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출전『마음의 수수밭』(1995)
천양희 시인하면 기억나는 시. 제게는 이 시입니다. 한 밤에 깨어있는 자의 심정을 저리도 절실하게, 절절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참 부러워요. '외롭다'고 표현하고 말 것을, 한계령의 바람소리를 끌어다 표현하는 시인의 시인다움이 아름답습니다.
얼마전에 서점에서 이것저것 책 구경을 하다가 천양희 씨의 새 책을 발견했습니다. 몇 권의 책을 사면서 함께 구입했습니다. 시집이 아니더군요. 에세이라고 해야 좋을지...살면서 느낀 이런저런 생각들을 모아놓은 책이에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역시 그 자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사랑, 시인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아요. 제게는 꽤 자극이 되더군요. 저도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사실 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무려 1942년 생이시더라구요. 저보다 40년 이상 더 사신 거군요. 사실 저는 '한 40대 정도 되는 분이시겠지.'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런 에세이집을 충분히 낼만할 나이이신 것 같아요. 사실, 시인이 시말고 다른 것을 쓰는 것에 대해 다소 인색한 저이지만, 인생 연륜이 있는 분들은 충분히 이런 책을 내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차분한 마음으로 읽기 좋은 책입니다. 마음에 드는 구절도 꽤 많구요. 몇몇 구절만 인용해보겠습니다.
p.20
자신을 아는 명석함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 속에 푸른 물길을 갖는다. 그 물길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영혼이다. 마음 안에 혼이 있을 때 마음은 비로소 깊이를 가진다. 바닥없는 바다처럼.
p.29
그의 영화 <아비정전>(1990)을 보며 감동받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아비는 무역체육관 매점에서 표를 파는 수리진을 찾아와 함께 시계를 보자고 말한다. 수리진이 놀라 아비에게 뭘 원하느냐고 묻는다. 원하는 것은 없고 다만 친구가 되어 1분동안 함께 시계를 봐줄 수 없겠느냐고 한다.
수리진과 아비는 1분동안 함께 시계를 바라본다. 그 때 아비가 말한다. "오늘은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을 지울 수 없어."
그러나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 앞에서 수리진은 독백한다. "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나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사랑의 혼미함과 허위를 함께 느끼게 해주는 이 영화는 사랑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다루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p.50
글을 쓰지 않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고통이다. - 버지니아 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