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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그림에 담긴 핏빛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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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학고재에서 나왔던 책이 새롭게 보리에서 선보였다. 부제는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언제부턴가 4.3을 제주와 함께 떠올려 보지 않았다. 요즘처럼 봄꽃이 만개한 철, 제주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광에 밝은 햇살이 마음을 간질이는 계절 속에 있겠다, 그런 이미지로만 제주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으로 정통으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핏빛 제주.   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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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학고재에서 나왔던 책이 새롭게 보리에서 선보였다. 부제는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언제부턴가 4.3을 제주와 함께 떠올려 보지 않았다. 요즘처럼 봄꽃이 만개한 철, 제주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광에 밝은 햇살이 마음을 간질이는 계절 속에 있겠다, 그런 이미지로만 제주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으로 정통으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핏빛 제주.

 

국민학교 때던가, 중학교 때던가. 4.3이란 단어가 수업시간에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실마다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아이들이 흡사 도깨비처럼 생긴 빨갱이를 그려대던 그 시절. 그때 이해하기로는 북으로 넘어가지 않은 빨갱이 잔당들이 제주도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고, 그 중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죄수들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4.3은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그래서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던 것이다.

 

대학 시절 기숙사 같은 방에 고 씨 성을 가진 제주도 후배가 살았다. "고와요~"라는 말을 자주 썼던 그 후배가 내가 만난 첫 제주도 사람이고, 다시금 4.3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리는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간혹 만나는 오 씨 성의 어떤 청년도 제주도 사람이다. 그러나 그와도 4.3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4.3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다만 선뜻 꺼내지 못했으리라 지금에야 속을 짐작해 본다. 겪어보지 못한 젊은 그들에게조차 4.3은 눈 감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풍경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오랜 고난의 역사, 마치 거대한 감옥처럼도 느껴지는 섬이 당해온 수탈의 역사, 그리고 지난한 항쟁의 역사. 제주도. 

 

남로당이 주동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대다수는 그저 '살기 좋은 세상'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제주도'를 원했던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남과 여, 노와 소가 달리 무엇을 바랐을까! 찢기고 베이고 밟히며 그처럼 간절히 바랐던 것이 뭐 다른 것이었을까! 그 고립된 곳에서 민초들이 겪었을 공포와 아픔이 강요배의 그림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요배는 소위 뭔지 모르게 아름답지만 솔직히는 난해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아플 정도로 직설적이다. <始原>에서 할머니와 어린아이는 뒤쪽에 선 나무와 구별되지 않게 닮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태어남과 죽음의 슬픔, 그러나 그 끈의 간단없음에 대한 경외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죽 넘기면 검은 그림 속으로 핏빛이 스며있음이 절절히 다가온다.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숨죽여 살아왔는가가 아우성으로 흔들린다.

 

모든 집단학살은 철저히 정치적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빛좋은 개살구이고, 민초들은 그저 아이들 크는 것 바라보며 평화로이 살고자 할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울컥거릴 때 많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숱한 원통한 넋들과 살아남은 제주도 사람들의 깊은 아픔을 그저 녹진녹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4.3. 우리 모두에게서 잊히지 말아야겠다.

 

 

어떤 의미로건 덮어두어야 할 과거란, 없다.

p****1 2008.04.07. 신고 공감 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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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동백꽃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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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한 권의 책 보다 하나의 그림에서 느끼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광주항재의 사진을 보면서 그리고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의 그림을 보면서 시시콜콜 책으로 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역사의 아픔과 눈물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또 어떠한가 영화 우리학교를 보면서 나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잊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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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한 권의 책 보다 하나의 그림에서 느끼고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광주항재의 사진을 보면서 그리고 강덕경 할머니의 빼앗긴 순정의 그림을 보면서 시시콜콜 책으로 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역사의 아픔과 눈물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또 어떠한가 영화 우리학교를 보면서 나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잊고 지내다가도 4월이 되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선.4.3항쟁이란 단어가 떠오는다. 그러나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어떤 책을 읽어야 바로 알 수 있는지도 모른 채 늘 그렇게 부산스런 마음으로 4월의 봄을 맞았던 것 같다.

 

한권의 책 보다 하나의 그림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때로는 이론으로 무장한 글들 보다 살아 있는 증언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육성의 목소리가 더 현실적으로 역사에 다가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점에서 동백꽃지다는 나에게 아주 알맞는 눈높이 책이 되어 주었다.

 

살아있는 증언을 바탕으로 나온 강요배화가의 그림 하나하나는 그것이 상상으로 그려질 수 마는 없는 그림들이란 것을 느끼게 해 주었고.

길지 않는 증언자들의 말 속에선 4.3항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가 죽을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4.3항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고 우리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 어렵지 않게 그러나 자세히 알 수 있게 해 준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쓴 강요배화가도, 추천사를 쓰신 서경식교수도 4.3항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그러나 모른다고 더이상 외면해서도 안될거란 마음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추천사를 쓰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4.3항쟁을 잘 모른다 그런데 이 단어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 온 순간 부터 숙제처럼 알고 싶었던 내용들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이제 시작점을 만들어 주었다. 4.3이 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는지 그와 관련된 현기영님의 소설도 읽어 봐야겠고 조금 더 구체적인 이론서도 읽어 볼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되고 있는 듯 하다.

 

동백꽃지다는 그림과 글 모두가 4.3항쟁이라는 문제에 내가 다가 갈 수 있게 길을 트어 놓은 느낌을 받았다

w*******i 2008.04.01.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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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이야기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이야기 " 내용보기
학창 시절의 역사 수업은 근현대사라는 이름으로 배우지만 현대사까지 가게 된 적은 드물었다.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는 자세히 배우지만, 해방의 기쁨과 그 뒤 찾아온 좌절과 극복의 역사는 제대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있어봤자 다 건너 뛰고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쳤노라... 정도의 이야기?   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 전공자인 내게도 낯선 현대사. 4학년 1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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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역사 수업은 근현대사라는 이름으로 배우지만 현대사까지 가게 된 적은 드물었다. 일제시대 수탈의 역사는 자세히 배우지만, 해방의 기쁨과 그 뒤 찾아온 좌절과 극복의 역사는 제대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있어봤자 다 건너 뛰고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쳤노라... 정도의 이야기?

 

대학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 전공자인 내게도 낯선 현대사. 4학년 1학기 때 겨우 현대사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교생 실습과 맞물려 역시나 한국 전쟁 정도에서 그치고 만 이야기.  제주 4.3 사건을 언제 처음 들어보았는지 기억이 아득하다. 교과서를 통해서 본 기억은 없다. 설령 적혀 있었다 할지라도 진도가 거기에 이르러 본 적이 없다.  누구를 통해서 들어본 기억도 없다. 내가 책을 찾아서 만나게 된 충격적인 사건. 한국전쟁을 공부할 때 보도연맹 사건에 경악한 것과 마찬가지의 집단 학살의 흔적.

 

그렇게 제주4.3 항쟁은, 부러 찾아 공부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전체 도민 열명 중 한 명 꼴로 죽어 나간 사건인데, 그토록 많은 피흘림을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그 억울함을 토로할 수 없었던 서럽고 아픈 이야기. 그래서 더 쉬쉬하고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  그 제주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 98년도에 학고재에서 출간되었던 동명 책이 보리에서 재출간되면서 강요배 화백의 그림에 생존자들의 육성이 덧입혀졌다.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반도와 가장 이국적인 풍경을 갖고 있는 제주도. 고려 시대 몽골의 침략기 때부터 수탈의 역사는 시작되었지만, 그때마다 항쟁의 역사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  밭이 99%를 차지하여 땅이 척박하고 소출이 적은 까닭인지, 육지에 비해서 계급 갈등의 소지가 적은 곳이 이곳 제주도라고 한다. 때문에 혈연 공동체적 성격도 유난히 강하다 한다.  이런 사회 경제적 요인은 도민들이 쉽게 단결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1948년 4.3 사건의 발달은 한 해 전 1947년 3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삼일절 기념 행사에서 경찰이 시민을 향해 발포했던 것.  이 사건으로 주민 6명이 죽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10일에 관민 총파업이 벌어졌는데 미 군정의 대응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쪽으로 몰고 갔다. 당시 경찰청장 조병옥은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이 불온하기 때문에 싹 쓸어버릴 수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육지에서 응원 경찰이 속속 도착했고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도 대거 투입되었다.  검거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치장은 차고 넘쳐 더 이상 수용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경찰과 주민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고문, 테러, 강간, 금품 갈취가 빈번히 일어났고 그 중심에는 서청 단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히 정치 깡패로 동원된 서청의 테러 탓이었을까? 그들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만행은 물론 용서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그들의 뒤에 또 누가 있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48년 5월 10일로 내정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 그 선거를 꼭 장악하겠노라 결심한 이승만. 함께 손 잡은 미 군정. 모두 다 진정한 배후이자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한 서청 단원 출신은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

 

일년에 걸친 탄압은 1948년 제주도민의 4.3 항쟁으로 맞불이 붙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가족이 입산했다는 것이 들키는 순간 부녀자건 노인이건 상관 없이 처형이 이루어졌고 이들에게 붙여진 연좌제는 그 후 수십 년간 이들의 발목을 붙잡으며 족쇄가 되어버렸다. 물론, 무장대가 토벌대에게 살의를 보인 예도 쉽게 눈에 띈다. 비율로 따진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테지만, 피가 피를 부르는 증오와 분노의 살풀이가 거듭 이루어졌다.

 


일년 여를 버티다가 무장대의 총대장 이덕구는 해산을 명령한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 이상의 죽음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산하였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어 자살을 하기도 했다. 마치 꽃이 시들지 않고 한꺼번에 저버리는 동백꽃처럼.

 


해방이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를 처단하고 새로운 조국에서의 새 삶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새롭게 들어설 정부의 주인이 되고자 제 나라 국민들을 먼저 핍박하고, 좌익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고 등을 돌리면서 친일파를 껴안는 그런 몰상식을 넘어선 만행이 자행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전두환도 박정희도 너무 미운 상대이지만, 첫 단추를 제대로 잘못 채운 점에 있어서 이승만이 가장 밉다. (모 대안 교과서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라고......;;;;)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진상 규명 특별법이 통과하고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듣기까지 6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도착했다.  (18대 국회에서 제주 4.3 특별법을 폐기할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던데 제발 그냥 소문이길...;;;;;)  찢기고 패어진 상처는 치유가 되어야 한다.  새살이 돋을 수 있게 약도 발라주고 새 붕대로 동여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팠다는 것을... 지금도 많이 아프다는 것을 함께 알아주어야 한다.  때로, '무지' 자체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책이, 그때 희생된 사람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역할만 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 피흘림을 넘어서 화합과 상생의 길을 가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진한 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작업해 가야 할 공동의 목표이기도 하다.  더 이상 '몰랐었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도록.

YES마니아 : 플래티넘 e*****a 2008.05.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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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승화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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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요, 제주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노랫말이 주는 제주도의 느낌은 평화롭고 한적한 휴식의 공간이고, 세상의 짐을 풀어버릴 수 있는 안식의 공간처럼 들린다.우리 가족이 찾은 제주도의 5월은 너무도 푸르르고 맑아 모두 눈에 담기조차 아까웠다. 깊은 속까지 제 모습을 가리지 않고 드러낸 바다며, 온통 검지만 듬성듬 채우지 못한 돌이며, 낮게 솟은 작은 오름들의 모습이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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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요, 제주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노랫말이 주는 제주도의 느낌은 평화롭고 한적한 휴식의 공간이고, 세상의 짐을 풀어버릴 수 있는 안식의 공간처럼 들린다.

우리 가족이 찾은 제주도의 5월은 너무도 푸르르고 맑아 모두 눈에 담기조차 아까웠다. 깊은 속까지 제 모습을 가리지 않고 드러낸 바다며, 온통 검지만 듬성듬 채우지 못한 돌이며, 낮게 솟은 작은 오름들의 모습이 낯설고도 재미있었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빠져 휴가 내내 행복했고, 돌아온 후로도 얼마동안은 그 매혹적인 풍경이 생각나 흐뭇했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tv에서 다시 만난 제주는 내가 보지 못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아픔과 상처가 가득한 곳으로 잊고 있었던 과거였다.

제주의 4.3! 들춰내봤자 가슴만 아프다고 생각해 대충대충 보고 넘겼다. 그런데, 그 후로 내내 미안한 죄책감이 드는 것은 왜인지...다시 꺼내 보아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재촉하곤 했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이 책, 강요배님의 [동백꽃 지다]이다.

나는 그림도 무척 좋아한다. 한 때는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 했던 사람으로서 이 책은 너무나 욕심이 났다. 책을 받아들고 기쁨에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다.
그러나 책을 펼쳐든 순간. 갑자기 밀려드는 슬픔에 변덕스런 마음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글을 보지않아도 알 수 있다.
그림의 선 하나하나가 고통 받던 제주도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움푹 패인 볼, 비쩍 마른 몸, 죽은 엄마의 젖을 문 아이, 철창 뒤에 갇힌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의 눈빛, 흙더미 속에 파묻힌 유골...숨이 턱 막히며 할 말도 할 생각도 잃었다.

다시 책을 덮었다. 그냥 그렇게 볼 책이 아니었다. 비장함마저 들었다. 43명의 증인들의 생생한 사건에 대한 증언들은 참혹하고 억울했던 당시의 상황들을 짐작케 해준다.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이 들만큼 희생의 규모가 컸던 4.3사건. 무장대와 토벌대로 나뉘어 주민을 집단으로 학살하다니 정치가 무언지 이데올로기가 무언지, 한심하기만하다.

책으로만 보았을 뿐인데도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게 아픈데, 작가는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그가 그린 그림 마다 그의 아픔이 묻어나온다. 역사화첩이라 불러야할까? 역사를 바로 보고 현재를 바로 잡고 미래를 바르게 만들어야 하기에 이러한 책은 의미가 깊다.

추천자 서경식교수의 추천사를 인용하자면,
'4.3은 알지 못해도 되는 사건이 아니며 알 필요가 없는 사건도 아니다. 4.3은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켜서 배우며 고쳐갈 기회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두가 꼭 한 번은 봐주기를 바란다.

g******a 2008.05.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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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그 날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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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항쟁이나 의거라고 불리우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 어느 하나 민중의 힘이 보태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집단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적인 거대하고 복잡한 명목은 몇사람의 선동자에 의해서 명명지어질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이념이 아닌 현실적인 삶의 이유로 항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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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항쟁이나 의거라고 불리우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 어느 하나 민중의 힘이 보태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집단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적인 거대하고 복잡한 명목은 몇사람의 선동자에 의해서 명명지어질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이념이 아닌 현실적인 삶의 이유로 항거하게 된다.

 

현재보다 조금만 더 나은 삶을 꿈꾸면서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항거를 한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가슴에 멍이 들 때가 많다.

 

[동백꽃 지다..]제목만으로도 붉은 동백꽃 한 잎 한 잎이 떨어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선혈이 뿌려졌을까 생각해게 만든다. 강요배라는 인물도 내게는 익숙하지 않고 제주의 4.3항쟁이라는 것도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굳이 가슴 속에 비장함을 품고 있지 않더라도 뚜렷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고 강요배가 그린 제주의 4.3사건에 대한 그림을 보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생생한 34명의 증언을 통해서 그려진 그림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절규이면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남로당이 주동이 되었다고는 하나 참여한 대다수의 사람이 이념을 떠나서 조금만 더 나은 삶을 꿈꾸었던 이들에게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익명의 섬처럼 제주도라는 섬에 갇혀 많은 살상으로 얼룩진 이들의 모습은 곳곳에 베어 있다. 젖먹이를 엎고 총에 맞은 여인네는 숨을 거두고 관통한 총알에 아이는 어깨쭉지를 날려버리는가 하면, 죽은 어미의 빈젖을 물고 이내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 이승과 저승의 한 가운데 놓인 마냥 넋이 나간 모습으로 쳐다보는 여인네, 새벽을 가르는 총소리와 화염에 뒤덮인 아비규환에서 목놓아 울면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천명'에서는 그 암울한 핏빗의 어두운 하늘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다.

 

책의 후반에 실린 제주도의 4.3희생자 지도를 보면 이때의 희생은 어디 한곳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제주도라는 섬의 전역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때의 이들에게 피할 곳은 바다 이외에는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의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 전에 땅속에 묻힌 수많은 혼령들의 흙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들은 분명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 멀지도 않은 우리의 과거를 통해서 지금도 억울하고 비참했던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차가운 흙속에서 암울하게 묻혀있는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것이 현재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진심이다.

c******u 2008.04.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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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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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4.3의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6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행사가 열렸다. 대중가수들이 시청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방송국에서도 수천명을 모아 열린 음악회를 공개녹화하였다. 그렇게 60주년을 맞이하는 4.3은 활짝 피어난 벚꽃과 유채꽃들을 배경으로 하여 화려하게 기념되고 있다. 이십여년 전의 사월 벚꽃은 거리에 흩뿌려진 최루가스에 속절없이 져버렸지만 4.3 60주년을 기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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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4.3의 60주년이 되는 해이고, 6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행사가 열렸다. 대중가수들이 시청광장에서 공연을 하고, 방송국에서도 수천명을 모아 열린 음악회를 공개녹화하였다. 그렇게 60주년을 맞이하는 4.3은 활짝 피어난 벚꽃과 유채꽃들을 배경으로 하여 화려하게 기념되고 있다. 이십여년 전의 사월 벚꽃은 거리에 흩뿌려진 최루가스에 속절없이 져버렸지만 4.3 60주년을 기념하는 2008년에 피어난 벚꽃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낭만을 흩뿌려대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내 눈에는 그 어디에도 4.3은 보이지 않는다.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것도, 진상 규명도 없이 단지 '60주년'만 남아있는 것 같다.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4.3은 규명되었고, 희생된 도민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유해발굴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고... 라는 말로 끝맺고 싶지만 2008년 현재, 4.3은 계속되고 있다,라는 말을 내뱉지 않을수가 없다.

당신은 4.3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평을 쓴다며 앉아서 이렇게 에둘러가는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내 마음도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책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4.3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물론 나 역시 4.3을 모른다. 이십여년 전쯤, 부모님께 4.3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모르민 속솜행 이시라'(모르면 잠자코 있어라)는 말 한마디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북에서 거대자본상인의 딸로 자라 아쉬운 것 없이 지내다 48년 제주에 들어와 6.25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갖은 고생을 하셨던 어머니는 4.3에 대해 이야기하기 꺼려했다. 그때만 해도 4.3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빨갱이짓이고 간첩죄로 몰릴 수도 있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이북출신의 외가집이 우연찮게도 48년에 입도(入島)하였다는 것이 내게는 섬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는 서북청년단이 떠올라버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나는 4.3에 대해 모른다.
아니, 그래 역사적인 4.3에 대해, 그러니까 4.3의 발단과 과정, 증언, 유적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4.3에 대해 알고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제주도 사람들은 가끔 '어디가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멱살잡고 크게 싸우거나 사기치면 안된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한다. 그만큼 서로가 알고보면 먼친척이거나 한다리 건너면 친구이거나 이웃이거나 하다는 뜻이다. 제주말로 '괸당'(친인척)으로 밀접한 관계형성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대문도 없이 이웃과 왕래하며 지내던 공동체가 60년전에는 어떠하였겠는가. 온나라가 좌우로 나뉘어 혈투를 벌일때 제주는 그런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4.3사건으로 인해 수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찰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산사람과 내통했다는 혐의에서 못벗어나 총살당했고, 오로지 살기위해 산중턱의 깊은 동굴에 숨어있다 발각되면 사살당해야만 했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겨우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촌사람들에게 소개령을 내려 해안으로 내몰았는데 삶의 터전을 두고 무작정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은 또 빨갱이로 내몰려 죽임을 당했다. 4.3은 말 그대로 제노사이드였던 것이다.

그런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바로 당신의 무관심과 일부 편향주의자들의 역사왜곡으로 4.3의 영령들은 다시 한번 죽임을 당하고, 유족들은 여전히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4.3을 단순히 남로당의 지령으로 인한 빨갱이들의 반란사건으로 규정하는 뉴라이트대안교과서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새정부 인수위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지금 현재 4.3 위원회 폐지를 유보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여전히 4.3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제주도민을 옭아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백꽃 지다

그저 마음이 답답할뿐이다. 처음, 멋모르고 4.3 유적지 순례를 갔었던 때의 기억이 난다. 큰넓궤라는 곳을 들어가며 두 팔과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깜깜한 동굴 몇미터를 지나면 공터가 나오고,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또 공터가 나오던 그곳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웠는지. 마을사람 절반 이상이 끌려가면서 띄엄띄엄 신발을 떨어뜨려 행적을 표시해놨기에 살아남은 가족들이 겨우 찾아 먼길을 갔더니 웅덩이 하나에 수십명이 몰살당해 있더라는 산 중턱이 숲길은 또 얼마나 멀고 힘들었는지. 커다란 마을 하나가 완전히 불타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의 수풀은 역사의 아픔을 눌러 세월의 흐름만을 보여줘 얼마나 쓸쓸하던지.
서평을 써보기 위해 책을 뒤적거려보지만 다시 또 마음이 아플뿐이다. 증언들과 함축적으로 표현된 강요배 화백의 그림들이 역사적인 사실 안에 담겨있는 그 깊은 고통과 슬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3을 겪지 않고 말로만 전해들은 나조차 이렇게 답답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 시대를 지나온 우리 부모님, 부모님의 부모님들은 어떠하겠는가.

나는 서경식 선생의 추천사를 읽으며 또 한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여든을 넘긴 재일 조선인 작가 김석범은 지난 해 제주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초대를 받고 단상에 올랐지만 '일본에서 비행기로 제주도에 왔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이 활주로 밑에 얼마나 많은 시신들이 묻혀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것을 생각하면...'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대로 단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고 한다. 서경식 선생의 말처럼 나 역시 그 눈물을 모른다. 4.3의 역사적인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나는 진정 4.3에 대해 모른다.

"바다 가운데 일 점 산으로 솟은 탐라, 고려 시대 몽골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뒤로 탐라는 육지로부터 끊임없이 수탈을 당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착취와 탄압에 맞서 싸워 온 탐라 사람들의 전통이 바로 4.3 항쟁의 뿌리이다" (13)
4.3은 지역에 한정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삼별초 전투(18), 왜구퇴치(20), 이재수 난(22), 잠녀 반일항쟁(24)의 역사가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해방이후 자율적인 사회운동체를 조직하고 교육에 힘썼던 제주도민의 공동체는 4.3의 제노사이드로 무너져갔다. 낮에는 해안으로 밤에는 산으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내몰렸던 제주도민의 십분의 일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나는 십년전에 이미 98년에 출판되었던 동백꽃 지다,를 읽었었지만 그 먹먹한 마음이 여전하다.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그것을 한 장 한 장 강렬한 그림으로 표현해낸 강요배 화백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아주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동백꽃 지다'의 그림과 증언들은 그냥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거나 4.3에 대한 책들 중 한 권으로 분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4.3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난 후 마음으로 동백꽃 지다를 봐야만 한다. 얼마나 큰 아픔이 있는지, 섬사람들이 육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성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수탈과 침략의 역사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제주동백은 강렬한 빨간색으로 활짝 피어난다. 그리고 활짝 피어 난 후, 사그라질때는 미련없이 툭, 하고 통꽃으로 떨어져버린다. 해산령을 받은 산사람들은 그렇게 동백꽃처럼 툭,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해마다 제주동백은 다시 강렬한 빨간 꽃을 피워낸다. 그처럼 우리는 4.3의 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외세에 침략당하지 않고, 수탈당하지 않는 민중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하여 진정 평화의 섬,을 이뤄낸다면 미련없이 툭 떨어져 후손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4.3을 모르지만 4.3의 후예로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r***2 2008.04.2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죽은 어미 위에서 젖 빨던 그 아이 잊을 수 없어"
""죽은 어미 위에서 젖 빨던 그 아이 잊을 수 없어"" 내용보기
"죽은 어미 위에서 젖 빨던 그 아이 잊을 수 없어"[서평]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동백꽃 지다>   <제주4.3 60주년을 기념해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가 보리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당사자 34명의 증언을 제주 4.3 전문가 김종민 씨가 정리해서 그림과 함께 생생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0-2"의 역사적인 의미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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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어미 위에서 젖 빨던 그 아이 잊을 수 없어"
[서평]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동백꽃 지다>


 

<제주4.3 60주년을 기념해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가 보리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당사자 34명의 증언을 제주 4.3 전문가 김종민 씨가 정리해서 그림과 함께 생생하게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0-2"의 역사적인 의미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열렸다. 이때 총 의석수는 200석이었으나 2표의 무효로 인해 제헌의회는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출범했다. 이 "-2"라는 숫자는 현대사에서 그리 조명을 받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정체성에 상처가 된다는 점이었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정치인생의 오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 당시에는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동의어였다. 이승만은 현대사에서 '굴종'이라는 선례를 남기며 권력을 누렸다. 자주독립을 위해 가산과 전 인생을 반납한 독립운동가와 그 자제들, 일제에 협조하여 가산을 지키고 권세를 누렸던 친일파와 그 자제들의 운명은 이승만이 미 군정에 굴종하며 친일 세력을 대거 재임용함에 따라 갈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현대사는 '굴종'이라는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재벌의 편법, 탈법이 일반화되고 정치인과 공직자의 일상적인 부패상은 이 '굴종의 현대사'를 더욱 빛내고 있는 셈이다.

제주 북제주 갑ㆍ을 2개 선거구의 무효는 이러한 '굴종'에 이의를 단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이듬해 5월 10일 이 두 개의 상처(?)는 신속하게 다른 '굴종'들로 채워졌다) 이 "-2"라는 역사적 메시지를 던진 죄로 당시 제주 인구 30만 명의 1/10인 약 3만명이 죽었다. (제주 4ㆍ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2003년 통과)) 선거철마다 주요 정당이 제주에서 경선을 시작하는 것은 비단 제주가 국토 하단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선거의 향배를 예측하는 캐스팅보드 역할을 오랫동안 자처한 제주의 민심은 그 기원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 예컨대 17대 대통령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의 전국 투표율은 48.7% 대 26.1%였다. 이 차이는 22.6%로 두 후보 사이에 한 명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들어갈 틈이 있을 정도였다. 제주의 투표율은 어땠을까? 이명박 후보 38.3% 대 정동영 후보 32.4%로 불과 6% 미만의 차이였다. 그나마 정치색이 덜하다는 서울도 53.1% 대 24.4%로 더블스코어 이상의 결과가 나왔던 때다. 제주도의 이 묘한 정치적 균형감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제주 4.3을 말해주는 '세 가지 마음'

 

제주 4.3을 감성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를 관통하는 세 개의 마음이 존재한다. 첫째, 5·10 남한 단독선거가 제주도의 거부로 절름발이가 되자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몹시 격분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9년 1월 12일 열린 국무회의 의결사항은 '제주도 특별소탕경찰대 1,000명 파견에 관한 건'이었는데, 이 문건에서 대통령의 유시 내용은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였다. 그보다 한달 전인 1948년 12월에 서북청년단 총회에 직접 참석해 연설을 하고 서북청년단원들을 제주도로 파견하였고, 그 단원들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볼 때 제주도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제주 4.3 전 영역에 걸쳐 가장 처참한 집단 학살과 초토화 작전이 자행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3개월만인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이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즈음이다. 제주도에 내려온 서북청년단원이 "이승만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는 바와 같이 제주 4.3의 일차적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다.

둘째는 서북청년단의 '증오심'이다. 일명 '서청'으로 불리는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자신들의 터전을 없애버린 세력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품은 서청과 남로당의 적극적인 활동지인 제주도의 만남은 처참한 홀로코스트를 낳았다.

셋째는 제주도민의 공분이다. 제주도는 이승만의 반공국시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본 지역으로 속하는데, 혹자는 제주 4.3이 '빨갱이들의 선동과 주민들의 동조'로 보고 <4.3특별위원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당국의 행태에 공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주도민의 특이한 이력을 살펴야 한다.  

제주도가 척박하고 고립된 땅이라고해서 그 정신마저도 고립된 것은 아니다. 제주는 예부터 최후의 유배지로 꼽혔는데, 유배 온 양반들은 제주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때문에 유난히 제주도에는 유풍과 학식이 생활상에 고루 반영돼 있다. 일례로 국어학자 이기문은 일조각에서 발행한 <속담사전>에서 해방 이후의 중요한 업적으로 <제주도 속담 1,2>(진성기 편저)를 소개하며 사전편찬에 도움받은 바가 적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나 역시 어머니로부터 수십 년 동안 '해태(懈怠)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는데, 이는 '해이하거나 태만하지 말라'는 일반에서는 보기 드문 한자어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늦게 상륙한 이유도 있지만, 제주도민들은 그야말로 해방감을 가장 깊이 맛본 사람들이었다. 이때 남한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친일파에 대한 청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치안과 정책을 수행하였다.

제주 4.3의 남상이 될 만한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지역 곳곳에서 개벽 이래 최대 인파인 3만명 정도가 참여한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였다. 3만명이 운집한 것도 대단하지만 주민 6명이 죽고 8명이 크게 다친 '3.1절 발포 사건' 직후 이에 항의해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ㆍ단체가 파업에 가세한 '민관 총파업'이 제주도민의 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가 서중식 교수는 <동백꽃 지다>(보리)의 부록 논문에서 "제주도는 밭이 99%인데다 땅이 척박하여 소출이 적은 관계로 육지에 비해 계급 갈등의 소지가 미약했고 혈연 공동체적 요소와 사회경제적 성격으로 인해 도민들이 쉽게 단결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고 기록했다. 이 책의 자료2 <제주 4.3항쟁 일지>에 의하면 3.1절 발포 사건 이후 단행된 민관 총파업을 두고 경무부(지금의 경찰청) 최경진 차장이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161쪽) 이는 단선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단지 제주인들은 부패하고 굴종스러운 기득권의 부조리한 정책에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의식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마음들의 충돌은 제주 4.3이라는 필연적인 비극을 만들어낸 동력으로 작용했다.

 


강요배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가 나왔다
 

올해로 제주 4.3 60주년을 맞는다. 그에 걸맞게 다채로운 행사가 제주에서 펼쳐진다. 출판에 업을 두는 사람으로서 나는 강요배 화백의 그림책 <동백꽃 지다>(보리)가 나왔다는 데 대해서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책을 보자마자 밤새 삽화와 증언을 살폈다. 대학시절 익숙하게 보았던 그림들이 한 책으로 묶인 점이 좋고, '제주 4.3전문가 김종민' 씨가 발품을 팔아서 '당사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는 점도 좋다. 이 책은 1998년 학고재에서 낸 <동백꽃 지다>를 다시 낸 것인데, <동백꽃 지다>는 강요백 화백이 1989년부터 3년 동안 '제주 4.3항쟁'을 다룬 그림 50점을 1992년 발표한 전시회의 제목이다.


<머리에 총을 맞고 죽은 어미 위에 엎드려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4.3의 처참함과 제주인의 처절한 생명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기영의 자전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에서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고"라는 말로 제주인의 이 같은 정신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난리통에는 어린아이와 부녀자 등 노약자가 최대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이 없으니 젖이 빈 것은 당연하다. 빈 젖을 빨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아이의 모습과 고개를 숙인 어미의 모습이 처절하게 다가온다>

 

 강요배 화백은 '기행'으로 더 유명한데, 재미있는 예화가 하나 있다. 바람과 풍랑이 잦은 제주도에서도 격렬한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밤에 강요배는 붓과 캔버스만 들고 열 번도 넘게 바다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것은 파도와 비바람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다. 현재 '민족 미술인 협회' 회장과 '제주 4.3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소재는 종이, 펜, 먹, 캔버스를 가리지 않았으며 증언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선택했다. 역시 제주 민중의 일상사와 당시의 처지를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그렸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119쪽의 '젖먹이'와 133쪽의 '빈젖'은 당시의 처참한 일상을 고스란히 설명해 준다. '젖먹이'에 대한 증언은 김석보 씨(조천읍 북촌리)의 1998년 증언에 담겨 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118쪽)

 

제주어에 '속솜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침묵하거나 아주 작게 말하다'는 뜻이다. 나는 제주 4.3이 발발한지 30년, 한 세대 정도 지난 197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4.3이라는 것을 알고 최초로 어머니에게 물었던 게 스무 살이 되었을 때니까 일이 벌어진 지 50년이 지난 때다. 어른들은 그 당시의 일을 입에 담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했고 그것을 내면화했다. 4.3의 기억은 제주 사람들의 일상습관을 바꿔버렸다. 어머니와 이모가 우연히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다. 별로 비밀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속솜하게 말했다. 이 장면이 두고두고 이상했다.

 비단 어머니와 이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제주 4.3에 속솜했다.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자고 열변을 토했던 참여정부도 역시 제주 4.3의 거대한 뿌리는 만지지 못했다. <나의 서양 미술사 순례>를 써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가르쳐준 '재일 조선인 2세'이자 도쿄 케이자이 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인 서경식 씨는 '추천하는 말'에서 "'4.3'은 알지 못해도 되는 사건이 아니며 알 필요가 없는 사건도 아니다. 4.3은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인 것인다. 우리들은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9쪽)라고 말했다. 1987년 대한민국에 절차적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가 실현된 것에 머무른 것처럼 제주 4.3 역시 단지 '특별법'이 통과되었을 뿐 그것의 역사적 의미나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알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4.3 특별위원회 폐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이다. 단지 제주인만의 문제, 피해의식적인 문제, 감성적인 문제, 빨갱이 문제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성숙한 관심으로 세심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환갑이 다 되었으니 '철'이 들 만도 되지 않았나?

d*****7 2008.03.3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벌어진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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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몇 차례 여행을 해본 경험이 있다.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또 이국적인 분위기는 마치 외국에 간 느낌을 주었다. 내가 그곳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평화롭고 멋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불과 60년 전에 가슴 시리도록 슬픈 기억이 있다는 것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4.3사건’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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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몇 차례 여행을 해본 경험이 있다. 봄은 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또 이국적인 분위기는 마치 외국에 간 느낌을 주었다. 내가 그곳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평화롭고 멋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불과 60년 전에 가슴 시리도록 슬픈 기억이 있다는 것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4.3사건’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모른 채, 좌우익 대립으로 인하여 해방이후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것도 4월3일에 일어나서 길지 않은 기간에 벌어진 사건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동백꽃 지다>(보리.2008년)에서 만난 ‘4.3’은 단순히 좌우익 대립으로만 설명이 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 정도를 넘어서는 무서운 광기가 지배한 몇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책의 구성은 화가 강요배의 그림과 34명의 증인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답답했기 때문이다.


‘4.3’의 기원은 오랜 세월 외세의 침탈에 시달려오고, 착취와 탄압에 맞서 싸워 온 탐라 사람들의 전통에 있다고 말한다. 그 투쟁의 기원은 고려 말 삼별초 항쟁에서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을 방어하고, 또 20세기 초 이재수의 난까지 뿌리를 연결할 수 있다. 게다가 일제 시대 잠녀(해녀)들의 반일항쟁과  일제의 강제노역까지 연이어진다. 그러다 해방이 되었다.


해방으로 일본은 이 땅에서 물러났지만, 남북이 분단될 상황에 빠져버렸고,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똑 같은 경찰의 모습 등, 갈등의 소지는 잠재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1947년 3.1절 기념행사와 이에 따른 경찰의 발포는 본격적인 4.3의 슬픔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제주 4.3 특별법’에서 ‘제주 4.3 사건’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제주 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기간 동안에 사망한 사람들을 신고 된 숫자를 보면 사망 10,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 장애 142명 등 총 14,028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피해자의 두 배 정도에 해당하는 2만5천 명에서 3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 제주도 도민의 수가 약 30만 명이었으니, 10분의 1이 희생된 사건이다.


오랫동안 사건의 내용마저도 함구해야했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희생자들은 당연히 죄인이었고 그들을 두둔한다는 것도 마치 범인을 은닉하는 행위처럼 생각되던 때였다. 세상은 이성이 지배하는 것처럼 느끼던 시대였건만 결코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개명천지이건만 사건의 슬픈 광기는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이제 와서야 수많은 희생자들의 무고함과 억울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의 명예는 회복된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잔혹한 방법으로 죽었다. 죽은 자들에게 명예회복은 웃기는 일이다. 다만 그들의 후손들은 죄인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광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인간은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말은 믿을 만하지 않다. 그들은 그들속에 숨어있던 광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야수일 뿐이다.

e****n 2008.04.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