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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에겐 이유가 없다. 꽃이 피니까 피는 것일 뿐이다.”
17세기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안겔루스 실레시우스(Angelus Silesius)의 말이라고 한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트랑 베르줄리(Bertrand Vergely)의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
이라는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어 본 말이다. 해설을 들어보니 꽤 그럴 듯 하다.
“‘왜’라는 질문은 앎을 넓히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는 모든 근거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삶은 설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어린아이는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세상을 통제하려는 아이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많은 성인들이 어린아이로 남는다. 그들은 모든 걸 통제하기 위해 모든 걸 설명하고 싶어한다.
뭔가가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겁을 낸다. 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지만,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따르는 게 좋겠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세상의 영역이 너무도 넓다는 사실을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편안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베르줄리는 ‘의지’와 ‘욕망’을 구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악의는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욕망이다.
따라서 악한은 악마가 아니라 유약한 사람일 뿐이다.
해치려는 의지를 잔뜩 품은 그는 사실 그저 의지가 부족할 뿐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누구도 의도적으로 악하지는 않다고 말한 플라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했다.
그 말에 모든 게 담겨 있다. 악은 의지의 소관이 아니다. 의지의 패배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게 절망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악을 물리칠 수 있다. 물리칠 의지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지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의지를 너무 미화하고 신비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지와 욕망의 경계가 분명한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의지와 욕망을 구분하는 게 비교적 편안한 삶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걸을 때 신발 속에서 거치적거리는 작은 돌멩이와 같다”고 표현한 재치가 돋보인다.
겸허(humilite)에 대한 정의도 마음에 든다. “그것은 ‘흙’을 뜻하는 humus에서 온 것이다.
겸허하다는 것은 흙으로 된 존재라는 뜻이며, 인간이라는 뜻이다.”(127-128쪽)
그렇다면 혹 자동차의 대중화 이후
인간들에게서 양심의 가책과 겸허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양심과 겸허의 화신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자동차를 운전할 때엔 전혀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걸
하도 많이 본 탓에 갖게 된 생각이다.
가벼움은 어떤가?
그 누구에게건 ‘가볍다’는 평가를 내려보라. 분노하기 십상이다.
특히 여성에게 ‘가볍다’는 건 ‘헤프다’로 통하기 때문에 악담이 되고 만다.
그러나 베르줄리는 살면서 가벼울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며,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은 가벼운 것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란다.(158-159쪽)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받는 것만을 염려할 뿐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엔 무신경한 법이다.
같은 이치로 가벼움은 현명한 처세술은 아니다.
“생동감 넘치는 모든 삶은 가벼운 삶”이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긴 어렵지 않지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지라 세상의 속물적 문법이 사는 기준이 되고 있는 현실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베르줄리는 수줍음과 소심함을 혼동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소심함은 몸과 욕망과 과감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영혼과 정신을 관통하는
삶의 격정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겁내는 소심한 사람은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 삶을 과시하는 속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심하지도 않고 속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위선자는 외적으로는 소심하면서 내적으로는 속되며, 소심함과 속됨의 갈등에 대한 거짓된 해결책을 보인다.
이 모든 방황 앞에서 가능한 탈출구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수줍음이다.
범속한 차원에서 삶을 절제하는 이 수줍음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삶을 해방시킨다.”(179-185쪽)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아무래도 프랑스어의 ‘소심’과 한국어의 ‘소심’이 좀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도 ‘소심’이 좋은 뜻으로 쓰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소심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대범’을 앞세워 무신경하고 뻔뻔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내 기준으론 부끄럽게 여기고 상처를 받아 마땅한 일인 것 같은데도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듯 너무도 당당하게 해맑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면
‘생물학의 신비’에 경악하곤 한다.
자신의 삶에 관한 한 소심은 버리는 게 좋겠지만,
적어도 대인관계에서의 소심은 인간에 대한 배려요 에티켓이 아닐까?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이 해묵은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아무래도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는 게 조금 더 고상해 보인다.
그래서 몰리에르의 『수전노』도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고 했는지 모른다.
베르줄리의 해석이 재미있다.
“그렇지만 살기 위해 먹는다는 사실에는 뭔가 거짓된 것이 있다.
그것이 수전노의 지혜라는 것을 잊지 말자. 수전노는 아무것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돈을 위해 산다. 그의 정신은 금고 형태를 한 정신적 배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 그가 살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그가 교묘히 감추고 있는 파괴적 식욕에 따라 먹기 위해 산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먹기 위해 산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다.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겸손해지고 우리가 홀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이분법이 영 마음에 안 든다.
먹기 위해 살 때도 있고, 살기 위해 먹을 때도 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늘 그렇잖은가.
식욕이 땡기는 때도 있지만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라고 고민하는 때도 많잖은가.
아닌게 아니라 나는 지금 그 고민을 하고 있다.
먹기 위해 살건 살기 위해 먹건, 우리의 공통된 문제는 ‘겸손’을 ‘초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평범한 사람의 겸손은 정직이지만 탁월한 사람의 겸손은 위선이다”고 했다.
르나드(Jules Renard, 1864~1910)는 “잘 나가는 사람이 겸손하긴 쉽지만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겸손하긴 어렵다”고 했다. 겸손의 딜레마를 잘 꼬집은 말이다.
나도 어지간히 겸손을 외치긴 하지만,
그게 정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덕목인가에 대해선 자신이 없다.
한가지 좋은 점은 분명히 있다.
체념의 지혜라고나 할까? 마음이 편해진다.
나 못난 것도 내 겸손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 이 어찌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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