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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포퓰리즘의 특징으로 정치선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소통과 논변을 배제한 “비합리적” 감성의 정치가 포퓰리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정치선동의 이면에 카리스마적 지도자, 그러나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려는 음모를 지닌 지도자가 있음을 동시에 언급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로 옮길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선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로 번역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포퓰리즘의 부정적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언급한다. 이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반복이 지나치다는 점이다. 아마 논문집들을 서로 짜깁기 한 탓이 클게다. 지겨울 정도로 비슷한 말의 반복이 심하다. 이를 이 책의 친절함으로 놓기에는 그 반복이 너무 지나치다. 따라서 이 책은 두께에 비해 상당히 간단히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포퓰리즘의 뚜렷한 특징으로 ‘인민에 대한 호소’라는 특성이 존재한다고 하며, 이것이 거의 대부분의 포퓰리즘 이론에 공통되는 요소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주도되며, 이것이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정치, 즉 비이성 정치의 실행으로 연결됨을 강조한다. 이를 저자는 두 가지 모순적 관계의 결합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해서, 포퓰리즘은 ‘인민주권의 회복’과 ‘감성자극적 단순 정치’의 공존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고전적 포퓰리즘 vs 신 포퓰리즘 고전적 포퓰리즘은 전통적 농촌 사회의 복구를 꿈꾸며 농민의 사회를 예찬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ex.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 현대의 신 포퓰리즘은 도회지를 중심으로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또는 선동정치에 기대는 경향(ex. 라틴 아메리카 포퓰리즘)이 있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들이 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 상승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의 한계가 뚜렷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분배를 중시하지만, 후자는 시장 친화적 정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규정에 대한 많은 이론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Paul Taggart같은 사람은 최근 포퓰리즘의 개념규정을 포기하고 대신에, 이를 관통하는 여섯 가지 핵심주제를 정리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그것은 1) 대의제 정치에 대한 적개심, 2) 마음의 고향에 대한 낭만적 신비화, 3) 중심이 없는 이데올로기, 4)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 5)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근본적 딜레마, 6) 주변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바뀌는 정체성이다. 순수한 인민 vs 타락한 엘리트 저자는 이런 포퓰리즘이 두 가지 계급 대립적 혹은 배타적 양상을 보인다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인민이 배제되고 무시되는 정치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인민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 이는 엘리트와 대중의 대립관계가 포퓰리즘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실스(Edwards Shils)의 견해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대중의 저항이라는 포퓰리즘의 특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민주권론은 포퓰리즘의 출발점이고 저항을 통한 인민의 위상회복은 그것의 지향점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인민주권 회복을 외치는데, 자자는 포퓰리즘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해 모순적으로 감성 자극적 혹은 감성 선동적 단순 청치가 개입한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라클라우는 인민에게 적대감을 품도록 조장한다는 요소가 포퓰리즘에 공통적으로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배타적인 포퓰리즘의 특징이 결국 선동적 정치가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이라는 의미에서 엘리트주의와 닮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민주권 회복론과 그 하위개념 저자는 인민주권 회복론의 하위개념에 보통 사람들에 대한 낭만적 미화, 엘리트에 대한 작개심 고취, 현상타파 주장,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계급 연합과 같은 5개 하위 명제를 제시한다. 대중 감성 자극적 단순정치와 그 하위 개념 저자는 감성 자극적 단순정치의 해위 개념으로 가부장적 지도자 중심주의, 선동정치, 체제 개혁의 한계와 같은 3개의 하위 명제를 제시한다. 이는 결국 포퓰리즘이 하향적 연대를 정당화하는 개념이라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결국은 반민주적임을 역설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흔히 선동정치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향적 연대 덕분에 포퓰리즘에 동조하는 많은 보통 사람들, 소위 인민들은 여전히 종속변수로 살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저자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기치로 내건 포퓰리즘이 끝내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을 도모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토론’과 ‘심의’가 없는 민주주의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포퓰리즘을 ‘정권획득’을 목표로하는 정치활동이며 이를 둘러싼 일련의 활동을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여기서 고전적 포퓰리즘과 신 포퓰리즘은 모두 소외당하는 다수의 약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한다. 인민민주주의 vs 포퓰리즘 저자는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전자는 인민의 직접적 참여를 우선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인 인민 스스로의 지배가 중요하다는 정치 이념을 강조한다. 반면 포퓰리즘은 사적인 이해관계의 구현에 더 많은 비중이 있으며,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라는 점에서 여전히 ‘사이비 민주주의’라는 굴레를 쓰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선동성 때문에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포퓰리즘의 전체주의적 성향과 대의제 거부 저자는 포퓰리즘이 다양성이나 다원성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촛불집회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전제로 출발하기에 사실 포퓰리즘과 거리가 먼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저자는 그 이유로 포퓰리즘이 ‘하나 됨’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며, 이는 ‘민주적 진정성’마저 문제로 만든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이것이 계급을 통합하는 전술로 기본적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엘리트 정치의 실패와 불신을 전제로 하는 포퓰리즘은 이들이 수행하는 대의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하고 인민의 직접정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도대체 인민이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이는 사실 실체가 없는 개념으로 저자에게는 포퓰리즘이 주장하는 인민은 지극히 제한적인 인민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포퓰리스트의 딜레마 포퓰리스트는 대의제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사실 정치적 운동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그들 역시 대의제 아래에서 운동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기존의 정치력을 상당히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서 포퓰리스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포퓰리스트의 색체를 저버리든지(ex. 캐나다의 소셜 크레딧 운동), 내부 분열을 거치든지, 그냥 붕괴하든지 이다. 헌정주의 vs 초법적 민주주의 그리고 심의민주주의 저자는 마지막으로 포퓰리즘의 문제를 통해 현재의 민주주의를 재점검하고 있다. 그래서 인민과 법이 함께 지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민주주의, 즉 인민의 의사를 제한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거부하고 있는 초법적 민주주의의 견해와 이러한 과도한 인민주권론을 견제하는 헌정주의 혹은 헌정 민주주의를 소개하고 있다. 후자는 주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으며, 전자는 최근 심의민주주의라는 입장의 후원을 받고 있음을 밝힌다. 아무튼 이런 민주주의 이론의 진행 과정과 더불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려주는 듯 하지만, 저자는 캐노번의 견해를 빌어 이것은 민주주의의 결핍을 알려주는 좋은 경종이며, 질병이 아닌 위기의 징후로 등장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저자에 의하면 포퓰리즘은 현실환기력을 가지는 긍정적인 기제인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인용한다. “현실 민주주의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주고, 대의민주주의의 약점과 한계에 대한 경고 신호를 보낸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내부의 주변부’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경철할만 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포퓰리즘은 여전히 공보다는 과가 훨씬 많다고 언급된다. 이것은 구체적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한 실천방안도 없다. 그리고 실제로 대다수 기회주의적으로 악용되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을 갖는다. 게다가 이것은 그 성격상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토대를 붕괴시켜며, 이 과정에서 다원성을 핍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포퓰리즘은 정치권력에 대한 불신 때문에 확산된 정치현상인 것이다. 다라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현실 속에서 순치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것이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주권자 인민의 정치적 성숙, 특히 윤리적 절제가 시급하다고 밝힌다. 이 얼마나 보수적인 결론인가? 생활정치에서 박탈된 사람과 피해자에게 진정하라고 이성을 찾으라고 외치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물론 정치적 성숙, 윤리적 절제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활의 차원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먹힐 말은 아닌 것이다. 저자가 정말로 포퓰리즘이 현실환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결론 말고 다른 결론을 내렸어야 했다. 예건대 적어도 합리적 저항과 불복종이 가능한 민주주의의 가능성 말이다. 이 책의 한계 1) 기사 인용의 편파성(조, 중, 동에 국한되어 있다.) 2) 지나치게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가 있다. 이를테면 포퓰리스트가 신분상을을 꾀한다는 견해는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데 핵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적인 특성을 포퓰리즘의 속성 안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있는 발언이자 학자가 조심해서 해야할 발언이다. 실제로 포퓰리스트로 규정된 사람이 최종적으로 암살될 수 있는 가능성이 포퓰리즘 운동 내부의 구성원에 의해서나 외부의 집단에 의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동을 위해 단정적이고 직설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역시 지나치게 협소하고 우연적인 지적이다. 왜냐하면 아주 세련된 언어로 대중을 현혹하고 선동할 수 있는 포퓰리스트가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가 밝히 미디어 선동정치에서는 얼마든지 세련된 언어로 대중을 현혹하고 선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저자의 지적은 지나치게 쪼잔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독자에게 종종 이런 인상을 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3) 어느 정도 관점의 편향성이 있는 책 같아 보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진 다른 논문들과 비교해서 읽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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