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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란 애당초 안에서 본 개념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역사는 안에서 보는 시각에 지나치게 얽매여있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각에도 균형이 필요하듯, 역사도 그러한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국사는 국외사와의 관련 속에서 전개되어 온 것 이기에, 때로는 밖에서 볼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사회에 근대사학이 들어온 것은 일제시대이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민족의 역사를 가능한 초라하게 만들고자 했으며, 이에 반발하여 민족사관으로 대별되는 우리의 역사는 민족사의 영광을 되살리려 노력하였고 이것이 해방후 한국역사 서술의 기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책의 저자는 중국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하며 조선족 사회를 관찰한 것이 이책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중국국민이라는 국가정체성과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민족정체성의 2중 정체성을 가진 그네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국사를 밖에서 볼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책에서 말하는“밖에서”란 위치는 국가기준으로는 한반도밖에 있고, 민족기준으로는 한민족 안에 있는 입장에서 한국사의 서술을 시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책을 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문명의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만주와 반도 사이에 울타리가 없던시절, 금속기문명이 대륙으로부터 처음 전파되던 시절에는 대륙에 가까운 만주가 한반도보다 더 선진지역였을것 이라고 말한다. 기원전 3세기경 철기를 바탕으로한 집약적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철기의 전파가 늦었던 지역이지만 철기를 이용한 농업문명의 발전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이 작용한 남쪽이 더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7세기경 신라통일시기에는 저울추가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10세기경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만주에 대한 한반도의 문화적 우위가 확실해 졌다고 한다. 이는 다시말하여 수렵,채집의 단계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는 생활자원 분포에 큰 차이는 없었지만 새로운 문물을 먼저 받아들일수 있는 북쪽의 문명이 높았고, 청동기시대 초기 농업문명시대에는 남부지역의 후진성이 극복되기 시작하여, 철기시대 집약적 농업문명의 시대엔 문명수준의 역전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문명은 해협을 건너 일본에까지 전달되며, 이는 철기문명이 중국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한반도로의 이민물결을 타고 전래되었고, 다시 일본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삼한시대의 문명의 융성은 후에 반도국가가 군사력보다 문화력에 의지해 정체성을 지켜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명의 전파를 담당한 중국은 주변으로 그들의 문명이 퍼져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으나, 이를 막을수없게 되자 중국의 천하체제 안으로의 병합을 강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천하체제는 문명이 확산되는 주변지역을 계속해서 중국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며, 중국문명을 섭취하고도 제국체제에 끌려들어오지 않으면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복속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아래서 생존의 길은 중국문명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또한 거기에 매몰되지도 않는“화이부동”의 자세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한민족 정체성의 바탕이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자문명권은 중국이외 한국과 일본, 베트남이 그 범위에 들어간다. 세나라는 중국의 문명을 깊이 받아들이면서도 독립된 위상을 지켜온 나라이었지만, 지금 아시아 서부와 북부의 광대한 지역은 한자문명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근대에 와서 중국에 편입되었다. 유교적 질서의 기본원리인 화이부동,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인 한국이 독립을 지켜온 것은 이러한 화이부동의 문화노선을 견지해온 덕분이며 이 노선을 안정시킨 것은 조선조 세종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중국 황하에서 시작된 철기문명은 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흉노와의 평화를 유지하던 중국은 한무제에 이르러 흉노를 치기위해 준비한 군사력으로 당시 중국문명과 거의 대등수준에 있던 남월과 조선을 공격한다. 남월은 쉽게 굴복되어 큰 굴곡없이 중국에 편입되지만, 조선은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굴복시켰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지도부가 그당시 중국화가 덜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설치된 한사군은 중국문명이 조선에 전해지는 송유관 역할을 하였으며, 초기의 고구려는 완전한 복속에 메이지는 않으면서 완전히 적대하지도 않는 애매한 외곽의 위치에서 중국문명의 이점을 계속 섭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고려시대 송, 요(거란), 금(여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으며 비록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종속적 관계이었지만 상대적인 것 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원(몽골)에게 복속되면서 이러한 종속관계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되었으나, 중국문명 학습의 시차가 사라진점과 중국문명과 고유전통 사이의 관계를 전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수 있게된 것은 그나마 몽골지배시대로 불리는 100여년 기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 이라고 할수가 있다고 한다. 이후 수백년간 중국문명을 남김없이 들여와 향유하고 있던 조선이 중국중심 천하체제의 일부가 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결과 중국이 도전의 대상이 될때 조선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오는 시점 조선의 국력은 일본보다 못하지 않았고 만주족보다는 월등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명선진국인 조선에는 새로 개발할 미개발 자원이 별로 없고, 정세변화에 응해 능동적 변화를 일으킬 동기도 없고, 계기도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민족의 공간이 한반도로 국한된것도, 그리고 중국문명으로부터 끝까지 살아 남을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받아들인 문명의 수준을 높이고 그것을 지켜낼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신라통일 이후 신라의 강역은 엄밀한 의미의 반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청천강어귀에서 동한만의 원산이나 함흥을 잇는선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의 통일은 고구려를 배제한 반도의 통일이었던 것이다. 수당시대 고구려와 돌궐은 중국문명을 상당수준까지 섭취하고 소화한 강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중국의 천하체제에 의해 이루어진 고구려의 멸망은 농업지역은 반도로 편입되었지만 유목, 수렵지역은 말갈, 여진, 만주국의 손을 거쳐 중국으로 편입되고 말았다고 한다. 통일신라는 고구려의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고구려의 전통을 민족정체성의 일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고려의 북방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의 성립으로 평양지역이 반도국가로 편입되었으며, 송의 고립과 여진견제를 목적으로한 요나라의 침입은 그들의 이해에 부합된 상태에서 우리에게 강동6주를 내어주고, 이는 평안북도 서부일대가 우리역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고려는 고구려 유산의 작은 부분만을 계승했지만 계승한 유산을 잘 지켜내고 키워냄으로써 가장 뚜렷한 계승자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이러한 고려 북방정책의 마무리로, 고려땅을 지키는 울타리이자, 고려사회 전국이 집약적 농업사회로 만들어졌다는 선언이라고 한다. 원나라 멸망후 함경도지역의 고려이주민과 여진족은 조선에 귀속되었으나, 만주서부지역 고려의 이주민은 명나라 통치를 받으며 한족에 편입되었고, 만주 중부와 동부의 여진족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에서 명의 간접적 통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우리의 공간이 지금의 한반도로 국한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때로는 가슴아파하고, 때로는 자랑스러워하는 우리의 역사를 과연 남들은 어떻게 볼까?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리네 역사를 돌아볼수 있게 해주는 책 이었다. 저자는 본인의 역사적 소양이 부족해서 통사로 쓰지 못하고 에세이 형식으로 쓰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좋은책 한권 읽었다는 생각이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얼마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