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타자의 권력이 개입한 사건이라 하여도 우리 자신의 역사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난 시절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부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 지배 계층의 적지 않은 비율이 지난 날 일제에 부역하는 선택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하더라도 권위가 서지 않고 지배자를 향한 시선이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다름 아닌 역사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둘로 분단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와 같은 사실이 과거 청산을 제대로 시행치 못한 우리의 과오를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진 못한다. 부정적이지만 긍정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모순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몇 없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얼룩진 유럽 사회 역시 우리보다야 나은 길을 걸었다 생각되지만 비슷한 문제점을 겪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프랑스 사회의 경우를 보자. 나치 세력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 프랑스에는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괴뢰정부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인 스스로가 세운 정부였으며 나치 독일에 자발적으로 협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시 지배자였던 페탱은 라디오 방송의 대국민성명을 통해 “오늘 나는 협력의 길에 들어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독일이 제1 의 위치에 놓이는 새로운 질서에서 2순위를 점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일환이었다. 공화국의 성립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는 과거의 부당함에 대한 반발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드골 정권의 권력이 강건해지기 전까지 존재했던 약식처형(남성)과 삭발식(여성)은 드골 정권이 안정화되면서 합법적인 숙청의 형태로 나아갔다. 이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숙청은 꽤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수치만 놓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겠으나, 해방 당시의 지사 99명 중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는 단 6명에 불과했다. 전체 사법관의 10% 선인 400명 정도가 징계를 받았으며, 경찰공무원도 총 징계자는 8,615명에 달했으며 그 중 6,126명이 완전히 쫓겨나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흐지부지했던 징계의 양상과는 비교가 되는 바이다. 물론 프랑스의 숙청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제기가 존재한다. 처벌의 수위 조절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공무원의 75.1%가 중징계를 받았다고는 하나 이들 중 대다수는 고위직이 아니었다. 또한 징계가 처음과 같은 강도로 지속되지 않았음을 아래의 구절은 보여준다 하겠다. 대독협력을 이유로 유죄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선고받은 형기의 일부(종종 극히 일부)만을 채우고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중략) … 결국 해방 20주년에 해당하는 1964년에 이르면 독일강점기의 부역죄로 감옥에 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 (p91-92)
한편 다소 감정적인 숙청도 행해진 듯하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가 정기적으로 친정 쪽 [독일인] 친구의 방문을 받은 것을 용인한” 지하철 기관사까지도 행정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p123)는 구절은 다소 어이 없게 들리기까지 한다. 급기야 이에 대한 반발도 커지기 시작했다. 숙청이 과오에 대한 정당한 처분이 아닌 또 하나의 폭력이었음을 고백하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레지스탕스에 대한 기억들이 희미해지는 틈을 피숙청자들의 외침이 파고든 것이다. 여전히 프랑스 사회는 지난 역사를 하나의 통일관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일제 시대나 6.25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젊은 계층 역시 나치 치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설문조사에서 적지 않은 응답자들이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프랑스 사회에서는 어찌 되었건 부역 행위에 대한 처벌이 진행되었으며, 그와 같은 처벌이 보다 큰 폭력을 막으면서도 새 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점이다. 또한 범죄의 개념 역시 시대의 흐름과 함께 진화했다는 점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최초의 처벌은 주로 반민족적인 행위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처벌의 초점이 반인륜적 행위로 옮겨감에 따라 벨디브 사건을 비롯하여 바르비, 투비에, 파퐁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과거는 현재의 토대이다. 지나친 과거에의 집착은 진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는 하나, 과거가 아예 존재치 않는데 현재를 건설하는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도 같다. 민족을 마냥 강조하는 것은 시대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족을 고려치 않더라도 인간의 존엄성 차원에서 지난 역사는 논의될 필요는 있다. 부당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
|
부제 : 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
최근에 나온 나치 독일 치하에서의 나치 부역에 대한 숙청에 대하 본격적인 저술이라는 선전을 보고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이미, 1999년에 도서출판 <중심>에서 펴낸 중앙일보 파리 주재원을 지낸 주섭일씨의 책인 <프랑스의 대숙청>을 읽었기 때문에 두 책을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숙청’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 때문인지 결국 숙청을 주제로 하면서도 제목에서 숙청을 빼는 대신 ‘과거사 청산’이라는 조금은 순화된 제목을 채용했다. 하지만 결국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1940년 나치의 강점기부터 1944년 8월 파리가 해방될 때까지 나치 치하에서 사회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 숙청이었다. 주섭일씨의 책이 해방 직후에 이루어진 숙청에 대한 좀 더 디테일한 면을 다루었다면 이용우씨의 책에서는 깊이보다는 넓이가 느껴졌다.
숙청에 대한 개념 설명에서 시작해서, 나치 치하에서 어떻게 대독협력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해방 직후의 숙청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해방 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다루어진 클라우스 바르비-폴 투비에 그리고 모리스 파퐁에 대한 재판들이었다. 아울러 숙청 전반에 대한 해방 후의 대중들의 인식변화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룬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에게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대독협력자들을 처벌하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대의 아래 집행되었던 당시의 숙청이 시대가 흐르면서, 피숙청자들과 이해가 맞물려 있는 이들을 통해 당시의 숙청이 평가절하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당시 숙청을 주도했던 레지스탕스 세력도 온전한 숙청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어느 순간 접으면서 반대파들에게 기선을 내주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 영향 탓인지, 프랑스 내에서 프랑스인에 의해 숙청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작금에 와서는 누구나 꺼리는 주제가 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사항이었다. 심지어 당시에 숙청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조차 나올 정도니 말이다.
다시 주섭일씨와 이용우씨의 저술에서 비교를 한다면, 전자가 해방 직후의 숙청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각주나 인용한 부분들에 대한 출처를 밝히는데 있어서 미진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반면, 이용우씨의 저술은 통사적인 면에서 해방 후 60년을 넘나들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주와 출처를 매우 자세하게 소개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전후 숙청의 과정에서 치열하게 대립했던 프랑수아 모리악과 대표적인 레지스탕스 지식인이었던 알베르 카뮈의 논쟁에서 보여졌듯이, 관용과 화합이냐 아니면 철저한 처벌을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초석을 다지느냐는 국가적 차원의 고민이,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전무했다는 사실이 매우 대조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