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는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의 올바른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데 도움이 된다. 종교와 정치가 서로의 역할을 잊은채 잘못된 길로 들어 설때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역사의 무수히 많은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그것은 비단 먼 역사의 이야기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현재 대한민국과 관련해서도 이 관계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
|
치열한 경쟁의 이면에는 다른 문화권에 대한 배타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권의 중축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종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특정 종교를 국정이념으로 표방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종교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인해 자신과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이단시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다. ‘불신지옥’ 따위의 무시무시한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쉬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지 못한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인간의 이성과 진보한 과학기술이 중심에 놓인 21세기도 이러할진대 로크가 살았던 17세기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당시 기독교는 여전히 유럽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업으로 성직자를 꼽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로크는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영국 국교회를 옹호하는 등 그의 활동의 기본에는 종교가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종교적 관용에 대한 글을 그가 남겼다는 사실은 하등 의아하지가 않다. 물론 그에게도 한계점은 존재한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마저도 부인하는 무신론에 대해 그는 특정한 견해를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로서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게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을 거다. 이러한 한계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는 다른 이들보다 충분히 앞선 삶을 살았다. 그는 기독교를 절대적 종교로서 신봉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단자가 종파분리주의자가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슬람교 신앙으로 퇴락한다면, 그것으로써 그 사람이 이단자나 종파분리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P 91 중에서) 이슬람교 신앙에 대해 비록 ‘퇴락’이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이 문장은 로크가 이슬람교를 이단으로 여기진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이단이라 칭했을까? 그는 성서를 기준으로 이를 판단했다. 즉, 성서로부터 도출되지 않은 것 혹은 성서에 완벽하게 위배된 것을 강요하는 것을 일컬어 그는 이단이라 칭했다. 서로 다른 형식의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한 집단에 속한 이가 다른 집단에 속한 이를 결코 이단이라 칭할 수 없는 것이며, ‘성경’이라는 기독교 성서의 범주를 아예 벗어난 이슬람교를 믿는 것 역시 이단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크는 또한 종교의 다름을 이유로 행해지는 각종 폭력, 핍박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종교 역시 사회라는 큰 틀 안에 속한 것이기에 사회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즉,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법에서 정해놓지도 않은 형벌을 가하는 것은 명백히 부당하다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결탁하거나 권력을 등에 업은 종교가 마치 정치가가 행하는 것마냥 힘을 발휘하는 행위는 로크에게 결코 옳은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사회의 각종 요인들과 얽혀 혼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정치가와 동일한 종교를 믿고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정치에도 쉽게 발을 들이는 종교인이 있는가 하면, 특정 종교를 사회를 해석하는 유일한 잣대 마냥 부리는 정치인도 있다. 하지만 사회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더욱, 유일한 하나의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 틀에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로크도 알았던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우리도 필히 알아야만 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의 안위에 해를 가하는 것은 물론 용납될 수 없다. 그렇지만 단순히 다른 것에 대해서까지 채찍질을 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