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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한의 책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책의 목록속에 이 소설이 있었다. 다른 도서들은 이미 명작으로 정평이 나있거나 다른 이들의 추천도서 목록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는 책들이었으나 이 책 '홍당무'는 낯설었다. 내가 이 소설을 읽기는 했었나? 고등학교 때 읽기는 했다. 하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었던 것 같다. 빨간 머리 때문에 홍당무라고 불리우던 한 아이가 우화같이 짧은 이야기 속에 등장해 온갖 말썽을 부렸었다는 거 외엔. 팥쥐 엄마같이 고약한 엄마, 무심하기 짝이 없는 아빠, 언제나 홍당무를 무시하고 놀려대는 형과 누나. 특히 그 엄마 르삑 부인은 홍당무가 이불에 싼 오줌을 그의 밥에 섞어 먹일 정도로 못된 여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존감을 계속 잃어 가던 홍당무는 생각지도 않은 사고를 치거나 가끔씩 무서운 폭력성을 보이며 그러한 외부의 세계에 반항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작금의 청소년 문제에 비추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어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일탈이나 부정적 행동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부디 색안경만 끼고 바라보지 말 일이다. 오히려 그들 내부의 감춰진 결핍을 관찰하여 그 매듭을 풀어 주는 데서 일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느낀 감정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내가 홍당무만한 아이에서 그 홍당무만한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된 탓이다. 짠한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들 녀석이 언젠가 내게 보였던 적의가 녀석의 본심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괜히 그만 일에 너무 크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나하는 후회같은 거 말이다. 녀석의 의도는 사실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12.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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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에서 끝까지 홍당무로 통하는 아이 유난히도 머리가 붉은색이여서 보면서 정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아이 그러나 슬퍼하는 표시하나 안지않는 홍당무를 보면서 나름 꿋꿋하게 커가는 모습에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말썽대장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좋은일을해도 좋은일보다는 나쁜일에 우선적으로 생각을 하게끔하는 아이지만 나름대로 사랑받기위해 몸부림치는 홍당무. 몸부림치다 지칠만하지만 홍당무는 더욱더 사랑받기위해 심한 장난도 일삼고 또한 엽기적인 행각도 하지만 생각자체는 너무나 때묻지 않은거 같아서 보기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기숙사에서 생활에서 아빠랑 주고받는 편지와 그리고 기숙사에 학습감독이신분의 사랑을 받고자 나름 노력하지만 사랑받지는못하고 떠나보낼때 " 어째서 쟤한테만 뽀뽀를 해주고 나한텐 안해준 거에요?. 왜 나는 안 해 준 거냐구요?"홍당무는 또 다른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어 보였다. 그리고는 베인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얼굴에 묻히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작정만 하면, 이렇게 붉은 빰을 가질수 이 있다구요.!" 이말은 가슴속에서 깊은 한숨과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주위에서 이처럼 사랑받길 위하는 어린친구들이 이책을 본다면 나랑 비슷한 상황이구나. 나처럼 방관되어지고 가족속에서도 홀로 외로이 커나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기서의 홍당무처럼 하나하나 알아가고 또 거기에 맞춰나가는 모습에서 성장되어지는 모습이 그려지는거 같아서 흐뭇한 미소가 그려지게 되는 책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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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당무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린아이 주제에 불면증에 시달리던 나는 밤마다 머리맡에 작은 스탠드를 하나 켜놓고 책장의 책을 손에 잡히는대로 한무더기씩 가져다 쌓아놓고 한 권씩 되풀이해서 읽었다. 생각해보면 그 후로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가끔씩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과거의 책들을 만나게 되면 언제나 그 때의 그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그 책들중 어느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한다면 한 권을 꼭 집어낼 수는 없겠지만 홍당무도 기억에 남는 책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나이들어 알게된 사실 중의 하나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좀 덜 아픈 손가락은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도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이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동반하긴 했지만 말이다. 세상에 완전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홍당무는 그 덜 아픈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부부간의 불화가 깊어지면서 나중에 태어난 홍당무에게 어머니 자신도 모를 원망이랄지, 짜증이 폭발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보자면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꼭 누구를 때리는 육체적인 체벌만이 폭력이 아니라 말로하는 공격도 폭력의 일종인데, 아무런 대항의 도구가 없는 아이를 향한 계속된 행동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받은 정서적인 상처가 얼마나 오래가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해보면 실상 홍당무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모두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처를 받고 있고 나름대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좀더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은 마지막 부분의 홍당무의 선언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으나 거절당하고 포기하는 아이의 슬픔이 느껴졌다. 요즘도 뉴스를 보기만 하면 어느 코너에선가 학대받는 아이의 기사를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누구나 기뻐했을 텐데 왜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아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도, 누나도 모두 단지 인간이기 때문인 걸까. 그렇다고, 그저 우리는 약한 인간일 뿐이다 라는 말로 정당화하고 눈을 돌려도 되는 것일까. 좋은 책의 역할 중 하나는 살면서 무뎌져가는 마음의 한 구석을 쿡쿡 찔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더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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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은 후 미니 감상평 ♣ 이 소설은 내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 책이다. 어릴 적 엄마의 잔인한 사랑이 작가 쥘 르나르에게 트라우마를 형성케 했으며 먼 훗날 이것이 소설로 각색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실제로 홍당무 엄마처럼 잔인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사랑의 표현이 잘못되었거나 전달 과정의 오차가 생겼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쥘 르나르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홍당무를 통해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에 대해 폭로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치하지만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 읽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엄마가 동생만 사랑하고 예뻐하는 것 같아 일기장에 수도 없이 기록한 적이 있다. 그렇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그래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 엄마가 되었다. 우리 엄마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 소설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가 자라서 엄마를 심판대 위에 올려놓은 기분이랄까! 그랬다! 분명 그런 느낌이었다. 홍당무는 평범한 아이와 달리 모난 곳이 많은 아이였다. 그의 정신세계가 궁금해 질정도로 섬뜩한 행동과 독특한 행동을 일삼는 아웃사이더였다. 어쩌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홍당무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홍당무에게는 늘 바쁜 아빠와 무서운 엄마 그리고 얄미운 형과 유일하게 홍당무를 챙겨주는 누나가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어쩌면 엄마 역시도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아들 홍당무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 투성에다 애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내아들의 공식이름은 홍당무였다. 형에게는 펠릭스라는 이름과 누나에게는 에르네스틴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었지만 홍당무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에 의해 홍당무라 불러졌다. 르픽부인에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홍당무였을 것이다. 누나와 형과 마찬가지로 밤에 닭장 문 닫는 일이 무섭다고 항의해 보지만 오히려 엄마는 “홍당무야, 네가 매일 저녁 닭장 문을 닫아야겠구나.”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형과 누나와 마찬가지로 사냥감 자고새 죽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홍당무는 냉정하고 인정머리가 없다는 식구들의 의견 일치로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친척들이 오는 날이면 엄마와 같은 침대에 자야만 했던 홍당무는 코를 골기만 하면 엄마는 아픈 부위를 골라 피가 나도록 손톱으로 꼬집어 댔다. 심지어 자신이 밤에 실수로 싼 오줌을 가지고 수프를 만들어 주는가 하면 르픽부인은 요강을 일부러 가져다주지 않고 나가지 못하게 문까지 잠가 놨으면서도 홍당무가 오줌을 쌌다며 동네방네 소리를 질러 창피를 당하게 만들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토끼에게 줄 멜론은 있으면서 홍당무가 멜론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먹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홍당무는 토끼에게 주기 전에 갉아먹을 수 있는 데까지 갉아먹고 토끼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나마 르픽씨는 자식들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제공했다. 늘상 바쁜 것이 문제였지만 홍당무는 아빠를 무척 사랑했다.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암흑으로 스케치했다면 아버지는 반대로 그에게 햇살과도 같은 존재였다. 점점 홍당무는 자라면서 엄마를 경멸하게 되고 엄마로 인해 자살충동은 물론이고 가출까지 생각하게 되면서 반항심과 더불어 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해 생긴 홍당무의 못난 마음은 <붉은 뺨>에서 그 파장이 미치는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대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인기 많은 학습감독 비올론 선생님은 투명한 얼굴에 붉은 뺨을 가진 마르소를 무척 예뻐했다. 비올론은 밤마다 미르소를 찾아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자신의 은밀한 비밀까지도 털어 놓으며 밤늦도록 마르소와 함께했다. 그래서 그런지 침대 이웃인 홍당무는 강한 질투심이 느껴졌고 둔한 어릿광대에다 곰보라고 놀림을 받은 자신의 얼굴이 밉기까지 했다. 그러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홍당무는 사감에게 비올론과 마르소가 이상한 짓을 했다며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비올론은 해고를 당했다. 마지막까지도 비올론은 붉은 뺨을 가진 마르소에게 다가가자 홍당무는 유리창을 깨며 피가 철철 흐르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이렇게 외쳤다. “어째서 쟤한테만 뽀뽀를 해 주고 나한텐 안해 준거예요? 왜 나는 안 해 준 거냐구요?” 홍당무는 그러면서 또 다른 유리창을 깨어 보이며 베인 손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얼굴에 묻히며 이렇게 말했다. “나두 작정함 하면, 이렇게 붉은 뺨을 가질 수 있다구요!” 정말 충격이지 않은가!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 인간관계마저 애정결핍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무서울 따름이었다. 부모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기초이자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부부가 먼저 행복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선물해 줄수 없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가족의 중심은 부부이다. 부부가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그 속에서 커다란 상처와 함께 슬픔을 경험한다. 줄거리만 몇 개 요약해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끔찍하고 충격적이지 않은가! 나는 지금도 너무 충격적이다. 영화 <홍당무> 포스터를 보면 홍당무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딱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당무는 자신의 생각까지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엄마가 만든 틀 속에 성장한 아이이다. 자신생각이란 자기만 간직해야 하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슬퍼지기 까지 했다. 늘 하는 행동마다 질책 받고 자랐으니 홍당무의 생각의 나무도 성장을 멈춰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홍당무는 성장했다. 작가 쥘 르나르가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듯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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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이 불쾌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은 뭐지?
학대받는 아이의 이야기치고는 <홍당무> 는 약간 이상한 책이다.
과장되고 왜곡되고 그렇지만 그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한 홍당무 이야기는.. 뭐랄까 내가 생각한 학대받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쩔 때는 분명히 홍당무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이해가 안되기도 하는 이 모순된 감정...
읽는 동안 내내.. '이게 무슨..'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오! 맙소사' 이같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읽었다
홍당무는 못생겼다.
저자의 설명으론 그러하다. 그래도 단순히 못생겼기 때문에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무언갈 열심히 해도 칭찬보다는 꾸중을 더 많이 받는 홍당무.
어두운 밤에 용기를 내어 닭장 문을 닫고 돌아왔더니 앞으로 계속 닭장 문 닫는 일을 하라는 어머니,
형의 실수로 형의 곡괭이에 이마를 찧어 아파도 오히려 형을 기절시켰다고 혼나고 형이나 누나의 놀림이 되는건 너무 흔한 일이다.
그렇게 가정에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다보니 동물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선생님에 대한 애정을 비뚤어지게 표현하기도한다.
글쎄, 그렇더라도 왜 이렇게 안타깝다는 기분보다는 구역질나는 기분이 드는지..
홍당무에게 사과를 해야하나. 그의 말대로 비극이 너무 희화화되고 과장되다 보니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날만큼 익숙해져 그런가보다.
이렇게 익숙해지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닌데 말이다.
"야! 이 더러운 녀석아, 네가 뭘 먹은 줄 알고나 있니? 어젯밤 네가 싼 거라고."
"그런 것 같았어요." 홍당무는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홍당무는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 있었다. 뭔가에 익숙해지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법이다. - p.24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바빠서 신경을 써줄 수가 없고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아버지...
아버지와 홍당무가 주고받은 편지글이 중간에 나오는데 뭐랄까.. 이 아버지는..
엄청난 유머감각의 소유자라고 해야할지, 다분히 현실도피적인건지...
아무튼 뭔갈 해주고는 싶은데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식사내내 조용한 분위기로 하녀마저 당황하게 만들고, 사냥과 일로 밖에만 돌아다니는 아버지
그가 마지막에 홍당무에게 현실과 행복에 대해 충고해 주는 부분은 그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것도 있겠고
그냥 현실에 수긍하고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홍당무도 어찌보면 그런 상황에 적응하고
아버지의 현실순응적 기질을 조금은 이어받은것 같다. 마지막에 변화시키려는 시도? 어떻게 될지는 이제 아무도 모르겠지.
다 자란 홍당무가 궁금하기도 하다. 과연 홍당무는 그가 바라던 행복을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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