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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돌아온다더니, 왜 이렇게 서둘러 갔니? 엄만 너만 있으면 되는데……. 많이, 보고 싶다.
더 이상 엄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래전 군에서 금쪽같은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 세월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한 여인의 넋두리를 가을부터 지금까지 간간히 sbs 라디오 방송 아침 7시 무렵 듣곤 했다. 대한민국을 지킨 당신이 있어 아름답다는 국가 홍보였는데, 엄마의 절절한 그 심정은 ‘많이’라는 말에 ‘울컥’으로 변한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분했던 젊은 엄마의 심장을 쥐어짜는 울음도, 드라마 <마당깊은 집>에서 고두심이 연기한 어린 자식을 잃고 꺼이꺼이 숨죽여 울던 모습도 스친다.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 해도 자식을 잃어본 자의 그것을 연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일말의 연기력 없이도 그 슬픔의 크기를 더듬어본 자는 음성만으로도 청자의 가슴을 일순, 그것도 들을 때마다 마비시킨다. 아무런 수사법 없이도 시 한 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입을 꽉 다문 채 패를 내려다보는 저 친구, 얼마 전 참척의 슬픔을 겪었다. 턱주름이 유독 자심하다. 촘촘한 철사 같다.’ - ‘뫼얼산우회의 하루’ 부분
전신이 무슨 마개 같다. 그 무엇이 목구멍 이상 올라오지 못하도록 얼굴 시뻘겋게 달도록 틀어막는 중이다. 저 짐승 같은 슬픔, 가두려 들다니…… 수억만톤 - ‘흔들리는 무덤’ 부분
육십을 넘긴 고등학교 동기들의 모임. 화자는 한 친구, 한 친구 관찰하다 고도리 치는 한 친구에게 멈춘다. 폭삭 늙어버린 친구는 얼마 전 자식을 잃었다. ‘뫼얼산우회의 하루’는 흥겨운 척 연기하지만 이면의 수렁을 감출 순 없는 친구의 슬픔을 담담하게 그렸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그 친구의 아내는 목구멍을 애써 틀어막고 있다. 좀체 사그라질 줄 모르는 감정과 전쟁하고 있다. 가까스로 전쟁에서 승리한 여인은 부랴부랴 가슴에 구덩이를 파서 아들을 묻는다. 화장은 이렇게 매장이 된다.
한때 한 세상과 연결되었음을 증명하는 배꼽, 친구의 아내는 혹시 자신의 배꼽을 만지작거리며 반대편의 흔적을 더듬지 않을까.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 ‘배꼽’ 부분
배꼽은 살아있음의 흔적도 되겠다. 탄생하는 순간 얻은 문양은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문양은 활기는 다시금 그 어떤 것이라도 좋을 희망을 불러온다. 그 어떤 희망이 친구 부부에게도 손짓하기를.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진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 ‘꼭지’ 부분
저 할머니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까마득한 계단 같은 것,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천천히 지우나니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몇몇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냉큼 쫓아가 할머니를 부축해 정성껏 마저 건너간다. 빨래판처럼 덜컹거리는 법감정이, 시꺼먼 길바닥이 문득 흰 젖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母法)이 있다. - ‘얼룩말 가죽’ 부분
늙어빠진 배꼽도 한번 볼까. 늙음과 느림이 이음동의어처럼 느껴진다. 보폭은 자꾸 짧아지고 걸음 속도 날로 느려진다. 그 모습이 먼저 측은하게도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장소에 따라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한때 젖을 배불리 먹고 평화롭게 잠에 취한 적 있다면, 엄마의 언행이 곧 법이었던 시절이 있다면, 법원 앞 횡단보도를 느릿느릿 무단으로 건너는 이의 행동에도 모법은 유효할 테니까. 각자가 지닌 배꼽은 이를 명확하게 기억한다. 경찰이라 해도 위대한(나이든) 모법 앞에서는 하찮은 법을 내세울 수 없다.
비닐봉지 하나가 시꺼멓게 떴다, 비스듬히 기운다, 길쭉하게 처진 저 빈 젖, 허공을 빨다만 아이의 입가엔 쇠파리떼가 소리도 안 나는 울음을 빤다. - ‘아프리카’ 전문
단 네 줄의 시로 먹먹하게 한다. 흰 젖을 물리며 모법을 만들지 못하는 퀭한 검은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점점 가벼워져 뼈 마디마디가 만져지는, 울 기운은커녕 파리떼를 쫓은 기운도 없는 아기를 안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쇠파리떼가 소리도 안 나는 울음을 빤다’는 수사가 생채기를 건드는 것처럼 아프게 돋보인다. 동그란 배 위에 볼록 튀어나온 배꼽이 잔상이 되어 괴롭힌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체가 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저미는 슬픔이 또 있을까.
(상략) 2006년 1월 12일, 뻐국뻐꾹뻐꾹…… 큰누님 저세상 갔다. 향년 76세, 삼일장 치른 뒤 우리 남매 어머니한테 갔다. 활짝 반기면서 어머니 대뜸, 하필 내게 물었다. “느그 큰누부는 안 오나……?” (약속대로 우리는) 나는, 딴청을 피며 어물쩍 넘겼다. (중략) “나, 와 이렇게 오래 사노!” 당신을 직접 때리는 것인지 큰누님 안부, 다시는 한번도 잠잠 묻지 않는다. 뻐꾹…… - ‘뻐꾸기 소리’ 부분
늙은 딸의 죽음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는 더 늙은 엄마의 씁쓸한 회피. 어쩌면 더 늙은 엄마는 짐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삶을 전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죽음 또한 삶의 일부임을.
그래서 문인수 시집의 <배꼽>에 삶과 죽음을 적절히 비벼 놓았나 보다.
* 문인수 시집 <배꼽>은 순전히 골드문트님 덕분에 펼치게 되었음을 밝힌다. 지난 9월 예스블로그 파티 책 교환 순서에 <배꼽>을 들고 나와 죽음에 대한 멋들어진 말을 들려줬다. <배꼽>을 탐내다 좌절, 직접 구입할 도리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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