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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다른 작품 무엇이든 쓰게 된다 나는 농담이다 뭐라도 되겠지 악기들의 도서관 펭귄뉴스 (..)
# 읽고 나서. 이제 곧 만 3세가 되는 딸아이는 이제 제 몸을 좀 더 유연하게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다양한 포즈를 시도한다. 배드민턴 스윙 연습을 하는 아빠를 따라 하고, 스쿼트를 하는 엄마를 따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끼리 코를 만든 내 모습을 보고 이리저리 따라 해도 안되어 짜증을 내곤 했는데, 이제는 잡아주지 않아도 알아서 코끼리 코를 만든다. 자신의 몸에 관심도 많다. 모기에 물려 부어오른 자리를 관찰하고, 이마에 있는 점을 거울을 통해 한없이 들여다보다 왜 엄마 이마에는 없냐고 묻는다. 며칠 전에는 팔꿈치에 움푹 들어간 부분은 무엇이냐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이렇게 사물에, 내 몸에 관심을 가져본 지가 언제였나 생각했다. 나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고 단정 지으며 살이 찌는 걸 방관하고, 금세 피곤해지는 건 나이 탓만 했다. 몸이 나에게 관심 좀 가져달라고 소리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못해봤다. 아니 바쁘다는 핑계, 30년 넘게 함께하고 있는 내 몸에 대해 궁금한 게 있을 거란 생각조차 솔직히 생소하다고 여겼다.
그런 와중에 소설가 김중혁의 '몸' 에세이 <바디무빙>을 읽었다. '몸'에 대해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소설가가 되려면 아이만큼의 호기심이 있어야 하는 거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세상이 전부 루저투성이다. 원래 나 같은 루저들이 그렇지. 분류하는 걸 좋아하고, 나누는 걸 좋아하고, 정의 내리는 걸 좋아하지. 시간이 무척 많으니까.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데.
'우뇌와 좌뇌' 챕터에서 작가는 시력 이야기를 하다가, 유일하게 안경을 써도 되는 스포츠인 야구 이야기를 하다가, <인사이드 르윈>이라는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 좌뇌와 우뇌 이야기를 하다가, 분류하는 걸 좋아하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건 다시 야구 이야기로 넘어온 후, 그가 세상에서 시간과 맞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불안하고 지루하던 이십 대 시간을 야구로 이겨냈다며 마무리 짓는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이야기들은 너무나 잘 연결되고, 유쾌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시력'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글쓰기의 기본과도 맥이 닿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지방국도를 달리는 것이다. 막다른 길로 잘못 진입했다가 빠져나오고, 우회 도로를 선택하기도 하고,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도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길을 달리는 동안 예상외의 글이 탄생하기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인체 사전의 유쾌한 바디 파트 정의는 물론이고, 놀라울 정도로 잘 그린 작가의 그림, 구석구석 놓여있는 책과, 영화 소개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
나처럼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하나에 대한 호기심을 공상을 통해, 혹은 소설과 영화 등을 통해 이런 게 아닐까, 저런 게 아닐까 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논하고, 철학을 논하고, 인생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소설가인가 보다.
읽고 나서는 어째서인지 지나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한번 더 눈길을 주게 되었다.
 
* 밑줄 쳤던 내용 인간의 두 눈이 앞쪽으로 몰려 있는 것은, 쉽게 현혹당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눈앞의 물체들을 더욱 자세히 보겠다는 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인간의 숭고함일 것이다.
영화와 사진과 그림과 소설과 시의 공통점은, 두 개의 눈으로 본 입체적 영상을 평면에다 구겨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한 일이 있을 때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풍습은 종아리에 찬 알을 빼주어, 거만하거나 겉멋 들지 않도록 하려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것이다.
현재를 알 수 없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절망의 마음'이 생겨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마음의 무게가 몸으로 전해져 무기력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무기력증에 그나마 좋은 약은 영화와 소설이었다.
춤이란 그런 것이다. 춤이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것이다. 같은 스텝으로 같은 리듬을 타며 서로의 몸에 기대는 것이다.
솔직해진다는 건, 솔직히 말해서,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몸을 초월하기 위해 셰릴은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엘 콘도르파사>에는 이런 기사도 있다. "인간은 땅에 묶여 살면서 가장 슬픈 소리를 내뱉지요" "나는 길보다는 숲이 되고 싶어요" 하염없이 걸어야 하는 인간의 몸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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