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9)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37%
  • 리뷰 총점8 53%
  • 리뷰 총점6 11%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9.0
  • 40대 8.0
  • 50대 8.0

포토/동영상 (3)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1973년의 핀볼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무라카미하루키의 두번째 장편작품이다. 첫 작품인 '바람의노래를들어라'에 이어 이듬해 쓴 두번째 이 작품까지 하루키가 아내와 함께 재즈카페를 운영하던 시기에 영업을 마친 후 부엌 테이블에서 집필한 작품이라 한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전업작가로 전향 할 수 있었다고 한다.하루키의 세계관 형성에 초석을 닦은 초기작인 (작가 스스로는 습작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표현도 했던걸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무라카미하루키의 두번째 장편작품이다. 첫 작품인 '바람의노래를들어라'에 이어 이듬해 쓴 두번째 이 작품까지 하루키가 아내와 함께 재즈카페를 운영하던 시기에 영업을 마친 후 부엌 테이블에서 집필한 작품이라 한다. 그리고 이 작품 이후 전업작가로 전향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루키의 세계관 형성에 초석을 닦은 초기작인 (작가 스스로는 습작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표현도 했던걸로 안다) 이 작품을 읽는게 하루키의 독자가 되기 위한 입문단계라 생각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b******h 2025.10.2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eBook 구매
1973년의 핀볼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하루키의 두 번째 작품.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배경 1970년에서 3년이 흐른 1973년도 이야기다. 그 속에 '나'는 친구와 함게 동업으로 번역회사를 차려고 승승장구하며 여유롭고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반면에 '쥐'는 여전히 고향에 머물며 역시나 J's bar에 가서 맥주를 자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이 둘이 만나는 장면이나 서로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하루키의 두 번째 작품.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배경 1970년에서 3년이 흐른 1973년도 이야기다.

그 속에 '나'는 친구와 함게 동업으로 번역회사를 차려고 승승장구하며 여유롭고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반면에 '쥐'는 여전히 고향에 머물며 역시나 J's bar에 가서 맥주를 자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이 둘이 만나는 장면이나 서로 연락하는 모습이 <1973년의 핀볼>에 등장하진 않고, 이 둘의 삶에 눈에 띄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없지만 전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함께 등장하는 '나'와 '쥐'의 아이덴티티 보다 더욱 촘촘하게 엮여진 것 같다.

 

애초부터 '나'와 '쥐'를 한 사람의 두 개 인격으로 #개인설정 하여 읽기도 했고.

제아무리 '나'가 쌍둥이 여자와 동거. 동침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외설적이거나 여성을 비하시킨 소재로 여겨지진 않았다.

 

어느 날 밑도 끝도 없이 '나'의 인생에 들어온 쌍둥이 여자들은 본격적으로 '나'와 '쥐'가 쌍둥이같이 한 배에서 나온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이 쌍둥이 자매는 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모르고, 단순하고, 쉽게 상처받거나 사람들에게 불리는 명칭에 둔감하고, 오로지 '나'를 편안하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보아주는 것에 집중하는 존재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가 왜 방황하는지 깊숙이 이해하고 알려고 들지 않지만 아묻따 언제나 살뜰히 '나'를 보살핀다. 마치 내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지켜주었던 엄마의 자궁같이 말이다. 주인공 집에서 희한한 형태로 동거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자매가 '나'를 떠나고 나의 집에서 나간 것은, 마치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드디어 세상 빛을 보는 순간 같았다.

 

엄마 자궁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모든 인간의 숙명은 똑같은 시스템을 맞닥뜨리게 된다.

새로운 삶이 시작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시스템.

탄생의 행위로 '나'는 살아가고 '쥐'는 바닷속에 빠져 자살을 하는 암시가 등장하며 이 소설은 끝난다.

쌍둥이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나'와 '쥐가 시스템 속에 진입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

처음엔 영문으로 읽어보겠다며 free e book을 찾아서 읽다가.

초반부터 굉장히 길을 잃고 헷갈렸다.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태어나서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pinball이라는 게임은 대관절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며. (구글링 필수. 아니.. 이렇게 보기에도 복잡한 게임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야? 내 눈엔 넘사벽인 레트로 아케이드)

쌍둥이 자매 어쩔 것이고,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핀볼에 맛들려 잊힌 게임기를 찾으려고 사방팔방 수소문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나오코가 잠시 살았던 우물이 있는 동네에 대한 전원스러운 묘사는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 읽어야 하는데, 영어 몇 줄 읽어보면 바로 아.. 악!! 안돼! 안돼! 한글 어딨어? 한글! 한글! 훈민정음 어디 갔어!! 외치게 되는.

마치 소고기 몇 근 사와서 이걸 스테이크로 먹느냐... 불고기로 요리하느냐 차이인데. 유독 스테이크가 안 받는 날이라고 해야 하나. 영문으로 읽으면 표현의 묘미가 뚝. 뚝. 떨어지는 것이다. #나에게한식과한글을달라

나중에 뒤에 보니 번역하신 분이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이셨다고 하던데. 정말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영미권에서도 사랑받는 작품을 쓴다는 사실이 놀랍다.

 

부랴부랴 ebook 한글을 결제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보니, 이제서야 '나'와 '쥐'의 다른 듯한 인격이 의식과 무의식 / 자아와 페르소나 / 실제와 이미지 가 번갈아가며 전개되는 구조가 보인다. 종국에는 평행선을 달려가던 두 갈래의 길이 하나로(내 해석으로는 '출산') 합쳐지며 탄생과 죽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니 드디어 깨야 할 게임의 레벨에 도달하고 이제는 숨 고르기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동시에 그것은 출구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잠시 등장하는 '데릭 하트필드'의 작품인 <화성의 우물> 이야기가 잊히지 않고 생각났다. 화성에 있는 우물에 한 청년이 내려갔는데 계속해서 우물 안을 걷다 보니 다른 우물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빠져나왔을 땐 시간 15억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있었고 나와보니 지상이었다는.

이 부분을 읽을 때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1973년의 핀볼>을 읽고 난 내 기분이 딱 '우물에서 지상으로 나온 청년'의 느끼는 감정과 같았다는.

 

 

어느 날, 우주를 방황하던 한 청년이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주의 광대함에 권태를 느끼고, 아무도 모르게 죽으려 했던 것이다. 우물 밑으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기분이 좋아졌고, 기묘한 힘이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일 킬로미터가량 내려간 그는 적당한 굴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기어 들어가 구불구불한 그 길을 정처 없이 계속 걸어 들어갔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계가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두 시간일지도 모르고 이틀일지도 몰랐다. 공복감이나 피로감은 전혀 없었으며, 처음에 느낀 기묘한 힘은 변함없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갑자기 햇빛을 느꼈다. 우물 속 옆으로 나 있는 굴은 다른 우물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물을 기어 올라가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그는 우물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무엇 하나 가로막는 것이 없는 황야를 바라보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바람의 냄새, 태양……태양은 중천에 떠 있으면서, 마치 해 질 무렵처럼 오렌지색의 거대한 덩어리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윤성원 옮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9월, 이 소설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입구다.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전혀 없게 된다.“

1973년의 핀볼 by 무라카미 하루키

 

 

++

'쥐'가 열 살 때에는 공업지대가 시작되기 전 고향 바다의 끄트머리가 '세계의 끝'이라 생각했고.

스물세 살의 '나'는 양계장 냄새가 진동하며 불빛이 보이지 않는 공터, 무수한 벌레들이 에워싸는 곳이 '세계의 끝'이라고 여겼다. '쥐'의 유년 시절에는 내가 사는 동네가 세계의 전부였지만, 청년이 된 후에 '나'는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세계'로 확장된 것이다.

 

+++

돌멩이를 바다에 던지거나 동전을 우물에 던지는 장면은 '나' 자신을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던지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틈날 때마다 끼고 읽는 '나'는 그러나 비가 내리면 허무함을 느끼고 비 냄새를 맡으면 고독해지고 냉랭해지기 시작한다. 눈은 이성을 쫓지만, 코와 촉감은 허무한 감각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렇게 조금씩 '나' 안에 미세한 균열이 감지되기 시작하게 됨에 따라 그의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머물던 쌍둥이 자매들은 조금씩 외출을 시도하고 (난 이걸 진통이라고 해석했다.), 앞으로 '나'에게 닥칠 변화된 자아의 출산을 예고하기 위해 오래된 '배전반'을 저수지에 빠뜨려 장례를 치러준다는 반증적인 제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

배전반 장례식 이후 '나'는 핀볼이 생각나 그것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기 시작하는데 반해.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나'는 핀볼로 인해 살아가기 위한 삶의 세계에 발을 디 딛는데,

'쥐'는 점점 현실에서의 도피를 결심한 듯 쉴 새 없이 맥주를 마셔대며 토악질을 하고 괴로워하며 방향을 튼다.

잠시 만나 사랑하게 되었던 여자를 떠나고, 제이 바의 J에게도 이별을 고한다. 여자의 방 안 모습을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방의 조명의 색과 카펫의 색깔이 어떠했는지 도저히 생각해 내지 못한다.

 

'나'는 화려한 색감의 핀볼 기계를 찾아 나서지만, '쥐'는 사랑하던 여자의 방의 색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두운 바다와 흰 안개가 둘러싼 무채 세계 속에 자신을 가둬버리고 고향을 떠나기로 한다.

(이 부분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다시 읽어 보아겠다는 생각을 했다.)

'쥐'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려고 할 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색을 알 수 없는 그녀의 공간에서도 위로받지 못한 쥐는 땅속으로 이끌리게 된다.

 

+++++

그나저나 '나'가 핀볼을 다시 조우하는 장면은 너무 아름다웠네.

한때 생생했지만 이제는 빛바래고 낡아진 일흔여덟 대의 핀볼 기계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서있는 비현실적인 장면 속에 이질적이게도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화하는 '나'와 '핀볼'의 모습은 이 책의 백미라고밖에...로맨틱하기도 하고. 이건 분명 말도 안 되는 허구일 텐데 그걸 알면서도 속고 항복한다.

 

진통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비로소 생명은 자궁 출구를 지나 또 세상의 입구에 서게 되는 것처럼.

그 순간 '나'와 '쥐'의 같은 듯 다른 모습이 묘하게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

하루키 소설이 나의 생활에 당장 어떤 유용성을 부여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허무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시간. 그 시간을 덮고 있는 얇고 투명한 막을 슬며시 걷어보면 어떨까.

왠지 막을 걷어내보면 그동안 믿고 집착하던 시간은 사라지고, 온전한 모습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나'와 '쥐'가 보일 것 같다.

YES마니아 : 로얄 y********5 2023.09.1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책 이야기 <1973년의 핀볼>
"책 이야기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두 번째다. 첫 번째 썼던 글은 아마 어딘가에 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학생이 주인공에게 선물로 준 스누피 컵의 글귀를 거꾸로 해석했던 것만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스누피 컵의 글귀는 “행복은 따뜻한 친구”였고 나는 이 말을 뒤집어 “친구는 따뜻한 행복”으로 읽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여럿의 정서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책 이야기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두 번째다. 첫 번째 썼던 글은 아마 어딘가에 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학생이 주인공에게 선물로 준 스누피 컵의 글귀를 거꾸로 해석했던 것만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스누피 컵의 글귀는 “행복은 따뜻한 친구”였고 나는 이 말을 뒤집어 “친구는 따뜻한 행복”으로 읽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여럿의 정서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파이프를 연결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외로움이다. ‘나’는 전화가 있는 방 옆에 살았고 여학생은 위층에 살았기 때문에 전화가 오면 ‘나’는 늘 여학생을 부르러 올라가야만 했다. 이 전화는 ‘나’에게 온 것이 아니므로 ‘나’와 상관없는 전화이다. 말하자면 ‘나’와 무관한 신호음이 울릴 때 ‘나’는 자신과 무관한 타인과 유관해진다. 어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세계를 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과 접촉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세계를 넓히려고 뻗은 발이 나를 아래로 추락시킬 수도 있다. 게임의 맵이 환해지듯 시야를 넓히게 될 거라고 믿었던 방향이 사실은 낭떠러지였거나 늪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경우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의 주인공, ‘나’와 쥐의 경우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친구였던 두 사람은 이 소설에서 무관한 사이로 나오지만 그래도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공유하고 있다. ‘나’의 경우가 사별한 나오코라면 쥐의 경우에는 아파트의 여자이다. 그런데 두 여자는 같지 않다. 나오코는 사별했으므로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지만 쥐는 자기가 특정 요일마다 걸던 전화를 끊었다. 말하자면 이별은 당한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한 것이다.


이별을 당한 자와 이별한 자는 다르면서도 같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 다르고 몰입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같다. 삶이 의미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에는 삶이 등장하지 않는다. 매일 비우고도 다시 채워지는 맥주처럼, 끝없이 연소하면서도 연기로 사라지는 담배처럼 이 소설의 세계에서 의미란 반복되는 것이거나 흩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이 세계에는 반드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목숨 바쳐 지킬 이념도 없고 보호해야 할 공동체도 없다. 살아가야 할 당위를 설명해줄 거대한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은 이제 작은 이야기로 생을 살아간다. 이를테면 연애가 그렇다.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꿈도 목적도 없다. 안전한 레일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탈 수도 없고 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런 ‘나’가 생에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마도 나오코였을 것이다. 나오코가 죽은 후 ‘나’가 그녀가 말한 역을 찾아간 이유도 그래서다. 나오코는 ‘나’에게 세상이었으므로 그녀가 죽은 후 ‘나’는 세상이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지만 이곳은 이제 낯선 곳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말한 역은 그대로 있었지만 개가 나타날 때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는 기다린다. 짧게 말하면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길게 말하면 ‘나’는 내가 살았던 세상이 사라진 것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렸다고 할 수 있다. 이념을 믿은 자들이 이념의 몰락 이후 세상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의 유일한 세상이었던 나오코가 죽은 이후에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믿고 싶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쥐는 왜 연락을 끊은 것일까. 나오코는 사망했기 때문에 ‘나’는 세상을 빼앗긴 셈이 되었지만 쥐는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어쩌면 그건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이 곧 세상의 영속성을 뜻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오코는 죽었기 때문에 ‘나’의 안에서 불멸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파트의 그녀는 살아 있으므로 언젠가 모든 의미를 잃고 사라질 것이다. 쥐는 그게 두려웠던 게 아닐까. 내가 몰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상이 금세 빛을 잃어버릴 것이며 또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리라는 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세상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게 ‘나’와 쥐의 이별이 말하는 바일지도 모른다.



빛나던 조약돌을 찾아 주머니에 넣었지만 집에 와서 꺼내보니 색이 바래져 있었던 것처럼 빛은 잠깐 빛나고 금세 사라진다. 달리 말하면 세상을 살아갈 이유나 의미는 영원하지 않고 단편적이어서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찾는 횟수만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상실의 삶이라고 부르자. 이 상실의 삶에 지친 자는 고향으로 떠나가고 환멸을 느낀 자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도록 스스로를 죽인다. 반짝거리는 것은 이제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사랑이든 핀볼이든 삶을 온전히 연소시켜줄 수만 있다면 되는 것이다. 허무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이유를 떠올리게만 해준다면 어떤 형태,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어도 빛이다. 광휘이건 형광등이건 차이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이렇게 짧게 연소하고 마는 상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길게 이어져 나가 바다로 향하는 물줄기는 없고 파편적이고 짧은 에피소드만 난무한다. ‘나’의 집에 어느 날 들어온 쌍둥이 자매는 정체성이 사라진 타인의 표본이다. 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불분명한 정체성에 적대감이나 불안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누가 뭐래도 배전반의 장례를 치러줄 만큼 따뜻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는 이유는 그 누군가를 제외한 나머지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누군가를 찾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로 명명하고 의식의 저편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타자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눈앞에 있어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쌍둥이 자매는 다정하고 따뜻하다. 그녀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나’에게 나오코가 하나의 세상이었다면 쌍둥이 자매는 세상의 바깥이었다. 나오코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쌍둥이 자매로 대표되는 타인은 곧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오코가 없는 ‘나’, 즉 살아가야 할 세상을 잃고 삶의 의미나 이유도 없이 방황하는 ‘나’를 곁에서 품어준 것은 죽은 나오코가 아니라 살아있는 쌍둥이 자매들이다. 즉 그들은 내가 인정한 세상이 아니었을 뿐 언제나 내 곁에 있어둔 세상이었다. 나오코가 상실의 삶이라면 쌍둥이 자매는 삶이다. 삶은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오코가 상징하는 삶의 이유, 이른바 한 줌의 불빛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경계의 대상일까. 쥐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그 이유를 모두 소진하고 사라질 것이므로 아예 접근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눈을 현혹하는 차가운 빛으로부터 물러나 주위를 감싼 따뜻한 어둠에 적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빛을 두고 현혹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생의 중간에 잠시 나타났다가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고 마는 빛이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빛은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 때를 함께 걸어갈” 빛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것에 눈을 빼앗긴다. 그것은 글일 수도 있고 노래일 수도 있고 핀볼일 수도 있으며 여자일 수도 있다. 한때 살아가는 모든 것이 되어 나의 세상이 되어주었던 그것은 어느 순간 모든 빛을 상실하고 검게 말라붙는다. 새까맣게 변한 흉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른 빛에 눈을 돌리고 또 시간이 지나면 그조차 검게 말라붙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삶에는 사실 의미나 이유라는 게 없고 일시적인 유혹과 명멸하는 조명만 가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바 영원한 빛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식으로.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폐인처럼 게임에만 빠져들게 만들었던 핀볼을 찾아간다. ‘나’는 이미 핀볼 중독에서 빠져나온 후이므로 이것은 게임을 위해서가 아니다. 핀볼은 한때 ‘나’의 모든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더러운 오락실 구석에서 맥주와 담배에 파묻혀가는 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나’가 핀볼을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은 부끄러운 혹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과거를 모른 체 하는 게 아니라 그조차도 스스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자신과의 화해이다. 이것이 화해인 이유는 우리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매번 토막내어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언가에 빠졌던 혹은 현혹당하고 눈 멀었던 나는 그 시간이 지난 미래의 나에 의해 버림받는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아닌 우리가 버린 과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과거는 그리움이 아니라 죄책감의 대상인 것이다.


핀볼 기계와 마주앉아 있으면서 나오코와 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온전히 작별한다. 내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과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버릴 수 없고 버리려고 할 때마다 반대로 떠오를 뿐이다. 버리지 않을 때 과거는 온전하게 지나간다. 나오코에서 핀볼로 이어진 삶의 빛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때 가장 밝은 것이었다. 그 중간의 검은 공백에 갇힐 때마다 우리는 빛났던 순간을 어지러웠던 순간으로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공백은 쌍둥이 자매처럼 따뜻하니까.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삶은 바다에 잠긴다. 삶은 원래 빛났던 시간과 어둠에 갇힌 시간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상실의 삶이 아니라 상실과 상실을 견뎌내는 삶이다.



2024년 2월 18일부터 204년 2월 20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YES마니아 : 로얄 g*******1 2024.09.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eBook 구매
상상력의 시작점
"상상력의 시작점" 내용보기
1973년 핀볼은 하루키 초기 작품으로 하루키 소설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본격적으로 장편 소설을 쓰기 전에 쓴 소설로 재즈카페 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전위적으로 느껴지지만 확실히 이 작품에서 하루키적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쓰고 싶다
"상상력의 시작점" 내용보기
1973년 핀볼은 하루키 초기 작품으로 하루키 소설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본격적으로 장편 소설을 쓰기 전에 쓴 소설로 재즈카페 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전위적으로 느껴지지만 확실히 이 작품에서 하루키적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h*******1 2024.01.2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자기 복제를 통한 끝없는 증식의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자기 복제를 통한 끝없는 증식의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1979년에 출간되었고 《1973년의 핀볼》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하루키는 이 두 권의 책을 쓸 때까지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중이 되면 부엌의 테이블에서 이 두 권의 소설을 썼다. 이후에 그는 전업 작가가 되었다. 하루키는 다른 단편집들은 전집으로 묶거나 할 때 수정을 했지만 이 두 권의 소설에는 손을 대지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자기 복제를 통한 끝없는 증식의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내용보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1979년에 출간되었고 《1973년의 핀볼》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하루키는 이 두 권의 책을 쓸 때까지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중이 되면 부엌의 테이블에서 이 두 권의 소설을 썼다. 이후에 그는 전업 작가가 되었다. 하루키는 다른 단편집들은 전집으로 묶거나 할 때 수정을 했지만 이 두 권의 소설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의 나였고, 결국은 시간이 흘러도 바로 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나는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나는 겨울잠에 들어가기 전, 지방을 비축하는 곰처럼 그런 이야기를 여러 개 비축해 두고 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떠오르고, 집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먼 곳의, 그리고 영원히 서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여유 있으면서도 확실한 삶의 일렁임을 느낄 수도 있다.” (p.13)


하루키의 산문들을 읽을라치면 그가 위트 있고 꽤나 현실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에게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현실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관찰과 동시에 저절로 그 뒷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술술 이어지는 이야기를 밤중의 부엌 테이블에 앉아서 드문드문 엮어가는 하루키를 떠올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은 그렇게 멈추지 않는 이야기들이 어떤 순간에 두 개로 분화한 하나의 이야기 같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쥐라고 불리는 사나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7백 킬로미터나 떨어져서 살고 있었다.

1973년 9월, 이 소설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입구다. 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약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전혀 없게 된다.“ (pp.34~35)


내가 있고, ‘쥐’와 ‘제이’가 두 소설에서 함께 등장한다. 글을 쓰는 행위가 있고, 원숭이와 여자와 술집이 있다. 그리고 우물이 있다. 우물은 철저하게 입구와 출구가 하나인 공간이다. 방이든 집이든 사무실에는 문이 있고 그것이 입구와 출구를 겸하지만, 문이 아닌 다른 출구들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우물에는 그런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A로 들어갔다면 반드시 A로만 나올 수 있다. 하루키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 B와 C와 같은 출구를 떠올리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래서 작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자신의 시스템에 맞춰 살아간다. 그것이 내 것과 지나치게 다르면 화가 치밀고, 지나치게 비슷하면 슬퍼진다. 그뿐이다.” (p.78)

 

소설은 1969년에 시작된다. 아니 1973년에 시작된다. 1969년 봄에 나는 나오코로부터 플랫폼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돌아디는 개가 있는 역에 대해 들었고, 1973년에 그 역을 찾아갔고 개를 보지 못했다. 나오코는 이제 없고, 나는 쌍둥이와 함께 살아간다. 그러니까 생김새가 완전히 똑같아서 구분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란성 쌍둥이와 함께 자고 일을 하고 돌아오면 다시 쌍둥이가 있다.


“... ‘스페이스십’은 매우 정통적이고 심플했죠... ‘스페이스십’은 이상한 기계였어요.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 같지만, 게임을 해보면 어딘가 달랐습니다...” (pp.159~160)


그리고 ‘스페이스십’이라는 이름의 핀볼 기계가 있다. 나는 내가 한때 꽂혔던 그 명칭의 기계를 찾기로 한다. 핀볼 매니아인 사내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그 기계와 다시 대면하는 순간은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다. 꽤 높은 점수를 낼 수 있었던 그 기계의 작동 버튼을 찾았지만 나는 플레이를 하는 대신 그 기계와 대화한다. ‘스페이스십’은 아무래도 그녀인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는 쌍둥이가 나를 떠난다.

 

“...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p.198)


그러고 보니 읽다만 하루키의 산문집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라는 글에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쌍둥이라는 상황을 좋아한다. 쌍둥이와 함께 있다는 가설 속의 내가 좋다.’ 라는 것이었는데, 하루키는 이미 쌍둥이와 함께 하는 소설을 실컷 써놓고 뒤늦게 고백한 셈이다. 자기 복제를 통한 끝없는 증식이라는,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하루키의 당시를 또 한 권 다시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 윤성원 역 / 1973년의 핀볼 (1973年のピンボㅡル) / 문학사상사 / 239쪽 / 2004, 2018 (1980)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19.03.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