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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연암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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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일은 예측할 수가 없는 법일세. 만일 황제께서 우리 일행더러 열하까지 오라 한다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터인데, 그때는 장차 어찌 할 것인가?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만수절에는 기필코 그곳에 도착해야 하는데, 심양과 요양사이에서 또 비에 막히기라도 한다면, 이야말로 속담에 ‘밤새도록 가도 문에 닿지 못했다’는 격이 되지 않겠는가.” <5편 막북행정록 / 음력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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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일은 예측할 수가 없는 법일세. 만일 황제께서 우리 일행더러 열하까지 오라 한다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터인데, 그때는 장차 어찌 할 것인가?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만수절에는 기필코 그곳에 도착해야 하는데, 심양과 요양사이에서 또 비에 막히기라도 한다면, 이야말로 속담에 밤새도록 가도 문에 닿지 못했다는 격이 되지 않겠는가.”

<5편 막북행정록 / 음력 8 5일 신해일 본문중

 

산넘고 물건너 더위와 폭우를 무릅쓰고 당도한 연경에 황제가 없다.

황제의 여름 리조트가 있는 열하로의 여정이 그래서 더욱 막막하고 일정을 다투는 일이라 심히 다급한 모양새였으며 혹여 짖궂은 날씨에 길이 막힐까봐 조마조마한 심사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설상가상으로 이제껏 함께 하던 일행과의 어쩔 수 없는 이별이 닥치자 연암의 한없이 따뜻한 인간미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장복아, 울지 말고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내가 이렇게 타이르자 다음엔 창대의 손목을 잡고 더욱 구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 오듯 한다. 단짝이 되어 이역만리를 왔는데 하나는 가고 하나는 남겨져야 하니, 인정이 실로 그럴 법도 하다.

이에 나는 말 위에서 생각하였다.

 인간사 중에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 생이별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다. 하나는 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은 굳이 괴로움이라 할 것도 못 된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아들, 신의 있는 남편과 올곧은 아내, 의로운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 피로 맺은 벗과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을 받들거나 또는 궤석에 기대어 명을 받을 때,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뒷일을 당부하는 것은 천하의 부자, 부부, 군신, 붕우가 똑같이 겪는 바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자애로움과 효성, 올곧음과 믿음, 의로움과 충성, 피로 맺은 우정과 진실한 마음 등은 한결같다 할 것이다. 사람마다 한가지로 겪는 바요, 사람마다 한결같이 솟아나는 정이라면 이것은 천하의 순리일 것이다.  

본문 p143~145>

 

6개월에 걸친 연암의 중국기행록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현위치를 충분히 투영해볼 수 있는 다양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내면의 이보 전진을 위한 일상의 형식 벗어나기에 몰입하고자 한다면 여행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익히 아는 바이지만 실제로 일상에 꼬이고 마음과 다르게 매여있다 보면 쉬이 결정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와 제모습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그 곳을 떠나야 한다. 떠나보면 그 곳의 일상이 새로이 보이고 그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을 내다보게 되는 것도 여행이 주는 미덕이라 하겠다.

 

18세기 지금과는 하늘과 땅차이의 여행 조건속에서도 연암 박지원은 당대의 문물과 풍속을 가감없이 들여다보았다. 그가 처한 세상에서 더 넓은 세상보기란 한마디로 culture shock의 집합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문자로서의 언어적인 일치감이 적어도 속내의 안도감을 주는데 한 몫했으리라. 이국으로의 여행은 그래서 짜릿하고 스릴이 넘친다. 연암은 풍속과 관습이 다른 이국에서 언어적 문제를 현명하고 지혜롭게 극복한 듯 싶다. 원래 선비정신이란 고고한데 있을 터인데 그는 결코 안일하게 뒷짐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은 아니었다. 실천하는 지성이란 이토록 매력적이다.

 

21세기 유럽의 어느 한 동네 구광장 구석진 노천 카페에 앉아 있을 그를 상상해본다.

한 잔의 뜨거운 카푸치노와 노트북에 양손을 올린 채 사유의 폭을 정리하는 길 위의 영원한 노마드, 21세기 연암을 꿈꾸며….

 



b*******e 2010.06.22. 신고 공감 13 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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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발자취를 통해 18세기 청나라의 문물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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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으로의 사행은 매년 정월 초하루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하는 ‘정기 사행’과 중국과 조선의 특별한 행사에 맞춰 파견하는 ‘임시 사행’으로 구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 해에 여러 차례 사행이 이뤄졌지만, 청나라는 이를 모두 통합하여 1년에 한 차례만 사신단을 파견하도록 간소화했다고 한다. 박지원이 참여했던 사행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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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으로의 사행은 매년 정월 초하루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하는 정기 사행과 중국과 조선의 특별한 행사에 맞춰 파견하는 임시 사행으로 구분되었다이전까지는 한 해에 여러 차례 사행이 이뤄졌지만청나라는 이를 모두 통합하여 1년에 한 차례만 사신단을 파견하도록 간소화했다고 한다박지원이 참여했던 사행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 겸 사은사로서의 임시 사행에 해당하였다삼종형이 박명원이 사행단의 정사로 선임되었기에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약 5개월에 걸친 중국 여향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과거를 일찍 포기하면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유력가문의 구성원이었기에 이러한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하겠다.

  

<열하일기>의 여정을 집중적으로 번역한 이 책의 하권에서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이 소요되었던 사행길에서 가장 중요한 산해관부터 연경까지’ 11일 동안의 여정을 관내정사라는 제목으로 가장 앞부분에 수록하고 있다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한 연경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꿈으로 여겨졌다고 한다비록 정식 사신의 신분은 아니지만연경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박지원으로서는 그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그렇게 탄생한 저작이 바로 열하일기이며그 내용을 통해 이른바 대명의리라는 명분에 갇힌 조선의 지식인들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반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던 박지원의 관점에서 청나라의 문화 가운데 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북학(北學)’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40여 일에 걸친 여정 끝에 연경에 당도했지만정작 청나라의 건륭제는 여름의 무더위를 피해서 북쪽의 열하로 피서를 떠났음을 확인하게 된다그리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고 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사신단의 일부는 다시 열하까지 가야만 했다정사인 박명원의 요청으로 박지원은 열하행에 동참하게 되고, ‘연경에서 열하에 도달하기까지’ 5일 동안의 여정이 막북행정록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었다그리고 열하에서 머무는 6일 동안 황제를 알현하고 다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태학유관록이다그리고 열하를 떠나 연경으로 귀환하는 6일 동안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환연도중록이라고 하겠다

  

이후 연경을 떠나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은 생략되다시피 했으니사실상 열하일기의 여정은 여기까지인 셈이다여기에 자신이 겪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별도의 제목으로 남겨 첨부했으며그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과 들었던 이야기들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중국에서 돌아온 후에 박지원의 글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읽히게 된다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소외받았던 이들이 넘쳐나면서이른바 연암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교륭에 적극적이었다이처럼 적자가 아닌 서얼이라는 이유로혹은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이들과의 사귐조차 박지원은 소중하게 여겼다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지만당시 권력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박지원의 글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YES마니아 : 골드 i*****n 2023.06.23. 신고 공감 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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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함께 떠나는 열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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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로 박명원이 정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연암은 삼종형박명원의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따라 나선다. 그 해 5월25일 한양을 출발하여 10월27일 다시 한양에 도착하니 장장 5개월에 걸친 여행이다.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어 연경까지 2천3백리 길을 여행하면서 보고 겪은 것이다. 여행이 여기서 끝났다면 열하일기 또한 다른 연행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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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로 박명원이 정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연암은 삼종형박명원의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따라 나선다. 그 해 525일 한양을 출발하여 1027일 다시 한양에 도착하니 장장 5개월에 걸친 여행이다.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어 연경까지 23백리 길을 여행하면서 보고 겪은 것이다. 여행이 여기서 끝났다면 열하일기 또한 다른 연행록과 차이가 없었으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에 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열하를 여행한 것이 열하일기를 다른 연행록과 다르게 만들었으니...

 

이 책은 열하일기를 완역한 것이 아니다. 처음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책을 보고서 였다. 헌데 책을 사서 막상 읽으려고 하니 완역본이 아니란다. 다소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읽기 시작한다.  이 책은 연암집 12권과 13권에 실려있는 관내정사, 막북행정록,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4개 부분을 번역한 것으로 날짜상으로는 724일부터 820일까지의 기록이고, 지리상으로는 산해관에서 연경까지, 다시 열하에 갔다가 연경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다.

 

관내정사는 724일부터 84일까지 11일간 산해관에서 연경까지 640여리 길의 여정을 기록하였다. 도중 옥전현에 도착하여 한 점포를 구경하다가 벽에 걸려있는 글을 보게 된 연암은 주인에게 베껴가도 좋다는 응낙을 얻자 저녁에 다시 그곳으로가 맘놓고 베끼기 시작한다. 주인이 이걸 베껴서 무얼 하려는가를 묻는다. 연암이 말하기를 내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 모두 허리를 잡고 한바탕 크게 웃게 할 작정 입니다. 아마 이 글을 보면 다들 웃느라고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튀어나오고,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줄처럼 툭 끊어질 겁니다.” 이렇게 해서 연암의 대표적 소설로 잘못 알려진 호질이 탄생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행을 다녀왔지만 그들이 본 것과 연암이 본 것은 차이가 있다. 그들은 사행사의 일행이었고 조선의 예법이 몸에 처절하게 베어있어 해로운 것, 예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보질 않으려 했겠지만 연암은 사행사에 크게 얽매이질 않은 몸 이었다. 더구나, 사대부들의 위선에 혀를 내밀고, 청의 선진문물에 매료되어 있던 터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조그마한 것 이라도 구경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적는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연경에 도착한 연암은 왕도의 크고 번성함에 놀라고, 중국역대 왕조의 궁궐들에 대해 서도 그의 박학을 유감없이 내보인다.

 

막북행정록은 85일부터 89일까지 닷새 동안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글이다. 산 넘고 물을 건너 연경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없다. 열하에 가 있었던 것이다. 열하는 황제의 행제소로 연경에서 동북쪽으로 420, 만리장성에서도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다. 장성밖의 요충지로 북쪽 오랑캐를 막기 위해 왕이 가서 머무르던 곳으로 피서산장이라고 부리었다. 조선사신이 도착한 것 안 황제는 그들에게 열하로 오라고 명령한다. 연경에서 열하로 떠날 때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갈수 없어, 마두는 빼고 견마잡이만 데려가기로 한다. 연암도 장복이는 두고 창대만 데려가기로 한다. 이별을 고하며 흐느끼는 장복을 보며 연암은 이별에 대하여 생각한다. 선인들의 이별에 대한 시를 생각하고, 병자호란후 심양에 끌려간 소현세자를 생각하고, 배따라기라는 곡을 생각하다 길을 잘못 들어 수십리를 돌아간다. 그에게 있어 사유는 길을 걷거나, 말을 타거나, 밥을 먹거나 항상 옆에 붙어있는 일상과 같다. 연암은 또 말을타고 강을 건너면서 견마잡이의 위태로움과 말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중심의 사고가 오히려 사람과 말 모두를 위태롭게 만들고, 그러고도 말에게만 화풀이하는 구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대한 사유도 끝이없다. 하룻밤에 아홉번 강을 건넜다는 일야구도하기도 이 여정에서 쓰여진 것이다. 황제의 독촉과 청나라 대신들의 배려로 이들은 밤낮없이 닷새 동안 달려서 간신히 제시간에 맞추어 도착한다.

 

태학유관록은 89일부터 14일까지 6일 동안 열하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각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려놓았고, 황제접견 내용을 기록하였다. 연암은 직접 황제를 접견하지는 않았지만 보고 들은 내용을 자신이 직접 당한 것처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황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중인 반선을 접견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조선의 사신들은 마지못해 따르지만, 예의를 지키지 않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았을까 전전긍긍 한다. 반선이 선물로 준 불상을 두고 그 처리방법을 두고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불교란 오랑캐들이나 믿는 천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815일부터 20일까지 엿새 동안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하였다. 열하에 갈 때와는 달리 날씨도 좋고, 시간에 쫓기지도 않는다. 연암은 중국의 선비들을 만나면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또 연행길을 수 차례씩이나 수행했던 비장들은 들어서 아는 것도 많다. 그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허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해서 허생전이 열하일기에 실리게 된다.

 

그 밖에도 연암은 여행도중 겪게 되는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적고 있다. 주막에서 술한잔 마시는 일이며, 길을 가다 만나는 만주족들과의 실랑이며, 청나라측 통역과의 일이며, 때로는 폭소를 자아내게 하고 때로는 사뭇 엄숙하기 까지 하다. 내용만으로도 열하일기가 왜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것도 같다. 조선시대 연행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연행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 기록들은 남아 있을진대, 다른 연행록들은 알려지지 않은데 반하여 열하일기만이 유독 관심을 끌게 되는 이유는, 명문가에 태어나고서도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한 연암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리란 생각이다. 북벌과 중화사상에 젖어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의 사대부들이, 연암에겐 부서진 기와조각이나 똥덩어리만도 못하게 생각 되었으리라.



k*****1 2010.02.20. 신고 공감 3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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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따라 연행(燕行)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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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책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멋진 여행기를 한편 써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무렵부터 장거리 여행을 떠나면 여행에서 얻은 느낌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적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뉴욕-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동부, 오클라호마-콜로라도-그랜드 캐년으로 이어지는 남부, 배드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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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책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멋진 여행기를 한편 써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무렵부터 장거리 여행을 떠나면 여행에서 얻은 느낌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적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뉴욕-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동부, 오클라호마-콜로라도-그랜드 캐년으로 이어지는 남부, 배드랜드-옐로우 스톤으로 이어지는 서부, 슈페리어호를 한 바퀴 도는 북부로의 여행들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챙길 수 없어 그때 적은 여행기는 아직도 파일함에 감추어두고 있습니다. 그때 적은 여행기에서 한 대목 옮겨봅니다.

 

“브라이스 캐년 국립공원은 한 마디로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다. 정녕 이것이 인간이 아닌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품이란 말인가? 전망대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는 순간 그 현란한 모습에 말문이 막힌다. 절벽 아래로 차곡차곡 쌓여 있는 탑모양의 창조물들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게다가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서로 다른 색깔로 켜를 이루고 있고, 하나하나의 자태 역시 너무 섬세하여 언뜻 다보탑을 연상케 한다. 이것들이 흙과 바위로 만든 자연이 이룩해낸 경관이란 말인가. 한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파이우트(Paiute) 인디언들은 이곳을 꼭 붉은 바위가 사람처럼 서있다고 하여 ‘Red rocks standing like men in a bowl-shaped canyo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계곡에 서 있는 환상적인 색조의 “hoodoo”는 코요테에 의하여 돌로 변한 “전설의 인간들(Legend People)”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출발 전 준비과정부터 다녀와서 마무리할 때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도 읽는 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여행기를 맛깔나게 쓰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고미숙님 등이 엮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게 된 것은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눈물’과도 인연이 있습니다. 연암의 산문을 새롭게 조명한 주영숙님은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http://blog.yes24.com/document/7024977>에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외쳤다는 열하일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도대체 눈물보이기를 기피하던 조선의 선비가 통곡할 만하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가 하늘과 만나는 지평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좁아터진 우리 땅에 갇혀 살던 연암이 요동땅의 드넓은 들판을 처음 보면서 생뚱맞아 보이는 통곡을 생각한 것은 바로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 터뜨리는 울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오니 참으로 시원한 마음이 들어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한번 펼쳐내는 것이라고 해석한 연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상권, 136쪽)” 누구나 이런 곳을 만나게 되면 마음에서 올라오는 감동이 눈물로 쏟아져 내리게 될까요?

 

연암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풍속, 시문 등 다양한 방면에서 통달하고 있음은 <열하일기>의 전편을 걸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투전과 같은 잡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에는 경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잠시 우리나라 고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사책에서 배운 대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위치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위치했다는 주류 역사학계가 판단은 틀렸고 요동반도로 보는 것이 옳다는 새로운 주장을 읽으면서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200년도 넘은 그 옛날 연암이 이미 요동을 지나면서 한사군이 요동지역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증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무왕 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왕에게 보낸 글에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 풍속을 지킨다.’고 쓴 부분이 있다. 이로써 추정해보자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겹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디 우리 영토 안에 있었다는 걸 더욱 명확히 증명할 수 있다.(상권, 98쪽)” 한사군이 평양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패수의 위치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연암시절의 선비들 역시 평양부근의 패수를 지목하는 경향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암은 옛날 중국 사람들은 요동 동쪽의 강을 모조리 ‘패수’라 불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대적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연암은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이라도 마땅히 이를 수용하여 본받아야만 한다.(상권 234쪽)’고 하였습니다. 사방이 수천리나 되는 우리나라의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곤궁한 것은 수레길이 없고 수레를 끌 말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대체로 목축이 자리 잡지 못한 탓이다. 우리나라에서 목장으로 가장 큰 곳은 탐라 한 곳뿐이다. 그곳의 말들은 모두 원 세조때 방목한 종자로, 사오백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용매나 악와에서 나는 준마들이 과하나 관단 같은 조랑말이 되고 말았다.(하권, 282쪽)” 옛날 우리나라에서 나는 과하마가 전투에서 유리한 점이 있다고 배웠던 것과는 달리 조선조에 들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이는 주자학을 국치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실용을 무시하고 이론과 의례에 지나치게 매달린 치세방식이 나라를 유약하게 만든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 때는 수와 당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대군을 막아냈던 우리나라가 조선조에 들어 왜란과 호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힌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잘 생각해볼 일입니다.

 

연암을 비롯한 당시 우리 선비들의 자연철학의 경지는 놀랄만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하에 머물 때 태학에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나눈 필담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지구가 둥글고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창하여 그때까지 천체운동의 원리로 확고하던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을 뒤집는 변환을 이루었던 것이 1543년입니다. 연암이 연경을 방문하던 때와 벌써 200년 이상 차이가 있고, 그때는 이미 서양 사람들이 연경까지 왕래하고 있던 터라서 그들을 통해 전해진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암의 친구 홍대용의 스승이라고 하는 김석문이라는 사람이 당시보다 100여년 전에 삼환부공설을 제창하는 등 천동설을 부정하고 있었다고 하니 독자적 사유의 결과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최근에 [북소리]에서 소개한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http://blog.yes24.com/document/7233082>에서 저자 정영숙 시인은 “샤를 보들레르 이래 시인은 언제나 화가의 암호를 풀어내는 해독자였고, 화가 역시 시인의 정신을 형상화하는 재현자였다. 시인은 시 안에 그림을 넣어두고, 화가는 그림 속에 시를 숨겨둔다. 마치 암수한몸과 같다.”라고 한 박제천 시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암은 벌써 이런 점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암은 심양에 가까워지면서 흩어져 있는 불탑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을 보면서 ‘어부가 손을 들어 강성이 바로 저기매요 하니(漁人爲指江城近) 뱃머리에 솟은 탑이 볼수록 더 높아지네(一塔船頭看漸長)’라는 옛시를 인용하면서 “대개 그림을 모르면서 시를 아는 이가 없는 법이다. 그림에는 농담(農談)의 구별이 있으며, 또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다. 이제 이 탑의 모양을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게 알겠다.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 반드시 그림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으리라는 것을...(158쪽)”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후에 의문이 가는 곳도 있습니다.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 부근에 있는 강영태의 집을 방문했을 때 화분에 심겨진 무화과를 보았다고 적은 부분입니다. 아열대성 과수인 무화과는 어린 나무 때는 추위견딜성(耐寒性)이 매우 약하고 큰나무가 되어서도 최저(最低) -9℃가 한계이므로 전남 영암 목포 등 남부지역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습니다. 온실이나 비닐하우스가 보편화된 지금도 북쪽 지방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는 것이 쉽지 않을 터인데 연암이 살던 시절의 요동지방에서 열매가 달린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을 믿어도 될까요?

 

또한 책문을 떠나면서 자주 비를 만나고 강물이 넘쳐 발이 묶이는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사신단을 몰아붙이는 정사 박명원의 독촉 때문에 몇 차례 연경을 다녀온 하급관리들이 ‘이 지독한 더위에 이렇게 쉴 참을 거르다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불만을 쏟아냈지만, 죽기 살기로 달려서 마침내 8월 초하룻날 연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연암의 여행기를 보면 연경에 이르는 동안 볼거리를 챙겨 돌아본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일정은 험난한 경로임에도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입니다. 연경에서 열하로 떠나는 여정을 기피하는 일행도 적지 않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열하까지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 끌려 정사와 동행하게 된 연암은 길이 험한 만큼 얻는 것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백하를 지난 다음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넌 연암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다. 명심(冥心-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 한 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물을 건넜지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175쪽)” 낮에는 시각으로 보는 위험이 캄캄한 밤에는 청각으로 듣는 위험으로 바뀌더라는 점에서 결국 근심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태평해졌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서 뚜렷해지자 눈앞에 크고 작은 것에 개의치 않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강물에 대한 연암의 생각은 연암협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듣던 시냇물소리로 거슬러 올라가,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거문고가 우조(羽調)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174쪽)”라는 생각으로 정리해내고 있습니다. 즉 외부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자극이 마음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최근에 정립되고 있는 뇌과학적 견해를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 옛적부터 내려온 정례와 규칙을 주장하여 인용함은 싸움터의 진지를 구축함이요, 글자를 묶어 구절 만들기, 구절 모아 문장 이루기는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주영숙 편저, 눈물은 배우는게 아니가, 195쪽)”라고 해서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한 연암의 글솜씨의 백미라 할 <열하일기>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1780년으로 날아가 연암과 함께 연경을 거쳐 열하에 이르는 장도를 경험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y*****2 2013.05.17. 신고 공감 1 댓글 3
리뷰 총점 종이책
[서평]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하)]
"[서평]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하)]" 내용보기
혹자는 이 [열하일기]를 읽고서 50대의 뒤늦은 나이에 연암 박지원 선생을 '인생의 멘토'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람은 단지 보리출판사에서 완역하여 출간한 [열하일기 세트] 3권을 읽었고 그 이외에 열하일기나 박지원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추가로 공부했을 뿐이다. [열하일기]의 무엇이 그 중년의 직장인을 '열하광인' 또는 '연암광인'으로 만들었을까?   고미숙씨의
"[서평]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하)]" 내용보기

혹자는 이 [열하일기]를 읽고서 50대의 뒤늦은 나이에 연암 박지원 선생을 '인생의 멘토'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람은 단지 보리출판사에서 완역하여 출간한 [열하일기 세트] 3권을 읽었고 그 이외에 열하일기나 박지원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추가로 공부했을 뿐이다. [열하일기]의 무엇이 그 중년의 직장인을 '열하광인' 또는 '연암광인'으로 만들었을까?
 

고미숙씨의 이야기처럼 [열하일기]에는 유머와 우정, 유목이 가득하다.
'유머'와 관련한 두 가지 내용. 첫 번째는 산해관에 들어서서 연암은 옥전현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 무심하게 거리를 쏘다니다 한 점포에 들러 벽에 쓰여 진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고는 촛불 아래 ‘열나게’ 베껴 쓴다. 이 문장이 바로 그 유명한 [호질]이다. 점포 주인이 연암에게 묻는다. “선생은 이걸 베껴 대체 무얼 하시려오?” 연암은 이렇게 답한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 모두 허리를 잡고 크게 웃게 할 작정입니다. 아마 이 글을 보면 다들 웃느라고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튀어 나오고,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줄처럼 툭 끊어질 겁니다.” 연암은 고국에 돌아간 후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연경에 도착하여 태평하게 쉬고 있다가 느닷없이 열하로 떠나게  되어 사람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였다. 연암과 같이 자던 수행원들이 일어나 연암에게 물었다. “불이 났소?” 순간 악동 기질이 발동한 연암은 이렇게 대답한다. “황제가 열하로 가는 바람에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는구먼.” 수행원들은 기절초풍하기 직전이다. “아이고!”

'우정'과 관련해서는 북경과 열하로의 여행일정 내내 연암이 만인이나 한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를 만나던지 지필묵을 들고 상대방과 통성명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연암의 이러한 태도는 산해관까지 가는 길에 어느 술집이나 찻집에 들러서도 자신의 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청나라 학자나 선비를 만나면 사서삼경과 중국의 역사, 시와 고문, 철학과 학문, 이용후생 등에 대해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정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연암의 열린 자세와 태도는 비슷한 중국인 학자들로부터도 크게 환영을 받아 서로 동등하게 논의하고 우정을 쌓게된다.
 
'유목'과 관련한 것은 연암 박지원이 아무런 공적 지위가 없음에도 사신단의 수장인 정사 박명원의 친척임을 내세워 일행 중에 합류한 것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 공식적인 지위와 역할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연암이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때로는 사신단 본진에 앞서서 한참을 앞서 여행길을 달려가서 마음껏 새로운 경치를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다음 날 공식 일정이 없기 때문에 중국인 학자들과 밤을 세워가며 필담을 나누고 술을 마시다가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연암이 진정한 '유목인'이었음은 그가 여행기간 동안 취한 행동보다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인 1780년 봉건시대에 자신이 살고 있던 좁은 세상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맛보고 겪어보고 사귀어보고 싶은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몸을 움직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 * 연암 박지원(1737~1805) 일대기 --------
1737년 2월,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752년  월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결혼
1757년  월 : 시정의 기이한 인물이나 사건을 듣고 '방경각외전'을 쓰다.
1766년  월 : 장남이 태어나다.
1767년  월 : 아버지 사망. 장지 문제로 녹천 집안과 시비가 벌어짐. 벼슬길을 단념함.
1768년  월 : 백탑 근처로 이사하고 이덕무, 이서구, 유금, 유득공과 가까이 지내다.
1770년  월 : 감시의 양장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다. 입궐하여 영조에게 극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박지원을 급제시켜 공을 세우고자 했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거나 응시한다 하더라도 시권을 제출하지 않거나 제출하더라도 노송과 괴석을 그린 그림을 제출하여 벼슬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1772년  월 : 식솔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 전의감동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다.
1778년  월 : 사은진주사 일원으로 북경으로 떠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전송하다.
1780년 5월 : 진하사 겸 사은사 박명원과 동행하여 북경 등지를 여행
1786년 7월 :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다
1787년  월 : 부인이 죽었다. 연암은 그 뒤로 죽 혼자 지냈다.
1791년 월 : 한성부판관, 안의현감으로 부임하다.

1793년 월 : <열하일기>의 잘못된 문체에 대해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고 반성문을 제출하다.
1797년 월 : 면천군수에 임명되다.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집필하다.
1799년 월 : <과농소초>를 집필하다.
1800년 월 : 정조 승하하다. 양양부사로 승진하다.
1802년 월 :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다 유한준이 방해하여 좌절되다.
1805년 월 : 가회동 집에서 향년 69세로 죽다. ---------
 
 
고미숙씨가 번역, 편집하여 발간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하)]는 크게 관내정사, 막북행정록,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4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박지원의 원본에 별도의 권으로 분리되어 있던 황도기략, 황교문답, 곡정필담, 환유기, 옥갑야화 등을 4개의 장 속에 편집하여 삽입하였다. 역자는 [열하일기] 원본 중에서 독자들이 난해하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할만 한 부분들을 생략한 것이었고 그것은 책의 서문에 기술되었듯이 보리출판사에서 [열하일기 3세트] 완역본이 이 책 출간 직전에 출판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권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 관내정사(關內程史) > 7월 24일 / 7월 25일 / 7월 26일 / 백이 숙제 묘당을 둘러보며 / 난하를 건너며 / 석호석기 / 7월 27일 / 7월 28일 / 범의 꾸중(虎叱) / 7월 29일 / 7월 30일 / 8월 1일 / 8월 2일 / 8월 3일 / 8월 4일 / 북경의 이모저모(黃圖記略) / 공자묘를 다녀와서(謁聖退述)
-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기행을 담았다. 북경까지의 여행 중에 느꼈던 몇 가지와 북경에서의 특이한 여행기를 기사체 형식으로 별도로 정리했다.
- 호질 : 역자는 연암이 '열하일기' 속에 기록한대로 '호질'이 연암의 창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자는 연암이 연행 기간 중에 많은 이야기를 구한 것 자체만으로 연암의 역할이 크다고 주장한다. 호질의 줄거리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람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범(호랑이)에게 졸개인 창귀들이 사이비 유학자인 북곽선생과 수절과부로 소문난 동리지를 추천하면서 전개된다.- 황도기략 : 북경의 이모저모를 관람한 소감을 적었다. 황성의 아홉 개 문, 서관, 만수산, 체인각, 황제의 마구간, 종묘와 사직, 천단, 범의 우리, 풍금, 서양화, 코끼리 우리(상방), 황금대, 황금대기, 옹화궁, 개우리(구방), 공작포, 오룡정, 구룡벽, 남해자, 회자관, 유리창- 알성퇴술 : 공자묘를 구경한 소감을 적었다. 태학, 학사, 관상대, 시원, 조선관
 









 
< 막북행정록(漠北行程論) > 막북행정록 서 / 8월 5일 / 8월 6일 / 8월 7일 /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一夜九渡河記) / 8월 8일 /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 8월 9일
-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길이다. 청나라 황제의 독촉으로 인하여 400리 넘는 여정을 단 5일만에 도달했다. 휴식도 잠도 없는 강행군을 별도로 정리했다.- 야출고북구기 : 고북구는 예로부터 전쟁의 중심터였다. 후당의 장종, 거란의 태종, 여진의 희윤, 원나라 문종 등이 고북구에서의 승전으로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연암은 고북구의 장성에 붓을 꺼내 (물이 없어서) 술을 부어 먹을 간 후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야삼경, 조선의 박지원, 이곳을 지나노라"라고 적는다.- 일야구도하기 : 연암 일행은 하루 밤에 하나의 강을 아홉 번 건너게 된다. 그만큼 강이 굽이쳐 흐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연암은 도를 깨우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거난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만국진공기 : 청나라 황제의 천추절을 맞아 주변 국가들이 사방으로부터 공물을 바치기 위해 열하를 향해 몰려들었다.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8월 9일 / 8월 10일 / 8월 11일 / 찰십륜포(札什倫布) /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黃敎問答) / 8월 12일 / 8월 13일 / 8월 14일 / 천하의 형세를 논하다(審勢篇) / 왕민호와 나눈 말들(鵠汀筆談)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象記) / 환타지아(幻戱記)
- 열하에서의 일정이다. 황교(라마불교)의 반서(달라이 라마)를 접견한 것, 황교에 대한 탐문 결과, 중국 학자들과의 밤을 세운 필담, 기타 열하에서 보고 들은 특이한 것들을 별도로 정리했다.- 연암은 조선이 가난한 까닭을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목축과 관련한 조선의 한심한 상황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이유가 '말을 다루는 솜씨가 틀렸고 말을 먹이는 방법이 옳지 못하며 좋은 종자를 받을 줄 모르고 관원들이 말 기르는 방법에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황교문답 : 연암은 '적국을 염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형상을 통해 상대국을 제대로 분석해야 함을 역설한다. 연암은 열하에 이르러 자신이 헤아려 본 천하의 형세를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또한 황교와 관련하여 청나라 관료나 학자인 학성, 추사시, 왕민호, 윤가전, 기풍액 등과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곡정필담 : 이 글에는 연암의 우주관과 철학이 나타나 있다.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서도 빛에 대한 학설, 지동설, 티끌을 통한 우주만물 생성론,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제3세계설 등에 대한 주장과 이론이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었고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이후에는 왕조와 사대부들에 의해 싹이 말라 버렸지만...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8월 15일 / 8월 16일 / 8월 17일 / 8월 18일 / 8월 19일 / 8월 20일 / 옥갑에서 밤들이 주고받은 이야기(玉匣夜話)
-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 옥갑야화 중에 그 유명한 '허생전(許生傳)'이 들어 있다. 연암은 청나라 학자들과 변승업이라는 조선 갑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윤영'이라는 사람에게서 허생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한다.


 
역자는 글들을 일상적인 여행기 뒤에 두어 시간의 흐름을 따름으로써 이해와 감정의 효율을 최대치로 올리려는 시도를 했다. 왕민호와 기풍액과의 인상적인 만남 이후 연암이 따로 「경개록」에 엮어 둔 그들에 대한 글을 「태학유관록」속에 넣은 것, 고북구를 떠나는 여정에「야출고북구기」가 따라 나오는 것, 열하에서 성승을 만나고 티베트 불교(황교)를 접하면서 그 뒤로 「찰십륜포」와 「황교문답」이 이어지는 배치.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배치는 자신의 호흡으로 직접 읽어본 이들만이 느끼고 행복해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가 갖는 편집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역자는 편집 과정에서 연암과 이국 친구들과의 길고 긴 밤샘 필담 부분은 희곡 형식으로 처리했다. “형식적 구속 때문에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다” 하여 시(詩)를 멀리했던 연암의 글답게, 형식의 구속 없이 자유롭게 희곡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연암이 나누었던 필담의 희곡버전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박진감 넘치고 리드미컬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질적 존재들의 시끌벅적한 향연을 즐긴 건 에피쿠로스를 닮았고,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한 건 스피노자를 닮았으며, 웃음이야말로 삶과 사유의 동력임을 보여준 것은 니체를 닮았으며, ‘투창과 비수’의 아포리즘으로 통념의 기반을 가차 없이 뒤흔든 건 루쉰을 닮았구나!”
역자 고미숙이 박지원의 묘비명으로 바치고 싶다는 이 헌사에서 우리는 연암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가 구현하고자 한 철학적 실천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철저하게 비타협적인 연암, 그는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굴려가는 것, 그러니까 ‘내 멋대로’ 하는 거라는 진실은 현대의 경쟁 속에서, 그리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천편일률의 일상 속에서그래도 좀 괜찮은 삶을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역자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 이들, 지루한 삶의 해독제가 필요한 이들에게 '연암과의 접속'을 강추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를 다 읽고 보니 역자 고미숙씨를 비롯하여 그토록 많은 이들이 한반도의 수 많은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당부하는 뜻을 조금 알 수 있겠다.
 [열하일기]만 하더라도 당시 조선이 세상의 흐름에 닫혀있는 상태에서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진 명나라의 후계국임을 자임하고 유학의 고리타분함만을 암송하는 새태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고리타분한 유학에서 벗어나거나 서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조선이 벽돌, 구들, 수레, 목축, 축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나라의 '이용후생'을 도입하여 백성들의 후생과 복지를 위해 노력했다면 역사는 지금까지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지적하는 상당수 논거와 주장의 큰 틀은 연암이 연행기를 쓴 이후 2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사방이 바다와 대륙에 막혀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사방의 효과적인 문물을 도입하고 내세를 강화한다면 21세기 지금에서도 한국은 더욱 강력한 공동체와 국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 공동체의 정책입안자,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기득권'에 안주하여 과거의 잘못과 병폐를 고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해 손에 움켜진 것을 내던지고 과감하게 나서지 못한다면 단기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될 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들의 기득권마저 아지랑이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까지의 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통받는 것이 조선의 백성들과 뜻있는 지사들이었다면 앞으로 21세기의 남은 기간 역시 잘못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중산층 이하 민중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쓰러지고 고통받을 것이 자명하지 않을까???
 
[ 2011년 8월 18일 ]

c****n 2011.08.19. 신고 공감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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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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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상권보다는 하권에 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호질'이라는 박지원이 묵었던 여관의 벽에 있던 글을 베낀 내용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당시 부동의 이념이었던 '유교'를 공격하고 '자연주의 사상' 아니면 마치 미국원주민들의 사상과 같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마치 몇 년 전에 읽었던 'World without us'라는 책을 요약해 놓은 것 같았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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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상권보다는 하권에 더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호질'이라는 박지원이 묵었던 여관의 벽에 있던 글을 베낀 내용이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당시 부동의 이념이었던 '유교'를 공격하고 '자연주의 사상' 아니면 마치 미국원주민들의 사상과 같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마치 몇 년 전에 읽었던 'World without us'라는 책을 요약해 놓은 것 같았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중국에 떠돌던 많은 '백가쟁명' 중의 하나이겠지만 박지원에 의해 픽업당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내용도 정조가 열하일기를 박해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 같다.

 

또한 박지원이 청나라 황제가 머나먼 북방 열하에 별장을 지은 이유와 티벳불교를 아끼는 이유 등 당시 청나라를 둘러 싼 정세를 분석한 내용도 흥미롭다. 하여튼 정치가들은 휴가나 종교마저도 정치적인 이유를 꼭 집어 넣는다.

 

또한 사신단이 티벳불교의 수장인 라마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웃음을 지울수 밖에 없었다. 청황제를 보아서는 절을 해야겠지만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로서 나중에 조선에 돌어았을 때를 생각해야하는 사신단의 딜레마에 쓴 웃음을 지었다. 조선 시대에 정치적, 종교적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유교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나마 우리나라의 불교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서양에서 불어 오는 과학적 사실이나 천주교에 대한 분석 또한 매우 날카롭다. 지동설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개념으로 소개되고 선비인 박지원이 거기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또한 마지막에 있는 '허생전'도 반갑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내용인데 열하일기에 포함된 내용인지 몰랐다. 허생의 그림자에서 박지원을 보는 것 같았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사람들의 비운이겠지...

 

마지막으로 박지원의 친화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어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정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필담을 나눈다. 상인층이나 선비들을 만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중국고사를 들먹이며 '시'같은 필담을 나눈다.  내가 한문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은율과 비유를 잘 맞추는 것 같았다. 하긴 일생에 단 한번 맞은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그의 친화성과 호기심은 본받을 만하다.

e******s 2009.07.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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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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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하)                 상권에 이어서 하권을 읽어보았다.                   역시 상권을 읽을 때처럼 검토해 볼만한 많은 부분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 있다.               <시경>에도 “복을 빌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마는 이야말로 헛돈이 아니고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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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하)

 

              상권에 이어서 하권을 읽어보았다.    

              역시 상권을 읽을 때처럼 검토해 볼만한 많은 부분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 있다.

              <시경>에도 복을 빌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마는 이야말로 헛돈이 아니고

                무엇이랴. (리상호 번역, 열하일기, 상 386쪽)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시경>에도, 복을 구하기 위해 바른 도리를 굽혀서는 안된다 求福不回 하지 않던가.(71쪽)

 

              두 번역의 차이가 느껴지는지 

              리상호 번역본과 이책의 번역은 유사한 게 아니라, 많은 차이가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해석일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리상호의 열하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런 시인이야말로 사당에 모시기는 좀 모자라지 않을까? (상권, 387쪽)

 

              그 부분을 이 책 81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런 시인에게 어찌 사당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쪽 번역이 맞는 것일까?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

               원문은 如此詩人 寧可乏祠이다.

s***h 2009.07.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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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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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는 연경에서 열하까지 여정이 더 재미있다. 연경에서 연암과 종 창복이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연암이 장황하게 읊는 ‘이별론’도 절창이고, 가는 여정에서 겪게 되는 일화도 재미있다. 이런 여정을 더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은 연암의 유머다. 어쩌면 그렇게 재미있게 묘사했는지? 재미있는 묘사에는 정확한 기억력에 바탕한 기록이 한 몫 한다. 기억력에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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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는 연경에서 열하까지 여정이 더 재미있다. 연경에서 연암과 종 창복이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연암이 장황하게 읊는 ‘이별론’도 절창이고, 가는 여정에서 겪게 되는 일화도 재미있다. 이런 여정을 더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은 연암의 유머다. 어쩌면 그렇게 재미있게 묘사했는지? 재미있는 묘사에는 정확한 기억력에 바탕한 기록이 한 몫 한다. 기억력에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바탕이 된다.


어릴 때 우울증을 알았다고 하더니, 덩치에 비해 소심한 사람인 것 같다. 고북구를 빠져 나와 고북구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자신은 겁이 많아 밤에 잘 돌아 다니지 못하는데, 고북구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끌려 별 무서움 없이 구경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문득, 연암의 우울증이 떠올랐다. 아주 섬세한 사람인 듯 싶다.


이 여정에서 그의 대표작인 호질과 허생전이 나온다. 아,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이런 생각도 했다. 과연 열하일기의 장르는 무엇일까?


자세히 읽다 보면 정말 만만치 않은 고생길이었는데, 연암은 그 고생길을 새로운 특이점과 접속하는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수많은 주름을 이루는 대하가 된다.


열하에 가서, 티벳 판첸라마를 만나는 장면, 판첸라마를 만나기 싫어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심리 묘사, 황제의 노여움을 듣고 모두 놀라 자빠지는 것을 재미있게 묘사한 장면, 열하의 풍경, 중국에서 사귄 벗들과의 천문 지리 역사에 걸치는 장대한 ‘구라’


누가 기행문을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한 대여섯 번 읽으니까, 열하일기의 참 맛을 조금 알 것 같다. 왜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하는지.

g********m 2008.08.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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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과 함께 떠나는 장쾌한 유목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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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과 함께 떠나는 장쾌한 유목여행!!   열하일기 [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중국 기행문집(紀行文集)이다.   열하일기에 대해 살짝 들추어 알아보자면..   26권 10책. 규장각도서. 1780년(정조 4) 그의 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칠순연(七旬宴)에 가는 도중 열하(熱河)의 문인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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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과 함께 떠나는 장쾌한 유목여행!!

 

열하일기 []는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중국 기행문집(紀行文集)이다.

 

열하일기에 대해 살짝 들추어 알아보자면..

 

26권 10책. 규장각도서. 1780년(정조 4) 그의 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칠순연(七旬宴)에 가는 도중 열하(熱河)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곳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바를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이해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 ·성경(盛京)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연암의 대표작인 이 《열하일기》는 발표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 그곳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은 당초부터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도 없었고, 여러 전사본(轉寫本)이 유행되어 이본(異本)에 따라 그 편제(編制)의 이동이 심하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습상(習尙) ·고거(攷據)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예술 ·고동(古董) ·지리 ·천문 ·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세계최고의 여행기로 꼽히는 열하일기는 과거 학교를 다니며 국사를 공부할 때 끊임없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박지원하면 지금 학생들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 때는 이렇게 열하일기를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책을 읽는 것보다 그저 학교 공부나 친구들과의 어울림이 좋았을 터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렇게 열하일기를 만날 수 있음이 내겐 행운이었다.

 

예쁜 사진들과 함께 기록된 이 책은 학교 다닐 때 보았던 국사책을 연상하게 만들어주면서 과거 학창시절로 돌아가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시절로의 초대는 너무나도 신선했고 아름다웠다.


200여년전 열하라는 것이 단지 하나의 단어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명을 뜻하였기에 신기하기 까지 했다. 한양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고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까지 가는데 무려 4천 1600킬로나 되었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사냥을 즐겼던 휴양지란다. 온천이 많아서 강물이 얼지 않기에 열하라고 부른다는 이곳은 북경에서 2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내몽고 지역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원래 그곳에 가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황제가 그곳에 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가게된 열하...그 가운데의 모든 이야기들이 담긴 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박지원은 청으로 가서 많은 선진 문물을 배웠으며 우리나라의 앞날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청을 오랑캐라고 하며 그저 대항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되는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닌 문물을 받아들여야함을 알게되는 사신길..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무작정 버리는 것도 문제인 것이다. 무분별한 외래문물로 인해 균형이 맞지 않고 있는 요즈음.. 과거 쇄국주의와 오늘날의 정치 이념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우리나라만의 멋들어진 이념이 탄생하길 바래본다. 그 안에 살아 숨쉬고 있는 내 자신 또한 하나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길 바란다.

s******g 2008.05.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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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의 중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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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뒷 부분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본다.    첫째는 유교국가 조선이다. 당시 명이 바뀌고 청이 들어선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고, 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잡혀있는 시기이다. 조선에서는 소중화로 유교에 빠져있는 시기이다. 황제께서 자기의 스승이신 중을 만나라는 명령에 조선 사신단은 질색한다. 황제의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지만 억지로 만날 수 밖에 없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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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뒷 부분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본다.

 

 첫째는 유교국가 조선이다. 당시 명이 바뀌고 청이 들어선지도 꽤나 시간이 지났고, 청을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잡혀있는 시기이다. 조선에서는 소중화로 유교에 빠져있는 시기이다. 황제께서 자기의 스승이신 중을 만나라는 명령에 조선 사신단은 질색한다. 황제의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지만 억지로 만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선물로 받은 불상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다. 박지원은 고루한 조선의 유교를 비판하고자 하는 느낌이다. 아울러 그가 청이 가지고 있는 외교 정책에 대해서 정확하게 서술한 부분을 보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째는 그의 우주론이다. 홍대용의 우주론을 이해하여 설명하는 것이겠지만, 태양과 달과 지구의 관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땅이 4각이 아니고 둥글다는 것, 특히 우주의 만물들은 모두 둥글지 각진 것이 없다는 것. 중국의 일반 선비에게 학설을 푸는 것이 사뭇 재미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부국강병에 대한 그의 신념이다. 말에 대해서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말이 전쟁에 있어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잘 관리하고, 말의 수량을 풍부하게 하여야 한다. 하지만 조선은 말을 다루는 것이 부실하다. 황제가 할 일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다. 수레를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이 떠오르고, 북학파들이 말한 수레를 장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역관들에 대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권선징악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가 청나라로 다니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에 추가하여 박지원의 허생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철학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완역으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z******g 2011.10.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