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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특성 상 아프리카나 중동의 현지 상황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에 관한 업데이트는 우리나라에서 단신으로조차 처리되지 않는 소식까지도 빠지지 않고 챙기고 있다. 뉴스 콘텐츠이다 보니 더빙 너머로 들리는 현지 언어의 생경함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덕분에 평생 한번 들어볼 수나 있을까 싶은 이방 언어들의 독특한 울림에도 태연하게 헤드셋을 끼고 앉아 한두마디 혀 위에 올려 놓아 보기도 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 중 최근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언어가 히브리어이다. 문자가 아닌 구어와의 접촉은 역시 그 직접적인 질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그야말로 귀로 만나는 유대인의 역사이다.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영토를 놓고 벌어지는 지난하고 복잡하며 비인간적인 다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승리감과 만족을 가져다 준단다. 이것은 내말이 아니고 어느 유대인 고고학자가 한 말이다.
아이작 싱어도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동유럽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시어는 지금껏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혹시나 해서 이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했다는 수상 연설을 검색해 봤지만 이디시어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스피치를 보면 자신의 모국어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진다. 그리고 그 언어를 배태한 유대 민족이 겪은 엄청난 질곡의 한 단면이 여기에 아름다운 소설 문학의 형태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바친 희생제물>이란 뜻이다. 엄밀히는 나치의 범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역설적인 용어이다. 그 극악의 현실 앞에선 누구라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넘치는 유머와 페이소스로 홀로코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 진지하게 만드는 놀라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인물들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유대인의 인간 군상 그대로이다. 부모를 잃고 남편과 아내를 잃고 자식을 잃었으며, 조부모, 삼촌, 고모, 이모, 사촌을 잃은 고독한 이들이다. 어떻게 삶에 대응할 것이며 미래를 경영해야 할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는 과연 내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시절의 유대인이었다면 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질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헤르만 브로데르는 참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예와 아니오의 결정까지 매번 구만리의 여정을 떠나곤 하는데, 이러한 한 개인의 캐릭터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이야기의 갈등 요소를 극적으로 몰고 간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놓고도 긍부정을 내리지 못해서 방황하는 모습을 여러번 연출한다. 결단력 없이 정신 못차리는 그의 모습에 끅끅대며 실소를 터뜨린 게 한두번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야드비가나 타마라, 마샤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개성이 굉장히 뚜렷해서, 누가 등장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가 다양하게 변화한다. 관찰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싱어는 그가 창조한(혹은 전형은 아닐지언정 어느 유대인들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된)인물들의 대화와 심리변화의 양상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현장의 한 구석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현실성을 구현해 낸다. 이디시어로 대화하는 이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찡그린 표정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미 죽어가는 언어인 이디시어로 계속 작업하는 이유에 대해 싱어는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나는 영적인 존재를 믿는 만큼 부활의 가능성도 믿는다. 언젠가 이디시어를 쓰는 수많은 영혼이 무덤에서 일어나 이렇게 첫 질문을 할 것이다: '이디시어로 쓴 책 새로 나온 거 있어?' 이들이 있기에 이디시어는 결코 사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신념의 바탕이 어디에 있든 자기 모국어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한 노작가의 열매는 풍성하고 탐스럽게 영글어 있다. 심지어 지금은 아름다운 우리말로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이 또한 참 즐거운 일인 듯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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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이들, 그들은 위로를 얻을 것이다.”, - 마태오 5:1-12 - 가끔은 사람들은, 겪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성장으로 이끄시는 시험이요, 시련이라 받아들일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갑자기 얻는 병이라든가, 신체적인 불편함을 동반한 질병들, 그리고, 순수히 타인의 부주의나, 정말 근거없는 불운으로 인한 우리가 겪게될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마저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믿음이 모자란 것인지, 그 동안 내가 알지못하는 잘못에 대한 징벌인지, 우리는,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 욥의 고통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그럴때마다, 홀로코스트를 겪고 난 유대인들의 전쟁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궁금해졌었다. 그들은, 그 엄청한 고통을 겪고, 그 후에 믿음을 어떻게 지켜나갈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탐색속에, “원수들, 그 사랑 이야기”를 만났다. 이 소설 속에서 다양한 이들을 만난다. 믿음을 잃어버린 이들, 그리고 아직 믿음을 간직한 이들....그리고 아무것도 이젠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도...
그리고 이 소설 속엔, 유대인들이 실생활 속에서 그들의 율법을 어떻게 지켜 나가는 지 엿볼수 있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참혹한 일들을 보고도 침묵만 지키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야.” - 헤르만의 옛 아내, 타마라의 대사중.. 산소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도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 중력을 부정하는 사람도 땅을 밟으며 살아간다. 하느님과 토라 (구약의 모세5경)를 저버린 후 질식할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다시 하느님을 섬기고 토라를 공부해야 한다. - 헤르만의 생각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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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은 유대인 대학살로 온 가족을 잃었다. 다행히 그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어머니의 하녀였던 야드비가가 그를 3년 동안이나 자신의 집 헛간에 숨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내인 타마라와 어린 아들 딸은 모두 총살로 사망했다. 야드비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 온 그는 랍비 밑에서 대필해주는 일로 간신히 먹고 살고 있다. 야드비가는 글을 읽고 쓸 줄도 몰랐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헤르만에게는 유부녀 애인 마샤가 있었다. 그녀 역시도 유대인으로 어머니와 함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 왔다. 헤르만은 마샤를 만나러 갈 때면 책을 팔러 타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아내에게 거짓말했다. 그럴 때면 혹시 자신을 버리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애만 태우던 야드비가였다. 그래서 헤르만은 마샤에 대한 열정과 마찬가지로 야드비가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르만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내 타마라가 살아 있으며 미국으로 왔다는 걸 타마라의 외삼촌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결혼 생활 내내 타마라와는 파경 직전까지 갔던 터라 헤르만은 그 소식을 듣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타마라는 자식 둘을 잃은 나머지 감정을 상실한 채 살고 있었다. 헤르만을 보고 느끼는 공허함도 감추지 못했는데, 그가 하녀 야드비가와 결혼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있던 상태에서 한 결혼이기 때문에 순순히 현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를 이해하려는 침착함마저 보인다. 마샤는 불같은 여자였다. 남편이 있지만 헤르만과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헤르만의 아내인 야드비가의 무지함을 비웃으며 그녀를 끊임없이 질투했다. 야드비가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길 원하는 마샤를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집착에 지쳐가는 헤르만은 아내 타마라에게 자신의 상황을 고백한다. 타마라는 야드비가에게 돌아갈 것을 충고하지만 헤르만은 마샤에 대한 애정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세 여자들에게 끝없이 끌려다니기만 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나치의 잔혹함을 경험한 이후 그에게는 하느님이 없었다. 계속되는 그의 무력감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유대인임을 잊을 수 없게 했지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에게 재앙은 아직 진행상태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아내가 둘이나 있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를 괴롭힌다기보다 미국에서 추방당할까봐 더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결국 랍비의 파티에서 자신과 야드비가를 알고 있는 페셸레스 때문에 모든 것이 탄로 났지만 그는 모든 게 혼란스럽고 두렵기만 했다. 결국 타마라의 곁에서 안정을 되찾지만 그는 마샤를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랍비의 요양원으로 일자리를 찾아 자신을 떠나버린 그녀를 그리워했다. 타마라의 외삼촌 부부가 이스라엘로 떠나면서 남겨진 고서점을 대신 운영하고 있던 그 앞에 마샤가 나타난다. 모든 걸 버리고 자신과 떠나자는 그녀에게는 야드비가가 만삭인 점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타마라의 만류에도 마침내 마샤와 함께 떠나기로 결심한 헤르만은 예전 마샤가 살던 주택으로 간다. 하지만 도둑이 들어 모든 세간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요양원에 있어야 할 마샤의 어머니마저 그곳으로 돌아와 숨을 거두고 만다. 마샤는 죽은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며 함께 죽고 싶다며 야드비가에게 돌아가라고 헤르만을 다그친다.
야드비가는 딸을 낳았고 랍비의 조언대로 이름을 마샤라고 지었다. 랍비는 마샤 모녀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야드비가도 잘 돌봐주었다. 타마라는 외삼촌의 고서점을 물려받아 잘 운영해나간다. 하지만 헤르만은 사라진지 오래다. 랍비는 타마라에게 재혼할 것을 권하지만 타마라는 거절하며 다시 태어나더라도 헤르만과 재혼할 거라고 말한다.
활자가 작아서 읽는데 좀 고생을 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몰입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불편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내용 전개가 너무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이 작품에 잘 녹아있다. 작가는 그들을 이해해달라는 논조는 펼치지 않는다. 그저 이 작품에는 헤르만이라는 한 남자의 말 못할 고뇌가 가득할 뿐이다.
누가 그를 탓할 수 있으랴.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또 살아남았다. 그는 처자식이 죽었다는 슬픔을 느낄 수도 없다. 그는 삶이 고통인 사람이니까. 여기 등장하는 세 여자는 그가 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들을 떠나야만 마땅하지만 그는 그녀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없는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들 모두 희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마라가 말했던 것처럼 살아는 있지만 죽어버린 존재가 된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 깨닫지 못한다.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나치에게 쫓겨 숨어 있는 자신을 느끼는 그에 대한 연민으로 슬펐지만 마지막에 용기를 내 그녀들 모두를 떠나겠다고 말하던 그가 안식을 찾기를 바랐다.
P135 한때는 창문이었던 한 구멍으로 캄캄한 밤하늘이 내다보였다. 하늘은 수많은 상형 문자가 적혀 있는 한 장의 파피루스였다. 헤르만의 시선은 히브리어의 모음 부호 <세골(∵)>과 비슷한 모양으로 배열된 세 개의 별에 고정되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세 개의 항성이었고, 아마 제각기 행성이나 혜성들을 거느리고 있을 터였다. 두개골에 연결된 작디작은 힘줄 하나로 저렇게 머나먼 물체들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런데 접시 하나에 담을 만한 두뇌를 가지고 끊임없이 궁리하는데도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또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그들은 모두 말이 없다. 하느님도, 별들도, 죽은 자들도. 그리고 말을 할 줄 아는 것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만난 매끄러운 번역 작품이다. 번역가 김진준님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