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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어가 다시 살을 회생시킬 수는 없을까...
"그 언어가 다시 살을 회생시킬 수는 없을까..." 내용보기
책 속의 언어가 낱낱의 소리가 되어 살갗에 스며든다. 나는 누군가의 동무가 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싶지만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쉽지 않음에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겹다. 그러나 그 절망과 힘겨움은 아스라한 슬픔으로 이어지고, 그 슬픔이 하릴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걸어둔 주술이다. 김영민 선생님의 전작 중 <사랑, 그 환상의 물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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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언어가 낱낱의 소리가 되어 살갗에 스며든다. 나는 누군가의 동무가 될 수 없음에 절망하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싶지만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쉽지 않음에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겹다. 그러나 그 절망과 힘겨움은 아스라한 슬픔으로 이어지고, 그 슬픔이 하릴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걸어둔 주술이다. 김영민 선생님의 전작 중 <사랑, 그 환상의 물매>를 읽을 때도 그러했지만, 이 책도 그 맑은 슬픔으로 나를 내내 설레게 하였다. 연인이나 동무나 세속 속에서 세속적이지 않은 것을 추구하지만 결국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그 돌아감을 허무주의적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 속의 결절들을 발견하고 그것에 관해 나직하게 이야기해 준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예전에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이 책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이 빠진 '사랑에 관한 에세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현존재, 거기 있는 존재, 그 존재의 장소와 같은 개념들이 간절한 사랑의 벡터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틀린 생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와 더 이상 사랑을 지속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한 아렌트가 결혼을 하고, 그 '일시적' 이별에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쓴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와 시간>은 하이데거식 실연에 대한 애도의 방식인 것이다.

 

그 반복을 정당화한 동기의 바탕에는 은밀한 지적 소통의 확신이 있었다. 다변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프랑스적 관계와는 달랐지만, 하이데거에 대한 아렌트의 사랑에도 ‘지적 반려’의 믿음과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이 세기의 사상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그녀만이 그의 뮤즈(muse)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윤리학적으로 상극을 달렸던 이 두 연인의 밀애를 가능케 했다.(살이 식고 삶의 양식이 달라도, 정신적 반려의 동질감에 대한 확신은 무섭도록 상대를 고집하는 법!)

 

오직 아렌트만이 자신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말한 데에는 어떤 사유가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살은 식는다. 확실히 식지 않는 살은 없다. 살을 식지 않게 하려면 서둘러 이별하는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처럼 살이 없는 곳에 언어가 들어찬다. 지적 소통이 들어차고, 그것으로 '무섭도록 상대를 고집'한다. 그러나 나는 그 '치환'이 사실 더 무섭다. 살이 끝난 자리에 언어가 대신해서 들어올 수 있는 것, 그것은 다행스럽지만 또 이미 과거로 빠르게 퇴각해 버린 살에 대한 혹독한 무심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조용히 묻는다. 그 언어가 다시 살을 회생시킬 수는 없는 것인지...

a****9 2008.04.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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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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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나는 망설임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가지 빛깔을 물들일수 있을 것이다.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그런 후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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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가지 빛깔을 물들일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후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
그 사이에다 펼쳐 놓고 말없이 마주 보며 있다가,
뉘엿뉘엿 해질녘에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선귤당농> [지기편], 이덕무




이덕무의 지기지우는 아름답다.
물론 여린 아내에게 동무의 얼굴을 수 놓게 한다는게 걸리지만,
(수로 동무의 정을 보일거면 수 놓는걸 배워라 남자들이여ㅡㅡ
수놓는게 어디 쉬운 줄 아냐는;;;;;)
저런 정성을 쏟고 싶은 벗을 얻는다면
삶이 얼마나 든든하고 충만하겠는가.


김영민의 동무론은 (같은)동 (없을)무 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함께 걷는 관계.
기분이나 정서공유가 아닌 신뢰의 관계.
취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혹은 그걸 무시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이.


친구는 시간을 먹고 산다.
시간의 명암과 굴곡 숙성이 재산이고
기억과 추억을 담보로 한다.
공감과 감정이입이 가능할 때 유지된다.
동무와 다르다.


동무는 원리상 시간을 초월하며
길없는 길을 어울려 걷는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동지와도 다르다.
동무는 수평적 관계이며 한계없이 상호인정하고 우의를 나눈다.


이 책은 2006~2007년 사이 한겨레에
같은 제목으로 연재된 글을 한데 엮은 것이다.
철학자의 글이라 낯선 문장이 많았지만
그만큼 배웠다.


동무가 갖고 싶다.
동무가 되어 주고 싶다.





e*****e 2016.12.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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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된 생산물로서의 동무
"추상화된 생산물로서의 동무" 내용보기
대학 시절 공대였던 나의 모교에는 여학생이 극히 드물었었다. 따라서 남녀간 연애도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캠퍼스 커플 역시 별스러운 존재였다. 그 희귀성으로 인해 쉽게 입에 오르내렸던 그 커플들은 김영민의 여러 예민한 진단과 달리 놀라운 학업성취를 보였고 과수석이니 졸업 수석이니 하는 것들의 당사자들이 되곤 했다. 이제 막 캠퍼스가 정비되면서 주변에 마땅히 여흥을 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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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공대였던 나의 모교에는 여학생이 극히 드물었었다. 따라서 남녀간 연애도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캠퍼스 커플 역시 별스러운 존재였다. 그 희귀성으로 인해 쉽게 입에 오르내렸던 그 커플들은 김영민의 여러 예민한 진단과 달리 놀라운 학업성취를 보였고 과수석이니 졸업 수석이니 하는 것들의 당사자들이 되곤 했다. 이제 막 캠퍼스가 정비되면서 주변에 마땅히 여흥을 누릴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유려한 수사와 풍부한 감정들이 뒤따라올 리 없는 ‘공대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남자가 자신의 내적 실존에서 소외된, 혹은 추상화된 생산물을 비교적 쉽게 견디는 데 비해, 여자는 이미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내몰렸고 그 구체성은 자신의 실존과 깊이 연루하고 있었다.(p.15)


드물게도 둘이 여전히 연구를 하고 서로에게 격려와 경쟁이 되며 살아가는 커플도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필연적으로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여자는 살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보편화되어 간다.


나는 근기(根氣)는 물론이거니와 재기(才氣)마저 갉아먹는 사랑의 열정을 수없이 목격했다. 인정투쟁을 악용하면서 허영과 탐욕의 늪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랑은 또 얼마나 흔한가? 그러나 생산적 상호인정은 연인 간의 사랑이 창조적 열정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와 같은 것이다. (……) 인정망각은 연인을 물화시키는 짓이며, 사랑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맹목의 동력을 상호인정의 호혜적 의사소통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길만이 연정의 생산성을 보장하는 법이다.(p.113)


김영민의 논리를 엮으면 그가 말하는 ‘인문학적 생산성’이란 ‘구체적인 생활’로부터 분리된 ‘추상화된 생산물’이다. 이 세계는 그 ‘추상화된 생산물’의 그물로 권력화되어 있으며, 여자들은 또한 필연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다. 똑같은 살이 매개되는 사랑의 열정이 어찌하여 여자들을 소비하여 남자들을 살찌우겠는가?


그러나 동무는 동지도 친구도 아니다. 굳이 조어로 그 취지의 한 극단을 잡아내자면, 동무는 동무(同無)다! 오히려 서로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는다. 공유된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면서 히틀러나 스탈린의 수염같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행진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머 -얼 -리 몸을 끄 -을 -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다. 그것은 일찍이 니체와 짐멜만이 거의 유일하게, 그러나 다소 흐릿하게 파악한 ‘신뢰’의 관계다. 우선적으로 ‘기분’과 ‘감정이입’의 차원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친구가 아니며, ‘뜻(이념)’ 중심주의적 결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지도 아니다.(p.33)


저자의 지향점은 위 ‘동무론’에 집약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실천적 전략이기도 한데, 이 책이 정돈되지 않는 어지러움을 주는 까닭은 같은 맥락에서 그의 동무론이 ‘추상화된 생산물’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삶 속으로 퇴패할 수밖에 없는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맹목의 동력을 상호인정의 호혜적 의사소통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길만이 연정의 생산성을 보장하는 법이다.’라고 강변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이 아닐까?


‘가욋사람’의 ‘가욋사람’으로서 여자를 남자의 파트너 삼아 동무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어딘지 부당하기까지 하다. 도리어 내가 이 책으로부터 얻는 교훈은 남녀간에 살과 사랑을 매개로 하는 ‘평등한’ 관계의 동무란 불가능하며, 설령 그 관계가 겉으로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여자에게 더 가혹한 ‘근기’를 요구한다는 것일 게다.


인문 역시 상상력의 산물이며 발명품이다. 좀 더 직설적이고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인문은 인간만이 지닌 ‘지적 허영’의 생산물이다. 분명 저자가 전개하는 공부의 치열함과 정직함은 탁월한 어느 인문학자들과도 비견할 만하지만, 애써 후한 평가를 내리더라도 저자가 그 허영에 빠져 ‘동무’라는 환상을 쫓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듯 하다. 물론 한 마디 덧붙여 나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 역시 그 보다 한참이나 아득히 낮은 곳에서 그들이 풍겨 내는 인문의 무늬에 현혹되고 있는 지라, 속수무책으로 김영민이 말하고 있는 동무(同無)를 꿈꾸어 보는 것이다.

m*******d 2009.10.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