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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약이라지만 제임스 스페이더의 탈모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최근에는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울트론 목소리 역으로 출연했는데 모습을 본 건 미드 <블랙리스트>가 마지막이었다. 드라마를 보다 하차한게 스페이더의 상대역 배우가 연기를 너무 못하고 왜인지 가발도 썼는데 그게 너무 거슬리는 거다. 물론 캐릭터의 먼치킨화 때문에 흥미가 덜어진 탓도 있다. 어쨌든 과거의 미모는 조금 남아 있지만 모자는 벗지 말아주세요... 스페이더의 매력을 느끼려면 지금 리뷰할 소더버그의 영화와 <하얀 궁전>, <세크리터리>를 보면 된다. 필모가 들쑥날쑥이라 다 볼 필요는 없지만 저 세 작품은 좋다. 무언가 유약한 듯 예민하면서도 지적인,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엘리트 변태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건 아무래도 <세크리터리>. 2002년 작품으로 아직 온전한 머리 숱과 미모를 자랑하신다. 연기야 두말 할 필요 없고 메기 젤렌할과의 합도 좋다. S 변호사와 M 비서의 사랑의 줄다리기인데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천생연분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 중 재미있게 본 것이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에린 브로코비치>, <쇼를 사랑한 남자>다. 26살 소더버그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작품은 섹스란 단어가 들어가지만 야하지는 않다. 남녀 관계와 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미성년자 관람불가여야겠지만...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름답고 현명한 여성으로 그려지는 앤은 강박증이 있고, 남편과 관계 없이 지낸지 오래이다.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데 거기서는 쓰레기가 어쩌고 하면서 쓸모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이 상의도 없이 대학 동창 그레이엄이 집에서 머물거고 오는 중이라 한다. 화는 나지만 앤은 그레이엄을 잘 대접하려 하고 그에 호기심을 느낀다. 지난 연애의 상처로 약 8년을 여행하며 차에서 생활한다는 그레이엄은 만나보니 멀끔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존은 친구 앞에서 부와 성공을 자랑하며 앤에게 타박을 준다. 그레이엄은 거짓말쟁이와 변호사에 대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후 사실로 드러난다. 존은 처제 신시아와 내연 관계였던 것이다. 앤과 그레이엄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섹스에 대한 의견도 주고받는데 플러팅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굉장히 담담하게 흘러가는 대화에서 앤은 한 번도 쾌감을 느낀 적 없다고 하며, 그레이엄은 자기가 불능이라고 한다. 이후 그레이엄이 집을 얻어 나가고, 앤은 그 곳을 드나들지만 그가 여성들의 성적 고백록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변태아냐?) 연락을 끊는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신시아는 그레이엄에게 찾아가 자신도 인터뷰를 하고싶다 요청한다. 이후 앤이 존의 바람을 알게 되고, 화가 나서 자기도 인터뷰를 하고 이혼을 요구하는 순으로 이어진다. 존의 캐릭터가 사실적이다. 과거 어울렸던 친한 친구가 나보다 못한 상황이니 친절을 베풀며 모욕을 줬다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집에서 나가라고 돌려서 말한다. 처제와 관계하며 아내를 비꼬는 이중적인 우롱, 무시하던 동창과 아내와의 관계에 격분하여 쫓아갔다가 내연녀와 아내의 테이프 중에 아내 것을 골라 보고 마지막엔 니 전 여친이랑 나랑도 관계가 있었다며 찌질찌질...
로펌에서 지분을 가진 파트너 변호사지만 인격적으로 상당한 결함를 보여주는 존의 몰락과 손을 잡는 그레이엄과 앤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늘 뛰어났던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자신과 달리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달한 동생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한 언니. 한쪽은 고상떤다 하고 한쪽은 천박하다 서로 깔보지만 남자 때문에 자매가 틀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존이 두 여자에게서 버려진다. 그레이엄 역할로 분한 스페이더의 대사 중에 유독 귀에 박힌 문장이 있다. "I expressed my feelings non verbally." 그레이엄은 사랑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상처를 주었던, 병적인 거짓말쟁이였던 지난 날을 속죄하기 위해 미 전역을 돌아다닌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존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앤과 그레이엄은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비언어적으로(non verbally)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암시된다. 죄책감을 느끼던 그레이엄의 마음을 덜어준 것은 존의 비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성녀인 줄 아느냐. 그레이엄은 모으던 테이프를 부숴버린다.
그레이엄은 왜 여자들의 성 경험을 인터뷰하게 되었을까? 자신의 거짓말로 파탄이 난 관계 때문에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고 다시는 그런 진실한 관계를 나누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능이 된 것은 그런 심리적인 위축 때문인 것으로 드러난다. 앤과는 잘 되었으니까. 어찌 됐든 상대가 자발적으로 털어놓은 내밀한 고백, 그 비밀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지켜보는데서 쾌감을 얻는 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변태도 보통 변태가 아닌데 꽃미모와 나긋나긋한 말투, 무해한 듯한 표정 때문에 거부감이 상쇄된다. 그리고 스페이더는 엘리트 변태의 길을 걷게 되지... 어쨌든 속죄 고행이 요상하게 튄 것 같지만 테이프들을 죄다 치워버리는 장면은 거짓, 기만이 가린 진실을 맞이하기 위한 단계를 뜻한다. 앤이 존과의 잠자리를 거부한 것도 어쩌면 그런 자기 기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완벽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강박과 나는 행복하다 되뇌는 자기 기만, 어쩌면 남편의 부정도 눈치채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진실된 관계는 거짓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명제를 캐릭터들의 복잡한 상호관계 속에서 명쾌히 풀어낸 수작이다. 어떻게 20대에 이런 작품을 쓰고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스티븐 소더버그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