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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이 좋은 건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어서다. 용기라기 보다는 객기일 확률이 |
| 이 책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절대 읽지 말기를 당부한다. 왜냐하면 주인공 '도련님' 의 특유한 냉소와 희소가, 읽는 이를 주위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도련님' 은 작가 나쯔메의 쉬운 문장력에 위트와 재치까지 어우려진 그야말로, '재미난' 책이다. 하지만 그런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련님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와 병폐 파헤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순수한' 책이기도 하다. 작가는 덤벙대고 즉흥적인 도련님이지만 그런 미숙함이 오히려 논리적이고 꼼꼼한 인물들보다 훨씬 순진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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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기의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를 급격하게 헤쳐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은 이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경직된 유교사상의 틀에서 탈출하여,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조일전쟁>의 책에서 도쿠가와 막부를 언급하기를 ‘공자 왈 맹자 왈’만 부르짖는 성리학을 사회적 체제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조선이 나약해진 원인이었던, 신분사회와 관료주의의 그늘에 그들도 사로잡히게 되었고,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고 나와 있었는데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890년대의 일본 사회에서의 하녀 기요와 시골의 중학교를 통해서 그 당시에도 쉬이 뿌리 뽑히지 않고 있는 신분사회와 관료주의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가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모든 조직이 가지고 있는 병폐 중의 하나인 관료주의 조직의 어두운 면이었다. |
| 나는 신문이나 뉴스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봐도 별 뾰족한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소식들만 들린다. 민생 현안을 의논해야 하는 국회에서는 서로 깎아내리기만을 반복하고, 실업자는 갈수록 늘어가고, 카드빚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제 더이상 놀랄일도 아닌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간혹 신문에서 부조리하고 부패한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설을 보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나뿐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비뚫어진 세상에 쓴소리를 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더 신랄한 비판을 늘어놓는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다. 처음에 그저 유명한 작가의 문학작품정도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책은 기대이상이었다. 도련님은 말 그대로 세상물정 모르는 말썽꾸러기다. 2층에서 뛰어내리고, 칼로 손을 베고, 아프신 부모님앞에서 덤블링을 하고, 제멋대로인 사고뭉치다. 이런 도련님이 어찌어찌해서 선생님이 되어, 한 지방학교에 부임을 하게 된다. 아직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도련님은, 부임 첫날부터 팁을 안준다고 막대하는 여관주인을 만나 점점 세상에 대해 깨달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잘대해주는 교감 빨강셔츠와 미술선생 알랑쇠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을 나무라는 수학선생 멧돼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멧돼지를 통해 빨강셔츠와 알랑쇠의 비리를 알게 되고,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도련님은 이렇게 말한다. "돈과 권력, 논리로써 사람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경, 대학 교수가 사람들의 호감을 가장 많이 사야만 한다. 중학교 교감 정도의 논법에 어떻게 내 마음이 움직인단 말인가. 사람은 좋고 싫음의 감정에 움직이는 존재다. 논리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악하고 모질어야지만 성공할 수 있는 듯하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솔직하고 순진하면, 모두들 '샌님'이나 '순둥이'라고 놀리며 속이고 무시하기 일쑤다.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 비웃음을 사는 세상, 비열하고 악한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 아닐까.. 결국 도련님은 멧돼지와 함께, 빨강셔츠와 알랑쇠를 혼내주고, 결국 정의가 승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은 어떨 지 모르지만,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부패한 세상을 꼬집고, 힘없는 약한 사람이 결국엔 승리한다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번, 그 도련님이 될 수 없을까? 그런 꿈을 꿔본다.도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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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세키의 소설들 중 가장 대중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꽤 유쾌하고 작은 소극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주었던 바, 지식인의 고뇌, 현대적 삶의 쓸쓸함, 정적인 서술과 표현 속에 담긴 감정의 섬세한 포착 등은 보여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전혀 소세키스럽지 않다. 집중해 읽으면 두 세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냥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합리적이며 억지스러운 선생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있으나, 나는 도리어 '도쿄와 지방 사이의 차별'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러한 지역 차별에 대해서는 패트릭 스미스의 '일본의 재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독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시간 안에 나쓰메 소세키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하진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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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이라는 말은 여러가지 느낌을 준다. 지체 높은 양반의 자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철부지 어린애 같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문학작품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다고 본다. 책을 선택하는 첫번 째 기준이기도 하지만, 막상 책을 읽은 후에도 제목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해 주는 부담을 주기도 한다. 어떤 책은 정말 제목과 내용이 제대로 일치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책을 다 읽고, 책에 대한 평론이나 다른 이들의 리뷰를 몇 번이고 읽어도 당최 책의 제목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수없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럴 때 마다 '내가 도대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책은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제목과 내용이 아주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작품이다. '도련님'이라는 느낌의 단어가 주인공의 모습과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도련님이라는 말 앞에는 '철부지'라는 말이 생략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도련님이라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투정을 다 부리며 아주 곱게 자라야 했겠지만, 이 책의 도련님은 실상 그렇지가 않다. 어린시절부터 부모는 물론 형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고 자란 거의 천덕꾸러기에 가깝다. 그런데다 성격까지 고지식해서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며, 황당한 사고를 쳐서 주위 사람들의 질타를 받는 경우도 매우 잦다. 다행히 심성 자체가 비뚤어지지 않았기때문에 그가 저지른 사고들이 밉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귀여운 사고뭉치 정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주위에 그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평생을 집의 하녀로 일했던 기요라는 할머니 한 명이다. 기요는 도련님에게 엄마보다 더한 정신적 고향과 같은 존재라고 해도 무방하다.
부모님의 죽음이후 하나 뿐이었던 혈육, 형과도 의절을 한 채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주인공은 학교 졸업후 우연히 찾아온 중학교 수학선생님의 자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특별한 사명감이라던가, 애정은 결코 찾아볼수가 없다. 단지 40엔이라는 박봉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 학생들은 귀찮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 책이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대해 깊은 감동과 존경을 불러일으킬수 없는 이유이다. 오히려 선생님과 학교라는 권력의 병폐에 대해 온갖 조소를 날리고 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도련님을 풍자성이 강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외딴 시골 중학교이지만, 그 곳에는 이미 완벽한 조직이 짜여져 있다. 물론 그 조직은 자신의 기득권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외부인의 기웃거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관료형으로 주위의 눈치를 보기에 바뿐 너구리 교장과, 부폐의 원흉이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빨간셔츠 교감. 그런 교감의 편에 서서 전형적인 아부형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미술선생 알랑쇠. 그나마 정상에 가까운 수학선생 멧돼지 만이 주인공과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물론 그것도 많은 우여곡절 끝에 터득한 상처가득한 동지애 덕뿐이다. 주인공에게 닥친 난관은 선생님이라는 기득권 세력만이 아니다. 그 곳에는 학생들이라는 전혀 학생같지 않는 무서운 점조직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기존의 선생 집단과 무언의 협력관계에 놓여있는 동조세력이었다. 세로운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한 것은 물론, 심지어는 선생님 길들이기라는 힘자랑까지 펼치게 된다.
나쓰메 소세키는 권력의 부폐와 남용이라는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시골학교와 신출내기 선생인 도련님을 내세웠다. 그 덕에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겁기는 커녕 잔잔한 일상에서 오는 싱거운 웃음을 연상케 한다. 참을수 없이 터지는 폭소가 아닌 , 배시시 흘러나오는 작은 웃음이기에 그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의도가 더욱 예리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고지식한 성격으로 타인의 시선에 둔감하고 호불호가 너무도 명확하기에, 주인공은 주변인들과 쉽게 융화될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모습이며, 그들이 항상 갈등하는 원론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섞여서 흘러간다면 어렵지 않게 남들이 가는 만큼은 나아갈 수 있겠지만, 인간으로서 느끼고 책임져야할 양심과 도덕성에 생기는 상처는 자신이 감수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른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으며, 양심에 난 상처가 더이상 아픔이 아닌 강한 내성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덕성과 양심과 같은 말들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할 것이다.
약간의 어리숙함과 고집스러움. 자신만을 생각하는 배타적인 성격의 도련님은 혼탁한 사회를 개혁할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결코 불의에 타협하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악인 또한 아니다.오로지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 이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갈수 있는 해법을 찾아볼수도 있을 것 같다. 도련님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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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구리, 빨간 내복... 한 번쯤은 누군가의 별명을 지어 놓고 즐거워 했던 적이 있다면 이 엉뚱한 도련님의 발상을 무릎 치면 읽지 않았을까? 조그마한 일에도 흥분을 하고 또 금방 잊어 버리는 도련님의 모습은 읽는 내내 내 모습과도 같아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세키의 작품에서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엉뚱한 발상과 더불어 깊은 사색적인 문구는 이 작품에서도 그 매력을 잃지 않고 한층 더 유 하게 그래서 더 깊이 파고드는 세련됨을 구사했던 거 같다.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장 소설이기 보다는 도련님이 가지고 있는 정의로운 활약상이 부패하고 나태한 사회에 스스로를 위로 하며 한 쪽 눈을 감고 살았던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생활 지침서가 아닐까 싶다. 현실을 알아 가지만 비굴하지 마라, 뒤로 물러 서지 마라... 백 년전의 도련님은 오늘의 우리에게 말한다. 엉뚱함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 엉뚱함 속에 지닌 순수함을 지키라고. 덤벙거리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그 속에 순수함만은 잊지 말라고. 소세키의 소설은 도련님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 한다. 담백하게 살라고. 담백함 속에 정신의 바쁨은 잃지 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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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경에서 태어난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은 어머니의 죽음 뒤 유모의 애정과 관심 속에 성장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형과 이별하여 한 명의 성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도련님은 시골의 한 중학교에서 사회와 만난다.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사회의 부조리와의 만남은 순응하고 기존체제에 합류하는 것이 아닌 싸움을 일으킨다. 그 과정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도련님』을 읽고 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주인공을 너무 순수하다거나 바보 같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렇다, 주인공은 언뜻 보아도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는 어리석어 보이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의 생각에 반기를 든다. 아니 우리의 생각을 뒤집게 만든다. 우리들은 편안한 삶을 위해, 현실에 안주하려들고 대충대충 타협하며 사려한다.
우스갯소리로 영화「올드보이」에 나오는 오대수가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 라는 말처럼 우리들은 대충대충 살고있다. 여기서 대충 대충이라는 말은 자신의 일에 대충이 아닌, 사회에 대충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 속에 한 명으로 있고자 한다. 자신의 소리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 도련님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소리를 강하게 낸다. 나의 비약이 너무 심할진 몰라도 말이다. [인상깊은구절] 착한사람이 오히려 나쁜사람이고, 나쁜사람이 좋은 사람이다?!(정확히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이런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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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인 도련님은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성장 후 수학 교사로 취직하여 학교에서 겪는 이야기이다. 도쿄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시골 중학교로 간 주인공은 기성 사회를 접하게 된다. 그러니까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신분, 또 교장, 교감 등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인물들과의 대면, 즉 주인공이 기성 사회와 만나며 또 진입되기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장난꾸러기 도련님에서 기성세대가 되어야 하는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작가의 시각이나 문체가 풍자와 해학이 가득 차 있어 결코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성사회 진입하기의 과제에는 현실 안주라든가 혹은 좌절과 같은 결말은 없고, 그저 사진처럼, 한 컷만 담은 동화같은 이야기다.
사실 기성사회라는 것이 어디나 다 그렇고, 또 적응하면서 겪는 부조화나 갈등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이나 일본은 일상 속에 권위주의라는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어 이 소설은 우리에게 더욱 깊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의 보편성이라면 하녀 기요라는 인물, 그리고 전승기념일이라던지, 온천욕, 음식 등에서 나타나는 일본적 특색도 이야기 중간 중간 엿볼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의 말이나 생각을 통해 드러나는 해학성들. 이를테면 동료 교사들의 별명을 붙이고 부르는 것,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선 반복을 통해 정말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간접표현,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어법 등에서 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번역시 드러나는 일본어의 특성인지, 아니면 일본 문학에 있어서의 공통요소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그 재치는 하루키의 소설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그리고 꼭 빼 놓아선 안될 것들. 일본어 사투리나 언어를 이용한 유희 등은 일본어를 모르는 내가 봐도 이 소설 번역에 중요한 요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무리없이 잘 된 번역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삽화도 꼭 맘에 든다. [인상깊은구절] 교장은 회중시계를 꺼내 보고서는 차차 얘기할 생각이지만, 우선 대강 형편을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교육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장황한 설교를 해댔다. 나는 물론 건성으로 경청하고 있었지만, 듣다보니 여기가 보통은 넘는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장의 말대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 같은 덤벙꾼에게 학생의 모범이 되라고 하질 않나,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는 본보기가 되라는 둥 학문 이외에 개인적인 덕을 끼치지 않으면 교육자가 되지 못한다는 둥 엄청난 요구를 무턱대고 한다. ......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도저히 교장선생님 말씀대로는 할 수 없으니 임명장을 반환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교장은 너구리 같은 눈을 깜빡거리며 내 얼굴을 보고 있다가 한다는 말이, 지금 한 말은 희망사항이며 당신이 그대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 정도까지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았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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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후기에 보면 도련님을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중에서도 손꼽이는 걸작이라 했는데 오히려 내게는 "마음" 이나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보다는 그 감동이나 글맛이 뛰어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작품들보다 뒤쳐진다거나 하는 느낌보다 오히려 이 도련님을 통해서 소세키는 다양한 인물들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부류를 나누고
소세키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제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도련님은 일종의 성장소설로 어렸을적부터 개구지지만 정의롭고 솔직한 도련님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직설적이고 살짝은 건방져보이는 도련님의 모습을 밉살스럽지 않게 전개해 나간다.
사회에 타협하기보다는 약자에게 머물러 있는 도련님의 마음이 예쁘면서도
정의로움이 어떻게 비겁함에 승리해가는지를 가볍게 일갈해버리는 작품. [인상깊은구절] 잘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작자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 때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거짓으로 사죄하니, 용서도 분명히 가짜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정말 사죄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때까지 두들겨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