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열린 사회화="" 그="" 적들="">이란 소설의 제목을 알아보자.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참 잘지었다고 생각한다. 김소진 작가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저서의 제목을 그대로 따 왔다. 물론 따온 것이 제목만인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제목을 따 온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칼 포퍼는 반대 주장을 할 기회가 있는 사회가 열린 사회라 했으며 플라톤이나 맑스처럼 반대 주장을 할 기회를 봉쇄시켜버린 사회를 닫힌 사회라 했다. 그래서 맑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들을 열린 사회의 적이라했다. 칼 포퍼의 주장을 바탕으로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생각해 봤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 열려 있다는 것은 무엇을까? 소설에서 보면 '부르스 박' 이라 불리는 박상선은 잠꼬대로 이런 말을 한다. "저놈 잡아라... 적이다 적... 난 시민이야... 문좀 열어 달라고... 나좀.. 헉헉.. 내게도 열어줘.. 아우..." 그러자 제복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제발 그만둬, 이 바보 멍충이야, 열리긴 무가 열렸다는 거야. 다 닫혔엉, 다" 여기서 열린 사회와 닫힌사회는 단순히 칼 포퍼가 말하는 사회의 개념은 아니다. 소설속에서 직접적으로 열린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하는 부분이 나온다. 열린사회란 " 계급이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신화가 더이상 개안에게 굴레가 되지 않고 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질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마당이며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에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라는것이다. 그러나 이 말중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계급이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신화가 더 이상 개인에게 굴레가 되지 않는 사회를 생각해봤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데올로기의 자유가 없었고 나라에서 좌익을 탄압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굴레가 되는 사회였다. 그러나 진정 자유 사회에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탄압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김소진 작가는 그런 사회를 열린 사회라 생각했을것이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열린 사회는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질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마당이라 한 것에대해 생각해봤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민주화 운동이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독재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피흘려 얻은 민주주의를 귀찮음으로 인해 버리고있다. 그렇게 피흘려가면서 달랄땐 언제고 현재의 선거 투표율을 보면 그때 피흘리며 민주화를 외치며 죽어간 사람들이 분통터져 할 일이다. 진정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그것은 피흘려 싸워서 쟁취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얻은 것을 지켜가는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화장실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아닐 때 그렇게 애걸 복궐 해서 얻은 것을 지금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위해 최대한 노력은 해야 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완전히 풍요롭고 평등 할 수는 없다. 맑스는 평등을 강조했지만 그렇게 되면 가난으로의 평등으로밖에 이어지지 않는다. 물질적인 불평등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회가 열린 사회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을 '밥풀때기'로 열린사회 속으로 끼워주려 하지 않는다. 또한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에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 지는 사회가 열린 사회라 한다. 그러나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엘리트에 의한 사회여야 한다는 말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에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정치와 통할 수도 있다. 이성적으로 눈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우리 국민 모두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앞에서 말한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어야 한다는 말과 모순된다. 이성적으로 눈 뜬 엘리트는 소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라는 말에 오점이 있지만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원리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는 공감하는 바이다. 이 소설에서 '밥풀때기'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김소진 작가가 "밥풀때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국어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의미의 '밥풀때기' 는 아닐것인데 말이다. 소설 속에서 찾아보자면 자칭 '색소폰의 명수'로 밤무대 악사로 뛰는 사내 브루스 박이나 왼손목이 잘려 외팔이로 불리는 강종찬 씨나 염낭 주머니를 도둑질한 표천식 씨, 은평구 일대에서 고물 줍기를 하는 얼룩이 성님이라 불리는 전을룡 씨 등이 '밥풀때기'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가나 바라고 싸우는 듯이 음식을 달라 어쩌라 하는 얼빠진 치들. 아무 허락도 맡지 않고 병원 사무실이나 빈 입원실에 몰래 들어가 떼잠을 자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당장 먹을 한끼를 걱정해야 하고 밤에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생존 여부가 중요한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은 사치에 지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을 "밥풀때기"로 치부해 버리고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 생각한다. 밥풀때기도 하나일때는 밥풀때기이지만 뭉치만 밥 뭉치가 되고 밥 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밥솥에서 갇 나올때부터 밥풀때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밥풀때기를 밥솥에 넣으면 밥뭉치가 되는 것이고 밥솥에서 밥한톨을 떼어내면 밥풀때기가 되는 것이다. 이들을 그저 밥풀때기라 하찮은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다시 밥솥으로 넣어주는 사회가 열린 사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란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열린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도 잘모르겠으며 그 적들이란 어떤 사람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소설에서 "밥풀때기"로 불리는 사람들이 결코 열린사회의 적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싸우려 할 뿐이란 말이오"라는 말에서 그 우리에 포함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밥풀때기"로 불리는 사람들을 반드시 그 우리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같다. 그들이 없으면 우리 사회는 있을 수 없으며 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에 무지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권력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나라가 하니라 내용상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이길 바란다. 지금 우리나라는 내용상의 민주주의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스스로 "밥풀때기"처럼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지 않길 바란다열린>열린> |
| 칼 포퍼의 책이 아니다. --;; 김소진 소설을 몇개 읽어왔다. 그때마다 참 괜찮긴 한데, 뭔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가져왔다.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 그걸 한마디로 '촌스럽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나쁜 뜻도 있고, 좋은 뜻도 있다. 좋은 뜻부터 말하면... 여러 평론가들이 써온바대로, 민중들, 민초들의 삶에 꾸준히 천착해온 그의 작품활동에 비추어 볼때, 그 작품의 소재들에 비추어 볼때, 세련된 작품이 나오기는 좀 어렵다. 해학을 조금은 다루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무지랭이들의 응어리를 서술하다 보니 아무래도 투박할 수 밖에 없고, 그걸 여러 각도로 되짚어보거나 다른 식으로 승화를 시키더라도, 여전히 관통하는 정서.. 응어리 풀이는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그는 그만큼 민초들의 삶을 정직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고, 그의 요절이 한국 문단에 큰 충격으로 아직까지 남을만 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이런 식의 소설은 김소진이 처음은 아니다. 그 윗세대... 해방이후에 있었던 작가들도 이런 정서는 많이 가지고 있다. 황석영이나 이문구 같은 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게 좀 맥이 끊겼다고들 한다. 내 생각에도 그렇다. 특히, 김소진과 동시대의 작가들은... 심하게는 사소설류의 개인적 감상으로 흐르거나, 혹은 민중소설이라는 식으로 건조하고 의식과잉의 작품들을 생산했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읽지못해서 객관화하긴 어렵지만) 하지만, 김소진의 계승적인 정서는 그런 동시대에 비추어볼때, 오히려 독특하다. 말한바대로 무지랭이들의 삶이 나오고, 그들의 말투가 스며있고, 또 그러면서 작가의 경험이 배인 80년대 운동권의 정서가 겹쳐져 있는 작품들... 초창기 작품들이 모였다고 하는 이 모음집에는, 특히 이러한 전형이 거의 매번 반복된다. 거기에 덧붙여지는게 나름대로의 오이디푸스 컴플랙스... 좀 더 다듬어졌다면, 각각 아주 훌륭한 작품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듬어진다면... 건방지게 말하는 것 같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한때 학과 후배들이 자작을 했던 단편소설들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들 괜찮았지만, 뭔가 미진하다는... 대충 그런 느낌들이 계속 이어졌었다. (그럼에도 이과생으로써 소설들을 몇편씩 썼던 그 친구들은 지금 봐서도 꽤나 훌륭했다고 본다) 플롯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들 사이의 연결이 부실하다거나, 채워넣어질 소재들이 빈약하다거나... 김소진도, 물론 언급한 후배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겠지만 이런 부족함이 있다. 그게 부정적 의미의 '촌스러움'으로 남겨진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에는 소위 '쿨함'이 결여되어 있다. 민초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아득바득 하나에만 매달리는 삶을 살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또한 삶의 방향을 전환할때도 급작스러운 결정을 내리진 않는다고 본다. 즉, 개인의 전략, 특히 개인의 멋을 생각하는 전략이 그의 인물들에는 결여되어 있다. 최수철의 꽁트의 제목처럼, 핫바리 룸펜일지라도 뭔가 머쓱하게 포기할 일이 있으면, '신포도'를 핑계대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농짓거리를 하기 마련인데... 김소진의 인물들은 대개가 너무나 순박하거나 맹목적이고, 외곬수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작품생활을 해 나가면서 대부분 극복될 수 있는 문제였다고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한번 더 김소진의 부재가 아쉽다. |
|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다. 이젠 잊혀질 만도 하지만 아직 그를 잊지 않은 이들은 많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그들 기억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해서 난 그의 글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즐겨 이야기하는 밑바닥 인생으로 부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이야기들을 보며 그와 따로 분리시킬수 없는 그의 문학들을 이번 작품에도 느낄수 있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내가 느낄수 있었던 아픔은 그가 단 한순간도 머물수 없었던 따스한 가정이라는 의미를 우리가 한번쯤은 떠올려 보아야할 명제였다고 아니할수 없다. 누구의 삶이든 행복과 불행 그리고 삶과 죽음 뭐 그런것들로 나뉠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모든것들로 부터 내부 분열을 하여 혼란과 그리고 성장을 거쳐 성장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알고 있다. 그리고 그안에서 알아내는 정채성운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시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보며 결국은 비판적이지 못하게 막아내는 그 어떤 계기를 알아가기도 하고 목적을 알수 없는 계시때문에 우리는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한때 우상으로 알던 모든것들이 물거품처럼 스러질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그가 막무가내로 원하던 부끄러움을 알수 있다면... 그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조금 더 알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 그를 만날수 없음이 조금은 아쉽고 많이 가슴 아프다. 그가 느꼈던 많은 증오들이 다만 그의 작품속에 나타난 문맥들이기를 바라며 밝고 편안한 곳에서 쉬기를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