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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ze the Day :: Saul Bellow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는 도시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성격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요새 같은 성장주의 시대엔 그 속도를 쫓아가기는 커녕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쫓아갈 욕망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럴 마음도 그럴 이유도 찾지 못해 그저 가만히 서있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도태 되었다 강제 분류 되고 만다. 남들이 그렇게 분류하는거야 상관은 없는데, 이 도시에선 나와 같은 그룹에 있는 사람이 적어서 다만 그것이 쓸쓸할 따름이다. 돈 좀 없어도 되고, 덜 좀 알아도 되고, 누구보다 잘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있으면 나누고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도시의 생리에 그렇게도 안맞는 것일까? 인간의 한 평생이 너무 짧아 아득바득 열심히, 죽어라 달려야만 가치가 있다고들 하지만, 느긋하게 유랑하듯 몇가지만 손에 쥐었다 다시 제자리에 놓고 가는 삶이 그렇게나 초라한 삶일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개설한다. 나를 세상에 알리고 무언가 반드시 남겨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온갖 흥미거리를 끌어내 폴더를 만들고 일상을 시시콜콜히 쓰고 찍어 올린다. 남들과 같으면 그 열심히 하는 게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아 이름을 바꾸고 디자인을 바꾸고 쓰는 기종을 바꾼다. 나란 존재는 이러이러 하다고 신빙성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가지각색의 심리 테스트를 끌어모아 내 취향은 이렇고 내 성향은 이렇다고 남에게 고지하듯 드러낸다. 그리고 스스로 믿으려 한다. 그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서, 그게 나 자신이고 내 능력인지 알 수 없어서, 이렇게 열심히 쓰고 찍고 남기는 것이 내가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고 가치라고 어떻게든 믿으려 한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멈춰서서 그 남겨진 것들을 돌아본다. 이것들이 정말 나일까? 지금의 나를 가치있게 하는 것들일까? 그렇다면 이것을 그만두었을 때 나는 그 순간부터 무가치 해지는가? 나는 이것들을 버리고도 오롯이 홀로 설 수 있는가? 가시적인 데이타 양산에 집착하는 것 역시 잘못된 교육의 폐해가 아닌가 싶었다. 가끔 강연회 등에 참석할 때마다 종이와 펜을 들고 강사가 하는 말을 죄다 받아적는 이들을 보게 된다. 받아적는 데 바빠 강사가 도중에 농담을 해도 웃을 타이밍조차 놓치는 그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고 만다. 어려서부터 판서와 받아쓰기에 길들여져 어느덧 써서 눈으로 보지 않으면 기억하지도, 맥락을 이해하지도, 가슴으로 느끼지도 못하게 되버린거다. 메모하는 습관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지나쳐 [쓰지 않으면 안된다] 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과연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남겨야만 하는 것이 자기 가슴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양에 연연하고 있다면 일종의 자기 기만을 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마치 책을 대량으로 사놓고 읽지 않았으면서도 지적허영심에 만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것은 내 얘기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 안정을 찾는 나 자신에게 가끔씩 소스라쳐, 이것이 없을 때의 내가 과연 어떨지를 몇번이고 시뮬레이션 하면서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갖고 자아비판하며 때때로 괴로워한다.) 보이는 것에, 남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싶었다. 하루를 별 하는 일 없이, 아무 소득없이 보내도 나 자신을 자책하고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를 게으르게 만들고 싶었던건 아니지만, 멈춰서 있는 나날을 한동안 보내더라도 그조차도 나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었다. 사람의 하루는 그렇게 무의미하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 마음을 다독이고 기운내고 싶었다. 그래서 또 다시 무엇을 하더라도 그땐 그때대로 열심히 하고, 그러다 또 후련하게 내던지고 다시 새로운걸 시작하고 싶었다. 사람의 평생이 고작 100년도 안된다해도 그렇게 사는 것이 왜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 하는가? 스스로가 그 인생 즐겁게 살았다면 누구에게 내보일 무엇이 없더라도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우리는 왜 고통스러워 하는가. 누구에게 내보일, 나 자신을 속일 무언가를 위해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다람쥐 마냥 죽어라 끝없이 달리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공포스러워 하는 것이 아닌가.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어렸을 때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외모도 별볼일 없고 능력도 변변치 않다. 그래도 자신에게 무언가 가치가 있을거라고 어떻게든 믿고 싶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윽박지르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아들을 과대포장해서 자랑하려하는 속물 근성을 내보인다. 단지 아버지의,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인정만을 바랬던 심성 약한 토미는 극단적인 남탓과 극단적인 자기탓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심리 속에 곁에서 자신을 구슬리는 탬킨 박사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그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포자기하듯 그를 믿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사기 당하고 아버지의 싸늘한 냉대를 받은 채 모든 것을 잃은 토미는 끝없는 절망 속에 빠져든다. 그는 정말 인생의 실패자였을까. 모든 책임이 그에게만 있을까. 그렇게 뭘해도 바보같은 선택만 하는 그는 더이상 살 가치가 없는 것일까. 어렸을 때 무언가 실수를 하면 부모는 그렇게 혼냈다. 네가 잘못했으니 혼나는 거라고. 남들 다 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내내 내가 잘못된줄로만 알았다. 부모의 기준에, 세상의 기준에 미달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살아선 안될 사람 같았다. 세상엔 꼭 있어야 될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없어야만 할 사람 이렇게 세 분류의 사람이 있다면 나는 가장 마지막 그룹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돋보이지도 않으니까, 좋아서 하는 일이라해도 다 실패만 하니까. 타인 앞에서 부모가 나를 과장해 설명할 때는 더 비참했다. 지금의 나는 부모조차 인정하지 않는거구나. 부모가 바라는 건 최소한 저기까지인데 나는 죽어도 못할 것 같으니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사춘기의 객기가 스며들 무렵에는 자기 비하와 세상에 대한 원망심이 널을 뛰며 수백번 수천번이고 그들 앞에서 목숨을 끊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자기연민으로 베갯잎을 적시곤 했었다. 그걸 지금은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극복해나가고 싶을 뿐이다. 부모에게든 남에게든 보이는 것에, 성과에, 수치에, 기준에 연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며 살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내 자신의 능력 미달에 좌절하더라도 적어도 남과 비교하며 나를 더 끌어내리지 않고 싶다. 좋아하는 일이 나를 괴롭히는 지경까지 놔두고 싶지 않다. 괴롭히는 순간에 바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를 구제하고 싶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전부는 그냥 나 자신일뿐이라고 믿으며 살고 싶다. 더 없어도 좋다. 덜 알아도 좋다. 그것을 누가 비난하고 조롱할까봐 그게 두려워 달려가지 않겠다. 좋아서 달리다 즐거이 멈추고, 좋아서 끌어모았다 기꺼이 내려놓고 가는, 그런 인생을 살겠다. [오늘을 잡아라]. 얼핏 자기계발서나 성공서의 제목처럼 보이는 이 말은 사실 영어 원문으로 Seize the day, [오늘(인생)을 즐겨라] 에 더 가깝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오늘 하루를 즐기는 것이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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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Seize the Day) - 솔 벨로
『오늘을 잡아라』 (Seize th Day) - 솔 벨로
허공에 매달린 사나이 "나는 너한테 한 푼도 줄 수 없어. 돈을 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거야. 너와 네 누이는 내가 가진 돈 마지막 한 푼까지 가져갈 거야. 그러나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있단 말이다. 생명이 아직 붙어 있어. 나도 너나 다른 사람처럼 살아 있어. 그리고 나는 누구도 내 등에 짊어지고 싶지 않단다. 다들 내 등에서 내려가! 그리고 윌키야, 너에게도 똑같은 충고를 해 주마. 누구도 네 등에 태우지 말아라." 하지만 그런 애들러 박사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또한 자신이 머무는 호텔의 이름처럼(글로리아) 과거의 헛된 영광과 명예 속에서 살아가는 허영심 가득한 꼰대일뿐이다. 여전히 아버지의 허영심에 대한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버지는 대체 무엇 때문에 찬사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잠깐씩 마주칠 뿐이어서 만남의 깊이가 없는 이 호텔이라는 곳에서, 그런 찬사들이 어떻게 그를 만족시키는 걸까? 그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잠시 머무를 뿐이었다. 듣는 순간 곧바로 잊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결코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윌헬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동글동글한 눈 위의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리고 두툼한 신문지 너머를 바라보았다. 한편으론 토미가 가엾은 생각도 들었다. 토미가 아버지에게 바라던 것은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애정어린 관심과 사랑이다. 꼰대같은 아버지는 형편없이 추락한 아들이 못내 창피한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들이 이미 짤린 회사의 임원이라고 거짓된 말을 해댄다. 그는 아마도 아들이 더 유능하고 뛰어났다면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아들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맹세코 아버지는 이 점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제게도 돈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접을요. 제가 아버지의 보증수표였다면, 그래서 호텔 사람들에게 동네방네 저를 자랑하고 뽐낼 수 있었다면, 좋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되었을 텐데요. 하지만 저는 그런 아들이 아니잖아요. 저는 나이도 너무 많이 먹고 운도 되게 없는 놈이에요." 토미는 자신의 불행이 오로지 외부 환경으로부터 온 것이고, 자신은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며, 이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아버지가 야속하고, 매달 생활비와 양육비를 내놓으라며 독촉하는 아내는 원수같다.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 하고 결코 인정하지 않는 그는 허영과 방어적인 심리로 가득차 있다. 막다른 골목길로 내달리는 그의 인생에 기름을 붓는 사람은 바로 탬킨 박사다. 정신과 의사인 탬킨 박사는 토미에게 재밌는 대화 상대였다. 그의 이야기들은 사실인듯한 허구들로 가득하다. 정신 심리학 박사인 그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토미의 정신와 영혼을 달콤한 말로써 치유해준다. "저는 이런 말도 들어 봤습니다." 윌헬름이 한마디 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는 말이요." 토미는 그의 뛰어난 언변에 속아 넘어가 결국 마지막 남은 전 재산 700달러를 주식 시장(선물 옵션)에 투자한다. 그와 함께 공동 투자로 요리용 돼지 기름 라드(Lard)에 모두 투자하고 마는데 돌아와보니 탬킨 박사는 사라지고 없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토미는 탬킨을 찾으러 거리로 나와 우연히 남의 장례식 행렬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는 눈물밖에 안 나온다. 대성통곡을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죽은 자와 가까운 사이라고 짐작하지만 닮지 않은 얼굴에 갸우뚱한다. 사람들을 '바로 지금'으로 데려와야 해. 현실 세계로. 현재 이 순간으로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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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많은 생각을 하지만, 막상 행동을 하게 되면 그동안 하지 말아야지 했던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다소 어리석은 사나이가 있다. 주인공 토미 윌헬름의 45년 인생은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슬픈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코 헐리우드로 가서 배우가 될 운명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재능도 없었던 윌헬름은 헐리우드행을 택했고,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여자와 결혼해 지금은 이혼 위기에 처해 있으며, 아버지가 믿음이 가지 않으며 사기성이 짙어서 그를 믿지마라고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탬킨 박사에게 남은 전재산을 맡기는 어리석음을 행했던 윌헬름의 삶은 그야말로 나락 그 자체이다.
솔 벨로의 작품 [오늘을 잡아라]는 토미 윌헬름의 더이상 끝간데없는 삶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직장도 잃고 가족에게서도 쫓겨난 윌헬름은 유명한 의사였고 지금은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는 아버지 곁에서 머물게 된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못마땅해 하며, 자신의 체면만을 중요시 한다. 그래서 아들이 경제적인 곤경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모른척 자신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바라지 말아달라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경제적으로 충분히 여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의 어려움을 끝까지 모른 척하고, 그런 아들에게 오히려 좀 더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냉정함이 조금은 지나쳐보였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부모로서의 정서와 다소 거리가 있을 듯도 하고, 요즘 세태를 볼 때 그러한 부모의 태도가 충분히 이해도 되었지만, 나라면 과연 그러한 입장에선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지 고민도 되었다. 윌헬름이 충분히 자신의 앞가림을 해야 할 나이지만,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들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문화적 차이이고, 개인간의 견해차라고 하기엔 윌헬름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고, 과연 그가 삶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과 걱정이 함께 했다.
탬킨 박사가 '오늘을 잡아라' 는 충고를 따르는 의미로 윌헬름은 얼마남지 않은 전재산을 주식에 투자한 것이,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삶이 끝장 났다고 판단했던 결과의 행동으로 여겨진다. 결국은 모든 이들에게서 배신을 당하게 되는 윌헬름은 자신과은 일면식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망자를 보고 목놓아 운다. 그 모습에서 처절할 만큼 희망이 사라져간 한 사내의 가슴 아픔이 현대인의 또다른 서글픔 이면을 들여다 보는 듯해 우울했다. 과연 지금의 많은 이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 위에는 누군가의 눈물과 아픔을 그 기반으로 한 결과물일 수도 있음을 늘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또한 삶에서 보여지는 '한탕주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러면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한 시간들이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또한 진정으로 소설속의 주인공 토미 윌헬름이 추구하고자 했던 삶의 목표와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많은 생각꺼리를 안겨준 책이었다. 그리고 읽고 난 뒤의 이 우울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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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40세에 이르면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혹(不惑)이라고 지칭했다. 인간에 있어 40이라는 나이는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반환점을 돈 세월에 비견될 수 있듯이 지나온 삶의 리뷰가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정립됨으로써 남은 삶의 조파수 역활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불혹의 의미는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특히 유교사회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이 40과 불혹이라는 멍에 아닌 멍에속에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삶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살아가는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 한두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물이 흘러가듯이 그냥 그 물길에 저항할 수 없이 몸을 맡겨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 가타부타할 수 도 없도 해서도 안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인생들에게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는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고 많은 점에서 독자들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마흔넷의 토미 윌헬름이라는 중년 남성이 살아온 40년의 세월과 앞으로 살아가야할 남은 시간을 단 하루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속에 녹여 놓고 있다. 그나마 잘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버림받고 아버지와 아내로 부터 소외되고 남은 몇푼의 돈마저도 사기꾼에게 털리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인생의 종말과 두려움 그리고 허망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는 애잔한 작품이다. 특히 중년의 남성들에게 이 작품은 500가지 이상의 공감을 가질 수 있는 내러티브와 주인공의 심리상태 그리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벌어져 버리는 일들에서 더 애잔하게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작중 주인공인 윌헬름이 생각하듯이 "사람은 중년이 되면 자기가 뭔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라는 말처럼 독자들 가슴속 깊이 감추고 싶었던 생각을 정확하게 끄집어 내는 표현도 없을뿐더러 왠지 나쁜짓을 하다가 들켰을때의 낯뜨거움과 동시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울분을 누군가 대신 속시원하게 말해주어서 통쾌한다는, 여러가지로 그동안 굳어져 있었던 감정의 폭발을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작품속에는 1+1=2 라는 항등식이 존재하고 있지 않는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재산을 가로채 사기꾼 탬킨 박사의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 "사실이란 항상 센세이셔널한 법이지. 다시 한번 말하지. 사실이란 항상! 센세이셔널해"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선과 악에 대한 그 어떠한 자의적인 규정마저도 불필요한게 바로 중년의 삶인 것이고 모든 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선택뿐이라는 자괴감과 더불어 인간소외성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결국 이러한 삶과 고뇌 역시 삶의 한 방편이라는 다소 의기소침해질 수 밖에는 없는 진실을 은근히 현학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어떨결에 생판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어 죽은자의 얼굴을 보면서 한없는 회한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대성통곡하는 윌헬름을 심리상태는 고독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다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도 왠지 끝모를 여운을 남기고 있다. 지금 중년이라는 나이대로 접어든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한번쯤은 되돌아볼 여유와 더불어 생의 전환점에서 꼭 짚어봐야할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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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솔 벨로의 대표작 시즈 더 데이는, 라틴어로 하면 이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이 되겠습니다. 오늘을 잡아라. 이것을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오늘을 즐겨라, 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황상으로는 둘 다 그렇게 해석되는 게 각각 옳은 것 같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화자가 의도하는 바가 약간 다른 상황이거든요. 참고로 저의 이름 비토 역시 라틴어로 비타, 인생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라 돌체 비타, 달콤한 인생의 그 비타에서 말이에요. 어쨌거나 이 오늘을 잡아라의 계보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건너 황석영 선생님의 개밥바라기 별까지 이어지고요, 드디어 원빈 횽아한테까지 전수되어서 난 오늘만 산다고 새로운 시츄에이션을 만들어 내신 겁니다. 아는 선배가 말하기를 얼굴만 이쁘면 귀머거리도 용서가 되고 벙어리도 용서가 된다하여 대박 웃은 적이 오래전에 있었는데 그게 농담인 줄 알았더만 대한민국 여자 분들은 실제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얼굴만 잘생기면 혀가 짧아도 다 용서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많은 게 용서가 되는 건가 봐요. 응?
이 작품은 딱, 영미소설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십니다. 그러니까 제목과 저자와 작품 배경의 이름을 바꾸고 읽어도 이건 좀 전형적인 영미 소설 타입이네, 하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게 뭐냐고 물으실 게 뻔하니까 이제 그 말을 이어나갈 건데요, 흐흠. 막상 말로 할라니 정리가 안 되네요. 제가 이 '삘'을 표현해내는 데에 또 한 구라해주시는데 그게 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어서 말이죠. 오늘은 안 잡히네요. 어쨌거나 거시기, 좀 메마른 형태로,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좀 정내미 없는 기계적인 형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나 할까요? 인간이므로 어떠하다, 라는 측면에서의 감성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이성적 인간이므로 이 경우는 옳고 저 경우는 그르다, 하고 자로 잰듯 정확하게 떨어뜨리려는 상황 전개랄까, 좀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니 뭐랄까, 주인공이 무언가를 깨닫고 슬픔을 느끼는 장면이 연출되어도 그 장면에 딱히 감정이입 된다기보다는 그 마저도 이성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일 더하기 일은 2가 되었고 그래서 주인공은 슬퍼하는 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권위적이고 외부적인 명예를 중요시하는 아버지와 헛똑똑이인 주인공과 절대 지존 구라맨 탬킨 씨까지 요렇게 삼각 구도로 주인공의 하루를 그려내고 있고요, 이것으로 현대인의 삶을 풍자하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좀 지루합니다. 아니, 지루했다 안 그랬다 그래요. 문장은 그냥 깔끔하고요. 하지만 작가 선생이 하고자 하는 말을 너무 대놓고 직설적으로 끌어가는 것이 좀 문제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현대 사회의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는 해석이 곁들여지기 쉽고 워낙 가지를 벌리기 쉬운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꿈보다 해몽을 마음껏할 수 있을 거란 측면에서 문학자들이 좋아했을 거란 생각은 좀 들었습니다. 감동보다는 정교함 쪽에 더 다가선 느낌이랄까요? 아버지는 무엇을 상징하고 주인공은 무엇을 상징하며 탬킨 박사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이런 식으로 자로 잰듯 딱딱, 자신의 역할에 끼워맞추어진 듯한 느낌이어서 제게는 그리 좋은 작품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옳고, 그럴 듯한 문구는 요소요소에 있었죠. 하지만 글쎄요. 그런데 반면,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심경이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라고 한다면 대단히 깊이 몰입이 될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고요, 만약 그리 된다면 그의 인생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힘은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코맥 매카시옹 떠올랐습니다. 물론 제가 그 옹을 편애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매카시옹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사는 사회 속에서 필요한 어떤 메시지를 매카시처럼 문학적으로, 혹은 거대한 은유의 이야기 속에 은근히 담아놓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은 아닌 가 봅니다. 이 작품과의 차이점이라는 게 이래요. 이 작품은 이를테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극이 구성되고 배역이 주어져서 거기에 딱 알맞는 대사가 진행된다고 할까, 그렇습니다. 요게 좀 애매한 표현이기는 한데 그게 참 미묘하게 차이가 있어요. 메시지를 위한 이야기의 탄생이냐, 이야기의 전개 속에 은근히 숨은 메시지냐, 하는 차이 말이죠. 이 두 가지를 해설이라도 하는 측면에서 접근해봐도 차이는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해설해 놓은 글을 읽으면 꿈보다 해몽이 날개를 펴고 난다는 느낌이 들고요, 후자의 경우를 보면 오오, 그게 그런 의미였던가! 하고 안목의 부족함을 깨닫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이 작품은 지극히 전자에 해당했습니다. 현대 영미 소설의 거장을 둘로 팍 쪼개서 매카시옹 타입과 필립 로스옹 타입으로 나눈다면 이 작품은 로스옹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엔 로스옹의 능력이 월등하지만 말입니다. 저자의 이름만 봐도 솔 베로는 세 자이고 필립 로스는 네 자이지 않습니까?
끄...끗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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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 순전히 단순히 이기심에 불과하지. 이런 것에 가짜 영혼이 사랑하는 방식이야. 허영이지. 그것은 단지 허영일 뿐이야. 그리고 사회적 통제이기도 하지. 가짜 영혼의 관심사는 사회생활의 관심사, 즉 사회의 메커니즘과 똑같아.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커다란 비극이지. (…)모든 것을 그대로 계속 돌아가게 하는데 목적이 있어. 진짜 영혼은 대가를 치르는 거야. 진짜 영혼은 아프고 병이 난 다음에야 가짜 영혼이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왜냐하면 가짜 영혼은 거짓말쟁이니까. 진짜 영혼은 진실을 사랑하지. 진짜 영혼이 진실을 사랑하고 싶을 때 거짓을 죽이고 싶어 해.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거지. 『오늘을 잡아라』중
진짜 영혼 삶이 치열한 만큼 우리는 치열함을 견뎌내야 합니다. 치열함이 많아질수록 우리들 가슴 속에는 수많은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영혼은 뭘까요? 솔 벨로는『오늘을 잡아라』에서 두 가지 영혼 즉, 진짜 영혼과 가짜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맨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뭔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인생을 허무하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허무하게 된다면 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하는 것, 이것이 자신의 방향이 불투명한 가짜 영혼입니다. 반면에 진짜 영혼은 스스로에게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큰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기는 삶이 느슨해질 때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에 삶이 나사처럼 단단하게 조여져 있다면 우리는 숨 쉬는 것마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혼이 깨져 있다고 말해야지 쓸모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사가 조금이라도 풀린 것처럼 삶이 느슨해져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느슨한 사람일수록 진짜 영혼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느슨함 토미 윌헬름은 느슨한 사람입니다. 의학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그는 2학년을 마치기 전에 대학교를 그만두고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바로 그때 잘생긴 외모 덕분에 캐스팅 담당자로부터 할리우드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한마디를 의지해서 캘리포니아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윌키’에서 ‘토미’로 이름을 바꾸고 ‘애들러’라는 성을 버려 ‘토미 윌헬름’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토미’는 개인의 자유를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 그의 야망은 착각으로 끝났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배우가 되기 위해 고생했지만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해 보기로 결심했을 때는 7년 동안의 고집과 좌절이 이미 그를 장사나 사업에 맞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십대 중반의 무직 상태였던 그가 은퇴한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면서 호텔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스무 살 나이에 불완전한 판단력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의 죄를 용서할 줄 몰랐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없는 고통은 그의 것이지 결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지금 만약 아버지에게 의지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탬킨 박사와는 가까워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탬킨은 그의 고민에 공감하고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탬킨에게 자기 인생이 바뀔 만한 충고를 해주었으면 바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탬킨은 특유의 최면술을 거는 수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가령, 사랑이 정말 사랑다우라면 돈이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거나, 삶에 대해 겸손해할 줄 알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길 원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며 다. 이렇듯 템킨의 이야기는 진실인 것 같으면서도 거짓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은 얼마나 사실적인지 모릅니다. 즉,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오늘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도 미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가 오늘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나 미래가 불행하거나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운명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운명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운동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어느 때나 ‘바로 지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은 무엇이든 현실적인 것에서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감각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 다면 ‘바로 여기’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예 진짜 영혼이 진짜 인생이겠지요. 진짜 인생은 활기차게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에 부딪쳐 눈물 맛을 알더라도 탬킨의 조언처럼 결코 1온스의 영혼을 1파운드의 사회 권력과 바꾸기 않아야 합니다. 조지프 캠벨은『신화와 인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안의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는 삶이 가장 힘겹게 느껴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가짜 영혼이 진짜 영혼의 에너지를 끌어당기면 마치 기생충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시체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대해 불안으로 ‘바로 지금’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서는 결코 오늘을 잡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삶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 모든 것에 ‘예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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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민을 감추는 것으로 말하자면, 토미 윌헬름도 남들 못지않은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그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줄 증거도 꽤 있었다. 그는 한때 배우로 일했었기 때문에-아니, 정확하게는 단역배우에 불과했지만-연기에 관해선 일가견이 있었다. p. 9
1956년에 씌어진 이 책은 21세기인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다. 책 속 인물인 토미 윌헬름이나 그의 아버지 애들러 박사, 의사인 탬킨, 모두 지금도 주변에서 찾기 힘든 캐릭터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솔 벨로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토미 윌헬름은 노인들이 묵고 있는 글로리아나 호텔의 투숙객이다. 책은 그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곳으로 떠나서는 안 될 이유가 백여 개나 있음을 뻔히 알게 되었을 때, 또 불안감으로 병이 날 지경이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그는 집을 떠났다. 이일은 윌헬름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많이 생각하고 망설이고 또 다시 한 번 숙고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든 행동해야 할 시기가 닥치면 하지 않기로 수없이 마음먹었던 바로 그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열 번이나 이런 결정을 내렸다. p.41
그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려깊지 못하다. 오히려 즉흥적이고 궁지에 몰리고나서야 될대로 되란 식으로 순식간에 일을 저질러버린다. 그는 판단하기를 주저하고 누구에게든 의지하려고 한다. 그가 의지하던 사기꾼 탬킨 박사가 이상하다는 것도 진작 알아차렸지만, 그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그를 변호한다. 탬킨 박사의 서명이 뭔가 이상했을 때에도 타이핑을 많이 하기 때문에 직접 글씨를 쓰는 것에는 서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던가, 대화를 하면서 실수를 계속 해도 과학자라고 해서 항상 똑바로 읽고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등. 탬킨 박사에게 왜 걸려들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투덜대다가도 윌헬름은 탬킨 박사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대신 판단해주길 바란다.
한편 윌헬름의 아버지 애들러 박사는 혈색 좋고 잘생기고 인자해 보이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아들에게도 환자를 대하듯 거리를 두고 대한다. 그러는 한편 아들의 무능력함을 숨기기 위해 타인에게는 허풍을 떤다. 아버지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적인 속물이라 생각한다.
처음엔 냉정한 애들러 박사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애들러 박사는 이기적이고 냉정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곳에서 나이 든 양반들이 별로 잘나지도 못하는 자식들의 뒤를 돌봐 주면서 커다란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많이 봤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일 년 후가 될지. 이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죽더라도 너는 여전히 이곳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드니. 나는 왠지 네가 그럴 것 같은데. p. 94
처음엔 윌헬름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애들러가 현명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인생을 살고 은퇴한 경제적으로 부유한 아버지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살다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을 사는 아들. 그 아들은 부모에게 기대려 한다. 부모의 돈을 갖길 바란다. 부모가 평생 희생하였음에도 또 다시 희생하길 원하고 강요한다.
윌헬름은 생각은 많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은 아무렇게나 해버린다. 그리고 경솔하고 성급하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포장하려고 한다. 거짓말과 허풍은 무능력함을 감싸는 포장지다.
아이리시 타임스는 솔 벨로를 20세기 문단의 거목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오늘을 잡아라'를 읽으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의견이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들은 윌헬름처럼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계속해서 늘어난다. 한 번 더 읽고 다시 한번 리뷰를 작성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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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소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소설을 만나면 내 치부를 들춰 내는 것 같아 다시 책장을 덮고 싶어진다. 착각이지. 그런데, 그 착각이라는 인식은 어느새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바래지고, 남는 것은 혹시 이 소설 속에 내 치부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역시 이것도 착각이다. 희망이 어찌 책 안에 있겠는가. 지금-여기에 있을 뿐이다. 문제는 내 눈에는 '지금-여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 덕산스님은 주금강이라고 불렸다. 금강경이 빠삭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금강경을 설파하러 중국 남쪽을 유랑했다. 어느 날 배가 고픈 차에 호떡을 구워 파는 노파를 만났다. 호떡을 먹으며 노파와 금강경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노파는 대뜸 "금강경에는 `과거심(過去心)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現在心)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未來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다 점을 찍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금강경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덕산 스님은 노파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재미있게도, 이 작품에서 그나마 자신을 챙기고 사는 사람들은 냉정하고 타인에게 무심한 사람들이다. ㅋ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학교에서도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은 항상 냉정하고 타인에게 무심하다. 남을 잘 챙기는 학생은 중간쯤 가는 학생들이다. 문제는 역시 이타적인 학생들은 학교라는 공간안에서 좋은 숫자를 얻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이 그리는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는 실패한 인생이다. 과거에 매여 산다. 하지만, 그는 남을 배려한다. 이런 걸 주접떤다고 하나? 자신도 못 챙기면서 남을 걱정한다. 더 큰 문제는 남을 걱정해서 무엇인가를 하는가인데 그렇지도 않다. 남을 위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여력도 없다.
박노해의 글에 가난하면 가난함을 나누라고 했다. 참 어렵다. 정말 '구국의 결단'이 필요하다. 결국, 자기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 데, 모르겠다. 주인공 윌헬름의 아버지, 그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도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성공했다. 그럼, 궁극적으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자는 얘기는 뭘까? 정말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 또 다른 형태의 '연대'는 가능한 걸까? 모든 얘기가 다 항상 빌빌거리며 사는 사람들의 자기 기만은 아닌가?
주인공에게 사기 친 박사는 말한다.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
오늘은 어디 있을까? 분명 내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건 맞는 데, 그렇다면, 오늘은 어디 있을까? 세상에는 정말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는 자꾸 책 속으로 도피한다. 장자의 어느 일화처럼 결국 책은 죽은 사람들이 남긴 껍데기일 뿐인데, 나는 책 속으로 도피한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결국, 나도 윌헴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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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중반 남은 거라곤 실패의 추억과 암담한 미래가 전부인 토니 윌헬름에게 정신과 의사 템킨 박사가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오늘을 잡으라고...마치 당신에게 오늘만 남은 것처럼 살라고 다그치는 박사를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한 딱한 사내의 처절한 하루가 펼쳐지고 있는 소설이다.그렇다면 사십 평생중 가장 끔찍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토니의 하루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팔십세 된 아버지와 같은 호텔에 장기 투숙중인 토니는 오늘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암담하기만 하다.전직 의사로 남은 것이라곤 체면과 돈뿐인 까탈스런 아버지가 그를 나 몰라라 한지도 이미 오래,이혼한 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다 이젠 실직자 신세인 그는 마지막 남은 재산을 탈탈 털어 증권에 투자를 한다.아버지가 넌지시 언급한 대로 사기꾼임이 분명한 자칭 정신과 의사 템킨의 조언에 따라...자신조차도 왜 템킨에게 돈을 맡겼는지 이해할 수 없어하면서도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냐고 마음을 다잡아 보는 그, 오늘은 대박이 날거라고 막연한 희망을 품어보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관리가 어려울 정도로 구겨져 있다.아들이 마뜩잖은 아버지와의 불화,끊임없이 거짓말을 내뱉는다는걸 알면서도 다정한 한마디에 돈도 믿음도 맡겨 버리고마는 템킨 박사의 출현,스쳐가는 사람들 모두 현실을 알고 있음에도 바보같이 자신만 모르는 것 같은 어리둥절함속에 결국 그는 생판 모르는 타인의 장례식에서 꺼이꺼이 우는 것으로 하루를 끝 내고 만다. 과연 하루동안 그에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루가 마치 일생처럼 길기만 하던 끝나지 않는 사건들로 첨철된 한 사내의 불우한 하루를 그린 수작이다.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필체로 작가는 어떻게 명망있는 의사의 철없는 아들이 속절없는 중년 사내로 늙게 되어 버렸는지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었다.솔 벨로의 명성이 과장된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책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갈 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속으로 스무번 안 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결국 그 길로 나서게 된다는 이 딱한 사내를 보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던 것은 어쩜 그의 모습에 우리가 어느정도는 투영되기 때문이 아닐런지...등장인물들의 탁월하고 모순없는 내면 묘사와 현실감 넘치는 상황 설명으로 공감 팍팍 되는 소설이었다.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소설이라고 보심 된다.내 참,Seize the Day라니...이 작가의 조롱끼 넘치는 유머 감각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리뷰를 마친다.이 정도는 되야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 말이야,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하시는 분이나, 이 가을 소설다운 소설을 읽고 싶다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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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 시카고에서 자라난 '솔 벨로'(본명 솔로몬 벨로스)의 <<오늘을 잡아라>>는 1956년에 쓰여진 글이다. 주인공 '토미 윌헬름'이 겪는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작품에서 우리는 파국으로 향하여 가는 '토미 윌헬름'의 삶을 볼 수 있다. <<오늘을 잡아라>>는 주인공의 다양한 회상과 독백, 그리고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인공의 내면을 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 소설의 독특한 특성은 주인공의 독백과 종종 서술되어 있는 시점의 변화이다. 작품의 특징인 두부분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을 잡아라>>의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나약한 심성과 낮은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소외받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립되는 이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은 정서적,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 그의 가족과 가정, 직장으로부터 지원을 얻는데 실패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잉여인간'과도 같은 존재이다. 무리 혹은 집단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주인공을 더욱 절망 가운데로 몰고 간다. 이러한 절망과 실의 가운데서 내밀어진 파멸로의 유혹자의 손길은 그의 믿음에 상처를 주고 더욱 큰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주인공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타파하기 위한 도움을 갈구하며 내밀어진 손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나약한 모습에서 독자는 연민과 슬픔을 발견한다. 물질문명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 학력, 그리고 가치 가운데서 고민하며 신음하며 살아간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한채 또 다른 빛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방황하는 주인공과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잡아야 한다'는 유혹자의 한마디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이다. 그 소리는 미혹의 소리이기도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의 단발마이다. 하지만 믿었던 확신이 무너질때 우리는 늪에 허우적 대며 그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고독'가운데로 내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삶에조차도 '희망'은 존재한다. 무너져버리는 삶일 지라도 그 앞에는 또 다른 삶이 존재하며 오늘이 아닌 내일은 또다시 내 앞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는 오늘 내 삶의 전부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제약된 상황에 우리를 내몰고 가둬서는 안된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오늘을 잡아라>>는 절망 속에 빠진 이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죽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종말이자 새로운 '삶'으로의 시작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