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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에는 지난 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한 발 한 발 목숨을 통째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64p) 목숨을 걸고 촐라체에 왔는데, 촐라체가 없다. (118p) 눈덮인 산. 그 속에 숨겨진 크레바스. 조난 그리고 이어지는 형제애. 아주 극적인 장치들은 다 끌어다 썼다 싶지만서도 그러면서도 잘 읽혀지는 것이 이런 소재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다분히 상업적이다 싶으면서도 또 감동을 주는 이야기. 외면할수 없는 문학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당최 왜 무엇때문에 산을 오르는가. 누군가는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른다라고 말을 했다지만 헉헉대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만 하는 것이 등산이 가장 기본 아니던가. 누군가는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기도 했다지만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오르는 이도 있다지만 별달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등산이기도 하다. 그런 개인적인 저의견은 차치하고 오늘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산은 북적거린다. 그 꼭대기에 서고 싶어하는 자들로 말이다. 많츤 주인공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단 세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베이스 캠프를 지키는 캠프지킴이. 그리고 빙벽등반을 하는 배다른 형제 상민과 영교. 단촐하지만 그들의 여정은 촐라체라는 큰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없이 원대하고 크게만 보인다. 촐라체를 향한 그들의 등반은 심지어 무모해보이기까지 하지만 도전이라는 것이 원래가 무모함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막다른 골목에 놓인 그들이 할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선택. 그랬기에 그 선택은 더욱 질실하고 더욱 간절하고 더욱 안타까울수 밖에 없다. 제발 살아남으라고, 자연을 이길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생을 유지하라고 응원하고 격려하게 된다. 에베레스트 남서쪽에 위치한 촐라체. 그 북벽을 등반하기로 한 형제. 그들이 본디 친했던 것도 아니고 등반을 여러번 한 것도 아니다. 형은 자신을 오랜만에 찾아온 동생을 데리고 이 곳에 왔고 그리고 등반을 준비할 뿐이다. 세르파를 데리고 가는 것도 아니고 등반대를 조직해서 가는 것도 아니다. 도구나 기구들을 많이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오직 맨몸으로 자신들의 힘으로만 그곳을 오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무모한 도전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들의 도전은 아무런 소실없이 무사히 끝나게 될 것인가. 아무리 등반을 한다해도 베이스캠프를 지킬 누군가는 필요한 법.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던 아들을 절에 떠나보내고 헛헛한 마음으로 산을 떠돌던 그가 캠프를 맡게된다. 형제에 비해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기는 하나 그가 이곳까지 오게 된 그 마음을 생각해보면 그 또한 형제와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 형제는 무사히 살아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캠프지킴이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눈덮인 산은 위험하다. 그냥 높은 산도 위험하지만 눈이 덮이면 그 밑에 크레바스 즉 갈라진 틈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더 위험한 것이다.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피켈로 하나씩 찍어가면서 확인을 하고 가야하기 때문에 더 시간이 오래걸린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눈이 내린만큼 추위도 한몫한다. 보통의 산보다 더 위험해지는 겨울 눈산. 그들이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등반을 계획한 이유는 지금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삶을 조금 외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은 아닐까. 이런 위험한 도전을 이겨내고 나면 자신들이 외면하고 있던 것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설마 죽음을 계획하고 도전장을 던질진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오래전 보았던 버티칼 리미트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크레바스에 걸려서 하나의 자일에 여러명이 달려있던 상황. 등산가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줄을 끊으라고 한다. 단 한명이라도 살려면 눈을 감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일에 연결해서 가는 형테를 안자일렌이라고 한다. 위험한 지역을 갈때 서로 같이 이동하기 위해서 엮어지는 것이지만 정작 위험한 상황에서는 그 줄을 잘라야 살수 있는 것이다. 단 두명인 형제는 이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될까. 한편의 산악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생생함이 책속 가득하다. 2008년 첫판을 인쇄한 작품이면서 2010년에 25쇄가 찍힌 작품 그 인기를 알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수 있는 그런 작품이라는 소리다.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가들의 영면을 기린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저씨던 산악가 박영석의 명복도 아울러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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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인도를 여행하고 네팔로 넘어갔었다. 당연히 히말라야를 보기위해서였다. 그 곳이라면 내가 가진 절망을 모두 버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포터없이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가는 길은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 절망이고 고독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일주일간의 산행 끝에 내가 얻은 깨달음은 '다음에 올 땐 꼭 포터를 고용하자, 등산을 할 때는 등산화를 신고 스틱을 들고 나서자(나는 정말 동네 뒷산을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화를 신고 ABC를 올랐다)'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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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스24에서 알게 된 어느 블로거 님에게서 받은 책이다. 이 분은 상당히 많은 책을 블로그를 통해 나누는 분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던 분이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책을 좋아했지만 내가 읽거나 구입을 한 책들은 어느 한 분야로 편향되어 있었다.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분야의 책만 읽었다는 뜻이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선물을 한 블로거로 인해 다양한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나로 하여금 독서의 폭을 넓어지게 하고 생각하지 않았던 차원의 독서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준 고마운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2년 이상 나의 책꽂이에 그대로 꼽혀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명성과 이 책이 네이버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책에 대해 그 이상의 배경지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박범신 작가는 신문소설을 많이 썼고, 그 연장선에서 인터넷 소설을 쓰지 않았나, 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촐라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이 너무 가벼웠다. '촐라체'가 히말라야의 고봉인 것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가벼운 연애소설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인해 이 책은 펼치지도 않은 채 2년 가까이 사장되어 있었다.
그러던 책을 펼친 것도 아주 우연이었다. 외출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책을 들고 나가는 것이 관례인지라 무심코 꺼냈을 뿐이다. 완전한 우연은 아니다. 두어 달 전에 <은교>를 읽었으므로 작가의 책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만난 책이 닷새 동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표현은 했지만 손에 땀을 쥘 정도로 흥미진진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작품의 화자인 나(캠프지기)는 물론 등반의 주역인 박상민과 하영교 모두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들이다. 작품속의 현재 상황도 역시 암담한 상태다. 게다가 최악의 조건에서 무모할 정도로 시도한 등반이다. 어쩌면 자살의 한 방법으로 등반을 택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 작품의 분위기는 밝을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등반 용어들은 생소했다. 부록으로 용어사전이 있었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것을 찾는 것도 번거로웠다. 또, 용어사전을 보아도 잘 감이 잡히지 않는 용어도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나오는 네팔의 사상이나 붓다의 세계도 신비롭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낯선 내용들이다. 스토리는 장쾌하고 박진감이 넘쳤지만, 그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란 것은 뭐 그리 아지자기하고 감미롭기만 하던가? 촐라체에 도전하는 상민과 영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마다의 삶이라는 장애물을 돌파하려는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산이 좋아서 간 것도 아닌 것 같다. 어딘가로의 도피였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무언가를 찾으려는 의지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그들의 모습이 구도의 자세만큼이나 진지했던 이유기도 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조는 아버지가 다른 박상민과 하영교라는 형제가 전인미답이자 죽음의 지대인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에서 6박 7일간 겪는 등반과 조난, 그리고 귀환의 모습이다. 그것을 나(캠프지기)와 상민과 영교를 시각에서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세 명이지만 전체적인 화자는 나이다. 즉, 형식적인 화자는 세 명이지만, 실질적인 화자는 한 명(나)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 최근에 읽은 그의 작품 <은교>가 연상되었다. <은교>에서는 Q변호사, 이적요 시인, 서지우가 지금은 여대생이 된 여고생 시절의 은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가 은교를 바라보는 모습을 Q변호사가 소개하는 형식이 이 책이다. Q변호사는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의 일기를 번갈아 소개하면서 은교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간간히 자신의 견해도 밝히고 있다.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는 외적으로는 사제라고 볼 수 없지만, 내적으로는 사제지정 이상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해서 애증을 느끼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은 한결같이 은교를 아끼고 있다. Q변호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과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촐라체>의 박상민과 하영교 형제는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Q변호사는 나(캠프지기)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은교는 누구인가? 촐라체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고생 은교는 전 세계 젊은 산악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꿈의 빙벽 촐라체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작가의 창작 순서는 <촐라체>과 <은교>보다 앞섰으나, 나는 <은교>를 먼저 읽었으므로 나의 입장에서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면 작가는 촐라체를 향한 박상민 하영교 형제의 열망을, 최근작인 <은교>에서 은교를 향한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의 애정으로 대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적요 시인이 늙고 병들지 않았다면 어찌 은교같은 여고생을 이상향으로 여겼겠는가? 마찬가지로 박상민이 부인과 이별하고 아들이 입산하는 암담한 현실이 아니었다면 굳이 촐라체의 빙벽에 무모하게 도전했겠는가? 작가는 독자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그대에게 촐라체는 무엇인가?”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촐라체와 은교를 찾았으면 좋겠다.”상민과 영교 형제는 촐라체 등반과 조난을 통해 몸의 이곳저곳을 절단하는 장애를 입었지만, 결국 정상에 올랐다.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는 은교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끝내 세상을 떠났지만, 결과적으로 은교의 사랑을 얻었다.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있다면 촐라체에 오르는 상민처럼, 은교를 사랑한 이적요 시인처럼 그 가치를 향해 돌진하고 싶다.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내게 있어서 은교는 누구이고, 촐라체는 어디에 있는가?” * 덧붙임 :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촐라체>와 <은교> 중에 어느 한 권만 읽은 손님이 계시다면, 나머지 작품도 함께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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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교를 봤다. 스토리와 표현의 섬세함이 좋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이 오고가지 않지만(이 영화와 어울리지도 않지만), 젊은 남녀의 노골적인 로맨틱 영화보다 뜨거웠고, 가족영화 보다 훈훈하고 순수했다. 이런 면의 사랑을 생각한 작가가 궁굼했다.
2) 박범신을 알게됐다. YES24 서적을 뒤지며, 은교와 같은 감동을 느끼고 싶어, 작가가 쓴 다른 서적을 찾아 보았다.
3) 촐라체가 이 시대의 젊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쓴 책이였다.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다. 평점까지 좋다. 산 이야기라 잘 알지도 못하는 어려운 등산 장비 단어가 잔뜩 나온다. 속도가 붙지 않고, 책을 잠시 덮었다.
4) 박범신 힐링캠프 인터뷰 인터넷 뉴스를 우연히 봤다. 우연히 그가 젊은날 자살시도를 5번이나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는 사람이, 젊은날 5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다고?! 반대로, 죽음 끝에서 5번이나 다시 살고자한 사람이다. 어떤 용기의 메시지 일까? 다시 책을 폈다.
5) 촐라체를 다시 읽으며, 도저히 용기의 메시지를 찾기가 어려워지고..
6) 강의 100 도씨를 봤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꺼두었던 티비를 켰다. 국민방송 전국노래자랑 보고 꺼두었던 채널이 그대로였다. 때마침 9번에서 강의 100도씨가 시작했다. 멍을 그리며 티비를 보고 있던 중, 박정헌이라는 강연자가 나왔다. 손가락이 잘렸는지 손끝이 뭉퉁했지만, 강연 첫머리에만 살짝 눈에 들어왔지 그의 당당하고 당찬 기운과 강연에만 집중 됐다. 강연 내용이 어찌도 절묘하게 내가 읽었던 촐라체의 이야기와 같은지, 그때서야 촐라체의 실제 주인공이란것을 알게 됐다. 크레바스, 책에서 어렵게 읽어낸 등산 용어였는데, 강연자가 이야기 할 때마다 이해가 어찌나 잘 되던지! 그리고 그 책이 실화라는 사실에 입을 쩍쩍 벌리며 감탄을 연발하며 봤다. 강연이 끝날 때 쯤, 그의 뭉퉁한 손끝은 역경을 이겨낸 훈장처럼 보였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7) 촐라체를 읽고, 누구나 말하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내 생각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다시한번 세상은 혼자보단 함께 살아가며 더 많은 것은 배우고 더 큰 아름다운을 느낄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그리고 이시대의 젊은이인 나도 책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읽은 촐라체 끝. 2012/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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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동부 쿰부 지방에 있는 산 촐라체.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로 6440m나 되는 전 세계 젊은 클라이머들이 오르기를 열망하는 빙벽이다.
이글을 읽는 와중에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인공인 영화'클리프행어'가 자꾸 생각났다. 록키 산악 구조대원으로 일하던 주인공이 동료 연인을 구조하다가 죽게해, 가책을 느끼고 산을 잠시 멀리하지만, 다시 산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산을 보는 순간, 뜨거운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나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고군분투하게 된다.
촐라체가 영화와 같은점이라면 인간이 불가능해 보이는 자연의 위대함을 인간애로 헤쳐나가는 점일 것이다. 영화는 음모에 연루된 사건을 다뤄 인간을 해치지만, 촐라체는 정상에 올라 하산하면서 실족한 두 형제의 지옥같은 크레바스 속에서 살기위한 인간애와 갈등이 잘 그려져 있다. 크랙, 피켈, 하켄, 프렌드, 슬링, 카라비너 등 생소한 산악 용어가 읽는 나를 하여금 낯설게 느껴지게 했지만, 6박 7일간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의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나오려는 의지와 끈기가 물질적 풍요로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강추 책이다. 온 몸이 얼어붙고 환영을 보다가 실신을 몇차례. 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젖먹던 힘의 몇배로 기적을 만들어 내는 장면은 내가 깊은 웅덩이에서 빠져나와 안도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마의 산 촐라체.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왜 험난한 등반을 하는 걸까?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자연의 절대적인 위엄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겠다. 인터넷 연재소설로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얘길 들었다. 아직도 산악 소설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라고 회자되고 있다는 촐라체. 주인공들이 살아나오기까지 리얼한 묘사가 궁금하다면 읽어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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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결국 두 갈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의 길은 경쟁에 가위 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일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안락한 일상을 버릴지라도 불멸에의 영성을 따라 이상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일 것이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삶의 모든 것이 자신을 버린다고 느낀 그들은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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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용서 그리고 새로운 출발'
자연이 현대인에게 던져주는 메시지.
왜 산을 오르냐는 세인의 말에 "산이 거기에 있어 간다"는 어느 산악인의 말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대답에 대한 '선문답禪問答'이다. 인간이 끊임없는 전인미답의 야생을 찾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사는 것이 이게 아닌데...'라고 느끼면서도 관계의 얽힘에 이끌려 하루 하루를 보내는 현대인들이 한치 앞을 알 수 없어 두렵도록 거대한 야생을 헤치면서 자신속에 숨어 있는 '살아야하는 답'을 구하기 위해 찾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살아오면서 풀지 못한 '미망未忘'을 준엄한 자연에 고백하고 털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많은 최고봉을 올랐던 어느 산악인은 인터뷰에서 '자연을 정복한 최고의 인간'이라는 소개에 당치 않는 소리라고 말하며 '준엄한 자연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는가? 내가 오르도록 자리를 허許해준 자연에 감사히 생각하며 오를 뿐'이라며 '올랐던 산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오르기 싫은 무서운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에게는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짓말을 하면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이 생生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떠난다. 그런 것처럼 '상민'은 고단한 삶을 등지고 산에 올랐고, '영교'는 이미 '채권자를 찌름'으로써 사회와 안녕을 하고 형을 따랐다. 그들은 문명으로 대변되는 장비와 식량을 최소화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자연을 마주 대했다. 끝이 없는 크레바스와 쏟아지는 눈사태, 그리고 살을 에는 눈보라 속에서 고통받으며 '왜'라고 외치며 자연에게 답을 구했다. 알 수 없기에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단지 애태우며 둘을 지켜본 '캠프지기'는 저자이고, 또 독자인 나였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가슴 뜨거운 무엇을 느끼게 되었다.
최고봉을 오르거나 극지를 탐험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지구상에 인간의 발자국이 안닿은 곳없다는 정복자의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구도求道'의 판타지에 덤벼드는 그들의 용기가 부러울만큼 존경스러운 때문은 아닐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하고 최소의 섭생과 수면으로 버텨가며 고군분투하다가 도중에 목숨을 잃거나 자연속에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목적을 이룬후 다시 원래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손발이 얼어 동상에 걸려 손가락과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그 무모한 짓을 지켜보면서 과연 그들이 버리고 온 것은 무엇이고, 얻어온 것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이 그들에게 길을 내주었듯이 인간에게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을 하진 않았을까?
90년대까지 신문연재소설의 최고를 자랑하던 저자 박범신이 절필을 선언하고, 미래의 신문이라 할 수 있는 포털사이트에 연재를 하게 된 작품이 이 책 <촐라체>인 것은, 촐라체 북벽을 마주했던 저자가 떨쳐내고 구하고자 했던 '나아가야 할 바'를 대신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세상에 대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을 하라는 이야기를 이 책이, 그리고 촐라체가 내게 말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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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흥미위주의 소설은 많다. 재미를 위한.. 하지만 박범신님의 "촐라체"는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도 전하는 메세지가 뛰어난 자기계발서이다. 다시금 생각하게끔 만드는 "나의 촐라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촐라체를 어떻게 넘을것일까...? 극중 상민과 영교는 최소한의 장비로 넘는 알파인스타일의 등반법을 선택하고 넘는다. 어떤장비의 힘이나 많은 인원의 힘을 빌려서가 아닌 최소한의 장비로 촐라체를 넘는다. 물론 위험을 동반하고 역시 그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 자신들이 넘어야만 할 촐라체라면, 자신들만의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넘고만 싶을것이다.
"가장 차갑고 가장 뜨거웠던 7일" 글머리에서 느낄 수 있듯 특별한 구분없이 소설전개는 일자별로 시간에따른 흐름에 의해 전개된다. 여기서 하루하루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이 하루하루를 비박하면서 독자는 상민, 영교 혹은 정선생과 같이 하나가 되어진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고가면서, 각각 서로의 대한 생각과 갈등-극중 인물들은 서로 모르는 감정-들을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알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보니 내용전개의 묘사도 무척 사실적이다 이로금하여, 같이 호흡하며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4일째 영교가 크레바스에 매달려 있다가 로프가 끊어지면서 떨어지는 신이 있는데, 그 순간 너무 영교의 생사가 너무 궁금해 책을 앞부분을 훝어 보면서 영교의 대사가 있는지(앞에 내용을 알면 재미없으므로, 생사확인만을 위한..^^) 확인 후 안도의 한숨이 쉬기도 했다. 이처럼 완벽한 구성과 사실적 묘사에 의한 흐름전개, 그리고 책을 읽고 난 후, 하나의 교훈적인 메세지.. 아직 4분의1도 가지 않은 2008년이지만, 올해 내가 읽었던 중 최고의 책이 될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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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설악산을 몇번씩 종주를 하곤 했다. 거대한 산에 들어가 며칠을 나무와 풀과 바위만 보면서 걷는 시간은 나 자신과 맞닥뜨리는 일이기도 했다. 때문에 촐라체를 오르는 상민과 영교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쉬웠다.
산악인들은 왜 목숨걸고 산에 가는 걸까?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사연이 있어 속세를 등지는게 아니라 종교적 희열로, 믿음으로 종교인의 길을 가듯, 이들도 산에서 느끼는 기쁨 때문에 산에 가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 고독에 직면하든, 놀라운 자연 경관을 느끼든 어쨌든 그건 목숨 걸고 할만한 기쁨이 있는 것일 거라는 생각. 명예욕이나 경쟁심만으로는 절대 산에 오를 수 없을 거라는...
산도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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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박범신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가 쓴 책들을 보다 보니 아는 게 안 보인다. 결국 내가 읽은 그의 책들은 좋은 책에 속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박범신은 내 어릴 적 유명한 작가였고 뜻도 모르면서 그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되어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난 박범신 작가, 그의 필체가 살아있음이 반갑고 고맙다. 문체에서 옛것이 느껴지기도 해서 간혹 추억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감동이 서슴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이 시대의 강한 ‘사내다움’을 느낀다.
<빙우>던가. 유지태와 김하늘이 나온 몇 년 전 영화가 있었다. 당시 극장에 애기들을 데리고 들어온 아줌마들 때문에 제대로 그 재미를 느끼진 못했지만 그 엄청났던 설산은 기억난다. 그 영화는 사랑으로 서로 엇갈린 운명을 그리면서 그 끝을 히말라야 설산에서 마무리하는 영화였는데 영화와는 별개로 그 배우들의 추위와 고통이 손끝까지 전해져 내 가슴까지 얼어붙었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 몸은 나도 모르게 슬슬 얼어붙었다. 이 따스한 5월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전기담요를 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두 형제의 산행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 빙벽이 보통 빙벽인가. 최소한의 장비만 갖고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 상민과 영교, 나이 차이가 열 살도 더 나는 두 형제가 각각의 삶과 그 아픔을 안고 오르던 촐라체. 그 둘을 위해 불을 밝혀놓고, ‘그리워서…’ 산으로 들어간 아들 현우를 생각하며 나는 베이스캠프를 지킨다. 간혹은 산사태가 나기도 하고 간혹은 추락도 일어날 수 있는 촐라체 북벽을 오르며 두 형제는 ‘고독의 맨얼굴’인 정적도 만난다. 또한 엄청난 자연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힘든 여정을 가면서 먼저 그 길을 갔던 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짧은 인생 동안 겪었던 일들도 다시 떠올리고 인생의 우여곡절을 되새기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정상을 정복했다는 따위가 아니다. 아무리 높은 산의 정상이라고 해봐야 다 똑같을지도 모르니까. 정상으로 향하던 동안의 고통도 아니다. 그런 고통은 어쩌면 인생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을 응축해놓은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니까. 중요한 건 각자가 품고 갔던 생각의 끝을 봤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사경을 헤매고 심한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되어도 또 동상으로 손가락 마디를 잘라내는 한이 있어도 그 산행을 꼭 해야만 했던 각자의 이유, 그것이 아니었을까. 각자의 길을 찾기 위한 여정… 어쩌면 그것이 우리 모두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하나의 촐라체가 아닐까.
‘박상민 형제가 그랬듯이,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갈망을 쫓아 보상 없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길은 결국 두 갈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의 길은 경쟁에 가위눌리면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를 허겁지겁 쫓아가는 길일 것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안락한 일상을 버릴지라도 불멸에의 영성을 따라 이상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일 것이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또한 사내들의 강한 의지, 약함도 약점도 받아들이는 그 강함이 이 작품엔 살아있었다. 작품을 읽기 전엔 그 사내들의 열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 위험한 산엘 오르는지… 하지만 이젠 안다. 그래야 함을, 그래야 했음을… 존재에 대한 확인, 너무나 나약한 존재일지라도 도전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감동이 넘친다. 그리고 ‘사랑해, 영우, 선우, 마야, 정순희 미안ㅎ…’라는 뜻을 이해했을 땐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떤 삶을 살든, 어떤 처지에 처했든, 가족은 사랑이다. 이제 나도 떠나고 싶다. 내 마음속 촐라체를 만나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