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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책을 읽는 일은 즐겁다. 어쩌면 교육과정이라는 틀을 정해놓고 배우고 싶은 것 배우고 싶지 않은 것 다 배우게 해서 결국은 다 배우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또 하나의 폭력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고 나면 나중에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될까?
요즘은 한국 근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눈에 들어와서 사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게 이틀만에 다 읽었다. 역사- 문화(문학), 이념과 시대의 담론을 아우르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 이야기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부정적으로면 여겨졌던 우리나라의 '쇄국'과 늦은 개방에 대해 새롭게 갖게 된 일종의 자부심이다. 저자가 우리나라 근대에 대해 변호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고 했으니 적어도 한사람의 독자에 의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저자가 먼저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이 근대에 태어난 것이라면 근대에 대한 환상은 곧 소설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시아에 있어서는 '근대화'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화되는 것을 의미하곤 한다. 그렇다면 근대를 알기 위해서는 서구가 중세를 극복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근대 시작 시점으로 여러가지를 들지만 통상 산업혁명을 꼽는다. 르네상스나 절대왕정, 시민혁명 같은 것은 산업화의 부수적인 결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일부 지식인들의 운동일 뿐이었다는 사실, 시민혁명이 부르주아가 아닌 민중의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나 시민혁명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근대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운동이라고 하지만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착취와 인권유린이 행해졌는지를 알게 된다면 르네상스라는 상징을 통해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하고 깔아뭉갬으로서 이성적, 합리적인 근대상을 극대화 시키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는 합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런지 돌아보고자 한다. 부르주아를 필두로 했던 자본주의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거부하고 무이상, 무이념적으로 현실만을 중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의 결과가 모든 구성원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 결과는 다수의 뜻을 반영할 뿐 모든 사람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다.
어쨌든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서구화= 근대화의 바람은 동아시아에도 불어왔다. 선수를 잡았느냐 놓쳤느냐에 따라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크게 벌어졌다고 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자본이 이상을 몰아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와의 비교를 통해서 살펴보니 근대화의 모습이 그렇게 달랐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문화가 그 사회상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믿고 있다. 과연 중세와 근대에 걸쳐 있는 조선과 에도시대의 모습은 참 다르다. 사육신과 47사, <<원생몽유록>>과 <<가나데혼주신구라>>, 판소리나 탈춤과 가부키를 비교하면서 붓으로 대나무를 그렸던 사대부들과 칼로 국화를 그렸던 조닌들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요컨대 그 시기 조선은 이상이 지배했고 에도시대는 힘이 지배했다. 가부키의 화려한 모습은 조닌들의 사치와 향락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그러한 조닌들의 문화는 최대한 새롭고 자극적인 소재로 만든 소설로 이어진다. 그들에게도 유학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강령'의 성격을 띨 뿐이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유학은 조선의 모든 구성원의 것이었다. 판소리계 소설에서 많이 드러나는 '권선징악'적 요소를 살펴보면 유학의 이념을 많이 담고 있다. 조닌들의 가부키는 한좌석 한좌석에 대해 돈을 내고 보는 것이었지만 판소리는 양반이 돈을 부담하고 민중이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판소리의 그러한 성격은 지배층이 민중과 상호작용하고 의사소통하고자하는 여지가 조선에는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에도시대에 상업이 발달한데 비해 조선에서는 국가적으로 중농정책을 실시하고 농민을 중시한 것 또한 조선이 얼마나 유학 이념에 충실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힘을 중시하고 상업이 발달했던 에도는 서양의 힘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었다. 빨리 문을 열고 그들의 것을 배워서 힘을 키우는 것이 살 길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두고두고 욕을 듣는 것일테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비해 조선이 '이상'을 중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서양을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이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이며 그것을 평등, 가난하고 약한 자를 북돋워 가능한 한 세상을 고르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저자가 일본의 애니매이션이라는 현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를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의 개그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90년대에는 정치 풍자 개그가 많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기껏해야 정치인 성대모사 정도가 살아남은듯 하다. 하지만 요즘의 개그 프로그램이 '콘서트'라는 간판을 내걸고 관중과 소통하면서 개그를 만들어가고, 관중의 반응이 좋은 개그만이 살아남는 형태는 조선시대의 판소리가 변형된 형태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민주주의라는 어쩌면 또 얼마간의 결함을 가지고 있는 이념 아래 살아가면서 정치인들은 그 옛날의 사대부들처럼 그런 대중문화를 통해 민중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가나데혼주신구라>원생몽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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