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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살림출판사에서 나온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시리즈를 읽은 적 있는데 물론 그 작품들을 이문열씨가 다 옮긴 건 아니고 세종대 강자모 교수 등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들이었습니다. 뜬금없이 그 책들이 생각난 건, 이 책 역시 (대상이 한국문학이긴 하지만) 주제별로 나뉘어져 권별로 엮인 편제라는 점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유년시절의 경험을 통한 성숙", "순수한 사랑의 설렘과 아픔", "가족 간의 갈등과 그리움", "자기 성찰과 내면의 성숙" "연민에서 인간의 이해로" 등의 다섯 주제에 의해 분류되었고 또 그 각각의 주제에 맞는 작품들이 선정되어 실렸습니다. 주로 수능을 준비하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기획되었겠지만, 성인 독자들이 읽어도 무방하며, 그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작품 pool과 차이가 꽤나 나는 선별이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오히려 남다를수 있습니다.
24기 34주차에 리뷰한 김유정의 <봄봄>도 있고, 전상국(1980년대 많은 화제작을 쓴 분)의 <우상의 눈물>이라든가, 전영택의 <화수분>,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등이 눈에 익지만, 임철우(1988년 <붉은 방>으로 이상문학상 공동 수상)의 <사평역> 같은 건 개인적으로 낯설었습니다. 이 중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우한용 서울대 교수의 <꽃자리>였습니다. 주인공이 체육 교사라는 점이 다르긴 하나 상당 부분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인 듯도 보였습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여성 후배와 짙은 교감을 형성한다든가 대학 은사분의 지도편달이라든가 어린 여학생 제자와의 골치아픈 사연이라든가 하는 게 말입니다. 극중 주인공의 나이도, 이 작품 창작당시의 작가분 나이와 비슷하겠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내용은 꽤나 통속적입니다. 어떤 카페를 운영하는 마담의 딸인 여학생은 "엄마와 동성동본(그 자신의 표현)"이라는 점이 언제나 불만인 반항아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1초 정도 생각했는데 이후에 사정이 나오듯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그런 말이 나왔겠습니다. 카페를 운영하는 분이라고 해서 항상 남자관계가 복잡하라는 법은 당연히 없으나 이 시골에서 하나뿐인 다방을 경영하는 저분의 경우는 그런가 봅니다. 사실 요즘이야 여성에게 널리 성적 자기결정권이 인정되니 혹 수십 명의 연분이 있어도 아 인기가 좋구나 혹은 능력자구나 하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이 작품이 나온 1980년대에는 평가가 매우 달랐겠습니다.
어느날 여학생은 한 남자 손님과 자신의 어머니가 중절 여부를 놓고 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참을성을 완전히 잃어 버립니다. 이때 그 손님이 하던 말 중, 여학생이 남몰래, 아니 대놓고 연모하던 체육 선생님이 혹시 지금 포태 중인 애 아버지가 아니냐는 공박을 듣고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체육 선생은 해당 카페에 자주 들를망정 마담과 그렇고그런 사이는 아니었던 듯 보이며 게다가 애초에 선생이라면 학부모와 그런 관계를 갖는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예나 지금이나). 편집자의 의도대로, 이 작품은 확실히 "자기 성찰과 내면의 성숙"이라는 주제를 잘 구현하기는 하지만 제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저 개인적으로는 다분히 통속적인 전개입니다.
이 작품은 MBC에서 베스트셀러극장 중 한 회차로 1980년대 말에 극화된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소설 원작과 달리 남교사의 후배인 여교사의 시선 위주로 전개되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은 여전히 여학생에 놓여 있으며 다른 인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는 자체가 무리입니다. 여교사 역에 당시 신인배우였을 옥소리씨가 나오며 말 안 듣는 여학생 역에는 아역배우로 유명했던 주희씨가 나오는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3년 정도라서 극 설정과 잘 어울립니다. 리즈 시절 옥소리의 미모가 매우 인상적이기는 하나 연기력은 극악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반면 주희씨는 열심히 연기하지만 아역배우로서의 매너리즘에 여전히 꼭 갇혀 있습니다. 그녀가 이후 성인 배우로서 큰 경력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가 어디 있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