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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다’의 시학과 윤리학 - 함기석 시집 『뽈랑 공원』
함기석은 언어 속에서 언어와 더불어 논다. 함기석의 언어에는 상상의 세계가 담겨 있고, 그 세계는 항상 역설적인 세계로 가득 차 있다. 언어(문장)가 말을 하고, 세상을 창조하고 다시 지운다. 언어의 제국에서 생성되는 시의 세계는 언어의 제국에서 흩어져 다시 말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언어적 상상의 세계에서 나와 언어의 제국으로 복귀하는 함기석의 시들은 그래서 상상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작가가 언어의 세계에서 상상한다면, 독자는 함기석이 창조한 언어의 세계에서 또 다른 언어의 세계를 상상한다. 상상의 끊임없는 반복에 함기석 시의 본질적인 특장이 놓여 있는 셈이다.
표제작 「뽈랑 공원」을 보자. ‘뽈랑 공원’은 책의 공원이며, 기호(언어)의 공원이다. 책 속에서 현실이 나오고, 현실은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책의 내용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책과 현실은 구분되지 않은 채 이어져 있다. 경계는 있지만, 그 경계는 항상 사라져야 하는 경계로 나타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뽈랑 공원에서는 가능하다. “아기가 젖을 빨다 스르르 잠이 들자 / 여자는 하늘 한복판을 푸욱 찢어 / 아기의 어깨까지 살포시 덮어” 주는 세계가 뽈랑 공원의 진정한 세계이다. 상상을 통해 구성되어 상상으로 뻗어나가다가, 상상의 공원으로 회귀하는(사라지는) 뽈랑 공원의 세계는 실상 『뽈랑 공원』(랜덤하우스코리아, 2008)이라는 시집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상상의 풍경은 함기석 특유의 시적 아우라를 창출하는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호의 세계는 인과관계가 통하지 않는 세계이다. 수많은 기표들이 저마다 의미의 자장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놀이를 벌일 수 있는 공간이 기호의 세계이다. 함기석의 시는 이러한 기호의 세계에서 문장(언어)들을 상상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기호가 기호와 만나 새로운 기호를 낳고, 그 기호는 또 다른 기호를 만나 상상 속의 기호의 제국을 이룩한다. 기호의 제국은 시물의 세계가 아니라 ‘말하면’ 곧바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상상의 세계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말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세상과 더불어 놀 수 있는 세계라니.
어쨌든 누군가 난 석기함을 입는다 말하면 이것은 옷이 된다 난 석기함을 읽는다 말하면 이것은 책이 된다 난 석기함을 피운다 말하면 이것은 담배가 되고 난 석기함을 먹는다 말하면 이것은 음식이 된다 한 마리 붕어빵이 되고 맛있는 찹쌀호떡이 된다 어쨌든 누군가 난 석기함을 그린다 말하면 이것은 그림이 된다 난 석기함을 듣는다 말하면 이것은 음악이 되고 난 석기함을 기른다 말하면 이것은 애완동물이 된다 한 마리 개가 되고 고양이가 된다 - 「석기함」 부분
석기함을 ‘석기함’이라고만 말하고, 의미화하는 일은 일상언어의 맥락에서나 이루어진다. 사회적 약속으로 정해진 의미의 고정은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놀이의 정신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다. ‘되기’라는 말 자체가 기존의 관념을 이탈하는 놀이의 정신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석기함이라는 대상을 통해 펼쳐지는 끝없는 환유의 연쇄는 고정된 의미의 세계를 이탈하려는 시인의 사고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환유는 사물의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연계를 통해 끊임없이 의미를 분산시킨다. 연쇄적으로 표출되는 다양한 사물들의 등장은 시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동시에 시를 사물들의 놀이로 변모시킨다. 사물과 놀고, 시와 놀 수 있는데 고정된 의미에 집착할 이유가 있는가? 함기석의 시는 이처럼 시적 의미에 대한 강박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남으로써 시를 수많은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이미지의 제국으로 만든다. 「차분한 야식」이란 시를 보자.
예쁜 발톱 예쁜 이빨 입술 가득 예쁜 피를 바른 쥐가 고양이를 먹는다 심장을 시계가 예쁜 밤의 예쁜 불알 - 「차분한 야식」 전문
야식을 먹는 주체는 쥐와 시계이다. 쥐는 예쁜 이빨로 입술 가득 고양이를 먹고 있고, 시계는 심장을 먹고 있다.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이 시는 그러나 상상 속에서 표현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새로운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 쥐가 고양이를 먹는 세계와 시계가 심장을 먹는 세계는 놀이의 공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세계이다. 이미지는 이미지를 낳는다. 고양이를 먹는 쥐의 모습이 예쁘다면 쥐의 발톱과 이빨, 입술 가득 피를 바른 입술 역시 예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종의 시적 쾌감이고,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자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시계가 심장을 먹는 “예쁜 밤”도 “예쁜 불알”과 어울려 시간 속의 ‘흐름-생성’으로 변주되고 있지 않은가. 예쁜 밤에 펼쳐지는 예쁜 피의 세계는 이미지로만 구성되는 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기호들이 놀이하는 세계에서 함기석은 이미지를 통해 그 기호들의 놀이와 마주하고 있다.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구태여 의미화할 필요가 없는 이미지의 세계이고, 그렇기에 의미에 대한 지나친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즐거운 마음’이 이번 시집에 주되게 나타나는 ‘웃음’의 시학을 탄생케 하는 동력이 된다. 끔찍한 이미지들이 남발되는 ‘미래파’(권혁웅)라는 이름의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와 견준다면, 함기석은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대하고, 시와 기꺼이 놀이한다.
이를테면 「높이뛰기 선수를 위한 말랑말랑한 피아노곡」을 보면, 놀이는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짜릿짜릿하다. “바이킹이 올라간다 / 바이킹이 뒤집힐 듯 뒤집힐 듯 가파르게 올라간다 / 글자들이 짜릿짜릿 소리친다 / 나무들 살랑살랑 초록 꼬릴 흔들어 / 피아노 선율 허공으로 퍼진다 / 하늘 이랑마다 아랑아랑 아름다운 잔물결”에 나타나는 바처럼, 놀이의 짜릿짜릿함은 가파른 곳에서 떨어지는 쾌감과 그 쾌감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온몸으로 아랑아랑 퍼지는 순간으로 표현된다. “글자들이 짜릿짜릿 소리친다”는 시구에 주목하자. 글자들은 시인의 종속물이 아니라 시인의 외부에서 열심히 놀며 소리친다. 아이들의 놀이가 그렇지 않은가. 시어들은 이미 아이들의 언어로 뛰쳐나가 스스로 놀며 고정된 의미의 고랑을 넘어선다. 같은 시의 다른 부분을 보자.
폭포수 광장 점핑 놀이기구에서 아이들이 논다 허공과 논다 점프도 점프하며 공기들과 논다 높이뛰기 선수도 점프해 여우구름에게 꽃을 전하고 글자들도 논다 명사들은 돌고래 점프 동사들은 벼룩 점프 부사들은 방아깨비 점프 글자들이 야호야호 신나게 점프하며 논다 하늘 높이 솟았다가 다이빙 선수처럼 공중회전하며 내려온다 그때마다 빈칸 밖 도시가 세계가 가볍게 뒤집힌다 - 「높이뛰기 선수를 위한 말랑말랑한 피아노곡」 부분
글자들이 노는 것은 아이들이 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놀아야 잘 노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노는 것을 노는 것이 잘 노는 것이다. “점프도 점프하며 공기들과 논다”고 시인은 말하지 않는가. 놀이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세상은 누구나 꿈꾸는 세상이지만 아무나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노는 순간 사람들은 놀이의 의미를 찾고, 의미가 없으면 놀지 않으려 한다. 세계가 뒤집히는 걸 사람들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이상한 나라처럼 세상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을 이성의 힘이라고 말하든, 아니면 질서에 대한 소망이라고 말하든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길 원한다. 노는 아이들-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통탄할 일이다.
함기석은 시어들을 놀이의 세계로 불러냄으로써 이러한 이성의 세계-도시를 가볍게 뒤집는다. 무더운 여름 오후, 참새가 부는 하모니카 속에서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나와 한 마리씩 선생들 귓속으로 들어간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선생들이 간지러워 웃는다 / 책상도 의자도 책들도 간질간질 웃으며 소리 없이 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 선생들도 흘러 내린다”. 교무실이 온통 수영장이 되어 무더운 여름의 오후를 날려버리는 상황을 시인은 상상하고 있다. 물의 세계는 “고드름 수염이 주렁주렁 달린 얼음 도시”(「배꼽 파는 가게」)를 ‘가볍게’ 뒤집는다. 단단하게 고정된 얼음 도시가 물의 세계로 변하는 순간, 세상에는 웃음이 넘쳐난다. 흐르는 물은 웃는 물이다. 고정되지 않고 흐르며 웃는 물은 죽음의 세상마저도 웃음이 있는 세상으로 뒤집는다.
여기, “백혈병으로 죽은 소녀가 누워 있다 / 내가 살짝 입술을 건드리자 입에서 /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 나온다”. 물고기(은어)는 어디로 갈까? 숲을 지나고 꽃밭을 지나고 채소밭을 지나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는 강의 눈썹에 닿자 “이곳에 날 묻어줘!”라고 말한다. 소녀의 영혼이 묻힌 그곳에 “강이 흐른다 / 소녀의 짧은 삶이 물풀이 되어 흔들리는 강 / 생의 고통과 상처가 웃는 물이 되어 흐르는 강 / 나는 은어를 손바닥에 담아 강물에 넣어준다 / 내 눈물보다 투명한 강의 살갗 속으로 / 어린 은어 한 마리 손을 흔들며 헤엄쳐간다”(「영혼」). 죽음의 세계를 아름답게(?) 표현한 이 시에서, 시인은 흐르는 물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소녀의 영혼을 위무하고 있다. 함기석 시의 웃음과 놀이가 속빈 웃음과 놀이와 갈라지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원통하게 죽은 자의 영혼은 웃음(울음)이 아니면 치유될 수 없다. 죽음이 죽음이 아닌 이유는 이렇듯 영혼은 여전히 살아남아 손을 흔들며 투명한 강의 살갗 속으로 헤엄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도시(얼음 도시)를 가볍게 뒤집는 행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영혼의 상상력은 함기석의 시를 현실에 튼튼하게 뿌리박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하겠다.
함기석의 시적 상상력은 ‘만약’의 상상력에 기반한다. 「만약」이란 시에 표현되는 바, “만약 지상의 눈송이가 모두 벌레로 변한다면 // 만약 도시 상공의 구름이 모두 바윗덩어리로 변한다면 // (……) // 만약 네 시의 글자들이 땅벌이 되어 너를 집단공격한다면” 등의 끊임없는 가정법적 질문이 시인의 상상력을 세상의 외부로 나아가게 한다. 그는 이러한 시적 태도를 ‘말과 섹스하는 남자’라는 말로 표현한다. “내가 말과 섹스할 때 / 내가 말과 성당에서 알몸으로 엉켜 통음할 때 / 시간은 납처럼 녹아 허공을 흐르고 / 하늘엔 태양이라는 외눈박이 개”가 있다. 단단한 시간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정도로 강렬한 섹스의 ‘느낌’이 말에 대한 시인의 ‘느낌’일 것이다.
‘만약’의 상상력이 ‘만약’의 상황을 넘어서는 순간은 그러므로 상상력이 ‘느낌’으로 변주되는 순간에 나타난다. 언어와의 놀이는 그 느낌에 다가서는 시적 방법에 해당한다. 아니, 언어와의 놀이가 있기에 느낌이 피어오른다고 말해야 한다. 자신의 느낌에 충실한 놀이만큼 재미있는 놀이는 없다. 함기석이 지향하는 시의 놀이는 느낌에 충실한 한 시인의 행보와 맞물려 세상을 가볍게 뒤집는 역설적 세상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