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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인 내게 이 책의 제목이 갖는 의미로 하여금 지금의 이 얼굴은 어떤 얼굴인가 들여다 보게 한다. 나름대로 잘 살아 왔다고 생각하는 있는 나 와는 다른 얼굴 같다. 올바른 마음쓰기를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책 속의 글을 읽으며 더욱 그렇게 느낀다.
중도적인 안목과 남다른 시각으로 쓴 한편 한편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나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자기성찰과 나의 내면을 돌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과연 나는 어떤 사고와 마음으로 살아왔나 극단에 치우친 사고와 집착으로 인한 이기심과 분별심으로 가득 찬 지혜롭지 못한 삶이었다. 지나간 삶이야 어쩔 수 없지만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사람의 얼굴은 열 번 변한다. 타고난 얼굴이야 고칠 수 없지만 인생을 살면서 변해가는 얼굴에 대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성냄, 어리석음, 탐욕,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아름다운 얼굴을 위해선 텅 비워라” 지은이의 말처럼 비움의 훈련을 해야겠다. 집착에서 벗어나 텅 빈 평상심의 마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부처의 아름다운 얼굴로 남기 위해서, 열심히 길들이고 가꾸어나가야겠다. 소중한 이 한 권의 책을.. 흐트러질 때 마다 나를 돌아보고 바로 잡아주며 마음을 밝혀줄 내 마음의 불서로 간직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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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궁긍했던 내용들을 글 도중에 풀이해 놓아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죽비의 내력과 출가의 본 뜻등.... 여러 종류의 글들이 모여 있습니다. 선사들의 마음 다스리는 부분과 유목민의 부분들 정말 무엇하나 유용하지 않은 글이 없습니다. 일독을 권장합니다.
이해충돌의 해결은 결국 무아(無我)의 길뿐이다.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곳곳이 잘살이를 위한 웰빙처요, 모두가 참살이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진정한 떠남이란 끊임없는 자기 변신이다.
억수가 쏟아져도 잘못 놓인 그릇에는 물이 담길 수 없고, 가랑비가 내려도 제대로 놓인 주발에는 물이 고인다.
발은 땅을 딛고 살지만 마음만큼은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
"마음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경을 읽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청매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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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인 가르침을 한문을 자제하고 쉬운 표현을 빌어 구성한 책이다
독자들이 통달 보다는 통섭에 가까운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것 같고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하는 내용이라 언제 어느때고 가까이 두고 읽을 수 있다
특히, 직장인들이나 주부들이 읽으면 마음공부에 좋을것 같다
종교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의 일들과 관련한 시원스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책의 구성은 큰 갈래 안에 짧은 분량의 글들이 나눠져 있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데 10분정도면 족한것 같아서 더더욱 부담이 없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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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 때 자연스럽게 신경쓰이는 것이 제목이다. 제목만 잘 지어도 독자의 손길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 책 역시 제목을 보면 인생공부에 대해 뭔가를 말하는 것 같다. 물질적 부는 평균수준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충족된 한국 사회지만 그만큼 뒷걸음 친 부분이 정신적 피폐일 것이다. 컬럼부스가 기존 대륙인 아메리카-서구기준으로 보았을 때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자본의 더 가질려고 하는 착취는 신자유주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즐기기 위한 인생이 아닌 일하기 위한 삶으로 변해버린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하루에 하늘을 올려다 볼 시간조차 없어진 현대인의 삶이다. 닭장속에서 계란을 낳기 위해 사육되고 있는 닭과 직장에 얽메인 한국 현대인의 모습이 비슷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 책은 에세이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관상학에서도 면상(面相) 보다는 심상(心相)을 더 강조한다. 아름다운 마음씨와 수행으로 가꾼 투명하고 맑은 얼굴을 어찌 말초적인 성형미인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47쪽). 종교의 속성 중 하나가 자신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영원한 출가가 되려면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나날이 발심해야 한다(91쪽)는 것과 기독교의 회개라는 것도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자는 것이다. 그것도 날마다 자신을 죽여야만 구도자의 길에 접어들 수 있건만 인내심이 강한 곰처럼 마늘만 먹지 못하는 호랑이 같은 성격 때문에 사람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불완전한 중생의 몸으로 살면서 허물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허물을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허물을 짓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것이 더 큰일이다. 자기반성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동시에 수행의 한 방편임을 깨달아야 한다(137쪽). 원철 스님은 종교인-아마 종교지도자 일 듯-들이 타고 다니는 차의 고급화, 중대형화 추세에 대해 ‘삼국유사’의 경흥우성(경흥국사가 성인을 만나다) 편을 통해 일갈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경흥국사는 대궐에 들어갈 때마다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탔고 차림 또한 그에 못지 않아 가던 행인들이 절로 길을 비킬 정도였다. 하루는 국사 앞에 초라한 행색의 승려가 광주리에 마른 생선을 지고 앉아 있었다. 승복에 생선을 지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 국사는 “부정한 물건을 지고 있다”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살아 있는 고기(馬)를 두 다리에 끼고 있는 것보다 죽은 고기를 메고 있는 게 더 싫단 말입니까?” 대꾸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알고 보니 그는 문수보살의 화현이었다. 이에 국사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177쪽). 그러면서 원철 스님은 말을 차에 비유하여 지나치게 과속하는 차, 또는 필요 이상의 사치를 부린 차를 탄 승려들에 대해 경고했다. 몇 년전 PD수첩에 방영된 강남의 부자교회에 대한 고급 외제 승용차가 오버랩 된다. 석가는 편안한 왕궁을 뛰쳐나왔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가난을 벗삼았지만 지금은… 종교가 소수의 편에 있을 때에는 바르게 움직이지만 기득권이 되는 순간 부패해 버리는 것은 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면서 침략의 화신으로 변했고, 불교 역시 한국사에서도 그랬다. 나날이 반성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신자들에겐 반성을 강요하지만 자신은 반성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다. 예수도 그러지 않았던가. 저들(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의 말은 들을 지라도 저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 원철 스님 말처럼 현대인들이 출가하기에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말 장난 삼아 몸(身)출가가 아닌 마음(心) 출가라고 하고픈 심정이다. 일신우일신 처럼 하루하루 자신을 돌아보아 끊임없이 반성하고 낮아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누구처럼 일신우일신 국가가 부여한 폭력과 기무사가 민간인을 사찰하는 그런 일신우일신은 과거 독재정권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서는 안될 말이다. 꼬랑지. “새벽에는 신선들이, 오전에는 사람들이, 오후에는 짐승들이, 밤에는 귀신들이 먹는 시간이다(174쪽)”를 보면서 다이어트를 작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글귀가 아닌가 생각한다. 밤에 먹는 음식은 저승사자가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오래 살려면 밤에 먹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24시간이 훤히 밝히는 사회에 야식의 유혹을 피하기란 어렵다. 불어나는 뱃살을 볼 때마다 저승사자가 튕기는 주판알 소리가 들린다. 얼마 남지 않은 주판알 소리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