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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저마다 진리라 자칭하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어느 것이 진정한 진리인가? 왜곡된 거짓 진리가 우리의 눈을 가려 진정한 진리를 분간하기 어렵다. 우리의 엄격한 분별의 능력이 필요한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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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님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두 권을 읽고 아주 감동을 받고 깨달았던 것도 많다. 아직 한 권 더 남은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옥성호님이 '방언'에 대해서 분석(?)하신 책이다. 성령의 은사 중에서 특별히 '방언'은 많은 논란이있다. 이 논란은 근본적으로 오순절계열의 은사계속론과 개혁주의계열의 은사중지론의 논란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역사가 오늘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오순절 계열이고 은사계속론자들이다. 그렇지만, 사도행전 2장은 상징적 사건이고 이 사건이 그대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에는 거부하는 사람들이 은사중지론자들이다.
'방언'과 '성령세례' 문제는 과거 영국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과 존 스토트 목사님과의 논쟁으로도 유명하다.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어느 것이 옳다고 명백히 가려지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광고'를 보고 샀었는데, 이 책 역시 철저히 '은사중지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만약, 김우현씨의 '하늘의 언어'를 읽고 이 책을 접한다면 아주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할 것이다. 중립적 입장에서 양쪽의 장단점을 제시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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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우현 감독의 '하늘의 언어'를 읽고 난 뒤 내 감상은 이랬다." 신학적으로 따져봐야할 문제들은 많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점은 배울만 하다".. 그런데 잊은 게 있었다. 하나님 중심이라 함은 철저히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우현 감독의 '하늘의 언어'와 극명한 질적 차이를 보이는 책이다. 김우현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의 체험이 책의 전개에 중심에 서있었던 반면 옥성호 형제는 말씀 중심에서 접근하려고 애쓰고 있고 많은 부분 동의한다. '하늘의 언어'가 출판된 후로 이와 관련된 질문들을 수도없이 받았고, 설명해 주느냐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 책이 나오거나, 안 나오면 내가 한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내가 이책에서 동의하는 바는 방언이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 방언이 성령세례 혹은 성령 충만의 증거가 아니라는 점, 방언이 모든 은사의 기초가 되는 은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반면 동의할 수 없는 바도 있었으니.. 성령 세례에 대한 관점과 은사 중지에 대한 관점이다. 저자가 방언, 예언, 지식의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하는 점은 동의하지만, 모든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보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또한 성령세례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개혁주의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것과 같다. 그는 성령 세례와 충만을 구분했고, 2차적인 성령세례를 지지했다. 이를 설명하려는 한참 걸릴테니 언급하지 않겠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한 책이었다. 하늘의 언어에 심취하여 방언을 사모한 나머지,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을 신앙이 없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도 몰아가는 세태가 너무도 화가나던 참이었다. 어쨋든.. 이번 책읽기는 흥미진진했다. 동의하는 부분에선 같은 생각으로 인해 즐거웠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에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을 다시 정리해 가며 즐거웠다. 하늘의 언어에 심취해 방언은 맹종하는 이들과 그런 주변인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개해 주고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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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책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 대부분이 내가 20대부터 보아 온 개혁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성령은사론의 내용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근간의 교회의 마케팅적인 요소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또한 감정 위주의 격한 예배인도 방식에도 찬성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방언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더욱 돈독히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말씀"이란 무엇인가? 그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가치와 행동의 표준은 될 수 있으나, 구체적인 행동양식까지 일일히 설명할 수 없는 제한성을 가진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비판한 Harvey Cox의 견해를 지지한다. "하나님은 text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한 text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사탄의 공격"으로 치부 해 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text"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반문 해 본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한 방언통역에 있어서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지적한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인간의 제한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완전한 것이 올 때에" 우리는 비로서 "완전한 것을 행할 수 있다."
소위 은사주의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 행위가 따라가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들이 하는 영적인 이적과 행위는 그 모양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또한, 소위 많이 안다고 하는 자, 말씀 위에 섰다고 하는 자 역시 모든 가치 판단 기준이 "하나님" 아닌 "자신"이 되어버려 일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 그 모양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모습"을 요구하신다. 주님 안에서의 지식과 행위, 영적인 감각을 지닌 자를 주님께서는 찾고 계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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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잠식한 '신비주의'가 가진 엔터테인먼트적 속성 때문에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3부 엔부기에서 방언을 다루려고 계획하다가, 아예 이 문제를 떼어내 책 한 권으로 쓰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베스트셀러 "하늘의 언어"가 이 책을 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그 책이 방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하나님의 대사"를 읽을 때처럼 마음이 좀 불편해지지 않을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어쨌든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다 읽고난 후라 이 책에서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 수월했다. 철저히 말씀에 근거해 명쾌한 논의를 펴 나가는 방식도 여전하다. 다양한 책과 주석을 읽지만 말씀의 앞뒤 맥락을 생각해보았을 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이 되는 이유를 찾을 때까지 고민해서 책임 있는 변증을 보여주는 점이 인상 깊었다. 적어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제시하는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린도전서 14:22)"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공관복음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다룬 사도행전은 연결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명령하셨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4가지 방언을 분석해보면, 방언은 이미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이방인, 아직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들은 후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접했을 때 회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지금처럼 무의미해보이는 알 수 없는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 통역이 가능한 외국어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은 이방인들이 난 곳 사투리로 된 외국어였으며 규칙성 있고 의미 있는 언어였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20세기 오순절주의 이후 퍼져나간 지금의 방언은 이미 타종교의 신비주의적 방언과 다르지 않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인 고린도전서 12-14장은 묶어서 읽어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중심에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화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은 많은 은사를 받은 만큼 주변의 유혹도 많았다.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 그들에게 4번 편지를 썼는데, 교회를 물들인 세속적 문화를 책망하기 위해 다른 어떤 교회들에게보다도 질타와 비꼬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은사의 올바른 사용을 다루고 있는 12-14장도 전후 맥락을 살펴가면서 바울이 비꼬는 표현이나 과장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잘 읽어야 한다. 필요한 한 구절만 떼어서 읽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유명하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은사, 특히 방언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말하는 와중에 불쑥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은사의 본질도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은사는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은 자기자랑을 위한 것으로 왜곡 되었다는 것이다. 통변 없이 개인적인 기도에 남용되었기 때문에 방언 내용이 공동체에 공유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저주할 자'로 부르는 등 옳지 않은 방언도 나타나게 되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방언을 금하지는 않겠지만 차라리 예언처럼 공동체에 덕이 되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현대의 방언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전한 것'이 오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고 바울은 말했다. 즉,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사도 시대와 같은 특별계시로서의 방언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성행한 방언처럼 지금의 방언은 타종교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방언이 터지게' 하기 위한 각종 기법과 꼼수들을 통한 인간적 노력은 은사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자신조차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방언은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14장의) 14-19절에서 "마음"과 "영혼"의 대조를 인간의 비지성적, 비사고적 측면과 이성적, 사고적 측면의 대조로 보는 것은 바울 서신 그 어느 부분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바울 서신에 있어서) "영혼"과 "마음"은 근본적으로 동의어라는 것, 아니 적어도 이 두 용어는 인격의 서로 대치되는 별개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 전체의 사상은 인간의 영혼이 마음과 대조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같이 인간의 내면생활 전체를 다 포괄하는 용어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4:!4의 "마음"과 "영"의 대조를 인간의 사고적 측면과 비사고적 측면의 대조로 보는 것은 신약 사상에 어긋난다...... 성경은 전인을 다루고 있다. 즉 인간이 마음과 뜻과 혼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막 12:30)과 새로워진 마음(mind)으로 자아 전체를 하나님께 경배와 제물로 바치는 것(롬 12:1-2)을 다루고 있다.(p. 173 재인용, 리처드 개핀 저, "성령은사론", p. 91-93) 개핀 교수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몸과 정신이 따로 놀며 영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정신은 딴 데 가 있다고 하는 식의 가르침은 전혀 성경과 관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전인격적 존재와 전인격적 예배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p. 173)
저자는 옳다 아니면 그르다 둘 중 하나의 입장만 있을 뿐 잘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중간 입장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이라면 현대의 은사나 방언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 얼마간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말씀을 근거로 조목조목 따져주는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설득당했다. "왜 인간인가" 같은 뇌과학 관련 서적을 읽다보면 종교인들이 환상 같은 체험을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와 간질에 관계되는 뇌 부위가 측두엽 비슷한 곳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있다. "뇌과학 여행자"에서는 많은 예술가들이 간질의 전조로 밝은 빛 같은 환상을 보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한다. 은사 전부에 대해 판단을 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현대의 어떤 왜곡된 은사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나 육체의 문제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언을 녹음해 들려주고 통변해보라고 요구했을 때 다 다른 내용의 통변을 했다는 실험 결과가 인상 깊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저자가 단호한 어조로 입장을 정리하라고, 말씀과 체험 중 어느 것이 우위냐고 묻는다면 역시 말씀을 택하겠다고 생각했다. "외로움과 자신의 가치 없음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 방언은 자신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데 중요한 동기부여적 가치를 가진다......(방언 실험 그룹에서) 방언을 하지 못한 사람 중에서는 단 30%만이 극심한 정신적 불안(anxiety crises)을 최근 겪었던 반면 방언을 하게 된 사람들은 그 중 85%가 정신적 불안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차이는 통계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차이다. 실험 결과 우리는 방언을 하게 되는 데 최근 과거에 겪은 정신적 불안이 큰 요소로 작용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p. 214 재인용, John P. Kildahl, "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s", p. 5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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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방언을 은혜와 능력을 받는 통로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비밀의 열쇠로 여기고, 그래서 하늘의 언어 운운하는 김우현 씨가 쓴 책 『하늘의 언어』를 겨냥하고 쓴 책이다. 시종일관 체험 중심의 논리를 세워갔던 앞서의 책과는 달리, 이 책의 저자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며 글을 써내려간다.
저자는 방언을 교회가 설립되는 특별한 시기에, 표적을 중요시했던 유대계 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독특하고 유일한 은사였다고 본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이란 오직 외국어 방언뿐이었고, 오늘날 일각에서 말하는 ‘영적 방언’, 혹은 ‘하늘의 언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고 생각한다. 방언과 관련해 가장 많은 직접적인 교훈/언급이 등장하는 고린도전서를 연구해 볼 때, 이미 교회 주변부에 다양한 종류의 세속적이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 사이에 그런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들이 존재했는데도 바울이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바로 방언에 관한 교훈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 교회 안의 방언은 그런 세속적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류였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외국어 방언은 점차 그쳐가고 있었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와 시기적으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로마서에 은사의 종류로 방언이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방언의 역할은 성경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였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힘을 싣는다.
아울러 오늘날 방언이라고 행하여지는 것들은 사실상 일관되게 통역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학적으로 무의미한 음성들의 연속일 뿐이며, 나아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해석방법 상의 문제점들도 지적한다.
2. 감상평 。。。。。。。
앞서 『하늘의 언어』라는 영지주의적 교훈을 담고 있는 책에 관한 서명을 쓰면서 내가 말했던 ‘재미도 없고, 공격적인 말투로 인해 욕먹기 딱 좋은’ 작업을 해 낸 책이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민감한 쟁점에 대해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고 있는 마당에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의 내용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판을 할 때는 정확한 이유와 분명한 논리가 필수적이다. 비록 저자가 아직 정규 신학과정을 수료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신대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도 들었는데 어떤지는 모르겠다), 저명한 신학자들의 해석과 성경문맥에 따른 이해를 시도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와 논리를 확보하고 있다. 내가 경험해 보니 아니더라, 누구에게 들은 얘긴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따위의 한심한 비난은 적어도 이 책에 대해서는 온당하지 못한 평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논리에 끼워 맞춘 불쌍한 책” 운운하는 밑도 끝도 없는 100자평을 달아 놓은 사람도 있던데, 누가 더 불쌍한 건지.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 중 하나는 반(反)지성주의다. 지성의 사용이 줄어들면 자연히 경험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고, 경험이라는 건 태생적으로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주관성이 강조된다. 쉽게 말해,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그것이 믿음의 길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그랬고,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요 16:2-3)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면 지성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냥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저자의 의견을 단순히 방언중지주의자의 생각으로 치부하고 나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특히 분명한 이유와 명확한 논리도 없이 따지는 식으로는 곤란하다. 그건 그냥 자신이 얼마나 성경과 예수님, 그리고 진리의 성령님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증거일 뿐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