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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 담긴 행복한 고향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 건넌방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할머니는 헛간에서 국수틀을 돌리시고 어머니는 안방에서 재봉틀을 돌리신다. 찌걱찌걱찌걱…… 할머니는 일이 힘들어 볼이 부우셨고, 돌돌돌돌…… 어머니는 기계 바느질이 즐거워 입을 벙긋대신다.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 이렇게 옮겨 살아도 이 틀은 깨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아버지는 건넌방에, 할머니는 헛간에 어머니는 안방에 계신다. 내가 어려서부터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외지로 떠돈 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으리. 어쩌랴,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니. 저승에 가도 이 틀 속에서 살 것인가, 나는 그것이 싫지만. 어느새 할아버지보다도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는 나의 이 집이 좋아졌다.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 - 신경림, 「즐거운 나의 집」 신경림이 쓴 「즐거운 나의 집」을 읽으며 ‘고향’에 대해 생각한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은 기억할 게 참 많다.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린아이는 기억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기억할 만한 일을 끊임없이 행동으로 표현한다. 어린아이에게 시간은 현재인 셈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고향을 떠올릴 리는 없다. 고향은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길 위에 놓여 있다. 어른이 아이가 되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산 사람으로 돌아오는 곳에 고향이 있다. 고향이라는 말에 묻어 있는 아늑한 정취는 지금은 사라진 세계를 향한 동경에서 뻗어 나온다. 그렇다. 무언가를 동경하는 사람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정지용 시인의 말을 빌려온다면, 고향에는 “함부로 쏜 화살”( 향수 )이 어딘가에 아직도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라는 구절로 시를 시작한다. 할아버지 앞에 텃도지가 밀려 주눅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가 앉아 있다. 건넌방에는 아버지가 “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하루 종일 머리를 맞대고 주판질을 한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일을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을 한다. 시인은 고향을 일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 일을 하는데 여자라고 쉴 리가 없다. 할머니는 헛간에서 국수틀을 돌리고, 어머니는 안방에서 재봉틀을 돌린다. “찌걱찌걱찌걱……” 국수틀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할머니는 힘들어 볼이 잔뜩 부었다. “돌돌돌돌……” 재봉틀 소리를 듣는 어머니는 “기계 바느질이 즐거워 입을 벙긋대신다.” 할머니는 아마도 재봉틀을 다루지 못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힘든 일에 볼이 부은 할머니가 흥겹게 일을 하는 며느리를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이 일상을 보내는 그곳에서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 딱지치기와 구슬 장난은 어린아이가 하루를 보내는 놀이=일상이다. 시인에게 고향은 이렇듯 일상생활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이런 일상을 향한 그리움과 다르지 않다. 어른이 왜 아이 시절을 생각할까? 아이 때는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며 보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처럼 주눅 든 새우젓 장사를 만날 필요가 없고, 아버지처럼 주판질을 하며 머리 아프게 보낼 일도 없다. 할머니의 부은 볼을 보며 웃을 수 있고, 기계 바느질이 즐거워 입을 벙긋대는 어머니를 따라 입을 벙긋댈 수도 있다. 일상이 숨 쉬는 세계에서 일상의 안팎을 오가며 노는 아이를 시인은 지금 이곳으로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어린아이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르면 아이는 더 이상 딱지치기도 구슬 장난도 하지 않는다. 사랑방과 건넌방과 안방을 오가며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할아버지 이전부터 내려온 집안의 틀=전통을 하나하나 내면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린아이는 점차로 어른이 되어간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아이가 틀 속에 갇히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내가 어려서부터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외지로 떠돈 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으리.”라고 시인은 적고 있다.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소년’은 자꾸만 집 밖으로 떠돈다. 집안을 이루는 틀이 자신을 가둔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집안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다. 그래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탄다.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간다. 하지만 딴 세상을 한없이 헤매다가 문득 자기가 서 있는 곳을 보면 “다시 그 자리”다.
어쩌면 좋은가? “저승에 가도 이 틀 속에서 살 것인가,”라고 마음은 여전히 소년인 시인은 한탄한다. 집안의 틀에 갇히기 싫은데 자꾸만 그리로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운명인 걸까? 죽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할 팔자인 것일까?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버스를 타고 밖으로 나가도 시간은 흐르고, 딴 세상에 갔다가 돌아와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기억은 차곡차곡 쌓인다. 기억이 쌓인다는 건 아이가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다는 걸 나타낸다. 아버지가 된 아이는 건넌방에 앉아 있고, 할아버지가 된 아이는 사랑방에 앉아 있다. 사람은 다르지만 일상은 반복된다. 누구나 이 길을 거쳐 가고, 누구나 이 길을 거쳐 온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시인 앞에서 또 다른 아이가 사랑방과 건넌방과 안방을 오가며 놀이를 한다. 시간은 똑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반복함으로써 시간은 생명들 스스로 삶의 법칙이나 규범을 만들게 한다. 아이가 아버지가 되면,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면 세상은 달라질까? 달라지는 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때가 되면 세상 안으로 돌아온다. 시절로 따지면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가 다시 아이로 돌아온다. 어떻게 아이로 돌아올 수 있을까? 시인은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사랑방에서, 건넌방에서, 안방에서 그는 딱지치기를 하는 어린아이를 본다. 그 아이는 놀이에 흠뻑 빠져 있다. 시인이 곁으로 와도 아이는 놀이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아이가 되는 일은 현실이 아니다. 시인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라는 이 시의 끝부분이 그것을 정확히 보여준다. 나이든 시인이 기억하는 세계는 그림, 곧 이미지로 펼쳐져 있다. 그림을 상상하며 그는 행복감에 빠진다. 아이-되기는 이렇게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되기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는 현재를 산다. 딱지를 치는 시간에 아이는 딱지만 생각한다. 구슬 놀이를 하는 시간에는 구슬만 생각한다. 생각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를 아이는 살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아이의 마음에 다가감으로써 “그림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셈이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도 나이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 그림 속에서”라는 시구는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시인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그림을 언어로 표현한다. 수묵화를 그리듯이 그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른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있다. 어른들이 있는 그 일상을 등에 업고 놀이에 빠진 아이를 시 세계로 불러내며 시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언어로 표현된 세계에서 시인은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다. 시인에게 언어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상상의 매개체로 나타난다. 언어로 그린 그림은 이렇게 시인을 그 시절로 이끈다.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세계이지만 그림 속에는 그가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어린 시절의 아이가 살던 그 현재를 나이든 어른=시인은 지금 ‘시적 현재’로 다시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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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신경림 시인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무엇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따뜻함이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 그냥 스쳐갈 수도 있는 사람과 사물들은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놀라울 정도의 생동감을 가지고 시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러한 시 세계는 아마도 시인 자신이 그만큼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집에는 평론가나 시인들이 시 세계를 논하는 발문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미 다른 책에 수록했던 산문을 수정한 ‘나는 왜 시를 쓰는가’라는 글이 시집의 맨 뒤편에 수록되어 있었다.
실상 시집을 볼 때마다,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상찬(賞讚)으로 일관하고 있는 누군가의 발문이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적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실상 누군가의 상찬에 걸맞은 시 세계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더욱 그 내용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집에는 시인이 한때 시를 멀리했다가, 다시 시를 쓰게 된 상황에 대해서 진솔하고 담담하게 진술되어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넉넉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집의 표제와 같은 작품은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되어 있었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 ‘낙타’ 전문)
이 시는 아마도 노시인의 자서전처럼 느껴진다.
세상의 문인들이 세속의 권력에 기웃거리는 동안 시인은 그저 시와 글을 품고 ‘낙타’처럼 살았을 것이다.
화자는 오로지 ‘별과 달과 해와 / 모래만 보고 살’았던 낙타를 타고 저승길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 길동무 되어서’ 세상을 떠나겠노라는 화자의 심정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이 시를 포함하여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전보다 사유의 깊이가 더해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여전히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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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 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서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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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전의 즐거운 낙타는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 별과 달과 해와 /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 손 저어 대답하면서,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 <낙타> 일부
죽음을 향해 가는 이 여정에서는 낙타는 즐거운 동반자다. 아무것도 몰라서 세상이 재미있는 낙타. 꿈을 꾸는 여정은 즐겁긴 하지만, 세상사를 모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여행. 그렇게 낙타는 세상에 반쯤 몽롱한 채로 발을 들여놓는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 늘 잊으면서 살았다, /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 늘 찾으면서 살았다, /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 나의 신발, // 어느 때부턴가는 /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 - <나의 신발이> 일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는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모래밖에 본 일 없는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또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렇게 밟은 세상을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또 다시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나고, 또다시 걸어온 길을 그리워하는 여정의 반복.
"한쪽은 햇살이 눈부시고 / 한쪽엔 찬비가 뿌리는 / 무너진 성과 집 사이의 무성한 잡초 속을 / 걸어가는, / 이것이 내가 요즈음 / 하루걸러 꾸는 꿈이다." - <폐도 (廢都)> 일부
이전에 있던 곳과 지금 있던 곳을 번갈아서 거쳐야 하는 험난하고도 심란한 여정. 낙타는 이 새로운 세계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꼬부랑 할머니가 / 두부 일곱 모 쑤어 이고 / 일곱 밤을 자고서 / 일곱 손주 만나러 // 한 고개 넘어섰다 / 두부 한 모 놓고 // 길 잃고 밤새 헤맨 / 아기 노루 먹으라고 // 두 고개 넘어섰다 / 또 한 모 놓고 / 먹이 없어 내려온 / 다람쥐 먹으라고 // 세 고개 넘어섰다 / 두부 한 모 놓고 / 알 품고 봄 기다리는 / 엄마 꿩 먹으라고" -<동시 칠수(童詩 七首)> 일부
혼란스러운 세계를 한 고개 두 고개 넘는 마음들, 꼬부랑 할머니가 동참하고 아기도 동참한다. 낙타의 세계는 이제 확장되기 시작한다. 모래만 알던 낙타는 이제 사람에 대해 느끼기 시작한다.
"듬성듬성 초원에 핀 꽃들을 보게 하고 / 조랑말처럼 초원에서 뒹구는 / 날렵한 두 처녀 활기찬 / 웃음소리를 듣게 하는 것을 보면. // 외진 장터에서도 후미진 산속에서도 / 찾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 저 별에 살고 있나보다, / 모든 걸 버리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밤새 / 동무가 되어주는 것을 보면." - <초원의 별-몽골에서>일부
낙타에겐 동무가 생긴다. 낙타에겐 자신과 같은 동무가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자신과 같은 동무를 보면서 비로소 진짜 세상을 만난다. 낙타에게 동무는 희망이 되어주고 동무는 새 삶을 살게 하는 힘이다. 이제 새 세상이 더이상 두렵거나 낯설지 않다. 아~ 낙타의 세상. 너는 비로소 태어났구나. 모래밭과 함께한, 모래밭을 통해, 그리고 모래밭에서 탄생한 새로운 세상. 모래밖에 모르던 너에게 이제 초원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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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 생략). .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아! 시로서 보여주는 최고의 동행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왜 글을 읽고 쓰고 하는지에 대한 마음속의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 마음의 표현을 단지 활자로 남기고 싶은 욕망이 어쩌면 더 크게 나의 손을 움직였을지 모릅니다. 작가 신경림 선생은 시대의 상황에 도피도 하였다가 현실에 적극적인 참여도 하였다가 이제는 마음속의 평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시대와 시의 표현의 불일치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낙타 중에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의 일부분 발췌) 그렇게 시는 나의 인생과 나와 동행하는 삶들의 아름다운 행복을 위해 쓰린 고통도 풀어내고, 기쁜 추억도 되새기며, 그 또한 변함없는 사랑의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시 ‘낙타’에서 함께 동행하는 즐거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 하더라도, 삶은 그러하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행복을 글속에서 찾아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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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1935년생이시다. 시를 읽고 있자니 자꾸만 시인의 나이가 떠오른다. 이만큼 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될까.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생각만큼만. 나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는 시인의 나이까지 이르지 않은 지금 벌써 그런 생각이 든다. 남은 삶과 다가오는 죽음을 이렇게 대할 수 있다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시집을 읽고 있는 것이겠지. -1부를 읽고- 왜 이리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은지. 그들은 왜 그다지도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곳곳에 이토록 슬픔들은 숨어 있는지. -2부를 읽고- 나무라는 그의 음성이 애달프다. 긴 세월 변할 듯 변할 듯하면서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향해, 변하는 것은 나쁜 쪽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나빠진 마음. 답답하실 것이다. “그분은 저 높은 데서 다 보고 계실 거다, 또 알고 계실 거다. 채널을 돌리지 않고도, 신문을 뒤적이지 않고도./그러나 무얼 하랴, 그분한테 세상을 바로 고칠 의지도 뜻도 없는 데야”(57쪽) -3부를 읽고-
여행은, 집을 떠나는 일은, 이 땅을 떠나는 일은, 낯선 곳에 가 보는 일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은, 무엇일까. 삶을 무엇으로 채우는 일일까. 채울 수는 있을까. 터어키, 네팔, 콜롬비아, 미국, 몽골에서의 일상을 통해 얻는 어느 하루의 생. 이곳과 그곳은 다를까. -4부와 5부를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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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낙타] 전문 [농무]때부터 줄곧 신경림 시인의 시가 좋았다. 이제 이 늙은 시인은 더욱 담담하고 관대하게 세상과 자신을 담은 것 같다. 나는 그 곱게 늙은 시를 보면서 또 잠깐 패배감을 느낀다. 세월이란 건 항상 위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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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낙타' 부분
언젠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광고가 있었다. 광고의 의도는 카드 소비를 부추기는 뭐 그런 거였던 듯 하지만, 문득 시집을 읽다 나는 이 문구를 떠올렸다.
과연 그 뒷모습은 어떨까.
흔히 사람의 뒷모습에선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한다. 고난과 상처를 이겨낸 사람의 뒷모습은 다부지고 튼튼할 것이며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이들의 뒷모습은 한없이 다정하고 아름다우리라. 긴 여정을 끝낼 준비를 하는 이들의 뒷모습엔 그들의 여정이 들어있을까.
늘 천상병의 '귀천'을 입에 달고 살았다. 소풍 나온듯 살겠노라고, 웃고 또 웃고. 우는 것도 웃는 것인양 그 어느날 내 여정이 행복으로 충만했음을, 생의 여과지엔 따뜻한 추억만 남고 아픈 추억도 어느새 빛나는 흔적으로 남아있기를..
그래, 우리도 어느 순간에는 저렇게 낙타를 타고 별반 걱정 없다는 양, 별반 큰 의미도 두지 않았다는 양. 태연히 걸어갈 수 있겠지.
이역만리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굽은 손과 청명한 눈빛, 몽골의 초원을 지나, 콜롬비아, 보르도, 터키와 평양, 안나푸르나까지....
그들의 건강한 움직임이 시 속에 가득하다.
나도 언젠간 고목나무처럼 될 수 있겠지. 뒤틀린 상처가 꽃보다 열매보다 더 아름다운...
시 한 편에 더운 여름을 식혀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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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늙습니다. 늙는다는 말은 듣기가 편치 않습니다. 늙음은 곧 쇠퇴를 의미합니다. 좋은 시절 다 지나 곧 삶의 끝을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늙음은, 말을 하기도 듣기도 편치 않습니다. 문득 늙음을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 늙음의 문턱에 들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늙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행동에 앞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젊음의 열정을 여전히 내 삶의 주된 코드로 삼으면서도 혹 그 부작용으로 오만함이 나타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그리고 바랍니다. 내가 늙음을 받아 들일 즈음, 그때는 나 스스로 성찰의 도를 완전히 깨친 후이기를 바랍니다. 마치 신경림 시인처럼 말입니다. 제 목 : 낙타 지은이 : 신경림 펴낸곳 : 창비 / 2008.2.22 초판 발행, 초판1쇄를 읽음 ₩6,000 신경림 시인의 최신작 《낙타》를 읽으니, 이젠 그가 많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의 끈과 저승의 끈을 함께 붙들고 혹 이승의 끈을 놓더라도 그리 당황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면서 책장을 펼치면 바로 나오는 시 <낙타>부터 그러합니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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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미지의 여행에 시를 동반하며 걸어가는 시인의 삶은 그가 풀어낸 시를 읽는 독자의 삶보다 몇 배 이상으로 고단하지 않을까. '신경림'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시인이 여직 껏 걸어왔을 그 여행의 녹녹함이 그려지는 듯 하다. 낙타라는 시집을 열고 처음 만나는 첫 시 낙타를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모든 시를 쭉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다. 아무도 듣는 이 없지만 이 시집을 목이 아플 정도로 소리 내어 읽고 말았다. 시가 주는 평안함을 참으로 오랜만에 곱씹고 있는 나를 보며 시를 좋아하던 그 옛날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쓴 웃음을 짓고 만다.
긴 산문 속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의미와 역할에 대해 쓸쓸하면서도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타지에서 내 고향의 말투를 듣고 반색하는 우리네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내 안에 숨겨진 그리움을 알고 있다. 시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시는 우리에게 잠자고 있는 감동을 흔들어 깨우는 때로는 소란스럽도록 시끄러운 노래인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