날씨였을 거예요. 그 날씨에 삽 하나 들고 올라가서 손에 물집이 잡혀가면서 판자를 긁어내렸어요. 그래도 ... 옳은 일을 하는구나 싶었어요. 젊은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서 집을 바꾸며 세상을 시작하는 그런 느낌 정도? 어떤... 일체감 같은게 있었죠. 거실 바닥을 공사할 때도 같은 기분이었어요. 바닥 표면을 다듬고 다시 평면을 다지는데는 2주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바닥에 착색도 하고 니스칠까지 마치고 나서, 드디어 그 위를 걸을 때의 느낌이란, 마치 우리 여생의 기초공사를 다 다진 것 같더라고요. 『낭만적으로 들리네요.』 『어느 정도는요.』 그녀는 맞장구를 치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가로 쓸어 넘겼다. 『하지만 요새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해요. 이렇게 늙어가고 있잖아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기침이 나서 물잔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컵은 그곳에 없었다. 그녀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제가 물 갖다 드릴게요.』 그녀는 수돗물을 한잔 받아서 컵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물을 들이킬 때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내가 물었다.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외모가 변했네요.』 『내가요?』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네, 당신요.』 그녀가 말했다. 『조금... 나이가 들어보여요.』 『늙었죠.』 『그럼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눈이에요. 예전보단... 더 진지한 눈빛이에요. 마치 봐서는 안 될 걸 본 그런 눈빛처럼요. 조금 지쳐있고요.』 내가 대꾸하지 않자, 내 표정을 읽은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한 말을 했나 봐요. 최근에 당신이 겪은 일만 겨우 알면서요.』 나는 그녀의 말을 생각하며 스튜를 한입 떠넣었다. 『사실 2004년 초에 이라크에서 나왔어요.』 내가 말했다. 『그후로는 독일에 있었어요. 이라크엔 부대 인원 일부만 남아서 상시대기 하는데, 우리는 교대 근무를 하고 있어요. 저도 다시 돌아가겠지만 언제일지는 몰라요. 다행스럽게도, 그때쯤 되면 진정국면으로 돌아가겠죠.』 『지금 제대할 때 되지 않았나요?』 『제입대 신청했어요.』 내가 말했다. 『달리 이유도 없었죠.』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요?』 『2007년까지요.』 『그리고 그후엔요?』 『글쎄요. 몇 년 더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대학교에 진학하던가요. 혹시 알아요? 특수교육학과에서 학위를 받을지요? 그 분야에 대해서 들은 얘기가 많죠.』 그녀의 미소는 낯설게도 슬퍼보였다. 그리고 한동안 우린 아무 말도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자세를 틀었다. 『다음달 11월이면 2년째에요.』 『여기서 결혼했어요?』 『마치 미리 정해진 것처럼요.』 그녀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우리 엄만 완벽한 결혼식을 치르려고 너무 열정적이셨어요. 제가 외동딸이어서 그런 건 알지만, 돌이켜 보면 규모를 훨씬 줄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백 명 정도가 딱 좋았을 거예요.』 『그 인원이 작은 건가요?』 『결과적으로 말이죠? 맞아요. 교회에는 하객들이 앉을 자리가 모자랐어요. 또 우리 아빤 빚 갚는 데 몇 년은 걸리겠다고 늘 제게 짚고 넘어가셨어요. 물론, 농담이지만요. 하객 절반이 모두 부모님 친구들이셨지만, 고향에서 결혼하면 다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우체부부터 이발사까지 빠짐없이 초대장을 받고 오시거든요.』 『그래도 고향으로 오니까 좋죠?』 『편해요. 부모님도 들리시고요. 특히, 지금은 더 그래요.』 그녀는 자세한 내막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나는 그점이 궁금했다. 궁금한 점이 백개는 더 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접시를 싱크대로 들고갔다. 접시를 물로 헹구는 사이, 그녀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그냥 두세요. 아직 식기세척기에서 비우지 않았어요. 제가 나중에 할게요. 그나저나 다른 것 좀 드릴까요? 엄마가 파이를 두 개 만들어 두고 가셨어요.』 『우유 한잔 줄까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막 일어서려고 하자, 내가 한 마디 더 했다. 『그냥 컵이 있는 데만 말해요.』 『싱크대 옆 찬장에 있어요.』 나는 선반에서 잔을 하나 꺼낸 후 냉장고로 걸어갔다. 우유는 맨 윗 선반에 있었고, 그 아래엔 열 개 정도의 터퍼웨어 용기에 모두 음식이 담겨 있었다. 나는 우유를 따른 후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바나, 어떻게 된 거예요?』 내 말에,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편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남편, 어떤 거요?』 『남편은 언제 볼 수 있는 거예요?』 즉답을 하는 대신, 그녀는 와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싱크대에 남은 와인을 쏟아 붓고, 커피잔과 차를 들고 돌아왔다. 『당신도 이미 만나본 사람이에요.』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녀가 두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팀이에요.』 사바나는 다시 자리로 건너와 나를 마주보면 앉았다. 커피 젓는 소리가 들렸다. 『이 얘기를 어디까지 듣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찻잔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전부요.』 나는 등을 뒤로 제쳤다. 『아예 안 듣고 싶기도 하고요. 잘 모르겠네요.』 나는 두 손을 모았다. 『언제부터죠?』 『잘 모르겠어요.』그녀가 대답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란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시작은 아니었어요. 우리 모두 계획된 만남은 아니었거든요.』 그녀는 테이블에 스푼을 내려놓았다. 『굳이 대답하자면, 2002년 초였던 것 같아요.』 내가 재입대한 그 후 무렵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처음 심장발작을 일으키기 육개월 전이고, 그 무렵, 그녀의 편지 주기에 변화가 생긴 시점도 그때다. 『우리가 친구사이였다는거 아시잖아요. 팀이 대학원생이였지만, 졸업 학기에 저와 같은 건물에서 두 과목을 듣기도 했어요. 그후, 커피도 마시고, 함께 공부도 하게 되었죠. 하지만 데이트도 아니었고, 심지어 손도 잡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팀은 잘 알고 있었죠 ... 하지만 팀은 곁에 있었다는 거죠. 제가 당신이 보고 싶고, 떨어져 있는게 힘들다고 할때도 팀은 다 들어주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저는 그때쯤 당신이 제대할 줄 알았거든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맺힌건 ... 뭘가? 후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우린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내가 기분이 안좋으면 늘 팀이 저를 잘 위로해 주었고요. 저보다 먼저 당신의 휴가를 알고 저에게 알려주기도 했어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다시 보고 싶어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그런데 당신 아버지까지 편찮은 몸이 되셨죠. 당신이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죠. 아마 곁에 있지 않았다면, 제가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건 아니었어요. 알아요. 제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들리는지요. 저도 그 생각만 하면 제 자신이 싫어지니까요. 그냥 운명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만 같았어요.』 그녀는 스푼으로 차를 다시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해 가을, 제가 모든 학과 과정을 마치고 이곳 시내의 발달평가 센터에서 근무하려고 돌아온 직후에 팀의 부모님이 아주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그들은 애슈빌에서 돌아오던 중, 차체 중심을 잃고 벗어나 고속도로 상에서 마주오던 차와 충돌을 했어요. 대형화물 트럭이었어요. 트럭 운전수는 멀쩡했지만, 두 분 모두 즉사하고 말았어요. 팀은 학교를 관둬야 했죠. 그렇게도 박사 학위를 따고 싶어했지만요. 그렇게 돌아와서 앨런을 보살피게 된 거고요. 팀은 부모님의 상실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어요. 부모님을 존경해왔으니까 상실감도 컸죠. 하지만 앨런은 그렇지 않았죠. 앨런은 비명을 지르고 자신의 머리칼을 뽑아댔어요. 그런 그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팀이었지만, 그도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 무렵, 제가 그들에게 다가간 것 같아요. 보살펴주려고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여긴 팀 부모님 댁이었어요. 팀과 앨런이 자란 곳요.』 그녀의 얘길 듣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곳은 팀의 집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팀의 목장이 옆집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린 그저 서로를 위로해 주었어요. 나는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팀은 내게 힘이 되어주고요. 그리고 같이 앨런을 도와주었죠. 그렇게 점차,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얘기 하는 도중, 처음으로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팀이나 저에게 화를 내고 싶겠죠.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요. 당신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한 거지만요. 하지만 당시에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일도 많았지만, 그 만큼 늘 감정적이었어요. 저에게 벌어진 일에 죄책감이 생겼어요. 팀도 그랬고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팀과 저는 이미 커플처럼 느껴가고 있었죠. 팀도 제가 근무하는 발달평가 센터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자폐아동들을 위한 주말 목장 프로그램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후, 우린 늘 붙어다녔어요. 함께 목장을 만들면서 일에 집중도 하게 되었고, 앨런에게도 도움이 되었어요. 앨런이 말을 좋아하는 데다가 할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도 점차 부모님의 부재를 잊게되었죠. 우린 서로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죠... 그해 늦게, 팀이 프로포즈를 했어요.』 그녀의 얘기가 끝나고, 난 고개를 돌린 채 그녀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앉아 서로의 생각에 잠겼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예요.』그녀가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얘기를 더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앨런은 아직 여기에 사나요?』 내가 물었다. 『앨런 방은 2층에 있어요. 실은, 늘 쓰던 그 방이죠. 생각만큼 힘들진 않아요. 그는 말에게 사료를 주고, 솔질을 하고 나면, 대개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해요. 그것도 몇 시간씩 하죠. 최근들어서는 그 아이를 못 말릴 지경까지 갔어요. 그냥 두면 밤새할 거예요.』 『지금 집에 있나요?』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팀과 같이 있어요.』 『어디요?』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개가 문을 계속해서 긁어대자, 사바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개는 혀를 내밀고 꼬리를 여전히 흔들며 안으로 걸어왔다. 개는 내곁으로 걸어오더니 내 손에 주둥이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나를 좋아하나 봐요.』 내가 말했다. 사바나는 여전히 문가에 서있었다. 『걔는 모든 사람을 좋아해요. 이름은 몰리에요. 집 지키는 건 글렀지만, 아주 귀여운 녀석이에요. 침 조심하세요. 그냥 두면 침범벅이 되니까요.』 나는 내 바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네요.』 사바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참, 정리할 게 좀 남아있네요. 오늘밤에 비가 온대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아직 팀에 대한 답변도 못 들었고, 그녀가 대답해 줄 생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줘요?』 『괜찮아요. 하지만 마음대로 하세요. 아름다운 밤이잖아요.』 나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모리는 좀 전에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간청한 사실을 완전히 잊기라도 한듯, 우리 앞을 황급히 지나갔다. 나무 어딘가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뛰쳐 나오자, 몰리는 캄캄한 암흑 속으로 달려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사바나는 다시 장화를 신었다. 우리는 헛간으로 향했다. 그녀가 털어놓은 전부를 생각해 봤다. 그러자 내가 여기에 온 동기가 다시 궁금해졌다. 그녀가 팀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잘 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완벽하게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화를 내야 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사실을 알아냈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감출 수 없는 슬픈 목소리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둠이 우리를 에워싸면서, 우리가 서로 아주 가까이 걷고 있다는 점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티를 내지 않았다. 저 멀리, 말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늘처럼 서있었다. 사바나는 말고삐 두 개를 회수해서 헛간으로 들고 들어와 못걸이에 걸어두었다. 그 사이, 나는 우리가 썼던 삽을 가져와 다른 연장들과 함께 두었다. 밖으로 나올 때, 그녀는 헛간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다시 확인을 했다. 손목시계를 힐끗 보니 거의 열시가 다 되었다. 늦은 시각이었고, 우리 모두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제 가봐야 될 것 같네요.』 내가 말했다. 『동네가 작잖아요. 소문나기 싫어요.』 『그렇겠네요.』 몰리가 어딘가에서 나타나더니 터벅터벅 걸어와 우리들 곁에 앉았다. 몰리가 사바나의 다리를 핥자, 그녀는 옆으로 비켜섰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그녀가 물었다. 『여관이나 아무데나 가죠. 고속도로 근처에 있어요.』 잠시였지만, 그녀의 코에 주름이 잡혔다. 『저도 거기 알아요.』 『후졌죠.』 내가 실토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 놀랄 정도는 아니네요. 당신은 늘 그런 독특한 곳을 찾는데 소질이 있었잖아요.』 『‘통나무집 새우’처럼요?』 『맞아요.』 나는 주머니 속에 두 손을 찔러 넣으며, 이렇게 마지막이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 허무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몇마디 하고 끝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로 앞으로, 다가오던 차가 집을 지나가며 헤드라이트 불빛을 번쩍이며 지나갔다. 『이제 가야겠네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도요, 존. 당신이 와서 기뻤어요.』 나는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나는 그것을 작별로 받아들였다. 『잘 있어요.』 『잘 가요.』 나는 현관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차로 향했다. 이제 정말 끝났다는 생각에 정신이 멍해졌다. 달리 뭘 기대했는지는 모르나, 이제 정말 끝났다는 사실에, 그녀가 보내준 마지막 편지를 읽은 후부터 억누르고 있던 모든 감정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뒤에서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존!』 『네?』 그녀가 현관 계단을 내려오며 나에게 걸어왔다. 『내일도 근처에 계실 건가요?』 가까이 온 그녀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가려졌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편지도, 그녀의 남편도, 이제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왜요?』 내가 물었다. 『당신이 혹시 들리고 싶어할까 봐서요. 열시 쯤요. 팀이 당신을 보고 싶어할 거예요...』 나는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저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나요?』 그녀는 팀이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식으로 그녀는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부탁이에요. 저에겐 남다른 의미가 될 거예요.』 그녀의 손길이 따뜻했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진 않았다. 팀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두 사람이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마치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있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애처로운 부탁을 거절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열시요.』 『고마워요.』 잠시후,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그녀가 현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본 후 차에 탔다. 나는 시동을 켜고 차를 후진시켰다. 사바나가 뒤돌아 보며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나도 답례로 손을 흔들며 도로로 차를 몰았다. 백미러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녀의 모습에 목이 메여왔다. 그녀가 팀과 결혼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내일 그 두 사람을 봐야 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그건, 차를 몰고 나올 때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현관에서 울고 있는 사바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Twenty 다음날 아침, 사바나는 현관에 서있었다. 내가 차를 몰고 들어서자 손을 흔들어주었다. 차를 세우자, 그녀가 앞으로 걸어왔다. 내심, 그녀의 뒤로 팀이 나와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오셨네요.』 그녀가 내 팔을 만지며 말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네.』 나는 마지못해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보였다. 『잘 잤어요?』 그녀가 물었다. 『별로요.』 그 말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준비 됐어요?』 『늘 준비하고 있죠.』 『좋아요.』그녀가 말했다. 『차 열쇠 가져올게요. 혹시 운전하지 않을 거면요.』 처음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나요?』 나는 집 건물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팀을 만나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팀은 여기 없어요.』 『그럼, 어디 있어요?』 그녀는 마치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물었다. 『운전 하실래요?』 『네, 그래야겠네요.』 나는 굳이 혼란한 표정을 감추지는 않았지만, 때가 되면 그녀가 자연스레 모든 걸 밝힐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타도록 차문을 열어준 후, 차를 돌아와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다. 사바나는 손으로 차 계기반을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마치 믿기지 않은 현실을 확인하려는 듯이. 『이 차 생각나요.』 그녀의 표정은 추억에 젖어 있었다. 『이 차, 아버님 차였잖아요. 그쵸? 세상에... 아직도 굴러다니다니 놀랍네요.』 『아버진 차를 그다지 많이 쓰지 않으셨어요.』 내가 말했다. 『직장이나 가게에 가는 정도였죠.』 『그래도요.』 그녀는 안전띠를 착용했다. 문득, 그녀가 홀로 밤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방향이죠?』 내가 물었다. 『도로로 나가서 자회전요.』 그녀가 말했다. 『시내 방향으로 가세요.』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서운한 생각도 들었지만, 넋을 잃은 그녀의 표정을 보니, 나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그녀를 혼자 있게 두었다. 시내 외곽에 들어서자, 그녀는 갑자기 정적을 의식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저는 말동무는 솔질이 없나 봐요.』 『괜찮아요.』 나는 커져만 가는 호기심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녀는 앞유리창 밖으로 손을 가리켰다. 『다음 모퉁이에서 우회전요.』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병원요.』 마침내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듯한 복도를 걸어갔다. 우리는 마침내 접수대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내 데스크 뒤로, 나이 지긋한 자원봉사자가 클립보드를 내밀었다. 사바나는 펜을 들어 자연스럽게 이름을 기재했다. 『사바나, 잘 견디고 있는 거죠?』 『노력하고 있어요.』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 잘 될거랍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잖아요.』 『감사해요.』 사바나가 말했다. 그녀는 클립보드를 다시 돌려주며, 나를 바라보았다. 『팀은 3층에 있어요.』 그녀가 설명해 주었다. 『엘리베이터는 복도 아래에 있어요.』 나는 그녀를 뒤따랐다. 속이 뒤집혀 왔다. 우리가 엘리베이터 문에 이르자 한 사람이 막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니 무덤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3층에 이르자, 나는 사바나를 따라 복도 아래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이 열린 한 병실에서 걸음을 멈추며 나를 돌아보았다. 『제가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줄래요?』 『알았어요.』 그녀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은 후 돌아섰다. 그녀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병실로 들어갔다. 『여보!』 한층 밝은 톤의 그녀의 목소리가 밖으로 들렸다. 『괜찮아?』 그 소리 외엔 몇 분간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병문안 갔을 때도 느꼈던 그런 삭막하고, 인간미 없는 주변 환경을 흡수하며 복도에 서있었다. 이름 모를 살균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한 병원 직원이 병원식이 든 카트를 밀고 복도 아래 한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복도 가운데로, 한 무리의 간호사들이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복도 건너 문 뒤에서는, 누군가가 헛구역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됐어요.』 사바나가 고개를 밖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녀는 애써 야무진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슬픈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이제 들어와도 돼요. 팀도 준비 됐어요.』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팀은 팔에 주사바늘을 꽂은 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지쳐 보였고, 피부는 아주 창백해서 속이 들여다 보일 정도였다. 우리 아버지보다 체중도 훨씬 빠진 모습이었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선한 그의 눈길만은 그대로였다. 병실 건너,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앨런이라는 생각이 즉시 들었다. 병실은 꽃이 가득했다. 여러 다발의 꽃들이 보였고, 안부 편지가 모든 테이블과 선반에 가득 쌓여있었다. 사바나는 남편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팀.』 그는 웃는 것도 지쳐보였지만, 애써 미소를 보였다. 『존, 다시 얼굴 보니 반가워요.』 『저도요.』 내가 말했다. 『잘 지냈어요?』 순간, 내가 말하고도 너무 바보같이 들렸다. 팀도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 같았다. 조금도 개의치 않는 걸로 봐서. 『좋아요.』 그가 말했다. 『이제 좋아지고 있어요.』 앨런은 쉴새없이 머리를 흔들어 댔다. 그런 그를 보자, 나는 개입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 휘말린 침략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내 동생, 앨런이에요.』 그가 말했다. 『안녕, 앨런.』 앨런이 대답하지 않자, 팀이 그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있니, 앨런? 괜찮아. 이 분은 의사 선생님이 아니야. 내 친구야. 가서 인사해.』 팀의 요구에 잠시 시간을 끌긴 했지만, 앨런은 자리에서 결국 일어섰다. 그는 뻣뻣하게 걸어왔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손을 뻗었다. 『안녕, 난 앨런.』 그는 아주 놀랄 정도로 단조로운 저음이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축 늘어진 손... 그는 한번 손을 흔들더니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앉으려면 저기 의자가 있네요.』 팀이 말했다. 나는 몇 걸음 더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채 묻기도 전에, 팀이 내 마음의 질문을 이미 알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색종이에요.』 그가 말했다. 『묻고 싶은게 이것이라면요.』 『하지만 별거 아닌거죠?』 앨런은 보다 빠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허벅지를 손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사바나는 고개를 돌렸다.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의사들이 하기 나름이죠.』 팀이 대답했다. 『최상의 치료를 받고 있어요.』 그의 대답은 나보다는 앨런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앨런이 진정되었다. 팀은 힘을 모으려는 듯, 눈을 감더니 다시 눈을 떴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그가 말했다. 『당신이 이라크에 있는 내내 당신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어요? 지금도 군에 있는 것 같은데.』 그가 내 머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맞아요. 직업군인으로 남을 것 같아요.』 『좋죠.』 그가 말했다. 『군에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필요해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은 마치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초현실적인 광경처럼 느껴졌다. 팀이 사바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 앨런과 같이 나가서 마실 거나 애에게 사다줄래? 오늘 이른 아침부터 걘 아무 것도 안 먹었거든. 그리고 가능하면, 잘 구슬려서 뭐라도 먹여 봐.』 『알았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 앨런. 마실 거 사러 가자. 알았지?』 앨런은 한참 후에나 그 말뜻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는 일어서서 사바나를 따라 나갔다. 사바나는 밖으로 나가며 살며시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이 나가자, 팀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앨런에겐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에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죠.』 『당연하겠죠.』 『그렇지만, 저 아이가 고개를 흔드는 건 제대로 이해해야 돼요. 자폐증이나 지능과는 전혀 무관한 행동이에요. 초조할 때마다 생기는 ‘틱’ 같은 증세죠. 허벅지를 때리는 행동도 마찬가지 이유고요. 앨런도 알건 다 알아요. 다만, 다른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식으로 행동을 해서 그렇지만요.』 나는 손에 깍지를 꼈다. 『저는 불편하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당신 동생이잖아요. 불안해하는 건 당연한 거죠. 이해해요.』 팀이 미소지었다. 『친철하게 말씀 하시네요. 사람들은 대개 무서워하거든요.』 『저는 아니에요.』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제가 더 무서울 걸요.』 그는 힘들어하는 모습이긴 해도 크게 웃었다. 『그렇고 말고요.』 그가 말했다. 『앨런은 순해요. 너무 순해서 파리 한 마리 잡아 죽이지 못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모든 게 나를 편하게 해주려는 그의 배려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편하지가 않았다. 『언제 알게 된 거예요?』 『1년 전에요. 종아리 뒤의 검은 점이 가려워서 긁었더니 피가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물론,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은 안했었죠. 그런데 그후에도 가려워서 긁으면 피가 나더군요. 육개월 전에 병원에 왔어요. 그날은 금요일이었죠. 토요일에 수술받고, 월요일에 인터페론을 주입받기 시작했어요. 오늘도 여기 있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줄곧 입원해 있었던 거예요?』 『아니요. 가끔씩 와요. 대개, 인터페론 주입은 외래환자에게만 해당되요. 저는 인터페론이 몸에 잘 안 맞아요. 잘 참지 못해서 병원에서 이렇게 해주고 있는 거예요. 통증이 더 오거나 탈수 증세를 보일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죠. 어제처럼요.』 『안타깝네요.』 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나는 병실을 둘러보았다. 내 시선은 침대 옆의 평범한 사진틀에 끼어진 사진 한 장에 고정되었다. 팀과 사바나가 앨런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서있었다. 『사바나는 잘 견디고 있는가요?』 내가 물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예요.』 팀은 병원 시트의 주름을 한 손으로 매만졌다. 『사바나는 참 잘 하고 있어요. 저한테 뿐만 아니라, 목장일도 잘 해요. 최근에는 혼자서 일을 다 해야 했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었죠. 또, 저랑 있을 때면, 늘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해요. 늘 잘 될 거라고 저에게 말해주죠.』 그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왠만하면 저도 그렇게 믿으려고 해요.』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그는 힘겹게 몸을 더 일으켜 앉았다. 고통에 몸을 움찔거렸으나, 통증이 자자 들면서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바나 말로는 어젯밤에 목장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네.』 내가 말했다. 『당신을 만나서 틀림없이 기뻐했을 거예요. 사바나는 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저도 그렇고요. 그 점, 당신께 사과드리고 싶어요.』 『그러지 마세요.』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아프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요. 건강한 몸이면, 당신은 이번에도 내 코를 부러트렸을 거예요.』 『그랬겠죠.』 나는 그의 말에 인정했다. 내 말을 듣고 그가 웃긴 했지만, 통증이 묻어 있는 웃음소리였다. 『맞아도 저는 할 말 없죠.』 그는 내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내 말을 못 믿겠지만, 저도 지난 날에 대해선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두 사람이 서로 정말 사랑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나는 팔꿈치에 몸을 실은 채 앞으로 숙였다. 『다 지나간 일이에요.』 내가 한 말이지만, 믿음의 진정성은 없었다. 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찾아오게 된 거예요?』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내가 말했다. 『지난 주에요.』 팀은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동정심을 얼굴에 드러냈다. 『존, 안됐어요. 아버님이 당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잘 알고 있어요. 갑자기 돌아가신 건가요?』 『다 그렇죠, 뭐... 하지만 지병으로 한참 누워 계셨어요.』 『그래도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죠.』 나는 그가 나만 꼬집어서 말하는 건지, 사바나아 앨런, 모두를 일컬어서 말하는 건지 궁금했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사바나가 말해주더군요.』 『교통사고로요.』 그는 천천히 말을 끌었다.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이틀 전에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어요. 그리고... 제가 장례 절차를 밟고 있더라고요. 정말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죠. 집에 있으면, 부엌에서 일하시는 엄마와 정원 주변에 계실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어요.』 그는 그 모습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당신도 그랬나요? 집에 있으면요?』 『매번 그래요.』 그는 머리를 뒤로 제쳤다. 『지난 2년이 우리 두 사람에겐 힘든 해였던 것 같군요. 충분한 시련을 검증받은 것이죠.』 『당신도 검증받았다고요?』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검증만요. 끝났다고 얘기하진 않았어요.』 『그럼요. 그렇게 끝나지는 않겠죠.』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실로 들어올 줄 알았지만, 그녀는 그냥 지나쳐 다른 병실로 들어갔다. 『당신이 사바나를 찾아와 줘서 저도 기뻐요.』 그가 말했다. 『당신과 사바나의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제 말이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사바나는 당장 친구가 필요해요.』 목이 타들어갔다. 『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팀은 조용해졌다. 그 얘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그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가 자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보고 있을 때, 이상하리 만큼 내 머리 속은 텅 비워져 있었다. 『어제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한 시간 뒤 돌아온 사바나가 말했다. 앨런과 함께 병실로 돌아온 그녀는 팀이 잠든 것을 보고 아래층 구내식당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당신을 만나서 놀랐어요. 제가 미리 말했어야 했지만, 매번 마음과 달리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우리 모두 식욕이 없었으므로 테이블에는 두개의 찻잔만 놓여있었다. 사바나는 찻잔을 들었다 이내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늘도 병원의 일상생활 중에 하루일 뿐이에요. 몇시간씩 병원에서 보내죠. 그러면 간호사들이 계속 측은한 표정을 짓죠... 뭐랄까, 조금씩 저들이 나를 죽여가고 있다는 그런 표정 정도요. 팀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들릴지 잘 알아요. 하지만 팀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게 정말 힘들어요. 정말 보기 싫어요. 물론 제가 잘 보살펴줘야 한다는 것 알아요. 사실, 제 마음도 그렇고요. 하지만 상황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나빠요. 어젠, 팀이 치료를 받은 뒤 너무 고통을 호소하는 걸 보고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토도 그치지 않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더라도 헛구역질을 멈추지 않았아요. 오분, 십분 간격으로 신음을 하고 참아보려고 침상에서 몸부림을 쳤어요.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죠. 그때마다 제가 그를 안고 달래주지만, 저의 무기력한 심정을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어요.』 그녀는 찻잔에 티백을 담갔다 들었다. 『늘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찻잔 손잡이를 매만졌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예요. 그 마음 알아요. 그래서 제가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있잖아요. 당신은 잘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실제로 제 얘길 이해해 줄 사람은 없었어요. 친구들조차 제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엄마, 아빠는 그나마... 잘 해오셨어요. 제가 부탁하면 뭐든 들어주실 분이죠. 늘 도움을 주려고 하시거든요. 엄마는 음식도 갖다 주세요. 하지만 매번 음식을 두고 가실 때마다 걱정거리만 한보따리 가져 가세요. 그때마다 울상을 지으면서요. 늘 말이나 행동이 잘못 나오면 어떡하나 싶어서 겁을 먹은 사람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저를 도와주려고 오셨지만, 매번 제가 오히려 엄마를 위로해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버리곤 하죠. 만사 제쳐두고라도, 엄마의 그 점이 너무 힘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냥 넘어가죠. 늘 최선을 다하시고, 우리 엄마잖아요. 그리고 사랑하고요. 그래도 엄마가 조금 마음을 강하게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어머니 생각을 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버님은 어떠세요?』 『조금 다르긴 해도 마찬가지에요. 아빤 화제를 피하시죠. 팀 얘기 꺼내는 걸 싫어하세요. 아빠랑 있을 땐, 목장이나 제 직장 얘기만 하시지, 팀 얘긴 전혀 안해요. 엄마가 계속 걱정만 하고 사시니까, 아빠가 그 점을 매우려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팀의 병에 차도가 있는지, 내가 잘 견디고 있는지 전혀 묻지 않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앨런도 문제예요. 팀이 아주 잘해줘요. 저도 앨런과 점점 잘 지내는 것 같고요. 하지만... 앨런이 자해를 하거나 물건을 부수고 할 때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죠. 오해는 마세요. 저도 노력은 해봐요. 하지만 저는 팀이 아니잖아요. 팀도 그건 알고 있어요.』 그녀의 시선이 나와 잠시 마주쳤지만, 나는 시선을 피했다. 나는 차를 한모금 마시며 지금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될지 생각해 보았다. 『팀이 얘기 해주던가요? 흑색종이라고요?』 『조금 들었어요.』 내가 말했다. 『얘길 다 듣진 못했어요. 반점을 봤는데 거기서 피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조금 미루다가 결국 병원에 오게 됐다고 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돼는 거 알아요? 팀이 많은 시간 동안 햇살에 노출되었다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뒷다리에 반점이 생겼잖아요. 팀을 알잖아요. 팀이 버뮤다 반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반바지를 입은 적이 거의 없어요. 심지어 해변에서도요. 우리한테 선크림을 꼭 발라야 된다고 따라다니면서 잔소리 했잖아요. 팀은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 피워요. 먹는 것도 신경써서 먹고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흑색종이 걸렸어요. 반점 주변을 절개했는데, 부위가 너무 커서 림프절 열 여덟 개를 제거해야 했어요. 제거된 림프절 가운데 하나는 양성 흑색종이었어요. 그때 인터페론 주입도 시작됐어요. 이건 일반적인 치료로, 꼬박 일년간 받아야 해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수술을 받고 몇주 뒤, 그는 사타구니 절개 부위에 봉와직염(蜂窩織炎)에 걸렸어요.』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미안해요. 요즘 의사들과 말하다 보니 버릇이 되버렸어요. 봉와직염(蜂窩織炎)은 피부 감염을 말해요. 팀은 꽤 심각한 편이었어요. 그래서 열흘간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그때 팀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팀을 잘 이겨냈어요. 그는 잘 참고, 치료를 꾸준히 받았어요. 그런데 지난달에 원래 흑색종을 발견한 부위 주변에서 암세포들을 발견했어요. 당연히 다시 수술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했어요. 인터페론 주입이 별 소용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팀은 PET촬영부터 MRI에 이르기까지 받을 건 다 받아봤어요. 그때, 폐에서 암세포를 찾아냈어요.』 그녀는 커피잔을 응시했다. 나는 말없이 차를 마셨고, 그렇게 한참동안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안타깝군요.』 나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는 포기 안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으로 갈라졌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마음씨 착하고, 참을성도 있고요. 저는 정말 그이를 사랑해요. 이건 정말 불공평해요. 우린 결혼한지 이 년도 안됐어요.』 나를 바라보며,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듯 숨을 깊이 몇 번 들이마셨다. 『팀은 여길 나가야 해요. 퇴원 말이에요. 여기서는 인터페론 주입밖에 안해요. 말했지만, 별 소용도 없고요. 엠디 앤더슨이나 메이요 클리닉, 아니면 존스 홉킨스 같은 곳으로 가야 돼요. 그런 곳은 최정밀 진단을 연구하는 곳들이거든요. 인터페론이 제대로 안 먹히면, 그쪽에서는 다른 약도 써봐요. 임상용이긴 해도, 늘 약품을 다양하게 배합해 보거든요. 또 생화학 실험이나 임상실험도 다른 곳에서 진행하고요. 엠디 앤더슨에서는 11월에 백신 실험을 할 계획인데, 다른 예방백신과 달리 치료백신을 실험할 거래요. 모의 실험 결과도 좋았고요. 그래서 팀을 그곳에 맡겨 보고싶어요.』 『그럼, 가봐요!』 내가 부추겼다. 그녀는 짧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게 아니에요.』 『왜요? 간단한 것 같은데요. 일단 퇴원해서 차타고 가면 되잖아요.』 『우리 보험회사에서 비용지불을 안해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튼, 지금은 안돼요. 팀은 우선 필요한 치료는 다 받고 있는 셈이고,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보험회사 측에서도 신속하게 일처리를 해주고 있어요. 입원비며, 인터페론 주사비, 그 밖에 모든 비용을 트집 잡지 않고 다 대줬어요. 심지어 여성 사회복지사도 한분 배정해 줬는데, 그분은 우리 처지를 너무도 잘 이해해 주세요. 그렇지만 그 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우리 주치의는 인터페론을 좀 더 투여하는게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니까요. 임상실험 비용까지 지불해주는 보험회사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일반적인 치료도 아니고, 그것도 다른 주에 있는 시설에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데 흔쾌히 치료비를 주겠다고 승낙해 줄 보험업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고소해버려요.』 『존, 우리 보험회사 직원은 집중치료비와 추가 입원비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없어요. 그리고 팀도 받아볼 치료는 다 받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팀을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다른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그가 호전될 거란 걸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도움은 될 테죠. 또 그래야만 되고요. 하지만 아무도 장담은 할 수 없거든요.』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설사 제가 그들을 고소해서 모든 비용을 청구해서 받아낸다 치더라도... 시간이 걸려요. 시간이 문제예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말해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문제인 거죠.』 『비용이 얼마나 되는데요?』 『엄청 많아요. 예전처럼, 팀이 감염된 상태로 이 병원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를 받기라도 하면, 비용은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해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돈을 구해야죠.』 그녀가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지역 사회에서 도움을 주고 있어요. 팀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지역 뉴스에서 기사를 다뤄줬고, 신문사에서도 기사를 써줬어요. 그리고 온 마을 주민들이 모금을 거둬주겠다고 약속해주셨어요. 주민들은 특별 은행계좌까지 개설해 주셨죠. 우리 부모님도 도와주셨어요. 우리가 근무하는 직장해서도 도와주셨고요. 우리 아이들 학부형께서도 도움을 주셨죠. 심지어 많은 영업장에 배치된 모금함도 거쳤다는 말을 들었어요.』 내가 르노아에 왔던 날 들렸던 당구장 바 한켠에 놓여있던 모금함이 생각났다. 그때 2달러를 넣었었다. 턱없이 모자란 돈이라는 사실에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충 모였나요?』 『모르겠어요.』 그녀는 마지못해 생각하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모든게 얼마 전부터 시작된 거예요. 팀이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저는 병원과 목장을 왕래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많은 비용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녀는 마시던 찻잔을 옆으로 밀어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왜 이런 얘기까지 당신에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곳에 가봐도 팀에게 도움이 될 지는 보장할 수 없으니 말이에요. 분명한 건, 그냥 이 곳에 있으면 가망이 없다는 거예요. 다른 곳도 마찬가지 일지 몰라요. 하지만 최소한의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까 ... 거기에 맡겨야죠.』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얼룩진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웃긴 건 뭔지 알아요?』 그녀는 드디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 얘긴 당신 외엔 아무하고도 하지 않았어요. 왠지, 지금 제 심정을 아무렇게나 부담없이 얘기해도 들어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를 잔을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당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제가 일방적이라는 것도 알아요....』 『괜찮아요.』 나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어쩌면...』 그녀가 말했다. 『제가 이기적이기까지 해요. 당신도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추스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당신에게 부담을 주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식당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비탈진 잔디밭 너머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봐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다 털어놓고 얘기하니까 저도 좋아요.』 잠시 후, 사바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그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 맞죠? 서로 부축을 받아야 하는 부상당한 두 전사처럼요.』 『그 비유가 좋네요.』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어쩐지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나는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요.』 우리는 오후를 팀의 병실에서 대부분 보냈다. 우리가 병실에 왔을 때 팀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잠깐 깨긴 했지만 다시 잠들어 버렸다. 앨런은 내가 있다는 건 의식하지 않은 채, 침대맡에서 형을 한사코 지켜보고 있었다. 사바나도 번갈아 가며 팀 곁에 앉아있거나, 내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곤 했다. 그녀가 내 곁으로 왔을 때, 우리는 팀의 상태에 관해서 얘기했고, 피부암에 대해서도 얘기했으며, 현재 가능한 대체 치료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몇주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현재 진행중인 모든 임상실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의 목소리는 톤이 높지 않았다. 앨런이 엿듣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설명을 다 들을 무렵,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흑색종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 저녁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사바나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은 오후 내내 잠을 잤다. 그녀는 저녁 인사로 부드럽게 팀에게 키스를 했다. 팀이 밤까지 내내 잘 거란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그에게 키스를 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나를 문밖으로 인도했다. 우리는 조용히 병실 밖으로 나왔다. 『차 세워둔 곳으로 가요.』 병실 복도에서 그녀가 말했다. 『다시 오나요?』 『내일요. 혹시라도 팀이 깨면, 저 때문에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할까봐서요. 그이는 좀 쉬어야 해요.』 『앨런은 어쩌고요?』 『앨런은 자전거를 타고 놀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걘 아침마다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늘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요. 내가 같이 가지고 해도 말 듣지 않을 거예요. 걱정 안해도 돼요. 이미 그렇게 생활한지 몇 개월은 됐으니까요.』 잠시 후, 우리는 병원 주차장을 벗어나 저녁 시간대의 차량들과 합류하였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을 띠며 변해갔고, 수평선 너머 먹구름은 해안가에서는 흔한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사바나는 생각에 잠긴 채 말이 거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내가 느꼈던 고단함이 묻어났다. 내일도 와야 하고,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돌아와야 한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그를 옮기면 희망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집 앞으로 차가 들어섰을 때, 나는 사바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을 본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눈물을 훔쳤다. 나는 버드나무 아래 낡은 터럭 옆에 차를 세웠다. 그때 앞유리창으로 빗방울이 조금 떨어졌다. 자동차 시동을 걸어둔 차 안에서 다시 작별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얘기나 꺼내려고 생각하는 사이, 사바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배고파요?』 그녀가 물었다. 『냉동실에 음식은 꽉 찼어요.』 그녀의 눈빛을 봐서는 사양하는 것이 옳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정말 배고프네요.』 내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다. 『오늘밤은 혼자 있기 싫었거든요.』 차에서 내리자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우리는 현관문까지 뛰어갔다. 현관까지 왔을 때는 이미 옷자락이 젖어 있었다. 몰리는 우리가 온 소리를 들었다. 사바나가 문을 열자, 몰리는 부엌쪽에서 황급히 내 옆을 지나 거실 방향으로 달려갔다. 개를 보니 어제 도착했을 때와 우리가 서로 혜어졌 있던 시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체감하게 되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이라크에서 순찰할 때도 그랬지만, 나는 오직 현시점에 집중하며 동시에 다가올 상황을 예민하게 가늠하고 있었다. 『음식은 종류대로 다 있어요.』 부엌으로 들어서며 그녀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 모든게 우리 엄마 솜씨죠. 음식 말이에요. 스튜, 칠리요리, 치킨 팟 파이, 돼지 바비큐, 라자냐 ... 다 있어요.』 내가 부엌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냉장고 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드시고 싶은게 있어요?』 『아무거나요.』 내가 말했다. 『당신이 먹는 음식으로 할게요.』 내 말에 약간 실망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실렸다. 순간, 결정을 내리는 일에 그녀가 염증이 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라자냐가 좋겠네요.』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바로 준비하죠. 배고파 죽을지경이에요, 아니면 아직 살만해요?』 조금 생각한 후 대답했다. 『배고파요.』 『샐러드 드릴까요? 블랙 올리브와 토마토를 곁들여서요. 랜치 드레싱과 크루톤과 먹으면 좋아요.』 『그거 좋네요!』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빨리 해올게요.』 나는 사바나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냉동실 아래에서 상추와 토마토를 꺼내서 흐르는 수돗물에 헹군 후, 목재 그릇에 담았다. 그 다음, 샐러드에 올리브를 끼얹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라자냐는 큰 스푼으로 떠서 접시 두 개에 담으며, 그 중 먼저 담은 접시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그녀는 손쉬운 일을 하게 되어 안심이 되는 마냥, 차분하게 일을 해나갔다. 『저는 와인 한잔 할건데 어떠세요?』 그녀는 싱크대 주방조리대 위의 작은 선반을 가리켰다. 『고급 피노누아죠.』 『한잔은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내가 병을 딸까요?』 『이미 따 놓은 거예요. 우리집 코르크스크루는 한 고집 하거든요.』 그녀는 코르크 마개를 열고 두 잔에 따라 부었다. 이윽고 음식을 담은 접시를 식탁에 놓고 그녀는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라자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냄새를 맡으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음식을 입에 한입 떠먹으며 포크로 접시를 가리켰다. 『오우... 정말 맛있는데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그녀가 거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음식은 손대지 않고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팀도 그 음식을 제일 좋아해요. 결혼하고 나서도 늘 우리 엄마한테 음식을 한솥 가득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거든요. 엄마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세요.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좋게 먹어주면 늘 흐뭇해 하시거든요.』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와인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붉은 와인 빛깔이 루비처럼 빛을 발했다. 『더 드시려면 음식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오히려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대개 남은 음식은 버리게 되거든요. 매번 엄마에게 음식을 덜 가져오라고 말해도 말을 들으셔야 말이죠.』 『어머니도 힘드실 테죠.』 내가 말했다. 『당신 마음을 잘 아실 거예요.』 『알아요.』 그녀는 다시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안 먹을 거예요?』 나는 손대지 않은 그녀의 음식을 가리켰다. 『저는 배 안고파요.』 그녀가 말했다. 『팀이 병원에 있으면 늘 이래요... 음식을 데워서 꼭 먹어야지 마음을 먹어도, 막상 음식이 앞에 있으면 위에서 딱 거부를 해버려요.』 그녀는 음식을 한술 떠먹으려는 듯이 음식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날 봐서라도 먹어봐요.』 내가 다그쳤다. 『어서 먹어요. 먹어야 해요.』 『전 괜찮아요.』 입으로 들어가려던 포크가 입가에서 멈췄다. 『날 봐서 먹으라니까요. 나는 내가 먹는걸 남이 보는게 불편하단 말이에요. 어색해서요.』 『알았어요.』 그녀는 포크를 집어들고 음식을 작게 잘라서 입에 넣었다. 『이제 됐죠?』 『그래야죠.』 코웃음을 치며 내가 말했다. 『진작 그렇게 먹으면 좋잖아요. 이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네요. 디저트로 빵부스러기라도 나눠 먹죠. 그때까지는 포크 손에 쥐고 먹는 척이라도 해봐요.』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까 좋네요.』 그녀가 말했다. 『근래에 당신처럼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내가 어쨌는데요? 솔직해서요?』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점이 좋아요.』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내 요구를 다시 묵살하였다. 『당신의 그런 점을 제가 좋아했죠.』 『저도 당신을 생각하면 그랬던 것이 생각나요.』 그녀는 냅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옛날이 참 좋았죠. 안그래요?』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옛 기억이 밀려왔다. 잠시나마 우리가 예전에 가졌던 모든 감정과, 바람, 소망을 되새겨보았다. 그러자 해변에서 만났던 생소한 여성과 바로 그 여성을 내 일부로 만들고 싶었던 그녀가 다시 내 앞에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때 손에 끼고 있던 반지에서 빛이 발했다. 나는 시선을 떨구며 그릇만 응시하였다. 『다 그렇죠, 뭐.』 나는 한입 입에 떠넣으며 애써 옛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 음식을 삼키며 다시 포코를 라자냐에 깊이 쑤셔넣었다. 『왜 그래요?』 그녀가 물었다. 『화 났어요?』 『아니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지금 화난 사람처럼 행동하잖아요.』 결혼한 것만 아니면 그녀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와인을 한모금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그녀가 조금씩 마시고 남은 양과 같아졌다. 나는 의자 뒤로 몸을 제쳤다. 『내가 여기에 왜 이러고 있어야 하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 말이에요.』 나는 부엌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안 먹을 거면서 나더러 저녁을 같이 먹자고 불러들였잖아요. 옛날 얘기를 꺼내면서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왜 집까지 저를 불러들였어요?』 대답을 피하며 그녀는 자리에 일어나 다시 잔을 채웠다. 『말상대가 필요했으니까 그랬겠죠.』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했던 것처럼, 우리 엄마나 아빠와 대화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팀에게는 더더욱 그렇고요.』 좌절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누구나 말벗은 필요하잖아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르노아에 온 게 아닌가. 『그 마음 이해해요.』 눈을 감으며 내가 말했다. 다시 눈을 떠보니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거죠. 옛일도 그렇고... 우리 사이도 그렇고요. 당신이 결혼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요. 팀 문제도 물론이고요. 이 모든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녀는 속상한 표정을 머금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는 안 그런 것처럼 보이나요?』 내가 아무말도 않자, 그녀는 잔을 옆으로 치웠다. 『사실을 알고 싶은 거예요?』 대답도 듣기 전에 그녀가 물었다. 『저는 그저 내일 일어날 만큼의 체력만 갖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내고 있어요.』 그녀는 실토한 사실에 마음이 아픈지 잠시 눈을 감더니 다시 눈을 떴다. 『당신이 저한테 아직 갖고 있는 감정도 알아요. 제가 당신에게 그 몹쓸 편지를 보낸 후로 당신이 겪었을 그 기분을 꼭 알고 싶다고 묻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할까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정말 그러고 싶은지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당신이 어제 여기에 왔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 기분도 좋았고요.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죠. 사실이에요. 지난 육개월 동안, 늘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매일 잠에서 깨어나면 초조하고, 긴장감이 흐르고, 화가 나기도 하고, 절망감에 빠지고, 두려움을 느꼈어요. 결혼한 이 남자를 잃을까봐서요. 저녁에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런 기분으로 지냈죠.』 그녀는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단 하루도 그르지 않고, 지난 육개월 동안 하루 종일 그런 기분으로 지내왔어요. 지금 제 삶이 그래요. 하지만 지금부터가 더욱 힘들 거예요. 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요. 남편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더욱 커졌고요. 도움이 될만한 처방전을 찾아야 하고, 남편도 살려야 하고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며, 마치 내 반응을 읽으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바나를 위로해야 했지만, 예전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한때 사랑했던 여자였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생각외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해요.』 마침내 입을 연 그녀는 무척 초췌해 보였다. 『부담을 주는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이 찾아와서 좋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게 이렇게 돼버렸네요.』 나는 테이블의 나뭇결 문양을 응시하며 솟구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다시 테이블로 걸어왔다. 아직 한모금 정도 마실 양이 남았지만 내 잔에 와인을 더 부어주었다. 『저는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는데 당신은 그냥 ‘괜찮아요’밖에 할 말이 없나요?』 『그럼 어떤 말이 듣고 싶은 거예요?』 사바나는 뒤돌아서며 부엌문으로 걸어갔다. 『당신도 여기에 와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 할 수 있잖아요.』 그녀는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자리를 피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녀가 거실로 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그녀를 따라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우리 사이에 변화가 생겼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포크로 라자냐를 힘주어 찍어서 마치 저돌적인 사람처럼 입에 쑤셔 넣으며, 그녀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편지를 보냈던 사람도 그녀였다. 끝내자고 한 사람도 그녀다. 먼저 결혼해버린 사람도 그녀였다. 마치 아무 일도 우리사이에 없었던 것처럼 행동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음식을 다 비운 나는 그릇들을 들고 싱크대로 들고 가서 물에 헹궜다. 비가 몰아치는 창문 사이로 타고 왔던 내 차가 보이자, 미련없이 이대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편이 두 사람에게 나을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찾는 순간, 나는 그대로 쥐 죽은 듯이 서있고 말았다. 지붕을 강타하는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거실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분개심과 심란한 지금 내 심정을 일순간에 날려버리는 그 소리는 ... 사바나의 울음 소리였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와인을 들고 거실로 걸어갔다. 사바나는 두 손으로 와인잔을 쥐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거실로 들어가자 그녀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집 밖에선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굵은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거실 창밖으로 번개가 섬광을 내뿜자, 이윽고 낮고 긴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잔을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의 옆에 앉으며 거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난로 진열대에 사바나와 팀의 결혼사진들이 보였다. 케이크를 자르는 사진과 교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옆자리에 서있고 싶은 마음이 순간 간절해졌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울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네요.』 『그럴 수 있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속에 담아둔 게 많잖아요.』 나는 말없이 창문을 강타하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굉장한 폭우네요.』 어색한 침묵을 깰 수 있는 말을 고르며 먼저 내가 말을 붙였다. 『네.』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앨런을 혼자 둬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잔을 톡톡 건드렸다. 『비가 그칠 때까지 안 나올 거예요. 번개를 싫어하거든요. 곧 그치겠죠. 바람이 폭우를 바닷가로 밀어낼 거예요. 최근들어 자주 그래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폭우가 오는 날 함께 있었던 것 기억나요? 우리가 짓고 있던 집 공사장에 제가 데리고 갔던 날요.』 『그럼요.』 『그날 밤이 지금도 생각나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날이잖아요. 그때가 엊그제 같아요. 당시에 저는 지금처럼 여기에 이러고 앉아 있었죠. 팀은 입원해 있고 앨런도 팀과 함께 가있던 날, 비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날이 갑자기 생각났어요. 마치 어제 일처럼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었어요. 비가 그치고서야 정신이 들어서, 그제서야 말들에게 밥을 챙겨줬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보니, 그때의 추억이 모든 꿈이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마치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남의 얘기처럼 말예요.』 그녀는 내곁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가 가장 생각나요?』 그녀가 물었다. 『전부 다요.』 그녀는 눈을 내려깔며 나를 쳐다보았다. 『특별한 기억도 없어요?』 폭우로 인해 실내가 어두워지며 분위기가 한껏 조성되었다. 지금의 분위기가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르지만, 잘못된 기대심에 마음이 초조하게 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가슴에 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내 여자가 아님을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실내는 온통 팀의 흔적이 베어있고, 더구나 그녀도 감상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나는 와인을 한모금 마신 후 다시 옆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없어요.』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하지만 나보고 늘 달을 바라보라고 말한 것 생각나요? 달을 보며 잊지 말라고 했던 말요. 그래서 다 기억하는 거에요.』 한가지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나는 지금도 달을 올려본다. 양심에 걸리는 생각이지만, 그녀도 나처럼 달을 바라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게 가장 생각나는지 아세요?』 그녀가 물었다. 『내가 팀의 코를 부러트렸을 때죠?』 『아니요.』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며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교회 갔을 때가 생각나요. 당신이 넥타이를 한 모습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아세요? 이제 자주 그렇게 차려 입으세요. 어울리거든요.』 그녀는 잠시 추억에 젖은 눈빛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만나는 사람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진작 말했겠죠.』 그녀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비 내리는 가운데 말 한 마리가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후에 나가서 밥을 줘야 해요. 쟤들도 내가 어디 있나 싶었을 거예요.』 『신경 안써도 돼요.』 그녀를 안심시키며 내가 말했다.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쟤들도 굶으면 얼마나 성격이 까칠해지는데요.』 『혼자서 다 하려면 힘들겠군요.』 『힘들죠. 하지만 별 수 있나요? 그래도 지금까진 사장님이 잘 배려해주고 계세요. 팀은 휴직계를 내놓은 상태고,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사측에서 제가 볼일 볼 시간을 넉넉하게 주시니까요.』 그녀는 장난기 서린 말투로 한마디 덧붙였다. 『군대도 그렇죠?』 『맞아요. 아주 똑같아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다가 다시 진정하며 물었다. 『이라크에선 어땠어요?』 매번 그곳 사정을 사람들이 물어올 때 들려주던 모래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바나는 내 이야기를 기다렸다. 나는 손을 뻗어 와인잔을 집으며 시간을 끌었다. 그녀 앞에서 그곳 이야기를 할 마음이 쉽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났다. 내가 원하는 쪽이든, 원치 않는 쪽이든. 사바나가 끼고 있는 반지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필히 배신감을 느낄 것이 눈에 선했다. 나는 눈을 감고 침공하던 날 밤의 사연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얘기 했을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비가 그쳤으니 한참 시간이 걸렸나 보다. 해는 여전히 낮게 하늘에 걸린 채 수평선 너머로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사바나는 다시 잔에 와인을 채웠다. 이야기를 다 마칠 무렵, 나는 녹초가 되어 두 번 다시 얘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사바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있다고 알려주려는 듯이 몇 차례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내가 물었다. 『신문 머릿기사나 기사 내용을 읽으면, 대개 군인들 이름과 이라크 도시에 관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게 일반적이지만, 당신 입장에서는 피부로 와닿는 ... 현실이잖아요. 아주 생생한 현실요.』 달리 거들 말이 없었다. 순간,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가슴이 요동쳤다. 『이제 그런 고생 안하면 좋겠어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움켜 쥐자, 그녀도 같이 힘을 주었다. 마침내 그녀가 손을 땠지만, 여전히 그 손길의 자취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흘러내린 머릿결을 귓가에 쓸어넘겼다. 그녀의 그런 습관은 엊그제처럼 생생하여 가슴이 아팠다. 『사람 운명은 모를 일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당신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 상상이나 해보셨어요?』 『아니요.』 내가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독일로 다시 복귀했을 당시만 해도, 저는 다른건 제쳐두더라도 당신과 꼭 결혼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녀가 계속해서 말하는 동안, 나는 와인잔만 내내 응시했다. 『또,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땐 더더욱 확신했어요. 더구나 우리가 잠자리를 가진 그 후부터 말예요.』 『그만!...』 나는 머리를 저어 흔들었다. 『그 얘긴 그만해요.』 『왜요?』 그녀가 물었다. 『후회되나요?』 『아니요.』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은 이제 유부녀잖아요.』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다 잊기를 바라나요?』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다. 『어쩌면요...』 『그렇게는 못해요.』 내심 서운하고 놀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제 첫경험인 걸요. 절대 못 잊어요. 누가 뭐래도 저에겐 특별해요. 우리 두 사람의 추억은 아름다웠어요.』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생각을 모은 듯, 그녀가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내가 팀과 결혼한 사실을 알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나는 신중하게 생각을 모은 후 대답하였다. 『처음부터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팀도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팀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요.』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후, 조금... 갈등은 했었죠. 팀을 만난 건 당신이 잘 한 일이에요.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둘이 통하는 것도 많고요. 한편, ...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이가 오래가지 못했잖아요. 지금쯤이면 제대한 지 거의 2년은 됐을 시간이네요.』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미안해요.』 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솔직한 제 생각을 말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저를 기다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놀랍게도 어설프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런 갈망을 담겨있었다. 그녀는 와인잔을 집어들었다.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만남이 어디까지 지속됐을까, 사는 곳은 또 어디고,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특히 최근에는요. 어젯밤에 당신이 가고 나서 그 생각만 했었죠. 몹쓸 소리라는 것 알지만, 지난 2년간 확신을 가져온 게 있다면, 그건 우리가 진실로 사랑했더라도 언젠가는 깨졌을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 당신은 저랑 결혼하려고 했겠죠?』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거예요.』 문득, 지난 옛일이 우리 두 사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진실했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우리 사이 말이에요.』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의 눈망울에 회색빛 땅거미가 빛을 발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 팀이 지금 우리들의 이 순간을 짐작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미리 앞서가는 내 생각이 병적이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쉽게 떨쳐지지가 않았다. 팀이 죽으면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는 내 자신이 몹시 싫었다. 나는 애써 생각을 지워보려고 했다. 하지만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사바나를 품에 안고 우리 헤어져 있던 그 모든 시간들을 되찾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바나도 다음 일을 알고 있었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지만 내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들고 있던 와인이 쏟아지면서 우리 모두 옷이 젖었다. 흠칫 놀란 그녀는 와인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살갗에 붙은 블라우스를 손으로 떼었다.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가 말했다. 『갈아입으면 돼요. 옷을 물에 담가놔야겠어요. 내가 아끼는 옷이거든요.』 『알았어요.』 그녀는 거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통해 우측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어리석은 내 행동에 머리를 흔들어 저었다. 셔츠에 와인이 묻어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욕실을 찾아 복도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아무렇게 돌려서 열고 들어간 후,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반사된 복도 건너 너머로, 방문이 조금 열린 틈 사이로 사바나의 모습이 보였다. 상위를 다 벗은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을 억눌러보았지만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엿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차렸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방문을 급히 닫거나 몸을 가릴 줄로만 알았다. 대신 그녀는 시선을 고정한 채 좀 더 지켜보라는 듯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뒤돌아섰다. 거울에 반사된 우리는 복도를 경계로 서서 서로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조금 열며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아마 천년을 내가 살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복도를 건너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녀의 마음도 같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서로 일체된 감정은 순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후회하며 나를 원망할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이미 사바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서둘러 정신을 가다듬고 시선을 거뒀다. 그녀가 뒤로 돌아서려는 그때, 현관문이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더니 밤의 정적을 깨는 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앨런이었다... 나는 황급히 거실로 뛰어갔다. 앨런은 이미 부엌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찬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쾅’하고 시끄럽게 닫혔다. 그는 마치 죽음을 맞이한 사람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순간, 사바나가 셔츠를 고쳐 입으며 빠른 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갔다. 『앨런! 나, 여기 있어!』 그녀가 넋나간 사람처럼 소리쳤다. 『이제 괜찮아.』 앨런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찬장 문을 세게 열고 닫았다. 『제가 있어야 되나요?』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요.』 그녀가 강하게 거부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간혹 이래요.』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간 후, 앨런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앨런의 울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옆으로 다가가서 앨런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어 내가 선뜻 나서고 싶었지만, 사바나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계속 걸며 앨런의 팔을 잡았다. 문을 여닫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문을 여닫는 소리도 잦아들더니, 이내 리듬을 타듯 간헐적인 몇 차례의 소리와 함께 결국 소리가 멈췄다. 앨런의 울음소리도 같은 톤을 유지했고, 사바나의 말소리도 한층 부드럽게 들렸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얼마 후, 다시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날은 어두웠다. 구름이 지나간 산 너머에 별들이 총총 떠있었다. 나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여 다시 거실로 가서 부엌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사바나와 앨런은 부엌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찬장에 기대고 앉아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앨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앨런은 언제든지 발작할 것처럼 눈을 심하게 깜빡거렸다. 사바나의 눈에는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었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앨런에게 속상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형을 사랑해.』 앨런이 말했다. 병원에서 들었던 저음은 온데간데 없고,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떠는 어린 동생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아픔의 소리였다. 『알아... 나도 팀을 사랑해. 아주 많이. 너도 무섭지만, 나도 무서워.』 그녀가 말하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베어났다. 『형을 사랑해.』 앨런이 반복해서 말했다. 『며칠 후면 곧 퇴원할 거야. 의사 선생님들도 최선을 다 하고 있으니까.』 『형을 사랑해.』 그녀는 앨런의 머리에 키스했다. 『앨런, 팀도 널 사랑해. 나도 널 사랑하고. 형도 너랑 함께 말을 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한테 형이 한 얘기거든. 또 널 정말 자랑스러워 해. 네가 일도 잘 한다고 얼마나 칭찬하는데.』 『무서워.』 『나도 그래. 하지만 의사 선생님들도 최선을 다 하고 계셔.』 『형을 사랑해.』 『나도 그래. 나도 팀을 사랑해. 내가 얼마나 팀을 사랑하는지 상상도 못할 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내내 소외감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동안, 사바나는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또 넋놓고 지난 추억에 빠져 홀려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를 뒤져 자동차 열쇠를 꺼내고 돌아서자, 눈물로 충혈된 눈가가 얼얼하게 아렸다. 현관문을 열자 ‘끼익’하고 큰 소리가 났지만 사바나가 이 소리를 들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올 땐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평생 이렇게 지친 하루가 있었던가 싶었다. 얼마 후, 차를 몰고 모텔로 향하던 중, 신호대기로 차를 세워야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운전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칠 것 같지 않은 뜨거운 남자의 눈물을. 그날 저녁, 나는 모텔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문밖으로, 손님들이 바퀴달린 여행용 가방을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댈 때마다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일시적으로 방안에 반사되어 유령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한 생활에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저들을 시기했다. 그러나 내심, 지금 같은 생각을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애써 잠을 청하지는 않았다. 팀 생각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병원에서 봤던 수척한 모습이 아니라, 해변에서 만났던 단정한 머리와 누구에게나 잘 웃어 보이던 그 청년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아버지의 임종 직전의 시간들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가 동전 얘기를 하면 아마 간병인들이 잘 들어주셨을 것이다. 또 아버지가 수면중에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고 말씀해 주신 그곳 원장님의 말씀이 사실이었길 기도했다. 앨런과 앨런만의 정신세계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사바나의 생각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오늘 함께 있었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지난 옛일만 수없이 떠올렸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공허함에서 나는 허둥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대지 위로 황금빛 구슬 같은 해가 떠올랐다. 샤워를 마치고 몇 개 되지 않는 짐을 다시 차에 실었다. 길 건너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주문했다. 그러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는 아침이 막상 나왔을 때, 나는 음식을 옆으로 치우고 커피 한잔으로 대신했다. 사바나가 벌써 일어나 말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내가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오전 아홉시였다. 나는 방문자 서명란에 이름을 기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갔다. 전날처럼, 같은 복도로 걸어갔다. 팀의 병실은 반쯤 열려있었고, 안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팀이 놀란 듯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존!』 텔레비전을 끄며 그가 말했다. 『어서 와요.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어요.』 나는 어제 앉았던 같은 의자에 앉았다. 팀은 혈색이 한층 더 좋아보였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들어올려 자세를 잡은 후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이제 떠나려고요.』 내가 말했다. 『내일 독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야죠. 이쯤 출발해야 시간이 맞잖아요.』 『그러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오늘 오후면 퇴원할 것 같아요. 밤새 푹 자서 몸이 좋아요.』 『다행이네요.』 내가 말했다. 『몸이 좋다니 정말 기쁘네요.』 어젯밤에 그녀와 있었던 일을 두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나 싶어 그의 눈을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런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존, 여길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뭐죠?』 그가 물었다. 『글쎄요...』 나는 말했다. 『당신을 보고 가야할 것 같았어요. 또 당신도 나를 보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병실에서 보이는 거라곤 오직 에어컨 시설물밖에 없었다. 『지금 가장 비참한 게 뭔지 알아요?』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앨런이 걱정돼요.』 그가 말했다. 『내 병은 내가 잘 알아요. 회복될 가능성도 희박하고, 그런 용기도 없죠. 다 수용할 수 있어요. 어제 말했듯이, 저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더 좋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죠. 사바나는 ... 만약 내가 정말 잘못된다면 정말 힘들어할 테죠.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깨달은 게 있어요.』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거요?』 『맞아요. 그거예요. 하지만 절대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슬픔도... 결국에는 차츰 사라져서 다시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완전히 소멸되진 않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참아낼 수 있는 정도까진 가더라고요. 사바나도 그렇게 되겠죠. 아직 젊고 생활력도 강해서 잘 헤쳐 나갈 거예요. 문제는 앨런이죠...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누가 그 아이를 돌봐주겠어요? 또 어디서 살고요?』 『사바나가 있잖아요.』 『그럴 테죠. 하지만 그건 그녀에게 억울한 일 아닌가요? 그런 책임감을 씌워줘야 한다는 게 말예요.』 『그런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죠. 사바나는 꼭 앨런을 챙길 거예요.』 『어떻게요? 일도 해야 하는데 앨런은 누가 돌보고요? 아시지만, 앨런은 아직 어려요. 고작 열아홉 살이에요. 사바나가 그 아이를 그 후 오십년 동안 계속 돌봐야 한다는 건가요? 내 동생이니까 편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바나 입장에서는 ...』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다워요. 평생 재혼하지 않고 살아가라는 게 그녀에게 억울하지 않을까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그녀의 새 남편이 우리 앨런을 보살펴 줄까요?』 내가 대꾸하지 않자, 그는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당신 같으면요?』 아무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 누워서 그런 생각만 해요. 아프지 않고 정신이 들 때만요. 사실, 생각이 많아요. 당신 생각도 하죠.』 『저를요?』 『지금도 사바나를 사랑하죠?』 나는 표정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팀은 이미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가 말했다. 『이미 알고 있어요. 예전부터요.』 그는 애처로워 보였다. 『사바나가 당신 얘기를 처음 하던 날의 그 표정을 지금도 기억나요. 저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죠. 저도 당신을 봤을 때 당장 믿음이 갔어요. 그래서 사바나가 기뻐할 때 저도 함께 좋아했죠. 당신이 그렇게 사바나를 남겨두고 복귀하던 해, 사바나는 일년 내내 당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어요. 하루 하루 지날수록 심장 한편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사람마냥요. 오직 당신 생각밖에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당신의 제대가 미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린 르노아로 돌아오게 되었죠. 부모님도 그렇게 그때 돌아가시고 ...』 그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도 내가 사바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건 제가 열두 살 때였어요. 그녀도 차츰 저를 사랑하게 되었고요.』 『왜 이런 말을 저한테 하는 거죠?』 『왜냐면...』 그가 말했다. 『예전 같지 않으니까요. 저를 아직도 사랑한다는 것 잘 알아요. 하지만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던 방식과는 아주 달라요. 타오르는 열망도 보이지 않았죠. 뭐, 어떻게든 함께 잘 살아오긴 했지만요. 목장 일을 시작할 땐 그녀도 너무나 좋아했어요... 그녀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어요. 그러던 가운데 제가 아프게 되었어요. 그 후, 사바나는 늘 절 간호해 주었죠. 저도 사바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똑같겠지만요.』 그는 잠시 생각할 말을 고르려는지 얘기를 멈췄다. 그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당신이 병실에 있을 때 사바나가 당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봤어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눈빛이었죠. 앞으로 그 마음은 영원하겠죠. 그래서 속상했지만, 제 마음 한편은 어떤지 아세요? 저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그녀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거예요. 다른 것 없어요. 그녀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요.』 목이 바짝 말라서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죠?』 『혹시 제가 잘못되더라도 사바나를 잊지마세요. 제 마음과 꼭 같이 사바나를 늘 아껴주세요. 약속해줘요.』 『팀 ...』 『아무 말 마세요, 존.』 그는 내 말을 제지하거나 작별을 하려는 듯 한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 말대로 해주세요. 아시겠죠?』 그가 등을 돌리며 누었다.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말없이 병실 문을 닫고 걸어나왔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셨다. 나무들 어딘가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어디에서 들리나 찾아보았지만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은 절반이 차있었다. 곳곳에서 병원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과 병원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서성거렸다. 병문안 때 지인들에게 보여주었던 낙천적인 마음도, 병실 밖을 나서며 혼자 남게 되면서 모든 희망을 잃은 사람들처럼 저마다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픈 환자라도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분만실의 산모처럼 신생아를 안으며 기쁨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병원 방문객들은 아마 나처럼 간신히 버텨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차장 앞 벤치에 앉아 이곳을 찾아 온 이유를 생각하며, 이내 후회하게 되었다. 팀과 나눈 대화를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그의 비통한 표정이 떠올라 눈을 감고 말았다. 사바나를 사랑하는 것이 ‘잘못한 일’이라고 후회하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면 기쁘고 평화로운 마음이 생겨야 하는데, 이렇게 지금 마음만 아프니 말이다. 팀을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고, 사바나를 생각해서도, 심지어 내 신세를 생각해도 마음이 아팠다. 사바나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온 것도 아니고, 결혼 생활을 파탄시키려고 왔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혹여 이미 그렇게 한 것은 아닐까? 내가 양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심정은 녹슨 페인트 깡통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지갑에서 사바나의 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구겨져서 주름이 가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나는 앞으로 다가올 한해가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팀의 소생 여부는 모를 일이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분명한 건, 일이 어떻게 되든 사바나와 내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꿈 많던 시절에 만났던 우리 두 사람, 이제는 가혹한 현실만 남아 그 시절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비비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밤에 사바나와 나 사이의 위태로웠던 관계를 팀이 알고 있거나 눈치 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처럼 사바나를 아껴달라고 부탁한 그의 말을 생각해 봐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팀이 죽게될 경우, 그가 부탁한 일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 잘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그의 배려심에 내 마음은 더욱 불편했다. 마침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마땅히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는 못했지만, 되도록 이 병원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도 르노아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자동차 열쇠를 꺼냈다. 차가 세워진 곳에 가까이 와서야 사바나의 트럭이 내 차 옆에 주차된 것을 보게 되었다. 사바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블라우스를 매만지며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몇 걸음 멀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존...』 그녀가 말했다. 『어제는 간다는 말도 안하고 가버렸더군요.』 『네, 그랬어요.』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여기 온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여기 온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말했다. 『모텔에 들려서 물어보니까 이미 짐을 들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에 와보니 당신 차가 있길래 무작정 기다린 거죠. 팀은 만나봤나요?』 『네. 어제보다는 낫더군요. 본인 말로는 오늘 늦게나 퇴원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다행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 차를 가리켰다. 『이제 떠나려고요?』 『이제 돌아가야죠. 복귀 날짜가 다 됐어요.』 그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한테 들려서 인사는 하고 갈 생각이었어요?』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히 내 마음을 말했다.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녀의 표정에는 서운함과 실망감이 엿보였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병원을 본 후,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녀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가야 되죠?』 앞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많은 차량들이 속도를 줄이며 서행하고 있었다. 빨간색 도요타를 탄 운전자는 늘어진 차량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차선을 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 나로서도 이미 그녀가 내 대답을 짐작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서서히 뒤돌아서며 내가 말했다. 『가야겠네요.』 팔짱을 낀 그녀의 손마디는 힘을 주어 하얗게 핏기가 없었다. 『편지 써도 되나요?』 나는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각자 다른 패의 카드를 거머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건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이해 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당신이 결혼한 사람은 팀이지, 내가 아니에요.』 나는 잠시 생각을 고르며 다음 말을 찾고 있었다. 『팀은 좋은 사람이에요, 사바나.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에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당신이 팀과 결혼해서 저도 기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구나 당신의 결혼생활을 파탄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마음도 그럴 테고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팀도 동시에 사랑하고 있잖아요. 그걸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긴 해도 분명한 사실이죠.』 팀의 불명료한 미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차마 내뱉기 힘든 말을 나는 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안 보는게 좋겠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하면, 팀은 괜찮을 거니까요. 또 내 느낌이지만, 그렇게 돼야 하고요.』 『그런 소리 마세요! 어떻게 장담하죠!』 『네...』 내가 말했다. 『장담은 못하지만요.』 『그럼, 왜 이렇게 끝내야 돼요? 이렇게 말이에요.』 한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냥 자리를 피하고 떠나야 했지만, 나는 그녀 앞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그녀 앞에 가까이 선 나는 눈물을 살짝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으로 두려움과 서러움, 분노와 배신의 감정이 보였다. 그중, 내 생각을 바꿔주길 간곡히 부탁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당신은 팀과 결혼한 유부녀에요. 당신 남편, 팀은 당신이 전부에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하염없이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눈물이 맺혔다. 나는 다가서서 사바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사랑해요, 사바나.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은 내 인생 일대의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내 절친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이죠.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이 내 인생을 소생시킨 장본인이잖아요. 더구나, 우리 아버지를 내게 돌려주었고요. 어떻게 그 사실을 잊겠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날은 언제나 당신뿐이에요. 이렇게 떠나야 해서 미안하지만, 가봐야 해요. 당신도 가서 남편을 만나야 하잖아요.』 내 몸에서 그녀는 서럽게 울며 떨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몸에서 떨어졌고, 그녀를 안아보는 것도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사바나의 눈을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걸어갔다. 『저도 사랑해요, 존!』 그녀가 말했다. 『잘 있어요.』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인사했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병원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작별은 늘 힘겹다. 마음 한 구석, 나는 차를 돌리고 다시 병원으로 가서 늘 그녀를 지켜주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팀이 내게 말했던 모든 것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나는 마을을 벗어나 작은 한 편의점에 들렸다. 연료를 주입해야 했다. 그 사이는 나는 가게에 들어가 생수를 한 병 샀다. 계산대로 다가갔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팀을 위해 주인이 마련한 모금함이었다. 나는 그 모금함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많은 동전과 지폐로 채워져 있었다. 모금함에는 지역 은행의 한 계좌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계산대의 점원에게 지폐 몇 장을 동전으로 교환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나는 멍한 상태로 차에 다시 돌아왔다. 차문을 열고 변호사가 주고 간 서류와 연필을 찾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깨달은 나는 공중전화로 갔다. 차들이 세차게 달리는 길가에 있었다. 서류에 있던 전화번호를 입력한 후, 나는 녹음된 육성을 잘 들으려고 수화기를 바짝 귀에 갔다댔다. 나는 서류 봉투 위에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갈겨 적고 전화를 끊었다. 동전을 더 넣고 장거리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동전을 더 넣으라는 녹음 육성이 들렸다. 동전을 더 넣으니 곧 전화 연결음이 들렸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고, 내가 누구인지 밝히며 혹시 나를 기억하는지 물어보았다. 『알다마다! 존, 잘 지냈는가?』 『네, 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참, 안됐구만...』 그가 말했다. 『괜찮은가?』 『글쎄요.』 내가 말했다. 『내가 도와줄 일이 있겠는가?』 나는 눈을 감고 사바나와 팀을 생각하며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을 우리 아버지께서 용서해주길 바랬다. 『네...』 나는 동전 수집가인 그분에게 말했다. 『그럼요. 아버지의 수집품을 내놓고 싶어요. 돈이 급하니까 가급적이면 서둘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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