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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중용 대학
어느곳에도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용의 도라고 합니다. 전 언제나 이 중용이라는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려 하고 있습니다. 적당히를 매우 좋아합니다. 대충대충과 적당히는 다릅니다. 두 가지는 비슷한 모양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대충대충은 부정적인 부분이 포함됩니다. 수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한다거나 성의없이 무엇을 할 때 대충대충이 됩니다. 적당히는 중용과 비슷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함에 있어 넘치지 않게 하는 자세입니다. 과도하게 무엇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하게 한가지에 대해 지지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사회에 있어 이 적당히는 꼭 긍정적인 가치관은 아니겠지만 전 적당히가 맘에 듭니다. 무언가를 함에 있어 적당히는 오히려 쉽지 않습니다. 적당히 한다는 거 자체가 무언가를 태만히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집단간의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합의한다는 것은 갈등에 대해 균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는 것이 합의라고 생각하곤 하죠. 거기다 편나누기가 되면 더 어려워집니다. 한쪽편에 서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요구받곤 하죠... 양쪽의견에서 옳은 부분을 찾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중간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용은 이런 세상에 여전히 필요한 책입니다.
주자는 대학을 먼저 학습하고 중용을 익혀라고 권했다고 합니다만... 이후엔 반대로 중용을 먼저 익히고 대학을 익히는 것이 맞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중용은 자신을 닦는 데 더 가깝고 대학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에 더 가깝기에 그렇다고 합니다만... 책을 읽고 중용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주자의 의견이 더 일리있어 보이거든요. 올재의 한글 중용은 흥미롭습니다. 주자와 다산의 학설을 비교하고 다산의 학설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없잖아 있는데.. 전체적으로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만 무조건적으로 동감하긴 어려웠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자는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중용을 해석하였고 다산은 유신론(천주교인이었죠)의 입장에서 중용을 해석한 것에 차이가 있으며 성리학적인 입장과 실학의 입장이라는 차이도 있을겁니다.
한글 중용임에도 주석엔 죄다 한자만 나열된 것도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쉬운 한자이고 한자를 함께 적지 않는다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기때문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능하면 한글/한자 병기였으면 어땠을 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거기다 상세한 주석이 나쁜건 아니었습니다만... 한 단락 마다 방대한 주석이 있는건 본문을 읽는 데 상당히 방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원문과 해석만 달고 주석은 후주로 달았으면 읽기 더 편하지 않았을 까.. 라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대학은... 자신을 닦고 가족을 건사하고 국가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중용 후 대학이 맞는거 같긴 합니다만... 전체적인 구성이 개론적인 내용으로 보여 중용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배우기엔 대학 후 중용이 더 나아 보이더군요.
중용과 대학에서 세상에 중심을 잡는법과 자신을 닦는법을 배울 수 있을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