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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역사 및 이론을 전공하고 이화여대 건축과 1호 교수로 부임한 저자는 꽤 많은 건축관련 책들을 출간했다. 그 중에서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현대까지의 건축과 미술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두 장르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개념 주제어를 찾아 20개의 장으로 구성했는데, 각각 그 주제 및 그것이 갖는 시대적 의미, 관련 작품들, 그 주제를 해석하는 시각 등에 대해 전문가적 입장으로 쓰인 책이라 그 내용이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약간 어렵다. 하지만 건축과 미술, 양쪽 분야에 관련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시대적으로 각 사조들을 비교하면서 일별하는 책으로는 적당하다. 우선 건축과 미술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눈길을 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조인 모더니즘에서는 건축과 미술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 상대적으로 명확했다고 한다. 또한 건축가와 화가를 동시에 겸한 예술가들이 많았지만 차차 분리되었다고 한다. 즉, 건축가들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으며 미술적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구하지도 않고, 미술계에서도 건축을 스케일이 크고 공학적 성격이 강한 토건업으로 단정하고 완전히 다른 장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건축에서는 다양한 기술과 접목하는 방식으로, 미술에서는 매체와 개념의 확장으로 각자 내부적으로 고유한 발전을 이루어 왔는데, 1990년대에 이르러 각자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즉, 건축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이용당하고 있는 실정이며, 미술은 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욕구를 충분히 담아내거나 분출하지 못한 채 고여 있는 형국이란 것이다. 이제는 서로를 들여다보며 좋은 실마리를 찾아야 할 때라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 건축과 미술 전반에 대해 상호 보완작용을 주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키워드는 미술에서는 아르브뤼, 건축에서는 뉴 브루털리즘이라 불리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이 인류에게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이루게 해줄 것이라는 모더니즘의 슬로건이 산산조각 났다고 한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서양 문명의 절대주의 전통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와 부정이 뒤따랐는데, 미술에서는 추상의 지속으로, 건축에서는 모더니즘 재해석 등의 흐름이 나타났다고 한다. 예술적 인식의 범위와 대상 소재가 일상과 오브제 등으로 확장되고 인간의 합리성과 비합리성 모두가 각각 사조를 가지면서 균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기에 무의식과 마음의 흐름에 따라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인간의 비합리성을 대표하는 비정형 예술이 유럽에서는 아르 앵포르멜, 아르브뤼,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로 각각 나타났다고 한다. 건축에서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뉴 브루털리즘, 즉, 신야수주의가 비정형 경향의 출발점이라 한다. 육면체와 고급 건물 중심의 정통 모더니즘을 거부하며 그 대안으로 자유형태와 임시 가설물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골조를 노출시켜 골조의 재료가 그대로 마감재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수 차례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지만, 건축은 실제 건물을 짓는 산업경제 분야에도 속하기 때문에 미술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실험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적어도 건축에서는 전쟁의 충격 및 그에 따른 반문명의 반항운동만으로 새로운 사조를 만들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키워드는 추상표현주의이다. 미국은 전쟁터가 아니었고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에 아르 앵포르멜 같은 문명 차원의 심각한 고민이 제외된 추상표현주의는 기존 유럽 주도 화풍의 구상 회화에서 벗어나 추상을 통해 새롭게 바뀐 시대 상황에 맞는 미국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조였다고 한다.
건축에서는 형태주의라고 통칭되는 경향이 추상표현주의와 유사한 고민을 공유했다고 한다. 형태주의는 1940~60년대 자유형태를 추구했던 여러 유사한 현상을 집단적으로 통칭하는 단어인데, 가소성을 가지는 콘크리트를 가지고 다양한 형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형태들은 새러소타 스쿨, 예일 스쿨, 아르 앵포르멜 건축, 기하충돌, 기하주의 등 다양한 세부 양식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폴 루돌프(Paul Rudolph)는 새러소타 스쿨과 예일 스쿨 모두를 이끌며 1950~60년대 형태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은 모더니즘 재해석, 형태주의, 고전 복고주의 등 다양한 방향으로 현대건축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인물로서 현대건축 최고의 다원주의 건축가로 소개하고 있다. 형태주의는 존슨의 다원주의 가운데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경향으로 콘크리트의 가소성을 이용한 자유형태에서 기하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 실험을 했다고 한다. 또한 브라질의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는 르 코르뷔지에의 표현주의 경향을 이어 받고 1920년대 추상회화운동의 경향도 부분적으로 혼합하였다고 한다.
또한 건축에서 모더니즘의 재해석은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는데, 모더니즘을 탄생시킨 신 재료공법인 유리, 철골, 철근 콘크리트 등을 장식적 또는 심미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인 레이트 모더니즘, 생산성에 대해 고민한 경향으로 만들어진 네덜란드 구조주의나 구조미학 운동 또는 하이테크 건축, 그리고 1920년대 추상 아방가르드 양식 사조에 대한 대대적인 리바이벌 경향인 네오 모더니즘이었다고 한다. 사실 현대예술에서 모더니즘 재해석 경향이 가장 크게 유행한 장르는 건축이었는데, 대중과 소비 미학에 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다고 한다. 특히 1970년대의 뉴욕 파이브에서 1990년대의 네오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모더니즘 재해석 운동이 하나의 큰 흐름을 차지했으며, 1990년대 이후는 네오 모더니즘의 시대라 할 만큼 모더니즘에 대한 의존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좁은 의미의 네오 모더니즘은 1920년대 추상 아방가르드나 추상회화 모델의 네오적인 차용 경향을 일컫는데, 르 코르뷔지에, 로스, 데 스테일, 구축주의,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이 대표적이라 한다. 앞서 언급한 뉴욕 파이브도 팝 아트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반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그 대안을 모더니즘 리바이벌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들은 르 코르뷔지에의 백색 빌라를 중심으로 입체파 공간이라 통칭할 수 있는 1920년대 추상회화 모델을 차용하여 각색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언급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미술은 모더니즘의 무게를 많이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 반면 건축은 아직도 모더니즘의 틀 안에 머무르고 있는 측면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건축은 덩치가 크고 진행 속도가 느리며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미술만큼 사조의 진행 속도가 빠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반면 미술은 예술가 개인의 자유가 훨씬 광범위하게 허용되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작은 변화에 대응하는 수많은 실험과 새로운 사조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런 수많은 실험들 중 후기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문명의 도래에 대한 예술가들의 대응방식으로 팝아트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팝아트는 기본적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찬반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건축에서는 팝의 개념이 다소 모호하며 아예 없었다고 볼 수도 있었으며, 있다고 볼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대중주의 같은 포괄적 주제에 포함된 측면이 많았다고 한다.
이어서 키워드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전후 현대건축은 모더니즘 재해석과 반 모더니즘의 양대 축으로 진행되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자를 대표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배경은 1960년대에 제시되었으나 1980년대에 실제 지어지는 건물을 중심으로 융성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뉴 브루털리즘에 있었던 반 모더니즘의 여러 내용 가운데 대중성과 일상성의 개념이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언급한다. 즉, 모더니즘의 엘리트주의와 백색 추상에 반대하는 대중주의 건축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건축 흐름은 네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우선 장식고전주의를 기본 사조로 하는 상업 양식으로 고층 건물에 주로 쓰이면서 대도시 조형환경과 스카이라인을 바꾸어놓은 흐름, 두 번째는 팝 건축, 네오 아르누보, 네오 아르데코, 네오 할리우드, 열대양식 등 여러가지 장식 사조, 세 번째는 고전주의이되 상업적 목적과 장식주의가 배제된 단순 복고주의, 마지막으로 지역주의 경향을 포함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가난한 자들의 미학으로 일컫는 아르테 포베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 미술에서 재료 자체가 갖는 물적 심미성 같이 재료를 1차 요소로 활용한 대표적 사조가 바로 아르테 포베라인데, 모더니즘의 거장들에게 철골, 유리, 콘크리트 등은 재료 자체의 물성보다는 그들의 일반론적 건축관을 강조하는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모더니즘 건축을 단순화시키면 철골과 철근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산업 재료를 바탕으로 이것에 맞는 건축 양식을 찾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르 코르뷔지에는 순수주의의 최적 조화 개념을 백색 추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철근콘크리트를,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무한 확장에 의한 폐쇄적 육면체의 탈피와 지구 중력 아래 이상적 수직 구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유리와 철골 구조를, 그로피우스는 구축주의의 근대적 역동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유리를 각각 활용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개념 한 가지만으로 예술세계를 정의하려는 사조로 이를 위해 매개의 개입이나 역할을 최소화하며 개념에 대한 집중과 의존을 극단화한 개념미술과 최소한의 단계까지 단순화시키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미니멀리즘에서 최소화 하려는 대상은 소재, 재료, 형태 등 주로 매개 요소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최소한의 기준은 예술가마다 달라서 편차가 큰 편이지만 주로 단순 기하형태로의 환원, 단일 매스, 단일 존재 단위, 모노크롬, 한 가지 재료, 흑백 대비 등을 공통적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미니멀리즘 건축도 기본 개념은 미술과 동일하지만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건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미술처럼 완전히 미니멀해지지 못하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생활을 위해 최소한의 기능 처리가 필요하고 살다 보면 최소한의 구성 요소가 나타나기 때문이란 것이다. 특히 루이스 칸(Louis Kahn)은 콘크리트의 물성만으로 건축 공간을 형성하는 시도를 했다고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칸은 르 코르뷔지에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콘크리트의 가능성을 현대 상황에 맞게 새롭게 탐구한 최초의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인데, 르 코르뷔지에는 자유 형태의 조각성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 반면, 칸은 재료 자체의 물성에 집중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덩어리 느낌이 강한 단순한 육면체를 즐겨 사용했고, 거기에 빛을 더해 엄숙한 공간미학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니멀리즘 건축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이서 현실, 상대주의, 양방향, 참여, 환경 등 포괄적 차원에서 현대문명을 이루는 다양한 개념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예술적으로 구현하려는 운동인 환경미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모더니즘까지는 자아로서의 작품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려는 주체론이 건축을 주도했다고 한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려는 서구의 전통적 자연관이 그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것의 구체적 성과로 위생적이고 질서정연한 건물을 이상적 기준으로 추구했다고 한다. 이런 시각에서 자연은 비, 바람, 추위, 더위 등 인간에게 혹독한 기후 조건 때문에, 오래된 도시 환경은 무질서하고 비위생적이기 때문에 각각 극복 대상으로 인식했는데, 이에 따라 건물은 혹독한 기후 조건을 극복하고 인간에게 쾌적한 물리적 존재 환경을 조성해주거나 오래되어서 열악한 도시 환경을 깨끗한 환경으로 개선하는 작업으로 정의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엘리트 건축가의 숭고한 예술세계와 그 건물에서 매일 살아가는 사람이 바라는 바가 서로 어긋나며 충돌할 때 발생하는 불편의 문제가 대두되어, 그 대안으로 실제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건물을 짓게 하는 환경건축이나 참여운동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환경과 참여 개념에 도시 내 공공성의 의미를 부가할 경우 공공미술이라 할 수 있는데, 건축에서는 공공미술에 해당되는 공공건축이라는 별도의 사조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기념비주의가 공공성 개념을 대표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은 1950~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대형 공공건물에 나타난 사조라 한다. 대형 기하학적 윤곽을 전체 형태로 가지며 거대 기둥 같은 웅장한 고전 어휘를 더하는 처리, 거대 기둥 열이 일렬로 늘어서면서 돌출된 웅장한 지붕을 받쳤으며 뚜렷한 좌우대칭과 강한 축 구성이 주요 특징인데, 건물이 크기 때문에 주변에 넓은 광장을 확보하거나 건물을 높은 기단 위에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콘서트 홀, 관공서, 미술관, 대학 건물 등이 그 대상이었으며 해리슨(Harrison)의 뉴욕 유엔 본부와 링컨 센터가 대표 건물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신기념비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이 양식이 전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정치적 위상을 과시하게 위한 측면이 강했다는 점이라 한다. 미국의 신기념비주의의 영향으로 제3세계에서도 1960~80년대에 대도시 내 대형 공공건물에 유사한 경향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이 때 건축사조는 그 나라의 전통 양식을 차용한 지역 역사주의가 주를 이루었다는데, 문제는 이런 경향이 대부분 독재 정권, 특히 군사 독재 정권이 집권한 나라들에서 유행했다는 점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유신정권, 5공, 6공의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이런 종류의 공공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전쟁기념관, 독립기념관, 헌법재판소, 법원 등이 바로 그런 건물들인데, 이런 건물들을 지을 때 내건 기치는 민족주의였고, 건축 양식도 그에 따라 한국의 전통 건축을 직설적으로 모방했다고 한다. 특히 국립극장은 미국의 신기념비주의를 직접 모방했고, 심지어 전쟁기념관은 1930년대 나치즘 건축의 신전 양식을 모방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과 서양의 전통 건축에 라이트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스털링의 슈투트가르트 미술관을 혼합한 혼성 모방 양식이었다고 언급한다. 이 때 독재 권력이 내건 민족 양식의 이면에는 민족주의를 독재 정권의 합리화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다고 한다. 특히 공공성 개념이 부족한 건물들이 꽤 많은데, 이를테면 일반 대중들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 건물을 위치시키는 것이 바로 그 사례라 한다.
이어서 상대성의 개념을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상대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더니즘의 절대주의, 즉, 숫자로 정형화 되어가는 인간의 가치, 이를 위해 표준화와 동일화가 개인의 개성을 대체하는 사회 체계, 이것을 구체화하는 경제 전략인 포디즘의 일직선 관리체계, 대형 블록 중심으로 바둑판으로 구획된 대도시 같은 특성들을 비판하면서 이 모든 것을 극복과 부정의 대상으로 고발하며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미술에서는 시리얼 아트 또는 시스템 아트라 하고 건축에서는 구조주의 건축과 신합리주의 건축이라 하는 사조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설치미술, 시리얼아트 조각가로 잘 알려진 솔 르위트(Sol LeWiit)가 한국전쟁 참전을 계기로 한국의 전통공간을 경험한 뒤 이를 반영한 추상 정육면체를 소재로 하여 점차 격자 시리즈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 다음으로 하이테크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첨단기술을 응용한 건축 사조라 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첨단기술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첨단이라 하는 것은 초고층, 공기 단축, 재료와 노동력 절감을 통한 경제성 확보, 오차를 최대한 줄인 정확한 시공, 재료 강도의 향상, 새로운 시공술의 발명 등을 일컫는 것이라 한다.
결국 하이테크 건축은 공학기술을 디자인 측면에서 적절히 각색하고 응용하여 첨단처럼 보이게 하는 첨단 이미지를 창출하는 사조라는 것이다. 기술을 생산 주체가 아닌 소비 대상으로 삼는 입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첨단 이미지는 한마디로 기술을 연성화시키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하이테크 건축가들은 이를 위한 다양한 디자인 경향을 창출하게 되었는데, 볼트너트 접합, 생명 유기체의 골조방식, 현수구조 등이 바로 그것이라 말한다. 이런 하이테크 건축은 1960년대에 발아하여, 1980년대에 완성되었는데, 렌조 피아노, 로저스, 포스터, 그림쇼, 장 누벨 등이 대표 건축가들이며, 특히 칼라트라바(Calatrava)는 인체의 역동적 동작에서 미학적 모티프를 얻어 정밀한 공학 이미지로 축조하는 구조미학의 대표적 건축가라 소개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기존의 절대적 심미성을 해체하려는 예술운동인 해체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해체 대상에는 형태뿐 아니라 형성과정과 논리구조 등 그 체계까지 포함된다고 하는데, 형태의 해체는 사각형이 대표해는 완성된 형태 윤곽과 지구 중력에 충실한 정역학 등이고, 공간의 해체는 십자 축과 x, y, z축 중심의 유클리드 기하 질서라 한다.
논리구조의 해체는 삼단논법에 기초한 합리주의 논리구조, 평면-단면-입면의 3대 기본 도면을 중심으로 한 건축 정보 전달체계, 스케치-도면-모델의 3대 기본 매체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설계 기법이며, 상식의 해체는 건축의 의사결정에 내재된 사회 상식과의 연계를 해체한다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해체는 더 큰 목적을 얻기 위한 중간 과정이며,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서 억눌려 있고 갇혀 있던 것을 끄집어 내어 전혀 새로운 것을 선보이는 것이라 말한다. 사실 해체주의는 통일된 사조라기보다 건축을 해체의 입장으로 정의하는 경향들을 모아놓은 포괄적인 개념의 집합체인데, 형태나 공간은 해체 대상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형태 윤곽의 측면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 일뿐 최종 결과는 항상 구조적으로 안전한 물리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해체 후 재구축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해체주의 건축은 형태 놀음에 대한 집중이 심한 편이며, 건물이 아무리 파격적으로 보일지라도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역학 방정식이라 말한다. 이를 실제 구조물로 짓기 위해 물리적 낭비가 더 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체주의 건축은 가장 반 해체적일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밖에도 신표현주의, 대지미술, 미디어아트 등을 소개하며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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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7989073
임석재 교수의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은 분명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좀처럼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떠올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 당시에만 즐겁게 읽었을 뿐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시 책을 펼쳐보며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긴 한데, 귀찮게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을 더위 탓으로 돌리는 요즘 분위기를 따라서 자기 자신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마냥 미루게 될 것 같다.
저자는 20세기의 미술과 건축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시간적인 구분으로 나누고 있고,다른 하나는 일종의 그 시대의 주된 정서 혹은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하려고 했는데, 그런 저자의 구분에 따라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1945~2000’는 20세기 후반기의 건축과 미술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저자는 우선 2차 세계 대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건축과 미술과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관계에 놓인 건축과 미술에 대한 논의를 하고, 이후의 건축과 미술은 연관성이 적어지기는 했지만 건축과 미술 둘 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지지부진한 발전과 한계를 돌파 /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전처럼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록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는 주장과 함께 그것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상호보완적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며 이번 연구가 갖는 중요성과 의의를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기존의 각 분야별로 점차 분화되고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되던 상황에서 융합, 통합, 종합, 통섭 등을 주장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혀 다른 관점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 아닌 단순히 물리적인 / 기계적인 결합에 대해서는 충분한 경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최근 다양한 결합과 관련성을 찾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의견을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의 논의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1945년 이후의20세기 후반기의 건축과 미술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한계에 대한 지적이며, 그런 입장 속에서 어떤 변화와 발전, 도약과 (모더니즘의) 미완성의 완성, 극복을 모색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건축과 미술 둘 다 이전에 비해서는 다양하게 분화되고 좀 더 난해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저자는 그런 다양하고 복잡한 흐름을 최대한 정리해주고 있고 그런 다양하고 복잡한 흐름들 속에서 중요한 흐름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흐름들이 어떤 입장과 논리 속에서 이뤄진 흐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유럽과 미국의 건축적 / 미술적 관점과 흐름이 이전보다 좀 더 거리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런 다양한 내용들을 다루기에는 분량의(370쪽) 한계 때문에 상세한 논의가 어렵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세부적인 논의보다는 몇몇 대표작들을 통한 대략적인 논의를 통해서 전달해주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고 다양한 흐름들을 보인 20세기 후반의 건축과 미술이기 때문에 그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저자는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혹은 알려지기 힘들었던 다양한 내용들을 잘 정리해주어 앞으로 20세기 후반의 건축과 미술에 대해서 좀 더 알려고 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