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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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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었다는 기억은 존재 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고 내가 느끼고 감동 받은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수레바퀴 아래서>는 다시 내게 선택되었고 더하여 문학작품의 번역에 있어탁월함을 보이는 코너스톤의 선택이라는점이 더욱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들에게 교육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고 기성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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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었다는 기억은 존재 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고 내가 느끼고 감동
받은 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는 다시 내게 선택되었고 더하여 문학작품의 번역에 있어
탁월함을 보이는 코너스톤의 선택이라는점이 더욱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들에게 교육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고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의 문제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성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을 녹여낸 수작이라 평가할만 하다.


우리는 동양권에 속해 있다보니 동양권 문화와 교육적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양 역시 그들만의 교육적 문제로 청소년들의
문제는 동.서양과 관계 없이 인간이 존재하는 한 발생하는  필연적 문제로 귀결
되는듯 한 느낌이 든다.
왜 교육이 문제가 되는걸까?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억압하는 교육으로서는
그것이 신의 섭리든 또는 부귀영화를 좇는 것이든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볼때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의 존재로서의 삶을 존속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억눌리면 눌릴 수록 거세게 일어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는 청소년들과의 대립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만들라 해서 만들어진 대립적 구도가 아니라 사상적 체계와 행동에서
보이는 차이는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청소년들의 사유와 행동을 억압하고 강압적
모습으로 대체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권위를 세워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라면 기성세대를
이해하는데 조금은 더 긍정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한스 기벤트라를 주인공으로 한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 성장드라마
또는 성장소설로 생각해도 꺼리낄것이 없다.
그렇지만 우물안 개구리 올챙이때 생각을 못하듯이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언젠가
그들도 기성세대라는 이름으로 존재 할 그 때 그들을 배척하고 그들과 담을
쌓을 청소년들의 심리를 지금 이해한다면 좀더 세대간의 공감을 이루어 내고 융화
할 수 있는 긍정적 사고를 유지해야 하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이달의 사락 n********1 2016.07.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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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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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를 처음으로 읽었던 때는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책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아동용 문학책으로 읽지 않고 어른들이 읽는 소설로 읽었기 때문이다. 열 몇 살짜리 아이가 어른들을 위한 소설을 읽었으니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그때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지루한 책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 지루하다는 잘못된 첫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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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를 처음으로 읽었던 때는 아마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책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아동용 문학책으로 읽지 않고 어른들이 읽는 소설로 읽었기 때문이다. 열 몇 살짜리 아이가 어른들을 위한 소설을 읽었으니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그때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지루한 책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다는 잘못된 첫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로 수레바퀴 아래서를 두 번 다시 읽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순전히 코너 스톤에서 출간하는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이 이전 작품들부터 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 책을 포함해 3권 밖에 출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코너스톤 컬렉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3권의 작품들을 번역한 솜씨가 매우 깔끔해서 읽는 데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 때 번역 일을 한 사람으로, 또한 한 명의 독자로서 어색한 표현의 번역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은, 내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최고의 번역 작품들이다.

여하튼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읽은 수레바퀴 아래서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처럼 교육의 문제,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관한 문제, 청소년 시기의 사랑, 우정, 성 등에 관한 문제 등 이 책에는 여러 가지 화두가 담겨있다.

교육에 관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가 보다. 물론 우리나라만큼 교육 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나라는 많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교육이 문제를 일으키기 위한 과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문제의 원흉이 되어가는 이유는 뭘까? 이 소설에서도 언뜻 내비치듯이, 얼마 전에 읽은 책의 저자는 신자유주의 사상에 의한 경쟁력 구도가 결국 교육이 곪아가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에 관한 문제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권위적이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인 이미지처럼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기성세대의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모습이 결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권위라는 말이 사라져가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어떨까? 어른의 권위가 사라지고, 스승의 권위가 사라지고, 부모의 권위가 사라진 오늘날에는 또 다른 권위의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의 위한 소설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을 어떻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그들은 결국 우리의 미래이니까 말이다.

p*****4 2016.07.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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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과 만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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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100여 년 전 출간된 소설이 주는 감동이 놀랍다. 고전(古典). 이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어서일까? 고전 읽기는 즐겁다. 난 새로 나온, 새로 번역된 고전 책이 더 좋다. 누가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 언제 발행되었는지에 따라 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세상에서 가장 최근에 번역되어 발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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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다. 100여 년 전 출간된 소설이 주는 감동이 놀랍다. 고전(古典). 이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어서일까? 고전 읽기는 즐겁다. 난 새로 나온, 새로 번역된 고전 책이 더 좋다. 누가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 언제 발행되었는지에 따라 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세상에서 가장 최근에 번역되어 발행된 책을 골라야 제대로 맛을 살려 읽을 수 있다. 현대인의 언어로 번역된 책을 골라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 누군가를 수레바퀴 아래 있게 했다면 이유가 있다. 신은 결코 수레바퀴 아래 혼자 있게 하지 않았다. 신을 찾을 때 신을 만나고 수레바퀴 아래에서 나올 수 있다. 한스 기벤라트는 수레바퀴 아래에서 신음하다 죽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한스 본인이 선택한 결과다. 비슷한 상황이었던 헤르만 헤세는 다른 선택을 한다. 1899년 첫 시집을 출간하고 이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전업 작가가 되었다. 헤르만 헤세가 남긴 작품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 이유를 찾았다. 살다가 굴곡이 찾아왔을 때 헤르만 헤세는 그 굴곡을 넘어 앞으로 향했다. 그 결과는 엄청나다. 헤르만 헤세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고, 노벨 문학상, 괴테 문학상을 수상했다. 누구에게나 오는 시련이 헤르만 헤세를 만들었다.

 

  올바른 인도자가 누굴까? 신 외에 아무도 없다. 진정한 인도자는 몰아세우지도 부추기지도 않는다. 묵묵히 옆에 있어주고 기다려준다. 기벤라트 씨, 교장, 학교 선생들 등이 잘못한 걸까? 그 부추김을 즐긴 한스 잘못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주지 않는다. 인생 가운데 하는 선택은 모두 본인 몫이다. 공부를 택해도 좋지만 때론 쉬어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때론 쉬면서 삶을 즐길 때 공부도 더 잘된다. 한스는 휴학 후 집에서 과거를 추억한다. 동화책과 도둑 이야기책, 자신의 손으로 만든 물레방아, 리제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이런저런 상상, 풀 베는 일, 클로버 수집, 낚시, 가재 잡이, 축제일 등을 추억하며 모든 것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p 157) 한스는 삶을 즐겁게 해주는 기쁨을 빼앗겼다. 한스가 한스를 즐겁게 해주는 즐거움 대신 공부를 택했기에 그것을 탓할 수 없다. 그 선택 또한 본인이 했기 때문이다. 한스는 후회한다. 유년기를 통째로 빼앗았다며 아쉬워한다. 아쉬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당연히 아니다. 후회와 아쉬움이 남더라도 미래를 보며 전진할 때 인생이 바뀐다.

 

  공부는 본인을 위해 해야 한다. 부모나 다른 누군가를 위한 공부는 옳지 않다. 한스가 삶도 즐기며 공부했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고 공부가 본인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결과는 더욱 다르다. ‘를 위한 공부여야 한다. 숙제도, 책 읽기도 모두 마찬가지다.

 

  학교에 입학한 아이에게 학교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며 배울 학()을 한자로 설명해 주었다. 책을 펴서 공부도 하지만 친구도 사귀는 곳이라 알려주었다.(‘배울 학()’ 안에 사귈 효()가 있음) 아이는 이를 알아듣고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친구가 늘어날 때마다 아이는 즐거워했다. 학교에서 공부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친구도 사귀고 같이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우정을 쌓을 때 삶은 더 풍성해진다. 학교는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아닐까? 이래서 다양한 친구를 사귀지 못한 한스가 아쉽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삶은 알 수 없는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만든 책은 내 삶을 유익하게 하고, 즐겁게 한다. 누군가 만든 자동차, TV, 냉장고 등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세상은 수많은 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커다란 기계처럼 보인다. 나는 누군가에게 누군가는 나에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사회 말이다. 자신이 가진 역량을 알고 일할 때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는 이를 일요일이 주는 기쁨, 일요일이면 가게 앞 환한 벤치에 왕처럼 당당하게 앉아있는 가게 주인들, 정교한 수작업에 대한 자긍심이라 표현했다.(p 205~206)

 

  100년 전 독일 교육은 입시 위주, 획일화된 교육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학생 인권이 보장된, 경쟁, 폭력 없는 교육이다. 나는 입시위주인 교육을 받았지만 내 아이는 지금 독일이나 핀란드에서 하고 있는 학생 인권이 보장된, 학생 중심인, 경쟁보다 인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으면 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반성했다. 내 아이에게 과도한 공부를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았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고 싶다. 내 인생이 아닌 아이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옆에서 아이가 본인에게 주어진 길을 가도록 돕는 부모가 되어야겠다.

g******7 2016.07.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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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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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작품을 좋아한다. 사실 좋아한다기보다는 좋아했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맞겠다. 가장 많이 알려진 데미안을 비롯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까지 거의 청소년기에 접했기 때문이다. 헤세의 소설은 성장소설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학창시절 추천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성인이 돼서는 데미안 정도만 다시 읽었었는데 청소년기에 읽었던 데미안과는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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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작품을 좋아한다. 사실 좋아한다기보다는 좋아했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맞겠다.

가장 많이 알려진 데미안을 비롯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까지 거의 청소년기에 접했기 때문이다.

헤세의 소설은 성장소설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학창시절 추천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성인이 돼서는 데미안 정도만 다시 읽었었는데 청소년기에 읽었던 데미안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이렇게 어려운 책이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에 비해 수레바퀴 아래서는 데미안보다는 조금 쉽게 읽혔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약 백 년 전의 획일적이고 경직된 교육제도에서 방황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지만 현재 우리 청소년들을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태도를 가진 수재 한스 기벤라트는 신학교 입학을 위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쁨을 모두 억압당한 채 공부에 몰두한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해 목사, 교장 선생님,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우월하다는 우쭐함에 빠지기도 하며, 열심히 공부한다. 좋은 성적으로 신학교에 가게 된 한스는 자유롭고 시를 즐기는 헤르만 하일러를 만나 우정을 쌓으며 삶이 급변하게 된다. 매우 금욕적이고 엄격한 신학교에서 하일러와 같은 자유분방한 학생은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스 또한 학교에서 겉돌게 된다. 결국 퇴학당하고 만 하일러에 이어 한스 또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한스는 생각한다. “대체 왜 어른들의 천박하고 소모적인 야망에서 비롯된 공허하고 이기적인 이상을 꿈꾸어야 했을까?”

 

고향으로 돌아간 한스는 더 이상 마을의 기대도, 관심도 받지 못한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람은 없고 외로움과 우울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는 기술공이 되기로 마음먹지만 결국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수험생이 자살하는 사건을 본다. 과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 소설을 보면 사람은 어김없이 청소년기를 거쳐 오지만 결국 기성세대가 되면 자신들이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틀을 정해 그 규격에 맞는 아이만이 올바르다고 규정하는 것은 역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과연 그것이 맞는 일이기 때문에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만약 한스가 신학교를 제대로 졸업하고 목사나 교수가 되었다면 행복했을까? 그것은 과연 누구의 행복일까? 친구들과 서로 마음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는 것도 배제한 채, 그 나이에 누려야 할 것을 억압한 채, 어른들이 정해놓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서 그곳에 도달하면 행복한 삶인 걸까? 기술공이 된 아우구스트는 과연 불행한 삶인가? 누구도 개인의 행복을 정의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다.

 

과연 우리나라 청소년은 진지하게 스스로의 행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의 기준에 따라 개척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결심했다. 내가 기성세대가 된다면 틀, 규격, 올바름 이 모든 것에 대해 확신하지 않고 정의하지 않는 어른이 되기로.

r**********0 2016.07.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