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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인상주의부터 현대로 넘어오기까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는 폴 세잔 Paul Cezanne이다. 특히 20세기 이후의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해 온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알아 가는 데 있어서도 세잔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작업이 우선 필요하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명칭이 붙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잔의 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바라보아야 하므로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서 아트북 하나를 골라 읽는다.
『폴 세잔 : 색채와 형태의 미학』은 반나절 정도만 집중해도 세잔에 대해 전반적으로 배울 수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화가들에 대한 급하고 강렬한 호기심을 충족시킨 경우가 많았듯이, 이 책 역시 세잔을 관통하는 데에 유용했다. 세잔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확실한 무게감을 부여하는 여러 명칭이 생겨난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다. 세잔도 지난한 무명의 시간을 보내야했고 어떻게 하면 화가로서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지 겹겹이 고민하고 분투했다. 이 책에서는 세잔이 살면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잘 나타나있다. 한 화가가 어떤 계기를 통해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교류했는지는 그의 작품세계를 알아가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엑상 프로방스는 그의 고향이자 세상을 떠나기까지 화가로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아예 세잔의 도시로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그 이름을 인정받은 사람은 세잔에 앞서 그의 아버지 '루이-오귀스트 세잔'이었다. 모자 상점에서 출발하여 은행업으로 발전하기까지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세잔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세잔이 법관이 되기를 바랐지만 화가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기에 잦은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거의 평생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되게 화가의 업을 추구할 수 있었다.
세잔이 처음부터 사과와 오렌지 가득한 정물화를 그리거나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살던 시대답게 세잔도 처음에는 베네로세나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적 그림으로 출발했다. 한편, 클로드 모네는 세잔을 '미술계의 플로베르'라고 묘사했는데 이유인즉 세잔이 플로베르에게 깊이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가 자신의 소설에서 시도했던 현실적인 요소와 상상적인 요소의 결합은 세잔의 초기 작품에도 역력히 드러나 있다. 특히, <묵주를 든 노파>에서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중간 색조를 쓰면서 '플로베르의 색'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세잔으로 차차 변모해가게 된 데에는 '카미유 피사로'와의 만남이 주요 역할을 했다. 아버지를 어렵사리 설득하여 (아들의 화가적 재능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기나긴 말싸움을 벌인 끝에 당시 최고의 예술 학교인 에꼴 드 보자르에 입학한다는 조건으로 허락받음) 파리로 옮겨왔지만, 그의 혼자 침잠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그리고 파리에 만연하던 세기말의 현란한 분위기 탓에 - 세잔의 성향이 시끌벅적한 대도시 파리와 맞기는 어려웠을 터- 세잔은 화가들의 무리에도 잘 끼지 못했다. 열 살 손위였던 피사로는 계속 세잔을 격려했고 그의 예술적 테크닉이 발전해간다는 사실을 알아주었다. 특히, 오베른쉬아즈에서 피사로와 가까이 지내면서 세잔의 색채들은 가볍고 밝아지게 되었으며 나이프와 물감의 사용방법 면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당시의 영향력 있는 예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조리스-칼 위스망스에게 세잔을 재평가하고 (처음에는 '병든 망막을 지닌 예술가'라고 세잔을 냉대했다)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세잔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린 것도 피사로의 공이 컸다. 세잔의 그림을 취급하는 유일한 미술상 '탕기 영감'이 사망하자 피사로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세잔에게 소개했다. 거의 20년간 파리의 전시회와 동떨어져 거의 은둔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던 세잔을 설득해 볼라르를 통해 개인전을 열도록 권유했다. 피사로는 ' 세잔의 작품들은 마치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회화들처럼, 초라하면서도 웅장한 가운데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라고 평하며 세잔의 진가를 널리 알리려고 애썼다.
세잔의 인물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람은 아마 '세잔의 부인'일 것이다. 세잔은 파리 시절, 모델로 활동하던 12살 연하의 '오르탕스 피케'를 만나 곧 동거하며 아들 폴을 낳았다. 보불 전쟁을 피해 에스타크로 피신하고 나중에 고향 엑상 프로방스로 오갈 때도 늘 함께 했다. 그러나 동거 사실을 가족에게, 특히 아버지에게는 한참 동안 비밀로 했다. 지참금도 없는 여성과의 결혼을 아버지가 찬성했을 리도 없고 혹시 결혼으로 아버지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정 지원을 아예 받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서야 가족들 앞에서 정식 결혼식을 치렀다. 오르탕스는 세잔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경솔하고 약간 천박'했으며 세잔과는 달리 파리를 매우 좋아했다. 그럼에도 수십 편의 드로잉과 24점의 채색된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줄 정도로 '참을성'이 많았다 (세잔은 오랜 시간 포즈를 여러 번 바꾸게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며 작업하기로 악명 높았다).
세잔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 세잔과 졸라는 엑스의 부르봉 중학교에서 만났다. 졸라는 파리 태생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엑스의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한 살 위인 세잔이 줄곧 졸라를 형처럼 보호해 주었고 함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놀랍게도 이 시절 졸라는 글보다 미술에서, 세잔은 그림보다 글쓰기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다). 세잔이 후에 파리로 가게 된 것도 졸라의 줄기찬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졸라는 사교적인 반면 세잔은 나서지 않고 고민을 많이 하는 편에다가 (비록 지나친 수줍음을 숨기려는 반작용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정반대의 성향 탓인지 파리에서 두 사람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졸라는 예술 비평가로서 활동하면서도 세잔의 진정한 예술적 동기를 알아보지 못한 채 '세잔은 재능은 지니고 있지만 위대한 화가가 될만한 의지가 부족하다'라는 식의 깎아내리는 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졸라가 발표한 소설 『작품』은 두 사람이 절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는 졸라 자신이 소설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된 동시대인들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은 자서전적 요소가 다분했는데 '실패한 천재'로 묘사한 랑티에가 바로 세잔을 닮았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세잔은'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며 악수를 청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라네'라고 편지를 보냄으로써 둘 간의 오랜 우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세잔이 입체주의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 책도 피카소가 얼마나 세잔의 그림에 집중했는지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다. 피카소는 수집가 블라르를 방문했을 때 세잔의 작품들을 자주 보면서 매혹되었다고 한다. 피카소 자신의 초기 화풍에 많은 것을 가르쳐준 세잔의 '질서를 깨는 구도'에 찬사를 보냈으며, 세잔의 작품을 깊이 탐구한 후에 자신만의 해석을 더했다고 말했다. 피카소의 <공 위의 곡예사>를 보면 자연을 '원통, 구, 원뿔 모양에 따라' 보라는 세잔의 충고를 진지하게 시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에서도 세잔의 수욕도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주의를 선도한 브라크 역시 세잔의 풍경화에서 추상적인 면모를 모방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있어서 세잔은 그때까지의 관습으로부터 회화를 해방시킨 자유의 힘이었다.
세잔의 그림 자체에도 훗날 입체주의적 경향으로 대두할 요소가 나타나있다. 보불 전쟁이 터지자 세잔은 징집을 피해 마르세유 근처의 어촌인 에스타크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마음껏 풍경화를 그렸는데 '양감을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점차 우아한 구성과 기하학적인 실험을 시도하려는 스타일'을 따르게 되었다. 이 그림들에서 입체주의의 출현을 예견하는 기미가 보인다.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은 화가 중에는 르누아르도 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들어 관계가 두터워졌는데 르누아르는 세잔의 '고립된 생활'에 감탄했고 세잔처럼 좀 더 확실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랐다. 마티스는 세잔의 <푸른 화병>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그림에 그림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던 마티스는 자신만의 '정신적이고 신비로운 순간에' 이를 모방한 <푸른 창문>을 그렸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헨리 무어도 세잔의 영향을 받았는데 <목욕하는 세 여인>을 직접 소장할 정도였다. 헨리 무어는 '1평방피트 정도의 작은 작품에 불과하지만, 내게는 세잔의 다른 커다란 작품들의 중요성을 모두 가진 작품이다'라고 말했고, 이 그림을 토대로 자신의 조각 작품 <목욕하는 세 여인>을 제작하기도 했다. 다소 적대적인 관계도 있었으니 에드가 드가와는 태생적으로 기질이 서로 맞지 않았다. 드가가 당시 발달하기 시작한 사진술을 적극 회화에 이용한 것처럼 세잔도 자화상을 수월하게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의 역할을 옹호했다. 그러나, 드가가 귀족 집안 출신으로 세속적이며 파리 화가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자처한 반면, 세잔은 시골 출신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향이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했고 무시했다.
세잔의 작품세계를 보면 아무래도 정물화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미술관에서 세잔의 사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는 한 곳에서 여러 점을 볼 수도 있다. 그만큼 사과는 그를 대표하는주제이면서 세잔이 열렬히 많이 그렸다는 것이다. 비평가 위스망스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진실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독특한 톤과 단일한 진실성의 단편들에서 말이다."라는 문장처럼 세잔의 사과는 회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바다 건너 영국의 작가인 (나의 우상이기도 한) 버지니아 울프도 세잔의 정물화는 '극단적으로 단순하면서도 고도로 복잡하다'라고 평했다. '걸작'이라고 칭했다. 하얀 천들 위에 무심하게 툭 얹어놓은 것 같은 사과와 오렌지가 탱글탱글 윤기를 발하며 내 머리 위로 튀어 오르거나 내 발을 향해 또르르 굴러 내려올 것 같았던 그 기괴한 느낌, 울프의 문장 속에서 드디어 언어를 입고 구체화된다.
"여섯 개의 사과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각각의 사과들 사이에는 관계가 있고, 색채와 양감이 있다. 오래도록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사과들은 더 붉어지고 둥글어지고 녹색이 짙어지며 점점 무거워진다…물감의 색깔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것 같고,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단어들을 떠오르게 하고, 이전에는 텅 비었을 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형태를 자각하도록 한다." --- 버지니아 울프
세잔은 자화상을 비롯하여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한 작품 외에도 친근한 관계를 가진 주변 사람들도 꾸준히 그렸다. 양감을 점점 단순화시켰고 원근법이 분산되고 밸런스가 맞지 않는 대담한 자세의 초상화를 고집했다. 색채의 변화를 통해 명암을 생성하고 배경에 기하학무늬를 그려 넣어 구성에 힘과 명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세잔의 초상화 점점 더 보는 이와 거리를 두고 추상적으로 변해갔고 인물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매우 현대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세잔의 유명한 시리즈 <카드놀이하는 사람들>도 초상화의 연장 또는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의 훌륭함은 '장면을 정물화의 수준으로 단순화시켰다'라는 데 있다. 굳은 표정으로 카드놀이에 완전히 몰입하여 어떠한 감정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전에 그려졌던 동일한 주제의 그림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정물화에서 사물을 정교하게 배치하듯 카드놀이하는 사람들도 색채 조화와 독창적인 구도를 자아내기 위해 세밀하게 배치했다.
풍경화 역시 세잔이 꾸준히 전념했던 주제였다. 지중해가 보이는 에스타크를 그린 그림도 많고 무엇보다도 '생트빅투아르산'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모티프였다. 일찌감치 파리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고향 엑스를 오가곤 했던 세잔은 아예 파리 생활을 접고 엑스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다. 물론 생트빅투아르산이 잘 보이는 곳이었고 매일 화구를 챙겨 여러 지점에서 이 산을 그렸다. '지속적인 형태의 탐구'에 몰입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또 그리면서 산의 뚜렷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순화되고 추상적인 모습의 정경들이 그려졌다. 생트빅투아르를 그리던 어느 날, 갑자기 몰아쳐온 폭풍우에 세잔은 쓰러졌고 며칠 후 폐렴으로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즉, 생트 빅투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아쉽게도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리면서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나간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수십 개의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리면서 세잔의 색과 형태가 다양하게 그리고 결정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을 상황을 세밀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로 집약되는 세잔의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딱히 그 대상이 아니었다.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하지만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전망'을 나타내려 했다. 그래서 '순수한' 그림이고 '예술이 점차 개념적으로 변해간 것은 전적으로 세작 덕분이었다'라는 칭송이 가능했다. 사실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고립을 자처하며 자신만의 그림 세계에 몰두하던 세잔이 어떻게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었는지 충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 책을 입문용으로 삼아 앞으로 세잔에 대해 더 깊게 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두 쪽은 의미가 크다. 세잔은 실로 위대한 화가이며 내가 세잔에 대해 알고 배워야 할 것이 방대하다는 사실을 예고한다. 비평가들과 일반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세잔이었지만, 말년에 이르러 자신만의 세계에 더 침잠하여 자기만의 그림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동료 화가들의 인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07년에 열린 그의 회고전을 통해 그를 추앙하고 열광적으로 따르기로 작정한 예술가들이 더 많아졌다. 이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세잔을 연구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펼친 결과 세잔이 현재의 영예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고전이 낳은 여러 이야기들을 빌어 내가 더 탐구하고 싶은 세잔의 세계를 가늠해 보려 한다.
"세잔은 절대적인 것을 찾는 명백한 독립인이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편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해되지 못했다" --- 에밀 베르나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현실은 그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의 색인 농밀한 억제된 푸른색에, 그의 붉은색에, 그림자 없는 녹색에, 그가 그린 와인병의 검붉은 색에 말입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 만남, 이 만남이 이루어지고 내 인생에 들어오면서 위대한 연대의 의식과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세잔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미술의 판도가 어떠할지 나는 가끔 의문이 든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작품들과 더불어 작업해왔다" ---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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