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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이었던가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질문에 아베 총리가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일축했던 게 말입니다. 과거 전범국의 수장인 그가 피해국에 대해 취하는 그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태도에서 우리는 분노를 넘어 어떤 치욕적인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런 심정이었겠지요. 그러나 그게 다였습니다. 우리나라 외교부는 정례 브리핑에서 "구체적인 표현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부의 저자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참담한 모욕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베에게서 받은 치욕보다 더한 수모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이미 1945년에 종식된, 오직 우리의 과거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것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이며, 현재 진행형의 치욕이라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일교포 2세로 평생을 떠돌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서경식 작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수치와 모멸감은 오히려 감정의 사치쯤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나에게 예술은 그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은 창문은 벽 높은 곳에 잇어서 바깥 경치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색깔 변화나 공기가 흐르는 기미는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닿지 않고, 창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지만, 그 작은 창문 덕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p.9~p.10)
서경식이라는 이라는 이름 석 자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하여 이미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경계에서 춤추다>가 먼저 생각나곤 합니다. 타와다 요오꼬와 서경식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엮은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그는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었던 모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 그의 두 분 형(서승, 서준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여 각각 19년과 17년의 옥살이를 살게 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지금쯤 대한민국의 평범한 일원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오늘 내가 읽었던 <청춘의 사신>이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운명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형님들이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구속된 것은 1971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였다.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형님들처럼 일본 사회를 떠나 한국으로 건너가서 뭔가 진실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그 철없고 막연한 인생설계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두 형님이 옥중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고 자주 고문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회사에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구체적인 '생활' 같은 것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p.9)
<청춘의 사신>은 '20세기 전반의 회화예술에 관한 에세이 서른한 꼭지를 한권에 모은' 책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세계 대전과 대량 학살로 기억되는 20세기 전반이 그 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에게 어떤 식으로 투영되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드바르드 뭉크를 비롯하여 에곤 실레, 오토 딕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블로 피카소 등 20세기 전반의 화가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대의 불안이 어떻게 예술로 표출되는지, 인간에게 과연 예술은 무엇인지 작가는 묻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가 그린 것은 청춘의 욕망과 좌절을 애처롭게 비추어 낸 20세기의 '죽음과 소녀'다. 여기서는 사신이 아니라 오히려 소녀가 상대를 놓지 않으려고 찰싹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신은 실레 자신의 자화상이고, 소녀는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찔(Wally Neuzil)이다." (p.76)
작가는 어느 책에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소유하고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아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자체도 자신의 부조리한 삶의 의미를 '신'이나 '국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약점이 있다"고 말이지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국가에 의한 '죽음'의 수탈을 끝낸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남과 북이 강대강으로 부딪치는 작금의 현실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수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곤 실레가 그렸던 '죽음과 소녀'의 소녀처럼 '죽음'을 상징하는 사신을 마치 연인인 양 꼭 껴안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베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용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민족의 수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식민지 역사를 되풀이하는 단초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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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는 어떤 모습일까? 21세기에 20세기를 돌아본다. 코드는 20세기에 그려진 회화 작품 몇점.
시대의 숙제를 그림으로써 풀려고 했던 것일까. 그림은 분명 언어와는 다르게 느낌을 전달한다. 거기에는 색채와 형태라는 독자적인 수단이 사용된다.
시대를 기록하고 고발하는 것은 회화만이 아니다. 작가는 그림만을 소재로 삼지 않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삶을 같이 조명한다. 20세기를 살다간 그들의 삶도 시대에 물들어 있고 시대의 도장을 낙인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시대의 아픔을 지니고 있었고 시대의 그림자를 짐처럼 지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다본 20세기는 아직 잿빛이다. 파시즘, 홀로코스트, 전쟁 등 역사적 재앙과 고뇌하는 개인의 모습들. 그러는 와중에도 예술 사조에 변화가 있었다. 바씰리 깐딘스끼에 의한 추상화, 즉 비구상회화의 등장 등이 그것이다.
짧은 에세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지만 그만큼 깊이 면에서는 약간 부족한 듯도 싶다. [인상깊은구절] "철학, 의학, 법학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직 예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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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신''이라는 제목은 ''청춘''도 ''사신''도 현재 일본 사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죽은말''이라고 해도 좋을 말들로 그 까닭은 생사의 윤곽자체가 흐릿해졌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20세기는 악몽과도 같았고 결코 생사를 알수 없었음에 화가들 또한 그들의 작품에서 온몸으로 견뎌내며 싸우는 모습들이 눈물겹다.
인상깊었던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작품을 보고서는 그녀 자신 또한 1차세계대전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써 전쟁화를 그린 그녀의 그림은 누구의 그림보다 설득력이 있다.
이렇듯 ''청춘의 사신''에는 20세기의 악몽들이 들어차 있다.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악몽같다하더라고 창조의 욕망앞에서 창조자들은 자신을 뜻을 굽히지 않고 새로운 창조로 자신을 버텨냈다. 악몽같은 20세기를... [인상깊은구절] ''잘산다''는 것은 쑤띤이 그러했듯이 무엇보다도 창조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 p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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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 관한 책은 많지만, 언제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내심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같은 '미술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음을 이제 깨달았다. 이 책을 보고.......!
난해하고 아름답지도 않은 근현대 미술 작품의 속껍질을 까기란 나같은 범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약관의 피카소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받은 감동과 슬픔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조금은 위로해주는 책이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에 관해 특히 언급하고 싶은 이유는 일단 그림을 먼저 봤던 나는 그 그림을 보고 '슬픔을 그린 흔한' 이라 평을 했었는데, 서경식씨의 조근조근한 관점은 '결코 흔하다 말할 수 없는' 이라는 평으로 바꾸게 했으니까.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특권을 가진 인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알베르 마르께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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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예술가란 독창적이고자 하는 격렬한 욕망에 항상 몸을 불사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이 정체 모를 욕망에 사로잡혀, 시대와 인생에 대한 따분하고 판에 박은 상식을 돌파하려고 쉬지 않고 싸운다. 돌파에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다수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파멸하고 만다. 잘 살지 못하는 예술가한테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착하다'거나 '모범적'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사임 수틴(Chaim Soutine)은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데, 시민적 도덕의 기분으로 보면 빈말로라도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수틴이 그러했듯이, 무엇보다도 창조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 12p 서경식의 삶의 배경은, 예술작품을 보는 시선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쫓겨야 했던 예술가들, 사회로부터 억압받아야 했던 예술가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었던 예술가들. 청춘의 사신(死神)에 소개된 작품과 화가들은 뾰족한 고통에 갇혀 그림을 그리다 죽어가기도 하고, 사회의 이념에 거부당한 채 도망 다니거나 숨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광기 어리고 반항하며 고통받고, 힘에 겨워 했던 화가들의 그림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화가에 대한 서경식의 집약된 설명은, 그 느낌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 작가들에 집중한 많은 칼럼, 미술 이야기들과 달리 그가 일본에 적(籍)을 두고 살았고, 마이니찌 신문에서 연재하던 글이었기 때문인지 일본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사에끼 유우조우의 <심바시 풍경>이나 이께다 요오손 <재화의 흔적>은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화조풍월(花鳥風月)만을 주제로 삼았던 시대에서 일본화의 울타리를 깨뜨리며 어두운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그들의 그림에서 매력을 느꼈다. 시대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그렸던 일본 화가들의 의지와 고집이 나를 사로잡았다. 앞서나갔던 그림들, 현실을 반영했던 그림들은 20세기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나치즘이 판치던 시절, 많은 작가는 퇴폐화가로 분류되며 붓과 그림을 팔 수 있는 통로마저 빼앗겼다. 불행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던 예술가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서경식이 소개하는 그림들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일곱 가지 대죄>는 진실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해직을 당하고 제명을 당하면서도 당당히 맞섰고,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전선으로 보내지기까지 한다. 로비스 코린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파울 클레, 에밀 놀데... 모두 동시대에서는 억압당하고 조롱당한다. 또 사임 수틴이나 샤갈 등 망명자, 디아스포라들의 그림을 설명하며 느껴지는 그의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동병상련, 동질감을 화가에게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많은 그림을 직접 보러 다녔다. 그의 눈 앞에 그림들은 그에게 많은 메시지와 이야기를 던져준 듯 보인다. 그는 그림을 그린 '사람'을 잘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글로 전달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뼈 아픈 역사적 진실과 독재, 식민지라는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상황을 이해하며 작가를 깊게 들여다 보았다. 대량학살, 세계대전, 난민의 시대인 20세기는 참혹했고 메말라 있었다. 청춘의 사신(死神). 언제나 죽음은 근접해 있었고, 언제든 죽을 수도 있었던 시기였다. 고통과 악몽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도 급급했던 시기에 예술가들은 열정을 표현했고, 그 열정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 감정과 상황들은 그림의 형태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서경식은 이 모든 예술가들이 그에게 창(窓)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어둡고 답답한 삶에 창(窓)이 되고 있다고. 예술가들의 창(窓)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이 지금 우리에게 창(窓)이 되고 있다 |
| 현실은 마치 그림자처럼,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것.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모두 다른 현실 속에 살고있다. 한 발을 옮기면 나보다 빠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나와 함께 발을 떼는 그림자처럼 둘로 나눠지지 않지만 결코 온전한 내 것은 될 수 없는 것. 그 속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현실을 느끼며 스스로와 싸우고, 나 아닌 타자와 싸운다. 같은 눈으로 보아도 늘 다른 것. 꿈이 즐겁다고 해서 그 즐거움을 현실로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악몽이 깊으면 깊을 수록 그 꿈은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공포감을 가지고 우리 옆에 선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사건에 대한 공포감. 차마 눈을 들어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함이 때론 우리의 현실로 곁에 함께한다. 전쟁의 모습으로, 기아와 광기의 모습으로....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새가슴을 가진 평범한 인간으로서 감히 눈조차 맞댈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내가 속힌 세상이라고 과연 인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일일 것이다. 20세기는 그런 악몽과 같은 현실로 시작되었고 용기 있는 몇몇의 예술가들은 그 용기로 말미암아 자신을 망쳐가면서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현실을 기록해야 했다. 그 기록을 이제는 조금 담담한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 악몽의 기억들은 아직도 우리 옆에 그 큰 입을 벌리며 공존하고 있다... 어느 광고 문구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라고 되어있던가. 용기 있는 그들의 기록에 우리는 죄의식을 가지며 이 시대를 살고있다. 아름다움을 꿈꾸며 현실을 직시하자고. 필자가 읽어내려가는 20세기의 악몽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다시는 그 끔찍함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찬찬히 다시금 작품들을 본다. 우리 속에 그 큰 입을 다물지 않고 있는 악몽의 한 순간들을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때다. 아직도 전쟁은, 파멸로 치닫는 인간의 광기는 끝나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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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씨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책은 나에게 그림을 읽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림에 관한, 그리고 작가에 관한 미술사적인 지식에 급급했었다. 작품을 보고 공감을 한다든지, 마음이 움직인다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는 것만이 그림을 보는 행위의 전부였던 것이다. (사실, 그림 하나 덜렁 프린트 해 놓고, 짧은 단상을 적어놓은 그런 책들을 나는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이성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절단해 버리는 그간의 그림읽기를 버리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장소로서 미술의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몇페이지 되지 않은 이 책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작가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진심'이 담긴 글이었기에 일본식 어투에 담긴 낯설기 짝이 없는 글이었지만 나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낯선 한글 아래에 깔려있는 저자의 마음. 그것이 바로 세상을 바꾸는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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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뭔가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청춘의 사신(死神)>이라… 과연 이런 제목에 어울리는 장르는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예술 서적 보다는 문학 서적의 제목으로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말하길 <반시대적>인 제목을 붙인 것은 사람들은 시시각각 불합리하게 수명을 줄이고 남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는데 이것을 절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자각할 수 없도록 유도당하고 있기도 하지만 스스로 거기에서 눈을 돌리고 있기도 하며 화를 내도 안되고 울어서도 안되는데, 하물며 '감동'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라는 서경식 선생의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감성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유지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무난히 살아가는데 불리할 것이지만 최소한 자신은 이러한 현실에 떠밀려가지 않으려는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p.8)
이에 대해서 나는 서경식 선생과 견해가 다르다. 물론 감성을 섬세하고 예민하게 유지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무난히 살아가는데 불리하다는 점에는 동감하지만 현실의 불합리에 대해서 스스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찌라시들과 기득권층의 끊임없이 계속된 이념 교육으로 인해서 이런 부조리한 사회를 꿰뚫어 보는 눈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그리고 굳이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서경식 선생의 형님 두 분이 정치범으로 옥살이를 하고 있고, 일정한 직업도 없는 처지에 유럽을 석 달 동안이나 여행하면서 여러 예술가의 작품을 보는 것은 정말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 서경식 선생은 "나에게 예술은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하늘의 색깔 변화나 공기나 흐르는 기미를 느낄 수 있었고 그 결과 나는 살아 있을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p.10) 물론 서경식 선생이 두 분 형님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여행은 <사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형님들 차입금이라도 넣어 드리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의문이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전반의 회화예술에 관한 에세이 31꼭지를 한 권에 모은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베토벤 프리즈 : 적대하는 힘(Beethovenfries : Die Feindlichen Gewalten)](1902)이 가장 인상 깊었다.(p.25) 오스트리아 미술관 지하실을 꽉 채우고 있는 이 벽화는 괴물 티폰과 그의 딸들인 '질병', '광기', ' 죽음', '욕망', '불순', '무절제'가 추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오히려 추상화보다는 이렇게 뭔가 생각할 것이 있는 회화를 나는 더 좋아한다. 왜 구스타프 클림트는 괴물 티폰과 여러가지 악덕들을 벽화로 그려넣었을까? 서경식 선생 말대로 환희에 대한 난관이 아니라 파국에 대한 불안이 바로 이 작품을 낳았으며 그 후 2개의 커다란 전쟁을 겪으면서 이런 불안이 현실화 되었으며 이 큰 원숭이는 바로 언제든지 파국이 올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어쨌든 이 책은 서경식 선생의 예술관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서경식 선생 자신의 입장에서 예술을 소개했기 때문에 순수한 예술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성 아래에서 예술을 검토했지만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이 다른 예술 에세이 서적과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서경식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책은 피할 수 없는 책인 것 같다. 앞선 <서양 예술 순례>를 읽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순서에도 맞고 일관성이 있어서 서경식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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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지하실에 처박힌 듯 어둡고 축축한 인생에 벽 높이 작게 나 있는 창 같다고 했다. 그 창을 통해 탈출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거기를 통해 보이는 작은 하늘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바로 얼마전 지나온 20세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작은 창에 모든 희망을 걸어야 할 만큼, 거칠고 혹독했다. 그 비이성과 폭력의 시간 속에서 태어난 그림들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세기 초에 사는 나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세계대전과 대량살육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 예술가들은 사신(死神) 의 숨결을 끊임없이 귓전에 느끼면서 끝없는 창조의 싸움을 벌였다. 푸르른 삶과 시커먼 죽음에 대한 동경, 그들이 남긴 작품은 우리에게 그 동경이 아직도 다 타버리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12~13쪽)” 이 책에는 이렇게 죽음의 경계선에서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반이성에 대항한 예술가들 뿐 아니라, 그들의 건너편 저 쪽에서 또 다른 사신과 싸우던, 징그러운 제3제국 어용 화가들 이야기도 실려있다. 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고전주의 화풍의 전쟁화가를 많은 독자들이 <나의 서양 미술 순례> 에서 그림 한 편마다 저자의 인생과 우리 역사의 아픔을 함께 읽었다. 독자가 저자의 순례길에 동행하며 묵묵히 그의 고백을 들었다면, 이번엔 그림에 좀 더 가까이 서서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전편과 비교하자면, 나의 “창”과 화가의 “창”에대해 고민해야 한다. 나의 창은 무엇인가, 또, 나는 그 창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
| 이 책에서는 좌절과 고통을 겪었던 화가들의 짧은 소개와 그림을 볼 수 있다. 정신적인 고통, 때로는 시대적인 아픔과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어낸 여러 20세기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뿐이 아닌 다른 세기의,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어릴 적, 혹은 재능이 커나가기 시작하는 어느 시점에 큰 충격으로 와 닿은 경험이 그사람의 개성(예술적인 특성)이 된다는 것은, 그 개인적인 생활로는 힘든 경험이 되겠지만 단지 나처럼 구경꾼의 입장으로서는 신비할 뿐이다. 나는 뭉크나 실레와 같은 분위기의 화가를 좋아하는데 어린시절 큰 충격으로 다가온 가족의 죽음이나 자신의 불안정함을 겉으로 보이지않기위해 내보이는 대단한 자신감, 자신의 단점, 아니 약점이라고 해야할지 깊은 무의식 안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법은 여러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그런 행동으로 외부로부터의 여러가지 어려운 점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나에게는 부러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