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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부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 이재무, 「위대한 식사」
날이 저물었다. 산그늘이 두꺼워지면 식구들은 흙 묻은 연장들을 허청에 함부로 던져두고 밥을 먹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 한여름 마당가에는 매캐한 모깃불이 피어오른다. 여름날 해는 길다. 해가 저물고 마당가로 그늘이 드리워지는 즈음에 식구들은 다 늦은 저녁을 먹는다. 멍석 위로 둥근 밥상이 놓인다. 식구들은 말이 없다. 그저 분주히 수저질만 할 뿐이다. 하루 일하고 하루 먹는 삶이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생활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걸 누군들 모를까. 밥상 한가운데 놓인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밤새 울음이 뛰어든다. 그에 질세라 밤하늘에 뜬 별 몇 점이 물김치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서는 비계처럼 둥둥 떠 있다. 냉수 사발 속에서는 새까맣게 풀벌레 울음이 밀려나온다. 산골마을의 한 집안에서 펼쳐지는 이 풍경으로 시인은 어린 시절의 한때를 표현한다. 세상은 한없이 고요한데, 그 속에 있는 시인은 한없이 서글퍼 보인다.
시인은 “까닭 모를 설움”을 “풋고추의 독한,” 맛으로 표현한다.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이 매운 맛으로 시인은 어딘가로 내뺄 것만 같은 마음을 진정시킨다. 배는 능선처럼 불룩해졌다. 트림 몇 번으로 뱃속 더부룩함을 꺼트리고 시인은 사립을 나선다. 아무리 트림을 해도 더부룩한 가슴은 여전하다. 온몸에서 열이 오른다. 가만히 앉아 내릴 수 있는 열이 아니다. 신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을길을 걸으며 시인은 멀리 태지봉 옆구리에 걸린 달을 본다. 달은 숨이 가쁜 듯 헉헉 대며 산허리를 오른다. 시인은 지금 달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태지봉을 오르면 저 달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일까?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가 제 마음속에서 밀려나오는 걸 시인은 듣는다. 저 달을 따라잡으면 까닭 모를 이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달릴수록 멀어지는 저 달이 참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세월의 때가 묻은 이 모든 대상들을 향해 시인은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뜨거운 우렁된장만이 위대한 반찬인 것은 아니다. 우렁된장이 시인의 허기를 씻어주었다면,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을 보며 시인은 마음속 허기를 잠재웠다. 한 소년은 몸과 마음이 더불어 자라야 어른으로 성장한다. 시인은 ‘위대한 식사’라는 제목으로 자연 속에서 성장하는 한 존재의 여정을 묘사한다. 어린 소년이 가슴 깊은 곳에 스민 까닭 모를 슬픔을 알 리가 없다. 슬픔은 시간의 흔적과도 같은 것이다. 살아온 시간이 쌓여야 슬픔을 감싼 막이 비로소 벗겨지기 시작한다. 소년 시절에는 몰랐던 설움을 나이 든 시인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경험을 쌓는다는 말과 같다. 우렁된장 하나에 들려주는 다양한 슬픔의 결을 태지봉에 걸린 달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소년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시인은 멍석 위 둥근 밥상에서 말없이 수저질을 하던 식구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기억에서 나온 식구들은 이제 이미지가 된다. 마당을 메운 매캐한 모깃불이 그렇고,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뛰어든 밤새 울음이 그렇다. 물김치 속에 비계처럼 둥둥 뜬 별들은 또 어떤가. 냉수 사발을 들이키자 곧바로 밀려오는 풀벌레 울음 또한 ‘위대한 식사’을 표현하는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시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 꾸미는 세상과 마주한다.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 가장 숭고한 마음으로 뒤바뀌는 자리에서 이재무의 시가 뻗어 나온다. 시인은 농주에 취한 달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를 지금도 여전히 듣고 있다. 그 소리를 잊는 순간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 고요함 속에 숨겨진 들끓는 열정을 시인은 술에 취한 ‘달 이미지’로 표현한다. 소년 시절 품었던 “까닭 모를 설움”을 시인은 디오니소스와 같은 시심(詩心)으로 펼쳐내고 있는 셈이다.
2. 분노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와도 같이 나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는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 생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울지 않고도 크게 세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더러운 추문과 스캔들에 두 눈 반짝이는 나는, 시집을 다섯 권이나 낸 시인이다 거듭 실패하는 동안 제법 독자들의 취향이나 입맛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분노는 내 생을 불편케 할 뿐이다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어린이가 굶어죽어도 눈물은커녕 비웃음만 나온다 동남아시아 가난한 나라 밀입국한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산재당해 오 년치 칠 년치 임금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려버려도 그것은 그들 개인의 불운일 뿐 나는 이제 가슴이 벌집인 양 숭숭 뚫리지도 매맞은 개구리 뒷다리마냥 벌벌 떨리지도 않는다 나 이제 살 만하다 그러니 청승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이제 길바닥 아무렇게나 놓인 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내 몸을 토막 난 막대기로 잘못 알고 함부로 걷어차도 인내에 익숙한 나는 아마 견성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을 것이다 - 이재무, 「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분노가 없이 시인은 과연 시를 쓸 수 있을까? 타락한 세상을 향해 시인은 분노해야 마땅하다. 시작(詩作)은 단순히 언어를 갖고 노는 일이 아니다. 시를 쓴다는 건 세상과 기꺼이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시인 자신만 읽는 시를 어떻게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을 세상으로 내던질 각오를 한 사람만이 시를 쓸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인들, 이를테면 이상이 그랬고, 김지하가 그랬고, 박노해가 그랬다. 시인들은 언어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즐거운 세상이라면 그들이 쓰는 시 또한 즐겁겠지만, 불행히도 시인들은 시를 쓰면서 한없는 고통을 겪는다. 시인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예술가라면 겪는 창조의 고통인 것일까? 창조의 고통 너머에 타락한 세상이 있다. 언어를 무기로 이 세상과 싸우는 시인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언제나 타락한 세상에서 서사시적 세계를 꿈꾸는 ‘문제적 개인’이다.
이재무는 위 시에서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라고 선언한다. 문제적 개인으로 타락한 세상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선언인 것일까?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자랑스럽다”라는 시어와 “분노할 줄을 모른다”라는 시구가 묘하게 엇갈린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처럼 심장이 싸늘히 식은 이 사람은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를 내려놓았다. 시인이 사는 세상이 그만큼 행복해졌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예전보다 더욱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변했다. 이런 세상에서 시인은 싸늘히 식은 심장으로 “울지 않고도 크게 세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울지 않는 시인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 이제 시인의 두 눈은 더러운 추문과 스캔들에만 반짝인다. 시집을 다섯 권이나 낸 중견 시인이니 독자들이 시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달리 말하면 독자들이 잘 읽는 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타락한 세상에 분노하는 시를 독자들은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독자들은 자기 마음을 위로해 줄 시를 원한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을 자꾸만 벼랑으로 내몬다. 벼랑에서 살아남으려면 굳건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않고 어떻게 죽음이 도사린 벼랑을 건널 수 있을까? “그러니 분노는 내 생을/ 불편케 할 뿐이다”라고 시인은 쓴다. “불편”이라는 시어가 가슴에 와 부딪친다.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말이 암시하는바 그대로, 시인은 원래부터 불편한 삶을 사는 존재였다.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시인은 불편한 삶을 제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시작(詩作)은 불편한 삶 속에서 제대로 뻗어 나오는 작업인 셈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불편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사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저주와 물질적인 저주가 동시에 시인을 압박한다. 자본주의는 시인이 내뱉는 분노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블랙홀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북한 어린이가 굶어죽는다는 소식을 들어도 시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다만 비웃을 뿐이다. 나이 어린 외국노동자가 산재를 당해 그간 모은 돈을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려버려도 시인은 그것을 개인의 불운으로만 생각한다. 개인의 불운을 시인이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민중들이 평등하게 사는 시대를 향한 시인들의 꿈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먹지 못해 뼈가 드러난 아이들을 봐도 “가슴이 벌집인 양 숭숭 뚫리지도/ 매맞은 개구리 뒷다리마냥 벌벌/ 떨리지도 않는다”는 시인의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연민을 잃은 시인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나 이제 살 만하다”라는 시구로 시인은 우리 시대 시인들이 처한 상황을 확연히 표현한다. 살 만한 사람이 이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릴 리는 없다.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 그는 살 만한 세상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분노는 이제 시인에게는 청승을 떠는 일에 불과하다. 청승은 떠는 사람은 삶의 고통을 과장한다. 고통을 고통으로 얘기하는 게 왜 고통을 과장하는 것일까? 시인은 더 이상 타락한 세상과 맞서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과 맞설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리라는 걸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분노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시를 쓰면서 시인은 한없이 인내하는 삶에 익숙해졌다. 인내라고? 고통을 견디는 삶이 아니다. 시인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돌이 되려고 한다. 누군가 제 몸을 걷어차도 아무렇지 않게 허허허, 웃는 그런 돌말이다. “견성한 도인처럼”이라는 시구로 이재무는 우리 시대 시인들이 처한 상황을 드러낸다. 견성(見性)은 자기 본성을 보는 것이다. 견성한 도인처럼 시인은 세상이 어찌 변해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겠다는 것.
견성한 도인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바깥세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재무는 물론 이런 의미로 견성한 도인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견성한 도인 흉내를 내는 시인들을 향해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라고 외친다. 좀비처럼 싸늘한 심장을 지닌 이 ‘자랑스러운 시인들’은 오늘도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위선(僞善)을 떤다. 정말로 깨달은 이는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는 가차 없이 제 분노를 드러낸다. 깨달은 부처는 얼마나 뜨거운 가슴을 지녔고, 깨달은 예수 또한 얼마나 뜨거운 가슴을 지녔던가. 이재무는 위선에 빠져 견성한 도인 흉내를 내는 시인의 얼굴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이를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시인의 심장은 그 누구보다 뜨거워야 한다. 그래야 차가운 언어에 뜨거운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정말로 자랑스러운 시인이 되는 길을 이재무는 사라진 분노를 되찾는 길에서 찾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사라진 분노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견성한 도인의 껍데기를 스스로 벗는 데서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타락한 세상을 똑똑히 보는 일로부터 자랑스러운 시인의 길이 열린다. 정당한 분노는 결코 청승이 될 수 없다. 정당하게 분노하는 시인은 고통에 빠진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못한다. 그들과 더불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그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세상을 바로 보는 마음이 필요한 이 시대에 이재무는 분노할 때 분노할 줄 아는 시인상을 정립하고 있는 셈이다.
3. 그늘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장수가 다녀갔고 박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 이재무, 「팽나무가 쓰러, 지셨다」
마을 어귀를 지키던 팽나무가 쓰러졌다. 시인은 팽나무를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으로 표현한다. 수백 년을 사는 팽나무니 길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에 비하면 참으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 팽나무가 시인의 마을을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시인이 그 나무를 보며 성장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팽나무는 단 한 장의 수의도 만장도 없이 흙으로 돌아갔다. 서럽게 곡(哭)을 하는 이도 없다. 수백 년을 산 팽나무 앞에서 길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이 곡을 하는 게 우습지 않은가. 팽나무는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팽나무는 속이 텅 빈 채 몸을 허물었다. 팽나무는 스스로 속을 비움으로써 죽음으로 가는 길을 대비했다. 때가 되어 태어난 팽나무는 때가 되어 죽었다. 삶과 죽음이 온전히 자연(自然)이다.
어린 시절 시인은 팽나무 그늘 안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리며 사랑에 들뜬 마음을 그늘 속에서 삭이기도 했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시인은 팽나무 그늘로 숨어들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팽나무를 보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팽나무는 늘 그 자리에서 시인은 맞았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팽나무는 따사롭게 지켜보았다. 하긴 팽나무 그늘 속으로 스며든 이가 시인뿐이었을까? 아이스께끼장수가 팽나무 그늘을 다녀갔고, 박물장수 또한 그늘에 스몄다가 갈 길을 갔다. 나그네 길에 지친 누군가는 부은 발등을 안고 팽나무 그늘 속에 몸을 뉘었다. 이 사람이 들어오면 이 사람을 맞고, 저 사람이 들어오면 저 사람을 맞으며 팽나무는 제 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흐르는 시간을 팽나무가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자신이 드리운 그늘 속으로 팽나무 스스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시인은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을 대하는 마음으로 팽나무를 우러른다. 팽나무 나이가 많다고 우러르는 게 아니다. 팽나무는 그토록 오랜 세월을 고통 받는 이들에게 그늘을 늘이며 살았다.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팽나무는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팽나무는 마을사람들과 나그네를 구분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아픈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듯, 팽나무는 나그네의 부은 발등에도 똑같이 그늘을 드리웠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를 넘어 마을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을 지키는 나무가 팽나무였다. 시인은 팽나무가 지닌 이 마음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죽을 때까지도 욕심을 버리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견준다면, 팽나무는 스스로 제 몸을 비움으로써 죽음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 제 몸을 비우지 않고 어떻게 가뿐한 마음으로 다음 세상을 갈까? 팽나무는 다음 세상으로 가는 일이 마음을 비우는 일과 다르지 않은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라는 진술에 표현되는 대로, 시인은 팽나무가 마을에 드리운 “두꺼운 그늘”이 사라진 걸 한없이 아쉬워하고 있다. 그늘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팽나무는 마을에 두꺼운 그늘을 드리움으로써 수많은 생명들을 길러냈다. 팽나무를 스쳐 지나간 생명들이 얼마나 될까? 마을의 역사는 팽나무에서 팽나무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팽나무를 보며 사람들은 태어났고, 팽나무를 보며 사람들은 다음 세상으로 기꺼이 갔다. 시인은 팽나무의 죽음을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는 의미로 되새긴다. 흙으로 돌아간 팽나무는 시인에게 “내부의 텅 빈 몸”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동안 세상에 두꺼운 그늘을 드리운 팽나무는 텅 빈 몸으로 자연으로 돌아갔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온갖 생명들에게 베푼 팽나무를 보며 시인은 남은 인생을 생각한다. 텅 빈 몸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세상에 그늘을 드리워야 비로소 몸이 비워진다는 걸 시인은 팽나무의 삶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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